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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지더라도
전창수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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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1.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2. 깨어진 유리의 약속
3. 도배에 관한 진실
4. 내 안의 잔잔한 물결
5. 플레이 오프 (PLAY OFF)
6. 고백-미친:의뢰서
7. 짜장면이다
2부 세상은 넓고 크다
8. 심연 (深淵)
9. 종착역
10. 아이스 에이지 (ICE AGE)
11. 시궁쥐
12. 햄스터 가족
13. 커닝 (Cunning)
14. 세상은 넓고 크다
3부 대박뿐인 인생이
15. 대박뿐인 인생이
16. 영화 보는 소년
17. 거울의 방
18. 김밥을 먹으며……
19. 가슴을 울리는 뒤통수
20. 나는 쓰네
21. 인사는 지금부터다
1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사내는 늘 그 자리다 그 자리에서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전화를 받는다, 멈추지 않는 시계, 또박또박 사내의 뇌 속에 자리 잡는다. 젠장, 이 시계는 고장도 안 나. 푸념도 잠시, 곧 어둠은 사내를 뒤덮고 깊은 잠에 빠져들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하얀 소복 차림의 여자. 오늘은 왜 또 나타났어? 늘, 그런 일을 겪는다는 듯, 사내는 애써 태연하다. 성(性)의 시간은 대체로 거룩하다. 여기는 뜨거운 감자 여기는 뜨거운 감자, 차가운 감자 대답하라 오바, 오바된 삶이 그를 떼어 놓는다 당신 안의 모든 것이 파란색이다. 대답하라, 파란 귀신. 대답하라 파란 귀신. 사내를 조여 오는 하얀 소복 차림의 여자.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사내는 애써 태연한 척이다.
깨어진 유리의 약속
1.
다시는 깨지 않기로
그 투명한 눈을 반짝이며
유리는 우리와 약속하였다.
얼마 후 유리는
동네 꼬마애들이 날려보낸 야구공에
우리들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 깨어지고 말았다.
2.
우리는 유리를 원망했다.
세월이 흘러, 우리는 한가지의 사실을 알아냈다.
우리는 유리에게 명령하지만 유리는 뜻대로 움직일 수 없다
유리는
약속을 지키고 싶어도 누군가 지켜주지 않으면
약속이란 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3.
시간이 지나면서
모든 것이 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더 이상 약속 같은 것은 하지 않게 되었다
스스로를 지키려 해도 지킬 수 없다는 게
이 세상에는 너무 많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 * *
투명한 눈을 반짝이며 우리와 약속한 유리가
왜 그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지 이젠 안다
유리는 다시 나와 약속하였다.
깨어지더라도 거짓말은 하지 않기로
거짓말을 하더라도 속 보이는 거짓말만 하기로
그래서 우리들은 아무말도 하지 않게 되었다
* * *
유리와 우리들 사이엔 이젠 아무것도 가릴 것이 없었다
햇살이 내 곁으로 찾아와 살짝 웃으며 눕기를 요청했다
난 그에게 미소를 보이며 유리의 품 안에서 곤하게 잠들었다
여전히 깨어지지 않은 꿈은 깨어진 유리 사이에서
도배에 관한 진실
1.
- 통신에서 여러 글을 한번에 올리는 것을 도배라고 그들은 말한다.
방은 색이 바랬다. 도배하라는 집안의 난리에 나는 브로마이드로 방을 채우기 시작한다. 그렇게 쌓아올린 사진들이 더 이상 채울 수 없을 무렵, 나는 더 이상 쓸 곳 없어진 방 대신 인터넷에 도배를 한다.
얼마든지 쓸 수 있고 얼마든지 지울 수 있는 그런 방에 무책임하게 도배를 감행한, 한참 후의 어느 날, 나를 무색케 하는 어느 기운에 도배했던 내 방을
썼다 지우길 반복한다, 나도 안다. 나는 결코 지워지지 않는 것임을, 나는 결코 지울 수 없는 것임을.
2.
자, 이제 도배합시다.
보이는 곳을 깨끗하게 보이려는 도배가 아니라.
마음을 깨끗이 할 수 있는 실감나는 도배를,
시작합시다.
내 안의 잔잔한 물결
밤이 깊을수록, 나는 더욱 더 또렷해지는 것이었다 시(詩)란 그런 것이지,또렷해질수록 나는 어두워지는 것. 굳게 닫힌 문은 열릴 줄 모른다 밑빠진 독처럼 마셔도 마셔도 채워지지 않는 목, 고양이 걸음으로 세든 거실을 지나 부엌녘에 들면 그제서야 열리는 서걱서걱 서걱임들 컵에 나자빠진 불개미 한 마리 발버둥 친다. 에미야 어쩜 좋으냐 느그 애비가 말이다. 나는 다시 비현실적이 되고 만 것이다.
어둠 속에서 피어나는 희망, 꽃, 사랑, 시(詩)란 그런 것이지 희망을 얘기할수록 나는 사라져가는 것. 꽃은 피지도 않는 계절에 꽃을 피우겠다고 생떼를 쓰고, 이것이 사랑이라며 이것이 기쁜 노래라며 잔잔한 이야기가 흐른다 세를 내어준 꽃들을 안고 희망을 상징하는 짧은 시를 읊조리면서 나자빠진 불개미 한 마리를 손가락으로 뭉그러뜨린다 가느다란 등줄기가 버둥거리며 안달을 하지만 이미 갇혀있던 그의 운명은 끝나고 있다 에비야, 어쩔 거냐? 이번에도, 빚 탕감. 또, 신청해야죠. 구제불능. 시(詩)에도 새로운 이정표가 필요할 듯합니다, 열려진 문은 좀처럼 닫히지 않는다.
그래, 희망은 사라지지 않는 것이지. 시(詩)란 늘 그래왔던 것이지. IMF 시대에도 희망을 얘기하고 5공화국 시대에도 일제암흑기에도 희망을 얘기해 왔던 것이지. 에미야, 에비 걱정은 하지 말아라. 늘 탕감해주는 빚, 고맙기도 하지. 방랑자의 특권인 게야. 닫힐 줄 알았던 문이 계속 열려 있다 새로 만드는 시(詩)를 감시해야 하는 탓일까 컵 속의 이물질을 죽였기 때문일까 아직도 져야할 빚이 많이 있기 때문일까.
알면 알수록 어두워지는 사랑, 세든 방 건너 들리는 목소리들이 문을 열어 놓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눈다 시(詩)란 그런 것이지, 세상이 어두워질수록 희망을 얘기하는 것. 에비야, 그래도 이번에는 좀 조심해라 잡힐지도 모르니께. 걱정마세요, 저 달리기 잘하는 거 아시잖아요? 컵 속에 죽어있던 불개미가 부르르 떨며 잔잔한 물결이 인다. 목마름이 잊혀질 때쯤 다시 시작되는 갈증 밤이 깊을수록, 부엌녘 건넌방에서 들리는 그들의 목소리는 그들의 목소리는 더욱 더 또렷해지는 것이었다
플레이 오프 (PLAY OFF)
바람은 우익수 쪽에서 좌익수 쪽으로 강하게 불고 있습니다. 스트라이크! 오늘 바람의 방향을 보아서는 홈런 한방으로 승부가 갈릴 확률이 굉장히 높습니다. 입술은 부르트고 양동이에 담긴 미꾸라지 수십마리의 몸놀림이 어지럽다 양팀의 승패를 내다볼 수 없어 심란한 응원단의 열기는 고무된다 가슴을 졸이는 승부처럼 단 한방에 갈리지 않는 미꾸라지는 좁은 원형의 안락처에서 거품을 내뿜으며 운명도 모른 채 아우성이다 홈런, 홈런입니다 오늘의 쐐기포인 듯 합니다 하지만 승부는 어떻게 될지 모르지요. 단기전이란 것은…… (개구리는 15도씨의 남비에 올려놓으면 자신이 죽어가는 사실조차 모른 채로 편안하게 죽어간다고 합니다. ) …… 아, 다시 동점, 동점입니다. 오늘 경기 정말 재미있습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승부. 시청자 여러분 양해말씀 드리겠습니다. 정규방송 관계로 오늘은 이만 중계방송을 마치겠습니다. 미처, 끝을 보지 못하고 양해를 받아야 했던 암담한 승부. 부르튼 입술에 연고를 바르며 그동안 바라보지 못했던 나를 바라본다 바람은 오른쪽 창(窓)으로 들어와 왼쪽 창문(窓門)으로 씨잉씽 지나간다 아우성치던 미꾸라지의 열기가 잠잠하다
------------------------------------------------------------------- 2002년 10월 26일 일요일 기아와 LG의 플레이오프 2차전 상황. 아주 추운 날씨였다.
개구리를 남비에 넣고 15도씨의 불에 천천히 데우면 개구리는 자신이 죽어가는 사실조차 모르고 죽어간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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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 미친 : 의뢰서
1
'미친 년'이죠. 아, 실례. 소위 미친 년이라 불리우는, 어느 동네에서나 볼 수 있었던 불쌍한 동네 아줌마나 처녀로, 비오는 날이면 활동력이 증가하며 꼭 비오는 날이 장날이라고, 헤어스타일은 '삼발'형 (요즘 업굴된 것이 '사자머리'라고나 할까?)을 고수하는 스타일, 거의 얼굴의 감정이 변동이 없죠. 항상 웃음으로 일관하는 품새가 지조가 있다라고나 할까? 시대적이거나 개인사적으로 事件적 불운에 의해서 혹은 후천적 자의나 선천적 운명에 의해서 결정되어 버리는 사회의(특히 지역사회의) 소외된 그녀들. 구체적으로 엄청난 사랑의 배신을 경험하거나, 자기자식의 사별 혹은 처녀성의 유린 등의 사유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으로 분석됨.
나중에 첨가하기로 함. 지금 퇴근함다.
결국은 사랑을 하고 사랑에 속아 그렇게 되버린다고 할 수 있겠죠. 요즘은 자주 볼 수 없지만 우리 주변에는 '미친 년'들이 더 많을 수도 있답니다. 사실 저도 <미친> 년이랍니다
2
친구가 쓴 러브레터. (친구의 성별은 남자임)
사유는 알 수 없으나, 치밀한 연구가 요구됨.
친구의 정신감정 분석의뢰서.
수신 : 지금 이 글을 보는 아무개.
짜장면이다
랩 속에 꽁꽁 숨겨진 그릇 안에서 시꺼멓게 나를 노려보던 그는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조금은 멀거진 기억의 회색빛으로 조금씩 변질되어간다 원래의 목적은 오래 묵은 가슴 안의 때들을 씻겨낼 목적이었지만 저으면 저을수록 씹으면 씹을수록 소화되지 않는 기관으로 얹혀져 그래서 더욱 더 시끄러운 가락, 그 덕에 눈물이 뚝뚝 떨어져 심심하면 먹는 땅콩이 아니라 가끔 한번씩 부담없는 가격으로 어우러질 수 있는 어우러져 어우러지는 것이 아니라 저어서 어우러지는 그래서 정성과 정성, 정성과 사람이 어우러져야 맛이 우러나는 속이 까맣게 타버린 사랑이다 그래서 짜장면이다 시꺼멓게 타버린 사랑이 아니라 적당히 저은 후에 비로소 맛을 내는 그래서 탄 듯 만 듯한, 그래서 보기보다 먹음직한 그것이 내 사랑이다 짜장면이다
2부 세상은 넓고 크다
심 연 (深 淵)
갸륵하다 번지르하게 윤나는 두 평의 세상 청둥오리 물결 치는 한밤의 기도로 하늘은 하루종일 푸르렀다 허리 휘도록 웅웅웅 소리내는 진공청소기 허리 반 듯 그 옛날 대(大)자로 뻗던 자리 누울 수 없다 창틈 한껏 내(余) 달(月) 비추던 자리 뿐이다 긴긴 이부자리 편 듯한 구김살이다 네모난 세계 꽉꽉 들어찬 세간살림이 비웃는다 제대로 한번 웃은 적 없는
가구는 꿋꿋하다 두 평의 세상, 청둥오리 물결 이는 고요함 사이 비치는 달빛, 내(余) 영(靈) 가득 불놓아 지쳐 우는, 이음새 잇닿은 하늘, 속내 들킨 듯 움츠리다 새우눈 치켜 뜬 가랑비 내린다 홀로 우는 새벽이 너무 길어 노을이다, 외치던 구김살이다 길게 울던 말 뭐 그리 바빠아 세상 어디에도 너그럽게 반길 이 나타나지 않아 술에 취해 반기는 거짓의 시간.
쉰 목소리 움켜쥔 간밤내 떠노는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깊은 연못 어딘가에 길러져 피어난 좁은 자리, 갸륵하다 반지르하게 윤나는 두 평의 세상
종착역
기차가 덜컹거리며 시간을 초월한 속력으로 빗속을 지나쳤다 죽음은 바로 옆에까지 왔다가 급정지의 사소한 일상에 한방을 얻어맞고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더니 뺑소니를 친다 먹구름 잔뜩 낀 날 기차가 덜컹거리며 시간을 배반한 속력으로 지구를 떠나갔다 죽음은 기차의 곁에서 잠시도 떨어질 줄 모르고 영혼의 식사를 시작했다 빼앗긴 영혼들이 가득한 저 기차 안에는 죽음을 예감하지만 죽음을 두려워하는 그러면서 항상 죽음을 곁에 두고 사는 많은 사람들이 시간의 기적을 울리고 있다
아이스 에이지(ICE AGE)
얼음이 쩌어억- 갈라지고 있었다 수세기에 걸쳐 녹여진 마음. 도토리를 차지하기 위한 다람쥐 스크랫의 투쟁은 역사를 뛰어넘어 지금도 이어진다 <다람쥐를 보호합시다> 심심풀이로 도토리를 주워가는 사람들. … 심심풀이로 던진 돌에 개구리는 맞아죽을 수도 있습니다… 나무늘보 시드와 맘모스 매니에게 우연히 맡겨진 임무. 아기 로산을 인간에게 데려갈 것. 호랑이 디에고에게서 아기를 보호할 것. 여행은 위험천만하다. 얼음 땡, 시대를 녹이기 위한 매니의 노력. 디에고의 항복은 자연스럽다. …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사람이 경찰에 붙잡혔습니다… 즐길 줄 아는 그들이 곡예를 한다. 얼음만이 가득한 세상, 파라다이스를 즐기며 먹을 것 하나 없는 이 세상에 따스한 온기 하나로 빙하를 녹이고 있다, 로산! 로산! 아기가 인간에게 구출된다. 아기가 멀어진다, 세상이 멀어진다. 아득하다. 빙하의 시대가 끝이 난다. 그들도 사라진다 지구의 온난화가 시작된다 … 자신의 목숨을 바쳐 인간의 생명을 구한 강아지가 … 도토리가 거리 곳곳마다 뒹굴고 있다
시궁쥐
만신 창이된 시궁쥐*가 병균을 매개로 활개친다. 몸은 크며 귀는 두껍고 짧으며 正中線(정중선)에서는 긴 털이 密生(밀생). 지하철 곳곳에서 뿜어낸 독기가 전류를 타고 넘쳐흐른다. 배수가 잘 되지 않아 질척질척한 열차 안, 속에서 내뿜는 열기는 깜깜 무소식이다. 시궁쥐도 무소식이다. 희소식이 무소식. 무소식이 悲報(비보), 悲報(비보). 한 자락 희망을 안고 시궁쥐는 진창*에 빠져 삶의 아우라를 붙잡고 허우적댄다. 얇은 실눈으로 주시하던 이 세상 어딘가에 빨간 색의 불이 번져 가고 진창이나 시궁창이나. 타오를세라 삶의 헛발을 재빨리 닫고 내딛는 저 생명력. 희망의 시작, 삶은 지나치던 시궁창이다. 허우적대던 시궁창이다. 불길 뚫고 내딛는 저 시궁쥐, 날카로운 눈빛 가득 한 더미의 슬픔을 뱉고 시궁창으로 행진 중이다.
햄스터 가족
1번 햄스터 : 나는 그놈이 싫다. 그놈은 나의 놀이기구를 빼앗아 혼자 가지고 논다. 나는 어쩌다가 나의 두 앞발로 그놈의 배를 걷어차 보지만, 그놈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놈은 보란 듯 나를 깔아 뭉게고는 뭐든지 혼자서 독차지한다. 내가 좋아하는 해바라기씨도 혼자 다 먹고…
2번 햄스터 : 요놈은 틈만 나면 도망갈라 그런다 지 둥지에선 매일 고양이에게 쫓기면서도 낯선 냄새 무서워 나에게 다가오려 하지 않는다 지 에미도 몰라보는 놈이라니, 며칠 간 외출을 시켰던 건 우리 주인의 크나큰 실수였다
3번 인간 : 나는 본다. 저들의 세계를. 그러나 단념하지 않는다. 저들의 세계는 낯설지만 낯익고, 아프지만 아프지 않은… 나는 그들에게 다가갈 수 없고 그 다가설 수 없음에 절망하지만, 나는 그들을 키운다 사각의 절제된 방 안에서 사각의 절제되지 않은 햄스터, 우리 안에서…
커닝(Cunning)
둥글게 형광등을 싸고 있는 세상, 희미하게 보이는 나와 의자와 침대와 그리고 커닝(Cunning) 없는 세상. 맥주박스를 힘겹게 옮기는 트럭아저씨, 뭐가 불만인지 볼멘소리로 투덜거리면서 남자친구를 구박하는 여인, 내일을 향해 힘차게 뛰어노는 아이들, 뒷동산 머언 산, 그리고 강이 흐르는 앞마당. 적적하게 담배를 피워올리며 거리를 내다보는 어르신들. 자리를 옮기면, 누군가 한마디 한다. 의자에 앉아서 궁상을 떨고 있는 또 한 명이 있다고. 침대 머리맡에 놓인 스위치. 밤이 되면, 사라지는 모드. 세상은 둥근데, 정치를 하는 어르신들의 한마디. 어디 한번 잘 살아 봅세!
아무래도, 한국에선 못 살겠어요, 교통이 너무 안 좋아서요. 아이구, 서울 거리는 왜 이리 복잡하다냐? 여보게, 여기 어딘지 아슈? 내 아들 놈 집인데. 할아버지, 저도, 여, 여기 처음인데요? … 막무가내로 내민 쪽지엔 <충북 청주시… : 교통이 좀 복잡하니까 중심을 똑바로 잡고 오세요> 어, 어라. 할아버지. 터미널로 다시 가세요. 잘못 오셨어요.
우리 당을 찍어주세요! 다 함께 잘 살아 봅시다! 저 양반들, 뭐야? 에잇, 저 **같은 새끼들. 할아버지, 말씀이 좀… 뭐, 내 말이 어때서? 저런 놈들은 우리 나라에서 사라져야 해. 에잇, 퇴퇴퇴! 프랑스로 가고 싶어요. 세계일주하는 것이 저의 꿈이지요. 그래, 그래, 자네는 좋은 꿈을 지녔구만. 부디, 성공하게나. 아이구, 터미널로 가려면 어찌 가야하남? 여기서 지하철 2호선을 타시고…
둥글게 세상은 돌고 돈다. 베개를 꾸욱 안고 잔뜩 쪼그라진 잠이 든다. 아침이 들면 밤새 가시지 않은 피로와 맞선 악몽, 커닝(Cunning)없는 사회가 처량하다
세상은 넓고 크다
그녀는 어린 시절 그녀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아주 조그만 반지를 기억해낸다 그것은 순금으로 된 실 반지였다 왜 하필이면 실 반지였을까 그녀는 거울에 그녀의 모습을 비추어본다, 아무리 봐도 그녀의 머리는 너무 크다 가냘픈 허리 그보다 더 작은 실 반지처럼 뼈만 앙상하고 섹시한 다리 그럼에도 그녀의 머리는 너무 커 아무도 그녀를 거들떠보지 않는다
세월이란 것은 미래에서 과거로 흘러가지 않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머리는 점점 작아져만 간다 그녀는 그녀의 머리가 너무 무거워 머릿속에 든 짐을 하나씩 풀어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의 머리가 뼈만 앙상한 섹시한 머리가 되기에는 그녀의 머리에 든 짐이 너무 많았다
그녀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녀는 그녀의 머리에 짐을 실기 시작했었다 그때부터 그녀의 머리는 기하학적으로 늘어만 갔다 아마도 너무 많은 세월이 그녀로부터 역행한 듯하다.
그녀는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었다. 제 머리가 무거워 보이나요? 아니요. 너무 커 보이는군요. 그럼, 어떻게 해야 작아 보이죠? 글쎄요. 그저 있는 그대로 보이는 게 훨씬 낫지 않을까요? 그녀는 거울을 본다. 그녀는 이제 그녀를 거들떠보지 않는 남자들을 신경 쓰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의 몸매에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그녀는 자신의 옷을 정성스레 벗듯이 실반지를 벗는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머리를 벗기 시작한다.
3부 대박뿐인 인생이
대박뿐인 인생이
로또에 관한 이야기라고, 오류하지 마세요 죽음에 관한 이야기거던요 아니요 문법이 틀렸어요 틀리는 순간 그것은 아! 바로 옆이 낭떠러지군요 그러나 그 밑은 아주 낮아요 툭 빠지면 또, 아니아니 더러운 이물질이 올라와요 음 - 냄새 좋군요 - 라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 그것은 죽음의 냄새랍니다 대박 터져 죽은 심장의 시체들 즐비해요 마구마구 닥치는 대로 그 거대한 악마는 아니아니 그 거대한 천사는 죽음을 집어 삼켰죠 사랑이란 허울 좋은 과시 앞에서 말이에요
말이죠 아- 로또에 관한 이야기라고 제발, 오류 좀 써주세요 문법이 맞지 않는다고 주제가 없는 인생이라고 나무라지 말아요 대박 터지는 인생 한 번의 큰 기쁨으로 심장이 터져 죽은 사람들은 그저 행복할 뿐, 뿐이에요
영화 보는 소년
“아저씨, 추워요. 라이터 하나만 사 주세요.” 라이터 하나를 사고 나는 게임에 접속한다‘접속하시겠습니까? 게임에 접속하는 순간 당신의 목숨이 위험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소녀를 구하기 위해 PC방에선 연일 목숨을 걸고 사람들이 접속 중이다‘할머니가 게임을 알아요?’신문에는 게임 속 영웅처럼 장렬하게 죽음을 맞이한 매니아들이 이 세상에서 떼구르르 떨어져 나간다‘병원으로 가시면 소녀를 구할 확률은 0%입니다’영화를 보고, 나는 버스를 탄다. 600원을 적선하고 남은 돈은 400원. 주머니 속에서 100원을 꺼내 창밖으로 내동댕이친다 남은 돈은 300원. 바람이 휭하니 들어와 창이 절로 닫힌다
남은 돈으로 뭐할까?
적선.
한 푼만 적셔 달라굽쇼?
사오정 같으니.
지금은 겨울이 아니라 가을, 애써 상기시키듯 낙엽이 뒹군다 여기가 어디지?. 가을, 아니. 겨울. 여기가 어디냐구?. 겨울, 아니지. 가을. 사오정 같으니.여기가 어디냐니까?. 대체 몇 정거장을 더 지나쳐 온 거야?. 아직 가을은 지나지 않았어, 추워졌을 뿐이지. 젠장, 묻는 게 아닌데. 영화는 재밌었어?. 여기가 어디냐니까?. 병신. 뭘 봤는지 기억도 못하면서. 대체, 여기가 어디냐구?. 네가 오늘 본 건 라이터 파는 소녀가 아니잖아, 왜 아직도 가을이냐구 묻는 거야?, 가을 맞다니까. 정말 너하고는 말이 안 통해. 병신, 지하고도 말이 안 통하면 누구랑 말을 하겠다는 거야?. 네온사인 간판이 빽빽이 들어찬 어느 정거장, 버스를 내려 터벅터벅 걷는다.
남은 돈으로 뭐할까?.
적선.
병신, 미쳤어? 300원 남았는데.
응, 너 미친 거 맞아, 내가 미쳤거든.
제기랄.
나는 100원짜리를 하나씩 내동댕이치기 시작했다.
첫번째 100원은 차들이 씽씽 달리는 도로 위의 어느 차에 정확히 명중했다. 워낙에 씽씽 달리던 차라 미처 멈추지 못해, 나는 얼른 그 자리를 벗어났다. 두번째 100원은 지나가던 꼬마애에게 아이스크림이나 사먹으라고 쥐어주었다. 요즘에 100원짜리 아이스크림이 어딨냐고 투덜대는 아이 덕에 나는 18세 이후 한 번도 하지 않았던 100미터 달리기를 했다. 세 번쨰 100원은 슬쩍 집어서 바지주머니 옆으로 흘러 뜨렸다. 아주 착한 어떤 아저씨가 동전을 주워서 나한테 건네주려고 해서, 나는 열심히 뛰었다. 정말 열심히 뛰었다. 아저씨도 열심히 쫓아왔다. 나는 아저씨 가져요, 라고 소리쳤지만. 아저씨는 막무가내였다. 요즘 100원이 얼마나 큰돈인지 아냐며, 나를 잡으려 했다. 숨을 헐떡이며
여관방에 서 있다. 부끄러워 그랬나 보다. 그녀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는다. 나도 쳐다보지 않았다. 숨을 헐떡였을 뿐이다. 그런데, 내가 왜 여기 있을까? 이유 없는 세상에 살고 있나 보다. 그래서 이유가 필요한 것인가 보다. 섹스에 이유가 있다면 본능일 뿐이다. 그래서 소녀는 라이터가 필요했었나? 그래서, 소녀를 얼어 죽여야 했나?
정신 차려, 여기가 지네 집인 것도 몰라?.
야, 너 누구야?, 누군데 자꾸 말을 시켜?.
내가 너지 누구야?, 지금까지 얘기해놓고 기억도 못해?.
주머니 속이 허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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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선우 감독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에서 주인공이 주로 했던 말
영화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에 나오는 나래이션
2002년도에 정선희 할머니가 모 일간지에 연재했던 칼럼 中
2002년 10월, 한국이라는 나라에서는 PC방에서 며칠씩 세우며 게임을 하다 과로로 쓰러진 사람이 유난히 많았다
영화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에서 게임에 접속한 이후의 나래이션
2002년 10월의 버스 성인요금은 600원이다
영화 “둘 하나 섹스”의 대사 中
2002년도 대한민국의 가을은 유난히 추웠다.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을 이렇게 부르기도 한다.
자신’의 방언. 상대를 격하시킬 때 쓰는 말이다.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에서 미션의 목적은 소녀가 라이터를 팔지 못하게 해 소녀를 얼어죽게 하고 그녀가 죽는 순간 떠올리는 사람이 승자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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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의 방
절제된 사각의 방은
어지럽다, 반듯하게 시작(始作)해야 할 방은 삐걱거리며 조각가를 맞이할 준비에 분주하다 책상은 의자를 향해 강펀치를 날려 의자의 한쪽다리를 부러뜨렸다 의자는, 웃으며 입을 닦고 다리 절뚝이며 조각가를 맞이했다 <의자가 좀 오래되었나 보군요> 조각가의 질문에 거울이 대답한다 당신보다는 새 것입니다 조각가는 거울의 대답을 듣지 못한다 <고쳐야겠군요>
절제된 사각의 방은
분주하다, 이번 주말에 높으신 손님을 맞이해야 하는 방이 말한다 <의자를 고쳐야겠군 책상도 새것으로 바꿔야겠어> 복수를 꿈꾸던 책상은 의자에게 화해의 손짓을 보낸다 <이미 늦었어> 의자가 대답한다 <반듯하게 始作해야 할 방은 반듯하게 있어야 해 너 대신 새 주인을 맞는 내 기분은 정말 설레인다> 거울이 의자에게 소리친다 <때론 헌 것이 새 것보다 낳을 때도 있습니다> 의자는 듣지 못한다.
절제된 사각의 방은
울상이다, <가구가 별로 없군요 가구가 없으니 뭔가 허전해 보이는군요 의자의 前 주인이 누구였습니까 폭력이란 아래로 향해 있다는 것을 당신은 아십니까 책상의 前 주인이 당신이었습니까 이 방은 다시 오지 않는 게 좋겠군요> 거울이 그에게 묻는다 <이 안에 있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가 대답한다 <나는 당신의 주인입니다>
절제된 사각의 방은
텅 비어 있다, 거울이 묻는다
당신의 주인은 누구십니까?
김밥을 먹으며…
길다랗게 토막난 야채들과 순간적으로 타오른 불꽃에 볶아진 김들이 어머니의 손에 의해 차곡차곡 쌓여졌을 길고 긴 김말이의 순간
김밥을 먹으며 나는 생각한다 그들은
어머니의 솜씨 좋은 손놀림으로 잘리워져 은박의 1회용 도시락통에 담겨져 내 앞에 있을 것이다
옆구리가 터지거나 속이 뭉개져 하얀 속살이 훤하게 드러난 김밥은 보이지 않는다 모두들 깔끔하게 정돈된 흠이 없는 김밥이다 김밥 한 개를 먹을 때마다 오렌지 프리미엄 주스는 한모금씩, 꾸역꾸역 메인 목을 타고 흐른다
생각에 잠겨있는 나는 김밥을 먹으며
오렌지 프리미엄 주스를 커피잔에 따라 마시고 있다
아주 뜨겁게 달구어진 커피를 마시다가 바닥에 떨어져
이가 조금 갈려진 커피잔, 그것을 보며
뜨거운 남비를 다루던, 그 남비에서
라면이 끓는다
아무리 곱게 길러도 면발은 제멋대로 수증기를 따라 흐른다
보들보들한 살결이 곱지만은 않은 식욕을 끌어당기는 냄새가 익는다
양손에 두꺼운 수건을 겹겹이 둘러싸고 뜨거운 남비를 들어올린다
길길이 날뛰던 음식들의 혼연한 향기보다
더욱 더 그리운 냉정한 체감으로
비로소 완성된 식단.
차가운 김밥.
커피잔에 담긴 오렌지 프리미엄 쥬스.
뜨거운 라면.
가슴을 울리는 뒤통수
퍼억퍽 아침의 질척거리는 교통체증, 아니 가슴을 짓누르는 이상한 체중 나의 단잠을 깨우는 이상한 목탁소리, 도시를 상실케 하는 라디오의 소음은 커져만 가고 사람들, 자신이 갇혀 있던 동굴 속으로 출근을 시작한다 배배배 꼬인 창자 움켜쥐고 아니 참아내고 스트레스 한뭉치 꿀꺽 집어삼킨 개미떼들처럼 우르르. 지상은 천지가 요동치는 경적 소리다 아직 이 세상에서 뭐 하나 제대로 해본 것도 없는데, 더러는 궤도를 이탈해 달라고 요구하는 왕벌. 새벽 네시 기도를 알리는 종소리가 요란하기는 한데, 아침 일곱 시 날은 완전히 밝고 출근길은 여전히 북새통이다 뒤통수를 맞은 듯 가슴이 아파오는 오후 무렵, 벌침에 쏘인 사람들은 눈물 나는 어떤 사연에 내일을 기다리고 세상은, 천지를 뒤덮은 먹구름이다
나는 쓰네
<1> 위 운동이 부족해요
저 남자는 끊임없이 트림을 내뱉습니다. 꺼억, 꺼억, 꺼억꺼억꺼억…. 듣기 거북합니다. 무슨 이유일까요. 나이는 30대 초반쯤 되어 보이고, 안경이 꽤나 두껍군요. 키는 큰데, 좀 많이 말랐군요 심각한 수준이네요 어머나, 눈이 반쯤 감겨서 마치 그 옛날 길동이의 꺼벙이를 연상시키고 있군요 놀랍습니다 멈추지 않고 꺼억꺼억꺼억…… 까치였나? 까악까악이 아닌 꺼억꺼억. 으- 이제는 더 심해지네요 꺼어어어억! 놀라운 트름일 따름입니다 대체, 무슨 병이 있길래?
<2> 나는 총각이거든요
저 여자는 나를 끊임없이 흘려 보는구나 왜지? 내가 뭐 잘못했나? 아- 나의 꺼억 소리 때문인가 보군. 지겹다. 이놈의 트림. 멈추길 바래- 그러나, 한번 나빠진 위속의 운동부족은 멈추지 않는다 어서 가자 어서 가자 -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악랄한, 누군가를 위해서는 한 번도 일어서 본 적이 없는 차디찬 바람.
<3> 만남은 늘 어긋난
그들은 말이 없다 남자가 꺼억 소리를 멈추자 여자는 더 이상 남자를 쳐다보지 않는다 남자가 버스의 벨을 누르자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환승카드기에 삐익- 소리를 내며 자신의 카드를 댄다 남자는 그녀의 뒤에 서 있다 버스가 멈추자 여자는 내려서 뒤에 오는 버스를 향해 힘차게 내달린다 남자는 그냥 터벅터벅 힘없이 내리더니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버스에서 내린 그래서 다른 버스를 타고 가버린 그녀와 같은 방향이다 그와 그녀는 사실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온 동네친구란 소문이 무성하다 나는 그 말을 그 남자의 동네친구에게서 들었다 사실은 그 남자는 나일지도 모르고 그녀는 내 애인일지도 모른다고 그녀가 말했다
인사는 지금부터다
인사는 지금부터다 환상이다 환상이다 버릇처럼 깨어나는 아침 차량들 차곡차곡 모여지고 있습니다, 라디오에서도 아침인사를 한다 밤새 첫눈처럼 내린 낙엽을 밟고 지나가면 버스를 기다리는 두 여자의 까르륵 도로 가득 메우고 칠보 가는 55번 시내버스 견인차에 실려 가고 있다 식수통 가득 담은 아주머니의 발걸음은 스르르- 미끄러짐이 자연스러운 날씨다 터미널 가는 300번 좌석버스의 불규칙한 기다림. 내일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란 듯, 입김을 호호 불며 발을 동동 구르는 사람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굳어 있다 만원인 버스에 올라서면 빼곡히 들어차 더 들어갈 틈도 없는 세상이 있다. 불가항력의 승차거부. 시간은 더불어 승차거부를 한다 차량들 서서히 빠지고 있습니다, 이어폰에서 이어지는 신호음. 삐이이- 사람들 한결같이 빠져나간 정거장, 버스는 조금 늦게 종착역을 향해 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