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1.13 월요일 도봉산 신선대
어제 부터 들이 닥친 영하 5도 추위에 서울의 아침은 두툼한 외투로 치장을 하며 거리를 움직인다. 왠지 움츠러든 어깨가 가슴을 감싸며 톡 치면 쏙 들어가 버리는 달팽이와도 같다. 우르르 지하철 계단으로 구르듯 밀려가는 모습이 마치 전쟁터로 가는 한무리의 병사들이다. 왠지 모르게 미국보다 춥게 느껴지는 서울 날씨에 겁먹어 잔뜩 쑤셔 넣은 옷으로 배낭이 큼지막하여 누가 보면 정말 설악산이나 지리산이라도 갈 기세다.
시차로 몸을 가누지 못해 계획했던 설악산을 뒤로 하고 (11/15 ~ 12/15까지 산불방지 기간으로 산행로 폐쇄) 가까운 곳에 위치한 도봉산으로 마음을 잡았다. 쌍문역에 자리를 잡은 것도 도봉산이 코앞에 있어서 였다. 12층의 오피스텔은 둘이 지내기 아주 딱 좋은 공간이다. 풀사이즈 침대 하나, 조그마한 책상 겸 식탁과 의자 2개, 그리고 서랍장은 단지 장식용인지 서랍이 모두 붙어 있어 열리질 않는다. 옷장에는 넉넉히 옷과 짐을 넣을 수 있고 2구 가스오븐, 마이크로 오븐, 그리고 그릇, 접시, 수저, 포크 모두 2개씩이다. 샤워 부스가 있어서 화장실은 미국식이라 어색하지 않아 좋고 동향이라서 아침에 뜨는 해를 보며 하루를 시작하니 이보다 우아할 수는 없다. 엘리베이터는 문이 열리는 순간 바로 닫히는 통에 몇 번이나 몸이 끼는 불상사(?)를 겪으면서 역시 성질 급한 한국인이라는 생각에 아내와 웃음을 터트렸다.
오전 7:05, 도봉산역에 내려 몇 년 전 기억을 더듬으며 아직 문도 열지 않은 수많은 가게들을 지나치며 김밥집을 찾았다. 거의 입구까지 왔는데 김밥 살 곳이 없다. 아까 지하철내 식당에서 구입하지 않은 걸 후회하며 다시 시내로 터벅 터벅 걸어 내려왔다. 김밥은 한줄에 3천원, 방금한 밥이라 뜨겁다고 싸주시는 아주머니는 내가 첫 손님인지 기분 좋게 맞이 한다.
북한산 국립공원이라고 쓰인 커다란 돌간판을 지나쳐 첫번째 나오는 화장실에서 볼일을 봐야 했다. 왜냐하면…한국 특히 도봉산처럼 등산객이 많은 곳에서는 중간에 빠져 볼일을 볼 수 없기 때문인데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가 있음을 산을 오르며 알았다. 미국에 있는 산처럼 평지 같은 곳이 거의 없어서 빠져 나갈 곳이 없고 낭떠러지일 뿐이기에 소변은 입구에서 해결하고 물도 조금씩만 마셔야 한다.
도봉분소 갈림길에서 젊은 한쌍이 제대로 배낭을 메고 오르기에 그 뒤를 따랐다. 틀림없이 좋은 코스로 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중간 중간 쉬면서 만나 몇 마디 주고 받으니 역시나 도봉산에서 제일 험한 코스로 가고 있다. 은석암을 지나 다락능선을 타고 포대능선 전망대를 거쳐 살벌하기로 소문난 Y계곡을 지나 오늘의 목적지 신선대를 오르는 코스이다.
초반의 잘 닦여진 길을 걸으며 항상 동영상으로 한국의 산을 볼 때마다 왜 미국처럼 자연을 그대로 유지하지 않고 온통 계단과 손잡이를 만들어 놨을까 의문이었고 불만이었다. 하지만 그 불만은 눈 녹듯 사라지고 미국에서 갈고 닦은 실력에 이 정도 쯤이야 했던 나의 오만과 편견은 그대로 꼬리를 내리고 만다.
그리 높지는 않지만 초반부터 치고 오르는 길이 여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모두 돌산인지라 마치 메인주의 카타딘을 오르는 느낌이랄까. 이리저리 바위 사이를 헤치며 중간 중간 얼굴을 내미는 자운봉의 자태는 정말 환상적이다. 이렇게 멋진 산이 서울 한복판에 있다니 감탄만 나올 뿐이다. 스위스의 몽블랑은 너무 기대를 많이 한 탓에 약간 미지근했다면 한국의 도봉산은 아무 기대 없이 왔다가 그야말로 대박이다. 왜 외국만 기웃 기웃하며 한국 명산에 관심을 갖지 못했나 마냥 아쉽다.
Y 계곡 가기 전에 포대 능선이 있다. 이곳을 가기 위해 거의 수직으로 바위를 타고 오르락 내리락 해야 하는데 함께 가던 부부에게 물었다. 이곳이 Y계곡이냐고. 아니란다. 이곳은 전초전 정도랄까. 포대능선 전망대에 서서 바라본 도봉산의 봉우리들은 세계 어디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만큼 아름답다. 숨통이 탁 트이면서 소리라도 지르고 싶을 만큼 황홀하다. 아아 대한미국! 아아 나의 조국! 노래가 절로 나온다.
Y계곡의 쇠로 잘 고정된 지지대를 잡고 수직의 절벽을 내려 갔다 올라 갔다 하며 도무지 이런 코스가 있다는 게 상상이 안된다. 더구나 다리가 짧으면 바위에 걸칠 부분이 닿질 않아서 상당히 위험하다. 맨 마지막 구간은 거의 몸을 비틀어 가면서 바위 위를 올라야 하는데 고소 공포증이 있다면 예전에 포기하는게 좋을 것이다. 다시 돌아갈 길이 없기 때문이다. 약간 종아리에 쥐가 날 것 같은 신호가 와서 잠깐 지지대를 잡고 숨 호흡을 한다. 먼저 앞서 가는 젊은 부부가 ‘이 곳에서는 사고 나면 도와 드릴 수는 없고 신고는 해 드릴 수 있어요’ 하던 말이 등골을 오싹하게 한다. Y계곡을 무사히 통과 하고 숨을 돌리려는데 머리 위에 치솟은 또 하나의 봉우리를 가리키며 저 곳이 도봉산 최고봉 신선대라고 한다. 물론 바로 옆에 보이는 자운봉이 제일 높지만 암벽산악인에게만 허용된 산인지라 트렉커들에게는 신선대가 최고봉인 셈이다.
바로 코앞에 있는 자운봉을 바라보니 조각난 바위들이 어떻게 비바람에 그대로 있는지 신기했다. 밤만 되면 그 바위들이 변신하여 산 주위를 뚜벅 뚜벅 걷다가 새벽녘이 되어서야 제 자리로 돌아온다는 전설이 있다고 하니 꾸며 놓은 이야기지만 나름 재미있는 상상이다.
마당바위에서 동행한 부부와 점심을 먹는데 고양이 2마리가 가까이 다가 온다. 서울 근교 산에는 버려진 고양이와 개들이 등산객이 던져주는 먹이를 먹으며 삶을 영위한다고 하니 가슴 아픈 일이다. 평일인데도 계속 올라오는 등산객을 뒤로 하고 우리는 하산 하기 시작했다. 계속 가파른 길을 내려 가려니 무릎에 조금 부담이 온다. 미국의 높은 산 마지막 돌구간을 오르 내린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출발지점까지 내려 오면 중간이 거의 없고 바로 평지가 시작된다.
동행한 부부는 남편은 사진작가이고 아내는 혼자 산을 다니는 산악인이다. 위험한 코스는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하여 꼭 남편을 대동한다고 한다. 아내에게서 한국의 가볼 만한 산을 소개 받은 후 짧은 인연을 뒤로 하고 헤어졌다. 지하철에 몸을 실으니 오후 1시 30분. 5마일을 6시간 정도 걸었고 상당히 힘든 코스였지만 너무나도 재미 있고 눈물이 날 정도로 벅찬 하루였다. 한국에 살 면서 제대로 가보지 못했던 산들…이제 나의 인생의 목표가 새로 생긴 기분이다.
첫댓글 생생한 후기 잘 읽었읍니다. 날씨 좋을 때 함 가보고 싶네요.
다음에 지리산 종주
정말 멋진 산을 다녀오셨네요.
꼭 가보고 싶은데요.
생생한 산행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