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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공허한가
글쓴이 qkdgidtjd@daum.net
그대는 혹시 ‘공허’라는 감정을 느껴본 적 있는가? 필자는 스무 살 즈음에 처음으로 그러한 감정을 느껴봤던 것 같다. 그 이유는 뒤에서 밝혀질 테니 일단 공허라는 느낌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 여기서 필자가 말하는 ‘공허’라는 건 어떤 느낌을 말하는 걸까?
머리는 '이럴 거면 왜 살지? ' 라는 질문으로 가득차고 동시에 가슴은 텅 빈 듯한 느낌을 이야기한다. 인간은 어차피 죽기 때문에 삶은 무가치하고 허무하고 무의미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상태, 인생을 왜 살고 어떻게 살고 뭘 하며 살아야 할지를 도저히 모르겠는 상태,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왜 해야 하는지 뭘 위해 하는지를 모르겠는 상태. 지금 이 순간 내가 인생을 잘 못살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상태, 내 인생 이게 아닌데... 이 방향이 아닌데.. 하는 상태, 무기력하고 가슴이 허전하면서 왠지 모르게 답답한 상태. 나의 몸이 바다 한가운데에 둥둥 떠 있는데 칠흑 같은 어둠만이 있고 어떠한 섬도 보이질 않아 어딜 향해 헤엄쳐야 할 지 모르겠는 상태, 쓸쓸하고 무기력한 상태, 한마디로 정리하면 머리에는 이럴 거면 왜 사는가 라는 질문으로 가득차고 가슴은 텅 빈 상태.
이러한 상태를 ‘공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러한 상태가 되는 걸까? 인간은 언제 공허해지는 걸까?
나는 인간이 공허해지는 이유는 행복하지 않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지금 이 순간 행복하다면 왜 사는지 따위는 궁금하지 않다. 왜냐하면 인간이 인생을 사는 이유는 행복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목적이 달성된 상태이기에 이유가 궁금하지 않다. 행복한 사람은 설렘으로 가슴이 가득 차 있다. 빈 공간이 있을 수 없다. 그럼 인간은 왜 행복하지 않을까? 왜 공허할까? 필자의 생각엔 꿈꾸는 삶을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공허와 꿈은 어떤 관련이 있을까?
꿈이라는 것은 ‘내가 이루려 하는 무언가’라는 뜻이니 mission(=목표)이라고 볼 수 있다. 미션은 우리에게 삶의 기준이 되어준다. 미션은 내 삶의 방향을 알려주고 내가 어딜 향해 가는 지를 알려준다. 뭘 위해 아침에 눈을 뜨고 밥을 먹는지 그 이유를 알려준다. 내가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내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고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야 하는 지를 알려준다. 삶의 이유를 알려준다. 내가 하는 모든 일에 이유가 생긴다는 것이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 일어나고 밥을 먹고 양치를 하고 출근을 하는 것을 왜 해야 하는지 알려준다. 왜 해야 되냐고? 미션을 달성하기 위해. 미션이 있다면 자연스레 내 인생의 방향이 설정이 된다.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이 어디로 가는지를 알게 된다. 그 길 끝에는 당연히 내가 바라는 것(=꿈)이 기다리고 있다. 내 인생이 어디로 흘러가는 지를 머리로 이해하고 알 수 있게 된다. 동시에 가슴은 비어있지 않고 설렘과 벅참으로 가득 찬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 데이트하는 것이 미션인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삶의 기준은 여자를 만나 데이트하는 것이 된다. 그 사람은 데이트를 하기 위해 사는 것이다. 아침에 눈을 뜨는 이유도 밥을 먹는 이유도 그 여자를 만나 데이트를 하기 위한 것이다. 그 사람의 인생의 방향은 데이트하는 것에 맞춰져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은 머리와 몸으로 알고 있다. 삶의 이유를 말이다. 내가 무엇을 위해 사는지를 말이다. 내 인생이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말이다. 동시에 가슴은 비어있지 않을 것이다. 설렘으로 차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꿈꾸는 삶’이란 건 뭘까? 그 전에 일단, 꿈이란 건 정확하게 뭘까? 무엇을 꿈이라고 말하는걸까? 간단하다. 아직은 현실이 아닌, 하지만 내가 하고 싶고 되고 싶은 무언가를 꿈이라 말한다. 뜻을 이해하기 위해 같은 뜻을 가진 말들을 찾아보자. ‘하고 싶다’라는 말은 무언가를 바라고 원한다는 말과 같다. 그리고 한자어로는 ‘본능’이나 ‘욕구’라고 표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무언가를 왜 원할까? 그 무언가가 날 행복하게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 때문에 행복한 지를 안다는 말이고 이는 내가 언제 행복한 지를 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 무언가가 나를 행복하게 만들기 때문에 당연히 그것을 좋아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것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것이 하찮아 보이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내 눈에 멋있어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좋아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건 멋있다고 생각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다. 멋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대단해보인다. 대단해 보이는 것을 할 때 우리는 보통 도전한다고 말한다. 멋있다고 생각하는 그 무언가는 도전하고 싶은 그 무언가라는 뜻이다. 따라서 정리를 해보자면 '꿈이 있다 = 내가 언제 행복한 지를 안다 = 하고 싶은 게 있다 , 되고 싶은 게 있다 = 바라는 게 있다 ,원하는 게 있다 = 본능, 욕망에 눈을 뜨다 = 좋아하는 것이 있다 = 멋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다 = 도전하고 싶은 것이 있다' 로 정리할 수 있다. '꿈 꾸는 삶' 이란 행복하게 사는 것,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것, 본능을 따르는 삶을 사는 것, 행복하게 사는 것,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사는 것, 도전하며 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간단하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산다는 것이다. 그리고 본능을 따르고 있다면 인간은 공허할 틈이 없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 주변 사람들의 인생을 들여다보면 놀랍게도 오로지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본능을 따르고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본능을 따르기는커녕 자신의 본능이 뭔지도 모른다. 자기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기 자신이 언제 행복한지 모른다는 얘기다. 설령 본능에 눈을 뜨게 된다고 해도 그 본능을 못 본 척 하거나 스스로 죽여 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럼 그런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게 뭔지 모르거나 하고자 하는 것을 스스로 죽여 버렸는데 도대체 뭘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 ? 삶을 어떠어떠한 식으로 살아야 한다는 기준이 없을 텐데 도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삼고 인생을 살고 있다는 걸까? 좋아하는 것이 없는데 텅 빈 하루하루를 무엇으로 채우고 있을까? 본능이 있어야 할 자리에 대신 들어가 있는 건 뭘까?
바로 도덕이다. 꿈이 없는 사람은 도덕을 따른다. 텅 빈 머리와 가슴을 도덕으로 채우고, 도덕을 따르는 것을 삶의 미션으로 삼고 인생을 살아간다. 본인이 의식을 하고 있든 없든 그들에겐 도덕이 기준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필자가 말하는 도덕이란 무엇일까?
도덕이란 윤리 규범 법 규칙 당위 예의 효(孝) 종교 문화 관습 사회 전통 분위기 양심 배려 등을 이야기한다. 풀어서 설명하자면 타인(=사회)이 나에게 바라는 것. 타인이 내게 요구하는 것. 타인이 좋아하는 것, 타인이 멋있다고 생각하는 것, 내가 당연히 지키고 해야만 한다고 일컬어지는 것. 마땅히 인간으로서 해야만 한다고 하는 것. 옛 부터 이러이러 해왔으니 나도 이러이러 해야 한다는 것. 기존에 존재하고 있던 규칙, 남들이 이러이러하니 나도 이러이러해야만 한다는 것. 한국에서 사는 사람은 무조건 따라야 한다고 하는 것, ‘일반적으로~ 상식적으로~ 통념 상~’ 이라는 말과 함께 오는 것 등등이라고 할 수 있다.
꿈과 도덕은 둘 다 인간의 미션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 둘은 큰 차이가 있다. 꿈은 내가 바라는 것이고 도덕은 남이 나에게 바라는 것이라는 점이다. 즉, 앞에서 말한 ‘꿈꾸는 삶’은 ‘내’가 기준이라면 ‘도덕’은 ‘타인’이 기준인 것이다. 꿈이 ‘내가 원하는 것‘이라면 도덕은 ‘타인이 원하는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도덕을 미션으로 두고 있다. 그 이유는 내가 원하는 게 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게 뭔지 모르니 쉽고 편안하게 선택할 수 있는 '남이 원하는 것'을 미션으로 둔다. 다른 말로 하면 '나'는 없고 '타인'밖에 없다. 나의 미션이 없으면 타인이 부여한 미션이 그 자리를 채운다. 할 게 없고 뭘 해야 할지를 모르니 남들이 하라고 하는 것을 한다. 남들이 좋다고 하는 것을 자신도 좇는다. 남들이 하는 것을 따라한다. 남들처럼 살려고 노력한다. 그렇게 하면 행복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지 않으면 뭘 해야 하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덕이라는 미션을 따라가도 공허함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내 가슴을 설레게 하는 미션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생을 살다보면 인간은 본능에 눈 뜨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건 좋고 이건 싫고 이걸 하고 싶고 저건 그만두고 싶고' 같은 것들 말이다. 그리고 당연히 본능대로 움직이고 싶어진다. 행복하고 싶기 때문이다. 문제는 본능과 도덕이 대개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문제가 된다. 어떤 지역. 어떤 시대든 보통 본능을 드러내려 하면 도덕은 이를 억제시키려 하고 압박하고 죽이려든다. 그래서 문제가 발생한다. 나는 이렇게 하고 싶은데 타인(=사회)은 그것을 못하게 막는 경우도 있고 나는 하기 싫은데 사회적 요구 때문에 해야만 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가 당연히 견뎌야 한다고 하는 ‘책임과 의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이는 스트레스가 된다. 그래서 도덕은 공허함에 고통까지 더해준다. 하기 싫은 걸 해야 하니 말이다. 하고 싶은데 못하게 하고 하기 싫은데 강제로 시키니 본능과 도덕은 서로 싸울 수밖에 없고 서로 적(敵)이 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보자. 18살은 아침 9시에 교실에 앉아 국영수를 공부해야 한다는 도덕이 있다. 그런데 이 도덕이 18살 학생의 본능과 과연 일치할까? 혈기왕성한 나이에 의자에 가만히 앉아 관심 없는 국영수를 공부하는 게 본능일까? 밖에 나가 햇빛이 좋은 곳에서 여자친구와 데이트 하고 싶은 게 본능 아닐까? 그렇다면 이 학생은 고민하게 된다. 본능을 따라야 하는지 도덕을 따라야 하는지 말이다. 이처럼 본능과 도덕은 서로 투쟁한다. 그 결과 본능이 이기면 본능대로 살고 도덕이 이기면 도덕대로 산다. 본능이 죽으면 인간은 공허하다. 게다가 도덕을 따르기까지 하면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그런데 이런 싸움을 하지 않는 존재가 있다. 바로 어린아이들이다. 어린아이들에게는 누군가 도덕을 요구하지도 않지만 요구 한다고 해도 먹혀들어가지 않는다. 공공장소에서 갓난아기와 함께 있어본 경험이 있는가? 사람이 가득 찬 고속버스든 비행중인 비행기든 연극이 진행되고 있는 소극장이든 그곳이 어디든 상관없이 애기들은 배고프면 울고 잠이 오면 울고 오줌 싸면 울어버린다. 그것도 큰 소리로 말이다. 어린아이들에게 도덕이란 없다. 본능만이 있다. 이유가 뭘까? 그들은 이성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들은 이성적으로 판단을 하지 않는다. 아니 이성이 없다. 오직 본능뿐이다. 마치 동물처럼 말이다.
여기서 필자가 말하는 이성이란 뭘까? 공허함과 이성은 어떤 식으로 연결될까? 여기서 이성은 인간이 행동하기 전에 머리로 생각을 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생각은 분석, 계산, 예측, 계획을 뜻한다. 분석과 계산을 통해 가장 합리적인 답을 찾아 그것대로 인간을 행동하게 하는 것은 바로 이성이다. 그런데 그 합리적인 답은 도덕적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합리적이라는 건 누가 봐도 타당하고 그럴 듯하고 현실적으로 가능해 보이고 앞뒤 말이 맞는 걸 말하는데 이러한 걸 보통 '통념, 상식' 이라 밀하고 통념은 곧 도덕이기 때문이다. 도덕은 본능을 억누르고 죽이려 한다. 그 결과 본능이 죽으면 인간은 공허하다. 이러한 건 인간에게서만 보이는 특징이다. 동물에게 이성이란 없다. 이성은 우리를 도덕으로 인도한다.
그렇다면 이성의 반대는 뭘까? 갓난아기들은 머리로 계산하지 않으면 무엇을 기준삼아 행동할까? 바로 느낌이다. 머리로 생각하여 ‘이게 옳은거니 이렇게 해야겠다‘ 가 아니라 그냥 순간의 느낌을 따른다. 느낌이라는 건 가슴(육체)에서 나오는 목소리를 말한다. 언어로 설명되지 않고 합리적이지 않고 현실을 무시하고 뜬금없고 황당해 보이지만 분명 내 안에서 나오고 있는 목소리다. 그 목소리를 따르든 안 따르든 나오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것은 과거와 미래를 무시한다. 오로지 현재 지금 이 순간 가슴에서 나오는 목소리다. ‘아 이거 하고 싶어’ ‘아 이거 고프다’ 같은 것들이 이미 우리 가슴에 분명 존재한다. 그리고 이것은 느낌이니 계산을 배제한다. 이성(=도덕)을 배제한다. 이성을 배제한 것이니 동물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성적 판단은 무시하고 느낌을 따라가는 것을 필자는 직관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싶다. 그리고 이 직관은 앞서 말한 ’꿈 = 하고싶은일 = 좋아하는일‘ 과 동의어이다. ’꿈 꾸는 삶 = 하고 싶은 걸 하는 삶 = 원하는 것을 하는 삶 = 본능을 따르는 삶 = 행복한 삶 = 좋아하는 것을 하는 삶 = 직관을 따르는 삶 = 순간의 느낌을 따르는 삶 = 순간순간의 판단을 따르는 삶 = 동물적 직감을 따르는 삶 = 동물처럼 사는 삶 = 내적 충동을 따르는 삶 = 이성이 없는 삶 = 계산이 없는 삶 = 계획이 없는 = 무작정의 = 정신이 없는 삶 = 눈치 보지 않는 = 자아분열 되지 않은 = 생명력이 살아있는 = 내가 나로 존재하는‘ 이라고 볼 수 있다. 필자가 말하는 ’하고 싶은 일, 좋아하는 일, 꿈‘이라는 것이 뭘 말하는 건지 좀 더 와닿는가? 꿈, 하고 싶은 일, 좋아하는 일이라고 말을 하니 ’어떤 거대하고 위대하고 굉장한 무언가’ 만을 얘기하는 것이라 착각할 수 있는데, 하고 싶은 일이란 그냥 지금 이 순간 가슴에 있는 ‘아 이거 하고 싶어’ ‘아 이거 고프다’ 또한 당연히 포함이다. 도덕적으로 사회적으로 (=이성적으로) 꽤 괜찮다고 판단되는 목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지극히 동물적이어서 솔직하고 위선이 없는 본능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러한 것을 따르면 공허의 자리는 쾌락으로 가득찬다. 그래서 예수가 ‘너희가 어린아이처럼 되지 않으면 절대로 천국(행복)에 들어갈 수 없다.“ 라고 했나보다.
정리해보자. 인간은 공허하다. 행복하지 않으면 말이다.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본능을 따르고 있지 않아서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궁금한 게 있다. 왜 인간은 본능을 따르지 않을까? 그냥 지금 당장 직관대로 살면 되는데 왜 그러지 않을까 ?
첫 번째 이유는 자기 자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하고자 하는 게 무엇인질 모른다. 자신의 본능이 없다. 그렇게 되는 이유가 뭘까?
우리는 아주 어릴 때부터 교육이라는 것을 받는다. 그런데 이 교육은 보통 본능에 대한 교육이 아니라 도덕에 대한 교육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내가 하고싶은 게 무엇인지 생각하게 하는 교육이나 내가 내 인생을 뭘 하며 살지 고민하고 선택하는 교육이 아니라 내가 뭘 해야 하는지를 주입하는 교육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도덕교육이 지속적으로 이어지면 도덕이 체화가 되어 우리는 도덕이 당연한 것이고 마치 원래 그게 본능이라고 세뇌가 된다. 그와 동시에 도덕이 내 안으로 들어오는만큼 직관(=본능)은 서서히 내 안에서 모습을 감춰버린다. 예를 들어보자 어린 나이부터 우리는 학교를 다닌다. 학교에서 우리는 타인의 기준에 대해 배우기 시작한다. 등교시간도 아침 8시라는 타인에 의해 정해진 것을 따르게 되고 등교 후에는 어떤 기준에 맞춰 시간을 사용할지, 그리고 무엇을 배울지도 정해져 있는 것을 따른다. 이러한 남에 의해 정해진 기준들에 처음에 우리의 직관은 불평불만이 많다. 내가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지 못하고 8시까지 등교하기 위해 일어나기 싫은 시간에 일어나야 하니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도덕교육이 몇 년 아니 몇 개월만 지속되면 이러한 기준들을 나도 모르게 당연시 여기게 되고 서서히 당연하다고 믿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인생은 원래 이렇게 하기 싫은 것들을 하며 사는 것이라고, 원래 이 정도는 참고 사는 것이 당연한 거라고 나도 모르게 믿게 된다. 중요한 건 ‘지금 학교에서 하는 것들은 나와 맞지 않고 재미가 없어서 하기 싫어. 지금 당장 내가 바라는 건 집에 가서 잠을 자는 거야, 노래를 부르며 노는 거야, 바다를 보러 가고 싶어, 저 여자애와 데이트하고 싶어’ 라는 순간의 느낌들을 부정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부정하게 만든다. 그러면서 직관을 부정하는 것이 세뇌된다. 나도 모르게 말이다.
이런 식으로 스스로 기준을 세워보지 않고 세워진 기준만 맹목적으로 따라가는 교육에 잘 적응한 사람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그러한 삶을 살게 된다. 28살이 되었을 때 ‘너 아침 8시까지 출근해’ 라는 소리를 듣기 위해 노력하게 될 것이다. 한번 주어진 나의 인생을 어떻게 살지 그리고 뭘 하며 시간을 보낼지 스스로 정해본 적이 없으니 타인이 정해주길 바라는 것이다. 스스로 미션을 가지려는 마음보다 타인이 내 삶의 미션을 설정해주길 바라는 것이다. 상사가 준 미션을 해결하기 위해 아침 8시까지 출근하려 노력할 것이다. 8시까지 출근하기 위해 밤 12시쯤에 잠에 들 것이고, 12시에 잠 들기 위해 7~8시 쯤에 저녁식사를 할 것이고, 그러라고 회사에서 6시에 퇴근을 시켜줄 것이다. 그리고 그 기준에 맞춰 살며 28살 아이는 뿌듯해 할 것이다. 나 지금 잘 살고 있다고 말이다. 도덕에 세뇌된 것도 모른 체 말이다. 흥미와 적성(=본능) 따위는 고려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정년퇴직할 때까지 8시까지 출근할 수 있음이 목표가 될 것이다. 이렇게 세뇌된 도덕적 기준들이 우리의 본능을 가리고 더 나아가 도덕자체가 원래 본능인 것처럼 생각하게 만든다.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아무 비판 없이 체화된 세상의 기준들은 우리를 공허한 삶으로 인도한다. 심지어 세뇌가 잘 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공허하다는 것조차 알지 못한다. 자기 자신이 공허하다는 것을 모른다. 이러한 감정이 원래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자기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모른다.
우리는 잃어버렸던 본능을 되찾아야 한다. 나도 모르게 억눌려 있는 직관을 되살려야 한다. 그렇다면 본능을 어떻게 되찾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꿈을 찾을 수 있을까? 하고 싶은 일은 어떻게 발견할 수 있을까? 내가 누구인지를 어떻게 찾아갈 수 있을까?
다양한 경험을 해야 한다. 이것저것 가리지 말고 뭐든지 닥치는 대로 다 해봐야 한다. 매 순간 의도적으로 세상의 많은 것들을 건들며 여러 다양한 경험들을 해보면서 내 안의 감정이나 취향, 가치관을 끊임없이 건들어야 한다. 그러다보면 내가 원하는 것에 눈을 뜨게 된다. 내 모든 것을 바치고 싶을 정도로 날 꽂히게 만드는 무언가를 만날 수 있다. 나를 열광하게 하는 그 무언가 말이다. 경험을 수단삼아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적극적으로 알아낼 수 있다. 이번 생에 이렇게 태어나 나와 마주하는 모든 것들 그리고 내가 조금이라도 호기심을 갖게 되는 것들을 놓치면 안 된다. 이 세상에 너무나 많은 것들이 있는데 이 많은 것 중에 내가 무언가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는다는 건 굉장히 의미가 크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소한 관심조차도 나의 본능을 찾게 해주는 연결점으로 바라보자. 그게 사람이든 일이든 물건이든 운동이든 뭐든간에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다양한 경험들을 할 때, 스스로의 마음에 일종의 제한(=편견, 선입견, 고정관념)을 두면 안 된다. 도덕에 어긋나 보인다고 해서, 사회적으로 급이 낮아 보여서, 남들이 별로라고 하니까 그리고 스스로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 건 나와 어울리지 않아’ 라는 마음 상태이면 안 된다. 마음을 열어야 한다. 내가 보고 들을 수 있는 모든 것에 가능성을 열어둔 상태에서 여러 가지 경험을 해봐야 한다. 마음이 닫혀있는 상태 즉, 편견에 사로잡힌 상태에서의 경험은 무의미하다. 나 자신에 대한 그리고 세상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을 버리고 마음을 텅 비워 마음을 열고 다양한 것들을 겪다 보면 나를 설레게 하고 나를 집중하게 만드는 그런 무언가를 만날 수가 있다. 그리고 순간순간 본능에 눈을 뜰 때, 그러한 본능을 죽이면 안 된다. 그 본능이 도덕에 어긋난다고 해서 그 본능을 스스로 부정하면 안 된다. 이런 본능을 부정해버리기 때문에 하고 싶은 일이 없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하고 싶은 게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절대로 하고 싶은 게 없을 수가 없다. 지금 이 순간 우리의 가슴엔 하고 싶은 것이 이미 존재하고 있다. 우리가 순간적으로 느끼는 직관 (=하고 싶은 일)을 사소한 것이라 판단해버리거나 ‘이상하고 유별나고 무모하고 철없는 것’이라 판단하여 그 느낌을 스스로 무시하고 없애버리니까 당연히 하고 싶은 게 없어지는 것이다. 본인이 스스로 없앴기 때문에 말이다. 어른스러워야 한다는 마음을 버려야 내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할 수 있다. 어른스러움을 버리라는 건 나에게 요구되어지는 도덕 그리고 나에게 주어지는 책임감, 의무감, 부담감 등을 버려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경험을 하며 되돌아보는 과정을 꼭 거쳐야 한다. 어떠한 경험을 할 때, 나 자신을 계속 잘 들여다봐야만 한다. 아니 나 자신을 들여다보기 위해 다양한 경험을 하는 것이다! 내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이러이러할 때 나의 감정은 어떠한지 나의 가치관은 어떤지 나의 취향은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 말이다. 나 자신을 들여다본다는 목적이 없이 경험을 하면 그냥 순간순간 그 경험들이 나를 스쳐지나갈 뿐이다. 목적을 상기하며 경험을 하면 사소한 것에서도 내 본능과 꿈에 눈 뜨게 된다. 그리고 다양한 경험을 하고 나서도 나를 되돌아보며 나 자신이 무엇에 반응했고, 내 기분을 좋게 했던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면 내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 게 된다. ‘이성’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 같다.
물론 다양한 경험을 하며 시간을 보내려 하면 도덕이 나를 가로막는 경우를 만나게 된다. ‘대학교 졸업도 안했는데 이래도 되겠어? 그 돈을 이렇게 써버리면 너무 철없는 거 아니야?’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럴 경우 도덕을 만족시키려는 마음을 체념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런데 이 체념은 포기를 위한 포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해 깨달을 수 있는 경험을 하여 한발자국 나아가기 위한 포기이기에 ‘긍정적 체념‘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긍정적 체념의 태도는 도덕으로부터 나를 지켜줄 수 있다. 나 자신의 취향이나 가치관에 집중하며 시간을 보내게 되면 남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줄어들고 혼자 다니거나 혼자 가만히 앉아 생각하는 일이 많아질 것이다.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그런 일들을 하게 될 수도 있다. 그리고 나를 압박하는 타인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런 나를 보며 재미있게도 주변 사람들은 내가 하루종일 멍 때리고 있고 하루종일 놀기만 한다고 왜 시간낭비 하냐고 하며 인생을 포기했냐고, 왜 인생을 막 사냐고 할 것이다. 사실 알고보면 한 번뿐인 인생을 제대로 살아보려 고군분투 중인 건데 말이다. 예를 들어 대한민국 최고 대학을 다니다가 가구 만드는 일에 호기심이 생겨서 휴학을 하고 가구를 만들기 위해 가구공장 아르바이트생이 된다는 게 일반적인가? 안정적인 직장을 잘 다니다가 연기를 하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고 영화 오디션을 보러 다니는 건 상식적인가? 과연 부모님이 가만히 계실까? 이럴 때 우리는 긍정적 체념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스스로조차도 불안하고 고민이 많을 것이다. 불안정한 미래와 확실한 것이 없는 상태이니 말이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긍정적 체념을 하고 자기 자신을 밀어붙인 사람들이 공허하지 않게 살고 있다. 심지어 부와 명예까지 얻는 모습을 우리는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의무와 책임으로부터 벗어나자. 내가 하기 싫은 것들을 요구하는 자들을 멀리하자. 그들을 만족시키겠다는 것은 체념하자. 세상을 경험하며 하고 싶은 것을 적극적으로 찾자. 그래서 마음껏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며 살자. 본능대로 살면 삶이 즐겁다. 그러면 인생을 왜 사는가 따위의 질문은 떠오르지 않는다. 공허하지 않다. 행복하다.
그런데 대다수의 사람들은 하고 싶은 것을 발견해도 그것을 하질 못한다. 도덕대로 살며 ‘내 인생이 이게 아닌데...’ 라고 느끼면서도 계속 그 틀 안에 스스로 갇혀 있는다. 벗어나질 못한다. 하기 싫은 일을 그만두고 과감하게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대담하게 틀에서 벗어나 직관을 따르는 용기를 내는 사람의 수는 희박하다. 도덕을 벗어나 자기 자신의 꿈을 펼치는 사람은 찾기 힘들다. 거침없이 본능을 따르는 사람은 보기 힘들다. 예를 들어 길거리에 지나가다 아름다운 여자를 보게 됐을 때, 연락처를 물어볼 수 있는 남자가 얼마나 될까? 거의 없다. 다들 그냥 힐끔 쳐다보고 지나간다.
그 이유가 뭘까?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왜 그 일을 하지 않을까? 왜 도덕에 복종하며 살까? 왜 틀에서 벗어나는 걸 두려워할까? 순간의 직관을 그냥 행동으로 옮기면 되는데 왜 그러질 않을까? 이것이 두번째 이유인데 바로 자존감이 낮기 때문이다. 자존감이 낮으면 자기 자신이 무언가를 해낼 수 있다는 믿음이 없기 때문에 도전하지 못한다. 언제나 안정적인 틀 안에 머무르려 한다.
그렇다면 자존감이란 뭘까? 자아존중감이란 단어는 어떤 느낌을 표현하고 있는 걸까? 자아존중감은 ‘자아를 존중하냐?‘ 라는 말이다. 누가 나의 자아를 존중하냐는 말이겠는가? ‘나’다. 즉, ‘내가 나를 존중하는가?‘ 라는 뜻이다. 여기서 ’존중‘이라는 한자의 뜻은 ’누군가를 높고 귀하게 대하는가’ 라는 뜻인데 존중 할지 말지 알기 위해선 그 사람에 대한 평가가 있어야만 한다. 평가를 해서 꽤 괜찮은 존재이면 높게 대할 것이고 별로라는 판단이 들면 낮게 대할 것이다. 즉, ‘내가 나를 어떤 사람이라고 평가하느냐‘에 따라 존중하냐 못하냐가 결정된다. 내가 나를 꽤 괜찮고 멋있고 대단하고 특별하다고 평가하면 존중할 수 있으니 자존감이 높을 것이고, 내가 나를 별 볼일 없고 미래가 어두운 놈이라 판단하면 존중하지 못하여 자존감이 낮을 것이다. ‘내가 나를 어떤 사람이라고 평가하는가’를 자존감의 뜻이라고 볼 수 있다.
뜻을 좀 더 살펴보자.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려보라. 그 사람을 왜 사랑하나? 그 사람을 특별하고 남다르고 귀하다고 여기니까 사랑하지 않는가. 인간은 내가 소중하고 특별하다고 여기는 사람을 ‘사랑한다‘고 한다. 내가 나를 특별하고 귀하다고 여기면 이는 곧 ‘내가 나를 사랑한다’ 라는 말과 동의어라고 볼 수 있겠다. 사랑이라는 가치에는 믿음이라는 가치가 포함되어 있다. 믿지 못하고 의심이 가는 상대와 사랑에 빠질 수는 없다. 내가 나를 사랑한다는 건 내가 나를 믿는다는 것과 같다. 그리고 사랑한다는 건 대상을 ‘최고’라고 여긴다는 뜻이다. 즉, 자존감이 높다는 건 내가 나를 최고로 여기는 마음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석가는 ‘천상천하유아독존’ 이라 표현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예수도 마찬가지다. ‘나를 믿는 것은 곧 신을 믿는 것이다.‘ 라고 했다는데 이 말의 뜻은 자기 자신이 신이라는 뜻 아니겠는가. 여기서 신은 인간을 넘어선 가장 높은 존재이다. 석가도 예수도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해 자신만만했다. 이 자신만만한 상태가 곧 자존감이 높은 상태와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내가 나를 가치있고 특별하고 대단하다고 생각해야 자신만만할 수 있으니 말이다. 정리해보면 ’자존감이 높다 = 내가 나를 사랑한다 = 내가 나를 잘난 놈이라 생각한다 = 내가 나를 최고라고 생각한다 = 천상천하유아독존 = 내가 곧 신(=왕)이다 = 자신만만하다 = 내 자신에게 만족한다.’ 라고 볼 수 있다. 자신만만 이라는 단어는 ‘기세등등 = 쫄지않음 = 위축되지 않음’ 이라고 볼 수 있다. 기가 살아서 패배감이 없고 자기 자신을 승리자라고 생각하고 앞으로도 뭘 하든 자기 자신이 승리할 거라고 믿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상태는 자기 자신이 앞으로 잘 될 거라는 믿음, 자신의 미래가 창창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는 상태이다.
인생을 살면서 하고 싶은 일을 만났는데 그 일이 대단한 일이라서 누가봐도 어려운 일일 때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그 상황을 어떻게 대할까? ‘으악 어려운 일을 만났어. 역시 인생살이가 쉽진 않군. 근데 이걸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가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라고 고민하고 생각한다. 승리할 수밖에 없는 방법을 찾아내려 노력한다. 포기하지 않는다. 그런데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으악 어려운 일을 만났어. 역시 인생살이가 쉽지 않군. 포기하자. 하긴 나 같은 애가 이런 걸 해낼 능력이 있겠어? 내가 내 분수를 너무 모르고 있었어. 물론 이걸 해낸다면 너무 멋진 결과를 얻겠지만 이런 대단한 일은 다른 대단한 애들이나 할 수 있는 일이야.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그냥 포기하고 내 분수에 맞는 급이 낮은 다른 걸 찾자.’ 라고 생각하고 단념해버린다. 고민하지 않는다. 필승법을 찾아 헤매지 않는다. 노력하지 않는다. 이렇게 자존감은 ‘노력’,‘포기’와 연결되어 있다.
그렇다면 자존감의 높낮이를 결정하는 것은 무엇일까? 무엇이 자존감을 컨트롤 하는 걸까? 내가 나를 잘난 놈 아니면 못난 놈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상징과 상상이다.
그렇다면 상징이란 무엇일까? 정확하게 정의를 내릴 수는 없지만,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무언가’라고 하자. 상징은 인간을 상상(=생각)하게 만든다. 속뜻을 가지고 있기에 그렇다. 예를 들어, 처음 만난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이 ‘미국 명문대 졸업생’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 학벌이 상징이 되어 우리는 자연스레 어떠한 상상을 하게 된다. 이 사람의 집안이 부유할 것 같다는 상상 말이다. 다른 예를 들어볼까? 애플의 로고를 떠올려보자. 사과 모양의 로고를 보고 우리는 ‘혁신‘이라는 걸 상상하게 된다. 그래서 사과 로고가 붙어 있는 제품을 보면 그 제품이 혁신적인 제품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자존감과 상징의 관계를 살펴보자. 일단 자아존중감이라는 단어를 보자. 여기에서 ‘자아’는 ‘자아정체성’을 뜻한다. 이 자아정체성을 잘났다고 판단하면 자존감이 높을 것이고, 못났다고 판단하면 자존감이 낮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자아정체성의 자리에 내가 대단하고 잘났다고 평가하는 ’자아정체성’이 자리한다면 자연스레 이 자아정체성을 높게 평가할 수밖에 없게 되고 따라서 자아존중감이 높아질 수밖에 없고, 반대로 내가 못났다고 평가하는 ‘자아정체성’이 자리한다면 자연스레 이 자아정체성을 낮게 평가할 수밖에 없게 되니 자존감이 낮아질 수밖에 없지 않을까? 즉, 자존감의 높낮이는 ‘어떤 자아정체성을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수동적으로 결정되어진다.
그렇다면 자아정체성이란 무엇일까? ‘자아’는 ‘나’를 뜻하니까 ‘나의 정체성’이라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정체성’이라는 말은 ‘누구인가’ 라는 말과 같다고 볼 수 있다. ‘너 정체가 뭐냐?’ 라는 말은 ‘너는 누구냐?’ 라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즉, ‘자아정체성‘이라는 말은 ‘나는 누구인가?’ 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 이라는 식으로 나올 것이다. 즉, ‘자아정체성’이라는 말은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이다’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러이러한’에 무엇이 들어가느냐에 따라 자존감의 높낮이가 결정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러이러한’에 들어가는 것들은 무엇일까? 나는 누구일까? 나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상징과 상상이다. 지금 당장 나를 떠올려보라. 무엇이 떠오르는가. ‘대학간판, 얼굴의 생김새, 애인의 유무, 직업, 집안의 빈부’ 등이 떠오르지 않는가. 이것들은 전부 다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의미를 생각하게 만들고 무언갈 상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징들이 정체성을 형성한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려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이러한 상징을 통해 '나’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바라보고 판단하고 평가하고 해석한다. 자아정체성에 자리하고 있는 상징을 통해 나를 평가하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내려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평가결과에 의해 자연스레 자존감의 높낮이는 정해진다.
대학간판으로 구체적 예를 들어보자. 내가 지방대에 입학하게 되었다고 해보자. 나의 자아정체성에 지방대생이라는 상징이 자리하게 되는 것이다. 이 상징은 ‘패배자, 별 볼 일 없는 놈, 불성실, 똑똑하지 않은, 미래가 불확실한’ 이라는 상상을 만들어낸다. 그러면 인간은 이러한 상상을 곧 나 자신으로 여기게 된다. 그러면 이런 정체성을 가진 ‘나’를 멋있고 대단하고 잘났다고 여길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없을 것이다. 내가 나를 못났다고 여기게 될 것이다. 즉, ‘지방대생’이라는 상징이 자아정체성에 자리함으로써 그 상징을 통해 내가 나를 부정적으로 평가하게 되고 그 결과에 따라 자존감이 낮아지게 됐다고 볼 수 있다. 반대로 ‘명문대생’이라는 상징은 ‘나’라는 존재에게 ‘승리자, 우월한 놈, 똑똑한 놈, 기득권자’ 라는 가치를 상상하게 하고 나는 이런 가치로 나 자신을 평가하고 판단하게 된다. 이런 가치와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게 된다. 그러면 내가 나 자신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되고 내가 내 자신에게 만족하게 되고 스스로를 자랑스러워 한다. 즉, 자연스레 자존감이 높아진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볼까? 얼굴의 생김새 또한 좋은 예시다. 내가 ‘못생긴 얼굴’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생각해보자. 그러면 이 ‘못생긴 얼굴’은 역시나 어떤 상상을 하게 만든다. ‘못난 놈, 인기 없는 놈, 특별할 것 없는 놈, 지질이’ 같은 것들을 상상하게 하고 이런 상상은 역시 나의 정체성을 형성한다. 이러한 상상이 ‘나’라는 사람을 정의내리고 내가 누구인지 규정해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못난 놈, ······, 지질이’ 가 된다. 그리고 이런 정체성을 갖게 되면 당연히 내가 나를 못난 놈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내가 나를 못난 놈이라 생각한다는 건 자존감이 낮다는 말이다. 반대로 ‘잘생긴 얼굴’은 ‘나 자신’을 ‘잘난 놈, 특별한 놈, 누구든 좋아하는 놈, 세상의 중심’ 이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이렇게 인간은 나에게 붙어있는 상징을 통해 나를 평가하고 판단하고 해석한다. 긍정적 상징은 내 자신을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평가하게 하고 부정적 상상을 만드는 상징은 그 반대일 것이다. 그래서 내 자아정체성에 어떤 상징이 자리하고 있는가는 자존감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썩 괜찮은 상징을 가진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 긍정적 판단을 하게 되어 천상천하유아독존 하게 되며 그 결과로 본능을 따르게 된다. 본능을 따르는 사람은 공허하지 않다. 행복하다. 문제는 그 반대의 경우이다. 부정적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상징을 가진 사람은 쪼그라들어버린다. 겁먹은(=낮은 자존감을 가진) 사람은 순간순간 하고 싶은 것을 느껴도 그 느낌이 잘못됐다고 그때그때 스스로를 속여버린다. 솔직해지지 못하고 도덕적 판단을 하려 부단히 노력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하고 싶은 것(=미션)은 사라져 버리게 된다. 낮은 자존감은 꿈(=미션)을 없애버린다. 그리고 꿈이 없는 인간은 공허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공허하지 않고 행복해지기 위해서 나 자신을 못난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부정적 상징’이라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렇다면 나를 지배해 나를 쪼그라들게 하는 ‘부정적 상징’은 어떤 식으로 만들어지는 걸까?
나 자신을 못난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상징들을 관찰해보자. ‘못생긴 얼굴, 짧은 다리, 안 좋은 대학 간판, 가난’ 등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가치를 자세히 봐보자. ‘열등’하다고 여겨지는 가치이지 않은가. 이 말은 이것과는 반대로 우월한 가치가 있다는 말일 것이다. ‘잘생긴 얼굴, 긴 다리’ 처럼 말이다. 이처럼 못난이라는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상징은 열등한 가치들인데 열등한 가치는 ‘상대적’ 가치라고 할 수 있다. 상대적 가치라는 건 A와 B를 ‘비교’했을 때 나올 수 있는 가치이다. ‘비교’라는 것을 하지 않는다면 이 세상에 ‘못생겼다, 짧다, 안 좋다’라는 가치는 존재할 수 없다. 그렇다면 ‘비교’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비교하기 위해선 둘 이상의 사람이 존재해야 한다. 둘 이상의 사람이 함께 존재하는 것을 우리는 ‘사회’라고 한다. 그리고 사회는 끊임없이 A와 B를 비교한다. 정리해보자. 사회는 비교를 만들어내고 비교는 상대적 가치를 만들어내고 상대적 가치는 우열(優劣)을 만들어낸다. 사회는 ‘그냥 얼굴, 길이가 92CM인 다리, 그냥 대학교, 그냥 이 정도의 생활수준’을 ‘예쁜 얼굴과 못생긴 얼굴, 긴 다리와 짧은 다리, 명문대와 지방대, 부유와 가난’ 으로 만든다. 명문대 간판은 우월한 것이고 지방대 간판은 열등한 것이 될 것이다.
이렇게 사회는 비교를 통해 우열을 만든다. 그리고 이러한 우열은 상징이 되어 개개인에게 부여된다. 긍정적 상상을 하게 하는 상징이 자아정체성에 달라붙는 다면 좋은 일이지만 부정적 상상을 만드는 상징이 오면 이는 자존감을 떨어뜨리니 문제가 된다. 그리고 낮은 자존감은 인간을 공허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이런 부정적 상징을 우리는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상징이 가진 특성인 '연역성'에 대해 알아야 한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고양이를 신으로 모셨다고 한다. 이런 말도 안되는 일이 어떻게 일어났을까? 이집트에 사는 고양이는 천지창조를 하거나 인간의 삶을 좌지우지 하거나 인간의 소원을 들어주는 존재라서 이집트인들이 고양이를 신으로 여긴 걸까? 당연히 아니다. 고양이에게 신이라는 이름(=상징)을 붙이고 그에 따르는 상상을 믿었기에 고양이를 신으로 모셨을 것이리라. 즉, 대상물에서 상징이 생겨난 것이 아니라 상징이 먼저 있고 그 상징의 의미대로 대상물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상물은 상징에 지배당한다. 이를 ‘상징의 연역현상’이라 할 수 있다. 상징의 연역현상은 인간이 사고하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즉, 대상물의 본질에서 귀납적 과정을 거쳐 대상물을 파악하는 게 아니라 대상물에 붙어있는 상징에서 연역적 과정을 거쳐 대상물의 정체에 대해 파악하는 방식으로 인간은 사고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평화’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볼 때, 본래 존재로서의 평화가 아니라 평화라는 한글 글자를 통해 평화에 대해 생각해 낸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내가 나를 바라볼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나의 실체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게 아니라 자아정체성에 이미 달라붙어있는 ‘상징’에서 끄집어내어 그 의미대로 ‘나’라는 사람을 형성하고 만든다. 그리고 그게 '나' 라고 여긴다.
문제는 인간의 이러한 사고방식이 대상물의 실상에 대한 착각과 오해를 낳는다는 것이다.
인간은 무언가의 '있는 그대로'를 인식하기보다 그 무언가에 붙어 있는 상징을 통해 무언가의 정체에 대해 알아내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 과정이 상징에서 연역적으로 뽑아내는 것이니 대상물의 실상과 무관한 결과를 얻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른 식으로 이야기해보자면 뽑아낸다는 것은 상상한다는 뜻이다. 어떤 상징을 보면 우리는 자연스레 머릿속에서 상상을 한다. 그리고 그 상상이 곧 대상물의 정체라고 확신하게 되는데, 문제는 이 상상이 대상물의 아주 작은 일부분만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대상물의 실상과 전혀 상관이 없는 엉뚱한 것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상징이 자의대로 대상물의 본질을 정해버린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 때문에 인간은 대상물에 대해 착각과 오해를 하게 된다. 앞서 이야기했던 이집트의 고양이를 예로 들 수 있다.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는 모르겠지만 고양이에게 ‘신’이라는 이름이 붙어버린 순간부터 인간은 고양이를 신으로 판단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신’이라는 이름에서 끄집어낸 상상이 고양이의 정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를 보라. 대상물의 실상과 상징을 통한 상상이 일치하는가? 이 예시를 통해 고양이에게 붙은 상징이 오히려 고양이의 본질을 결정해버린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있다. 그리고 인간의 이러한 사고방식 때문에 이집트인들은 고양이의 정체에 대해 착각을 했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a는 b에게 좋아하는 마음을 고백했다. b의 집 앞 놀이터에서 말이다. b는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a는 알겠다고 대답하고 집에 돌아왔다. a는 기분이 안 좋았다. a가 고백하던 순간 b의 '표정'은 일그러졌고 미안한 듯한 '말투'로 생각할 시간을 달라며 집으로 얼른 들어가 버렸기 때문이다. a는 슬픔에 빠졌다. 2시간 뒤 b에게 연락이 왔다. 아까 너무 당황스러웠지만 사실 나도 널 좋아해왔다고 말이다.
우리의 자존감을 낮아지게 하는 것은 상징의 연역작용으로 생기는 ‘착각’이다. 정체성에 달라붙은 상징을 통해 정체를 파악하는 인간의 사고방식 때문에 발생하는 ‘착각’ 말이다. 그대는 지금 상징에 속고 있다. 그대의 정체성에 붙어 있는 부정적 상징이 그대를 못난 사람이라고 속이고 있다. 부정적 상징이 만들어내는 부정적 상상들은 그대의 실상, 실체, 본모습이 아니다. 부정적 상상은 ‘나’라는 사람의 극히 일부만을 보일 뿐이다. 아니 극히 일부도 아닌 전혀 아닌 정체를 마치 진실인 것처럼 보여주고 있을 수도 있다. 부정적인 상징에 속지 말자. 그렇다면 이러한 착각에 속지 않는 방법은 뭘까?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어떠한 상징을 마주했을 때 우리는 자연스레 어떠한 상상을 하는데 이러한 상상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상상이 진실인지 아닌지 의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불교철학의 ‘공즉시색’이라는 말을 아는가? 여기서 ‘공’은 마음을 비우라는 것이다. 여기서 ‘마음’은 고정관념, 편견 따위를 이야기한다. 선입견을 버리는 자가 결국 색(=쾌락)을 얻을 것이라는 말이다. 상징을 보고 떠오르는 고정관념을 버리면 쾌락을 얻는다는 말로 연결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협소한 사고방식을 버리고 모든 가능성을 여는 넓고 자유로운 사고를 가지도록 해야 한다.
상징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그대의 진짜 모습이 아니다. 부정적 상상에 속지 말아라. 착각에서 빠져 나와라. 그대가 못난 사람이라는 착각 말이다. 그대는 똑똑한 존재인데 멍청함을 의미하는 상징이 그대의 자아정체성에 붙어 있어서 지금 착각을 하고 있을 수 있다. 그대는 사실 꽤 괜찮은 존재인데 지금 상징에 그 실체가 가려져 그대가 속고 있다는 것을 그대는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반대로 자존감을 높이는 방법은 뭘까? 이번에는 반대로 ‘착각’에 머무는 것이다. 수능 시험이 끝나고 최고 대학에 합격한 친구들이 갑자기 자존감이 높아지는 모습을 본 적 있는가? 자아정체성에 ‘1등 대학 학생’ 이라는 상징이 새로 붙게 되었고 그 상징이 만드는 ‘최고’ 라는 상상이 곧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 또한 착각이다. 1등 대학에 입학하면 세상에서 최고인건가? 그렇다면 그 학생이 스티브 잡스, 정주영 회장보다 대단한가? 국, 영, 수 1등을 하는게 1등 기업을 만드는 일보다 대단한가? 아니지 않은가. 그렇기에 최고 대학에 입학했다고 자기 자신을 최고라고 생각하는 건 사실 ‘착각’이다. 하지만 이런 긍정적 상상은 우리의 자존감이 높아지게끔 한다. 그래서 이러한 착각에서는 벗어나지 않는 것이 좋다. 이러한 나에 대한 긍정적 상상에 내가 푹 빠져 있으면 자존감은 자연스레 높아진다. 이 상상이 진실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어떤 경로를 거쳤든 간에 나에게 긍정적 상징이 달라붙어 있고 이로 인해 내가 나 자신을 최고라고 여기게 된다면 자존감은 높아진다. 마치 스티브 잡스처럼 말이다. 그의 전기에 ‘현실 왜곡장’이라는 챕터가 있는데 이를 보면 스티브 잡스는 주변 사람들에게 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고 말하고 다녔다고 한다. 그건 ‘신’과 ‘골빈 자들’ 인데, 여기서 ‘신’에 속하는 사람들은 아인슈타인이나 간디처럼 ‘깨달은 사람들’을 말한다고 한다. 그런데 잡스 본인은 스스로 여기에 속한다고 말하고 다녔다고 한다. 10대 후반에 사귀었던 여자친구에게도 이런 말을 했다고 하니 애플이라는 회사를 세우기 전에도 자기 자신을 이런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스티브 잡스는 이러한 착각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이런 착각은 자존감을 높이는 착각이다. 심지어 애플이라는 회사를 세우기 전인 아무것도 없을 때도 이런 식의 믿음이 있었다고 하니 ‘완벽한 착각’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착각은 스티브 잡스의 자존감을 높여주어 잡스가 자기 자신의 직관을 따를 수 있게 해주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신’이라는 상징을 부여했더니 그 후 그 상징의 의미대로 그는 신이 되었다. 상징의 연역작용이 일어난 것이다.
착각에 빠져라. 최고대학 간판이 만들어내든 할아버지께서 지어주신 이름이 만들어내든 점(占)이 됐든 스티브 잡스처럼 상상을 통해 현실과 전혀 무관한 새로운 자아를 만들어 버리든 어떤 상징이 계기가 되었든 간에 자기 자신에 대한 긍정적 상상에 푹 빠져라. 자기 자신이 최고라는 착각에 빠져라.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 말이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기 자신에게 긍정적인 상상을 만들어 낼 긍정적인 상징이 없을 수도 있다. 그래서 상징과 상상력에 대해 우리는 좀 더 이야기를 해야한다.
예를 들어보자. 못난 얼굴이라는 상징 때문에 스스로를 못난 사람이라고 상상하고 있는가? 그건 오해다. 못난 얼굴을 타고났지만 잘난 사람들은 정말로 많다. 위인전에 실리는 위인까지 갈 필요도 없다. 한국에서만 둘러봐도 못난 얼굴을 가졌지만 멋지게 사는 사람들을 우리는 쉽게 볼 수 있다. 왜 이 사람들은 상징의 연역작용을 겪지 않은 걸까? 못난 얼굴을 가지고 있으니 그 상징의 의미에 따라 자존감이 낮아지고 무기력하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상상력’이 핵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못난 얼굴'이 문제가 아니고 못났다고 상상하고 있는 그대의 ‘상상’이 문제라는 것이다. 즉, 이 부분을 따져보자면 상징(=못난 얼굴)이 문제가 아니라 상징으로부터 만들어지는 ‘부정적 상상‘이 자존감을 낮게 만든다는 것이다. 사실 따져보면 나의 정체성에 어떤 상징이 존재하는가는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왜냐하면 어떠한 상징이 존재한다고 한들 그 상징을 보고 인간이 아무런 상상을 하지 않는다면 상징은 연역기능을 못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떠한 상징을 마주했을 때 그 상징을 ’어떻게 대하고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냐’ 이다. 인간이 어떠한 상징을 마주했을 때 부정적 상상을 하는지 아니면 긍정적 상상을 하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어떤 상상을 할지 내가 선택할 수 있다. 통제권이 나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다. 못난 얼굴을 보며 자기 자신은 못난 사람이고 이번 생은 찌질이로 살아야할 운명이라고 상상하는 사람과 얼굴이 못났기에 후천적 노력을 통해 오히려 더 멋지고 대단한 사람이 되라는 하늘의 뜻이라고 상상하는 사람 있다면 그 둘의 자존감의 차이는 어떠하겠는가? 그리고 그 둘의 삶도 많은 차이가 있지 않겠는가.
’태도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라는 말을 들어봤는가? 태도를 한글로 풀어서 설명하면 ’마음가짐‘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즉, 어떠한 마음을 가진다는 건데 여기서 ’마음‘은 ’생각‘을 뜻한다. ’생각‘은 곧 ’상상‘을 의미한다. 즉, 어떤 상상을 갖느냐(하느냐)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뜻일 것이다. 여기서 ’모든 것‘에는 자존감의 높낮이뿐만이 아니라 인생의 행복도 포함될 것이다.
이렇게 나 자신에 대한 긍정정 상징과 상상을 통해 자존감을 높이고 나 자신을 사랑하고 나 자신에게 만족하고 나 자신이 괜찮은 사람이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나르시시즘에 빠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긍정적 착각의 가장 큰 효과는 일상에 '활력'을 불어넣어 준다는 것이다. 나 자신에 대한 만족은 나의 ‘일상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긍정적 착각은 나의 앞 날이 밝고 앞으로의 내 인생이 잘 될거라는 믿음을 갖게 만든다. 그리고 이런 믿음은 밝고 에너지 넘치고 생기 있고 활기 있고 세상을 꼬인 것 없이 긍정적이게 바라보고 나의 미래에 긍정적인 것들을 그려내게 만든다. 그럼으로써 살아 숨 쉬는 것 자체만으로도 행복하게끔 만든다. 특별한 일을 하지 않아도 하루하루가 즐겁게 느껴지도록 한다. 인생과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도록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