淸心味 역사.
청심미는 종창祖 묘소가 있는 地境(지경) 이름이다.
우리들은 종창祖 묘가 있는 坐田을 부르는 이름이다.
종창祖 묘소는 화북이동 2741번지 坐田에 모시어 있었고, 배위인 광산김씨祖母 묘는 연북로 확장함에 따라 화북이동 000번지에서 부득이 이장을 하여 이곳에 같이 모시었다.
종창祖의 이력은 족보와 문중의 서책의하면 아래와 같다.
종창祖께서는 (1767-1821, 星主公 25世, 司直公 14世)은 字가 昌甫이고 號는 梅圃이며, 1767년 화북리 거로마을에서 濟州梁氏司直公派 거로마을 入鄕祖인 孝謙(1735-1770, 星主公 24世, 司直公 13世)과 羅州金氏(1733-1813)의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公의 10代祖는 通政大夫 淵敏(星主公 15世, 司直公 4世)이고, 6代祖는 宣略將軍 應泓(1584-1660, 星主公 19世, 司直公 8世)이며, 曾祖는 1738년에 당시의 목사 홍중징(洪重徵)과 더불어 제주 유림의 명부인 靑衿案을 창설한 道赫(1696-1753, 星主公 22世, 司直公 11世, 陞補試, 鄕解訓長)이다. 또한 外祖는 거로마을의 羅州金氏 就鑑(1710-1740, 1814년 文科에 同榜及第한 英集, 英業, 英樂 3형제의 祖)이다. 梅圃公은 어릴 때 부친을 여이고 가난하였으나 타고난 재능이 비범하고 그릇이 커서 靑雲의 뜻을 품고 橘林院에 들어가 학업에 전념하여 陞補試에 합격하고 鄕貢進士에 올랐으며, 제주향청의 留鄕座首와 제주향교의 都訓長을 역임하였다.
三射石(지방 기념물 17호)은 탐라의 시조인 梁高夫 3神人이 벽랑국의 3공주를 맞아 배필로 정하고 활을 쏘아 거처할 터전을 정할 때 그 화살이 꽂혔던 돌들을 말하는데, 1736년 목사 金政(1670-1737)이 矢射石으로 전해진 돌을 모아 석각을 지어 보존하고 壇과 三射石遺墟碑(毛興穴古 失射石遺 神人異蹟 交暎千秋)를 세웠다.
세월이 지나 三射石에 風磨의 염려가 있어 1812년 겨울 三射石 보존을 위한 論議에서 公은 石室을 짓는 首長으로 選望되어 萬戶 高益普, 軍官 夫贊彬과 더불어 석실을 크게 치장하여 射石을 드리니 밖에서 보면 화살촉 흔적이 잘 드러났으며, 석실 前面 左右에 이 일을 이룩한 내용의 글(三神遺蹟 歲久殘斂 今焉補茸 加以石室 嘉慶癸酉春)을 새겨 넣었다.
梅圃公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면 1786년 司馬試에 급제하고 能文善書로 알려져 濟州筆苑에도 수록된 進士 吳霑(1764-미상)이 지은 비문에 <才性超凡器宇弘大多貯於諸子百家及其作文衆皆讓席而傑然爲一鄕最>라 기록되어 있고, 1940년 당시 제주 최고의 한학자로 알려졌던 李膺鎬가 지었으며 1979년에 발간된 梁氏大同譜(己未譜) 宗史編(上)에도 수록된 <梅圃翁傳>에서 일부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如氷玉骨相可觀其志淸高(빙옥 같은 골상이니 그 뜻과 기상이 맑고 높음을 볼 수 있다). 才性超凡器宇弘大(재능과 성품이 남보다 뛰어나고 도량이 크시었다). 公日就月將及其作文衆皆讓席而傑然爲一鄕最後鄕望爲座首(公이 나날이 다달이 진전되어 시문을 짓게 되니, 모두 다 자리를 양보하며 한 고을의 으뜸이 되었고, 나중에는 고을의 덕망 있는 좌수가 되었다). 又被儒薦爲州學訓長而勸獎諸生不貸課程乃有興蔚菁莪之風矣(또 선비들의 추천을 받아 주학당의 훈장이 되었고, 모든 학생에게 학비 없이 교육을 권장하여, 이에 새싹을 키우는 교육의 풍토를 일으켜 세웠다). 公於保存私石之議首被選望而監董其役乃與萬戶高益普軍官夫贊彬大治石室而納焉外露鏃蹟而示焉以爲蘇世久遠計如記事之文亦出其手矣(公께서 射石을 보존할 논의를 할 때에 수장으로 선출되어 일을 책임지게 되었다. 만호 고익보와 군관 부찬빈과 더불어 크게 석실을 치장하여 射石을 드리니, 밖에서 보면 화살촉 흔적이 잘 드러났다. 이로써 세대가 永久토록 원대한 계획을 일깨우니 이 일을 이룩한 글이 公의 손에서 이루어졌다).>
종창祖 묘 관리 및 종친회의 제반사항은 제주양씨 사직공파 청심미 종친회에서 관장한다.
종친회의 구성은 총친회의 정관에 정해 있다.
종창祖 坐田 내역을 살펴보면
화북이동 2740-3번지(18평) 그리고 화북이동2741번지(340평)은 조상 대대로 내려 온 토지인데 1982년 이전에는 양배현씨가 문중에 승인도 없이 특별조치법으로 명의이전을 하였다가, 청심미 종친회가 발족함에 따라 제주양씨 사직공파 청심미 종친회로 명의이전 하였다.
화북이동2740번지(286평) 토지는 본래 면적은 644평이고 거로마을에 거주하던 김병인씨 소유인것을 우리 문중에서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십시일반으로 동참하여 본 토지를 매입 하였다.
임시종친회를 구성하여 회장 치연(용희부친) 총무 달현(진원부친) 추진위원장 찬희(석필부친)를 호선하여,
필자가 어렸고 관심이 없어 자세히는 알수가 없어도 찬희, 달현 종친의 종사에 관심을 갖고 필자의 부친을 찾아와서 보고를 하는 것을 보고 들었고, 일본, 육지부,종친들에게도 기별,통지을 하고, 제주 종친들 집을 가가호호 방문을 하며, 수금을 하여 매입 자금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총무 달현 총친이 사망하면서, 장부도 손실되었고, 세월이 흘러 누가 얼마를 부담하였는지, 토지는 얼마에 매입을 하였는지, 자세히 알수가 없는 것이 아쉽다. 종친들이 십시일반으로 자금을 모아 1974년에 매입을 하여 소유권을 달현외 3명으로 명의 이전 하였다가 1994년 제주시청에 청심미 종친회로 종중등록하여 제주양씨 사직공파 청심미 종친회로 명의 이전 하여 현재에 이른다.
필자가 1994년 이전에 있었던 종친,좌전에 관련된 여러 사연들은 확실한 문서나 확증을 할 수가 없어 듣고,보아 온 바를 기록 하였고, 우리 문중에서 기록이 보존되지 않은 것을 부끄럽게 생각되어 여기에 기록 함을 이해하여 주시기 바람니다.,
필자는 청양원 우리가족묘지(월평동138-1번지)를 마련하고져 업무를 하는 도중에 필자의 부친과 종친들이 호선에 의거1994년 5월부터 2005년 1월까지 청심미 좌전과 종사에도 관심을 갖고 청심미 종친회 산파역을 자임했다.
좌전 토지보상은 2004년 동부관광도로 확장사업 시행--제주시청 건설과-11781(2004.10.11.)에 의거
동부산업도로(번영로) 편입 토지와 보상은 편입토지(과수원,임야,도로) 384평, 밀감나무.164주, 삼나무,90주,에 대한 우리 문중회의 회장인감,문중회회의록,문중회등록증,문중회정관등 제반 구비서류를 갖추워 시청에 가서 공공용지 보상계약을 협의 하여 손실보상 금액 일억사천이백칠십삼만사천오백원 (142.734.500)원 수령 처리 하였다.
2005년 3월에 좌전 보상을 받고, 문중종친회을 소집하여, 제주양씨사직공파청심미종친회를 조직하여 회장 명희, 총무 중구종친을 선임하고 보상금액과 토지이전 서류등을 필자가 인수 인계 하였다.
2005년 11월에 번영로 개설,확창하는데 광산김씨祖母 묘소가 편입되는 토지에 가까워 지장을 초래해서 종창祖 묘소 곁, 이곳으로 이장, 경비는 360만원을 예산집행하였다,
종창祖 비석은 2006년 4월5일 墓祭일에 舊碑(구비)는 (祖, 祖母비 모두)산담안 묘앞 동쪽 땅속에 묻어 보관을 하고 새로 비석과 상석등을 경비 5백만원을 지출 마련 하였으며,
종창祖 묘제는 청심미 종친회 창립 전에는 墓祭 봉행을 본 坐전을 임차하는 조건으로 본 坐田 (화북2동 2740번지) 동쪽 土地 주인 양두현종친의 妻(처)가 매해 墓祭 제물을 준비하면 우리 종친들이 묘제를 봉행하는 사연도, 여러 해를 지냈었다.
2007년부터 청심미 종친회에서 墓祭는 매년 음력 팔월 초하루前 토요일 09시에 벌초를 마치고 세길祖,세달祖,세열祖, 자손들이 매년 순번으로 돌아가며 봉행하고, 경비는 처음 30만원을 보조하다가 2020년부터 50만원을 보조하고 있다,
기록이 소중함을 인식하고 앞으로 우리 자손들은 제주양씨사직공파청심미종친회를 중심으로 물심양면으로 서로 협동하고 존중하며, 청심미를 우리의 성역으로 잘 보존되고 전승되기를 기원합니다.
2020년 12월 경자 초순 근희 .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