봄을 기다리며, 꿈꾸며
지난 금요일이 입춘이라고 하던데 날씨가 많이 춥다. 집안 창문으로 본 하늘과 구름과 햇살은 봄느낌이 나던데 막상 나가보니 차가운 바람에 걸어다니기도 힘들었다. 해마다 이 시기이면 직업상 마음이 많이 심난해진다. 새로운 업무에 기대반 걱정반 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저기 쇼핑으로 허한 마음을 달래보려는 온라인상 글도 많이 보인다.
올 해 나는 더더욱 맘이 잡히지가 않는 것 같다. 최근 급증한 오미크론 확산세 때문일까? 오늘에는 급기야 자기 주변에 아무도 확진자가 없다면 친구가 없는 사람이라는 기사 제목까지 나왔다. 선별진료소에 길게 늘어선 줄을 보니 한참 검사받으러 다니며 떨었던 생각에 두려움이 몰려온다. 봄을 기다리는 마음보다 아직도 기나긴 겨울에 잠겨 있는 마음이라 도무지 책도 들어오지 않는다.
긴 겨울의 끝자락, 어릴 적 시골서 자란 나는 이 시기의 햇빛과 바람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아침에는 쌀쌀하지만 낮이 될수록 따스한 햇빛이 동네를 비추면 이웃집으로 발걸음 했던 나날들. 마을 한가운데를 관통하다 정미소 공장쯤 가면 햇빛을 쬐기 위해 나와서 앉았던 할아버지들의 모습이 보인다. 흙은 약간 질퍽하기도 했고 놀러간 친구들 집 마당에서 한참동안이나 비석치기를 하면 땀이 나기도 했던 것 같다. 뭔가 나른하면서도 무료하면서도 새학년을 기다리는 설레임이 공존했던 시기 2월, 그 2월이 이렇게 가고 있다.
아마 남쪽은 서울보다 훨씬 더 따뜻하겠지? 고향을 떠나온지 25년이 되어가니 내 고향 봄날이 생각이 잘 안 난다.
대신 김 훈의 <자전거여행>을 떠올리며 머릿속으로 나는 자전거 바퀴를 돌리면서 우리집 마당을, 우리 동네와 섬을, 그리고 더 넓은 남도를 여행하는 상상을 해본다.
우리집은 당시 우리 마을에서 큰 집이었다.(정확히 말하면 큰집이 육지로 나가면서 우리가 그 집을 사서 명맥을 유지해야하는 집이었다. 좀 살던-큰 아들, 큰집만- 집이라 규모가 있었다. ) 나는 이사를 오기가 너무 싫었는데 집만 컸지 사실 안쓰는 사랑채에 다른 창고들이 너무 폐가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단, 앞마당에는 화단이 조성되어있고 꽃들이 많았는데 그 꽃들을 보는 게 유일하게 마음에 들었다. 그 중 동백꽃 한그루가 있었고 그 근처에는 아주 큰 목련 나무가 있었다.
나는 동백꽃보다는 목련꽃이 좋아 더 많이 눈이 가고 오래 기억에 남았던 것 같다. 분명 동백꽃의 색깔, 잎의 촉감도 다 기억나는데 기억에 오래 남지 않은 이유가 뭘까 싶었는데 다음 구절을 보니 조금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다.
‘동백꽃은 해안선을 가득 메우고도 군집으로서의 현란한 힘을 이루지 않는다. 동백은 한 송이의 개별자로서 제각기 피어나고, 제각기 떨어진다. 동백은 떨어져 죽을 때 주접스런 꼴을 보이지 않는다. 절정에 도달한 그 꽃은, 마치 백제가 무너지듯이, 절정에서 문득 추락해버린다. ‘눈물처럼 후드득’ 떨어져 버린다.
동백꽃의 낙화의 속도를 못 맞추고 내 눈이 동백꽃을 못 담은 것이다. 반면 목련은 직접 꺾어 방에 가져와 유리병에 넣어서 활짝 봉오리가 피는 순간, 작가의 표현대로 ‘등불이 켜지는 듯한’ 장면을 목격하며 탄성을 질렀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아래의 표현대로 목련은 피고 나면 지기까지의 과정이 참 더뎌 목련을 바라보는 시간이 참 길었기에 더 오래 기억이 남은 건 아닌지 싶다.
‘목련은 등불을 켜듯이 피어난다. 꽃잎을 아직 오므리고 있을 때가 목련의 절정이다. 목련은 자의식에 가득차 있다. 그 꽃은 존재의 중량감을 과시하면서 한사코 하늘을 향해 봉오리를 치켜올린다. 꽃이 질 때, 목련은 세상의 꽃 중에서 가장 남루하고 가장 참혹하다. ~ 목련꽃의 죽음은 느리고도 무겁다. 천천히 진행되는 말기 암 환자처럼, 그 꽃은 죽음이 요구하는 모든 고통을 다 바치고 나서야 비로서 떨어진다. 펄썩, 소리를 내면서 무겁게 떨어진ㄷ. 그 무거운 소리로 목련은 살아 있는 동안의 중량감을 마감한다. 봄의 꽃들은 바람이 데려가거나 흙이 데려간다. 가벼운 꽃은 가볍게 죽고 무거운 꽃은 무겁게 죽는데, 목련이 지고 나면 봄은 다 간 것이다.
두 꽃의 특징, 묘사가 어쩌면 이리 정확하고 예리한지 볼 때마다 감탄이 절로 나온다. 자전거 여행의 가장 백미로 나는 바로 이 ‘꽃피는 해안선’ 챕터를 꼽는데, 왜냐하면 봄의 주인공 꽃들의 모습에 대한 작가의 통찰이 너무 정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매우 새롭기 때문이다.
산수유에 대한 표현이 특히 그러한데,
‘산수유는 다만 어른거리는 꽃의 그림자로서 피어난다. 그러나 이 그림자 속에는 빛이 가득하다. 빛은 이 그림자 속에 오글오글 모여서 들끓는다. 산수유는 존재로서의 중량감이 전혀 없다. 꽃송이는 보이지 않고, 꽃의 어렴풋한 기운만 파스텔처럼 산야에 퍼져이싿. 산수유가 언제 지는 것인지는 눈치채기 어렵다. 그 그림자 같은 꽃은 다른 모든 꽃들이 피어나기 전에, 노을이 스러지듯이 문득 종적을 감춘다. 그 꽃이 스러지는 모습은 나무가 지우개로 저 자신을 지우는 것과 같다. 그래서 산슈유는 꽃이 아니라 나무가 꾸는 꿈처럼 보인다.’
아..꽃이 아니라 나무가 지우개로 저 자신을 지우는 것 같다니, 나무가 꾸는 꿈이라니...!! 이런 표현을 과연 나는 할 수 있을까? 얼마나 꽃을 바라보고 생각하면 저런 표현이 가능할까?
하지만 내가 가장 이 책에서 사랑한 문장은 다른 데에 있다. 나는 이 문장을 잠언의 말씀처럼 외우고 마치 좌우명처럼 생각한다. 내가 어쩌면 그런 위치에 있거나, 또는 있을 때 나를 일으켜줄 수 있는, 세상 사람들이 다 나를 외면해도 나 스스로 견딜 수 있을 것 같은 힘을 주는 문장이기 때문이다. 하동포구를 대표하는 재첩국을 이야기하는 장면인데 작가는 하동 재첩국은 순결한 원형의 국물이며 잡것이 전혀 섞이지 않고, 위안의 기능을 준다고 한다. 그리고 무릇 모든 맛의 맨 바닥의 기초의 맛이며 국물의 빛깔은 새벽의 푸른 안개와도 같다고 표현한다. 그리고,
“하동 포구 주민들은 4월 하순부터 재첩을 잡기 시작한다. 함지박을 밀고 강 속으로 들어가서 바닥을 긁는다. 가장 낮은 곳에 사는 가장 작은 조개 속에 가장 깊은 맛이 들어 있다. 조개 몇 마리와 물과 소금이 그 국물의 형식의 전부다. 재첩 국물은 삭신의 구석구석으로 스며 들뜬 것들을 가라앉힌다. 재첩 국물 속에도 작은 숲이 들어앉아 있다.”
라고 작가는 말한다. ‘재첩 국물에 숲이 있고 인생이 들어있구나’ 라는 생각과 함께 ‘가장 낮은 곳에 사는 가장 작은 조개 속에 가장 깊은 맛이 들어 있다’라는 말은 바로 나의 가슴에 들어와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리고 나는 그 말을 붙잡고 싶어졌다. 내가 가장 낮은 곳에 살아도, 나의 인생이 다른 사람들보다 화려하거나 물질적으로 성공한 삶이 아니어도, 내가 내 스스로 깊은 맛을 내는 삶을 살아가면 그 뿐 아닐까?싶은 것이다. (당시 나는 오랜 휴직으로 자신감도 떨어지고, 남편 사업의 문제로 불안정한 시기여서 더 그랬던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니 조급하거나 두럽거나 남과 비교하며 괴로운 마음도 많이 사라졌다. 그리고 몇 년이 흐른 지금은 더 나아가 낮은 곳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고개를 돌리고 그들의 깊은 맛을 보고 싶고, 함께 정을 나누며 살고 싶다는 생각도 조금씩 들게 되어 감사하다. 나는 믿는다. 가장 낮은 곳에서 묵묵히 자기 일을 하는 사람들이 없다면 이 사회는 무탈하게 돌아가기 힘들거라는 것을…그들의 삶이 뜨겁고 진실되고 깊다는 것을…
첫댓글 음청 잘 쓰셨어요 꽃이 눈앞에서 피어나는것 같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