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남자들아, 내가 늘 말하기를 ‘물질과 마음의 모든 인연과 마음에 끌려 다니는 것과 반연되는 모든 현상들은 오직 마음에 의해 나타나는 것’이라고 하였느니라. 너의 몸과 마음이 모두 오묘하게 밝고 참되며 정밀한 마음속에서 나타난 것이거늘, 너희들은 어찌하여 본래부터 오묘하고 원만하고 밝은 마음과 보배롭고 밝고 오묘한 성품을 잃어버린 채 혼미해진 것만을 인정하는가? 밝은 성품을 잘못 아는 어두움 때문에 허공이 되고 그 허공과 어두움 속에서 어두움이 뭉쳐져 물질이 되었나니, 그 물질의 부질없는 생각과 뒤섞여서 생각과 모양을 지닌 것을 몸이라 하고, 연을 쌓아 안에서 흔들리며 밖으로 달려 나가려는 혼미하고 어지러운 모양을 심성이라고 한다. 한 번 잘못 알아 마음이라 인정하고는 이 마음이 결코 내 몸속에 있는 줄로 착각하여 이 몸이나 밖에 있는 산과 강, 허공과 대지에 이르기까지 모두 오묘하게 밝고 참된 마음속의 물건임을 알지 못하나니, 비유하면 맑고 깨끗한 백 천의 큰 바다는 버리고, 오직 하나의 들뜬 물거품만을 바다 전체인 양 잘못 인식하여 눈앞의 조수를 보고 바다 전체를 다 알았다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곧 미혹한 가운데서도 배나 더 미혹한 사람이니 마치 내가 손을 드리운 것과 다름이 없다. 그래서 가엾은 사람이라고 하였느니라.“ 아난아, 저 중생들이 따로 지은 업장의 허망하게 보는 것 때문에 등불 주위에 둥근 그림자가 비록 대상의 물체처럼 나타나지만 마침내 보는 이의 눈병으로 생긴 것이니, 눈병은 곧 보는 주체의 피로 때문에 생긴 것이지 물질에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눈병을 보는 것도 마침내 보는 주체의 허물은 없느니라. 그러니 깨닫는 것과 보는 주체가 병든 것이지 본래부터 있어온 깨달음의 밝은 마음으로 대상인 물체를 깨닫는 것은 병들지 않았느니라. 지금 나와 너와 그리고 모든 세간과 열 가지 중생을 보는데 그것은 모두 보는 주체가 눈병을 앓고 있는 것이지 눈병을 보는 것은 아니다. 저 보는 주체의 정밀하고 참된 성품은 병들지 않았기 때문이니 보는 주체라고 이름하지 않느니라. 허깨비같이 허망한 것을 물질이라고 하지만 그 성품은 참으로 오묘한 깨달음의 밝은 본체이다. 이와 같이 오음. 육입. 십이처. 십팔계도 인연이 화합하여 허망하게 생기며, 인연이 흩어져서 허망하게 없어지나니, 진실로 생기고 없어지고 가고 오고 하는 것, 그 자체가 본래 여래장이어서 항상 머루르는 것이며 오묘하고 밝은 것이며 흔들리지 않으며 두루 원만하고 오묘하고 참답고 변함없는 성품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구나. 성품의 참되고 항상한 가운데에서는 가고 옴과 미혹되고 깨달음과 나고 죽음을 찾아도 찾을 수가 없느니라. 아난아, 이 헛보이는 꽃은 허공에서 생긴 것도 아니며 눈에서 나온 것도 아니니라.그러하다. 아난아, 만약 허공에서 생긴 것이라이미 허공에서 생겼으니 다시 허공으로 들어가할것인데, 가령 나오고 들어감이 있다면 그것은 허공이 아니며,허공이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자연 그 꽃 모양이 생겼다 없어졌다 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리니 마치 아난의 몸에 다른 아난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과 같느니라. 오음. 육입. 십이처. 십팔계가 모두 여래장이다.| 아난아, 너는 아직도 모든 허망한 물질인 허깨비같이 변화하는 모양이, 장소를 따라 생기며 장소를 따라 없어짐을 알지 못하는구나.허깨비같이 허망한 것을 물질이라고 하지만 그 성품은 참으로 오묘한 깨달음의 밝은 본체이다. 이와 같이 오음. 육입. 십이처. 십팔계도인연이 화합하여 허망하게 생기며, 인연이 흩어져서 허망하게 없어지나니,진실로 생기고 없어지고 가고 오고 하는 것, 그 자체가 본래 여래장이어서 항상 머루르는 것이며 오묘하고 밝은 것이며 흔들리지 않으며 두루 원만하고 오묘하고 참답고 변함없는 성품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구나. 성품의 참되고 항상한 가운데에서는 가고옴과 미혹되고 깨달음과 나고 죽음을 찾아도 찾을 수가 없느니라.아난아, 어찌하여 오음이 본래 여래장인 오묘한 진여의 성품이라고 하느냐? 아난아, 비유하면 마치 어떤 사람이 깨끗한 눈으로 맑게 개인 하늘을 볼 적엔 오직 맑은 하늘만 보일 뿐, 멀리 아무것도 없거늘 그 사람이 까닭 없이 눈동자를 움직이지 않고서 오래도록 똑바로 보다가 피로해지면 곧 허공에서 또 다른 헛꽃이 보이며 또다시 몹시 어지러워 아무 모양도 없는 듯하니 색음도 그러한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 아난아, 이 헛보이는 꽃은 허공에서 생긴 것도 아니며 눈에서 나온 것도 아니니라. 그러하다. 아난아, 만약 허공에서 생긴 것이라면 이미 허공에서 생겼으니 다시 허공으로 들어가야 할 것인데, 가령 나오고 들어감이 있다면 그것은 곧 허공이 아니며, 허공이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자연 그 꽃 모양이 생겼다 없어졌다 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리니 마치 아난의 몸에 다른 아난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과 같느니라. 만약 눈에서 나온 것이라면 이미 눈을 좇아 나왔으므로 다시 눈으로 들어가야 할 것이니이 헛꽃의 성품이 눈으로부터 나왔으므로 마땅히 보는 것이 있어야 할 것인데, 만약 보는 주체가 있다면 나갈 적에 이미 허공에 꽃이 있으므로 돌아올 적에는 마당히 눈을 보아야 할 것이며, 만약 보는 주체가 없다면 나갈 때에 이미 허공을 가렸으므로 돌아올 적에도 마땅히 눈을 가려야 할 것이다. 또 헛꽃을 볼 적에 눈에는 마땅히 가리는 것이 없을 것인데 어찌하여 맑은 허공을 볼 적에만 깨끗하고 밝은 눈이라고 하겠느냐? 그러므로 색음은 허망한 것이어서 본래 인연도 아니며 자연도 아닌 성품이라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아난아,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손발이 편안하고 모든 뼈마디가 적절히 조화되었을 때는홀연히 살아 있음을 잊은 듯하여 성품이 어긋나거나 순함이 없다가 그 사람이 까닭 없이 두 손바닥을 허공에서 서로 비비면 두 손바닥에서 허망하게 껄끄럽거나 미끄럽거나 차거나 뜨거운 여러 가지 현상이 생기는 것과 같으니, 수음도 역시 이와 같음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라. 아난아, 이 여러 가지 허깨비같이 허망한 접촉은 허공에서 온 것도 아니며 손바닥에서 나온 것도 아니니라. 그러하다. 아난아, 만약 허공에서 왔다면 이미 손바닥과 접촉하였는데 어찌 몸에는 접촉하지 않느냐? 마땅히 허공이 이를 선택하여 와서 접촉하지는 않은 것이다. 만약 손바닥으로부터 나왔다면 손바닥이 합해야만 비로서 나타나는 그런 현상은 없어야만 할 것이다. 또 손바닥에서 나왔으므로 합할 적에 손바닥이 느낀다면 뗄 적에는 접촉이 들어가서 팔과 손목과 골수들이 마땅히 들어갈 때 어떤 느낌이 있어야 할 것이니라. 반드시 느끼는 마음이 있어서 들어가고 나감을 안다면 자연 한 물건이 몸 가운데 오갈것인데 어찌 손바닥과 합해져야만 느끼는 것을 접촉이라고 하느냐? 그러므로 수음은 허망한 것이어서 본래 인연도 아니며 자연도 아닌 성품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지니라. 아난아,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신 매화 열매를 말하면 입 안에서 침이 생기고, 까마득한 벼랑에 있는 것을 상상하면 발바닥이 저려오는 듯하니, 상음(想陰)도 역시 이와 같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할지니라. 아난아, 이러한 매실 이야기는 매실에서 생긴 것도 아니며 입을 좇아 들어가는 것도 아니니라. 그러하다. 아난아, 만약 매실에서 생긴 것이라면 매실이 마땅히 스스로 말을 해야 할 것이거늘 어찌 사람이 말하기를 기다리며, 만약 입을 좇아 들어갔다면 마땅히 입으로 들어야 하리니 어찌 귀를 통해서만 듣느냐? 만약 유독 귀만이 듣는다면, 침은 어째서 귓속에서 나오지 않느냐? 높은 언덕에 서 있는 것을 생각하는 것도 매실을 이야기하는 것과 같느니라. 그러므로 상음은 허망한 것이어서 본래 인연도 아니며 자연도 아닌 성품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지니라. 아난아, 비유하면 마치 급히 흐르는 물결이 서로 연속되어 앞과 뒤가 차례를 뛰어넘지 않는 것과 같으니 행음도 역시 이와 같음을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 아난아, 이와 같이 흐르는 성품이 허공으로 인하여 생긴 것이 아니며, 물로 인하여 있는 것도 아니며, 또한 물의 성품도 아니며, 허공과 물을 떠나서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하다. 아난아, 만약 허공으로 인하여 생긴 것이라면 곧 시방의 끝없는 흐름이 생겨서 세계가 자연히 모두 물에 잠겨야 할 것이며, 만약 물로 인해 있는 것이라면 이 급히 흐르는 물의 성품은 마땅히 물이 아니어야 할 것이다. 능유(能有, 물)와 소유(所有, 급히 흐름)의 모양이 지금 당연히 앞에 나타나야 할 것이며, 만약 곧 물의 성품이라면 맑을 때에는 마땅히 물의 본체가 아닐 것이며, 만약 허공과 물을 떠나서 있는 것이라면 허공은 밖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며, 물 밖에는 흐름이 없어야 할 것이니라. 그러므로 행음은 허망한 것이어 본래 인연도 아니며 자연도 아닌 성품임을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 아난아, 비유하면 마치 어떤 사람이 빈가병의 두 구멍을 막고 가운데는 허공을 가득히 채워 가지고 천 리나 되는 먼 다른 나라에 가서 사용하는 것과 같으니, 식음(識陰)도 역시 이와 같음을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 아난아, 이러한 허공은 저쪽에서 온 것도 아니며 이쪽에서 들어간 것도 아니니라. 그러하니라. 아난아, 만약 저쪽에서 온 것이라면 본래 병 가운데에 이미 허공을 담아 가지고 갔으므로 본래의 병이 있던 곳에는 마땅히 허공이 조금 줄었어야 할 것이며, 만약 이곳으로 들어갔다면 구멍을 열고 병을 기울일 적에는 마땅히 허공이 나오는 것을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식음은 허망한 것이어서 본래 인연도 아니며 자연도 아닌 성품이라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 "또 아난아, 어찌하여 육입이 본래 여래장인 오묘한 진여의 성품이라고 하느냐? 아난아,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눈동자를 움직이지 않고 오래도록 똑바로 보다가 피로해졌을 때, 눈과 피로는 다 같이 보리가 똑바로 보다가 피로해져서 생긴 현상이니라. 밝음과 어두움의 두 가지 허망한 경계를 반연하여 보는 주체가 생겨 그 중간에 있으면서 이 물질의 현상[塵象]을 흡수하여 들이는 것을 '보고 깨닫는 성품[見覺性]'이라고 하나니, 이 보는 주체가 밝음과 어두움의 두 가지 대상을 벗어나면 마침내 본다는 그 자체도 없어질 것이다. 이와 같나니 아난아, 저 보아 깨닫는 성품은 밝고 어두운 데서 온 것이 아니고 눈에서 생긴 것도 아니며 허공에서 나온 것도 아님을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 왜냐하면 만약 밝은 데서 왔다면 어두워질 때 곧 따라 없어져야 하리니 마땅히 어두움을 보지 못해야 할 것이고, 만약 어두운 데에서 왔다면 밝아질 때 곧 따라 없어져야 하리니 마땅히 밝음을 보지 못해야 할 것이며, 만약 눈에서 생긴 것이라면 반드시 밝음과 어두움이 없으리니 이렇게 보는 주체의 정기는 본래 자성도 없어야 할 것이요, 만약 허공에서 나온 것이라면 앞에 나타난 물질의 현상을 보았으니 돌아갈 때에 눈을 보아야 할 것이며, 또 허공이 스스로 볼 것이니 너의 입(入)과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그러므로 '눈으로 보아 받아들이는 것[眼入]'은 허망한 것이어서 본래 인연도 아니며 자연도 아닌 성품이라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 아난아, 마치 어떤 사람이 두 손가락으로 갑자기 귀를 막아서 그것이 오래되어 피로해지면 머리 속에서 또 다른 허망한 소리가 들릴 것이니 귀와 피로는 다 같이 보리가 똑바로 보다가 피로해져서 생긴 현상이니라. 움직이는 것과 고요한 것, 이 두 가지 허망한 대상으로 인하여 듣는 주체가 생겨 중간에 있으면서 이 소리를 흡수하여 들이는 것을 '들어 깨닫는 성품'이라고 하니, 이 듣는 주체가 움직임과 고요함의 두 가지 허망한 대상을 벗어나면 마침내 듣는다는 그 자체도 없어질 것이다. 아난아, 이 들어 깨닫는 성품은 움직임과 고요함에서 온 것이 아니고 귀에서 생긴 것도 아니며 허공에서 나온 것도 아니라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 왜냐하면 만약 고요한 데서 왔다면 움직일 때엔 곧 따라 없어져야 하리니 마땅히 움직임을 듣지 못해야 할 것이고, 만약 움직임에서 왔다면 고요해질 때엔 곧 따라 없어져야 하리니 마땅히 고요함을 듣지 못해야 할 것이요, 만약 귀에서 생긴 것이라면 반드시 움직임과 고요함이 없으면 이와 같이 듣는 주체의 본래 자성은 없어야 할 것이요, 만약 허공을 좇아 나온 것이라면 들음이 있어 자성을 이룰 것이니 곧 허공도 아닐 것이며 또한 허공이 스스로 들을 것이니 너의 입(入)과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그러므로 '귀로 들어 받아들이는 것[耳入]'은 허망한 것이어서 본래 인연도 아니며 자연도 아닌 성품이라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 아난아, 어떤 사람이 코로 숨을 급하게 들이켜 오래되면 피로가 생겨서 콧속에 찬 촉감이 있음을 느낄 것이니, 그 촉감으로 인하여 트이고 막힘과 허하고 실한 것을 분별하며, 이와 같이 모든 향기와 구린내까지도 맡는 것이니 코와 피로는 다 같이 보다가 똑바로 보다가 피로해져서 생긴 현상이니라. 트인 것과 막힌 것, 이 두 가지 허망한 대상으로 인하여 냄새 맡음이 생겨 중간에 있으면서 모든 냄새를 흡수하여 들이는 것을 '맡아 깨닫는 성품'이라고 하나니, 저 냄새를 맡는 주체가 트임과 막힘의 두 가지 허망한 대상을 여의면 마침내 냄새라는 그 자체도 없어질 것이다. 아난아, 이 맡아 깨닫는 성품은 트이고 막힌 데서 온 것이 아니며 코에서 생긴 것도 아니고 허공에서 나온 것도 아니라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 왜냐하면 만약 트인 데서 왔다면 막힐 때엔 곧 따라서 없어져야 하리니 마땅히 막힘을 느끼지 못해야 할 것이며, 만일 막힌 데서 왔다면 트일 때엔 곧 따라서 없어져야 하리니 마땅히 트임을 느끼지 못해야 할 것이고, 만약 코에서 생긴 것이라면 반드시 트임과 막힘이 없으면 그와 같이 맡는 주체의 본래 자성이 없어야 할 것이고, 만약 허공에서 나온 것이라면 냄새를 맡는 주체가 도리어 네 코를 맡아야 할 것이며, 또 허공 스스로가 냄새를 맡을 것이니 너의 입(入)과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그러므로 '코로 맡아 받아들이는 것[鼻入]'은 허망한 것이어서 본래 인연도 아니며 자연도 아닌 성품이라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 아난아, 어떤 사람이 혀로 입술을 핥아서 오래오래 핥다가 피로가 생겼을 때 그 사람이 만약 병이 있으면 쓴맛을 느낄 것이고, 병이 없는 사람이면 약간 단맛을 느낄 것이다. 이 달고 쓴 것으로 말미암아 혀의 의식이 드러날 것이고, 핥지 않을 적에는 담담한 성품이 항상 있으리니 혀와 피로는 다 같이 보리가 똑바로 보다가 피로해져서 생긴 현상이니라. 달고 쓴맛과 담담한 맛, 이 두 가지 허망한 대상으로 인하여 맛을 봄이 생겨 그것이 중간에 있으면서 맛을 흡수하여 들이는 것을 '맛보아 깨닫는 성품'이라고 하니, 저 맛을 보는 성품이 달고 쓴맛과 담담한 맛, 두 가지 허망한 대상을 여의면 마침내 맛이라는 그 자체도 없어질 것이다. 아난아, 이 쓴맛과 담담한 맛을 맛보아 아는 것은 달거나 쓴데서 온 것이 아니며 담담한 맛에서 온 것도 아니고 혀에서 생긴 것도 아니며 허공에서 나온 것도 아니라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 왜냐하면 만약 달고 쓴 데서 왔다면 담담할 때엔 곧 따라 없어져야 하리니 어떻게 담담한 맛을 알며, 만약 담담한 데서 왔다면 달거나 쓸 때엔 곧 따라 없어져야 하리니 어떻게 달고 쓴 맛을 알며, 만약 혀에서 생긴 것이라면 반드시 달거나 담담하거나 쓴맛이 없으면 이렇게 맛보는 주체의 정기가 본래 자성이 없어야 할 것이며, 만약 허공에서 나온 것이라면 허공이 스스로 맛볼 것이니 네 입이 아는 것이 아니며, 또 허공 스스로가 아는 것이리니 그것이 너의 입(入)과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그러므로 '혀로 맛보아 받아들이는 것[舌入]'은 허망한 것이어서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닌 성품이라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 아난아, 어떤 사람이 찬 손으로 따뜻한 손을 잡았을 적에 만약 찬 기운이 많으면 따뜻한 손이 차가워질 것이고, 따뜻한 기운이 많으면 찬 손이 따뜻해지리니, 이와 같이 합했을 때 깨닫는 촉감은 서로 떨어져도 느낌이 남아 있나니 교섭하는 세력이 만일 이루어진다면 접촉으로 인한 피로 때문일 것이니 몸과 피로는 다 같이 보리가 똑바로 보다가 피로해져서 생긴 현상이니라. 떨어지고 합하는 두 가지 허망한 대상으로 인하여 촉감이 생겨 중간에 있으면서 이 촉감을 흡수하여 들이는 것을 '느껴 깨닫는 성품'이라고 하니, 이 느끼는 본체가 떨어지고 합하는 것과 배반하고 따르는 두 가지 허망한 대상을 여의면 마침내 느끼는 그 자체도 없어질 것이다. 이와 같으니 아난아, 이 느껴 깨닫는 성품은 본래 떨어지거나 합해진 데서 온 것이 아니고 어긋나거나 따르는 데서 온 것도 아니며 몸에서 생긴 것도 아니고 허공에서 나온 것도 아니라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 왜냐하면 만약 합하는 데서 온 것이라면 떨어질 때엔 곧 따라서 없어져야 하리니 어떻게 떨어짐을 알겠으며, 어긋남과 따르는 두 가지 현상에 대해서도 역시 그러하니라. 만약 몸에서 생긴 것이라면 반드시 떨어짐과 합함과 어긋남과 따르는 네 가지 현상이 없으면 이와 같이 느끼는 정기가 본래 자성이 없을 것이며, 만약 허공에서 나온 것이라면 허공이 스스로 느끼는 것이리니 너의 입(入)과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그러므로 '몸의 접촉으로 받아들이는 것[身入]'은 허망한 것이어서 본래 인연도 아니요, 자연도 아닌 성품이라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 아난아, 마치 어떤 사람이 피로해졌을 때 실컷 자고는 문득 깨어서 대상 물질을 보면 기억하고, 그 기억이 사라질 때 잃어버린다고 한다면 그것이 곧 생겨나고 머무르고 변하고 없어지는 뒤바뀐 현상이니, 습관을 흡수하여 들여서 그것이 가운데로 돌아가되 서로 차례를 어기지 아니함을 '생각으로 인식하는 근원'이라고 하나니 생각과 피로는 모두다 보리가 똑바로 보다가 피로해져서 생긴 현상이니라. 생기고 없어지는 두 가지 허망한 대상으로 인하여 모아진 앎이 중간에 있으면서 내진(內塵)을 흡수해 들여서 보고 들음이 다섯 가지 감각기관의 흐름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거꾸로 흐르는 것을 '깨달아 아는 성품'이라고 하니, 이 성품이 깨고 잠자는 것과 생기거나 없어지는 두 가지 허망한 대상을 벗어나면 마침내 그 자체도 없어질 것이다. 이와 같이 아난아, 이 알아 깨닫는 성품은 깨거나 잠자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고, 생기거나 없어지는 데서 오는 것도 아니며, 몸에서 생기는 것도 아니고 허공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 왜냐하면 만약 깨어 있는 데서 온 것이라면 잠잘 때엔 곧 따라서 없어져야 하리니 누가 잠을 잘 것이며, 만약 생기는 데서 온 것이라면 없어질 때엔 곧 따라서 없어져야 하리니 무엇이 없어짐을 느끼겠으며, 없어지는 데서 온 것이라면 생기면 곧 따라서 없어져야 하리니 그 무엇이 깨고 잠자고 생기고 없어지는 두 가지 현상은 몸의 개합(開合)을 따르는 것이니 이 두가지 실체를 여의면 저 깨달아 아는 것은 허공의 헛꽃과 같아서 마침내 그 성품이 없어지리라. 만약 허공에서 나온 것이라면 허공 스스로가 아는 것이거니 너의 입(入)과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그러므로 '뜻으로 생각하여 받아들이는 것[意入]'은 허망한 것이어서 본래 인연도 아니며 자연도 아닌 성품이라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 십이처가 본래 진여 또 아난아, 어찌하여 십이처가 본래 여래장인 오묘한 진여의 성품이라고 하느냐? 아난아, 너는 또 기타숲과 모든 샘물과 못들을 보아라. 네 생각은 어떠하냐? 이런 것들은 물질의 모양이 눈으로 보는 작용을 생기게 한다고 생각하느냐, 눈이 물질의 모양을 생겨나게 한다고 생각하느냐? 아난아, 만약 눈이 물질의 모양을 생기게 하는 것이라면 허공을 볼 적에는 물질의 모양이 아니므로 물질의 성품이 마땅히 사라질 것이다. 물질의 성품이 사라지면 나타나는 모든 것이 없어지리니, 물질의 모양이 이미 없어지면 누가 허공의 본질을 밝히겠느냐? 허공도 또한 그러하니라. 만약 물질이 눈으로 보는 것을 생기게 하는 것이라면 허공을 볼 적에 허공은 물질의 모양이 아니므로 눈으로 보는 것도 곧 사라져 버리리니 사라져 없어지면 모두가 없어질 터인데 무엇이 허공인지 물질인지를 밝히겠느냐? 그러므로 보는 주체와 물체와 허공이 모두 처소가 없으므로 보는 주체의 처소와 색질의 처소, 이 두 가지는 허망한 것이어서 본래 인연도 아니며 자연도 아닌 성품이라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 아난아, 너는 다시 이 기타원 가운데서 밥이 마련되면 북을 치고, 대중을 모을 적엔 종을 쳐서, 그 북과 종소리가 앞뒤로 서로 연속됨을 들어 보아라. 어떤 생각이 드느냐? 그런 것들은 소리가 귓가로 온다고 생각되느냐? 아니면 귀가 소리 있는 곳으로 간다고 생각되느냐? 아난아, 만약 소리가 귓가로 오는 것이라면 내가 시라벌성에서 밥을 구할 적엔 기타림에는 내가 없는 것처럼, 그 소리가 반드시 아난의 귓가에 왔으면 목련과 가섭은 당연히 함께 듣지 못해야 할 것인데 어찌 그 가운데 천이백오십 명의 사문들이 한꺼번에 종소리를 듣고 식당으로 모두 모이느냐? 만약 네 귀가 소리나는 곳으로 갔다면 내가 기타림으로 돌아왔을 적에는 시라벌성엔 내가 없는 것과 같아서 네가 북소리를 들을 적엔 그 귀가 이미 북 치는 곳으로 갔을 터이니종소리가 함께 나더라도 마땅히 종소리는 듣지 못해야 할 것이거늘 더구나 어떻게 그 가운데 코끼리. 말. 소. 염소 등 갖가지 소리를 한꺼번에 들을 수 있다더냐? 또 만약 오고 감이 없다 한들 어찌 들음마저도 없겠느냐? 그러므로 듣는 주체와 소리는 모두 처소가 없으므로 듣는 주체와 소리나는 곳, 이 두 처소는 허망한 것이어서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닌 성품이라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할지니라. 아난아, 너는 또 이 향로의 전단향 냄새를 맡아보아라. 그 향을 만약 한 개만 태워도 시라벌성 사십 리 안에서 동시에 그 향기를 맡을 것이다. 네 생각엔 어떠하냐? 그 향기는 전단향나무에서 나온다고 생각하느냐, 너의 코에서 생겼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면 허공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아난아, 만일 이 향기가 네 코에서 생긴 것이라면 마땅히 코에서 나와야 할 것인데, 코가 전단이 아니거늘 어떻게 콧속에 전단의 향기가 있다고 하겠느냐? 또 네가 향기를 맡는다고 한다면 마땅히 코로 들어가야 할 것이니 콧속에서 나오는 향기를 맡는다는 말은 옳지 못하느니라. 만약 허공에서 생긴 것이라면 허공의 성품은 항상한 것이므로 향기도 항상 있어야 할 것인데 어째서 향로에다 이 나무를 태워야만 향기가 생긴다더냐? 만약 나무에서 생긴 것이라면 그 향기의 본질은 태움으로 인하여 연기가 되었으므로 코로 냄새를 맡을 적에는 마땅히 연기가 코로 들어가야 할 것인데 그 연기가 공중으로 올라가 멀리 퍼지기도 전에 사십 리 안에서 어떻게 그 냄새를 맡게 되느냐? 그러므로 향기와 코와 냄새를 맡는 것이 모두 처소가 없어서 냄새 맡는 주체와 향기 나는 곳, 이 두 가지는 허망한 것이므로 본래 인연도 아니며 자연도 아닌 성품이라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 아난아, 네가 매일 두 때씩 대중 가운데서 발우를 가지고서 이따금 수락이나 제호를 만나게 되면 최고의 맛이라고 하나니 네 생각은 어떠하냐? 그 맛은 허공에서 생긴다고 생각하느냐, 혀에서 생긴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면 음식에서 생긴다고 생각하느냐? 아난아, 만약 이 맛이 너의 혀에서 나온 것이라면 너의 입속에는 혀가 하나뿐이니 그 혀는 조금 전에 이미 생소 맛이 되었으므로 흑석밀을 먹게 되더라도 마땅히 달라지지 않아야 할 것이다. 만약 달라지지 않는다면 맛을 안다고 할 수 없고 만약 달라진다면 혀가 여러 개가 아닌데 어떻게 여러 가지 맛을 한 개의 혀로써 알겠느냐? 만약 음식에서 생기는 것이라면 음식은 의식이 있는 것이 아닌데 어떻게 스스로 알겠느냐? 또 음식이 스스로 안다면 곧 다른 사람이 먹는 것과 같을 것이니 너와 무슨 관계가 있기에 맛을 안다고 하느냐? 만약 허공에서 생기는 것이라면 네가 허공을 씹어보아라. 무슨 맛이더냐? 만약 허공이 짠맛이라면 이미 허공이 너의 혀를 짜게 하였으므로 네 얼굴도 짜야 하리니 그렇다면 이 세계의 사람들은 바닷속의 고기와 같아서늘 짠 것을 받아왔으므로 담담함을 알지 못할 것이다. 만약 담담함을 알지 못한다면 역시 짠 것도 느끼지 못해서 반드시 아는 것이 없을 것이니 어떻게 맛을 안다고 하겠느냐? 그러므로 맛과 혀와 맛을 보는 주체는 모두 처소가 없으니 맛보는 주체와 맛, 이 두 가지는 허망한 것이어서 본래 인연도 아니며 자연도 아닌 성품이라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 아난아, 네가 새벽마다 손으로 늘 머리를 만지나니, 그때 어떤 생각이 들더냐? 만져서 느낌이 생길 때 어느 것이 감촉을 느낀다고 생각하느냐? 느끼는 주체가 손에 있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면 머리에 있다고 생각하느냐? 만약 손에 있는 것이라면 머리는 느낌이 없어야 하리니 어떻게 감촉을 느낀다더냐? 만약 머리에 있을 것 같으면 손은 쓸모가 없으리니 어떻게 접촉한다고 하겠느냐? 만약 각각 있는 것이라면 너는 마땅히 두 몸뚱이가 있어야 할 것이다. 만약 머리와 손이 한 번의 접촉으로 생기는 것이라면 곧 손과 머리가 한 몸이 되어야 할 것이고, 만약 한 몸이라면 감촉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며, 만약 두 몸이라면 감촉이 어디에 있단 말이냐? 접촉하는 주체에 있다면 접촉의 대상인 물질에는 없어야 하고, 접촉의 대상인 물질에 있다면 접촉하는 주체에는 없어야 하리니 그렇다고 허공이 너와 더불어 감촉을 이루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촉감을 느끼는 주체와 몸은 모두가 처소가 없고 몸과 감촉, 이 두 가지는 허망한 것이라서 본래 인연도 아니며 자연도 아닌 성품이라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 아난아, 네가 늘 생각 속에 반연하는 착한 성품과 악한 성품, 그리고 착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닌 성품, 이 세 가지 성품이 법을 생성하나니, 이 법은 마음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냐, 아니면 마음을 떠나서 별도로 처소가 있는 것이냐? 아난아, 만약 마음에 의한 것이라면 법은 대상이 아니므로 마음으로 반연하는 것이 아닐 터이니 어떻게 처소를 이루겠느냐? 만약 마음을 떠나서 따로 처소가 있는 것이라면 법의 자성이 앎이 있느냐, 없느냐? 만약 앎이 있다면 마음이라고 이름을 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너와는 상관 없을 것이고, 그렇다고 대상이 아니므로 다른 사람의 마음과 같을 것이니 너에 의한 것이라거나, 마음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면 어찌하여 네 마음이 둘이 되겠느냐? 만약 앎이 없다면 그 대상은 빛. 소리. 향기. 맛, 그리고 여의거나 합해지는 것과 차고 따뜻한 것과 허공의 모양도 아닐 것이니 어디에 있다고 하겠느냐? 지금 물질과 허공에 모두 표시할 수 없으니 마땅히 인간은 또한 허공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라. 마음이 반연하는 것이 아니면 법의 처소가 어디로부터 이루어지겠느냐? 그러므로 법과 마음이 모두 처소가 없어서 마음과 법, 이 두 가지는 허망한 것이라 본래 인연도 아니며 자연도 아닌 성품이라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
그러므로 뜻과 법진이 인연이 되어서 뜻이 인식하는 경계가 생긴다고 하는 세 가지는 모두 허무한 것으로 뜻과 법진 그리고 뜻의 경계, 이 세 가지는 본래 인연이 아니며 자연도 아닌 성품이라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 여래장 가운데 성품이 물질인 참다운 허공과 성품이 허공인 참다운 물질이 깨끗하고 본래의 자연 그대로여서 이 우주에 두루 있으면서 중생의 마음을 따르고 아는 바 정도에 따라 업대로 나타나거늘 세간 사람들은 지식이 없어서 인연과 자연의 성품이라고 의혹하고 있으니 이는 다 식심(識心)으로 분별하고 헤아리는 것이므로, 다만 말만 있을 뿐이지 진실한 이치는 조금도 없는 것이니 아난아, 만약 불의 성품이 화합으로 인하여 생긴 것이라면 저 사람이 손으로 거울을 잡고 햇빛에서 불을 구할 적에 그 불은 거울 속에서 나오는 것이냐, 쑥에서 나오는 것이냐, 아니면 해에서 나오는 것이냐? 거울은 손에 들려 있고 햇빛은 하늘에서 오며 쑥은 땅에서 난 것인데 불은 어느 곳으로부터 여기에 온 것이냐? 해와 거울의 거리가 멀어서 화합한 것이 아니니 그렇다고 불이 나온 데도 없이 저절로 생긴 것도 아니니라. 너는 오히려 알지 못하는구나. 여래장 속에 성품이 불인 참다운 허공과 성품이 허공인 참다운 불이 깨끗하고 본래 자연 그대로여서 우주에 두루 퍼져 있으면서 중생의 마음을 따르고 아는 바 정도에 따라 응하는 것이다. 아난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세상 사람들이 한 곳에서 거울을 들면 한 곳에 불이 생기고 우주에서 골고루 들고 있으면 온 세상에 가득하게 일어날 것이다. 온 세상에 골고루 생기는데 어찌 장소가 따로 있겠느냐? 업을 따라 나타나는 것이거늘 세상 사람들은 지혜가 없어서 인연과 또는 자연의 성품으로 의혹하고 있으니, 이는 다 의식하는 마음으로 분별하고 생각하여 헤아리는 것이다. 다만 말로만 있다고 할 뿐 진실한 이치는 전혀 없느니라. 아난아, 물의 성품은 일정하지 않아서 흐르고 그치는 것이 항상함이 없느니라. 여래장 가운데 성품이 물인 참다운 허공과 성품이 허공인 참다운 물이 깨끗한 본래의 자연 그대로여서 우주에 두루하여 있으면서 중생의 마음을 따르고 아는 바 정도에 따라 응하나니 한 곳에서 구슬을 잡으면 한 곳에서 물이 나오고 온 우주에서 두루 잡으면 우주에 가득하게 생긴다. 세상에 가득하게 생기는데 어찌 장소가 따로 있겠느냐? 업을 따라 나타나는 것이거늘 세상 사람들은 지혜가 없어서 인연과 또는 자연의 성품으로 의혹하고 있으니 이는 다 의식하는 마음으로 분별하고 헤아리는 것이다. 다만 말로만 있다고 할 뿐 실제 의미는 전혀 없는 것이다. 만약 이 허공의 성품이 원만하고 두루하여 본래 동요하지 않는 것이라면 마땅히 알아야 한다. 앞에서 밝힌 흙. 물. 불. 바람과 함께 균등하게 '다섯 가지 원소[五大]'라고 하리니 그 성품은 참되고 원융하여 모두가 여래장이므로 본래 나고 없어짐이 없느니라. 아난아, 너의 마음이 혼미해서 네 가지 원소가 본래 여래장임을 깨닫지 못하는구나. 허공을 살펴보아라. 나오느냐, 들어가느냐, 나오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냐? 만약 하나의 우물을 파서 공간이 생기면 허공이 한 우물만큼 생기는 것과 같아서 시방의 허공도 그와 같이 시방에 원만한 것이거니 어찌 방향과 장소가 따로 있겠느냐? 만약 하나의 우물을 파서 공간이 생기면 허공이 한 우물만큼 생기는 것과 같아서 시방의 허공도 그와 같이 시방에 원만한 것이거니 어찌 방향과 장소가 따로 있겠느냐? 변두리가 없고 동요하지 않는 허공과, 동요하는 흙.물.불. 바람을 아울러 여섯 가지 원소라고 이름하나니, 그 성품이 참되고 원융하여 모두가 여래장이므로 본래 생기고 없어짐이 없느니라. 너는 안타깝게도 네가 보고 듣고 깨달아 아는 것이 본래 여래장임을 알지 못하나니 너는 마땅히 이 보고 듣고 깨달아 아는 것을 관찰해 보아라. 생기더냐, 없어지더냐, 같더냐, 다르더냐, 생기는 것도 없어지는 것도 아니냐, 같은 것도 다른 것도 아니냐? 너는 일찍 알지 못하는구나. 여래장 가운데 보는 성품으로서 밝게 깨닫는 것과 깨닫는 정기로서 분명하게 보는 것은 깨끗하고 본래 자연 그대로 여서 우주에 두루하여 있으면서 중생의 마음을 따르고, 아는 바 정도에 따라 응하나니, 이는 마치 하나의 보는 것이 우주를 두루 보는 것처럼 듣는 것, 냄새 맡는 것, 맛 보는 것, 접촉하는 것, 그리고 깨달아 아는 것이 밝고 오묘한 덕으로 우주에 두루하고 시방 허공에 원만한 것과 같으니 거기에 어찌 장소가 따로 있겠느냐? 또한 그것은 업을 따라 나타나는 것이거늘 세상 사람들은 지혜가 없어서 인연과 자연의 성품으로 의혹하나니 이는 다 의식하는 마음으로 분별하고 헤아리는 것으로서 다만 말로만 있다고 할 뿐 진실한 이치는 전혀 없느니라. 아난아, 의식의 성품은 근원이 없어서 여섯 가지 감각 기관과 그 대상으로 인하여 허망하게 생기느니라.
대중들을 두루 살필 적에 눈으로써 차례로 둘러보는데 그 눈이 둘러보는 것은 다만 맑은 거울과 같아서 별달리 분석할 것이 없겠지만 너의 의식은 속에서 차례로 지목하기를 '이는 문수이고 부루나이며, 이는 목건련이고 수보리이며, 이는 사리불이다'라고 할 것이니라. 그렇게 인식하는 의식은 보는 것에서 생기는 것이냐, 대상에서 생기는 것이냐,허공에서 생기는 것이냐, 까닭 없이 돌연히 나오는 것이냐? 아난아, 만약 너의 의식의 성품이 보는 가운데에서 생긴 다면 밝고 어두운 것과 물질과 허공은 없어야 할 것이다. 이 네 가지가 반드시 없으면 따라서 보는 것도 없어지리니 보는 성품도 오히려 없을 터인데, 무엇으로부터 의식이 발생하겠느냐? 만약 너의 의식하는 성품이 대상 속에서 생기고, 보는 것을 따라 생기는 것이 아니라면 이미 밝음도 보지 못하며 어두움도 보지 못해서 밝고 어두움을 보지 못하면 곧 허공과 물질도 없으리니 그 대상도 오히려 없을 터인데 의식이 무엇으로부터 발생하겠느냐? 만약 허공에서 생겼다면 대상도 아니고 보는 것도 아닐 터이니 보는 것이 아니라면 분별함이 없어서 자연 밝음도 어두움도 물질도 허공도 알지 못할 것이며, 대상이 아니라면 반연할 것이 없어져서 보고 듣고 깨닫고 알고 하는 것이 편안하게 성립할 곳이 없을 것이다. 대상도 아니고 보는 것도 아닌 데에 있다고 한다면 허공은 없는 것과 같을 것이요,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물질의 형상과는 같지 않을 것이니 비록 너의 의식이 발생한다 한들 무엇을 분별하겠느냐? 만약 원인도 없이 돌연히 나온 것이라면 어찌하여 한낮에는 밝은 달을 인식하지 못하느냐? 너는 다시 세밀하고 자세하게 살피고 관찰하라. 보는 것은 네 눈에 의지하였고 대상은 앞에 나타나는 경계를 미루어 말하는 것이니, 형상할 수 있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고 형상할 수 없는 것은 없는 것이니 이와 같은 의식의 인연이 무엇으로 인하여 생기느냐? 의식은 움직이고 보는 것은 맑아서 서로 화합(和合)할 수 없으니 듣고 냄새 맡고 깨닫고 아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의식의 인연이 좇아서 온 데가 없이 스스로 생기지는 아니하리라. 만약 이 의식하는 마음이 본래 좇아온 데가 없다면 마땅히 알아야 한다. 보고 듣고 깨닫고 앎으로 인해 확실하게 분별함을 볼 때, 그것은 원만하고 고요하고 맑아서 그 성품이 좇아온 데가 없으리니, 저 허공과 흙.물.불.바람을 겸하여 균등하게 일곱 가지 원소라고 하는데 성품이 참되고 원융하여 모두가 여래장이므로 본래 생기거나 없어짐이 없느니라. 아난아, 네 마음이 거칠고 허망해서 보고 듣는데 밝음을 발하여 확실하게 아는 것이 본래 여래장임을 알지 못하나니너는 마땅히 이 여섯 가지 처소에서 의식하는 마음을 관찰하여 보아라. 같으냐, 다르냐, 빈 것이냐, 있는 것이냐? 아니면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더냐, 빈 것도 아니고 있는 것도 아니더냐? 너는 원래 알지 못하는구나. 여래장 가운데 성품이 의식인 밝게 아는 것과 성품이 밝은 깨달음은 참다운 의식은 오묘한 깨달음이 맑고 고요하며 우주에 두루해서 시방세계를 삼켰다 뱉었다 하는데 어찌 장소가 따로 있겠냐? 업을 따라 나타나는 것인데 세상 사람들은 지혜가 없어서 인연과 자연의 성품으로 의혹하나니 이는 다 의식하는 마음으로 분별하고 헤아림이니 다만 말로만 있을 뿐이지 진실한 이치는 조금도 없느니라." 그때 아난과 대중들이 부처님의 오묘한 가르침을 받고서 몸과 마음이 후련해져서 걸림이 없어지고 모든 대중들도 각각 스스로 마음이 시방에 가득함을 깨달아서 시방의 허공 보기를 마치 손에 가지고 있는 나뭇잎을 보듯 하며, 모든 세상의 사물들이 모두 보리의 오묘하고 밝은 원래의 마음임을 깨달았다. 마음의 정기가 두루하고 원만해서 시방을 둘러싸고 있어 부모가 낳아준 몸을 돌이켜 보되 이는 마치 저 시방의 허공 속에 나부끼는 한 작은 먼지가 있는 듯 없는 듯한 것과 같고, 마치 큰 바다에 떠가는 한 조각 물거품이 생기고 없어짐이 좇아온 데가 없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여겨 분명히 스스로 깨달아서 본래 오묘한 마음이 항상 머물러서 없어지지 아니한다는 것을 증득하였다. 그래서 부처님께 예배하고 합장하며 일찍이 없었던 초유 [未曾有]의 일을 얻고서는 여래 앞에서 게송을 읊어 부처님을 찬탄하였다.
미묘하고 깨끗한 덕을 모두 지니시어 흔들림 없으신 세존께서는수능엄왕으로서 세상에 드문 존재이십니다. 억 겁 동안 뒤바뀌었던 저의 허망한 생각을 없애주셔서 아승지겁을 거치지 않고서도 법신을 얻게 되었습니다.
지금 저희들도 성과(聖果)를 얻어 보왕(寶王)이 되어서 이렇게 항하사 같이 많은 중생을 제도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깊은 마음으로 티끌 같은 세계의 모든 부처님을 받들 것이오니이것은 부처님의 은혜를 갚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원하건대 세존께서는 증명하여 주소서. 맹세코 오탁(五濁)의 악세에 먼저 들어가서단 하나의 중생이라도 성불하지 못한다면그들을 위하여 열반에 들지 않겠습니다.
큰 자비와 큰 힘을 지니신 거룩하신 분이시여. 다시금 저희들의 미세한 의혹을 없애게 하사 저로 하여금 하루바삐 최상의 깨달음에 올라 시방세계의 도량에 앉게 하여 주소서. 허공[舜苦多]의 성품은 없앨 수 있을지언정 굳고 굳은 [迦羅] 이 마음은 변함이 없으리이다.
불공여래장(不空如來藏)
세존이시여, 만약 세간에 일체의 근(根). 진(塵). 음(陰). 처(處).계(界) 등이 다 여래장이어서 깨끗하고 본래 자연 그대로라고 한다면 어찌하여 홀연히 산과 강, 그리고 땅덩어리 같은 모든 물질들이 생겨나서 차례로 변천하여 끝마쳤다가는 다시 시작하곤 하는 것입니까? 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흙과 물, 불과 바람은 본래 성품이 원융하여 법계에 두루 퍼져서 맑고 고요히 늘 머문다’고 하셨습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흙의 성품이 두루 퍼진다면 어떻게 물은 용납하며 물의 성품이 두루 퍼진다면 불은 생기지 않아야 할 것인데 어떻게 물과 불의 두 성분이 허공에 가득하여 서로 능멸(陵滅)하지 아니하나이까? 세존이시여, 흙의 성질은 가로막는 것이고 허공의 성질은 텅텅 빈 것인데 어찌하여 두 가지가 다함께 법계에 두루 퍼진다고 하십니까? 저는 그 이치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원컨대 부처님께서는 큰 자비를 베푸시어 저희들의 어두운 구름을 벗겨 주소서.“ “부루나야, 네가 말한 것과 같이 ‘깨끗하여 본래 자연 그대로라면 어떻게 홀연히 산과 강과 대지가 생기겠느냐?’고 하는데 너는 내가 늘 ‘성각(性覺)은 오묘하고 밝으며 본각(本覺)은 밝고 오묘하다’고 한 말을 듣지 못했느냐?” 만약 밝힐 대상이 없다면 밝혀야 할 깨달음도 없으리라. 밝힐 대상이 있으면 깨달음이 아니요 밝힐 대상이 없으면 밝힐 것이 아니니 밝음이 없으면 깨달음의 맑고 밝은 성품이 아니니라. 성품의 깨달음은 반드시 밝은 것이건만 허망하게 밝혀야 할 깨달음이라고 하느니라. 깨달음은 밝힐 수 있는 것이 아니건만 밝힘으로 인하여 밝혀야 할 대상으로 만들었으니그 밝혀야 할 것이 이미 망령되게 이루어지면 너의 허망한 작용의 능력을 생기게 해서 같고 다름이 없는 가운데서 불꽃처럼 성하게 다름을 이루느니라. 저 다른 것을 다르다고 여겨서 그 다른 것으로 인해 같음이 성립되었고 같음과 다름을 분명히 구분하므로 그로 인해 다시 같음도 없고 다름도 없음이 성립되었다. 이렇게 gms들리고 어지러운 것이 서로 작용하면 피로가 생기고 그 피로가 오래되면 번뇌가 생겨서자연 서로 혼탁 하게 되느니라. 또 이로 말미암아 오염과 번뇌가 일어나느니라. 움직여 일어나면 세계가 되고 고요하게 있는 것은 허공이다. 허공은 같으나 세계는 다르니 그 같고 다름이 없는 것이 참다운 현상계[有爲法]이니라. 세계와 중생의 시초 깨달음의 밝음과 허공의 어두운 것이 서로 작용하여 요동하기 때문에 풍륜(風輪)이 생겨나서 세계를 잡아 지탱[執持]하는 것이다. 그리고 허공으로 인하여 흔들림이 생겨나고 밝은 것을 굳혀서 막힘이 이루어지나니 저 금은 보배는 밝은 깨달음이 굳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금륜(金輪)이 생겨서 국토를 보전하고 지탱 하는 것이며, 깨달음이 굳어져서 금은보배가 되고 밝음이 흔들려서 바람이 일어나나니 바람과 금이 서로 마찰하므로 불빛이 생겨 변화하는 성품이 되었으며, 금보(金寶)의 밝음이 윤택한 기운을 생기게 하고 불빛은 위로 치솟기 때문에 수륜(水輪)이 생겨 시방 세계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불은 위로 오르고 물은 흘러 내려서 서로 발하여 굳어져서 젖은 곳은 큰 바다가 되고 마른 곳은 육지와 섬이 되었으니 이러한 이치로써 저 바다 가운데에서는 불빛이 늘 일어나고 육지와 섬 가운데에서는 강물과 냇물이 늘 흐른다. 물의 힘이 불보다 열세이면 맺혀서 높은 산이 된다. 그러므로 산에 돌이 부딪치면 불꽃이 일어나고 녹으면 물이 되며 흙의 힘이 물보다 열세이면 돋아나서 풀이나 나무가 된다. 그러므로 숲과 늪이 타버리면 흙이 되고 쥐어짜면 물이 된다. 서로 엉켜서 허망하게 발생하여 번갈아 서로 종자가 되나니 이러한 인연으로 세계가 서로 이러지느니라. 또 부루나야, 밝은 것이 허망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깨달음의 밝은 것이 허물이 되니 허망한 것이 이미 성립되면 밝은 이치가 이를 앞지르지 못한다. 이러한 인연으로 듣는 것이 소리를 벗어나지 못하며 보는 것이 색깔을 벗어나지 못하여 빛과 향기, 맛과 촉감 등 여섯 가지 허망함이 이루어지나니 그로 말미암아서 보고 듣고 깨닫고 느끼는 것이 나누어져서 같은 업장끼리 서로 얽히고 어울리고 떨어져서 변화를 이루느니라. 보는 것이 밝아서 빛이 발하고 밝게 봄으로 해서 생각이 이루어지나니 다르게 보면 미움이 생기고 생각이 같으면 사랑이 생겨서 그 사랑이 흘러 종자가 되고 생각을 받아 들여 태(胎)가 되어서 서로 어우러짐이 발생하게 되고 같은 업장끼리 끌어들이게 된다. 그러므로 그 인연으로 해서 *갈라람(羯羅籃)과 알포담(遏蒲曇) 등이 생기느니라. 태로 생겨나는 것과 알로 생겨나는 것, 습지에서 생겨나는 것과 화생으로 생겨나는 것이 제각기 응할 바를 따라서 알로 생겨나는 것은 오직 생각으로서만 생겨나고, 태로 생겨나는 것은 정(情)으로 인해 생겨나며, 습기로 생겨나는 것은 합하여 느낌으로서 생기고 화생은 떠나서 응함으로 생기니, 정(情). 생각[想]. 합(合). 떠남[離] 으로 인하여 생겨나는 것들이 다시 서로 변하고 바뀌어서 업을 받는데 그 업을 따라 혹은 날고 혹은 잠기고 하나니 그러한 인연으로 중생이 서로 계속되느니라. 부루나야, 생각과 사랑이 함께 맺어져서 애욕을 여읠 수가 없어서 모든 세간의 부모와 자손이 서로 낳아 끊이지 않나니 이러한 것들은 탐욕(貪慾)이 근본이 되느니라. 탐욕과 사랑이 함께 불어나 탐욕을 그치게 할 수 없으므로 모든 세간이 알로 생겨나는 것, 변화로 생겨나는 것, 습기로 생겨나는 것, 태로 생겨나는 것의 강하고 약한 힘을 따라 번갈아 가며 서로 잡아먹나니 이것들은 살생을 탐하는 것이 근본이 되느니라. 사람이 양을 잡아먹었을 경우 그 양은 죽어서 사람이 되고 사람은 죽어서 양이 되어, 이러한 열 가지 생명을 지닌 무리들에 이르기까지 죽고 나고, 나고 죽고 하여 번갈아 가며 서로 잡아먹으면서 악업이 함께 생겨 미래의 세계가 다하도록 계속되나니 이러한 것 등은 도적질을 탐하는 것이 근본이 되느니라. 네가 나의 목숨을 저버리면 나는 너의 빚을 갚아서 이러한 인연으로 백 천겁을 지나도록 항상 나고 죽음에 머물며, 너는 나의 마음을 사랑하고 나는 너의 얼굴을 어여삐 여겨서 이러한 인연으로 백 천겁이 지나도록 항상 얽매이게 되느니라. 오직 살생과 도적질 그리고 음욕, 이 세 가지가 근본이 되나니 그러한 인연으로 업장과 과보가 서로 이어지느니라. 공불공여래장(空不空如來藏)
부루나야, 또 네가 묻기를 '흙과 물, 불과 바람의 본래 성품이 원융하여 우주에 두루하였다면 어째서 물의 성품과 불의 성품이 서로 능멸하지 않습니까?'라고 하였고, 또 묻기를 '허공과 땅덩어리가 함께 우주에 두루하였다면 서로 용납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니, 부루나야, 비유하면 허공의 본체는 여러 가지 모양이 아니지만 그래도 저 여러 가지 모양이 나타남을 막지 않는 것과 같느니라. 그 까닭이 모엇이냐 하면, 부루나야, 저 커다란 허공이 해가 비치면 밝고 구름이 끼면 어두우며, 바람이 불면 흔들리고 비가 개이면 맑으며, 기운이 엉키면 탁하고 흙먼지가 쌓이면 흙비가 되며, 물이 맑으면 밝게 비치기 때문이니라.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러한 여러 방면에서 작용하는 모든 현상들이 저것들로 인하여 생기느냐, 허공을 따라 있는 것이냐? 만약 저것들로 인하여 생기는 것이라면, 부루나야, 장차 해가 비칠 적에는 이미 그것은 햇빛이므로 시방세계가 다 같은 햇빛이어야 하거늘 어찌하여 공중에서 다시 둥근 해를 보게 되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한다. 그 밝음은 해도 아니요, 허공도 아니며, 허공이나 해, 또한 다른 것도 아니니라. 그 현상을 살펴보면 본래가 허망해서 가리켜서 말할 수 없음이 마치 허공의 꽃에서 부질없이 열매가 맺히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나니, 어떻게 서로 능멸하는 이치를 따지겠느냐? 성품을 살펴보면 본래 참된 것이라서 오직 오묘하고 밝은 깨달음일 뿐이다. 오묘하고 밝은 깨달음의 마음이 본래 물이나 불이 아니거늘 어찌하여 또다시 서로 용납하지 못하느냐고 묻느냐? 참되고 오묘하고 밝은 깨달음도 역시 그러하니라. 네가 허공으로써 밝히면 허공이 나타나고 흙과 물, 불과 바람으로 각각 밝히면곧 그것들도 각각 나타나며 만약 한꺼번에 밝히면 곧 다함께 나타나느니라. 어떤 것을 함께 나타나는 것이라고 하는가 하면 부루나야, 마치 물 속에 해의 그림자가 나타나는 것과 같나니, 두 사람이 함게 물 속의 해를 보다가 동쪽과 서쪽으로 제각기 가면 물 속의 새도 제각기 두 사람을 따라 하나는 동쪽으로, 하나는 서쪽으로 가서 본래부터 표준한 곳이 없거늘 따져 말하기를 '저 해는 하나인데 어찌하여 제각기 가느냐?'고 하며, '각자 가는 해가 이미 둘인데 어찌하여 하나로 나타나느냐?'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완연히 허망하여 의지할 수가 없느니라. 부루나야, 너는 물질과 허공으로써 여래장에서 서로 밀어내고 서로 빼앗으므로여래장도 따라서 물질과 허공이 되어 우주에 두루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 가운데서 바람은 움직이고 허공은 맑으며 해는 밝고 구름은 어두운 것인데, 중생들은 어리석고 미련해서 깨달음을 저버리고 허망한 티끌과 어울리므로 번뇌가 일어나서 세간의 현상이 생기게 되느니라. 나는 오묘하고 밝은 것이 생겨나거나 없어지지도 않는 것으로서 여래장과 합하였는데 여래장이 오직 오묘하고 밝은 깨달음이므로 우주를 원만하게 비추고 있다. 그러므로 그 가운데서 하나가 한량없는 것이 되고 한량없는 것이 하나가 되기도 하며, 작은 가운데 큰 것을 나타내기도 하고 큰 가운데 작은 것을 나타내기도 하며, 도량에서 움직이지 않고 시방세계에 두루퍼지며, 몸으로 시방의 끝없는 허공을 머금으며, 한 털끝에서 보왕(寶王)의 세계를 나타내며, 작은 먼지 속에 앉아서 큰 법륜(法輪)을 굴리느니라. 번뇌를 없애고 깨달음에 합하였으므로 진여인 오묘한 깨달음의 밝은 성품을 발하나니, 여래장의 본래 오묘하고 원만한 마음은 마음도 아니요 허공도 아니며, 흙도 아니요 물도 아니며, 바람도 아니요 불도 아니며, 눈도 아니요 귀.코.혀.몸.생각도 아니며, 빛도 아니요 소리.향기.맛.촉감. 법도 아니며, 안식계(眼識界)도 아니요 나아가 의식계 (意識界)도 아니며, 밝음도 밝음이 없음도 아니요 밝음과 밝음이 없는 것마저 다함도 아니며, 이와 같이 나아가 늙음도 아니여 죽음도 아니며, 늙음과 죽음이 다함도 아니며, 괴로움[苦]도 아니요 괴로움의 원인[集]도 아니며, 괴로움을 없애는 자리[滅]도 아니요 괴로움을 없애는 방법[道]도 아니며, 지혜도 아니요 증득함도 아니며, 보시바라밀도 아니요 계율바라밀도 아니며, 인욕바라밀도 아니요 정진바라밀도 아니며, 선정[禪那]바라밀도 아니요 반야바라밀도 아니니라. 이와 같아서 더 나아가 여래도 아니요 응공[阿羅訶]도 아니며, 정변지도 아니요 대열반도 아니며, 항상함[常]도 아니요 즐거움[樂]도 아니며, 주체[我]도 아니요 청정함[淨]도 아닌데까지 이르나니 이렇게 세간과 출세간도 모두 아니기 때문이니, 곧 여래장의 원래 밝고 오묘한 마음은 곧 마음이요 허공이며, 흙.물.바람.불이요, 곧 눈.귀.코.혀.몸.생각이며, 곧 빛.소리.냄새.맛.촉감.법(法)이요, 곧 눈으로 보아 의식하는 경계이며, 이렇게 나아가 뜻으로 생각하여 의식하는 경계이며, 곧 밝음과 밝음이 없음이요, 밝음과 밝음이 없는 것까지 다끊음이며, 이렇게 나아가 곧 늙음이요, 죽음이며, 곧 늙음과 죽음이 다함이요, 곧 괴로움.괴로움의 원인.괴로움을 없애는 자리.괴로움을 없애는 방법.지혜.증득함이며, 곧 보시.계율.인욕.정진.선정. 반야바라밀이고 이렇게 나아가 곧 여개.응공.정변지이며, 곧 대열반이요, 곧 항상함.즐거움[樂].주체[我].청정[淨] 이니 이것 모두가 곧 세간법과 출세간법이므로 곧 여래장인 오묘하고 밝은 마음의 근본은 그런 것도 아니요 그렇지 아니함도 아니며,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 것이니라. 어찌하여 세간 *삼유(三有)의 중생들과 출세간의 성문과 연각들이 알고 있는 마음으로 부처님 최상의 보리를 추측하고 헤아려서 세간의 언어로써 부처님의 지견에 들어갈 수 있겠느냐? 비유하면 마치 거문고.비파.*공후(箜篌)가 비록 오묘한 소리를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만약 사람의 손가락이 없으면 끝내 소리를 낼 수 없는 것과 같으니 너와 중생들도 이와 같아서 보배로운 깨달음의 참마음이 각각 원만하건만 만일 내가 손가락을 놀리면 해인(海印)이 빛을 발하거늘 너는 잠시만 마음을 움직여도 번뇌가 먼저 일어나나니 이는 가장 높은 깨달음의 길을 부지런히 구하지 않고 소승을 좋아하여 적은 것을 얻고도 만족하게 여기는 탓이니라." 오묘한 깨달음의 밝은 마음은 본래 원만하고 밝고 오묘한 것이니 이미 허망한 생각이라고 하였던들 어떻게 원인이 있다고 하겠으며, 만약 원인이 있다면 어떻게 허망한 생각이라고 하겠느냐? 스스로 일으킨 모든 망상들이 전전하며 서로 원인이 되어 미혹을 좇아서, 미혹을 쌓으면서, 끝없는 세월을 지내왔으 므로 비록 부처님께서 드러내어 밝혀 주었어도 오히려 돌이키지 못하느니라. 이와같이 미혹한 원인은 미혹으로 인하여 저절고 생긴 것이니 미혹함이 원인이 없다는 것을 알면 허망한 생각이 의지할 데가 없어서 오히려 생기는 것조차 없으리니 무엇을 없애려느냐? 보리를 얻은 자는 잠을 깬 사람이 꿈 속의 일들을 이야기하는 것과 같아서 마음에는 비록 꿈 속의 일이 분명하지만 무슨 수로 꿈 속의 물건들을 취할 수 있겠느냐? 더구나 원인이 없어서 본래부터 있지도 않은 것이겠느냐? 네가 다만 세간에 업장과 과보 그리고 중생, 이 세 종류가 서로 연속되는 것을 따라 분별하지 아니하면, 세 가지 인연이 끊어지기 때문에 세 가지 원인이 생기지 아니하면 곧 너의 마음 속에 연야달다의 미친 성품은 자연 사라질 것이다. 무명이 없어지면 곧 보리의 뛰어나게 깨끗하고 밝은 마음이 본래 우주에 두루 퍼져서 다른 사람에게서 얻어진 것이 아니니 어찌하여 애써 수고롭게 닦아서 증득하겠느냐? 비유하면 마치 어떤 사람이 자기의 옷 속에 여의주를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은 미처 알지 못해서 타향에서 곤궁하게 돌아다니며 빌어먹는 것과 같아서 비록 가난하긴 하지만 여의주를 잃어버린 것은 아니다. 홀연히 지혜 있는 사람이 그 여의주를 가르쳐 주면 마음 속에 기원하던 대로 큰 부자가 되리니 그때서야 비로소 그 신비로운 여의주가 밖에서 얻어진 것이 아님을 깨달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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