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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말라기 개요
https://youtu.be/YqdHypKIbd4?si=f5z0qQ35YCvSbOdp
https://youtu.be/KxJb21AxVqI?si=0l4OkrB7X-HJrJWc
1) 바벨론에서 귀환 후 성전이 재건 된(B.C.516년)지 약 107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학개와 스가랴 등에 의해 예언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지 않자, 이스라엘 백성 들은 하나님에 대한 의심과 신앙 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죄속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본서는 이러한 상태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민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특별하신 사랑을 과거의 회고를 통해 깨닫게 함으로써 형식적 신앙과 비도덕적 생활을 회개케 한다. 그리고 메시야의 임재와 순종한 자에게 임하는 축복과 구원에 대한 약속의 신실성, 곧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반드시 성취될 것임을 확증함으로써 영적,도덕적 각성을 권고하고 있다.
이처럼 본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과 심판의 선고, 또한 메시야의 임재라는 분명한 주제를 선포하고 있다. 이는 오늘날의 성도가 그리스도의 재림을 대망하여 앞으로 주어질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으로서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 것에 대한 촉구이기도 하다.
2) 말라기는 분명히 자신의 이름에 긍지를 가지고 있었고 그 이름을 되풀이 해 쓰기를 좋아했다." 천사의 이름을 지닌 무명의 선지자"인 말라기란 이릉은 "나의 천사" 혹은 "사자" (meesenger)를 의미한다. 또 레위는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로 언급 되었고(2:7), 침례 요한은 하나님의 '사자'로 왔으며 주님은 "언약의 사자"로 언급 되어 있다(3:1). 이처럼 그 이릉은 그 사람의 임무를 나타냈다.말라기 자신이 강렴하고 독특한 개성을 소유하였 고, 도덕적이고 영적인 개혁을 수행하도록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인간의 영적인 삶은 타락의 밑바닥을 걷고 있었고 이전 선지자들이 경고했던 많은 죄악들이 다시 만연되었다. 말라기는 하나님과 그 분의 성호를 더럽히는 자들을 경고하고 모든 학대로 부터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는 느헤미야의 사업을 도와주기 위해서 보냄을 받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함"이 이 책의 주제이다. 우상숭배가 사라진 다시 죄를 짓기 시작한 백성들은 십한 불평을 하게 되었고 공허한 형식주의와 극단적인 회의주의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덟 가지의 하나님과의 풍자적인 문답들을 볼 수 있는데, 이것들로 인해 이 책은 대화체의 정수로 알려졌다. 이 책에는 하나님의 서로 다른 두 속성인 사랑과 진노가 합께 나타나 있다. 우리는 '그 중에' 나 '이르노니'(1'2번이나 나타나는)라는 구절에 의해 나눌 수도 있다.
3)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인 말라기는 느헤미야와 동시대인으로서 당시 신앙상태가 말이 아닌, 거의 불모지와 같은 정황 가운데서 그의 사역을 시작하였다 백성들의 예배는 형식주의와 이기주의로 변질되어 갔고, 이방인과의 결혼으로 말미암는 이방종교, 마술, 간음 등 온갖 불경건한 일들이 자행 되었다 그는 이러한 백성들에게 책망과 회개를 촉구했다.
4) 말라기는 하나님의 은총이 농작물과 국가의 경제적인 안녕에 임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께 신실하고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거룩한 백성으로 부르셨기 때문에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야만 하고 오실 메시야를 대망해야 한다. 그리고 메시야가 오셔서 이스라엘의 소망을 실현시켜 주시기를 바라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본서의 내용은 학개 · 스가랴서와 더불어 바벨론 포로 후기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생활에 대한 교훈과 장래에 대한 소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초두에서는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 여호와의 모습을 그리며(1.1-5), 다음으로 여호와를 멸시하는 제사장들(1:6-2:9)과 일반 백성들(2:10-4:3)에 대한 책망을 그리고 있다. 마지막으로 모세의 율법을 굳게 지킬 것을 강권하며 엘리야를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고 있다(4:4-6)
요 약: |
2.말라기 지도
3.말라기 서론
1.역사적 배경 | B.C 539년에 바벨론을 정복하고 그 뒤를 이은 바사(페르시아)제국은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 원정때까지 존속하였다. 당시 바사왕국은 총독들에 의해분할 통치되고 있었는데, 지방 장관들은 이러한 총독들의 관할 아래 있었다. 총독이 없던 유다는 사마리아 총독에 의해 감독을 받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성전이 재건되어 완공된 것은 이 기간 초기 있다. 유대의 대표자는 아마 대제사장들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유다와 사마리아 관리들 사이에는 상당한 분쟁과 갈등이 있었다. 그러는 동안, 예루살렘 거주민들은 아닥사스다 1세 통치 기간 (B.C. 464-423)에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기 시작하였다. |
2.제 목 | 저자의 이름을 따른 본서명 말라기는 ‘나의 사자’라는 의미로서 ‘말라키아(여호와의 사자)의 축약형인데 ‘언약의 사자’의 오심을 이야기하는 이 책의 주제에 부합된다. |
3.저 자 | 본문1:1에 근거해 본서가 예언자 말라기의 저작임을 알 수 있다. 유대 전승에 의하면 말라기는 경전으로 인정된 거룩한 문서들을 수집하고 보관하던 대회당의 회원이었다고 한다. |
4.연 대 | 말라기의 저작 연대를 정확히 규명하기란 어려운 문제이나,스룹바벨 성전과 제사장들의 부패상이 언괍된 것으로 보아, 말라기 선지자가 성전 재건(B.C.516 년경)이후에 활동하였으리라는 점은 추정할 수 있다. |
5.기 록 목 적 | 가시적이며 즉각적으로 임할 것으로 믿었던 영광의 나라의 도래가 늦어지자 이를 회의한 자들의 불경건한 신앙을 되돌이킬 뿐만 아니라, 장차 임할 메시야 나라를 예비케 하기 위해 기록되었다. |
6.특 징 | 1) 다른 예언서들이 예배 의식의 내적인 면을 강조한 반면, 말라기는 외적 규례의 철저한 준수도 강조하고 있다 2) 분명한 주제를 직설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특히 논쟁 형식의 문답식 대화체로 엮어 나가고 있다. 3) 메시야의 도래에 앞서 엘리야(침례요한)가 올 것을 예언함으로서 구약 시대를 마감하고 신약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교량 역할을 하고 있다. 4) 인간의 거듭된 범죄에도 불구하고 계속 구속사를 전개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희망과 신뢰가 두드러진다 |
7.기 록 장 소 | 유다 땅, 예루살렘으로 추정 |
8.기 록 대 상 | 예루살렘의 유다인과 모든 그리스도인 |
9.주 요 인 물 | 말라기 제사장 |
10.핵심 단어 |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여호와의 날, 기억하라 |
4.말라기 중심주제
사 실 | 교 훈 | |
1.하나님의 사 랑 | 선지자 말라기는 이스라엘의 죄악 을 책망하기 전에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한다(1:2-5)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신다는 근거는 야곱의 후손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선택하셨고, 에서의 후손 에돔은 버림받아 비참한 운명으로 전락했다는 역사적 사실에 있다 이는 인간의 행위나 능력으로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주권으로 말미암은 것이다(신4:37; 호11:1) | 하나님께서 성도를 사랑하시는 것은 성도의 행위나 능력이 불신자보다 뛰어 나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은혜에 의해서이다(롬11:6). 따라 성도란 하나님의 사랑을 항상 느끼며 자발적으로 맡은 바 직분에 봉사하는 자이다 |
2.제사장들의 죄 악 | 말라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 을 올바로 인도하고(2:5-7), 거룩한 제사를 행할 직분을 맡은 제사장들의 불의를 규탄한다(1:6-2:9). 그들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형식적이고도 불성실한 제사를 드렸을 뿐만 아니라 (1:6-lO), 편협한 율법 교육으로 백성들을 미혹케 하였다(2:8, 9). | 하나님께로부터 직분을 맡은 자는 그 직분에서 죽도록 하나님께 충성해야 한다.(계2,'10). 만일 직분을 맡은 이가 성실치 못하다면, 그의 행위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멸시하는 행위이며, 다른 성도에게도 나쁜 영향을 주는 행위임을 명심하여야 한다. 따라서 성도는 아무리 미약한 직분이라도 머리 되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해 일한다는 사명 감을 가져야 한다(롬12:3-13). |
3.백성들의 죄 악 |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회의 근간이 되는 가정에서부터 타락되어 있었다.남자들은 자신의 충실한 아내와 이혼하고(2:14-16), 젊은 이교도 여인과 재혼하는 죄악을 범했(2:11). 이러한 행동은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자녀들의 종교 훈련을 위협하는 행위이며 결국 하나님의 율법에 대항하는 행위이다. | 가정은 사회의 근간일 뿐만 아니라(민33:51), 가장 기본적인 신앙 공동체 이다(신15:20). 따라서 성토는 먼저 가정의 복음화와 더불어 신앙적인 부부의 결합과 신앙 교육을 실행하여야 한다. 현대 산업 사회의 물질 만능주의와 배금주의라는 사단의 궤계로부터 가정을 지키고, 가정의 구성원 전체가 주의 군사가 되게 하는 책무가 모든 성도 각자에게 있다. |
4.주의 오심 | 메시야의 도래에 대한 약속은 죄인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슥12:10,13: 18) 말라기는 본서에서 그리스도의 수난 뿐 아니라 오순절 성령 강림(슥 12:10-14), 그리고 그리스도의 재림(슥 14장)에 대해서 예언한다. | 그리스도의 초림과 성령 강림으로 인해 구원받은 성도는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며, 현실의 고난 속에서도 주의 재림을 앙망하는 자이다. 주의 재림으로 말미암은 세상 심판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대한 약속은 고난 속에서 살아가는 성도의 궁극적인 승리를 보장 한다. (요일5:4, 5) |
5.말라기 신학
1. 신학적 배경
바벨론 포로(주전586-538년)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사람들은 먼저 나라를 '복구하고 성전을 재건하고자 하였다(스3-6; 학1). 그 후 그들은 또다시 하나님의 이릉을 더럽히고 하나님의 법을 포기하기 시작했다. 느헤미야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들 중 어떤 이들은 자신들의 히브리 아내와 이혼하고 이방 여인들과 이족혼을 하였다. 제사장들은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가르치지 못했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께 온당한 희생제물과 십일조를 드리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였고, 어떤 사람들은 정말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섬겨야 하는지 회의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유대인은 몇 가지 가능한 선택을 할 수 있었다.
1) 그들은 계속해서 옳지 않은 제물로 하나님을 모독하고 십일조를 거부하며 아내와 이혼하
고 불신자와 이족혼을 맺고 그들을 축복하지 않는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었다.
2) 그들은 악의 길에서 돌이켜 엄격한 모세 율법의 준수자가 되어 그들의 열성적인 선행에
하나님이 감동하시기를 바랄 수 있었다.
3) 그들은 하나님의 성전에 모실, 그리고 악한 자를 심판하시며 또한 하나님의 나라를 임하게 하실 여호와의 사자를 위해 길을 예비하는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었다.
4) 그들은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 앞에서 청지기 직분을 다시금 활발히 수행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말라기 선지자는 독특한 질문과 대답의 형식을 이용하여 그의 청중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베풀었다.
2. 신학적 결론
말라기는 하나님의 백성을 권하여 다음의 네 가지 교훈을 강조함으로써, 그들이 하나님을
생각하고 있는 방식과 그들의 신앙 활동에 숨은 동기를 일신하도록 하고 있다.
1)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사랑하며 그들의 공경과 영광을 받으실 위대한 임금이시다.
2) 하나님의 백성은 예배와 혼인관계로 하나님께 참 공경을 표시한다.
3) 영적 지도자는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가르칠 책임이 있다.
4) 하나님은 어느 날 "언약의 사자"(3:1)를 보내시어 자신을 공경하지 않는 사랑은 심판하고 그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사람을 축복하신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보다 그들의 위정자를 더 존경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을 세상을 다스리시는 여호와로 대우하지도, 합당한 예배로 공경하지도 않았다. 말라기는 어느 날 열국의 뭇 백성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리라고 그 백성에게 상기시켰다(1:11, 14). 하나님이 사랑하고 그의 백성으로 선택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공경하고 그의 은혜와 사랑을 무시하거나 의심하지 않아야 한다.
3.오늘날의 교훈
말라기는 오늘날 교회의 문제점을 다루고 있다. 말라기는 우리에게 다음을 요구한다.
1)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주의 깊게 돌아보고 진실로 우리 삶 가운데 하나님을 왕으로 존중하고 있는지 평가하라
2) 예배와 십일조를 드리며 최선의 것으로 하나님을 공경하라
3)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데 실패한 그 순간 바로 자백하고 겸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돌아가라
4) 하나님과 배우자에게 신실하라
5)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을 진심으로 공경하고 섬기면 그것을 아시고 풍성하게 복 주신다는 것을 확신하라
6.말라기 책 개관
대 단 원 | 1 : 1 - 3 : 1 8 책 망 과 심 판 | 4 : 1 – 4 : 6 주의 날에 대한 약속 | |||||
소 단 원 | 1:1-1:5 이스라엘을향한 하나님사랑 | 1:6-2:9 제사장의 죄 | 2:10-3:15 백성들의 죄 | 3:16-3:18 기념책 | 4:1-4:3 주의 날에 대한 약속 | 4:4-4:6 엘리야 파송 예언 | |
주 제 | 은혜를 저버린 백성 | 약속을 믿는 자들의 구원 | |||||
하나님의 고소 | 하나님의 책망 | 하나님의 임재 | |||||
문 체 | 직설적인 논쟁 형식의 문답체를 사용하여 외적 율례를 강조한 예언서 | ||||||
장 소 | 예루살렘 | ||||||
기 간 | B.C 432-425 | ||||||
대 단 원 | 소 단 원 | 내 용 | B.C |
1.책망과 심판 (1:1-3:18) | 1)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1:1-5) | (1)하나님 사랑에 대한 백성들 무지 (1:1-2) (2)하나님 사랑에 대한 설명(1:2-5) | 586 예루살렘 함락 537 1차귀환 536 성전재건 작업1차시작 520 학개/스가랴 사역시작 성전재건 재개 516 제2성전 완 공 458 2차귀환 (에스라) 444 3차귀환 (느헤미야) 435 말라기 사역시작 |
2) 제사장의 죄 (1:6-2:9) | (1)직무에 관련된 죄(1:6-14) (2)제사장이 받을 벌(2:1-9) | ||
3) 백성들의 죄 (2:10-3:15) | (1)이방인과의 통혼과 이혼에 관련된 죄(2:10-16) (2)공의의 하나님을 의심한 죄 (2:17-3:5) (3)십일조와 헌물에 관련된 죄 (3:6-12) (4)하나님을 대적하는 말을 하는 죄 (3:13-15) | ||
4) 기념책 (3:16-18) | (1) 기념책에 의한 심판(3:16-18) | ||
2.주의 날에 대한 약속 (4:1-6) | 1) 주의 날에 대한 (4:1-3) | (1)악인에게 주어진 심판(4:1) (2)의인에게 주어진 축복(4:2-3) | |
2) 엘리야 파송 예언 (4:4-6) | (1)모세의 법도를 기억하라(4:4) (2)엘리야의 사역(4:5-6) |
7.책망과 심판(1:1-3:18)
대 단 원 | 1 : 1 - 3 : 1 8 책 망 과 심 판 | 4 : 1 – 4 : 6 주의 날에 대한 약속 | |||||
소 단 원 | 1:1-1:5 이스라엘을향한 하나님사랑 | 1:6-2:9 제사장의 죄 | 2:10-3:15 백성들의 죄 | 3:16-3:18 기념책 | 4:1-4:3 주의 날에 대한 약속 | 4:4-4:6 엘리야 파송 예언 | |
주 제 | 은혜를 저버린 백성 | 약속을 믿는 자들의 구원 | |||||
하나님의 고소 | 하나님의 책망 | 하나님의 임재 | |||||
개 요: 말라기 선지자는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무조건적인 선택으로 말미암아 에서로 대변되는 에돔과 야곱으로 대변되는 이스라엘이 그 당시에 처한 대조적인 상황을 제시함으로써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를 극명히 보여주고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라 할 수 있는 제사장들의 범죄와 백성들의 죄를 구체적으로 지적하여 책망한다. 그리고 기념책에 의한 의인과 악인의 최종적 분리와 하나님의 최후 심판날에 있을 의인과 악인의 대조적인 최종 운명에 대해 보도하고 있다.
단원 및 제목 | 내 용 |
1.이스라엘을향한 하나님사랑 (1:1-5) | 1) 하나님 사랑에 대한 백성들 무지(1:1-2a) (1) 여호와께서 말라기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말씀 (2) 이스라엘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부인하는 백성들 2) 하나님 사랑에 대한 설명(1:2b-5) (1)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음 (2) 에서의 후손이 재건을 장담했지만 하나님께서 무너뜨리셨음 (3) 너희는 그것을 목격하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지역 밖에서까지 위대하시다고 고백할 것임 |
2.제사장의 죄 (1:6-2:9) | 1) 직무에 관련된 죄(1:6-14) (1)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 했음 (2) 더러운 떡과 온전치 못한 제물을 바침으로 내 상을 경멸했음 (3) 하나님께 희생 드리는 것을 번거로운 폐단으로 여김 2) 제사장이 받을 벌(2:1-9) (1) 저주를 내려 너희가 누리는 복을 저주하리라 (2) 희생제물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르고 그 쓰레기 더미 위에 너희를 던져버리겠음 (3) 모든 백성앞에서 멸시와 천대를 당하게 함 |
3.백성들의 죄 (2:10-3:15) | 1) 이방인과의 통혼과 이혼에 관련된 죄(2:10-16) (1) 공의의 하나님을 부인하는 백성들 (2) 주의 사자 출현과 메시야의 사역에 대한 하나님의 예고 2) 공의의 하나님을 의심한 죄(2:17-3:5) (1) 공의의 하나님을 부인하는 백성들 (2) 주의 사자 출현과 메시야의 사역에 대한 하나님의 예고 3) 십일조와 헌물에 관련되 죄(3:6-12) (1) 너희는 조상 때부터 하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있음 (2) 하나님의 것인 십일조와 헌물을 도적질 함 (3) 온 나라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함으로 저주를 받음 (4) 헌물과 십일조를 정확하게 바칠 때 축복을 약속하심 4) 하나님을 대적하는 말을 하는 죄(3:13-15) (1) 너희가 오만한 말로 주를 대적함 |
4.기념책 (3:16-18) | 1) 기념책에 의한 심판(3:19-18) (1)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의 대화를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그들의 이름을 기념책에 기록해 놓으셨음 (2) 하나님께서 심판하는 날에 그들은 하나님의 사람이 될 것임 · (3) 그때에는 너희가 의인과 악인의 차이점을 알게 될 것임 |
8.주의 날에 대한 약속(4:1-4:6)
대 단 원 | 1 : 1 - 3 : 1 8 책 망 과 심 판 | 4 : 1 – 4 : 6 주의 날에 대한 약속 | |||||
소 단 원 | 1:1-1:5 이스라엘을향한 하나님사랑 | 1:6-2:9 제사장의 죄 | 2:10-3:15 백성들의 죄 | 3:16-3:18 기념책 | 4:1-4:3 주의 날에 대한 약속 | 4:4-4:6 엘리야 파송 예언 | |
주 제 | 은혜를 저버린 백성 | 약속을 믿는 자들의 구원 | |||||
하나님의 고소 | 하나님의 책망 | 하나님의 임재 | |||||
개 요: 본서의 결론으로서 여호와 날에 임할 심판을 언급한다. 그 날에 악인은 뿌리까지 잘리는 멸절을 당할 것이지만 의인은 참 기쁨과 자유를 향유할 것이다. 2절에 나타나는 ‘의로운 해’는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치료하는 광선’은 그분의 치유 능력을 의미한다. 한편 말라기는 본장의 말미에서 엘리야의 출현을 예언함으로써 구약을 마무리 짓고, 새로운 시대(신약)의 막을 열고 있다.
단원 및 제목 | 내 용 |
1.주의 날에 대한 약속 (4:1-3) | 1) 악인에게 주어진 심판(4:1) (1) 하나님의 분노가 횃불처럼 타오를 날이 올 것임 (2) 교만한 자와 악행자가 지푸라기처럼 타서 없어질 것임 2) 의인에게 주어진 축복(4:2-3) (1) 내 이름을 두려워하는 자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할 것임 j 그 날에는 너희의 의로운 생활이 밝혀질 것임 k 그 날에는 모든 것을 다시 회복시키는 햇빛이 비칠 것임 l 우리에 갇혀 있다가 초원으로 풀려나온 송아지처럼 기뻐 뛸 것임 (2)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날에는 의인이 악인들을 모두 짓밟을 것임 j 하나님께 반항한 그들을 너희가 땅바닥에 흩어진 재처럼 밝고 다님 |
2.엘리야 파송 예 언 (4:4-6) | 1) 모세의 법도를 기억하라(4:4) (1) 내가 호렙산에서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위하여 그에게 전해준 그 계명과 규정들을 실천하라 2) 엘리야의 사역(4:5-6) (1) 온 세상을 심판하는 무섭고 위대한 날이 오기 전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라 (2)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려주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려줄 것임 j 그가 부모와 자녀들이 화목하도록 가르쳐주어 내가 가서 심판할 때에 온 세상을 완전히 멸망시키지 않도록 할 것임 |
9.여호와의 고소와 이스라엘의 변명
10.말라기에 나오는 33가지 죄
중간사 서론
(구약과 신약 중간에 위치하고 있는 중간사 )
1.바사 시대
페르시아 통치하에서 유대인들의 생활은 비교적 평안한 편이었다. 고레스(Cyrus) 황제가
예루살렘으로의 귀국과 성전 재건을 허락함에 따라 일부 유대인들이 귀국하였다.팔레스타인 주민들의 방해에 부딪히기도 했으나, 그들은 다리오 대제(Darius the Great)때에 성전 재건을 끝마쳤다. 학사 에스라와 평신도였던 느헤미야가 유대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율법에 충성을 다할 것을 독려하였다. 그들은 팔레스타인 유대 공동체를 굳건히 세우려고 노력하였다. 느헤미야 이후에도 약 1세기 반 동안 페르시아 제국이 유대를 통치하였으나, 유대인들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은 채, 자신들의 종교와 제사를 지킬 수 있도록 허락 받고 있었다. 이때 유대를 다스린 자는 페르시아 정부에 정치적 책임을 진 대제사장 이었으며 이는 유대인들에게 커다란 자율성을 보장해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사제 직분과 정치적 공직의 겸임은 가까운 미래에 이것을 둘러싸고 일어날 무서운 암투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대제사장직을 놓고 시기와 음모, 심지어 살인까지 자행되기도 했는데, 이에 대해 요야다의 아들 요하난(느12:22)이 성전 경내에서 자기 형제를 살해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기도 하다. 요하난은 얏두아를 이어 대제사장직을 계승했는데, 요세푸스에 의하면 얏두아 동생 므낫세가 사마리아의 통치자인 산발랏(Ssmballat)의 딸과 결혼했다고 한다. 이 무렵에 사마리아 성전이 그리심 산에 세워졌었다. 므낫세가 이방 여인과의 결혼 때문에 제사장직을 물러날 것을 종용 받자, 그의 장인 산발랏이 그리심 산에 예루살렘 성전에 필적할 만한 새 성전을 세워 주었다고 한다. 사마리아 공동체에서는 시온산보다 그리심 산을 더 성스러운 것으로 여겼다. 그리심 산의 성전은 하스몬 왕가의 통치자인 요한 힐카누스(B.C.134-lO4)에 의해 파괴되었으나, 그리심 산은 오늘날 까지도 남아 있어 사마리 아인의 성역으로 받들어지고 있다. 한 사마리아 여인이 자기들의 성역에 예배처가 복원될 것이라고 예수께 말했으나, 구세주께서는 예배처 보다는 예배자의 영적 태도가 오히려 더 중요하다고 강조하신 바 있다(참조, 요4:20). 요세푸스의 기록에 나오는 산발랏이 느헤미야 서(4:1)에 기록된 사람과 동일 인물일 수는 없다. 그러나 확실히 이즈음에 그리심산에 성전이 세워졌을 것이라고 하는 믿을 만한 전승을 요세푸스의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페르시아가 그리이스 침략 전쟁에 실패하자, 피정복민들은 독립을 쟁취하려고 동요하게 되었다. 이집트가 끊임없이 페르시아의 멍에로부터 벗어나려고 노력해 온 반면, 지리적으로 이 두 세력 사이에 끼여 있는 유대는 예속을 면치 못했다. 아닥사스다 3세때 많은 유대인들 이 페르시아에 대한 투쟁에 가담했다 이것이 실패로 돌아가자, 페르시아 정부는 이들을 바벨론과 카스피해 남부 연안으로 보냈다. 한편 일단의 유대인들은 이집트에 오랫동안 거주해 오고 있었다. 그다랴가 살해된 후 선지자 예레미야는 일단의 망명자들 속에 끼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들은 나일강의 동쪽 평야에 위치한 다바네스에 피난처를 구했다. 또 다른 유대인들은 느부갓네살에게 잡히는 것을 피하여 이집트로 도망하였다. 그리하여 B.C. 5세기까지 이주민의 행렬이 계속되었고, 현재의 에스완 근처인 엘레판틴 섬에는 유대 용병들이 모여 사는 집단 거주지가 형성되었다. 이들 이주민들은 모세의 율법을 어기고 자신들의 성전을 세웠으며, 그들 조상의 여호와 신앙에다가 이방적 요소를 혼합하였다 엘레판틴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은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사마리아인들과도 교제를 가졌다.
2.알렉산더 대왕 시대
헬라 문화의 영웅인 마게도냐 왕국의 알렉산더 대제는 마침내 페르시아 제국의 종말을 가 져 왔다. 알렉산더는 단순히 권력에만 광분한 독재자는 아니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인 그는 헬라 문화야말로 세계를 통일할 수 있는 한 원동력임을 철저하게 확신하고 있었다. B.C.333년 그는 마게도냐에서 소아시아로 진군하여, 페르시아 군대를 격파하고 거기에 주둔하였다. 그후 시리아와 팔레스틴 남부를 통과하여 이집트로 옮겨갔다. 두로와 가사가 각각 완고한 저항을 하였으나, 그러한 저항이 알렉산더의 파죽지세를 꺾을 수는 없었고, 그의 군대는 승전 의지를 드높일 뿐이었다. 대제사장 얏두아 시대에 헬라 군대가 승리를 거두게 되리라는 다니엘서의 예언(단8장)이 실현되어진 것이다. 역사가들이 세세히 말하지는 않고 있으나 유대인과 마게도냐의 정복자 사이에는 퍽 우호적 관계가 형성되었던 것 같다. 알렉산더는 유대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율법을 지키도록 허락하였을 뿐 아니라 안식년에는 조공을 면제하였다. 이집트에 알렉산드리아가 건설될 때에는, 유대인들의 이주 를 장려하고, 다른 정복민들과는 구별되는 특권을 부여하기도 하였다. 이집트에서 알렉산더 는 페르시아 압제로부터 구출해준 해방자로 환영받았다. 그의 군대는 승승장구를 올리면서 팔레스틴과 시리아를 다시 되 밟아 올라가 계속 동진하여 인도의 펀잡 지방까지 정복해 나갔다. 전쟁에서의 승리도 승리려니와, 알렉산더가 중동에 끼친 유산은 그 통치 방식보다 는 헬라 문화에 있었다 그는 자신이 이룩한 제국의 각 지방마다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였는 데, 이 도시들은 헬라의 문화를 좇아 생활 질서를 전체적으로 갱신시키는 모델이 되었다. 실제적인 의미에서 볼 때 도시 건설이란 곧 생활 방식을 헬라적으로 변화시킬 웅장한 공공의 건물과 체육관, 야외 극장 같은 건물을 건축하는 것을 의미했다. 모든 사람은 헬라식 이름을 갖게 되었고, 헬라어와 의복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간단히 말해서 헬라화 되어 갔던 것이다. 헬레니즘의 물질적 측면이 많은 사람들에게 매우 매혹적이었음이 틀림 없었다. 교역과 상업이 새로운 상인 계층에게 부를 안겨 주었고, 학자들은 도서관과 학교의 설립을 환영했다. 높은 수준의 주거 방식과 식생활이 사람들에게 생활 수준의 향상을 가져다 주었다. 다른 모든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인들도 헬라 문화의 이 겉모습에 만족하였고 그 문화를 기꺼이 받아 들였다. 바벨론 포로 이전 시기에 있어서 우상숭배가 이스라엘에게 장애물이 되었었다면, 헬레니즘 이야말로 바벨론 포로 이후에 이스라엘이 당한 가장 큰 유혹이었다. B.C. 3세기의 한 역사가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최근에, 페르시아와 그리고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한 마게도냐의 지배를 거치면서 갖게 된 이들 이방 민족과의 접촉으로 많은 전통적인 유대 종교 의식들이 지녔던 그 본래성을 잃어 왔다. " 많은 유대인들이 헬라식 이름을 가졌고, 헬라 철학을 받아들였으며, 자기 조상의 신앙과 헬라식 지혜를 혼합하려고 하였다. 반면 또 다른 이들은 헬레니즘에 저항하여, 율법을 더욱 폭넓고 깊게 연구하기도 하였다. 알렉산더는 바벨론에서 33세로 요절하였다. 향후 수년 동안 근동의 미래 정세가 불확실하였으나, 그의 장군들이 제국을 계승하여, 헬레니즘의 물결은 더욱 고조되었다. 헬라는 네 명의 장군들이 나누어 가지게 되었으며 애굽의 톨레미 왕조와 시리아의 셀류쿠스 왕조는 영토와 권력을 얻기 위해 서로 싸웠지만, 반면에 그들의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사명에 대해서는 완전히 일치하였다. 역사가 타른(W.W. Tarn)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알렉산더가 세상을 너무 변화 시켰으므로 그의 후대에 가서는 아무것도 그 이전처럼 될 수가 없었다. "
3.톨레미 왕조 시대
알렉산더가 죽은 후 유대는 처음 얼마동안 알렉산더 장군 중 한 사람인 안티고누스(Anti gonus)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으나, 곧 이어 '해방자'란 뜻의 이름인 소케르라 불리는 다른 장군인 톨레미 1세가 통치하게 되었다. 톨레미 I세는 B.C.320년 안식일에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는데, 이집트에 왕국의 중심을 둔 그는 유대인들을 퍽 호의적으로 다루었다. 많은 유대인들이 알렉산드리아에 정착하였으며, 이 도시는 이후 수 세기 동안 유대 사상의 중심지가 되었다. 톨레미 2세 (필라델푸스, Philadelphus) 치하 때에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은 구약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하였다. 이 번역은 후에 '70인역'이라고 알려진 것인데, 이것은 히브리 경전을 헬라어로 번역하기 위해 유대에서 왔다는 70인(정확하게 12지파로부터 각각6명씩 도합 72명)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팔레스타인에 거주 하는 유대인들은 톨레미 왕조 시대에 번영을 누렸다. 애굽 중앙 정부에 조공을 바치기는 했으나, 지방 행정면에 있어서는 페르시아 통치 이래로 대제사장 책임하에 자치권을 가지고 있었다. 톨레미 왕조 시대에 유대인 중 가장 위대했던 인물은 의인 시몬(Simon the Just)이었다. 대제사장이었던 그는 "그의 형제 가운데 높으심이여, 그의 백성의 영광 중에 크시도다"라고 외경의 집회서에서 지극히 찬양되고 있다. 그는 톨레미 I세 때에 파괴되었던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했으며, 가뭄과 포위 속에 서도 급수를 가능케 할 수로 시설 공사를 지시했다고 한다. 시몬은 이러한 대제사장으로서의 명성과 함께 고대 유대주의의 위대한 스승으로 존경되어졌다. 그가 즐겨 암송했던 격언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이 세상은 율법과 성스런 봉사와 자비, 이 세 가지에 의존하고 있다. " 그러나 의인 시몬이 정확히 누구인지는 역사적 문제로 남아 있다. 시몬 I세로 알려진 대제사장은 3세기 중엽에 생존했고, 시몬 2세는 B.C.200년경에 실존했다. 유대 전승과 설화에 전해지는 의인 시몬은 이 두 인물 중 하나일 것이다. 톨레미 시대에 제사장 가문이었던 오니야가와 도비야가 사이에는 치열한 경합이 있었다. 도비야가는 친 이집트파였고 상류 계층을 대표했다. 이 도비야가는 느헤미야를 몹시 괴롭혔던 암몬 사람 도비야와 관련되기도 한다(느2:10; 4:3, 7; 6:1-19). 톨레미 2세 때의 한 파피루스 문서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도비야라는 유대인은 요단 동편 암몬 지역에 주둔했던 톨레미 군대의 기병 대장이었다. 현대에 이르러 고고 학자들이 중앙 요르단의 아락 엘엠밀(Araqel-Emir)에서 '도비야'라는 이름이 붙은 B.C. 3세기 때의 거대한 능묘를 발굴해 낸 바 있다. 도비야가는 신약 성경에서의 세리와 같은 직무를 행하는 수세관이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요세푸스는 오니야 2세가 톨레미 6세에게 대제사장이 바쳐야 할 조공 액수인 은20달란트의 지불을 거부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거절로 인하여 오니야는 톨레미에 대한 충성을 거부하게 된 듯하다. 이후 도비야가 출신인 요셉 이전 팔레스타인 지역의 수세관직을 맡았다. 한편 수세관은 해마다 세금을 거두어 들일 수 있는 자격권을 갱신 받기 위하여 알렉산드리아에 다녀와야만 했다. 요셉은 톨레미 시대와 그 후의 안티오쿠스3세 및 셀류쿠스 왕조 시대의 20년 동안, 이 영향력 있는 지위를 계속 누렸다.
4.셀류쿠스 왕조 시대
시리아의 통치자들은 셀류키드(Seleucids)라고 불리어진다. 왜냐하면 알렉산더 제국을 계승한 국가들 중의 하나인 그들의 왕국이 셀류쿠스 I세(니카톨, Nicator)에 의해 세워졌기 때문이었다 초기 지배자들은 대부분 셀류쿠스나 안티오쿠스라는 이름을 가졌는데, 그들은 오론테스강의 안디옥을 그 수도권으로 삼았다. '대제'라는 별칭을 가진 안티오쿠스III세는 B.C.199년까지 이집트와 수 차례의 전쟁을 치루어, 그 해에 이집트로부터 팔레스타인을 점령하였다. 요단강의 발원지인 파니온 근처의 전투에서 승리한 결과였다. 이 사건은 유대 역사에 새 장을 이루어 놓았다. 그 이전의 톨레미 왕조가 유대 관습과 전승에 관용적이었던 반면, 셀류쿠스 왕조는 유대인에게 헬레니즘 문화를 강압적으로 이식시켰던 것이다. 안티오쿠스IV세(에피파네스, Epiphanes)의 통치 때에 위기가 찾아 왔다. 그는 친 헬라파 유대인들과 동맹을 하는 데 성공했다. 안티오쿠스IV세 치하 초기에 유대는 대제사장 오니야 3세가 다스리고 있었는데, 그는 의인 시몬의 후손으로 정통파 유대인이었다. 헬라 문화에 호의를 보이던 다른 유대인들은 오니야를 반대하고, 그 형제 야손의 주장을 지지하였다. 야손(lasorl)은 안티오쿠스에게 거액의 뇌물을 약속한 대가로 대제사장직에 임명받는데 성공하였다. 안티오쿠스가 대제사장직을 정치적 직임으로만 생각한데 반하여, 경건한 유대인들은 그것이 그 근원에서부터 신성한 것이며, 돈을 주고 그 직을 매매하는 것은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야손은 그에게 대제사장의 직위를 안겨다 준 헬라 인들의 문화를 장려하였다. 경기장이 예루살렘에 세워지고 헬라식 이름은 흔한 일이 되어 버렸으며, 히브리적 정통주의는 반 계몽적이거나 또는 시대에 뒤진 것으로 매도되었다. 그러나 야손은 자기의 친한 벗이며 헬라주의자인 메넬라우스 (Menelaus)에게 밀려나게 되었다. 베냐민 지파의 한 사람인 메넬라우스는 야손보다 더 많은 돈을 안티오쿠스에게 지불하여 대제사장직에 오른 것이다. 야손이 대제사장이 되었을 때 소요했던 정통파 유대인들은 제사장직을 맡을 수 없는 베냐민 지파의 메넬라우스가 대제사장직에 임명되자 더욱 크게 불만을 표시했다. 야손은 자신의 대제사장직을 회복하기 위해 군대를 일으켰고 도움을 청하였다. 메넬라우스는 안티오쿠스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이집트와 대치하고 있었던 시리아는 팔레스타인에 대해 효과적인 통제를 유지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느꼈다. 그리하여 안티오쿠스는 안식일에 예루살렘을 공략하기로 은밀한 계획을 세웠다(정통파 유대인은 안식일에 결코 싸우지 않기 때문이다). 마침내 시리아 군대는 메넬라우스에 적대하는 세력들을 대량 학살하였다. 도시의 성벽들이 파괴되었고 새로운 요새인 아크라가 성채에 건조되었다. 안티오쿠스는 정통적 유대 신앙의 자취를 일소해 버릴 결심을 하게 되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제우스의 이미지와 동일시되었고 턱수염을 기른 이방 신상(아마 안티오쿠스의 모습과 같았을 것이다.) 이 성전 제단에 건립되기에 이르렀으며, 이 제단에서는 돼지가 희생제물로 바쳐졌다. 유대인들에게는 할례를 행하는 것과 안식일이나 유대의 절기를 지키는 것이 금지되었다. 또 성경을 필사하는 작업 및 모든 율법의 준수는 잔혹하게 탄압되어졌다. 엘르아살이란 나이 많은 서기관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매질 당하여 죽게 되었다. 군대의 힘으로써 메넬라우스는 대제사장직을 유지했으며 친 헬라파들은 승리를 획득했다. 그러나 친 헬라파들은 지나치게 극단에 흘렀으며 옛 질서를 폐지하려는 그들의 노력은 그들 자신의 타락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정통파들은 그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던지기도 했다. 그러나 모든 유대인들이 그렇게 수동적으로 죽음만을 택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
5.마카비 혁명
박해받던 유대인들이 기다려 오던 영웅은 오래지 않아 나타나게 되었다. 안티오쿠스의 사자들이 예루살렘에서 24km 가량 떨어진 모딘이라는 마을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전례 대로 제사장 맛다디아(Mattathias)가 이방신에게 제사를 드려 유대 백성에게 좋은 본을 보여줄 것을 바랐다ㅏ. 맛다디아가 이를 거절하자 겁이 많은 다른 유대인이 앞으로 나와 제사를 드렸다 격노한 제사장은 제단에 다가가 그 배교한 유대인과 안티오쿠스의 사자를 살해하였다. 맛다디아는 그의 다섯 아들과 함께 이방 제단을 부숴버린 후 체포되는 것을 우려해 피신했다. '그후 정통 유대주의를 추종하는 일단의 무리들이 맛다디아 일가에 합세하여 헬레니즘에 편승한 유대인들을 대항하여 게릴라전을 폈다. 한편 정통파 유대인들은 안식일에는 도무지 싸우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커다란 군사적 약점을 노출하기도 하였다 안식일에는 이들 유대인들이 방어조차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량으로 학살을 당하기도 하여, 맛다디아는 안식일의 자기 방어를 위해 교전하는 것이 허용 될수 수 있다는 새로운 방침을 세우기도 했다. 맛다디아는 혁명 초기에 곧 사망하였다. 그는 자기의 셋째 아들이 유다를 지도자로 추대할 것을 추종자들에게 명하였는데, 그 셋째 아들이 마카비(71accabee, 쇠망치라는 뜻)로 알려진 유다였다. 아마도 이 선택이 퍽 훌륭한 것이었던지 더 많은 유대인들이 나날이 규합되어졌고, 시리아군을 대항할 자체 군대를 보유하기에 이르렀다 유대는 기습을 감행하여 엔마오에서 시리아군과 친 헬라파 유대인을 패배시켰다. 그는 노획물을 이끌고 예루살렘을 향해 진군해 갔다. 마카비는 아크라를 제외한 전 도시를 점령하게 되었고, 성전에 들어가 거기에 설치되어 있던 이방의 모든 우상들을 제거해 버렸다. 제우스에게 바쳐졌던 제단을 헐고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드릴 새 제단을 세웠으며, 제우스 신상은 산산이 부수어졌다. 기슬래월 25일에서 시작하여 8일간 계속되는 이 봉헌 축제는 하누카(Hanukkah)라고 하는 히브리 광명제(the FestiVal Of Light)의 시초가 되었다. 이렇게 해서 성전은 모독 당한 지 꼭 ,3년만에 다시 회복되었다. 그러나 평화는 짧았다. 시리안 장군 루시아(Lysias)가 예루살렘 근처의 전투에서 마카비군을 격퇴 시키고, 예루살렘 도시 전체를 공략하였다. 그런데 포위 도중 본국에 큰 위기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루시아는 유대인에게 화친을 제안했다. 유대주의를 고수하지 못하도록 규정한 법들이 철회되었고, 시리아는 유대의 내정에 간섭하는 것을 그만두게 되었다. 메넬라우스는 제거되었고 그 대신 온건한 헬라주의자인 알키무스 (Alcimus)가 대제사장에 임명되었다. 루시아는 유다와 그 추종자를 벌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벽은 파괴해 버렸다. 마카비 군의 장관들을 포함하여 존경받는 서기관과 장로들과 구성된 회의가, 향후의 행동 방향을 결정짓기 위해 소집되었다. 이 때에 마카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화친이 받아들여졌다. 알키무스는 대제사장이 되었으며, 메넬라우스는 사형을 당했다. 유다는 그의 추종자와 함께 도시를 떠나 버렸다. 한편 유다가 염려한 것이 적중하여 알키무스는 정통파 유대인을 체포하여 처형하였다. 충성스런 유대인들이 유대에 게로 다시금 전향하여 시민 전쟁이 재개 되었으나 유다는 장비도 거의 갖추지 못한 800명의 군대로 수많은 시리아 군대를 맞아 교전하다가 전사하고 말았다. 이리하여 마카비 혁명의 제 일 국면이 끝나게 된다. 유다의 형제인 요나단은 마카비 군대 수 백명과 함께 요단강을 건너 달아났다. 그들은 전쟁을 치를 만한 군대를 갖지는 못했으나, 외교적 측면에서 제2의 승리를 성취해 내었다. 시리아 왕좌를 노리는 두 경쟁자가 유대로부터의 도움을 요구했다. 그들은 유대군을 일으키고 지도해 나갈 만한 재질이 요나단 속에 있다고 간파하였다. 요나단은 지연 작전을 펴서, 한편으로는 승세를 보이는 후보자를 보좌하고, 또 한편으로는 승세를 보이는 후보자를 보좌하고, 또 한편으로는 스파르타 및 로마와 조약을 맺었다. 전쟁이 채 끝나기도 전에 요나단은 유대인의 통치자인 대제사장에 임명됨은 물론 시리아의 귀족이 될 수 있었다. 한편 그의 동생인 시몬은 팔레스타인 평야 지대의 통치자가 되었다. 요나단은 유다의 내적 번영을 이룩하였는데, 사후 시몬이 대제사장직을 계승하였다 시몬이 왕좌에 올랐을 때에는 쾌 늙어 있었다. 그의 빛나는 승리는 외교 분야에 있었는데, 그가 데메드리오를 시리아의 합법적인 왕으로 승인함으로써 유대인들이 세금을 내지 않게 되었다. 이 세금의 면제야말로 결과적으로 유대의 독립을 승인한 것이 되는 것이다. 또한 시몬은 아크라를 점검해 왔던 시리아 주둔군을 굶어 죽게 함으로써 욥바와 벳술의 전 도시를 차지하였다. 그의 현명한 통치를 기념하여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시몬을 가리켜 "영원한 지도자이며 대제사장이시니, 이는 신실한 선지자가 나타날 때까지니이다"라고 찬양 하였다. 맛다디아의 막내 아들인 시몬을 하스모니안(Hasmorlaean)이라 하는 새로운 왕조를 열게 되었는데, 아마도 그의 조상 아스모네우스(Asmonaeus, 히브리어로는 하스몬)에서 따온 말인 듯한다. B.C.134년에 시몬과 그 두 아들은 야망에 차 있는 그의 사위에게 살해 당하였다. 시몬의 셋째 아들인 요한 힐카누스(John Hyrcanus)는 겨우 달아나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6.하스몬 왕조 시대
시리아인들은 유대인들이 시리아에 종속할 것과 시리아의 군대 출정에 협력할 것을 조건으로 하여 요한 힐카누스의 정부를 승인하였다. 요나단과 시몬이 병합하였던 일단의 연안 도시를 또한 양도하게 되었다. 그러나 힐카누스의 효과적인 통치로 곧 회복되어, 이두매 지역(구약성경의 에돔)과 연안 도시들이 유대 영토로 귀속되어졌다. 이 정복은 상인 계층들에게 그들의 옛 상로를 되찾게 해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유대인들에게 종교적인 문제를 야기시키기도 했다. 힐카누스는 이두매인들에게 할례를 장려하고, 유대 신앙을 받아들일 것 등을 강요하였는데, 이는 후기 유대교가 반대하게 된 일이었다. 맛다디아의 손자가 그 정복인에게 종교적 일치를 종용한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칼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힐카누스는 사마리아에도 출정하여 그리심 산의 성전을 파괴하기도 했다. 유대 군대의 승리를 민족주의자들이 환영한 것은 사실이지만, 초기 마카비 시대에 가졌던 종교적 열성을 더 이상 명확하게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B.C.104년 요한 힐카누스가 사망하기까지 그 영토는 전 국경에서 확대되고 있었다. 마카비 투쟁은 이미 오래 전 일로 지나가 버리고, 새로운 경쟁자들이 다투고 있었다. 과거의 헬라주의자들은 배척당하였으나, 그들의 사상은 사두개인들 가운데 그대로 존속되고 있었다. 마카비 시대의 정통파들은 기독교 이전과 신약 시대에 바리새인으로 되었다. 힐카누스 자신은 율법을 고수하는데 헌신적이었으나, 그의 자녀들은 전통적인 히브리 사상에 거의 공감을 느끼지 못하였다. 그들은 자신을 귀족으로 간주했으며 철저한 정통파 바리새인을 경멸하기까지 했다. 아이러니칼하게도 마카비의 후손이 철저하게 헬라화되었던 것이다 힐카누스의 사망이 남은 자녀들간의 분쟁을 재촉하여, 장자인 유다가 형제들 가운데서 승리를 거두었다 유다라는 히브리 이릉보다 헬라식 이름인 아리스토볼로스(Aristobulus)라는 명칭을 더 좋아하였던 그는 형제 중 3명을 옥에 가두어 그 중에서 2명을 굶어 죽게 하였다. 또 다른 한 명은 궁전에서 죽임을 당했다. 겨우 일년 남짓했던 통치 기간 중에도 아리스코볼로스는 유다의 영토를 레바논산 북편까지 확장시켰고, 스스로 왕의 칭호를 사용하였다. 그의 생애는 술과 질병, 그리고 폭동이 일어나지나 않을까 하는 끝없는 불안을 떨치지 못한 채 곧 끝나 버리고 말았다. 아리스토볼로스가 죽을 때 그의 형제 중 단 한 명만이 감옥에 갇힌 채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그의 히브리식 이름이 요나단임에도 불구하고 역사에서는 헬라식 이름인 알렉산더 얀네우스(Alexander Jannaeus)로 알려져 있다. 그도 영토 확장 정책을 계속해 펴나갔다. 유다의 경계는 팔레스틴 해안을 따라 확장되어 나가, 이집트 국경과 트랜스요르단 지역까지 이르렀다. 이것은 다윗 왕과 솔로몬 시대의 영토와 크기가 같았던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여기에는 팔레스틴 전 지역과 이집트 경계에서부터 갈릴리 호수 북부의 훌라 호수까지가 포함된다. 트랜스요르단의 베레아도 얀네우스에게 굴복하여 아스글론을 제외한 해안 평야의 도시들이 그의 점령하에 들어갔다. 하스몬 왕국에 병합된 지역들은 대부분 빠르게 유대화되어 갔다.
이두매가 유대인의 생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고, 갈릴리 또한 유대주의의 주요한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나 사마리아가 동화되지 알고자 저항하였고, 아볼로니아와 스구디아 (구약성경의 벧산)와 같은 도시는 약간의 유대적 요소를 가지기는 했으나, 그들의 비 유대적 성격을 계속 지켜 나갔다. 알렉산더 얀네우스가 바리새인들에 대하여 노골적인 멸시를 가한 사건을 기화로 일어난 당파적 분쟁이 내란을 부르게 되었다. 이때에 바리새인들은 얀네우스에게 대항하기 위해 시리아에 도움을 요청하였고, 이렇게 해서 유다의 독립은 한동안 불안정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그 후에 바리새인들은 곧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아 시리아와의 화친을 파기하고, 외세의 간섭없이 자유롬고 자신들의 주관대로 살아가게 될 유대 국가를 원하게 되었다. 그러나 얀네우스는 반란의 주모자들을 색출하여 800 명의 바리새인을 처형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얀네우스는 죽기 직전에 자신의 참해를 뉘우쳐서 그 아내 살로메 알렉산드라(Salorrle Alexandra)에게 사두개인의 충고를 멀리하고 바리새인을 가까이 할 것을 명하여 통치권을 그녀에게 넘겨 주었다. 아마도 이러한 전설이 역사적 근거를 지니지는 못했을 지라도, 알렉산드라가 바리새인에게 호의적으로 전향한 것은 사실이다. 아리스토볼로스에 이어 알렉산더 얀네우스와도 결혼했던 살로메 알렉산드라는 하스몬 왕가 두 통치자의 미망인으로서, 7년 간을 다스렸다. 왕위에 오를 때 70세였던 그녀는 두 아들에게 왕의 권한을 나누어 주었다. 장자인 힐카누스는 대제사장이 되었고, 둘째 아들인 아리스토볼로스는 군의 총수가 되었다. 한편 그녀의 오빠인 시므온 벤 세타(Simeon ben Shetah)는 바리새인들의 지도자였는데, 이 점이 유대주의의 적대 당파들 사이의 화친을 유지하는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 알렉산드라의 치하에서 바리새인들은 유대인의 생활에 건설적으로 공헌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많은 영역에서, 특히 교육에서 바리새인들은 특출한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시므온 벤 세타가 산헤드린(유대의 국가 회의)의 의장일 때에 모든 젊은이들은 교육받아야 한다는 법령이 제정되었다. 광범위한 초등 교육제도의 성립과 실시로 인해 유대의 큰 마을이나 촌락 및 도시에서 교양있고 학식있는 사람을 길러내게 되었다. 이 교육이 히브리 성경에 그 중심을 두고 있음은 물론이다. 당파 분쟁의 상처가 알렉산드라 재위 기간에 다 치유 되지는 않았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새로이 획득해 낸 여러 측면의 권력에 만족해 했으나, 반면 사두개인들은 권력을 갖지 못한 데 대하여 분개하고 있었다. 문제를 더욱 어렵게 만든 것은 바리새인들이 알렉산더 얀네우스가 자기들의 지도자들을 대략 학살했던 사건에 대하여 복수하려고 벼르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로 인해 사두개인들이 피를 흘리게 되었고, 또 내란이 일어났다. 사두개인들은 얀네우스와 알렉산드라의 둘째 아들인 아리스토볼로스를 알렉산드라의 계승자로 추대하였다. 아리스토볼로스는 군인이었고 제국의 팽창과 세계적인 권력을 꿈꾸는 무리들이 그들 지지하고 있었다. 반면 바리새인들은 장자이며 정식 후계자인 힐카누스를 옹호하였다. 알렉산드라가 죽자 이 두 형제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그의 모친이 세상을 떠나자 힐카누스르세가 대제사장으로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그 동생 아리스토 볼로스가 사두개인의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을 향해 진군해 올 때, 힐카누스도 바리새인도 아무런 방비를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힐카누스는 그 왕권을 아우에게 물려줄 수 밖에 없게 되었고, 아리스토볼로스가 왕위와 대제사장직에 오르게 되었다. 그후 그의 장 자인 알렉산더와 힐카누스의 외동딸인 알렉산드라가 결혼하는 등 짧은 평화가 있었다. 그러나 평화는 잠간 동안이었을뿐, 힐카누스는 도망하였고, 이두매의 총독인 안티파터 (Antipater)가 그를 지지하였다. 나라가 내란의 위협에 흔들리고 있을 때, 폼페이 (Pompey)가 유대를 평화롭게 유지하고 더 나아가 포라가 품은 야심을 실현시키기 위해 그의 로마 군단을 이끌고 나타났다.
7.로마시대
폼페이는 아리스토볼로스가 로마를 반역하리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예루살렘을 포위
한 지 3개월 만에 요새를 함락시키고 도시 내로 진군해 들어갔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는 일만 이천 명의 유대인을 학살했다. 폼페이와 그의 부하들은 성전 지성소에까지 침입했으나, 값비싼 비품들과 설치물에는 손대지 않았고, 예배를 계속 드릴 수 있도록 허용했다. 그러나 유대는 이제 로마의 속국이 되었으며, 유대의 독립은 멀리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유대는 로마의 시리아 행정 구역으로 부속되어졌고, 해안 도시와 사마리아 지역 및 요단 동편의 비 유대인의 거주하던 도시들을 잃게 되었다. 힐카누스는 갈릴리와 이두매 및 베레아를 포함 하는 유대인의 지배자라는 칭호로 불리어졌으며 다시금 대제사장으로 인정되었다 그는 매년 로마에 조공을 바쳐야 했다. 아리스토볼리스는 폼페이의 승리를 장식하기 위해 다른 포로들과 함께 로마로 끌려갔다. 호송 도중 그의 아들 알렉산더가 도주하여 힐카누스를 대항하는 폭동을 일으켰으나, 힐카누스는 로마의 도움으로 이를 진압하였다.아리스토볼리스 (II세)와 힐카누스(2세)가 내분을 일삼고 있는 동안 이두매 총독 안티파터(또는 안티파스)는 유대의 정치상황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안티파터는 아리스토볼로스에 대해 몹시 반대하였는데, 이는 두려움 때문이기도 했지만, 힐카누스와의 화친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힐카누스는 안티파터를 매우 신뢰하였으므로, 유대를 사실상 지배한 자는 바로 이 안티파터였었다. 유대인들은 로마의 지배를 증오한 만큼이나 유대에 귀속되어 힐카누스가 다스리는 것으로 되어 있었으나, 결코 유대에 동화되지도 않았으며 자신들의 오랜 적대감도 잊지 않고 있었다. 줄리어스 시이저(Julius Caesar)가 암살되고 일단의 위기가 밀어닥치자, 안티파터와 그의 아들은 세금을 열성적으로 거두어 들여 카시우스(Cassius)의 새 정권에 바침으로써 충성을 보였다. 안티파터의 아들인 헤롯 (Herod)은 언젠가는 왕위에 오르게 해주겠다는 밀약을 받고 유대 지방의 수세관의 직위에 올랐다. 안토니(Anthony)가 부루터스와 카시우스를 빌립보에서 패퇴시키자 아시아는 또 다시 새 정권의 손아귀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자 헤롯은 재빨리 안토니에게도 뇌물을 주어 새로운 총성을 다짐했다. 한때 페르시아 제국이 지배했던 동부지역은 로마에게 한번도 정복당하지 않았던 파르티아(Parthians)족속이 점거하고 있었다. B.C. 41년에 그들은 예루살렘을 침공해 아리스토볼로스 2세의 아들인 안티고누스(Antigonus)를 왕과 제사장으로 삼았다. 안티파터의 아들인 헤롯은 힐카누스의 사후에 자신이 계승하려 했던 왕위를 빼앗기자 로마로 피신하였다. 거기에서 헤롯은 안토니의 환심을 얻어, 유대인의 왕이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다. 그 칭호가 파르티아인이 쫓겨가기까지는 명목상에 지나지 않았으나 파르티아인이 쫓겨간 후 헤롯은 모라 군대와 함께 승전고를 울리며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왕좌에 올랐다. 헤롯은 B.C.37년에서 A.D.4년까지 통치했으며 그 동안 수많은 사건들이 발생했었다. 그는 자신을 능가하는 '유대인의 왕'이 탄생할 것을 두려워해서 예수가 탄생한 즈음에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영아를 살해한 것으로 악명 높다. 그의 잔악성은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에게는 도합 열 명의 아내가 있었는데, 아구스도(Augustus) 황제는 그의 사생활을 가리켜, "헤롯의 아들이 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의 돼지가 되는 것이 낫다"고 논평했다 한다. 돼지는 불결한 동물인 관계로 도살하지 않는 반면에, 헤롯은 자신의 계획에 방해가 되건, 그 충성 여부가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우면 자기 아내와 자식들도 가차없이 살해해 버렸던 것을 가리킨 말인 것이다. 헤롯의 번영기라고 할 수 있는 B.C.25-14년에는 로마(가이사)와 유대인의 요구 사이에서 조심스럽게 중도적인 노선을 취하여, 유대 신하들이 헤롯을 몹시 미워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들의 호의를 얻고자 노력했다. 전 국토에 걸쳐 도시를 세우거나 재건하는가 하면, 요새오 목욕탕, 공원, 시장, 도로 및 헬라 의 사치스런 문화 시설들을 세웠다. 사마리아를 아구스도를 기념하여 세바스터라는 새 이름으로 명명하였고, 스트라톤 망대에는 가이사랴(가이사)라는 이름을 부여하기도 했다. 헤롯은 이 가이사랴를 열 개의 망대를 가진 성벽과 제방으로 보호되는 항구 도시로 발전 시켰다. 헤롯 18년 (B.C.20/19년)에, 예루살렘 성전 재건이라는 큰 역사가 시작되었다. 주요 건물은 제사장들이 1년 반 동안에 걸쳐 건축했으나, 성전의 복잡한 제건물과 구조는 알비누스(Albinus A.n.62-64) 시대에 이르러서야 완성되었으며, 10년도 채 못되어 A.D.70년에 디도(Titus)의 군대에 의해 완전히 파괴 되고 말았다. 헤롯이 죽기 직전에 그가 가졌던 '유대인의 왕'이란 칭호에 도전하는 한 분이 막 탄생하였었다. 헤롯이 아무도 애곡해 주는 이 없는 죽음을 맞음으로써 신구약 중간시대의 막이 내리고, 신약시대로 옮겨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