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평윤씨의 자긍심
(2023년9월16일)
1. 천년의 명유거족(名儒巨足)
우리시조 태사공(신달)께서는 고려 태조를 도와 삼한통합의 위훈을 세우셨고 문숙공(관.
5대조)께서는 30만 대군을 이끄시고 여진족을 정벌하시어 민족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어느 성씨 문중이고 한 시대에 만 번성하다 시대가 바뀌면 쇠미해지는 예가 허다하지만
우리 윤문은 고려 초 이래 조선 5백년을 거치는 천여 년 동안 한결 같이 번성을 거듭하였다.
2. 문무겸전(文武兼全)의 혈통
문숙공께서는 文武全才를 갖추신 분으로 문과에도 장원하시어 명장으로서도 청사에 빛나는 위업을 완수하신 분이다. 문숙공의 아들 휘 언이 께서는 아버님과 같이 여진 정벌에
정군하시고 묘청의 난이 일어나자 출정하시어 이를 토벌하였다.
3. 조선조 최다의 과거급제자 배출
조선 5백년 동안의 문과급제자 수를 집계하면 420명으로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소과(생원.진사) 및 무과 급제까지 포함하면 우리 선조님들께서 얼마나 면학에 힘을 쏟으셨나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4. 세종대왕. 명문거족과의 통혼
세종22년 왕실과 통혼한 경우가 10여명이나 되었고 세종의 부마(매부)도 4명이 파평윤씨 출신이었다고 한다.
세종의 자부(정희왕후.세조비)또한 파평윤씨로써 겹사돈 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이 밖에
충무공 이순신, 율곡 이이, 백사 이항복 등 많은 名臣名賢들이 통혼하였다.
우리는 이 나라의 많은 명족들과 통혼을 하였다는데 명문의 후손으로써 더욱 자부하는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다.
5. 최고의 족보를 편찬
우리 파평윤씨의 족보는 멀리 세조 3년에서 10년에 이르는 동안(서기1457년~1464년)에 편찬되기 시작하여 중종 34년(서기1539년)에 이르러 첫 간행을 보게 되었는데 이것이
윤문의 첫 번째 족보인 기해대보(己亥大譜)이다. 안동 권씨의 성화보가 63년 앞서 있다고는 하나 족보 편찬 실시는 우리가 훨씬 앞어 있다는 기록이 있는 만큼 최고의 족보라고 할 수 있다.
6. 국왕의 전교
윤문의 선대조상들이 이룩하신 국가와 민족에게 끼친 위대한 공훈으로 문숙공 후손들에게는 조선5백년간 역대 국왕들이 천역을 면케 하라는 전교 문을 5번이나 내려 큰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문종때에는 연호(호세난역)를 하지 않도록 하였으며 성종.선조.숙종 대왕께서는 문숙공 자손들에게 군역.잡역을 면제하라는 전교를 내렸다고 한다.
영조대왕께서는 7가지 천역(군보.납미.잡역등)을 면제하라는 교지를 내리셨다.
7. 많은 왕비가 나시다.
왕비록은 고려조 때 한분, 조선조 때 다섯분의 왕비가 우리 윤문에서 나오셨음으로 모두
여섯분이 된다.
그중 연산군 모후가 되시는 성종 왕비가 폐비가 되었다고는 하나 왕비에 책봉되었던 분으로 다른 왕비와 동격으로 기록된다.
1.고려조: 희비(12세,충혜왕),
2.조선조:정희왕후(16세,세조),제헌왕후(17세.성종).정현왕후(18세,성종) 장경왕후(19세,중종),문정왕후(20세.중종)
교리공파는 현재 의정부 신곡동에 종회 사무실이 있고 연천군 백학면 노곡리 305번지에 “고강재”재실이 있다.
1998년 정부정책에 따라 묘역이 수용됨에 따라 의정부 신곡동(동오리)에서 이곳으로 묘역을 새로이 조성하였고 고려 공민왕조 태위공 휘 안비12세)를 위시한 12위의 추원단이 있으며 교리공 휘,돈(16세)을 비롯 15대에 긍한 21기의 묘소가 있다.
(파평윤씨 태위공파 교리공종회 사무국장 병찬(炳讚 )
▣ 坡平尹氏太尉公派(校理公)항렬표
*항렬이란 “같은 부계혈족의 직계에서 갈라져나간 계통 사이의 대수(代數)관계”를 표시
하는 말이다.
세(世) | 30 | 31 | 32 | 33 |
太 慰 公 派 宗 會 파평윤씨 태위공파 | ●成 | 泰● | ●植 | 炳● |
34 | 35 | 36 | 37 |
●基 ●均 | 鍾● 鎭● | ●永 ●洙 | 東● 相● |
38 | 39 | 40 |
|
●默 ●煥 | 用● 星● | ●錫 ●鉉 |
|
◯ 34세부터 병용사용 가능하다.
◯ 한자가 같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