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굴비
봄의 서막이 오르고 공연이 무르익었다. 자연의 순리에 따라 연둣빛 이파리가 차츰 초록으로 매봉산을 덮었다. 매봉산 정상을 오르내린 지 오랜 세월이 흘렀으니 쇠약해 있는 나는 가족들에게 걱정거리를 안겨준 늙은 어미가 되었다.
건강검진을 해마다 철저하게 했는데도 미처 발견하지 못한 주먹만 한 혹이 나의 뱃속에 자리 잡고 있단다. 팔십을 바라보며 처음으로 해본 위장과 대장 내시경 검사 결과, 대장은 이상 없고 위장에는 약간의 염증이 있을 뿐이란다. 그런데 담당 의사가 대장·항문 외과 충수 부위에 혹이 보였다는 것이다. 특수 촬영한 결과 맹장 옆에 꽤 큰 점 혹(11.7㎝)이 발견되었다. 의사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일반외과에서 수술하란다.
서울 큰 병원에 수술 날짜를 잡았다. 이 나이에 전신마취를 해야 하는 두려움과 부담감이 나를 억누르기 시작했다. 병원에서 두 번째로 유명한 대장항문외과 교수가 복강경으로 한 시간이면 끝낼 수 있는 수술이고, 죽고 사는 건 당연히 하느님 몫이라며 살짝 부담을 주었다.
천주교 환자가 위험한 수술이나 위중할 때 받는 병자성사를 받고 싶은 마음에 새로 부임하신 본당 신부님과 수녀님께 점심 대접을 해드리겠다고 했다. 신부님께서 쾌히 시간을 내주시겠다고 하셔서 청주에서 유명한 보리굴비 집으로 모셨다.
신부님께서는 보리굴비 집엔 처음 오셨단다. 분위기가 워낙 좋은 식당이라 신부님, 수녀님께서 신기하다며 좋아하셨다. 신부님은 메인요리인 보리굴비가 어떤 요리냐고 물으셨다. 굴비 요리에 대한 지식도 없이 그곳으로 모신 것이 송구스러웠다. 가끔 보리 굴비를 맛있게 먹을 때마다 귀한 손님을 모실 때는 보리굴비가 제일인 것으로 맘에 두고 있던 터였다. 내가 머뭇거리고 있는데 신부님께서 스마트 폰으로 보리굴비에 대한 요리 방법을 찾으시더니
‘보리굴비란 해풍에 말린 참조기를 항아리에 담고 보리를 채워 보관하여 곰팡이가 나지 않게 숙성시킨 굴비를 이른다.’라고 하셨다.
식당 직원이 반찬으로 상을 채우면서 상냥하게 설명한다. 보리굴비를 먹을 때는 녹차에 밥을 말아 쫀득쫀득한 보리굴비를 한 첨씩, 수저에 물 말은 밥 위에 얹어 먹는 것이라며 가르쳐 주었다. 그녀가 말 한대로 차가운 녹차 물에 밥을 말아 한 수저 뜨고, 보리굴비를 젓가락으로 떼어보니 곰삭은 살점이 결에 따라 잘 찢어진다. 보통 굴비 맛과는 차원이 다르게 입에 달라붙었다.
식사 끝날 무렵에는 보리 개떡 모양의 보리 향내가 나는 빵을 맛보기로 내오더니 나중에 일어설 무렵에는 보리 개떡 열 개를 주며 신부님 수녀님 가져가서 드시란다. 식당 선택을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술을 앞둔 나를 바라보시는 신부님의 눈빛에서 진심을 담아 걱정하시는 마음이 보여 감사했다. 성모님의 날 행사 후에 병자성사를 주시겠다며 무사히 수술을 잘 끝내고 활짝 웃으며 성당에 나오라고 하셨다.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유서를 써본 적이 없다. 처음으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유서를 몇 자 적어보기도 하고, 예기치 않게 닥쳐올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죽음에 대해 준비를 하는 흉내도 내보았다. 유서를 작성하는 내내 눈물은 왜 그리 흐르는지….
젊은 시절, 장질부사란 못된 병을 앓은 적이 있다. 성모병원 독방에 격리되었다가 며칠 만에 깨어났다. 며칠 동안, 못된 병마에 시달린 끝에 다시 살아난 내 생명이 고귀함을 처음으로 알았다.
창밖을 내다보니, 장미 만발한 오월, 덩굴장미가 병원 울타리에 환하게 피어있었고 성당에서는 성모의 성월 성가가 내 가슴을 울렸던 오월이었다. 이번에도 병으로 고통을 겪는 게 우연치고는 같은 오월이다.
보리굴비를 잡수신 후 위로의 말씀으로 나를 안심시켜주신 신부님과 수녀님의 말씀이 나를 지켜주시리라 믿으며 기운을 낸다. 수술이 잘 되어 신부님과 수녀님을 모시고 보리굴비를 대접하는 날이 다시 오기를 간절하게 기도한다.
첫댓글 큰 수술을 앞둔 긴장감이 글에 여실히 보이네요.
지금 이렇게 문인회 카페에 글도 올려주시니 살아나신 건 분명해요. ^^
잘 읽었습니다.
카타리나님.
용기주심에 부끄러운 글 올렸네요.
카타리나님의 열정은 그 젊은시절의 열정그대로 남아 있음에
감사드립니다.
그러기에 가톨릭 문인회가 무리없이 전진하고 있네요.
감사합니다
건강할 때 맛보는 음식과 아플 때 맛보는 음식이 서로 다르겠죠 .
한 살 나이들수록 건강의 중요성을 새삼 발견하게 하는 글이네요.
수술 잘 받고 건강한 생활 자체가 축복이겠죠.
잘 읽었습니다.
루도비꼬님.
알비나 만큼이나 귀하신 본명이네요
부끄러운 글 읽으시고 댓글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용기도 주심에 또한 그렇습니다.
성모성월의 은총이 느껴집니다.
신부님, 수녀님과 함께 식사하시면서 병자성사를 약속하시고
건강이며 생의 축복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믿음에 감사드립니다.^^
대건안드레아님.
선생님의 본명앞에선 늘 숙연해 진답니다.
저와 함께 보리굴비 잡수시며 격려 듬뿍주신 신부님 수녀님들은
진정 늙은 영혼에게 진심으로 용기와 희망을 주시고 이땅에서 보기 드믄
성직자십니다.덕분에 성모님으로 부터 의 특별한 은혜로 또 한고개 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옥천 어느 식당인가~저도 보리굴비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소박하고 정갈하면서도 품격이 느껴지는 맛이랄까요~
빨리 건강 찾으셔서 좋은 글 써주시길 빕니다.
나작가님
보리굴비는 한여름 차가운 녹차에 밥말아서 밥한술 떠 보리굴비 결따라 한첨떼어 얹어
먹으면 최고랍니다. 부끄러운 글에 댓글 달아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