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창수 시들 ▶ 텔레레터용
초록빛의 0
빛이 빛을 쪼여 한낮의 모든 걸 매기고 있다 그 빛은 내게 모든 걸 다 주려 하진 않고 있어 나는 빛에게 말한다 내게 바람을 달라 내게 비를 달라 내게 구름을 달라 그 빛은 그럼 나는 당신에게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주어야 하느냐고 무작정 따지기 시작했다
나는 바람을 쐬러 모두에게 나아가기 시작했는데, 푸르른 하늘이 나를 반기는 척 하더니, 이내 숲의 저편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나는 어느 순간 내가 갈 수 있는 모든 곳에 머물렀고 내가 다가갈 수 없는 모든 것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더니 이야기는 저 바다 너머 어딘가로 떠나겠다고 했다
자꾸만 허둥대기만 하는 어떤 날에 슬픔이 슬픔이 아니게 된 어느 날에 사랑을 하기만 하고 싶던 그 날에 나는 삶이라는 아주 흔한 것들을 마주하게 되었고 더 이상 아무도 내게 이야기를 붙이지 않게 될 그 날이 올 지도 모른다고 바다에게 투정했더니 바다는 그럼 나는 너의 무엇을 보아야 하느냐고 내게 묻고 있었다
아주 오랜 후 어느 날 나는 바다 위에서 햇살을 받으며 바람을 맞고 있었는데 그것은 꿈인 듯 지금인 듯 나중인 듯 했다 그리고 내게 닥쳐온 그 지금은 어느 덧 내가 지금까지 이야기하던 것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나는 달라진 나중을 이야기하려 했는데 지금은 내게 꿈이냐고 꿈인 거냐고 나는 맞을 거라고 맞을 거라고
그 대 로
밤 피어오르듯 별은
어제
그 자리에 빛을 내고
뜨거운 열기로 타오르는 사막에
오늘
목마름을 덜어내는
오아시스
사라지듯 기어이,
달아오르는 날빛
내일
또
그대로
너로
나
너로
다가선다
너로
나
돌아선다
나 이제
나로
돌이킨다
다만 너로
아픈 상처
감싼 채
나의 나로
너의 너로
이제야
다가선다
펭 귄
뒤로 막은
거대한 얼음덩이
앞은 출렁이는
푸르름
끝내
녹지 않는
바닥 위에 존재한
나의 일상(日常)
문득
흔들리는 몸짓에
동무들 지나가고
하늘을 우러르는
나의 일독(一讀)
조금
조금
나아가는
나의 걸음은
뒤뚱
이기만 하고.
충 치
아픔이
시린 잇몸을 타고
온몸으로 흐른다,
이미 썩은 지 오래 되어
한두 푼으로는 메울 수 없는
내 조그만 생(生),
정부보조금 벗 삼아
하루 한쪽 파내어질 때마다
아멜강으로 채워지는 나.
입 속의 썩은 세상 사라지고
아픔 가득했던 사각사각 소리가
이제는 아름답게 들린다.
그러나 여전히 슬며시 썩어가는 이빨.
조금 더 강한 내일을 꿈꾸는 오늘.
소나기, 그 후
1. 콘크리트
사라지듯 툭 튀어오른 방울 같은 날들
너무 오랫동안 단단하여 쉽게 바꾸지 못하는 생(生)
그런 날이 지고 있다
2. 진흙더미
저 세상 끝 떨어진 칼날 같은 방울
갑자기 들이닥친 변화에 유유히 스며드는 삶
실패한 첫, 사랑처럼 파인다
3. 무지개
서로 다른 인생을 묵묵히 바라보다가
엇갈린 7가지의 목소리, 오늘도 아름다운 불협화음
마 음
맑은 하늘,
눈이 내리고
그 안에
떨어지는 나라면
흐린 하늘,
눈이 내렸고
그 속에 묻혀 사는
그것도 나.
바람 부는 허공.
우뚝 선 눈사람.
거기에
떨고 있는 나라면
밝은 햇살,
시간의 눈빛에
침묵으로 사라지는
그것조차 나.
비 둘 기
자유를 바라며
날으는
새우리 안의
비둘기.
누군가,
열은 문을
차고 나오려는
날개짓.
푸른 허공
문 사이
흩어지는 그들의
한 맺힌
지저귐.
먹구름
몰려들어
그들을 버린
하늘.
비 뚫고
날아 오르는
새우리 안의
봉우리.
그저 한번
몸부림치던
날개 안의
설레임.
보리콩 볼펜
1.
그냥, 평소처럼 생각하세요
상쾌한 아침의 초록이 맞는 시간
우쭐댄 소리의 아이가
히히, 평소처럼 생각하세요
보리에는 콩이 있구요
콩에는 보리가 있어요
볼펜 하나에는 잉크가 잔뜩 들어있는 걸요
2.
6월에는 낮이 있었어요, 그 낮에
소리는 소리없이 소리를 냈어요
불안의 붉은 점이
히히, 평소처럼 생각하네요
보리콩 볼펜 보리콩 볼펜
우쭐댄 소리의 어른이
더 늘어가는 허리를 붙잡고
아하, 아하, 아하
3.
가끔은요
시간에도 독이 있었어요
그 독은
빨리빨리를 외쳐대며
오늘,
우쭐댄 소리의 사람이
미안하다며 미안하다며
회한의 파란 하늘이
오늘도 소리를 치며 소리 너머로
4.
보리콩 볼펜 보리콩 볼펜
오늘 작은 눈물 방울 하나
히히, 우쭐댄 소리의 아이가
방울방울 방울 너머로
마냥 해맑은 웃음을 짓고 있군요
오토바이의 날들도 지나치던 바람넣기도
1.
소음이 지난다
어느 한날,
바람을 넣던 종이조각들
시간의 찢어짐 속에서
나는
어느덧
울부짖는
한낮의 맹수
2.
때로 사람들은
너 한가지로만
될 수 있는 것들은
무엇이냐며
볼멘 소리로
바아앙 소리를 낸다
3.
굉음을 내던 어떤 조각들은
시간의 지나침 속에서
잊혀져간 기억들과
소환해낸 기억들과
달라진 시간들 속에서
아픔을 달리고 있었다
달려간 슬픔의 너머로
4.
오늘 조금 더 살아가서
내일 조금 더 살아야 해서
모레 조금 더 믿어야 해서
그날의 기억들을
한통 속에 모두 날린 채
살아가야 하는 오늘
인생이 서럽다면
5.
거짓은 거짓 너머로 두어야 한다
진실은 진실 너머의 진실을
그 뒤에 속해 있는 그 모든 것들이
6.
오늘 나의 오토바이를 달리게 한다
쌩쌩 지나치는 바람들,
어느덧 지나치는 바람들이
나의 속을 채우고 있다
나의 그날을 달래고 있다
동행의 마음․1
오늘부터
나의 이름을
비워두기로 합니다
이 여백은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바다
몸을 맡겨본다.
어떠한 상처도
남아있지 않을 것 같은 파도,
어떠한 상처도
남아있지 않을 것 같은 바람.
그러나 오늘부터
나의 이름은 비워집니다
언제나 오늘부터.
동행의 마음․2
오늘만이라도
살아내어 보자
누구에게나 있을지 모를
찬란한 하늘의 꿈,
화사하게 시들고
바람마저 세찬
터엉 빈 바다로 달려
사람들의 숨소리 느껴지는
생채기라도 내어
하루를 지키어내는
저 고운 하늘 저 고운 바다 저 고운
바람이 불러내는 오늘,
하루만이라도 살아내어 보자
어쩌면
여엉영 끝나지 않을지 모를.
(사람들은
새벽빛 불어오는 오늘을
내맘대로 걷고 있다)
동행의 마음․3
오늘은
새의 날개를 접어
흰 빛 날리는
너무너무 화창한
꿈이었다
햇살 달려
너의 곁에 가 닿으면
오후의 나른한 한숨 쉬어본다.
날개짓은 멈추지 않고
오늘은
흰 살촉 날리는
너무너무 화려한
꿈이었다
믿음이 있었다
믿음에 빠진 어떤 오늘,
때로는 사랑함에 열려 버린
우리의 마음을 기다렸다가 기다렸다가
마음을 믿고 있었다,
자칭 믿음이 없는 자는
마음 너머를 가끔 바라보며
그 모두에게
사랑을 보인다고도
때로는 지쳐가는 삶들 같은 것이
오늘의 날들을 지켜본다고도
믿음은 퍼뜩퍼뜩
눈부신 깊은 마음 순수가
시작된 그곳엔
나는 있었다 너도 있었다
저기 떠오른 한 시작이 있었다
아주 치열한 슬픔이
나를 둘러싸고 누른 건 슬픔이 아닐까
슬픔이 아니다
나를 들처메고 벼른 건 기쁨이 아닐까
기쁨이 아니다
나를 바라보고 깨운 건 절망이 아닐까
절망이 아니다
나를 일으키고 이룬 건 출구가 아닐까
출구가 아니다
나를 바람에다 재운 건 세월이 아닐까
세월이 아니다
나를 별빛까지 태운 건 버튼이 아닐까
버튼이 아니다
나를 깨우기만 하는 건 채움이 아닐까
채움이 아니다
나를 재우기만 하던 건 이별이 아닐까
이별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