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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마리, 변하다 외 3편
전창수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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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마리, 변하다
핸드폰 안에는 그 녀석이 있었다
재판
외인
로즈마리, 변하다
1.
시해는 집에 들어오는 벌레를 쫓는 방법은 없을까를 고민해 보았다. 약을 뿌리는 건, 일시적인 방편이니, 지속적으로 벌레가 근처에 안 오게 하는 방법이 필요했다. 어느 날, 상구네 집에 갔는데, 식물이 하나 있었다.
“이게 뭐야?”
“로즈마리.”
“어, 이걸 왜 키워?”
“벌레들이 싫어하거든”
“그래, 나도 키워야겠다.”
“그래, 그럼 하나 골라봐.”
“진짜?”
“어, 난 많거든. 가지치기 하면 여러 개 키울 수 있어.”
“그렇구나.”
벌례 때문에 고민이었던 시해는 상구가 고마웠다. 상구의 집에서 로즈마리를 골라 보는데, 희한한 모양의 로즈마리가 하나 있었다. 위와 중간이 넓은데, 위와 중간의 사이는 좁고, 아래 쪽 역시 좁게 풀들이 나 있는 로즈마리였다.
“이건 왜 이래? 다른 건 반듯한데?”
“나도 모르겠어. 아무리 똑바로 자라게 하려고 갖은 방법을 동원해도 늘 저래. 희한한 건, 그래도 죽지는 않는다는 거야. 어때, 맘에 들어?”
“음… 난 오히려 이런 게 좋은 거 같은데?”
“그렇지? 그럴 줄 알았어. 역시, 그건 내꺼가 아니었다니까.”
“왜?”
“왠지 저 로즈마리는 나를 싫어하는 거 같거든.”
“그런 느낌도 들어?”
“응, 그래서 나도 그 녀석을 언젠가 떠나보내려고 마음먹고 있었지.”
“아, 그래? 고맙다. 내가 질 키워볼게.”
‘내가 고맙다. 히히.“
시해는 로즈마리를 가지고 집에 왔다. 그것을 보면, 왠지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 로즈마리가 벌레를 쫓아준다는 말이 좋았다. 그래, 이젠 벌레에서 해방되는 거야!
2.
시해는 로즈마리를 데리고 와서 지극적성으로 돌보았다. 너무 지나치게 물을 많이 줘도 안 된다는 말에, 물을 언제 주는 것이 적당할까를 고민하면서 물을 주었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로즈마리에게 사랑한다고 말해주었다. 그 덕분인지, 더 이상 시해의 집에 벌레가 접근하지 않았다. 시해는 살 것 같았다. 이 로즈마리가 아니었다면, 여전히 벌레들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거라는 안도감이 시해의 마음에 자리잡았다. 시해는 더욱 더 로즈마리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다.
시해는 꿈을 꾸었다. 로즈마리가 사람으로 변하는 꿈이었다. 그것도 여자다. 사람으로 변한 로즈마리는 시해에게 몹시도 불친절했다.
”아, 씨X!“
사람으로 변한 로즈마리가 욕부터 해댔다.
”아니, 누, 누구세요?“
”너 때문에 망쳤다.“
”망쳤다니요?“
”내가 사람되는 거. 너 나를 왜 이렇게 예뻐해? 앙!“
아름다운 그 여인은 오히려 시해를 나무랐다. 시해는 정신을 못 차렸다.
”나를 미워해야 내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왜 나를 이리로 데려와 가지고, 끔찍이 아껴주는 거야?“
”그야, 식물이니까요.“
”난 식물이 아니라고!“
”좀 전까진 식물이었잖아요. 로즈마리.“
”그래, 그랬지.“
”어떻게 된 거예요?“
”마법에 걸렸어. 악.“
”왜요?“
”난 다시 식물으로 변한다. 아아 억울해. 아직 할 말도 다 못…“
시해는 그녀가 식물로 다시 변하는 것을 보았다. 꿈에서 깨니, 로즈마리는 여전히 그대로 있었다. 저 식물이 정말로 사람으로 변할까? 그럴 리는 없을 거 같은데. 로즈마리를 바라보는 시해의 표정에 두려움이 일었다. 여태껏 자신이 열심히 돌봐왔던 로즈마리에게서 배신감도 느꼈다. 사랑의 대가(代價)가 이런 것인가. 시해는 로즈마리를 정말로 미워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로즈마리가 정말로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도 들었다. 한편으로는 로즈마리가 정말 사람이 되길 바라는 마음도 생겼다. 꿈에서 본 그녀가 여자였기 때문이다. 시해는 이 알 수 없는 양가감정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시해를 지탱해주는 무언가가 빠져나가는 느낌, 그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시해는 밤새도록 로즈마리를 기다렸다. 로즈마리는 변하지 않았다. 아침이 오고 뜬금없이 상구한테 전화가 왔다. 상구가 시해네 집에 있는 로즈마리를 보고 싶다고 했다. 시해는 상구에게 갑자기 왜 그러냐고 물었다. 상구가 자기도 모르겠다고 했다. 그 로즈마리가 너무 보고 싶어서 밤에 잠을 못 잤다고 했다. 시해는 상구에게 집으로 오라고 했다. 상구가 집까지 오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택시를 타고 왔기 때문이다.
시해는 상구에게 밤에 꾸었던 꿈 이야기를 했다. 상구도 비슷한 꿈을 꾸었다고 했다. 지금은 꾸지 않지만, 그 로즈마리를 갖고 있을 때는 자주 그런 꿈을 꾸었다고 했다. 그래서 이 로즈마리를 미워했고, 그래서 시해에게 준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미안하다고 했다. 껄끄러우면, 자기가 다시 가져가겠다고도 했다. 시해는 싫었다. 이 로즈마리를 미워하기가. 시해가 상구에게 말했다.
”너는 미워하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나는 이 로즈마리를 미워하지 않을 거야. 그냥 꿈일 뿐이잖아.“
”그런데, 이상한 꿈이지.“
”너는 이 로즈마리를 버려놓고 다시 보고 싶어 이렇게 온 거잖아.“
상구가 아무 말 하지 못했다.
”이 로즈마리는 내가 잘 키워볼게. 보고 싶으면 언제든 와.“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상구의 마음이 틀어진 것은. 상구는 한참동안 아무 말이 없더니, 잘 있어, 라는 말 한마디 남기고 휭하니 가버렸다. 시해는 상구의 태도가 조금 이상했지만,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시해는 상구를 보내고 로즈마리를 쳐다보았다.
”로즈마리, 오늘부터 너에게 너의 이름을 지어줄게. 영순이. 어때? 마음에 들어? 넌 오늘부터 나의 여자친구다.“
시해는 자신이 왜 이런 생각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로즈마리에게 왜 여자친구라고 하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지만, 왠지 그러고 싶었다.
상구가 자주 꿨다는 그 꿈을, 시해도 자주 꾸었다. 꿈속에서 그녀는 자주 나타나 시해에게 투덜댔다.
”이러면, 내가 사람이 못 되잖아! 제발 날 사랑하지 말라구.“
”왜, 왜 사람이 못 되는데요?“
”그걸 말로 설명할 수가 없…아, 씨X. 또 변하네…“
듣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늘 설명을 들을 수 없었다. 꿈 속의 영순이는 언제나 투덜대기만 하다가 로즈마리로 돌아갔다. 꿈속의 영순은 늘 알몸이었지만,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듯 했다. 옷을 왜 안 입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저 식물로 살아가느라 옷이 없겠거니 짐작만 할 뿐이었다. 더더군다나, 그건 꿈일 뿐이잖아, 라며 시해는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어떤 성적인 욕망도 허용되지 않는 꿈일 뿐이었다.
가끔, 꿈에서 깨고 나면 몽정을 할 때도 있었다. 알몸의 영순이가 너무나도 탐이 나서 그녀에게 성관계를 요구하고 싶었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러고자 시도하려고 하면 꿈에서 깨었다. 시해는 로즈마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자꾸 그의 꿈 속에 나타나서 이렇게 성적 욕망을 부추기는지. 시해는 로즈마리를 계속 돌봐주는 게 맞는지, 계속 사랑해야 하는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시해는 그래서 결정을 내렸다. 한번도 시도하지 않았던 가지치기를 해보기로. 만약, 이 로즈마리가 진짜 사람이라면 잎을 자를 때 조금은 아플 거다. 그래서 다시는 내 꿈에 나타나지 않을 거다. 라는 위험한 생각도 함께 했다.
3.
꿈은 이어졌다. 아주 조금 잎의 귀퉁이를 살짝 잘라 내었을 뿐이라서 그런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시해는 로즈마리 잎의 반을 잘라내기로 했다. 가위를 들고 그 앞에 섰다.
”네가 사람으로 변하면 안 자른다!“
시해는 잎을 잘라내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꿈일 뿐인 건가. 시해는 문득, 자신이 이 로즈마리를 미워하고 있다는 생각에 미쳤다. 시해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시해는 이 로즈마리 영순을 지극정성으로 돌봐주기로 마음먹었고 사랑하기로 마음먹었었다. 지금의 그는 그렇지 않았다.
”내가 왜 이러지.“
시해는 다시 로즈마리를 지극정성으로 돌봐주기로 마음먹었다.
“미안하다. 앞으로는 너를 더욱 지극정성으로 돌보아 줄게”
꿈은 점점 더 심해졌다. 어느 날은 사람으로 변한 영순이가 시해를 죽이려고 칼을 든 것을 보기도 했다. 로즈마리 영순을 사랑하면 할수록, 꿈은 점점 더 악몽으로 변해갔다. 시해는 자꾸 왜 그런 꿈을 꾸게 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이렇게 지극정성으로 너를 돌봐주는데, 그 대가가 겨우 이거냐, 며 푸념을 하는 순간이 늘어만 갔다. 한편으로는 꿈일 뿐이잖아, 라며 위안을 삼기도 했다. 그렇지만, 꿈이 자꾸 신경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시해는 상구에게 전화를 해서, 지금 꾸고 있는 꿈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상구가 미안하다고 했다. 자기도 그런 꿈을 자꾸 꾸었다고 했다. 이 식물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때 마침 시해가 가져가겠다고 해서 반가웠다고 했다. 아무래도 버리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상구가 말했다. 아직도 그 식물이 보고 싶냐고 상구에게 물었다. 지금은 벗어났다고 했다. 어떻게 벗어났냐고 물었더니, 시해가 지극정성으로 돌봐주겠다는 말을 듣고 나서는 더 이상 그리워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상구가 물었다.
“아직도 그 마음 변함 없는 거야?”
“나도 잘 모르겠어. 어느 날은 미운데, 그러다가도 이럼 안 되는데 하는 생각도 들고. 그냥, 식물일 뿐이잖아. 그리고 꿈은 꿈일 뿐이고. 왜 분리가 안 되는 거지?”
“버리고 싶지 않으면, 다른 사람한테 줘봐. 대신, 그 상황을 솔직히 얘기하고.”
상구는 다른 누군가가 또 같은 피해를 입으면 안 된다면서, 시해에게 솔직히 얘기하라고 했다. 시해는 그 식물을 받아 줄 사람이 있을까, 하고 상구에게 물었다.
“그거야, 잘 모르지. 동기들 집에 초대해서 파티 한번 벌이는 건 어때? 네 생일이 언제지?”
“아직 멀었지.”
“뭔가 축하할 만한 일 없어?”
“이번에 면허 땄어.”
“아, 그걸 이제야 얘기하냐. 축하파티 연다고 해. 내가 도와줄게.”
상구는 시해와 파티의 자세한 상황에 대해서 얘기하고, 이 식물이 누구의 주인이 될 수 있을 건가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파티에서 시해가 겪은 이야기를 모두 이야기할 거라고 하면서.
4.
시해와 상구의 친구들이 면허를 땄기 때문에 축하파티를 연다는 말에 다소 의아해했지만, 파티에 오면 깐풍기를 시켜주겠다고 하니, 흔쾌히 오겠다고 했다. 다른 것보다 깐풍기는 무척 먹고 싶었나 보다. 여섯명이 오기로 했다. 상구와 시해는 로즈마리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작전을 짰다. 시해가 꾸는 지나친 악몽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악몽을 꿀 수도 있다는 정도만 얘기하기로 했다. 시해는 그래도 되냐고, 상구에게 물었더니, 만약 불편을 느낀다면, 버려도 된다고 얘기해주면 된다고 했다. 시해는 맞는 말인 거 같다며 동의했다.
파티날이 되었다. 토요일이었다. 시해는 친구들에게 12시쯤 오라고 했다. 10시쯤 친구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친구들이 전화를 받지 않았다. 시해는 문자를 보냈다. 몇 시쯤 와? 여섯 명 모두 전화를 받지 않았고, 10분 후 답문이 오기 시작했다.
“미안. 급한 일이 생겼네. 갑자기 부모님이 오신대”
“미안, 오늘 여자친구가 만나자고 떼를 써서. 거기 간다고 했더니, 오늘 자기 안 만나면 헤어지는 걸로 알래.”
“미안. 동생이 갑자기 아파서.”
“미안. 갑자기 해외출장이 잡혔네. 오늘 아침에 연락왔어.”
“미안. 나 갑자기 아파서 병원에 와 있어. 링거 맞고 있어.”
“미안. 오늘 집이 이사하는 걸 깜빡했네. 와이프가 그걸 잊어버리면 어떡하냐고 벼르고 있어서.”
여섯 명 모두 오지 않았다. 시해는 상구한테 전화를 걸었다. 상구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문자를 보냈다.
‘모두 못 온다는데 어떡하지?“
10분 후 상구한테 전화가 왔다.
“시해야. 미안하다. 이제 나도 어떻게 할 방법이 없네. 네가 알아서 해야겠다. 나도 잘 모르겠어. 그냥 버리던가 해야 할 거 같아.”
시해는 로즈마리를 놓고 한참을 고민했다. 이걸 버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러다가 또 잠이 들었다.
“넌 내가 사랑의 대상이 아니고, 성욕의 대상이지? 네 알량한 성욕을 채우려는 욕심으로 나를 택한 거야. 가증스런 자식!”
시해는 꿈에서 깨었다. 로즈마리는 여전히 로즈마리였다. 사람으로 변할 수도 있다는 건, 허무맹랑한 생각인 걸 시해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5.
아침부터 시해는 분주했다. 신제품 볼펜광고의 프리젠테이션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 광고를 못 따내면, 시해는 팀장 싸움에서 밀릴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카피라이터 인생을 마감해야 할 지도 몰랐다. 사활을 걸어야만 했다. 볼펜에서 영순의 얼굴이 겹쳤다. 볼펜광고에 영순의 알몸이미지를 덧입히고 싶었다. 성인광고의 이미지를 이용하면서도, 성인광고 같지 않게 덧입히는 방법을 시해는 고민했다. 로즈마리를 처음 봤을 떄가 떠올랐다. 로즈마리의 이미지와 볼펜의 내구성을 잘 결합하면? 뭔가 나올 것 같았다.
대박을 쳤다. 광고주가 시해가 만든 광고에 흡족해했고, 볼펜은 대히트를 쳤다. 시해는 광고의 성공 덕분에, 3팀의 팀장을 맡게 되었다. 팀장 자리는 프리젠티이션 능력도 좋아야 하지만, 팀원들이 좋은 카피를 쓸 수 있도록 지원도 해 주어야 한다. 지원이야 팀장의 몫은 아닐 수도 있지만, 시해는 그것이 팀장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야만 팀원의 사기가 높아지고, 훌륭한 팀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악몽은 계속되었다. 로즈마리 덕분에 시해는 점점 더 성공의 길을 달리고 있었지만, 꿈 속의 영순은 시해를 점점 더 괴롭혔다.
“나를 여자로만 보는 개자식!”
“왜, 나 강간이라도 하지 그러니?”
“내가 아직도 여자로 보이니?”
영순는 비아냥거렸고, 시해는 너무 두려웠다. 언제든 저 로즈마리가 사람으로 변해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니, 이젠 정말 로즈마리를 버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로즈마리를 버리려고 결심하면, 이번엔 영순이 꿈에 나타나 시해에게 명령했다.
“나 버리지 말아!”
“나 버리면 죽을 줄 알아!”
“나 때문에 잘된 거잖아. 은혜도 모르고!”
시해는 영순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시해는 악몽과 함께 몇 년을 보냈다.
시해는 영순이 실존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시해가 로즈마리 영순과 똑같이 생긴 사람을 본 건, 신입사원 면접 자리에서였다. 신입사원 영순은 꿈에서의 영순과 똑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다. 시해는 면접관이었다. 눈앞이 아득했다. 저 사람을 뽑지 않으면 시해는 뭔가 큰일날 것만 같았다. 시해는 다른 면접관에게 우리 팀으로 넣을 테니, 신입사원 영순을 뽑자고 했다. 영순의 이름은 영아였다. 시해는 영아를 뽑았다. 신입 카피라이터. 시해는 영아가 좋으면서도 미웠다. 한편으로는 잘 해 줬지만, 실수할 때는 따끔하게 혼을 냈다. 영아는 그런 시해를 잘도 버텨냈다.
6.
어느 날 영아가 시해에게 말했다.
“팀장님, 저한테 왜 이렇게 잘 해주세요?”
뜨끔했다. 시해는 자기가 뭘 잘해 줬는지 생각해 봤지만, 딱히 잘해 줬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내가 너한테 잘해 줬다고?”
“네. 왜 이렇게 잘 해주세요?”
“글쎄.”
영아는 한동안 심각한 표정으로 시해를 보더니 말했다.
“저희 집에 가요”
“응?”
“집에 가요.”
시해는 잠깐 놀랐으나, 오래 망설이지는 않았다.
자꾸만 로즈마리 영순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로즈마리 영순이 있는 집에 가고 싶지 않았다.
“정말 그래도 될까?”
“그래요, 가요. 까짓 거.”
시해는 영아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으니, 영아의 집에 같이 가기로 했다.
시해의 다소 들뜬 마음이 하늘에 부딪혔다. 정말 이래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과 드디어, 나도, 라는 생각이 가끔씩 불어오는 바람과 맞부딪혔다.
영아는 전혀 긴장된 표정이 아니었다. 가는 도중 영아가 물었다.
“팀장님, 저 그럼 내일부터는 팀장님께서 밥을 사 주시는 거죠?”
“그, 그러지, 그렇게 하자.”
시해는 영아의 거침없는 대쉬에 당황했지만, 한편으로는 기분이 무척 좋아졌다.
영아의 집은 조금 멀었지만, 깔끔한 동네였다. 시해는 드디어 영아의 집에 도착했다는 기쁨에, 영아에게 물었다.
“나, 정말 영아 집에 가도 돼?”
7.
영아는 대답하지 않고, 말없이 영아네 현관문을 열었다. 시해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영아의 집이 꽤 넓다는 건 알겠는데, 왜 가구가 하나도 없는 걸까. 침대도, 책상도, 의자도, 심지어 이불도 보이지 않았다.
“영아씨, 왜 가구가 하나도 없어?”
영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시해를 집안으로 끌어당겼다. 영아의 웃음소리가 저 멀리 울려퍼졌다. 시해의 눈에는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영아의 벗은 몸조차 상상이 되지 않았다. 아니, 시해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집 안으로 들어오는 찬란한 햇빛, 그리고 여기저기서 흘려들어오는 물소리만이 시해의 귓가에 들려오고 있었다. 시해는 그 자리에 서서 얼어붙었다. 아무리 움직이려 해도 움직일 수 없는 자신의 모습, 시해의 눈에는 이제 사람이 된 영아가 문 밖으로 나가는 것이 보였고, 시해는 따라갈 수 없었다. 시해에게 들리는 물소리는 점점 더 거칠고 세졌다. 햇빛도 점점 따가워졌다. 시해는 눈물조차 흘릴 수 없었다. 그리고 시해는 점점 더 시들어갔다.
핸드폰 안에는 그 녀석이 있었다
신통한 다이어리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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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폰 안에는 그 녀석이 있었다.
1.
상수는 그 괴물들을 바라보았다. 아주 쪼끄만 녀석들이었는데, 나름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도롱뇽을 닮은 갈색얼굴인데, 귀는 또 개구리처럼 연두색이었다. 세 마리나 있었다. 그 녀석들이 상수를 발견하고는, 잠시 멈칫했다. 상수가 그들을 피하지 않고 바라보는 게 신기했던 모양이다. 상수는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러나 그 녀석들은 별 반응이 없었다. 그 세 녀석은 다시 아까 바라보던 그곳을 바라보았다. 상수는 그 녀석들이 바라보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 녀석들에게서 멀지 않은 곳에 핸드폰이 놓여 있었다. 그 녀석들은 그 핸드폰만을 뚫어지게 바라볼 뿐이었고, 움직이지 않았다. 상수는 그들을 한동안 지켜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상수는 조금씩 그들에게 다가가 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움직임이 없었다. 그때 핸드폰의 벨소리가 울렸다. 띠리리리리리. 그러자, 그 세 녀석들은 서로에게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놀란 상수는 잠시 뒷걸음질을 쳐, 그들과 거리를 두었다. 짧은 팔과 짧은 다리. 색깔은 파란색. 상수는 그제서야 그들의 전체 몸이 눈에 들어왔다. 기괴했다. 파란색과 연두색과 갈색의 기묘한 조화였다. 그들은 짧은 팔과 다리를 이용해 서로를 공격했다. 한 녀석이 다른 녀석에게 공격을 가하면, 또 다른 녀석이 그 공격을 가하고 있는 녀석을 공격하는 식이었다. 그러니까, 공격의 방향이 앞으로 나란히 하는 것처럼 원으로 둘러서, 자신에게 공격을 가하는 녀석이 아니라, 다른 녀석을 공격하고 있는 녀석을 서로 공격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상수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핸드폰은 한참을 그렇게 띠리리리리 울리다가 이내 꺼졌다. 그러자 그 녀석들도 싸우기를 멈췄다. 다시 그들에게 평화가 찾아왔다. 상수는 다시 앞으로 다가가 보았다. 역시 그 녀석들은 상수를 한번 쳐다보긴 했지만,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진 않았다. 상수는 그 녀석들과 핸드폰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그러나 함부로 그들에게 끼어들기엔 아직 그녀석들이 어떤 녀석들인지 파악되지 않았다. 상수는 그들을 조금 더 지켜보기로 했다. 그러자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 삑. 삑. 이번엔 문자가 온 것 같았다. 핸드폰은 계속 삑삑 울렸다. 그러자, 그 녀석들이 서로의 품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마치 씨름을 하는 줄 알았는데, 한 녀석이 다른 녀셕의 꼭 껴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녀석이 그 녀석의 품에 안기면서 그들은 서로를 보듬어 주고 있었다. 상수는 이 희한한 광경이 점점 더 궁금해졌다.
핸드폰의 삑삑 소리가 멈추자 그 녀석들은 또 다시 정지모드였다. 상수는 과감히 용기를 내어, 그들에게 바짝 다가섰다. 그 녀석들은 여전히 아무 움직임이 없었다. 핸드폰이 또 울릴까? 상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 녀석의 옆에 자리를 잡아보았다.
조금 후, 또 다시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카톡 소리 같았다. 그러자 그 녀석들이 상수의 앞으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그 조그만 손들을 내밀어 상수가 앉아있는 곳의 무릎을 공격히기 시작했다. 그런데, 워낙 조그마한 손이라 그런지,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마치, 상수에게 장난을 거는 모양 같았다. 상수는 그들이 정말 자기를 공격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장난을 치려는 것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상수는 손을 내밀어 보았다. 그러자 그들은 상수의 손위로 올라와 아예 자리를 잡았다. 워낙에 작은 녀석들이라 상수의 손 위로 세 녀석 모두가 올라와도 자리가 충분했다. 상수는 점점 더 그들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상수의 손 위로 올라온 녀석들은 상수를 바라보면서 가만히 있었다. 상수는 그들을 손 위에 올려놓은 채로 핸드폰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손바닥 위의 그 녀셕들은 상수의 그런 행동을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핸드폰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자 그 녀석들이 갑자기 손바닥 위에서 뛰면서 난리치기 시작했다. 무언가 불안해 보였다. 상수는 손바닥을 핸드폰에서 먼 곳으로 옮겨보았다. 그러자 그 녀석들이 잠잠해졌다. 상수는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액정화면이 커져있었다. 거기에는 부재중 전화 표시가 있었다. 상수는 문자버튼을 터치해 보았다. 그러자 공격! 공격! 공격! 이라는 문자가 수십통 와 있었다. 상수는 이게 뭔가 싶었다. 카톡을 열어보았다. 그러자 거기에는 파고들기! 라는 카톡이 와 있었다. 누군가 장난치는 거 같았다. 이 녀석들을 데리고 장난을 치는 듯 했다.
상수는 분개했다. 아니, 이 녀석들이 무슨 잘못이 있다고. 이 녀석들도 생명체인데, 이렇게 마구 가지고 놀아도 되는 거야? 이 녀석들도 감정이 있는데. 상수는 이 핸드폰의 주인이 이 녀석들의 정체를 알고 가지고 노는 것이라 짐작했다. 이 녀셕들이 핸드폰 문자와 소리에 반응하는 걸 보고, 가지고 노는 것이다. 상수는 이 핸드폰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을 해 보았다. 딱히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보다 상수는 이 녀석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더 컸다.
상수가 찾은 방법은 이 녀석들과 핸드폰을 분리시키는 방법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핸드폰을 그대로 두고 이 녀석들을 데리고 나가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상수는 그 녀석들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채로 그 건물의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녀석들에게서 생기가 사라졌다. 거의 죽어가려고 했다. 아니, 이게 아닌데. 녀석들은 상수의 손바닥 위에서 축 늘어져 있었으며 숨을 헐떡였다. 핸드폰 때문인지, 바깥의 찬 공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상수는 다시 건물 안으로 그 녀석들을 데리고 들어갔다. 헐떡이던 그 녀석들은 다시 정신이 들었는지 다시 상수를 빤히 바라보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때 상수가 자신도 핸드폰이 갖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상수는 아까의 그 핸드폰으로 다가가 그 핸드폰으로 자신에게 전화를 걸어보았다. 뭔가 난리를 칠 줄 알았던 그 조그만 녀석들은 핸드폰 소리가 나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 상수는 다시 궁금증이 들었다. 이번에는 상수의 핸드폰으로 거기에 놓여진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어봤다. 핸드폰 소리가 들렸지만, 역시 그 녀석들은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 녀석들은 누군가의 조종을 받고 있는 것인가? 상수는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그렇다면, 이 녀석들은 어떤 조직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상수는 그들을 손바닥에서 내려놓았다. 그 녀석들은 상수가 하는 대로 그냥 내벼려 두었다. 도대체 어쩌라는 거지? 상수는 그 녀석들을 놓아두고 다시 한번 핸드폰이 울리기를 기다려 보았다.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상수는 끈질기게 기다려 보았다.
드디어 핸드폰이 울렸다. 띠리리리리리. 그러자 이번에 그 녀석들은 핸드폰으로 우르르 달려갔다. 그리고 그들은 핸드폰의 액정화면 속으로 뛰어들었고, 그 속으로 사라졌다. 상수는 무슨 일인가 싶어 핸드폰으로 다가갔다. 그 조그맣고 귀여운 괴물들은 사라졌고, 핸드폰의 액정은 깨져 있었다.
상수는 얼른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서 그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려 했다. 그런데 놀라운 장면이 펼쳐져 있었다. 핸드폰 배경 안에서 그 녀석들이 뛰어놀고 있었다. 상수는 핸드폰의 앱들을 터치해 보았다. 작동하는 데에는 이상이 없었다. 상수는 배경화면이 있는 어플로 들어가 보았다. 거기에는 온통 그 녀석들만 있었다. 모든 배경화면 속에 그 녀석들이 뛰어놀고 있었다. 그 녀석들은 어디에서 온 녀석들일까. 이 녀석들은 무엇일까.
2.
상수는 오랜만에 학교에 갔다.방학이 끝나고 새 학기가 시작되었지만,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대학생활이었다. 달라진 게 있다면 핸드폰 속의 그 녀석들이 함께 한다는 것. 상수는 핸드폰을 꺼내서 그 녀석들을 바라보았다. 그 녀석들이 무표정한 듯 하면서도 해맑은 표정으로 핸드폰 속에서 뛰어놀고 있었다. 누군가 상수를 불렀다. 미희였다. 상수는 그 녀석들을 들킬까 싶어 얼른 핸드폰을 집어놓고 미희의 부름에 대답했다. 미희는 상수에게 오늘 조별과제가 있는데, 같이 할 생각 있느냐고 물었다. 상수는 특별하게 거절할 이유를 못 찾아서 그러자고 했다. 그런데 과제가 뭐냐고, 아직 상수는 듣지도 못한 과제가 있느냐고 미희에게 물었다. 교수님 블로그에 오늘 내줄 숙제에 대해 미리 올라왔다고 했다. 블로그에 대해서도 듣지 못했다고 하자, 미희는 그건 학교 홈페이지게시판에 올라와 있다고 했다. 블로그 이웃추가는 자율이나, 블로그에 와서 교수님의 글들을 보면, 전반적인 학사일정이 잡혀 있을 거고, 과제에 대한 팁도 주니, 나름 편할 거라고 했다. 상수는 미희에게 블로그 주소 좀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미희가 상수의 전화번호를 물었다. 상수는 미희의 전화에 손을 대고 자신의 전화번호를 콕콕 눌러주었고, 미희는 상수에게 전화를 했다. 핸드폰 소리가 울렸다. 그 녀석들이 핸드폰으로 침입한 후 처음으로 울린 전화였다. 핸드폰 소리가 울리자 상수는 깜짝 놀랐다. 히히히히히히. 그 녀석들의 목소리 같았다. 상수는 핸드폰을 쳐다보았다. 미희의 전화번호가 찍힌 그 양 사이드로 그 녀석들이 웃는 모습이 보였다. 미희는 전화소리도 참 희한하다며 웃었다. 머쓱해진 상수는 얼른 미희의 전화가 오는 것을 끊고 미희의 전화번호를 저장했다.
“오늘 과제는 개구리와 도롱뇽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비교분석하는 거다. 팀은 최소 2인 1조, 최대 4인 1조다. 2주의 기간을 줄 테니, 모두 빠짐없이 제출하도록. 오늘은 첫 개강 날이니, 수업을 간단히 마치고, 질문이 있는 학생은 지금부터 개인적으로 내게 오도록!”
어려운 과제다. 상수는 그저 미희와 어떻게 이 과제에 대해 얘기해야 할지 머리를 짜냈다. 미희가 개구리는 낮은 온도의 물에서는 자기가 죽어가는지도 모르고 서서히 죽어간다는 얘기를 했다. 도롱뇽도 그러냐고 상수가 묻자, 도롱뇽은 조금 민감해서 아마 조금만 물이 뜨거운 느낌이 들면 당장 도망칠 거라고도 말했다. 상수는 그러냐고 그럼 도롱뇽과 개구리의 차이점은 그걸로 해도 되냐고 묻자, 미희는 자료조사는 해봐야 아는 거 아니냐고 재차 물었다. 상수는 알았다고 하고, 자료조사는 각자 하는 거냐고 미희에게 묻자, 우선 각자 조사하고 난 다음에 그 다음에 부족한 자료는 같이 조사하자고 했다. 상수는 알았다고 하고 미희와 헤어졌다.
3.
상수는 핸드폰 속의 그 녀석들을 바라보았다. 상수는 딱히 자료를 조사할 마음 같은 건 없었다. 미희가 다 해 오길 바랐다. 아니면, 같이 조사하기를 바랐다. 상수는 이 과목을 딱히 좋아서 신청한 것은 아니었다. 비교학. 과목 이름 자체가 모호했다. 학점을 채우기 위해서, 그리고 점수를 잘 준다기에 그냥 신청한 것일 뿐이다. 비교학은 정해진 수업의 틀이 없다. 무엇을 비교할지도 정해지지 않았다. 어떤 때는 부모님과 나를 비교해 보라기도 한단다. 또 어떤 날은 개와 고양이, 그리고 어떤 날은 곤충과 나를 비교해 보라기도 한다는 데, 그래서 상수는 비교적 쉽겠거니 생각했다. 남과의 비교라면 지겹게 해 오던 상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구리와 도롱뇽의 비교라. 딱히 흥미가 당가지 않았다. 그런데, 상수는 그때까지 잊고 있었던 사실을 하나 발견했다. 핸드폰 속의 그 녀석들이다. 그 녀석들은 도롱뇽과 개구를 섞어놓은 듯한 형상. 어쩌면, 이 녀석들에게서 답이 나올지도 몰랐다. 상수는 핸드폰 속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 녀석들이 즐겁게 뛰놀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 녀석들은 상수의 핸드폰 속에서는 무척 즐거워 보였다. 어떻게 이 녀석들이 핸드폰 속으로 들어올 수 있었는지 의문이 가시지 않았지만, 상수는 그저 그 녀석들을 바라보는 게 즐거웠다. 상수가 그 녀석들을 바라보면, 그 녀석들은 늘 즐거워했고 상수는 그게 좋았다. 상수는 이번에도 오래도록 그 녀석들을 바라보다가, 말을 한번 걸어보았다.
“너희들, 개구리와 도롱뇽의 차이점을 아니?”
녀석들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대화가 되네? 상수는 이 녀석들과 대화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았다. 그러나 그 녀석들에게 얻을 거라곤 없는 듯 했다. 상수는 그 녀석들과 대화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해 또 다시 물어 보았다.
“너희들, 내 말을 알아들어?”
그 녀석들이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러나 그 녀석들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만 끄덕이거나 저을 뿐. 상수는 궁금했다. 이 녀석들이 과여 말을 할 수 있는지. 상수는 또 다시 물었다.
“너희들, 말은 할 줄 아니?”
그 녀석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라? 상수는 어떤 말을 할 수 있는 그 녀석들에게 물었다. 그 녀석들이 아버버버버 하면서 뭔가를 말하려는 목소리가 핸드폰의 스피커 소리로 들려왔다. 그러나,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말은 못하는구나. 그것이 말인 줄 아는구나. 하지만, 조금 후에, 핸드폰의 화면에서 풍선모양이 그려지면서 그 안에 글자가 들어있었다.
‘우리는 말로는 표현 못하지만, 말은 알아듣고 이렇게 말할 수 있다구. 우리는 너랑 있으면서 말을 다 습득했어. 이 이상한 거 속에 들어와서 글자라는 것도 다 배웠어. 우리는 네가 우리에 대해 궁금해한다는 것도 알아. 우리는 외계에서 온 사람이 아니야. 우리는 사람이 만든 존재야. 그래서, 우리는…우리는…’
상수는 깜짝 놀랐다. 이 녀석들이 글자를 안다는 것에 놀랐고,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라는 데에 대해서도 놀랐다. 그러나, 그들은 말을 잇지 못하고 슬픈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왜 그럴까? 상수는 그것이 더 궁금했다. 이들에게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 상수는 더 물었다.
“무슨 사연이 있어?”
그러나 그 녀석들은 슬픈 표정을 지으며, 화면 속에서 갑자기 사라졌다. 어, 어디로 갔지? 그때 갑자기 미희가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었다. 미희의 손 안에는 작고 귀여운 그 녀석들이 얌전히 서 있었다. 상수야 상수야,를 연발 외치며 달려오는 그녀의 모습은 놀랐다기보다는 무척 흥미가 당긴다는 표정이었다. 오히려, 상수가 당황했다.
“상수야, 너 나한테 전화했어? 네가 나한테 전화오는 걸 받았는데, 이 녀셕들이 튀어나왔어.”
“어, 내가 전화한 게 아니라…”
“와, 신기하다. 이 녀석들은 어디서 나온 녀석들이야?”
“글쎄, 어디서 나왔을까?”
상수는 미희에게 그간의 사정들을 자세히 미희에게 설명했다. 미희는 점점 더 흥미가 당긴다는 듯이, 상수가 하는 얘기를 들었다.
“그러니까, 이 녀석들이 너의 핸드폰 화면 속으로 들어갔다 다시 나온 거란 말이지?”
“응”
“그럼, 원래 그 핸드폰은 어디에 있는데?”
“집에 그냥 뒀어. 혹시 몰라서”
“그럼 거기에 가 보자. 뭔가 비밀이 숨어 있을지 모르잖아.”
미희의 말에도 일리는 있다. 그런데 비밀을 발견하는게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 상수는 미희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냥, 이 녀석들고 이렇게 어울리는 걸로 만족하면 안 돼? 꼭 비밀을 파헤쳐야 돼?”
“궁금하지 않아? 이 녀석들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누가 만들었는지?”
“그 녀석들은 누군가에 의해 분명 만들어졌겠지. 그런데 지금은 나의 친구가 되었어. 나는 이 녀석들하고 친구가 되어서 좋았어. 그런데 그 녀석들을 만든 사람을 찾아내서 뭐하려고? 비밀을 밝힌다 한들, 그게 이 녀석들한테 무슨 도움이 되는데?”
미희는 아무 말 하지 않고, 그 조그맣고 귀여운 괴물 녀석들을 바라보았다. 상수의 말에 수긍을 하는 건지, 아니면, 반발을 하려는 건지 파악할 수가 없었다. 그저, 상수는 이 작고 귀여운 괴물들이 자기에게로 다시 와주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러나 이 녀석들은 미희의 손 안에서 눈웃음을 치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장난을 걸고 있을 뿐이었다. 어딘가로 갈 준비를 하는 것 같아 보였다. 또 다시 핸드폰 속으로 들어가려는 걸까. 미희의 핸드폰이 울렸다. 미희가 이번에는 모르는 번호라며, 받지 않으려고 하자, 그 녀석들이 미희의 핸드폰을 그 작은 손으로 가리켰다. 얼른 받으라고 재촉을 하는 것 같았다. 미희는 그 녀석들의 강요에 못 이겨 핸드폰의 받기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그 녀석들이 또 핸드폰 속으로 들어갔다. 미희가 깜짝 놀라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상수도 깜짝 놀라 자신의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녀석들은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는 미희의 핸드폰을 보았으나 그 인에도 그 녀셕들은 보이지 않았다.
“원래 있던 핸드폰, 거기에 가 봐야 할 거 같아!”
미희가 상수에게 재촉했다. 상수도 이번에는 그럴 수밖에 없을 거 같다고 생각했다. 미희와 상수는 상수의 집으로 갔다. 핸드폰 속에, 혹은 핸드폰이 있는 장소에 그 녀석들이 있기를 바라면서.
4.
그 녀석들은 상수의 방에 없었다. 깨진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았지만, 거기에도 그 녀석들은 보이지 않았다. 미희는 깨진 핸드폰 화면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미희가 뭔가를 발견한 듯 했다.
“이 밑에 좀 봐, 뭐라고 써 있어.”
상수는 한번도 핸드폰을 자세히 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 핸드폰을 습득하신 분은 02-1234-1234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충분한 보상을 해드리겠습니다』
상수는 반대했지만, 미희는 이미 핸드폰에 손이 가 있었다. 핸드폰의 띠리리릭.누군가 받는 소리. 미희는 핸드폰을 습득해서 연락드린다고 건너편의 누군가에게 말을 건넸다. 상수는 조금 불안하긴 했지만, 미희가 하는 대로 잠자코 있었다. 미희가 곧 가자, 고 말했다.
“어디로?”
“오래, 자세한 건 와서 얘기하자는데.”
“꼭 가야 돼?”
“그 녀석들이 있을지 모르잖아.”
상수는 미희와 함께 전화 속의 사람이 존재하는 조그마한 까페로 갔다. 거기에는, 40대 중반 즈음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있었다.
“카페 운영하시나요?”
미희가 발랄한 목소리로 물었다.
“운영은 하지만, 장사는 잘 안 되지요. 그래도 단골 몇 분이 계시니까, 그분들 덕에 먹고는 살아요.”
“자, 여기 아저씨 핸드폰이요.”
“감사합니다.”
“액정 깨졌는데, 괜찮아요?”
“흔히 있는 일이죠. 금방 고쳐요.”
미히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녀셕들은 보이지 않았다. 40대 중반의 아저씨는 핸드폰을 들고 들어가더니, 곧 새 핸드폰 두 개를 가지고 나왔다.
“두 분이 오셨으니, 두 개를 준비했습니다.”
“어,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되는데…”
상수가 잠시 거절의 의사를 밝혔지만, 40대 중반의 아저씨는 개통까지는 못 드리지만, 어느 통신사에서 쓰든 쓸모가 있을 거라며, 기존의 핸드폰 유심칩을 옮겨서 심는 것도 가능하다고 하면서, 아주 좋은 핸드폰이라고 소개해 주었다.
“직접 만드신 건가요?”
미희가 물었다.
“네, 맞아요. 직접 만들었습니다.”
“기술이 뛰어나시네요?”
“제가 핸드폰 제조회사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데, 그때 제품의 모든 기술을 다 섭렵했죠.”
“그러시구나.”
미희가 주위를 둘러봤지만, 여전히 그 녀석들은 보이지 않았다.
“손님이 오셨네요. 제가 바쁠 것 같아서 오늘은 이만. 차 드시고 싶으면 언제든지 오세요. 제가 대접해 드리지요. 핸드폰 찾아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미희와 상수는 고맙다고 감사인사를 하면서, 카페를 나왔다.
“가만 있어봐, 이 녀석들 이 안에 들어있을지도 몰라. 핸드폰 켜보자.”
미희가 핸드폰을 켰으나, 켜지지 않았다. 배터리가 부족한가 보다.
“상수야, 네것도 한번 켜봐.”
“안 켜지는데?”
“유심칩이 없어서 그러나? 아님, 배터리?”
“잠깐, 아 저기가 좋겠다. 저 카페 들어가서 배터리 충전 좀!”
미희와 상수가 카페에 들러서 두 개의 핸드폰 배터리를 모두 충전해 보았고, 유심칩도 갈아서 껴보았다. 그러나 핸드폰은 켜지지 않았다.
“허, 안 되겠다. 아저씨한테 다시 가보자.”
상수는 별 말없이 미희의 뒤를 따랐다.
다시 간 카페에는 아까와는 달리,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 그 녀석들이 있었다. 사람들이 마시고 있는 찻잔에 커피잔에, 그 녀석들의 그림이 있었다. 그렇다면, 이 녀석들은 그림이었다는 건가?
40대 중반의 아까 그 아저씨가 다시 미희와 상수를 반갑게 맞이했다. 미희는 아저씨에게 성급하게 말했다.
“아저씨, 핸드폰이 안 켜져서요.”
“아참, 깜빡했네요. 이 스티커 붙여야 켜져요. 특수 배터리가 연결되어 있죠.”
그 조그맣고 귀여운 녀석들의 그림이 새겨져 있는 스티커였다.
“아저씨, 이 녀석들…”
“제가 개발한 캐릭터에요. 이 녀석들이 실제로 살아서 뛰어다닌다면 얼마나 재밌을까 하는 상상을 한 적이 있죠. 그리고 삶에서 얼마나 많은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구요. 그래서 이 캐릭터를 제가 대접하는 모든 컵과 받침에 새겨넣었어요. 그리고, 특수배터리도 이 녀석들의 캐릭터를 개발하면서 개발할 수 있었구요. 마음에 드시면 좋겠는데요! 아, 핸드폰 켜시면 배경화면에도 그 녀석들이 있을 겁니다. 마음에 드시면 얼마든지 복사해서 나눠주셔도 돼요. 저는 커피와 차를 파는 사람이지, 그림을 파는 사람은 아니니까요.”
집으로 돌아오는 상수의 마음은 무거웠다. 그러나 미희는 오히려 밝아보였다. 그 녀석들이 진짜로 살아있는 게 아니었다는 느낌에 상수는 자신이 지금까지 본 것이 헛것일 뿐이었다는 자괴감에 시달렸다. 미희는 상수의 표정을 보더니, 왜 그러냐고 뭐가 문제냐고 물었다. 상수는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 미희에게 얘기했다.
“사실, 우리가 보게 되는 모든 것이 그런 것이 아닐까. 우리가 사실은 개구리로 알고 있는 게 사실은 도롱뇽이었고, 도롱뇽이라고 알고 있던 게 뱀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수도 있잖아. 진짜 내가 알고 있는 건 진실이 아닐 수도 있잖아.”
하나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상수는 마음이 점점 더 무거워졌다.
미희가 아저씨가 준 핸드폰에 스티커를 붙이고 전원을 켰다.
“와, 진짜 켜진다. 신기해라.”
미희가 감탄하면서 핸드폰의 전원을 키자, 그 조그맣고 귀여운 녀석들이 배경화면을 설정되어 있었다. 미희는 미적거리고 있는 상수의 핸드폰을 빼앗아, 거기에 스티커를 붙이고 전원을 켰다. 핸드폰이 켜졌다.
“상수야, 이것 봐!”
“응?”
핸드폰에 있는 배경화면에서 그 녀석들이 이리저리 뛰어놀고 있었다.
“이거, 움직이는 그림인가 봐!”
상수는 미희가 가지고 있는 핸드폰과 자신의 것을 비교해 보았다. 둘 다 그 녀석들이 있었고, 그 녀석들이 신나게 이리저리 뛰어놀고 있었다. 상수는 무심코 그 녀석들에게 말을 걸어보았다.
“너희들, 내 말 알아들어?”
그러자 그 녀석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희는 상수를 쳐다보며, 약간의 미소를 띄었다.
“와, 신기해라! 이 녀석들, 진짜로 살아 있나 봐.”
상수와 미희는 이 녀석들이 있는 화면을 계속 바라보았고, 그 녀석들과 대화를 계속 나누었다. 그 녀석들은 고개를 끄덕이거나, 혹은 고개를 가로젓거나, 아니면 말풍선으로 대답을 했다. 상수는 이 순간이 오래오래 지속되기를 바랐고, 미희는 이 상황을 보면서 계속해서 웃었다. 너무 재밌어 죽겠다는 듯이.
5.
상수와 미희는 결국 교수님께서 내주신 과제를 수행하지 못했다. 교수님께서 그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미희가 대답했다.
“저희들은 과제 대신 더 소중한 걸 얻었습니다.”
“그게 무엇인가?”
“얘네들이요!”
그러면서 미희가 핸드폰에 있는 그 녀석들의 괴물사진을 교수님께 보인다.
“그 녀석들은 어디서 났나?”
“핸드폰을 잃어버린 사람이 있어서, 주인을 찾아줬는데, 그 주인이 찾아줘서 고맙다며 이걸 주셨어요.”
“핸드폰 주인은 뭐하는 사람인데?”
“카페 주인이요.”
“그래, 거기가 어딘가? 자네 말이 사실이라면, 자네 둘에게 A플러스를 주지. 하지만, 거짓말이라면, 자네들은 F일세.”
“네, 수업 끝나고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미희가 자신있게 말했다. 그러자, 다른 학생들도 자신들도 같이 가보고 싶다며 아우성을 친다.
“좋아, 좋아! 오늘 수업은 이걸로 끝내고, 지금 다 같이 미희양이 말한 그곳을 방문하도록 한다. 안내하도록!”
학생들을 모두 데리고, 미희는 그 카페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학교에서는 걸어서 1시간은 걸리는 거리였지만, 아이들은 별다른 불평을 하지 않았다. 그 괴물사진이 신기했었나 보다.
“저기에요. 저기 보여요! 근데, 차는 교수님께서 사 주시는 거죠?”
미희가 애교를 떨었다.
“좋다. 미희양 말이 사실이라면, 내가 사마. 하지만, 거짓이라면 사지 않겠다.”
미희가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두리번거리면서 가게 주인을 찾았다. 그러나 보이지 않았다. 카페에서 서빙하고 있는 아가씨가 있었다.
“혹시, 여기 사장님께서는 지금 자리를 비우신 건가요?”
“아, 그분이요. 얼마 전에 떠나셨습니다.”
“네, 어디로요?”
“자기가 여기서 할 일은 더 이상 없다면서, 이 가게 저한테 넘기시고 그냥 어디로 가신단 말씀도 없이 떠나셨어요. 저보고 이 카페 운영하면서 돈 좀 모아놓으면, 나중에 돈 떨어져서 찾아오면 약간만 주면 된다 하시고는, 막무가내로 맡기고 떠나셨어요”
“저, 그럼 사장님은 그 아저씨랑 관계가?”
“저, 여기서 가끔 일 도와주던 알바생이에요.”
“그럼, 혹시 이 녀석들의 정체를 아세요?”
미희는 핸드폰 배경화면 속에 있는 그 녀석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아, 이 녀석들! 여기 있었구나.”
그 아가씨는 드디어 발견했다는 듯이, 기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혹시, 찾고 있었나요?”
“네, 이 녀석들은 어디든 가죠. 그래서, 통제가 불가해요. 어느 날은, 어떤 할아버지가 와서는 이 녀석들이 왜 내 핸드폰 속에 들어 있느냐는 거에요. 그래서, 할아버지, 이 녀석들은 자기들이 가고 싶은 곳으로 가요, 했더니, 할아버지가 껄껄 웃으시면서 그러는 거에요. 내 살다가 별 녀석들을 다 봤네. 그 녀석들은 그 할아버지 곁에 오래도록 있었는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자 또 다른 곳을 찾기 시작했죠.”
그때까지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던 교수님께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 녀석들이 살아 있는 녀석들인가요?”
“사장님께서는 그냥 그렸을 뿐이라고 해서 잘 모르세요. 그런데 그 그림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 건, 조금 역사가 되었죠. 어느 날, 어떤 꼬맹이가 오더니, ‘엄마, 얘네 나랑 말을 해’ 하고부터였어요. 진짜로 그 그림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사장님만 그 그림을 쳐다보면, 얼음 상태가 되는 거에요. 그래서 사장님은 전혀 모르시죠. 그 그림이 살아서 움직인다는 걸요. 그러더니, 제 핸드폰 속에서도 며칠 있는 거에요. 그래서, 사장님께 저 여기서 알바 하고 싶다고 얘기했죠.”
“잠깐만요, 그럼 아가씨께서는 그냥 여기에서 손님으로 오셨던 거였어요?”
미희가 적극적으로 질문하기 시작했다.
“네, 처음엔 그냥 손님이었죠. 그런데, 이 녀석들 덕분에 알바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사장님께 말씀드렸더니, 그러라고 하신 거에요.”
“혹시 그럼 그 깨진 핸드폰에 대해서도 알고 계신가요?”
“아, 사장님께서 그거 가지고 가셨어요. 그거 자주 깨져요. 이 녀석들이 핸드폰 너머의 공간으로 이동할 때, 어쩌다 한번씩 깨지는 데요. 그건 이 녀석들의 주인이 바뀌는 순간을 의미하는 거에요. 사장님께서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냥 깨진 핸드폰을 가지고 오시는 분들에게는 자신이 만든 핸드폰을 내어주고, 그리고 그 깨진 핸드폰은 수리해 놓곤 하시죠.”
“혹시 이 녀석들에 대해서 사장님께 얘기해 보셨어요?”
“네, 사장님께서는 그게 진짜 사실이라면, 내가 할 일은 이걸 매번 고쳐놓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인지 아닌지는 내가 보지 못했으니까 모르겠다. 그냥, 나는 그림을 더 열심히 그리고 싶고, 발명을 더 열심히 하고 싶다, 라고만 말씀하셨어요.”
상수는 사장님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왜 사라졌는지가 궁금했다. 그러나 상수의 그 생각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미희는 질문을 멈추고 교수님께 이제 우리 말이 사실인 걸 알았으니, 차를 사라고 했다. 그리고 에이플러스도! 라고도. 교수님께서 껄껄 웃으며, 그러자고 했다. 학생들은 신나서 저마다 먹고 싶은 차를 주문했다. 그날, 40여명의 학생들에게 차를 판 아가씨도 덩달아 신이 났다. 상수도 카모마일을 하나 주문했다. 오늘따라, 왠지 그 차가 쓰게 느껴졌다. 여전히 상수의 마음은 무거웠다.
상수는 그 아가씨에게 한가지 부탁을 했다.
“혹시, 그 아저씨 소식 들리거든 연락 좀 해주실 수 있나요?”
“아, 그러세요. 어려운 일 아니니까요. 연락처 주세요.”
상수는 아가씨에게 연락처를 남겼다. 그리고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이 카페의 이름이 뭔지 모른다는 것이다.
“혹시, 이 카페 이름이요?”
“아, 도롱뇽과 개구리요.”
“아…”
카페이름이 도롱뇽과 개구리. 사람들이 과연 이름을 보고 이 카페를 찾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상수는 카페 밖으로 나가 보았다. 카페 간판에도 그 녀석들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러나, 카페 이름은 써 있지 않았다. 미희가 그런 상수를 보더니,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왜 그래?”
“카페간판에 이름도 없고 그림만 그려져 있는데, 아가씨는 카페이름이 도롱뇽과 개구리라는데…”
“그럼, 물어보면 되지…”
미희는 얼른 아가씨에게 카페 간판에 이름은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카페 간판에는 없고, 쿠폰에 있다고 했다.
“쿠폰? 우린 왜 쿠폰 안 줘?”
교수님께서 웃으면서 따졌다.
“저, 이미 쿠폰값 반영해서 할인해 드렸습니다.”
아가씨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미희가 쿠폰 하나만 보여달라고 했다. 거기에 도롱뇽과 개구리라고 진짜로 써 있었고, 역시 그 녀석들의 그림이 있었다. 상수는 그 쿠폰을 보았다. 어딜 가나 그 녀석들이 있었고, 어딜 가나 그 녀석들만 눈에 들어왔다. 상수는 그 녀석들에게 너무 깊이 빠진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6.
교수님께서는 약속대로 상수와 미희에게 에이플러스를 주었다. 같은 청강학생들도 별다른 반대를 하지 않았다. 덕분에 신기한 체험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수님께서 에이플러스를 준 이유는 핸드폰 주인을 찾아준 데 대해서 기특하게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이 놀라운 체험을 다같이 함께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록, 그 녀석들이 살아서 뛰노는 것은 보지 못하지만, 교수님의 핸드폰 배경화면에도 그 녀석들의 그림이 깔려 있었다. 그래서 언젠가는 그 녀석들이 교수님의 핸드폰에서도 뛰어노는 걸 보고 싶다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그 배경화면을 깔아놓았다. 그러다가 그 녀석들이 보고 싶을 때는 미희를 찾아가서 그 화면을 보고 싶다고 하면, 미희는 언제든지 그 녀석들이 놀고 있는 걸 보여주었다. 그러나, 상수는 조금 달랐다. 상수는 다른 학생들과 거리두기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이들은 상수에게 말을 잘 붙이지 않았다. 상수는 그 녀석들을 잘 보지도 않았다. 왜 이 녀석들은 미희와 나의 핸드폰에 둘 다 있는 것일까? 라는 의문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의문을 풀 숙제는 사장님게 있을 것만 같았다. 상수는 아가씨에게 연락이 오기를 기다렸지만, 좀처럼 연락이 오지 않았다.
아가씨에게 연락이 온 것은 학기가 끝날 때 즈음이었다. 이제, 비교학 과목은 기말고사만 남겨놓은 상황이었다. 교수님께서는 기말고사는 자신이 지금까지 체험한 것들, 그러니까 자신이 지금까지 다루던 주제들을 수필 형식으로 쓰면 된다고 하였다. 그러니, 미리 공부할 필요도, 미리 써올 필요도 없었다. 그날 와서, 즉석에서 쓰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결국 자신이 체험한 것을 쓰는 것이 비교학에서 가장 중요한 자신과의 비교를 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시험이 있기 전날, 상수는 전화를 받았다. 아가씨는 아저씨가, 내일 오전 즈음에 잠시 들를 것이라고 했다. 아저씨가 보고 싶다면, 그때 오시면 될 것이라고 했다. 상수는 교수님께, 중요한 일이 생겨서 시험은 못 볼 것 같다고, 다음에 다시 수강해야 할 것 같다고 말을 했다. 교수님께서, 그 중요한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상수는 사실대로 말했다. 교수님은 자신도 함께 가자고 했다. 그곳에서 상수의 시험을 치를 것이라고 했다. 학생들 시험은 조교에게 부탁하면 된다고 했다. 상수는 딱히 거절할 명분이 없어서 그러겠다고 했다.
다음날 오전, 상수는 도롱뇽과 개구리 카페로 갔다. 아가씨가 웃으며 인사했다.
“사장님, 곧 오실 거에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교수님꼐서 상수와 차와 자신의 차를 시켜주었다. 그리고 아가씨한테 쿠폰을 달라고 했다. 아가씨는 웃으면서 쿠폰을 건네주었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손님은 교수님과 상수 외에는 없었다.
30여분 쯤 기다렸을까, 사장님이 모습을 드러냈다. 손님이 있는 걸 보더니, 깜짝 놀랐나 보다. 그리고, 상수임을 알아보았다.
“아, 귀한 손님이 오셨군요. 이분은 누구?”
“저희 교수님이세요”
“아, 안녕하세요. 지금은 사장이 아니지만, 이전에 이 집 주인이었던 사람입니다.”
“아, 알고 있습니다. 오신다는 소식 듣고 왔습니다.”
“아하, 그러시군요. 제가 돈이 좀 떨어져서 돈 받으러 왔습니다.”
그러면서 카운터로 가더니, 아가씨에게 얼마 정도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얼마 필요하신지 말씀하시면 그만큼 드릴 수 있어요.”
“돈 많이 벌었나 보네. 우선, 1000만원.”
“가능해요.”
“현금으로?”
“아니요. 계좌이체요.”
“아, 고마워.”
그러더니, 곧 가려고 서두르는 모양이었다.
“어, 사장님, 저분들, 아까부터 기다리셨는데요.”
“나를?”
“네.”
상수가 있는 테이블로 40대 중반의 아저씨가 다가왔다.
“사장님,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는데요, 상수가.”
교수님이 대신 이야기했다.
“어떤?”
상수가 물어보기 시작했다.
“개구리와 도롱뇽의 존재를 아세요?”
“그야, 내 그림이지요그 둘을 절묘하게 조합한.”
“아니, 살아 있는 거요.”
40대 중반의 아저씨, 사장님은 상수를 한참 동안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이내 말을 꺼냈다.
“때로는 알아도 모르는 척하는 것이 나을 때가 있어요. 그랬을 때, 모든 존재는 확장을 하지요. 때로는 하나가 둘이 될 때도 있고, 둘이 셋이 될 때도 있어요. 내가 아는 것을 모두 말해 버리고 나면, 그들은 숨기 바쁘지. 내가 누군가의 위에 서 있는 존재가 된다면, 그럴 필요가 있지. 그래서 삶이란 게 힘든 거라요. 교수님께서는 잘 아시겠네요.”
교수님께서 껄껄 웃었다. 교수님은 이미 답을 알고 있었을지 모른다는 걸 상수는 그때 느꼈다.
“대답이 되었는지 모르겠네요. 학생.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 연락해요. 내 번호 알지요?”
상수는 잠시 사장님이 무슨 얘기를 하나 했다. 그리고, 핸드폰을 처음 발견했을 때를 떠올렸다.
“아, 그 전화번호가…?”
“액정이 깨진다고 해서, 죽는 것은 아니지요.”
상수는 한참 동안 말이 없이 있었다. 사장님은 곧 다시 떠났다. 교수님은 자신의 핸드폰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상수는 그 웃음이 무슨 의미인지 몰랐으나, 물어보지는 않았다. 교수님께서 지금부터 시험을 치르곘다고 얘기했기 때문이다.
다음 날, 학교가 난리가 났다. 자기 핸드폰에서도 그 녀석들이 뛰어놀고 있다며, 기뻐하고 있는 녀석들이 다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희가 상수에게 물었다.
“어제 무슨 일 있었지?”
“사장님 만났어.”
“그랬었구나.”
미희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때, 범용이가 상수에게 다가와서 애기했다.
“상수야, 고맙다.”
“응? 뭐가?”
“네 덕분에 희망을 찾았어.”
“내가 뭘 했는데?”
“우리에게도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걸 보여줬잖아.”
그러면서, 범용이는 자신의 핸드폰을 보여주었다. 거기에서 그 녀석들이 즐겁게 뛰어놀고 있었다.
“난 한 게 없는데?”
“교수님께서 이야기했어. 그 카페 사장님한테 가서 다른 학생들도 다 이 녀석들이 살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졸랐다고. 정말, 고마워.”
“아니, 난…”
범용이가 그런 말을 하고 가더니, 또 다른 학생이 와서 말을 건다. 고맙다는 인사였다. 그렇게 몇 번의 인사를 받았는지 모른다. 미희는 그런 상수를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았다.
“상수야.”
“응?”
“고마워.”
“뭐가?”
“그냥.”
미희는 그냥 웃더니, 그 말만 하고 저 멀리 공을 차고 뛰어다니는 학생들 곁으로 다가가 자신도 축구할 수 있다면서 끼워달라고 말했다. 미희는 놀랍도록 축구를 잘했다. 상수는 그런 미희를 한참 동안 그냥 지켜보았다.
7.
10년 후, 상수는 여전히 그 녀석들의 배경이 있는 핸드폰을 쓰고 있다. 어쩌면, 이 핸드폰은 영원히 고장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수는 굳이 핸드폰을 바꾸어야 할 이유를 못 느꼈다. 그 녀석들은 여전히 핸드폰 속에서 뛰어놀았지만, 거기엔 10년 전에 비해 하나 바뀐 게 있었다. 녀석들은 미희의 사진을 바라보고 있는 걸 좋아했다. 녀석들이 미희의 사진을 한참동안 바라보고 있으면, 미희에게서 전화가 오곤 했다. 이번에도 왔다.
“어, 어디야?”
“이제 퇴근해.”
“어, 나도!”
“집으로 갈 거야?”
“아니, 우리 어디 가서 맛있는 거 보고 영화도 보고 가자. 불금이잖아.”
“어디서 볼까?”
미희가 상수에게 장소를 주소를 보내겠다고 했다. 상수는 미희가 알려준 주소로 가기 위해서 지하철을 탔다. 그런데, 주소가 호텔연회장이다. 호텔 연회장? 무슨 일일까.
상수가 도착하자, 미희가 나와 있었다.
“오늘 무슨 날인지 알아?”
“무슨 날인데?”
“그 녀석들이 우리 모두에게 희망을 준 날.”
“그런 날이 뭐야?”
“에이 바보, 네가 비교학 기말고사 시험 본 다음 날.”
“아, 오늘이?”
“그래서 10주년 기념으로 모두 너 보고 싶다고 해서.”
“근데 그렇게 말하면 되지, 왜 영화는 보자고?”
상수가 툴툴댔다.
“그러면 너 안 올까 봐서.”
상수는 기쁜 건지, 부담스러운 건지 알 수 없었으나, 친구들이 자신을 보러 온다는데 싫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연회장에는 이미 동창생들이 와 있었다.
“반가워, 상수야! 우리 모두 기다리고 있었어!”
상수는 반가운 마음을 표현하는 이에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자신의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그 녀석들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 녀석들이 상수에게 핸드폰을 들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상수는 핸드폰의 앞쪽을 앞으로 향하게 하고 손을 들었다. 그러자, 동창생들 모두가 핸드폰을 손에 들고 상수를 따라 손을 흔들었다. 그들의 핸드폰 속에 그 녀석들이 있었고, 모두 똑같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미희도 상수의 옆에서 핸드폰을 손에 들고 손을 흔들었다. 미희의 핸드폰 속에는 상수의 사진이 있는 것만 다를 뿐, 모두 그 녀석들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리고 모두의 핸드폰 속에 각자에게 의미있는 사진이 걸려 있었고, 그 녀석들은 그 사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손을 흔드는 그 녀석들이 상수의 눈에 들어왔다. 상수는 웃었다. 어쩌면, 그 웃음은 친구들이 상수에게서 볼 수 있었던 첫 번째 웃음이었을 것이다. 상수가 웃는 것을 본, 친구들의 눈가에 눈물이 촉촉이 맺혔다. 미희의 눈도 조금씩 젖어들었다. 상수는 그 눈물의 의미를 몰랐으나, 지금 이 순간, 웃음을 거두고 싶지 않았다.
재 판
그럼 지금부터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모두 기립해 주십시오
천둥이 치고
소리만큼의 간격으로 번개가 번쩍이면서
비가 퍼부었다.
자연이 나를 향해 기립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고통이 시작된다
1
- 당신의 생년월일은?
- 내가 태어난 그 당시 생년월일 따윈 존재하지 않았소.
- 당신은 어떻게 태어났소?
- 나는 자연에 의해 잉태되고, 바람에 의해 길러졌소.
- 당신은 스스로를 정신병자라고 생각해 본 적 없소?
- 사람은 누구나가 정신병자요. 모두 미친 년놈들 뿐이요.
- 당신은 인생을 부정하시는군요.
- 나는 내 인생을 사랑할 뿐이요.
- 당신이 행하는 그 수많은 거짓말들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지 알기나 하오?
- 물론, 잘 알고 있소. 하지만 난, 거짓말을 한 적은 없소.
- 증거가 이렇게 많고, 저 많은 사람들이 다 증인인데, 없다고?
- 그건 그들이 생각할 때 거짓말인 것처럼 느껴질 뿐이오. 사람들은 언제나 순간순간 말하기를 주저하지. 내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들과 내가 다르기 때문이오. 나는 이렇게 말했지만, 당신은 저렇게 받아들이면 그건 거짓말이 되지. 그럴 경우는 아주 흔하오. 그런 상호관계가 지속될 때, 결국 서로에게 신뢰란 존재하지 않게 되지. 오직, 거짓말만 존재할 뿐이오.
- 이유를 모르겠군. 당신이 그런 말을 하는 이유가 대체 뭐요?
- 우리는 의사소통이 전혀 되지 않는군. 묵비권을 행사하겠소.
- 영구불변의 시간 동안만 심문을 중지하겠소.
- 땅땅땅.
태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2
나는 다가가 그에게 반문했다.
- 방금 영구불변의 시간이라고 했소?
- 그렇소만?
- 당신은 영구불변의 시간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오?
-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 세상에 불변하는 것은 없소. 지금 이 시간에도 모든 건 변화하고 있소. 그런데도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게, 영구불변의 시간이라고 말하는 군?
- 당신은 지금 나를 포함한 법정 전체를 모독하고 있다는 것 아시오?
- 물론, 잘 알고 있소. 알고 있을 뿐 아니라, 난 그걸 즐기고 있소. 당신
이 흥분하면 할수록, 당신은 당신의 잘못을 인정할 뿐이오. 내 말이 틀렸
소? 그리고 난, 당신이 흥분하는 것을 즐기고 있소. 당신이 자꾸 흥분하면
할수록 난 자꾸 당신을 괴롭히고만 싶소. 당신이 그럴수록, 날 자꾸 자극
하는 것일 뿐이라는 것, 아시오?
- 그만 하시오.
- 당신은 나를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하고 계시는군? 하지만, 당신이 날
어떻게 처리한다고 해도 내가 바뀌진 않소. 당신은 당신 잘못을 인정할
줄 모르는 사람에 불과하오. 그것은 나 역시도 마찬 가지오. 내 말이 틀렸
소?
서기가 나에게 다가왔다.
- 틀렸소.
- 틀렸다고? 이유를 대 보시오.
- 이유를 왜 대야 하죠?
- 내 말이 틀렸다고 했잖소?
- 난 서기일 뿐이요.
-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
- 내가 당신의 말을 기록하는 데 왜 이유가 있어야 되죠?
- 무슨 소리요?
- 난 당신 말이 틀렸다고 말했을 뿐이오. 당신, 왜 살아? 이렇게 묻는다면 당신은 내게 아주 그럴 듯한 이유를 들어 변명하려 할 거요. 하지만, 그건 당신 생각일 뿐이오. 그렇듯이 나 역시 당신 생각이 틀렸다는 걸 말하는 것뿐이오. 됐소?
침묵이 흘렀다. 재판장은 아무 말 없이 망치를 두들겼다. 서기는 내게 뒷모습을 보이며 지는 해 저편으로 사라졌다. 나는 다시 혼자 남은 영혼 속으로 들어갔다. 또 다시 재판이 열리길 기다리는 동안, 다른 죄수가 내게 말을 걸어오려 한다. 그 동안, 내리던 폭우가 가라앉고 햇빛이 내려쬐기 시작했다. 영구불변의 시간 동안, 나는 그 죄수가 말을 걸어오기를 기다렸다.
3
- 시작에서 중요한 건
끝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일단, 끝을 보고 시작한다면
시작할 엄두조차 못 낸다
하지만
더욱 위험한 것은
일단 시작하고 보자라는 사고방식
무작정 저질러놓고 보는 일
이것은 한번쯤 생각해 봐야 한다
그러나
일단 시작하고 보자하고 시작했으면
끝은 봐야 할 거 아닌가
그는 한참동안 말을 걸려 했으나 말을 어떻게 걸어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처럼 서성이고 있었다. 나는 천둥번개가 멈춘 짜증나는 날씨를 바라보면서 그런 그를 등지고 서 있었다. 나 역시, 그가 어떤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4
- 중요한 건
답을 맞추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문제를
얼마만큼이나 제대로 이해했느냐 하는 것이
삶에서의 가장 큰 과제가 된다
- 나는 지금
<인생>이란 문제를
열심히 푸는 중이다. 여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렇게 망설이는 동안, 재판이 다시 시작되었다. 재판장은 "현명과 지혜의 바보"라는 하늘로 바뀌어 있었다. 재판장이 물어보기 전에, 난 먼저 그에게 질문을 했다.
- 어떻게 된 거요? 재판장이 바뀌다니?
- 그는 땅 밑으로 기어들어갔소. 내가 못 마땅하오?
- 아니오. 비웃을 상대가 없어 섭섭할 뿐이오.
- 나는 비웃을 만한 가치가 없소?
- 아니오. 당신은 비웃을 만한 가치가 없는 게 아니라, 내가 상대하기에 너무 큰 존재요. 당신은, 존경할 만한 가치가 있소. 그러나 내가 얘기하고 싶은 상대는 당신같이 넓고 큰마음을 지닌 존경하고픈 사람이 아니라, 내가 비웃을 수 있는 상대요. 그런 사람은 적어도, 내게 우월감을 느끼게 해 주거든. 당신의 마음은 넓고 크기 때문에, 내가 아무리 당신을 비웃는다 해도 당신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을 거요. 그 이유가 당신하고 얘기하고 싶지 않은 이유요. 됐소?
- 그렇다면, 오늘도 여전히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하겠군요?
- 그야, 물론이지요.
- 당신에겐 콤플렉스가 많은 듯하오.
-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알지?
- 그건 내가 아닌 누구라도 쉽게 알 수 있을 거요. 당신은 지금까지 당신만을 위해 살아왔소. 그리고 당신보다 못한 사람은 비웃고, 당신보다 잘난 사람은 상대도 하지 않았소. 콤플렉스가 지나치게 많지 않다면, 이런 일이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오? 어떻소? 당신의 콤플렉스가 어떤 건지 말해 보지 않겠소?
- 미쳤소? 내가 당신 같은 인간에게 그런 말을 할 것 같소?
- 당신은 어쩔 수 없는 사람이군요.
- 아니오. 틀렸소. 난 사람이 아니오.
- 그럼, 무엇이오?
- 무엇인지는 나도 모르겠소. 아뭏든 난 사람은 아니오.
- 자기비하가 강하군요.
- 난 내 자신에게 정직할 뿐이오.
- 그것이 정직하다고 말할 수 있소? 지금까지 당신은 내게 얼마나 많은 말을 했는지 아시오? 그러면서, 당신은 나하곤 말하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소?
- 더 이상 말하지 않겠소.
- 좋소. 이제, 증인들의 증언을 들어볼 차례가 된 것 같군. 변호사를 선임하겠소?
- 나를 대신해 변호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소.
- 좋소. 지금부터 증인들의 증언을 들어보기로 하겠소. 영구불변의 시간은 너무 지루하다. 나는 가만히 앉아, 증인들이 증언하기를 기다렸다.
5
말이란
하고 나면
속은 시원하지만
괴롭기는
더욱 괴로운 것
하지만
후회해도 소용없는
그런 시간들이 지나간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그런 만남
- 첫번째 증인, 등장하시오. 나는 그녀를 기억해내려 애썼다. 그러나 난 도저히 그녀를 어디에서 봤는지, 또 그녀가 나를 어떻게 아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 증인의 이름은?
- 전 "이름 없는 여인"입니다.
- 당신은 왜 이름이 없습니까?
- 제 이름을 지워버렸기 때문입니다.
- 당신의 이름을 왜 지웠습니까?
- 아무리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가 않았기 때문이죠.
- 왜 지워지지가 않았죠?
- 저 사람 때문입니다.
- 저 사람이 당신에게 어떤 일을 했습니까?
- 제게 이름을 지어주셨습니다.
- 당신께 이름을요? 놀랄 만한 사실이군요.
- 예, 저 사람은 제게 "이름 없는 여자"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 증인, 증인은 지금 진실만을 말하고 있습니까?
- 예, 진실만을 말하고 있습니다.
- "이름 없는 여인"과 "이름 없는 여자"란 그 “이름”이 갖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 "여인"과 "여자"란 말의 중요성을 생각해 보세요. 그 이상 말하지 않겠습니다.
- 예, 좋습니다. 그럼, 저 사람을 만나고 난 이후 저 사람이 당신에게 어떻게 했는지를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 더 이상 없습니다. 저 사람은 단지 저를 지워버렸을 뿐입니다.
- 어떻게 지웠죠?
- 저의 이름을 지워버렸죠.
- 도대체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군요. 저로선 이해하기가 힘든데, 좀더 자세하게 말씀해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 자세하게요? 어떤 게 자세한 거죠? 이 이상 자세하게 설명 할 수 있을까요? 판사님은 제게 무얼 기대하세요? 제가 저 사람에 대해 무얼 말하길 바라시죠? 저 사람을 욕해줘야 하나요? 아니면, 저 사람과의 그날 밤 일에 대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죠? 저 사람은 그 날 밤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모를 텐데요? 저 역시 아는 거라곤, 제 이름을 지웠다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그게 다라구요! 판사님, 판사님도 원하세요? 자세하게 알려드릴까요? 자세하고 알고 싶으시면, 오늘 밤 제게로 오시죠? 어때요? 자세하게 가르쳐 드려요? 그래요, 자세하게 가르쳐 드리죠. 판사님은 자세하게 알 권리가 있을 테니까요. 결국은 모두들 가면을 쓰고 있죠. 판사님 역시 가면을 쓴 천사에 불과해요. 모두들 가면을 쓰고, 겉으로는 아닌 척 하면서도 모두들 날 원해요. 모두들 날보고 손가락질을 하죠. 하지만 그 손가락질 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날 알아요. 내가 자세하게 모든 걸 가르쳐 드리니까요. 난 그들에게 이러죠. 날 제발 욕해 달라고요. 왜인지 아세요? 안 그러면 그들의 명예가 실추되고, 명예가 실추되면 곧, 내게서 멀어질 테고, 그러면 제 밥줄도 끊기고 말 테니까요. 오늘 밤 또 제 이름을 지워주시지 않겠어요?
판사의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었다. 그렇게 위엄 있고 현명하다고 판명 나 있는 판사의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것을 보니, 내 기분도 유쾌해졌다. 결국, 저 판사도 이 가련하고 노련한 여인네 앞에선 꼼짝을 못하는구나.
- 그만하시오. 다음 증인을 불러오시오.
- 판사님, 기억하세요. "이름 없는 여인"의 방입니다.
나는 상상한다. 주위의 시선을 뿌리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판사의 모습. 몰래 찾아갈 "이름 없는 여인"의 방. 그 방에는 매일 자기의 이름을 지우는 여인이 또 한 번 자신의 이름을 지우기 위해 판사를 기다리며, 꽃단장을 하고 있을 것이다. 아침이면, 평소와 다름없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나타날 판사의 얼굴표정 - 겉으론 위엄 있지만 온갖 이물질들이 잔뜩 끼어있는 속내 - 그것은 상상만으로도 역겨운 일이다.
나는 속으로 외친다.
‘이름 없는 여인은 아름다웠습니다’
6
두번째 증인이 채택되기 전에, 1 박 2 일 동안 재판장은 휴정을 선언하였다. 그가 왜 1 박 2 일이란 시간을 주었는지 말하진 않지만, 모두들 그 이유는 알고 있었다.
또 다른 죄수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전에는 머뭇거리면서 말하기를 꺼렸던 그 죄수의 태도는 너무도 확연하게 달라져 있었다.
- 당신은 왜 스스로를 감추려 하는 거죠?
나는 잠시 뜨끔했었지만, 이내 냉정을 되찾고 말했다.
- 난, 감추는 거 없소.
- 감추는 게 없다구요? 당신은 왜 스스로를 합리화시키려 하죠? 사람이란 동물은 합리적인 사고방식만을 가지고는 살아갈 수 없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불합리한 것이 합리적이기도 하죠. 당신은, 당신의 문제들이 아주 사소한 것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말하기를 꺼리는 거죠? 사실, 한 가지 문제의 무게가 큰 것이라면, 그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이 모두들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그렇기에 마음 놓고 괴로워할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그 괴로움이 가시고 나면 안정을 되찾기가 쉬워지지만, 사소한 문제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반응은 이렇죠. 뭘 그까짓 것 가지고 고민을 하냐고. 이런 경우가 한두 번으로 끝나면 모르겠지만, 그것들이 쌓이게 되면 병이 되죠. 사실, 가장 위험한 정신 상태는 도저히 풀 수 없을 만큼 그것들을 쌓아두었을 때입니다. 당신의 문제는 그것들을 쌓아두었다는 데 있습니다. 쌓아놓은 점수들을 한꺼번에 잃는 것처럼 어려운 것도 없죠. 그렇듯, 당신은 한꺼번에 그 모든 문제들을 해결할 수가 없는 겁니다. 당신의 가장 큰 문제는 그 쌓아놓은 것들을 단 한 번에 풀려 하는 데 있다는 겁니다. 당신은 스스로를 감추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이미 그럼으로써 당신은 스스로를 철저하게 감추는 아이러니에 빠져버린 거죠. 제 말이 틀렸습니까?
- 당신은 어째서 죄수가 되었소?
- 바로, 방금과 같은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때론, 사람의 마음을 전
혀 모르는 것이 편하고 현명할 때가 있죠. 사람의 마음을 지나치게 정확
하게 꿰뚫면 많은 걸 잃게 되요. 그것이 저의 죄목이죠.
- 흥미 있는 죄목이군.
- 당신의 죄목은 뭐요?
- 바로 당신과 반대되는 죄목이오. 당신은 당신 죄를 너무 잘 알기에 정당하다고 생각하겠지만, 난 나의 죄가 무엇인지 전혀 모르겠소. 이 나라는 정말 우습기만 하오. 왜 죄 없는 사람을 이리 가두어 두려만 하는지, 정말 난 이해를 못 하겠소. 혹시, 죄가 있다면, 말하지 않은 죄? 그것도 죄가 될 수 있소? - 결과에 따라선 될 수 있죠.
- 결과?
- 그렇습니다. 중요한 건, 어떤 상황이었느냐보다는 결과로 판단한다는 것이죠. 모두들 결과만 보려 해요. 당신이 말하지 않은 죄를 저질렀다면, 그것은 당신이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오해일 수도 있습니다. 내가 왜 당신을 감추려 하느냐고 물어본 건 그 때문이었습니다.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감추려 하지 말고 털어놔요. 당신이 기억할 수 있는 모든 것, 쏟아내 버려요. 두려워하지 말아요. 뭐가 두렵죠? 어차피 죽기 아니면 살기 아닌가요? 이 나라의 형벌에는 석방 아니면 사형밖에는 없습니다. 극단적이죠. 석방되면 그야말로 당신은 영원토록 호강하게 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영원토록 당신은 저주받게 될 겁니다. 하지만, 명심하십시오. 말을 할 때 절대로 흥분을 해서는 안돼요. 최대한,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상황에 맞게 말을 해야 한다는 것. 때로는, 거짓말도 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당신은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것이 문젭니다. 말을 하고 싶지 않다면, 거짓말이라도 하세요. 그것이 지금 당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지요. 물론, 당신이 영원토록 저주받고 싶은 사람이라면 더 이상 할 말은 없지만.
전 이제 그만 가서 쉬어야겠습니다. 저의 재판은 쉬는 시간이 너무 없어요. 판사가 너무 서둘러요. 판결이나 제대로 내릴지 모르겠습니다. 그럼, 행운을 빕니다.
난 잠시, 그렇게 멍하니 서 있었다. 내가 그의 말대로 말을 하지 않은 죄를 지은 것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난 정말, 말하지 않은 죄를 저지른 것일까?
7
재판이 다시 시작되었다. 재판장의 얼굴에선 근엄한 표정이 사라졌다. 대신, 그의 얼굴엔 묘한 웃음이 번졌다. 왠지 그 웃음은 비굴해 보였다. 그 웃음의 의미를 알고 있는 것은 오직 나뿐이다. 그는 어젯밤 "이름 없는 여인”의 이름을 완전히 지웠던 것이다. 그 여인은 지금쯤 곤하게 잠이 들었을 것이다. 상처뿐인 그녀의 몸을 끌어안은 채.
- 재판장, 어떻소? 나랑 내기하지 않으시겠소?
- 뜬금없이 무슨 말이오?
- 하시겠소? 안 하시겠소?
- 허…. 이 양반, 웃기는 양반이구만.
- 하시겠다면 말씀드리겠소.
- 좋소. 하겠소. 당신이 억지를 부리지만 않는다면 말이오.
- 켤코 터무니없는 내기는 아니오.
- 그렇다면, 말해 보시오.
- 먼저, 내기의 조건부터 걸겠소.
- 어떤 걸 원하시오?
- 만약, 이 내기에서 내가 이긴다면 나를 풀어주는 조건이오.
- 터무니없군.
- 터무니없는 것이 아니오.
- 나에겐 무엇이 돌아오는 것이오?
- 당신이 이기면, "이름 없는 여인”을 선물하겠소.
- 지금 농담하시오?
- 농담이 아니오. 첫 번째 증인의 "이름 없는 여인”은 시작에 불과하오. 앞으로 수도 없이 "이름 없는 여인”은 등장할 것이오. 물론, 언제 등장할지는 모르지만, 아뭏든 나의 재판 과정으로 보아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릴 듯한데, 그 여인들을 모두 선물하겠소. 한 가지 충고하자면, 그 여인들은 첫 번째 "이름 없는 여인"같이 그렇게 만만한 상대는 아니오. 내가 그 여인들을 상대하는 방법을 가르쳐 드리겠소. 어떻소?
- 당신이 이기면?
- 내가 이기면 나를 풀어주길 바라오. 이건 정정당당한 승부요. 하시겠소?
- 그런데, 무엇으로 내기를 하자는 말이오?
- 사랑이오.
- 무슨 말이오?
- 내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소. 그녀의 마음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소. 하지만, 난 그녀 아닌 다른 누구를 사랑해 본 적이 없었소. 그녀는 그만한 가치가 있었던 사람이오. 그녀의 사랑을 얻는 것이오. 그것이 내기의 조건이오.
- 무슨 말인지 잘 이해를 못하겠군. 다시 한 번 설명해 주시겠소?
- 당신이 내가 사랑한 그 사람의 사랑을 얻을 수 있는 만큼 능력 있는 사람이라면, 난 당신을 존경하게 될 것이오. 비록, 지금은 당신을 경멸하지만.
- 난 당신의 존경을 바란 적은 없소.
- 잘 들어보시오. 당신은 진정, 사랑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오? 그러고도, 존경을 받는 이유를 모르겠군. 당신이 진정 존경을 받는 재판장이 되려거든, 우선 그녀의 사랑을 얻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오. 그렇기 때문에 하는 말이오.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은 나 같은 사람이 아니오. 당신같이 이중적인 사람도 아니오.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은 그녀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오.
- 그녀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오?
- 말 그대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오. 그게 궁금하거든, 직접 노력해 보시오. 그녀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는 것도 당신에겐 흥밋거리 중 하나가 될 텐데?
- 듣고 보니 흥미롭군.
- 어떻소? 하시겠소?
- 재미있군. 내가 그녀의 사랑을 얻을 수 없을 거라 생각하오?
- 당신은 절대로 할 수 없소.
- 좋소. 내기하겠소. 당신은 나의 자존심을 자주 건드리는군.
- 그것도 내 취미 중 하나요.
- 악취미군.
- 내겐 좋은 취미요.
- 좋소. 아뭏든, 재판은 이후로 미루겠소.
- 장담하지만, 앞으로 재판은 진행되지 않을 것이오.
- 그건 두고 봐야 알지.
나는 경멸의 눈빛으로 재판장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재판장 역시, 나를 경멸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는 확신했다. 저 녀석은 결코 그녀의 사랑을 얻을 수 없어. 그녀는 경멸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녀가 원하는 눈빛을 언제나 따뜻한 눈빛으로 세상을 응시하던 그 눈빛이었다……
나는 다시 어두운 지하 동굴로 들어갔다.
8
- 재판은 어떻게 되었소?
- 글쎄요. 아직 진행 중입니다.
- 당신은 스스로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오?
- 전 제 스스로를 잘 알고 있습니다. 때론, 죄가 되지 않는 것도 죄가 될 수 있고, 죄가 될 수 없는 것도 죄가 될 수 있죠. 문제는 죄가 있느냐 없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제가 재판장과 배심원의 마음을 얼마나 움직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쉽지 않군요. 재판장도 만만치 않게 저를 잘 파악해요. 서로 대등하다 보니, 꽤나 힘겨운 싸움입니다. 댁은 어떠십니까?
- 아마 곧 풀려나게 될 거요.
- 그럴 듯한 사기를 치셨나 보군요.
- 당신한텐, 궂이 설명을 할 필요가 없으니 무척 편하군.
- 하지만, 조심하시는 게 좋으실 것입니다. 사기는 믿을 만한 게 못돼요. 너무 자신감이 지나치면, 화를 자초할 수도 있어요. 항상,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 놔야하죠.
- 내 방법이 잘못된다는 거요?
- 그렇지는 않습니다. 다만, 만약의 경우에 항상 대비를 해야 한다는 거
죠. 아, 재판이 또 시작되는군요. 제대로 얘기할 시간조차 없으니, 무척 섭
섭하군요. 또 뵙지요.
그의 말을 다시 되뇌어봤다. 항상, 철저하게 대비한다는 건 중요한 일이다. 나는 그럴 일은 없을 거라 자신했다.
9
- 재판장이 바뀌었다는 어이없는 소식을 들었다.
- 당신은 또 누구요? 전(前)판사는 어디 갔소?
- 전(前)판사요? 못 들으셨어요? 사기죄로 구속되었어요. 재판장이 재판
을 받는 드문 경우가 발생한 거죠
- 사기죄라니오?
- 당신이 내기를 하셨더군요. 그 여자분을 상대로 사기를 치셨죠? 여자분은 아직도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요.
- 결국, 그녀의 사랑을 얻었다는 말이오?
- 사랑을 얻었을 뿐 아니라, 자제분을 잉태하셨죠.
- 이번엔 내가 충격을 받을 차례군.
-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물어도 될까요?
- 무엇을 묻고 싶소?
- 그 여자분, 정말 사랑하셨나요?
- 미안하오. 그건 사기였소.
- 원인은 당신한테 있었군요. 전(前)판사는 마치 자신이 당신인 양 행동했어요. 당신이 지상에 계셨을 때는 참 따뜻한 눈빛을 지녔더군요. 당신이 그 여자분을 사랑한 게 아니라, 그 여자분이 당신을 사랑한 거였죠? 전(前)판사는 당신의 사기를 알고 있었어요. 한번 크게 상처받은 사람은 좀처럼 쉽게 다른 사람에게 가지 못해요. 전(前)판사는 아주 쉽게 그녀를 얻었죠. 하지만, 그 판사는 한 가지만 알고 둘은 알지 못했어요. 아무리 속이려 해도 때론 속일 수 없는 사람이 있다는 걸 모르고 있던 거지요. 당신을 사랑한 그 여자분은 당신을 너무도 그리워해 잠시 그 재판장이 당신인 것처럼 착각했지만, 곧 당신이 아니란 걸 알아챘어요. 그 길로 바로 신고를 해 온 거죠. 이렇게 되면, 게임은 누가 이긴 게 되나요?
- 모르겠소.
- 여전히 당신은 당신의 잘못을 깨우치지 못하는군요.
- 내가? 뭘? 뭘 잘못했소? .
- 재판이 끝나면 알게 될 거예요. 변호사 선임은 여전히 안 하실 건가요?
- 그렇소. 난 아직 그 생각엔 변함이 없소.
- 좋아요. 그럼, 재판을 계속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10
문득
살아가면서
난 진정
진실로서의 사랑을 해보았을까?
라는 물음을 던져보건대 “난 아니다”
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 쉽지 않으신가 보군요? 얼굴색이 말이 아니군요.
- 판사가 또 바뀌었소.
- 자만은 담배나 술보다 더 좋은 기호품이죠. 하지만, 그것은 마약 같은 거지요. 한번 자만에 빠지기 시작하면 헤어나기 힘듭니다. 당신은 이미 그 자만이란 것에 익숙해지셨더군요.
- 잘 봤군. 당신 역시 마찬가지 아니오? 아니라면, 당신하고는 상대할 필요가 없는 걸로 아는데.
- 그렇지요. 하지만, 당신과 내가 다른 부분이 분명히 있습니다. 당신은 분명하게 그 자만심을 드러내지만, 나의 경우는 그 자만을 철저하게 겸손이란 덕목으로 위장하죠. 그것은 곧, 당신은 철저하게 솔직한 사람이고 나의 경우는 위선자라는 얘기가 되죠.
- 그럼 그것도 알겠군. 난 당신 같은 사람을 경멸한다는 것.
- 물론, 알지요. 당신과 나는 서로를 너무도 잘 알기에 서로를 경멸한다는 것도. 하지만, 결국에 이기는 것은 당신처럼 솔직한 사람은 아닙니다. 저 같은 위선자가 살아남는 거죠. 당신께 그걸 깨우쳐 주고 싶군요. - 그렇다면 헛수고 하신 것 같은데.
- 결코 그렇지 않지요. 왜냐하면, 당신이 나와 같아지기를 바라지는 않으니까요. 다만 난 내가 무죄로 석방됨으로서 저 같은 위선자가 살아남는다는 것을 당신께 증명하려 하는 것뿐입니다.
- 그래서 당신이 얻는 게 뭐요?
- 당신이 사형선고를 받는다면 내 생각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셈이 되지요. 난 내 생각이 옳았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리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알리기 전에는 모르는 것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것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이지요.
- 당신은 참 우스운 소신을 가지고 있군. 당신은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나 보군.
- 때론 목적을 위해서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있죠. 이번이 그런 경우입니다. 내가 아무리 이 세상에 이런 비리를 알리고 싶어도 내가 살아남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으니까요.
- 그렇다면 만약에 말이오. 당신이 죽고 내가 산다면? 그때는 어떻게 되는 거요?
- 아마도 그것은 이 세상이 제대로 되어 간다는 증거가 될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바라는 바이기도 합니다. 다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는 얘기지요.
- 왜 불가능하지?
- 당신은 도무지 현실 판단 능력이 없군요. 현실을 똑바로 주시하세요. 아직도 몽상 속에서 헤메십니까? 그래서는 안돼요. 이제 그만 꿈에서 깨어나세요. 당신은 지금 재판을 받는 중입니다. 그리고 이 재판의 유죄선고는 사형입니다. 당신을 고소한 사람은 당신을 죽이는 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으셨고, 당신 편이 되어줄 증인조차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재판에 승산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당신 혼자 아무리 증언하고 당신 혼자 아무리 아니라고 우겨도 다른 모든 증인들이 당신의 말이 틀렸다고 하면 틀린 겁니다. 재판이 언제나 진실만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재판은 단지 당신의 유죄를 얼마나 명확하게 판단하느냐를 가려줄 뿐입니다. 당신이 아무리 죄가 없다고 우긴다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확실한 증거가 있어야 하고 또 당신을 도와줄 증인이 있어야 합니다. 당신이 말하는 진실은 결코 진실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 했다. 솟아날 구멍은 없는 듯 했다. 지금까지 나는 최악의 상황으로까지 몰고 온 듯 했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설 순 없었다.
11
- 비로소
- 재판이
- 시 작
- 되었다
- 두번째 증인 나와 주세요.
꽤나 긴 시간이 지난 것 같았는데, 이제 겨우 두 번째 증인이란 말에 나는 좀 당황했다.
- 질문이 하나 있는데?
- 하세요.
- 증인은 대체 몇 명이나 되는 거요?
- 당신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 이해할 수가 없군. 대체 이 재판은 언제 끝나는 거요?
- 재판이 지루하신가요?
- 그렇소.
- 당신은 참을성을 배워야 합니다.
- 그런 건 필요 없소. 어서 빨리 이 재판이 끝나길 바랄 뿐이오. 어차피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지.
- 무엇이든 쉽게 이루어지는 건 없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진짜라고 생각합니까? 당신이 정말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까? 당신이 아무리 아니라고 우겨도 당신은 가짜이며 당신은 죄인입니다. 당신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하지만, 당신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잘 모르죠. 그리고 자신의 죄를 인정하기 싫어하죠. 죄를 인정하기 싫어하는 사람들, 자신을 돌아볼 줄 모르는 사람들, 그들 모두는 가짜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을 반성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끊임없이 발전시켜 나가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발전이란 흔히, 문명 속에 갇힌 기계적인 것들만을 말하죠. 그것들은 치열한 머리싸움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지금 하는 이 재판은 무엇입니까? 당신은 이미 죄인이라는 전제가 있습니다. 지금 판단하는 것은 죄질의 크고 작음이지 유죄냐 무죄냐가 아닙니다.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당신이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는지 이제 그걸 당신께 깨우쳐 드리려 합니다. 제 이전의 판사는 모두 당신을 재판하기에는 역량이 부족했습니다. 그들은 나의 제자이기도 하지요. 모두들 당신의 독설에 넘어가 제대로 된 재판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나를 유혹한다면 몰라도 전(前) 판사처럼 그런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성별을 지닌 장점이 있지요. 하지만, 절대로 당신이 나를 유혹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을 테니 걱정 없을 거구요.
- 왜 그렇게 확신하오?
- 당신은 당신이 꼭 필요하지 않으면 여자들을 유혹하지 않아요. 과연, 당신이 나를 유혹한다고 해서 무슨 이익이 있을까요? 어차피 당신은 유죄인걸요.
- 승산 없는 싸움이군. 그런데 왜 그리 질질 끌지? 어서 빨리 나를 사형
대에 보내주시오.
- 당신을 빨리 보낼 수는 없어요. 당신이 죄를 지은 건 분명한데 정확한 증거가 없으면 당신이 유죄임에도 불구하고 석방될 수가 있으니까요. 다만, 판결에 관계없이 당신은 유죄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은 것뿐이에요.
- 그렇다면 당신을 유혹할 필요가 있겠군.
- 뭔가 착각하고 계시는 군요. 판결은 제가 내리지 않아요. 당신을 지켜보는 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심판할 겁니다. 저는 최대한 중립적인 입장에서 재판을 진행할 뿐이지요. 그것이 판사가 하는 역할입니다. 판사의 권리를 남발해서는 안 돼죠.
- 당신은 존경하고 싶은 사람이군.
- 아직은 아니군요.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죠. 하지만, 제가 바라는 것은 존경받는 것이 아니라 제가 하는 일이 당연한 일인 듯 넘어가는 세상입니다. 사실, 누구에게든 존경받는다는 것은 부담스런 일입니다. 그리고 하나 충고해 드리죠. 당신은 지금 당신 변호사 역할까지 하신다는 것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묵비권 행사를 할 권리가 있는 동시에 또 없기도 합니다. 당신이 하는 모든 말이 불리하게 작용할 수도 또 유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당신이 변호사와 피고인의 역할을 동시에 하고 있기 때문에 당신의 말을 모두 다 받아주기도 하며 들어주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재판은 더 오래 진행될 수밖에 없음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번이 마지막 기회입니다. 이번에 변호사 선임을 하지 않으시면 당신은 변호사 선임권을 박탈당합니다. 변호사 선임을 하시겠습니까?
- 생각할 시간을 주겠소?
- 좋습니다. 잠시 휴정합니다.
증인은 말 한마디 못하고 그냥 들어갔다. 우스웠다. 이 모든 게. 모두 가짜라고? 나도 가짜? 어떤 면에서? 그리고 나는 변호사를 비웃기 시작했다. 세상엔 진짜도 있다는 걸 보여주겠다고 속으로 속으로 외치면서.
12
- 세 번째 증인 나와 주세요.
- 잠깐. 두 번째 증인은 어떻게 된 거요?
- 한번 나온 증인은 다시 나오지 않습니다.
- 이유가 뭐요?
- 모든 사람은 한번만 죽기 때문입니다.
- 우습군.
- 변호사 선임을 하시겠습니까?
- 아니, 하지 않겠소.
- 꿋꿋하시군요.
- 어차피 내가 나를 살려내지 않으면 아무도 나를 살려줄 수는 없소. - 그렇군요. 하지만, 당신을 살려내지는 못하더라도 당신의 목숨을 연장시켜 줄 사람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조금 더 산다고 해서 내가 가치 있는 인간이 될 거 같소? 나는 이제 저물어 가는 사람일 뿐이오. 죽음 아니면 영원을 택하겠소.
- 아주 짧은 시간 동안에도 많은 걸 이룩할 수는 있습니다.
- 당신같이 능력 있는 사람은 그렇겠지.
- 아닙니다. 당신 같은 분도 충분히 가치가 있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죄를 결코 알 수 없겠지만, 당신은 스스로를 지켜낼 능력이 있습니다. 당신은 결코 권력 앞에 무릎 꿇지 않았으며 당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변호사 선임을 하시겠습니까?
-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는 도대체 모르겠지만, 어찌됐든 난 변호
사 선임은 할 생각이 없소.
- 좋습니다. 세 번째 증인, 증인에게 묻겠습니다. 당신은 피고에게 어떤 피해를 당하셨습니까?
- 저 자는 내 약혼녀를 뺏었습니다.
- 어떻게 뺏었습니까?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주시겠습니까?
- 그녀는 저와 약혼을 하고 난 후, 저 자를 보게 됐는데, 그 후 저 자에게 푸욱 빠져 저와의 약혼을 파기했습니다.
- 증인, 그러면 그 후 증인의 약혼녀는 어찌되었습니까?
- 혼자서 저 자만을 그리워하며 살고 있습니다. 저 자의 애기도 낳았습니다.
나는 잠시 멍했다.
- 잠깐, 판사님. 내게도 말할 기회를 주시오.
- 피고는 변호사의 역할도 겸한다는 걸 명심하십시오. 발언은 잠시 후 해주시기 바랍니다. 증인은 진실만을 말하고 있습니까?
- 예. 틀림없이 저 자와 결혼하여 애기까지 낳았고 저 자는 바로 죽었습니다.
- 예. 알겠습니다. 증인, 수고하셨습니다.
- 이제 당신이 어떤 죄를 저질렀는지 아시겠습니까?
- 무슨 말이오? 난 그녀와 결혼한 적도 없고 더군다나 애를 갖을 만한 일을 한 적은 더더욱 없소. 뭔가 잘못되었소.
- 아닙니다. 잘못되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보이는 것들만 보려 하기에 당신의 죄를 모르는 것뿐입니다. 당신은 틀림없이 결혼한 적도, 애를 낳은 적도 없습니다. 당신의 전(前)판사와 내기를 거셨던 것을 기억하세요. 제가 당신께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것입니다. 당신은 존재 그 자체로서 죄가 됩니다. 당신이 얼마나 올바르게 살았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당신을 사칭한 누군가가 또 그녀를 괴롭힐지 모릅니다.“이름 없는 여인”을 지우는 것처럼 당신은 서로의 쾌락을 추구하기 위해 하는 행위에 불과하지만, 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상처받는다는 것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자, 이제 재판을 마칠 때가 된 것 같군요.
- 그럼, 난 유죄가 되는 거요?
- 처음에도 말씀드렸듯이, 저는 당신을 판결하지 않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당신께 판결을 내릴 것입니다. 판결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당신을 석방할 수도 사형할 수도 없습니다. 그럼, 영구불면의 시간 동안 판결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땅땅땅.
13
내 방에 있던 또 다른 죄수는 보이지 않았다. 그가 사형되었는지, 또는 석방되었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그 죄수에 비해 나는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은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 그 죄수는 나타나지 않았으며 나는 그에게 내 판결이 어떻게 내려질지 물어볼 수도 없었다. 영구불면의 시간 동안 판결이 내리길 기다려야만 했다. 천둥이 치고 소리만큼의 간격으로 번개가 번쩍이면서 비가 퍼부었다. 자연이 나를 향해 기립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고통이 시작된다.
외 인 ( 外 人 )
프 롤 로 그
"접근 암호 x208. 살인 목표물 여우 팔찌. 수신 여우 꼬리. 발신 여우 목걸
이.”
통화는 조용하고 간단했다.
'찰칵'
'찰칵'
1
"날씨가 많이 추워졌군.”
외투깃을 여미며 들어오는 서장의 굵은 목소리가 비좁은 공간을 가득 메웠다.
"네, 서장님. 오늘은 유난히도 춥죠?”
형식적인 대화가 몇 차례 오고 갔을 뿐, 이내, 오후의 침묵은 싸늘한 날씨만큼이나 그들을 에워쌌다. 한참 후 서장은, 서랍에서 몇 장의 사진을 꺼내들고 그 중 한 장을 골라 이 형사에게 내밀었다.
"자네, 이 여자 아나?”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몽타쥬. 그래, 그것은 사진이라기보다는 몽타쥬에 가까웠다. 사진을 보는 이형사의 눈빛이 희미하게 찌푸려졌다. 서장은 그런 그의 눈빛을 지우기라도 하듯, 사진을 낚아채며 말을 이었다.
"그녀는 거물급 사기꾼인데, 아주 특이하고 영리해서 좀처럼 덜미를 잡기가 힘들다네. 그녀의 주요 목표물은 다른 사기꾼인데, 바로 그 여자의 그런 사기행각이 우리를 골치 아프게 만든다네. 그녀가 사기를 치는 사기꾼을 우리가 찾아내야만, 그녀의 덜미를 잡을 수 있는데 말이야.”
전화벨이 울렸다. 서장은 기다렸다는 듯이 수화기를 들어 올렸다.
"그래? 곧 보내겠네.”
통화는 간단했고, 서장은 곧 이 형사를 향해 말을 퍼부었다.
"드디어, 그여자도 걸려들 모양이군. 지금 곧 출동하게. 총력전이네.”
"여자 한 명에 총력전을 펼칩니까?”
"여자라고 우습게 보지 말게. 마약 밀매에 손을 댄 모양이야. 설명할 시간이 없으니까 빨리 준비해!”
이형사는 지우려 지우려 아무리 애써도 자꾸만 떠오르는 여인의 모습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사진 속의 그 여인. 지금은 이미 몽타주라는 희미한 기억 속에 묻혀버린, 그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 그러면서도, 그의 마음 한 구석 깊은 곳에 자리잡고, 마치 그의 수호천사라도 되는 듯 떡 버티고 서서 좀처럼 나가려 하지 않는 한 여인의 기억.
"서장님, 한 가지 물어 봐도 됩니까?”
"뭔데 그러나?”
"그 여자에 대한 정보는 누가 입수합니까?”
"김 형사에게 물어보게나.”
2
여인의 모습이, 주택가 귀퉁이 골목길에서 줄지어 노는 아이들의 눈에 비쳤다. 길게 늘어뜨린 머리는 허공을 휘저었고, 홱홱 젖혀대는 길다란 팔 안으로 엉덩이가 씰룩거렸다. 아이들은 그녀가 나타나자,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그녀를 놀려댔다.
"오리 궁둥이. 헤헤.”
"아니야. 저건 분명 여우 꼬리야.”
"웃기지 말라구. 저 누나는 분명 오리야.”
"여우꼬리! 오리 궁둥이!”
끝없이 재잘거리는 아이들의 놀림소리가 들리는지 안 들리는지, 여인은 몸에 꽉 끼는 옷차림으로 거리를 가로질렀다.
그녀가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아이들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쩍쩍 다시며, 하나 둘 저마다의 집으로 제각기 흩어졌다. 지평선 사이로 물드는 붉은 하늘만이 여인의 아름다움을 출렁이고 있었다.
여인이 이 동네에서 살게 된 건, 어느 추운 겨울날부터다. 그녀는 쬐그만 용달차에다 책상과 화장대, 그리고 보따리만 몇 개 실고 이 동네로 이사를 와서는 그 후 한 번도 얼굴을 내민 적이 없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은 그녀가 무얼 하는지, 어떻게 사는지, 그녀가 언제 이사 왔는지조차 몰랐다. 심지어, 그녀를 이웃동네에 사는 아가씨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봄기운이 그녀를 거리로 내몰았을 때, 그녀는 아이들의 환영을 받으며 화려한 등장을 했지만, 그녀는 동네의 어떤 사람에게도 인사 한 마디 건네지 않았다. 누가 말을 건넬라 치면, 그녀는 그 사람을 무시해버리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러한 그녀의 행동은 동네 사람들에게 미움을 샀고, 곧 그녀가 버릇없다느니, 무례하다느니 하는 말만이 떠돌았다. 그 후, 동네 사람들은 그녀를 무시해 버리거나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곤 했다.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밤낮 여인을 배웅하는 재미에 골목길을 드나들었다. 여인은 그들의 배웅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가끔 귀찮다는 듯이 그들에게 돈을 몇 푼 쥐어주면서, 멀리 구멍가게로 쫓아내곤 했다. 그럴 때, 여인은 웃음을 짓곤 했는데, 아이들은 그런 그녀의 얼굴을 신기하게 쳐다보면서도 막상, 공돈이 생겼다는 게 기쁜지, 아무 말 없이 그녀에게서 사라져버리곤 했다. 그럴수록 더욱더 솟구치는 아이들의 호기심은 억제할 수가 없었다.
봄기운이 채 가시기 전, 아이들은 몇 명의 남자를 거느리고 다니는 그녀를 보았다. 그들은 어쩔 때는 한 명, 다른 때는 두 명, 가끔은 여러 명씩 거느리고 올 때도 있었는데, 얼굴은 거의 매번 바뀌었다. 처음에 아이들은 무서워서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다.
한번은 여인과 남자가 아이들이 노는 골목을 지나다가 정면으로 마주친 적이 있었다. 남자는 아이들에게 동전 몇 개를 쥐어주면서 말했다.
"얘들아, 까까 사 먹고 가서 놀아라. 여기로 오지는 마. 안 그럼, 다음부턴 까까 안 사준다."
그 후로 아이들은 여인이 남자를 데리고 오는 날을 기다렸고, 그런 날은 어김없이 구멍가게로 가서는 맛있게 놀 수가 있었다. 아이들은 여인이 데리고 오는 남자를 모두 '보스'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들이 돈을 받으면, 그들은 어김없이,
"보스, 고맙습니다. 이번 일은 저희에게 맡겨 주십시오. 반드시 처치하고 오겠습니다."
하며, 일제히 고개를 숙이고는 쏜살같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면 남자들은, 한 결 같이 당황한 표정을 짓다가 그들이 영화 흉내를 내는 것임을 깨닫고, 요즘 아이들의 머리는 참 일찍 돌아간다며 혀를 내두르면서 씨익 웃고 마는 것이었다.
어느 날부턴가 아이들의 머릿속에는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 대한 의문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혀엉, 그런데 그 사람들하고 그 누나랑 뭐야?”
"무슨 말 하는 거야?”
"그러니까, 그 아찌들하고 그 누나 뭐 그런거… 있잖아?”
"난 또. 그걸 '관계'라고 하는 거야.”
"맞아. 간개가 뭐야?”
"'간개'가 아니구, 관계!”
"어렵단 말야.”
"좋아, 대충하자. 저기 대답해줄 만한 사람이 오는데……”
"어, 미선이 누나다!”
"무슨 얘기를 하는데 나를 그렇게 빤히 쳐다만 보고 있는 거야?”
"누나, 아찌들하고 그 오리누나랑 무슨 간개야?”
"간개?”
"얘는 '관계'란 발음을 못 하잖아.”
"아, 관계가 뭐냐고?”
"너라면 알 것 같은데.”
"아마, 남편일 것 같애.”
"남편? 무슨 남편이 그렇게 많아?”
"혀엉. 남변이 뭐야?”
"네 엄마의 아빠가 남편이지 뭐야?”
"뭐? 그러믄, 우리 외할아버지가 남변이야?”
"아휴, 이 바보.”
"그게 아니라, 네 엄마한테는 네 아빠가 남편이라는 거야. 알았지?”
"아, 그러니까 아빠가 엄마한테 남변이라는 소리구나. 근데, 저 누나는 남변이 저렇게 많아? 그러믄, 우리 같은 애들이 몇 명이나 되는 거야?”
"야, 너하고는 말이 안 통한다.”
아이들의 궁금증은 날이 갈수록, 닭이 알을 까듯이 하나씩 더해졌다. 그들은 5월의 어느 날, 여인에게서 어린이날이라며 억지로 뜯어낸 돈으로 구멍가게에서 과자를 사서 먹으면서 놀다가, 문득 새 화젯거리를 떠올렸다.
"그런데, 그 여자 돈이 어디서 나지?”
"누구 말이야, 혀엉? 그 누나?”
"그래, 임마. 미선이, 너는 알 것 같은데. 너는 그쪽에선 끝내주잖아?”
"글쎄. 내 생각으로는 그 뭐라더라? 매춘부라 그러나? 그런 거 같애.”
"혀엉, 매춘부가 뭐야?”
"임마, 넌 아직 몰라도 돼.”
"피이-. 형도 모르니까 갠히……”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남자한테 돈 받는 여자래.”
"뭐? 그냥 돈 주는 남자도 있나? 하기야, 저 여자도 그냥 우리한테 돈 주니까. 그럴 만도 하네.”
"글쎄, 그런가 봐. 매춘부하면 그렇대. 그런데, 우리 엄마는 절대로 나는 그런 거 하면 안 된대. 정말 어른들은 알 수가 없다니까.”
"그러믄 난, 매춘부 해야지.”
"야, 남자는 안 돼.”
"그래, 남자는 매춘부하면 돈 주는 거래.”
"에이……”
아이들은 여자를 매춘부로 놀려댔고, 그 놀림은 소문으로, 그 소문은 동네 사람들에게는 진실로 받아들여졌다. 동네 사람들은 이제 그녀를 보면, 슬금슬금 피해 다녔고, 아이들에게도 그녀는 나쁜 사람이라고 가까이 가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아이들은 부모의 눈을 피해 여전히 여인을 쫓아다녔다. 마치, 개가 닭을 쫓는 모양으로.
마지막. 아이들이 그토록 잘 따르던 여인의 마지막 모습을 본 것은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은 한여름의 가장 더운 어느 날이었다.
3
"그래, 잘 됐나?”
"마약밀매업자들은 소탕했지만, 그 여자만은 사로잡지 못 했습니다.”
"그럼, 죽였단 말인가?”
"아닙니다. 마찬가지겠지만, 여자는 동맥을 끊고 자살해 버렸습니다.”
이형사의 목소리에 약간의 흔들림이 느껴졌다.
"그런가? 어쨌든 수고했네.”
이 형사는 조각난 목걸이를 꺼내 들었다. 무슨 이유였을까. 그에게 이 목걸이를 붙잡고 놓아 주려 하지 않는 이 알 수 없는 힘은. 그 신비한 힘은 그가 처음 이 목걸이를 보았을 때 그를 강력하게 사로잡았다. 그는 그의 모든 것을 바치고서라도 그것을 가져야 한다는 강한 욕망을 가졌었다. 도대체 왜일까.
4
"그래, 웬일이야? 나한테 데이트 신청을 다하고?”
"응, 좀 물어볼 게 있어서.”
"뭘로 드시겠어요?”
여자의 낭랑한 목소리가 그들의 귓속을 후볐다.
"뭐 마실래?”
이 형사가 물었다.
“너, 커피 마실 거지?”
"아니야, 난 레몬차.”
"그래? 웬일이야, 커피를 다 마다하고?”
“그냥, 나에게도 뭔가 변화가 필요한 거 같아서.”
“그래? 그럼, 레몬차 두 잔 주세요.”
"예, 감사합니다.”
여자의 발자국 소리가 멀어져 갔다.
"뭘 물어 보시려고? 여자 때문에 고민하시나?”
"여자? 난 널 보면서 여자는 사귈 만 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데……”
"흥, 너 재미없을 줄 알어.”
차가 나올 때까지 그들은 이런 저런 농담을 주고받았다.
"이제, 본론을 얘기하시지.”
그들은 서로 담배를 입에 물고, 성냥으로 불을 나누어 붙였다. 담배연기가 그들이 앉아 있는 좁은 공간을 가득 채웠다.
"그 여자에 대한 정보 말인데…… 그 정보 어떻게 입수했지?”
김 형사는 잠시 주저했다. 이 형사는 그녀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에게 생각할 여유를 주었다.
"사실, 정보 입수하기는 어렵지 않았어. 그 여자가 우리 집에다가 전화를 해서 알려주었거든.”
"직접 너네 집에? 그 여자가?”
"응. 아마 그 여자였을 거야. 그게 전부야. 여자에 대한 정보는 컴퓨터에 입력되어 있었거든. 그 여자는 거래 장소를 알려 주었을 뿐이야. 물론 암호 같은 말로 했는데, 암호는 바로 접촉 직전에 해석을 할 수 있었어.”
더 들을 건 없었다. 그녀에게선. 그들은 헤어졌다. 아무 말 없이. 찻값은 각자 부담. 그것이 그들의 인사였다. 전류의 짜릿함이, 그들을 감전시킬까 봐 그들은 서로를 두려워했던 것이다.
5
잡으려 잡으려 아무리 애를 써도 잡히질 않던 여인의 얼굴. 그녀의 얼굴이 차디찬 시체로 그의 앞에 나타났을 때, 여인의 온몸에서 풍겨 나오던 온화함.
여인, 새삼스레 여인이라는 낱말이 그녀에게 어울린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째서일까. 이 형사는 검퓨터의 스위치를 올리고, 정보부를 연결했다.
"암호는?”
암호? PASSWORD? 그는 아득한 먼 추억을 회상하듯, 기억을 더듬었다.
"2049년. 100000”
아무런 뜻도 없는 암호. 그는 간신히 기억해낸 그 번호의 자판을 눌러댔다.
"O.K. PASS”
그는 여인의 이름을 기억해내려 애썼다. 불여우? 그런 사람은 등록되어있지 않습니다. 컴퓨터의 음성 신호가 '삐-' 소리를 냈다. 지문 검색. 그는 손바닥을 컴퓨터의 모니터에 갖다 대었다.
"YES. RIGHT. PASS.”
이 형사는 다시 여인의 이름을 생각해 보았다. 여우 목걸이?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곧 자료를 찾아보겠습니다. 곧, 화면에는 그녀에 관한 정보가 나열되었다. 프린터를 하시겠습니까? (Y/N)
그는 Y자의 자판을 눌렀다. 프린터기에서 자료가 복사되었다.
여우 목걸이에 관한 정보 자료. 죄수번호 1111. 2025년, 살인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음.
5년 후, 탈옥. 또 다시 살인을 했으나, 잡지 못함. 살인 동기는 두 번 모두 강간범에 대한 증오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판명됨.
지금은 거대한 X 조직의 일원으로 마약과 사기에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밝혀짐.
여우 목걸이에 대한 사적인 정보를 원하면, P를 누르시오.
그는 P자를 쳤다. 곧이어 또 다른 정보가 프린트 되었다.
여우 목걸이의 사생활. 2015년 낙태 수술을 해 벌금을 문 적이 있음.
2019년 딸을 출산. 두 번 모두 사생아였음. 2023년 딸을 고아원에 버림.
그 이듬해 아이는 입양된 것으로 알려짐.
혈액형 인자는 BB. 최신정보를 원하십니까? (Y/N)
그는 N을 치고, 전원을 내렸다. 그리고 마냥 전해져 오는 아득한 기억 속에 그의 몸을 내맡겼다.
6
아이는 조용히 서 있었다. 여인은 멀뚱히 아이를 쳐다보다가 금빛의 목걸이를 아이의 목에 걸어주고 말없이 멀어져 갔다. 하늘은 맑았다. 아이는 여인이 멀어지는 거리를 멀뚱히 쳐다보다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이는 목에 걸린 목걸이가 걸리적거리는지 그것을 빼내었다. 아이는 한참동안 그 목걸이를 이리저리 만지작거리더니 하수구 구멍으로 그것을 집어던졌다. '퐁당'하는 탁한 소리가 아이의 귀를 때렸다. 길을 가던 어떤 사람이 아이에게 물었다.
"집이 어디니?”
아이는 말이 없었다.
"엄마가 누구니?”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아이는 마치 자기를 버린 엄마를 원망하듯 마음씨 좋게 생긴 아줌마를 쳐다보았다.
"엄마가 없나 보구나? 아유, 불쌍해라.”
아이가 간 곳은 고아원이었고, 그 다음해 아이는 바로 입양되었다.
여인은 비틀거렸다. 해는 뉘엿뉘엿 기울어져 가고, 사람들은 퇴근길을 서둘렀다. 여인이 골목길을 들어섰을 때, 비로소 그녀는 헛소리를 해대기 시작했다.
"이 새끼들, 어디 두고 보자.”
"야, 저 여자 왜 저러냐?”
아이들의 소곤거림. 이어 동네 관리인의 등장.
"야, 고자질쟁이다. 어서 도망가자.”
그들은 잽싸게 달렸다. 남자의 얼굴이 지는 햇살 속으로 가려져 갔다.
아이는 밤길 나다니길 좋아했다. 그날 밤, 아이는 골목길 어귀에서, 들려오는 말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여보, 오랜만이야.”
"왜 왔죠?”
불분명한 여인의 말소리.
"여기가 어디죠? 나를 집에 데려다 줘요.”
"취했군. 너무 취했어.”
"그래요, 취했어요. 당신은 누구죠? 관리인?”
"여보, 나야. 정신 차려.”
"저는 그년을 죽일 거예요.”
여인의 욕지거리가 아이의 귓가를 타고 흘렀다. 곧이어 알 수 없는 신음소리. 여인은 행복해 보였다. 아이는 말없이 사라졌다.
다음 날, 아이들이 골목길에 들어섰을 때, 그들은 잠들어 있는 여인의 모습을 발견 했다. 여인의 치마 자락이 피로 얼룩져 있었다.
"누나! 누나! 정신 차려요!”
아이들이 부르짖는 소리에 여자는 게슴츠레하게 눈을 떴다. 아이들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으응, 내가 왜 여기 있지?”
"어제부터 있었어요.”
"뭐, 어제부터?”
그녀는 일어났다.
"앗! 내 옷이 어떻게 된 거야? 어제, 나 말고 또 누구 본 사람 있니?”
"예, 관리인 아저씨요.”
그녀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고맙다는 말을 남긴 채, 그녀는 사라져갔다. 그 후, 그녀를 더 이상 그 동네에선 볼 수 없다.
동네는 술렁거렸다. 아이들은 여인의 집에 어느 날 갑자기, 경찰이 들이 닥친 것에 흥미를 느꼈다.
"저 아찌들, 저기는 왜 저렇게 지키고 서 있는 거야?”
죽음. 관리인은 여인의 집에서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여인은 이미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아이들은 그 사실을 몰랐다. 다만, 그들은 여인을 배웅하던 골목길에서 그녀의 향수를 아쉬워하며 놀이를 하고 있을 뿐이었다.
"혀엉, 이게 뭐야?”
"목걸이 같은데.”
조각난 금 빛깔의 물체가 아침 햇살에 반짝거렸다.
"그 여자 건가보다. 줘, 내가 가져갈 테니까.”
"싫어, 내가 줏었으니까, 내꺼야.”
"내가 까까 사줄께.”
"정말?”
"그래, 임마.”
"그럼, 먼저 사 줘. 까까랑 바꾸게.”
"알았어, 임마.”
하늘의 구름이 뽀얗게 흐려지고 있었다.
7
이 형사는 담배를 꺼냈다. 그는 빈속에 담배를 피우는 때가 별로 없었지만, 가끔, 아침에 일어나면 담배 생각이 날 때가 있었다. 대개는, 사건을 처리하고 난 뒤에 그러는 버릇이 잦았고, 그러고 나면 아침을 거르기 일쑤였다. 그는 신문을 펴들었다. 사회면을 읽으면서 그의 얼굴이 흥분되기 시작했다.
"2049년 x월 x일. 사기로 악명 높은 사기꾼인 '여우 목걸이'는 대규모 마약 밀매에 성공했다. 이날 그녀는 경찰에 헛 정보를 흘림으로서, 그의 명성답게 여러 곳에서 거래를 성공시킨 것으로 알려졌는데, 경찰의 총력전이 펼친 가고파 빌딩에서 자살한 것으로 알려진 여자는 그녀의 동생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살을 위장한 타살인 것으로 검사의는 진단을 내렸다. 경찰은……”
그는 컴퓨터의 전원을 올리고, 정보부를 연결했다. 여우목걸이에 대한 최신 정보. 잠시 후, 화면이 모니터에 인쇄되었다.
여우목걸이에 관한 최신 정보. 최근 그녀에게 동생이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그녀의 정보를 원하십니까?(Y/N)
그는 Y를 쳤다. 다시 화면이 모니터에 인쇄되었다.
여우 목걸이 동생에 관한 정보. 성별은 여. 2019년 아들 출산.
여우 목걸이 밑에서 일하는 마약 밀매 전문업자.
2023년 아들 행방불명.
전해지는 말로는 그녀가 직접 거리에 내버린 것으로 알려짐.
혈액형 인자는 AA.
특기 사항.
두 자매 모두 같은 해 같은 날에 아이를 버린 것으로 추정됨.
복역 사항 없음. 그외 다른 사항의 질문이 있으십니까?
그는 HUSBAND라는 자판을 눌러댔다.
이것은 극비 사항입니다. 지문 검색. 혈액형 검사. 신분 확인.
그는 양쪽 손바닥을 모두 모니터에 갖다 대었다.
지문 통과. 혈액형 인자는 AO. 신분 확실함.
곧 기밀 정보가 흘러나왔다.
극비 사항에 관한 자료. 이것은 사생활 침해가 될 수 있으니 조심하십시오.
이 자료를 발설시는 처벌.
극비 사항.
여우 목걸이의 동생은 여우 팔찌라 불림.
남편은 두 자매가 같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함.
즉, 그들 자매 아이들의 아버지는 한 명이라는 의미.
2030년 여우 팔찌가 살던 집에서 관리인이 시체로 발견됨.
관리인의 혈액형 인자가 OO형인 것으로 보아 두 아이의 아버지인 것으로 추정됨.
더 이상의 자료는 없습니다.
그는 처음으로 조각난 목걸이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자세히. 거기엔, 희미한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여우 목걸이. 2030년.'
8
"뭔가?”
서장은 귀찮다는 듯 무뚝뚝한 얼굴로 이형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김 형사의 혈액형을 알 수 있습니까?”
"그건 왜?”
"아무래도 미심쩍어서요.”
"김 형사가 여우 목걸이라도 된다는 건가? 꿈꾸지 말게. 그녀는 너무 어려."
"혹시나 하고요.”
"잠시 기다려보게.”
서장은 별 큰 뜻 없이 혈액형에 관계된 서류를 뒤져보았다.
"으흠. 혈액형은 B고, 인자는 BO구만. 짚이는 게 있나?”
"아닙니다. 별로.”
9
"솔직히 말해! 그 정보 어떻게 입수 헀지?”
방안. 이형사의 집은 침묵에 휩싸였고, 벌거벗은 그들의 몸이 한밤중의 싸늘한 기온을 느끼게 했다. 느닷없이 총구를 들이민 이형사의 손짓에 놀란 김 형사의 얼굴에선 땀이 베어나기 시작했다.
"무슨 짓이야?”
"네 엉덩이에 새겨진 여우꼬리는 무엇을 의미하지? 네 어머니는 여우목걸이야, 맞지? 어서 대답해!”
이 형사의 손이 가느다랗게 떨렸다. 아니라고 말을 해줘, 제발! 아니라고. 너는 내 오랜 친구였잖아. 나는 너를 사랑한단 말이야. 제발, 아니라고! 그는 그녀와 그렇게 오랜 세월 함께 했으면서도, 그녀가 그녀의 어머니를 숨기려 했음에 막막한 허탈감을 느꼈다. 너는 뭐가 될 거야? 나? 나는 엄마를 돕기 위해 경찰 정보국에서 일할 거야. 엄마가 뭐 하시는데? 우리 엄마? 글쎄, 하여간 그래. 그녀의 어물거림이 이형사의 눈앞에 머무르는 듯 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그러나 그의 입에서는 정작 다른 말이 흘러 나왔다.
"바른 대로 말해! 입 잘못 놀렸다간 …… !”
그녀의 온몸에 식은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침착하려 애쓰며, 흘려 내리는 땀을 솜으로 부풀어져 있는 이불의 안쪽 면으로 닦아내기 시작했다.
"난 너를 사랑해. 그게 그렇게 중요해? 그러면, 차라리 나를 죽여. 그것이 너나 나를 위해서 차라리 낫겠어.”
"이 바보야! 넌 내 어머니를 죽였어, 그렇지? 그게 뭘 의미하는지 알기나 해?”
충격이 김 형사의 얼굴에 번졌다. 이 형사는 총구를 그녀의 가슴에 겨누었다.
"이러지 마! 법적으론 아무런 문제도 없단 말이야”
"그래, 그건 법일 뿐이지. 하지만, 밉든 곱든 너는 내 어머니를 죽였어”
"네가 말한 대로야.”
순간, 엄청난 굉음과 함께 그녀의 비명소리가 밤의 정적을 깨웠다. 그는 옷을 입고, 뛰었다. 이 도시를 벗어나고 싶었다. 더 이상의 비극이 그를 묶어둘 순 없었다. 아주 어렸을 적 그의 어머니가 항상 타이르던 말이 그의 귓가에 들려오는 듯 했다.
'절대로 사람을 믿지 마라. 이 팔찌 외에는. 누구도 믿어서는 안 된다.'
그는 주머니를 뒤져 보았다. 조그만 팔찌가 손에 짚혔다. 어릴 때부터 차고 다니다, 손에 맞지가 않아서 주머니에 넣고 다닌 이후로 그것은 계속 그의 주머니의 주인이 되어 있었다. 서서히 새벽의 햇살이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어디로 뛰는지도 모른 채, 마냥 그 빛을 쫓아가고 있었다. 그 빛이 마치, 자신의 구원자라도 되는 듯이.
10
서장은 신문을 펼쳐들었다.
"김 미선 형사를 살해한 혐의로 수배중인 이 형사의 행방은 서산 기슭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시체의 옆에는 여우 목걸이라 새겨진 금빛의 목걸이가 선명하게 반짝거리며 놓여 있었다. 이것은 여우 목걸이가 떨어뜨린 것으로 추정되며……”
서장은 아무 표정 없이 담배에다 불을 붙였다. 그리고 나서 어느 여형사에게 명령을 했다.
"고 형사, COFFEE, PLEASE.”
서 안은 평온했다.
11
"내 아들은 왜 죽였지?”
"당신에 대한 복수. 그는 너무 많은 걸 알아 버렸어요. 내 딸까지 죽였고.”
"아직도 원한이 남아 있었나? 나는 당신을 살려줬는데?”
"그래요. 이제, 복수는 끝났어요. 당신과 함께 남은 시간을 즐기고 싶어요. 사랑해요.”
"조직은?”
"해체 시켰어요. 당신을 위해. 우리의 새 아기를 만들어요.”
"당신의 문신은?”
"엉덩이에 새긴 문신이요? 그건 이미 오래전에 지워버렸어요. 내 동생을 탈옥시킬 때.”
"그녀를 왜 빼냈지?”
"조직에서 필요로 했어요. 그리고 걔를 이용해 먹기 위해서.”
"돈은 많이 벌었나?”
"이번이 마지막 거래였어요. 그거면 평생 동안 살 수 있어요. 호화롭게.”
서장의 눈빛에 묘한 웃음이 떠올랐다.
"당신은 천재야. 이젠 다 끝났어. 우리 둘이 멀리 떠나서 살자. 당신의 여권은 내가 만들어주지.”
서장과 여우 목걸이는 웃으며, 서로의 몸을 부벼 댔다.
에 필 로 그
"내 아인 어디 있지?”
"알 거 없어!”
"빨리 말해! 그 앤 내 아이야! 왜 언니가 마음대로 버려 놓는 거지? 언니가 뭔데?”
"정 알겠다면 가르쳐 주지. 하지만, 넌 아이를 몰라볼 걸. 널 마지막으로 본 지 이미 7년째야. 그동안 아이는 몰라보게 컸을 거고. 우리도 그 아이가 어떻게 생겼는지 몰라. 7년 전에 길바닥에 내버린 이후로 한 번도 본 적이 없거든.”
"뭐야? 그럼, 진짜로 내버렸단 말이야? 이 빌어먹을 년!”
"그것이 내 애인을 빼앗은 죄보다 덜할 걸. 앙큼한 계집애 같으니라고!”
여우 팔찌는 아이가 있는 동네에서 살게 되었다. 2030년 1월.
"관리인은 왜 죽였지?”
"그는 잠복 경찰이야. 아니면, 사립탐정이든가.”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야. 그는 너무 많은 걸 알아.”
"언니가 직접 죽였군?”
"그렇지. 하지만 붙잡혀도 감옥 가는 건 너지, 내가 아니야.”
"언니는 그 점을 노린 거고. 하지만 나는 도망쳤어.”
"널 잡을 수도 있었어.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안 됐어. 너는 아직 이용할 만한 가치가 있으니까.”
"툇, 제기랄!”
"명심해 둬. 네가 아무리 날뛰어봤자 내 손아귀에 있다는 걸.”
여우 팔찌는 침묵했다. 2030년 여름.
여우 목걸이는 이 형사 앞을 가로막았다. 헉헉거리는 그의 앞에 선 그녀는 총구를 그의 머리에 겨눴다. 햇살이 그녀의 얼굴을 번득였다.
"당신은 누구죠?”
"대답하기 어렵군. 이 목걸이를 보여주면 대답이 될까?”
그녀는 목에서 목걸이를 빼내었다.
"여우 목걸이?”
"그래. 내 딸을 죽인 녀석에게 복수하기 위해 여기까지 쫓아왔지.”
"드디어 만났군. 내 아버지를 죽인 범인을.”
"아버지?”
"20여 년 전, 당신은 우리 아버지를 살해했고, 내 친어머니에게 누명을 씌웠지. 그토록 찾아 헤맸는데, 이렇게 만나니 반갑군.”
"하하, 그랬었군. 그가 네 입양 아버지였군. 그는 경찰이었나?”
"정보원이었지. 하지만, 결국은 당했어. 내 친아버지는 누구지?”
"미안하지만, 그건 말해 줄 수 없어.”
이 형사의 입은 중얼거렸으나, 거대한 굉음의 메아리 속에 그의 음성은 묻혀버렸다. 이형사의 입에서는 계속되는 중얼거림이 이어졌다. 나를 자유롭게 해 줘서 고마워, 여우 목걸이…. 당신은 영원히 행복할거야. 그 행복 뒤에 오는 고통만 없다면 말이야……
여자는 그에게로 다가갔다. 신선한 피비린내가 그녀의 신경을 자극시켰다.
그녀는 이 형사가 쓰러지면서 떨어뜨린 두 개의 금속품이, 떠오르는 아침햇살에 반짝거리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그 중 조각난 금빛 물체 한 개를 골라 그녀의 주머니 속에 집어넣고, 식어가는 이 형사의 시체에서 멀어져갔다.
약간 녹이 쓴 물체가 부분부분 번쩍였고, 또 하나의 금빛 물체가 아침햇살에 눈부시게 반짝였다.
'여우 목걸이. 204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