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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2. 한국의 도맥(道脈) 청학집(靑鶴集)과 해동이적(海東異蹟)을 중심으로)
카카오 환단원류사 박민우 쌈선 가마선 토크방에서 발췌
도맥
해동전도록(海東傳道錄)
金可紀(在唐登仙)
鍾離權 僧慈惠 明悟和尙
(唐) 崔承祐 崔致遠 ↘ ↓
李 淸→僧明法→權淸→賢(金孤雲)→金時習
(元)
徐敬德
金時習 洪裕孫→朴氏(妙觀)→張世美→姜貴千→張道觀
鄭希良→僧 大珠→鄭??朴枝華
尹君平→郭致虛→韓無畏
해동이적
檀君단군, 赫居世혁거세, 東明王동명왕, 四仙사선, 玉寶高옥보고, 金蘇二仙금소이선, 大世仇柒대세구칠, ?始시,
金可紀김가기, 崔致遠최치원, 姜邯贊강감찬, 權眞人권진인, 金時習김시습, 洪裕孫홍유손, 鄭鵬정붕, 丁壽崑정수곤,
鄭希良정희량, 南?남,智異仙人지리선인, 徐敬德서경덕, 鄭?정, 田禹治전우치, 尹君平윤군평, 漢拏仙人한라선인,
南師古남사고, 朴枝華박지화, 李之?이지함, 漢溪老僧한라노승, 柳亨進유형진, 張漢雄장한웅, 南海仙人남해선인, 蔣生장생,
郭再祐곽재우
청학집 ① 廣成子→明由→桓仁眞人→桓雄天王→檀君→文朴氏→永郞→
寶德→玉寶高(學琴山人)
李純甫(習隱高士)
元曉
② 瓢公→始仙人→勿稽子→??道詵
大世?仇柒→崔致遠
李茗, 郭輿, 崔?, 韓惟漢
③ 百愚子 李惠孫……………………> 鄭希良
↓ 楊雲(中國人)
靑鶴山人 魏漢祚 李之
↓
片雲子 李思淵, 7人 (金蟬子, 彩霞子, 翠窟子, 鵝?子, 桂葉子,
↓ 花塢子, 碧落子)
龍岑居士 趙汝籍
오계집 靑鶴上人 魏漢祚→7門, 片雲子 李思淵→趙汝籍
↓
片金子
百愚子 李惠孫 ↓
某人
↓
松月堂李淨雲→潭月堂(阿郞道士)→休休子→李宜白
한국의 도맥(청학집과 해동이적을 중심으로)
네가 현묘의 道를 아느냐?의 글에서 노중평님은 광성자가 마고이며 명유는 황궁씨라고 하였는데
가이아킹덤은 이 글을 보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청학집의 저자가 범한 오류라는 것이 노중평님의 주장이었다.
광성자
<莊子>‘在宥篇’에는 黃帝황재가 임금이 된 지 19년이 지나 공동산으로 광성자를 찾아가
長生장생하는 도를 배운 것으로 되어 있다.
전설에 나오는 옛날의 선인(仙人). 공동산(崆峒山)의 석실(石室)에서 진리와 도를 닦으면서 살았다.
나이가 1천 2백 살이 되었는데도 늙지 않았다고 하며, 황제(黃帝)가 그의 소문을 듣고 두 번이나 찾아와
지도(至道)와 치신(治身)의 요점을 물었다고 한다.
명유
환인진인 환인. 동방선맥의 조종
환웅천인 환웅
檀君단군, 단군은 소를 타고 다니면서 백성을 다스린지 1048년에 아사달에 들어가 신선이 되었다.
赫居世혁거세, 신라 최초의 왕으로 모든 박씨들의 시조.
東明王동명왕, 고구려의 시조 주몽.
四仙사선, 述郞술랑, 南郞남랑, 永郞영랑, 安詳안상의 4人
玉寶高옥보고,
통일신라사회의 귀족층인 육두품(六頭品) 출신이며, 사찬(沙飡) 공영(恭永)의 아들이다.
지리산(地理山 : 智異山)의 운상원(雲上院)에 들어가서 50년 동안 거문고를 배워 익히고
스스로 거문고를 위한 새로운 가락 30곡을 지었으며, 거문고의 대가다.
그의 금도(琴道)를 속명득(續命得)에게 전해줌으로써 신라 땅에 거문고의 전통을 뿌리내리도록 큰 공헌을 하였다.
金蘇二仙금소이선, 金謙孝김겸효와 蘇소 2인
大世仇柒대세구칠, 大世대세와 仇柒구칠
?始시,
金可紀김가기, 신라의 도교가
崔致遠최치원,
9세기 통일신라 말기의 학자로 현묘지도라는 말을 기록의로 남긴 최초의 인물이다.
유교∙불교∙도교에 이르기까지 깊은 이해를 지녔던 학자이자 뛰어난 문장가였다.
姜邯贊강감찬, 고려 현종때의 명장. 평장사
權眞人권진인, 해동전도록의 권청과 동일인물로 해동이적에 남궁두의 스승으로 나옴
金時習김시습, 조선 초기의 학자·문인, 생육신의 한 사람.
洪裕孫홍유손, 조선 전기의 학자.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자 벼슬길에 나가기를 포기하고 세상을 등지고 살았다.
鄭鵬정붕, 조선 전·중기의 문신
丁壽崑정수곤, 1452-1486 조선 전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문신.
鄭希良정희량, 조선 전기 문신
南?남,
智異仙人지리선인,
徐敬德서경덕, 조선중기의 학자
鄭?정,
田禹治전우치,
한양 출신의 선비인 전우치는 역질을 도술로 예방하였으며 환술과 기예에 능하고 귀신을 잘 부렸다고 한다.
현재의 부천 지역을 포함하고 있던 부평 지역에 역질이 성행하자,
부평현감 이길(李佶)이 도술을 잘 쓰는 전우치를 초청하여 역귀들을 쫓아내고 전염병을 물리쳤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尹君平윤군평, 윤군평(尹君平)은 낙중(洛中) 사람이다.
젊어서 무예를 익혀 군관(軍官)으로서 연경(燕京)에 따라갔다가 이인(異人)을 만났는데,
≪황정경(黃庭經)≫을 주자 능히 수련(修鍊)의 방법을 해득하여 전우치(田禹治)와 더불어 한 때에 도술(道術)이 매우 높았다.
나이 80여 세로 죽음에 미쳐 시체(屍體)가 빈 옷처럼 매우 가벼웠으므로,
사람들이 말하기를, “시체는 남기고 혼백(魂魄)이 빠져나가 신선(神仙)으로 변화하였다.” 하였다.
漢拏仙人한라선인,
南師古남사고, 격암유록의 저자. 소울음소리와 해인에너지
朴枝華박지화, 학관(學官) 박지화(朴枝華)의 자(字)는 군실(君實)이고 호는 수암(守菴)이다.
일찍이 서 화담(徐花潭, 서경덕(徐敬德))을 찾아가 수업하였고 젊어서부터 명산(名山)을 유람하며
소나무 잎만 먹고 곡식을 먹지 않았다.
학자(學者)들과 같이 산사(山寺)에서 머물면서 한 달이 되도록 한 벌의 베옷만 입은 채 낮에는 책을 베개로 삼아 자고
15일 밤은 왼쪽으로, 15일 밤은 오른쪽으로 누워 잤는데, 베옷이 새로 다린 것처럼 구겨지지 않았다.
李之?이지함, 토정비결의 저자
漢溪老僧한라노승,
柳亨進유형진,
조선중기의 인물로 젊어서부터 도가의 수련법 중에서 심호흡을 하는 토고납신(吐故納新)과
침을 삼키는 연수(嚥嗽) 방법을 좋아하여 스스로 수행하였으며, 때로는 사람들에게 수련하도록 권유하였다.
그래서 나이 60세가 되어서도 쇠약하지 않았다.
정유왜란(丁酉倭亂) 때에 집안 식구들을 왜적에게 잃고, 그 뒤에 집을 버리고 입산(入山)하였다.
張漢雄장한웅, 장 산인(張山人)의 이름은 한웅(漢雄)인데, 자세한 내력(來歷)은 알 수 없다.
그의 조부(祖父)로부터 3대에 걸쳐 양의(瘍醫, 종기, 부스럼, 외상 등을 치료하는 의원)를 가업(家業)으로 삼았으며,
그의 부친은 일찍이 상륙(商陸, 한약재 이름)을 먹고서 귀신을 볼 수도 있고 부릴 수도 있었다고 하는데,
나이가 98세나 되어서도 마치 40세 정도로 젊게 보였으며, 출가(出家)하여 어디에서 어떻게 살다가 죽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가 집을 떠날 때 2권의 책을 아들에게 주었는데 바로 ≪옥추경(玉樞經)≫과 ≪운화현추(運化玄樞)≫1)였다.
南海仙人남해선인,
蔣生장생, 아래 참조
郭再祐곽재우 조선중기 임진왜란때의 의병장
장생의 일화
장생(蔣生)이란 사람은 어떠한 내력을 지닌 사람인 줄을 알 수가 없었다.
기축년(선조 22, 1589) 무렵에 서울에 왕래하며 걸식하면서 살아갔다.
그의 용모는 매우 우아하고 수려했으며 미목(眉目)도 그린 듯이 고왔다.
담소(談笑)를 잘하여 막힘이 없었고 더욱 노래를 잘 불렀으니 노래 소리가 처절하여 사람들을 감동시키곤 했었다.
늘 자주색 비단으로 된 겹옷[裌衣]을 입고 다녔는데, 추울 때나 더울 때에도 갈아 입는 적이 없었다.
창녀(倡女)나 기생들 집에도 다니지 않는 곳이 없어 잘 알고 지냈으며,
술만 있으면 곧바로 자기가 떠다가 잔뜩 마시고는 노래를 불러 아주 즐겁게 해주고는 떠나가 버렸다.
어느 때는 술이 한창 취하면 맹인ㆍ점쟁이ㆍ술취한 무당ㆍ게으른 선비ㆍ소박맞은 여인ㆍ걸인ㆍ노파들이 하는 짓을 흉내냈으니
하는 짓마다 아주 똑같이 해댔었다.
또 가면을 쓰고 열심히 십팔나한(十八羅漢)을 흉내 내면 꼭 같지 않은 경우가 없었다.
또 입을 찡그려서 피리ㆍ거문고ㆍ비파ㆍ기러기ㆍ고니ㆍ무수리ㆍ집오리ㆍ갈매기ㆍ학(鶴) 등의 소리를 내는데,
진짜와 가짜임을 구별하기 어렵게 하였다.
밤에 닭우는 소리ㆍ개 짖는 소리를 내면 이웃 개나 닭이 모두 울고 짓어대는 지경이었다.
아침이면 밖으로 나와 거리나 저자에서 구걸을 했으니, 하룻동안에 얻는 것이 거의 서너 말[斗]이었다.
몇 되[升]쯤 끓여 먹고 나면 다른 거지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래서 밖으로만 나오면 뭇 거지 아이들이 뒤를 따랐다.
다음날에도 또 그와 같이 해버리니 사람들은 그가 하는 짓을 헤아릴 수 없었다.
전에 악공(樂工) 이한(李漢)이라는 사람 집에서 더부살이한 적이 있었다.
머리를 쌍갈래로 땋은 계집이 호금(胡琴)을 배우느라 조석으로 만나므로 서로 친숙하였다.
하루는 구슬로 이어진 자주빛 봉미(鳳尾 머리에 꽂는 노리개)를 잃어버리고 있는 곳을 모른다고 하였다.
연유를 들어 보니,
아침에 길 위에서 오다가 준수한 소년이 있기에 웃으며 농을 붙이고 몸이 닿고 스치더니 이내 봉미가 보이지 않더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애처롭게 울기를 그치지 않더란다.
그래서 장생은,
"우습구나. 어린 것들이 감히 그런 짓을 하다니. 아가씨야 울지 마라. 저녁이면 반드시 내 소매 속에 넣어 오겠다."
하고는, 훌쩍 나가버렸다.
저녁이 되자 계집아이를 불러내어 따라오게 하고서는,
서쪽 거리 곁 경복궁(景福宮) 서쪽 담장을 따라 신호문(神虎門)의 모퉁이에 이르렀다.
계집의 허리를 큰 띠로 묶어 왼쪽 어깨에 들쳐매고 풀쩍 뛰어, 몇 겹으로 겹친 문으로 날아서 들어갔다.
한창 어두울 때여서 길도 분간할 수 없었지만 급히 경회루(慶會樓) 위로 올라가니 두 소년이 있었다.
촛불을 들고 마중나와 서로 보며 껄걸 웃어대었다.
그러더니 상량 위의 뚫어진 구멍에서 금구슬ㆍ비단ㆍ명주가 무척 많이 나왔다.
계집이 잃어버린 봉미 또한 있었다.
소년들이 그걸 돌려주자 장생(蔣生)은,
"두 아우는 행동거지를 삼가서 세상 사람들이 우리들의 종적을 보지 못하도록 하게나."
하였다.
그런 뒤에 끌고 다시 날라서 북쪽 성(城)으로 나와 그의 집으로 돌려보냈다.
계집은 다음날 밝기 전에 이씨(李氏)의 집으로 가서 감사의 말을 하려 했더니 술이 취해 누워 있으며 코를 쿨쿨 골고 있었고,
사람들 또한 밤에 외출했던 일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조선의 이인: 장생
노중평님의 글 현묘지도
네가 현묘의 道를 아느냐? 1
노중평
우리는 마고시대에 시작하여 한인시대를 거쳐서 한웅시대와 단군시대를 이어온 仙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다.
선이 우리 선조가 창안한 고유한 우리의 심신수련법이거나 종교로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가서仙家書>의 으뜸으로 볼 수 있는 <청학집靑鶴集>은 선맥仙脈을 광성자-명유-한인-한웅-단군으로 설명하였다.
그러나 <청학집>의 저자는 마고를 광성자로, 황궁을 명유로 바꾸어 놓았고, 그들이 누구인지 알 수 없게 얼버무림으로써,
명백하게 선맥을 훼손하여, 우리의 최고 조상을 오리무중으로 만든 우를 범하고 말았다.
격암 남사고 선생은 정체성이 훼손된 선가仙家의 선맥를 버리고 선가를 송가松家로 바꾸어 비결秘訣로 만들어
<격암유록>이 실었다.
송松이 백목百木의 왕이고, 국왕을 상징함으로 선맥을 이어온 최고조상들을 유추할 수 있게 해 준 것이다.
송가의 조종祖宗인 한웅천왕과 단군왕검을 그린 그림이 소나무 아래에 앉아 있는 산신을 그린 그림인 <산신도山神圖>인데,
<산신도>를 달리 말하면 <신선도>이고, <신선도>를 달리 말하면 <송가도>이다.
현묘정통玄妙精通 수하지칠요誰可知七要 일왈천심一曰天心
이왈석피의二曰石皮之衣 삼왈석피건三曰石皮巾
사왈초일십화四曰艸日十花 오왈근농五曰菫農
육왈칠지인六曰七之人 칠왈일소중력七曰一小重力 시개불망의是皆不妄矣
현묘의 도에 정통하다고 한들 누가 일곱 요결을 알 수 있으랴.
일곱 요결의 첫째는 천심, 둘째는 파의, 셋째는 파건, 넷째는 초화, 다섯째는 근농, 여섯째는 칠성의 백성, 일곱째는 도의 부동이다.
선도의 계율로 볼 수 있는 글이 본문에 나온다.
본문에서 현묘玄妙는 선仙을 뜻하는 현묘지도玄妙之道의 줄임말이다.
본문에서 키워드는 玄妙· 七要· 天心· 石皮(破)之衣· 石皮(破)巾· 艸日十(草)花· 菫農· 七之人(化)· 一小重力(不動)이다.
玄妙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현묘玄妙이다.
현묘가 현묘지도의 줄임말이기 때문이다.
현묘지도라는 말을 기록으로 남긴 분은 최치원 선생이다.
그가 쓴 <난낭비문>에 기록되어 있다.
최치원 선생이 <난낭비문>에서 맑힌 것을 보면, 유교· 불교· 도교가 모두 풍류에서 나왔다고 하였다.
풍류란 풍이족이 세운 나라인 한국에서 처음 시작한 덕교(선)를 말한다.
덕교는 목덕木德에 근원을 둔다.
한국을 세운 풍이족은 나무에서 울리는 소리를 신성시하였고, 나무의 울림에서 음악을 깨닫게 되었다.
소리가 울리는 나무를 소목蘇木이라고 하였다.
소목의 도를 풍류의 도라고 하였다.
바람의 도라고 한 것이다. (<扶蘇譜序>)
나무가 울림으로 바람소리가 난다.
울림은 율려律呂이고, 율려를 마고시대에는 팔려八呂의 음音이라고 하였다.
<부도지>는 마고가 팔려의 음에서 태어났다고 햐였다.
진동이 생기가 되고 생기에서 마고가 태어났음을 말한 것이다.
한인시대에는 팔려의 음을 바람소리라고 하였다.
그래서 팔려를 팔풍八風으로 바꾸어 불렀다.
한웅시대에는 팔풍을 기호화 하여 팔괘八卦로 바꾸어 불렀다.
팔괘란 팔풍이라는 뜻, 팔려의 음이라는 뜻이다.
울림이 바람이 되고, 바람이 기호가 된 것이다.
마고는 팔려의 음으로 마고지나를 세웠고, 한인은 팔풍으로 한국을 세웠고, 한웅은 팔괘로 배달나라를 세웠다.
한인 때부터 바람을 숭상하여 풍도風道라고 하였고, 풍도를 숭상하는 인종을 풍이風夷라고 하였다.
풍이는 울리는 나무를 세우고 소목蘇木이라고 하였고, 소목이 있는 곳을 소도라고 하였다.
소목에서 덕德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이를 목덕木德이라고 하였다.
소도는 나라에서 제사지내고 백성을 교육을 시키던 신성한 땅으로 발전하였다.
목덕을 수행하던 이들이 신선이 되었다.
이들이 모이는 곳이 소도이다.
이곳으로 출가하여 이곳에서 수행하여 신선이 되었을 것이다.
신선이라는 말은 사람이 산에 들어가 수행하여 신을 통하게 된 사람이라는 말이다.
요즈음도 산에 도를 닦으러 간다는 사람들이 있고, 간혹 도통했다고 자처하는 사람이 나온다.
<난낭비서문>은 다음과 같다.
국유현묘지도國有玄妙之道 왈풍유曰風流 설교지원設敎之源 비상신사備詳神史
실내포함삼교實內包含三敎 접화군생接化群生 차여입즉효어가且如入則孝於家
출즉충어국出則忠於國 노사구지지야魯司寇之旨也 처무위지사處無爲之事
행불언지교行不言之敎 주주사지종야周柱史之宗也 제악막작諸惡莫作
제선봉행諸善奉行 축건태자지화야竺乾太子之化也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풍류라고 한다.
모든 설교의 근원이 된다.
신사에 상세하게 실려 있다.
유불도 삼교를 포함한다.
사람이 접하면 변화하여 백성을 살린다.
현묘의 도에서, “들어와 집에서는 효도하고, 나가면 나라에 충성하라”는 노사구(공자)의 가르침이 되었고,
“세상사를 자연의 이치에 맡기어 말없는 가르침으로 행하게 하라”는 주주사(노자)의 가르침이 되니 가르침의 으뜸이 되었다.
“악한 일들을 하지 말고 착한 일을 행하라”는 축건태자(석가모니)의 불교가 되었다.
우리 역사에서 신선도를 수행하는 신선이라는 문자가 나오는 때는 단군조선의 마지막 단제인 제47세 고열가단군이
나라가 망하면서 구월산에 들어가게 된 이후가 된다.
그에게 처음으로 신선이라는 문자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신선의 도인 풍도(덕교)가 이미 한인시대에 있었다.
七要
칠요七要는 현묘지도의 7가지 요결要訣이다.
우리는 격암 남사고 선생이 전해준 이 ‘현묘지도의 칠요’를 통하여 ‘송가도의 요결’, 즉 ‘선가의 요결’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삼한관경본기>에, 단군왕검이 초대왕검으로 등극하면서, 나라의 인물들을 불러모아 약속한 말이 기록되어 있다.
“앞으로 백성의 뜻을 물어 공법公法을 만들고 이를 천부天符라 할지니, 그 천부란 만세의 강전綱典이며,
지극히 존중하여 아무도 이를 어길 수 없을 것이다.”라는 기록이다.
단군왕검이 말한 공법· 천부· 강전을 현묘지도의 7가지 요결을 뜻하는 말로 본다. 다음에 든 것은 요결 7가지이다.
1 天心
천심天心은 칠요 중 1번이다. 단군왕검이 말씀하신 천부와 같은 말로 볼 수 있다.
천부는 하늘의 마음이다.
하늘의 마음은 변함없는 자연의 생성과 운행과 소멸의 원리原理이다.
천불인天不仁으로 볼 수 있다.
2 石皮(破)之衣
석피지의石皮(破)之衣는 의복을 찢어 치장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단군조선의 제2세 부루단군은 계묘 3년(BC 2238년) 9월에 조서를 내려 백성들이 푸른 옷(복청의服靑衣)만을 입게 하였다.
동이족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푸른 옷을 입게 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를 백의민족이라고 하는 말은 단군조선의 시대가 지나간 이후에 쓰기 시작한 말로 본다.
고구려시대에는 조의선인이 있었다.
검은 옷을 입은 선인이라는 뜻이다.
고구려가 북쪽에 있었으므로 북쪽을 상징하는 흑색의 옷을 입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서쪽(발해만에 있었던 백제군)에서 온 백제 사람을 상징하는 옷이 백의였고,
백의를 입은 백제 사람을 백의민족으로 호칭했다고 볼 수 있다.
3 石皮(破)巾
석피건石皮(破)巾은 모자를 쓰지 못하게 한다는 말이다.
단군조선의 제2세 부루단군은 계묘 3년(BC 2238년) 9월에 조서를 내려 백성들이 머리카락을 땋아 목을 덮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건이 필요 없게 된 것이다.
길게 땋은 생머리가 천기天氣를 수신하는 안테나로 보았기 때문에 건을 쓰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
4 艸日十(草)花
초일십화艸日十(草)花는 초화草花이다.
단군조선 제13세 흘달 단군 때 무술 20년(BC 2763년) 소도蘇塗를 많이 설치하고,
천지天旨花(桓花-한국의 국화라는 뜻)를 심었다.
젊은이 들을 국자랑國子郞으로 뽑아 외출할 때 머리에 천지화를 꽂도록 하였다.
이들을 천지화랑天旨花郞(신라 화랑의 근원이 된다)이라고 하였다.
5 菫農
근농菫農은 농사農事로 볼 수 있는 말이다.
농사를 지어야 자연의 이치가 어떻게 돌아가는가를 알 수 있게 된다.
원형이정元亨利貞을 알게 되는 것이다.
菫자는 艸+雙土+中+主로 이루어진 문자로 풀이 땅의 주인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땅의 주인인 풀을 잘 받들어 모시라는 뜻이 있다고 생각된다.
6 匕之人(化)
비지인七之人(化)은 비匕가 칠성의 형상이라 칠성의 백성을 의미한다.
칠성을 숭상했던 당시 사람들의 신앙심을 알 수 있는 문자인데, 칠성을 숭상하라는 뜻으로 썼다.
칠성은 하나님의 또 다른 명칭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숭상하라는 뜻으로 섰다고 본다.
7 一小重力(不動)
일소중력一小重力(不動)은 세상의 모든 이치를 다 깨달은 후에 함부로 행동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가 갖게 되는 깨달음과 초능력의 남용을 경계한 말로 보인다.
본문해석
현묘지도에 정통하나 누가 일곱 요결을 알 수 있으랴.
첫째 천심, 둘째 파의, 셋째 파건, 넷째 초화, 다섯째 근농, 여섯째 칠성의 백성, 일곱째 부동이다.
네가 현묘의 道를 아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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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이적 (海東異蹟)
도교 문헌 조선후기 문신·학자 홍만종이 단학설화를 인물별·시대별로 배열하고 평설을 달아 1666년에 간행한 전기.
이칭
해동이적전
조선후기 문신·학자 홍만종이 단학설화를 인물별·시대별로 배열하고 평설을 달아 1666년에 간행한 전기.
불분권 1책. 목활자본. ‘해동이적전’으로 불리기도 한다.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있으며, 그 밖에 『홍만종전집』에도 수록되어 있다.
정두경(鄭斗卿)의 서문과 홍만종의 자서(自序) 및 목차, 송시열(宋時烈)의 발문이 있다.
발문의 기년이 1670년(현종 11) 8월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간행연대는 그 이후라고 생각된다.
단군에서부터 시작하여 곽재우(郭再祐)에 이르는 38명을 32항으로 나누어 편술하였다.
수록된 인물은 단군·혁거세·동명왕·사선(四仙: 述郎·南郎·永郎·安詳)·옥보고(玉寶高)·김소이선(金蘇二僊: 金孝謙·蘇嘏)·
대세(大世)·구칠(仇柒)·참시(旵始)·김가기(金可記)·최치원(崔致遠)·강감찬(姜邯贊)·권진인(權眞人)·김시습(金時習)·
홍유손(洪裕孫)·정붕(鄭鵬)·정수곤(丁壽崑)·정희량(鄭希良)·남추(南趎)·지리선인(智異仙人)·서경덕(徐敬德)·정렴(鄭렴)·
전우치(田禹治)·윤군평(尹君平)·한라선인(漢拏仙人)·남사고(南師古)·박지화(朴枝華)·이지함(李之菡)·한계노승(寒溪老僧)·
유형진(柳亨進)·장한웅(張漢雄)·남해선인(南海僊人)·장생(蔣生)·곽재우 등이다.
홍만종은 불로장생의 가능성과 초능력을 획득한 실례를 사서(史書)·문집·만록 등에서 찾아 원문을 뽑고,
그에 대한 평설과 자신의 견해를 달아 놓았다.
이 책에서 주목되는 점은 우리나라 고유의 선파 인물과 수련도교와 관련 있는 단학파 인물들을 함께 다루었다는 것으로,
단학파의 도맥이 제시되어 있는 『해동전도록』에 수록된 인물이 김가기를 비롯하여 11명 포함되어 있다.
이는 선파와 단학파의 합류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다.
자료들을 빠짐없이 망라했다고는 보기 어려우나, 우리나라의 도교사상 및 신선사상 연구에 귀중한 자료집이다.
참고문헌
『한국의 도교사상(홍만종전집)』(차주환, 동화출판공사, 1984)
『홍만종전집』상·하(태학사 영인, 1980)
『조선도교사』(이능화 저, 이종은 역, 보성문화사, 1977)
도맥 (道脈)
도교 개념 우리나라 신선도가의 인맥 및 도가사상을 이어가는 계보를 가리키는 도교용어.
우리나라 신선도가의 인맥 및 도가사상을 이어가는 계보를 가리키는 도교용어.
신선사상은 발해만을 중심으로 일어나 성행하였기 때문에 한민족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
보통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하는데, 하나는 한민족 고유의 선도(仙道)이고, 다른 하나는 수 · 당을 통하여 도입된 중국의 도교이다.
(1) 상고대(上古代)의 도맥
이에 관한 기록은 『백악총설(白岳叢說)』 · 『청학집(靑鶴集)』 등에 보이는데,
두 문헌 모두 도맥의 근원을 문박(文朴)에 두고 있는 점은 일치되나, 그 이전과 이후의 계보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즉, 『백악총설』에서는 환인(桓因)을 도맥의 개조(開祖)로 삼고 있으나,
『청학집』에서는 더욱 거슬러 올라가 광성자(廣成子)에서 시작한다.
『백악총설』의 계보는 환인¬ 환웅(桓雄)¬ 단군¬문박¬을밀(乙密)¬ 영랑(永郎)¬ 안류(晏留)¬보덕성녀(普德聖女)이다.
『청학집』의 계보는 광성자¬명유(明由)¬환인¬환웅¬단군¬문박¬영랑¬보덕¬ 옥보고(玉寶高)이다.
또한, 변지(卞沚)의 『기수사문록(記壽四聞錄)』에는 신라의 선도 도맥을 〔그림 1〕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2) 중근세(中近世)의 도맥
『청학집』에 따르면 위와 같은 계보 외에 이명(李茗) · 곽여(郭輿) · 최당(崔讜) · 한유한(韓惟漢) · 한식(韓湜) 등의
고려인들이 대세(大世) · 구칠(九柒)의 도맥에 속한다고 언급되어 있는데, 그 뒤의 고려 · 조선 시대의 승계는 모호하다.
다만 16세기 후반인 명종 · 선조 때의 선파(仙派) 인물들이 사생제관계(師生弟關係)를 맺어
새로운 도맥을 형성한 듯한 양상을 보인다.
여기에서 청학상인의 스승은 백우자(百愚子)와 중국인 양운(楊雲)인데,
청학상인이 죽은 뒤 양운의 문하생인 조현지(曺玄志)를 중심으로 금선자(金蟬子) · 편운자(片雲子) 등이 도우관계를 맺었다.
한무외(韓無畏)의 『해동전도록(海東傳道錄)』에 따르면, 신라의 당나라 유학생인 김가기(金可紀) · 최승우(崔承佑) 및
승(僧) 자혜(慈惠)가 종남산(終南山)의 광법사(廣法寺)에 있는 천사(天師) 신원지(申元之)로부터 종리권(鍾離權:종리장군)을 소개받아 『청화비문(靑華祕文)』을 비롯한 몇 종의 도서(道書) 및 구결(口訣)을 얻고 내단수련(內丹修鍊)도 지도받았다고 한다.
김가기는 도를 신라에 전하지는 않고 당나라에서 신선이 되었다고 하는데,
중국문헌인 『속선전(續仙傳)』에 그 과정이 수록되어 있다.
반면, 최승우와 자혜는 신라로 돌아와 내단수련의 도를 전승하였다.
그 도맥은 대체로 〔그림 3〕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실린 도맥과는 약간 차이가 있다).
이 밖에도 석현준(釋玄俊)은 당나라로 건너가 도교의 시해법(尸解法)을 습득,
『보사유인지술(步捨遊引之術)』을 저술하고 그의 생질 최치원(崔致遠)에게 전수하였으며,
최치원은 또한 당나라에서 환반지학(還反之學)을 배워 최승우에게 전수하였다고 한다.
사제관계가 분명하지 않고 혼자 터득한 인물로는 남추(南趎) · 최도(崔□) · 이광호(李光浩) · 김세마(金世麻) · 문유채(文有彩) ·
정지승(鄭之升) · 이정해(李廷楷) · 곽재우(郭再祐) · 김덕량(金德良) · 이지함(李之菡) · 정두(鄭斗) · 허미(許米) 등이 있다.
그러나 이지함은 청학상인 위한조(魏漢祚)의 제자로도 언급되고 있으며,
조선 중종 · 명종 때의 예언가로 유명한 남사고(南師古)와는 정작(鄭碏: 정렴의 아우) · 홍유손(洪裕孫) 등의
내단파 문인들이 연결되어 있어서, 조선 중기 이후 선파와 내단파 사이에 빈번한 융합현상이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도맥의 계보를 파악하려면 상고대로 올라갈수록 그 사실여부에 대한 비판이 행해져야 하는데,
이는 신선사상 및 도교사상이 지닌 초역사적인 성격과 더불어 인용된 문헌이 대개 조선시대의 기록이라는 점 때문이다.
참고문헌
『청학집(靑鶴集)』(조여적)
『오주연문장전산고』(이규경)
『해동전도록(海東傳道錄)』(한무외)
『해동이적(海東異蹟)』(홍만종)
『조선도교사』(이능화 저, 이종은 역, 보성문화사, 1977)
『한국도교사상연구』(차주환, 동화출판공사, 1984)
관련 항목
청학집 도교 문헌 조선시대 도사 조여적이 선파(仙派) 인물들의 행적과 담론을 잡기형식으로 기술한 도교서.
문박 도교 인물 초기국가시대 단군의 선도를 전수받은 전설 상의 선인(仙人).
환인 고대사 인물 초기국가시대 단군신화에 나오는 하늘의 신. 신화인물.
환웅 고대사 인물 초기국가시대 고조선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단군의 아버지인 신. 신화인물.
단군 고대사 인물 초기국가시대 고조선의 제1대(재위:BCE.2333∼BCE.1122) 왕.
이명 도교 인물 고려후기 청평산에서 단을 연마하여 자신을 수양하며 살았던 은사(隱士).
곽여 의약학 인물 고려전기 합문지후, 홍주사, 예부원외랑 등을 역임한 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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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학설화 (丹學說話)
도교 개념 수련파 도인들이 선약을 만드는 외단에 대한 집념에서 탈피하고,
수련으로 공행을 쌓고 몸 안에 단을 이룩하는 내단 수련에 관련된 도교설화.
수련파 도인들이 선약을 만드는 외단에 대한 집념에서 탈피하고,
수련으로 공행을 쌓고 몸 안에 단을 이룩하는 내단 수련에 관련된 도교설화.
수련을 통하여 공행을 쌓아서 몸 안에 단을 이룩하는 일을 일반적으로 단학이라고 부른다.
본성에 연결시킨 단학의 기본 이론은 김시습(金時習)의 용호(龍虎)에 관한 해설에 잘 해명되어 있다.
정기(鼎器:솥)에 납과 수은을 넣고 거기에 불을 지펴 두 가지 광물이 날아가거나 흩어지지 않고 하나로 합치되도록 만드는 것이
금단(金丹)을 연조하는 방법인데, 이것을 상징적인 것으로 취해서 인체에 적용시켜 풀어나가는 것으로 되어 있다.
정기는 사람의 몸인데 머리는 건(乾)이 되고 배는 곤(坤)이 되며 배꼽 아래 한 치 서 푼의 자리에 있는 단전(丹田)이
그 중심이 되므로 단전을 기준으로 하여 몸을 안정시킨다.
납과 수은은 용호에 비기는데, 그것은 인체에서 행하여지는 일호일흡(一呼一吸)인 호흡이다.
이 일호일흡을 잘해서 우주의 원기(元氣)를 훔쳐다가 체내에 단을 이룩한다.
지피는 불은 복이(服餌), 즉 양생을 위한 식물로 잡는다.
그 복이로 복호항룡(伏虎降龍:호랑이와 용을 항복시킴.)하여 하나로 병합하도록 조절하는 것이다.
몸의 자세를 제대로 잡아서 숨을 법도에 따라 바로 쉬면 된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이러한 기본적인 방법 외에도 여러가지 금기 내지 술법이 있기는 하다.
이러한 단학은 장생불로하는 신선으로 변화하는 것을 중심으로 삼으므로, 자연 그것에 관련된 설화가 많이 생겨나게 마련이다.
단학설화로 간주할 수 있는 기사는 각종 만록(漫錄:일정한 체계 없이 붓 가는 대로 쓴 글)에 흩어져 있으나,
그 중 홍만종(洪萬宗)이 엮어 지은 『해동이적 海東異蹟』이 가장 규모를 잘 갖춘 것으로 들 수 있다.
32항 38인의 이적을 여러 책에서 뽑아서 인물별 시대순으로 배열하고 엮은이의 안어(按語)와 평설(評說)을 달기도 하였다.
다루어진 인물은 단군(檀君)·박혁거세(朴赫居世)·동명왕(東明王)·사선·옥보고(玉寶高)·김소이선(金蘇二僊)·
대세구칠(大世仇柒)·참시(旵始)·김가기(金可記)·최치원(崔致遠)·강감찬(姜邯贊)·권진인(權眞人)·김시습·홍유손(洪裕孫)·
정붕(鄭鵬)·정수곤(丁壽崐)·정희량(鄭希良)·남추(南趎)·지리선인(智異僊人)·서경덕(徐敬德)·정렴(鄭磏)·전우치(田禹治)·
윤군평(尹君平)·한라선인(漢拏僊人)·남사고(南師古)·박지화(朴枝華)·이지함(李之菡)·한계노승(寒溪老僧)·유형진(柳亨進)·
장한웅(張漢雄)·남해선인(南海僊人)·장생(蔣生)·곽재우(郭再祐) 등이다.
이들이 모두 단학에 조예가 깊어서 이적을 나타낸 것은 아니나, 그 기사가 대체로 단학을 연상시키는 성질의 것들이다.
신라 후기의 유당학인(留唐學人:당나라 유학생)들에 의하여 중국에서 수련 중심의 도교가 전래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들 중에서 김가기는 백주등선(白晝登仙)한 인물로 전해진다.
그에 관한 기록은 중국의 도교전적인 『운급칠첨(雲笈七籤)』의 「속선전(續仙傳)」에 들어 있는데,
그에 관한 기사를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당나라 대중(大中) 11년(857) 12월 홀연히 표문(表文)을 올려 말하기를,
“신은 옥황상제의 조서를 받들어 영문대(英文臺)의 시랑(侍郎)이 되었습니다.
내년 2월 25일에 올라가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당나라 선종(宣宗)은 대단히 이상하게 여겨 중사(中使)를 보내어 궁중에 들라고 불렀으나 고사하였고,
옥황상제의 조서를 요구하였으나 다른 신선이 관장하여 인간세상에 남겨두지 않았다고 하여 거절하였다.
마침내 궁녀 4인과 향약(香藥)과 금채(金綵)를 내리고, 또 중사 2인을 보내어 시중을 들게 하였다.
김가기는 조용한 방에 홀로 거처하여 궁녀와 중사는 거의 접근하지 못하였다.
매일 밤중이면 방안에서 내객과 담소하는 소리가 나서 중사가 몰래 들여다 보면
다만 선관(仙官)과 선녀가 각각 용과 봉 위에 앉아서 엄연하게 마주보고 있어 궁녀와 중사가 호들갑을 떨 수 없었다.
2월 25일 봄 경치가 아름답고 꽃이 활짝 폈는데, 과연 오색 구름 속에서 소리치는 학과 나는 난새와 생소(笙簫)와 금석의 풍악과 깃, 수레지붕에 경옥바퀴를 한 수레가 나타났고 깃발이 하늘에 가득 찼으며 신선의 의장대가 극히 많은 가운데 하늘로 올라갔다.
조정의 여러 관원과 사서인 등 구경하는 자들이 골짜기를 넘치도록 메운 채 바라보고 절하며 감탄하면서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다.
『해동이적』의 김가기 기사에도 이것을 그대로 옮겨 기록하고 있다.
최치원도 신라에 수련 중심의 도교를 전파한 주요 인물 중의 하나이다.
그에 관한 기이한 설화는 많으나 김가기의 경우같이 등선(登仙: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감.) 사실이 역력한 설화는 남기지 않았고, 다만 그가 식구를 거느리고 가야산에 들어가 숨어 살다가 어느날 아침 집을 나가 수풀 속에 갓과 신발을 버리고 없어져 버려
그것이 상빈(上賓), 즉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간 것으로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김시습은 그의 괴벽과 기행으로 이미 범상한 인간이 아님이 세상에 알려졌고,
또 유·불·도 3교의 어느 것을 신봉하는지조차도 분간할 수 없게 처신하였다.
그러나 우리 땅의 수련 중심 도교의 도맥에서는 중시조격 지위에 있으며,
장생불로하는 신선이 되는 묘리를 터득한 사람으로 여겨져 신선과 관련된 설화까지 낳았다.
유몽인(柳夢寅)의 『어우야담(於于野談)』에 김시습에 관한 한 가지 기사가 있다.
김시습이 강원도 양양 땅의 설악산에 은거하고 있을 때,
강릉 사람인 최연(崔演)이 뜻을 같이하는 젊은이들 5, 6인과 함께 김시습을 찾아가 가르침을 청하였으나,
다 거절하고 유독 최연만은 가르칠 만하다고 머물러 있게 하였다.
최연은 반 년 동안 사제간의 도리를 다하고 자나깨나 곁에서 떠나지 않고 살았다.
그런데 달이 높이 뜨고 밤이 깊어질 때 잠을 깨어 보면 김시습이 간 곳이 없고 잠자리가 비어 있었다.
최연은 속으로 괴이하게 여겼으나 감히 추적해서 찾을 수가 없어 그대로 있고는 한 것이 여러 차례였다.
어느날 저녁 달이 또 밝아지자 김시습이 옷을 차려 입고 몰래 나가는데, 최연이 멀리서 그 뒤를 밟아갔다.
큰 골짜기 하나를 지나고 재를 하나 넘자 숲이 우거져 있어 그 사이로 살펴 보았다.
재 아래에는 사람들이 앉을 만한 큰 반석이 있고,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없는 객 두 사람이 김시습과 인사를 나누고 반석에 앉아 이야기를 하였다.
거리가 멀어서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오랜 시간 후에 그들이 헤어지자 최연은 먼저 돌아와서 본래대로 자리에 누웠다.
그 이튿날 김시습은 최연을 보고 “처음에는 너를 가르칠 만하다고 여겼으나 지금 네가 조바심하여 가르칠 수 없음을 깨달았다.”고
말하고 그를 쫓아버렸다. 김시습이 밤중에 만나 이야기한 자들이 사람인지 신선인지 끝내 알아내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김시습이 선관들과 담소한 듯한 여운을 남기는 설화이다.
김시습은 그 뒤 두타승(頭陀僧:떠돌면서 수행하는 승려)이 되어 홍산(鴻山:지금의 부여에 있는 산)의 무량사(無量寺)에서
죽었는데, 임종 때 화장하지 말라는 유언이 있어 승려들이 임시로 절 곁에 매장하였다가 3년 뒤에 제대로 매장하기 위하여
그 관을 열어보았더니 안색이 살아 있는 것 같아 그가 시해(尸解:몸만 남기고 혼백이 빠져 나가서 신선이 됨.)한 것이 아닌가 하고들 여겼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단학설화 중 수련을 통하여 공행을 쌓아 가는 힘들고 괴로운 과정을 설명한 것들이 있다.
그리고 재주가 비상하면서 그것을 세상에서 펴 보지 못하고 요절한 것을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간 것으로 나타낸 것도 있다.
남궁 두는 조선 명종 때 도예(道藝)를 배울 목적으로 치상산(雉裳山)에 가서 한 장로를 만나 지도를 받고
체내에 단을 이룩하는 수련을 하게 되었다.
그는 장로의 말대로 수련을 쌓은 끝에 단전이 충만해 오고 배꼽 밑에서 금색의 광채가 나는 듯하였다.
그는 금단이 이루어진 것이 기뻐서 그만 빨리 성공하고 싶은 마음이 발동하여 급작스럽게 단전에 힘을 주어
황화(黃花:빛깔이 누런 꽃)를 발하게 하였더니 금단이 망가져 버려, 외마디 소리를 내지르고 밖으로 뛰쳐 나갔다.
장로는 지팡이로 그의 머리를 때리고 틀렸다고 탄식하며 뒷수습을 해서 그의 심기를 안정시켜 주었다.
장로는 이어 “자네는 신태(神胎)는 이룩하지 못하였으나 지상선(地上仙)은 될 수 있으니,
약간 양생을 하면 800세의 수는 누릴 수 있을 것이다.”라고 일러 주었다.
그는 장로의 내력을 물어 그가 의상(義湘)의 도맥을 승계한 권진인임을 알았고,
그 장로를 졸라서 배꼽 밑의 신태를 구경할 수 있었다.
장로가 어둠 속에서 아래에 싸인 것을 풀자 금빛이 대들보를 쏘듯이 비치고,
그 빛이 하도 휘황하여 똑바로 바라볼 수조차 없을 정도여서, 놀란 남궁 두는 바닥에 넙죽 엎드려 버렸다.
조선 중종 때 장원급제하여 전적 벼슬까지 지냈다는 남추에 관한 설화도 단학설화의 한 가지 특색을 나타내는 예로 들 수 있다.
그는 도인에게서 수련술을 배우고 난 다음 대과에 급제하였는데,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곡성(谷城)으로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살았다.
그는 이적을 많이 일으켜 사람들의 주의를 끌면서 지내다가 30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염습하여 입관시켰다가 관을 들어 보니 너무 가벼운 듯하여 열어 보았더니 빈 관이었다.
그 안에 “창해에서는 배 간 자취 찾기 어렵고, 청산에서는 학 날아간 흔적이 안 보인다.”라는 시구가 적혀 있었다.
밭가는 사람들이 공중에서 풍악소리가 들려서 쳐다 보니 남추가 말을 타고 흰 구름 속을 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설화는 민간에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에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에도 언급되어 있다.
단학설화에는 술사(術士)의 괴술에 관한 이야기도 많이 들어 있다.
전우치는 신광한(申光漢)과 내왕하였던 사람으로 전해지는데, 태백산의 여우한테서 영전(靈詮)과 비기(祕記)가 적힌
소서(素書)를 얻어 그 일부를 익힌 끝에 여러 가지 환술(幻術:도술)을 부리게 되었다.
한번은 신광한의 집에서 내객들과 함께 있을 때 천도(天桃:하늘나라에 있다는 복숭아)를 얻어낼 수 있느냐는 말을 듣고,
그는 새끼 수백 사리(뭉치)를 공중 구름 밖으로 던져 올려놓고,
동자를 시켜 그 새끼를 타고 올라가 새끼가 다하는 곳에서 벽도(碧桃:仙境에 있다는 과실)를 따오게 하였다.
동자가 새끼를 타고 공중으로 올라갔는데, 잠시 후 벽도의 잎과 열매가 마당에 떨어졌다.
좌객들이 다투어 그 벽도를 집어 먹었는데 그 단물의 싱그러움이 속세의 복숭아가 아니었다.
그런데 공중에서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것이었다.
전우치는 놀라며 “복숭아 한 알을 먹으려고 동자의 목숨을 없앴다.”고 말하였다.
천도를 지키는 자가 상제(上帝)에게 고하여 동자를 죽인 것이라고 했다.
그러던 중 팔 한 짝이 땅에 떨어지더니, 또 한 팔이 뒤이어 떨어지고 양다리와 몸뚱이와 머리가 떨어졌다.
좌객들이 아연실색하고 있는 가운데 전우치가 천천히 걸어가 동자의 시체를 수습하여 이리저리 이어 붙였다.
한참 후에 동자가 툭툭 털고 일어나 비틀거리며 가버렸다.
그런데 전우치는 그 뒤 괴술로 군중을 현혹시킨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옥사하였다.
태수가 내어다 묻게 하였는데 친척들이 이장하려고 파내어서 관을 열어 보았더니 빈 관이었다.
그 일이 있은 다음 전우치를 만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전우치와 같은 때의 사람으로 역시 도술이 높은 것으로 알려진 윤군평은 이인(異人)을 만나
『황정경(黃庭經)』을 전수받아 수련법을 터득하였다.
그는 언제나 사람들에게 과식을 삼가라고 경고하면서, 모든 질병은 음식을 절제하지 않는 데서 생긴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늘 찬 철편(鐵片:철 조각) 4매를 가지고 번갈아 가며 양겨드랑이에 끼고 있었는데,
잠깐 사이에 철편이 불같이 뜨겁게 달아 올라 식은 것으로 갈아 끼워야 하였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편안하지가 않았다.
추위나 더위를 가리지 않고 늘 목욕을 해서 어깨와 등을 식혔으며 동짓날에도 우물물 한 동이를 등에 부어야 견디었다.
80여세에 죽었는데 시신이 너무 가벼워서 수의만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윤군평이 시해하였다고들 말하였다는 것이다. →단학
참고문헌
『매월당집(梅月堂集)』
『용호비결(龍虎秘訣)』
『해동이적(海東異蹟)』
『어우야담(於于野談)』
『열하일기(熱河日記)』
『시화와 만록』(차주환 편역, 민중서관, 1966)
『한국도교사상연구』(차주환, 서울대학교 한국문화연구소, 1978)
집필자
차주환
南宮浩然
남궁두(南宮斗) 선생 관련자료
프로필
한마루
2007. 4. 5.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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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두(南宮斗) 선생 관련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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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두(南宮斗)에 대하여
남궁두(南宮斗)
1526(중종 21)∼1620(광해군 12). 조선 중기 단학파(丹學派)의 한 사람. 전라도 함열 출신.
1555년(명종 10)에 진사과에 급제하였다.
임파(臨陂)에서 살다가 애첩과 당질간의 간통사건으로 두 사람을 살해하고 중이 되었다.
법명을 총지(摠持)라 하고 지리산 쌍계사(雙溪寺)에서 은거하였다.
《해동이적 海東異蹟》에 의하면 후에 경상도 의령의 한 암자에서 지낼 때 부주(符呪)·상위(象緯)·감여(堪輿)·추점(推占) 등
도교의 방술에 뛰어난 노승을 무주 부근에서 만나 신선술을 익혔다.
먼저 정신통일을 하기 위하여 잠 안 자는 법을 익히고, 다음 벽곡(辟穀:곡기를 끊음)하면서 《참동계 參同契》와
《황정경 黃庭經》의 묘리를 터득하였고, 이를 운용하여 내단수련(內丹修鍊:호흡법 등으로 장수를 누리려는 도교 수련법의 일종)의 극치인 신태(神胎)일보 직전까지 도달하였다고 한다.
이수광(李睟光)의 《지봉유설 芝峯類說》에 따르면 그의 나이가 90살이 되었어도 거의 늙지를 않았고,
언제나 명산대천을 떠돌아다녀 사람들은 그를 지선(地仙)이라 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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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제국 국방부 정책홍보본부장
지난 2004년 9월부터 1년간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TV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 이순신 장군의 청년시절 무술선생이자
조선 최고의 검객으로 알려진 남궁두 선생이 청년 이순신에게 검(劍)을 선물하면서 당부하던 말씀이 생각난다
“무(武)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무는 지과(그칠 止, 창 戈)니라.
세상의 온갖 폭력을 그치게 하는 것이니라.
노략질을 일삼는 왜구들의 창검을 그치게 하는 것이니라.
그날이 올 때까지 그 검을 손에서 절대 놓지 마라.”
여기에서의 화두는 ‘왜구들의 창검을 그치게 하는 방법’에 있는 것 같다.
왜적의 창검을 그치게 하려면 △(그들이 쳐들어왔을 때) 힘껏 싸워서 이기는 방법이 있고
△(처음부터 아예 쳐들어오지 못하도록 하여) 싸우지 않고도 이기는 길이 있을 것이다.
“무(武)는 창검을 그치게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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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반딧불이
아주 오래전부터 준비된 땅! 태권도공원은 무주가 최고입니다.
이순신장군을 가르친 남궁두 선생님도 이 무주에서 심술와 무술을 연마하셨습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구천 명의 승려가 마음의 정성을 드린 고장인 무주구천동(九千洞 ) !
구천동에는 예로부터 많은 승려가 도를 닦은 장소였으며 밥을 먹기 위해 쌀 씻은 뜨물이 계곡을 따라 흐르는 것이
흰 눈처럼 보였다하여 설천(雪川)이라 불리 운다.
많은 사람의 정성이 깃들어 있어 붙인 이름이 무주 덕유산(德裕山) !
그 덕을 받으려 "조선왕" 이성계도 왕되기전 산신제를 지냈답니다.
그리고 그 덕 위에 많은 선비들이 후진들을 길러냈습니다.
그 선비의 한사람이 바로 형설지공을 이루어낸 설계 박치원 선생이십니다.
선생님은 올바른 몸과 마음을 수련하기 위하여 태권도의 기초인 수박을 연마하셨습니다,
이순신장군을 가르친 남궁두 선생님도 이 무주에서 심술와 무술을 연마하셨습니다
그리고 계속된 왜란과 호란 속에서도 300년 정도의 긴 세월동안 한국의 역사를 보존하고 지켜왔던 조선왕조실록,
왕실의 족보인 선원록을 지켜낸 적상산사고가 있습니다.
죽음으로 사고를 지키기 위하여 승병들과 군민이 하나 되어 호국의지를 불태운 애국심!
국가의 안녕과 백성의 평안을 위해 창건한 안국사와 호국사
그리고 나라의 큰일이 일어날 때마다 국태민안을 위해 기도를 드린 국보1267호인 영산회괘불탱이 있습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5514권이란 책을 혼자 짊어지고 국가의 보물을 지켜내야 한다는 일념으로
밤길을 혼자 가신 상훈 승님의 호국정신 !
테러와 전쟁 불신과 개인주의가 팽배한 어지러운 세상 !
올림픽에서 정식종목이 되고 세계인의 인정을 받은 태권도는 미래의 희망 !
태권도를 통하여 세계의 젊은이가 바른 몸과 밝은 마음을 길러내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오랜 세월 많은 정성 많은 애국심이 쌓여 있은 고장 무주!
무주야 말로 태권도 공원을 창건하고 세계인을 하나로
묶어 평화를 만들어 갈 수 있는 땅입니다
무주를 지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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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세계원
도교 수련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참동계(參同契)』라는 책에 대해 한번쯤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후한(後漢) 시대에 위백양(魏伯陽)이 지었다고 하는 『참동계』는 『주역참동계(周易參同契)』라고도 부르는데
역(易)의 원리에 의해 단약(丹藥)을 합성하는 방법을 설명한 책이다.
도교수련의 기본 원리와 철학을 담은 이 책은 ‘단경(丹經)의 왕’으로 불리며,
조선 시기의 단학파 도인들에게도 중요한 학습 대상이 되었다.
권극중(1585∼1659)은 바로 이 『참동계』에 대해 독자적인 해석을 시도하고 나름의 내단(內丹) 이론체계를 구축한
조선 참동계학의 대가이다.
조선의 도교는 김시습에 의해 문호가 열리고 정렴에 이르러 수련의 꽃을 피웠는데,
그후 권극중에 이르러 이론의 결실을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학문과 수련에만 몰두한 그의 일생
권극중은 자가 정지(正之), 별호는 청하(靑霞)로 선조 18년(1585) 전북 고부(古阜)에서 태어났다.
그는 진사시(進士試)에만 합격했을 뿐 일체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으며,
학문 탐구와 저술 그리고 수련에만 몰두하다가 효종 10년(1659),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어렸을 때의 그는 일반 사족(士族) 출신이 그러하듯이 유교 교육을 받았다.
그는 당대의 저명한 유학자인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계통의 학자 최명룡(崔命龍)으로부터 성리학을 수학하였고
짧은 기간 직접 김장생으로부터 배운 적도 있었다.
김장생의 유학은 예학(禮學)을 중심으로 하였는데 그 영향은 권극중에게도 깊게 미쳐 광해군(光海君)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한 이른바 ‘폐모(廢母)’ 사건이 일어나자 그로 하여금 현실에 절망하여 은둔하게 한 외면적 동기가 되었다.
아울러 스승인 최명룡은 성리학뿐만 아니라 당시 이단시되었던 불교와 도교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지니고 있었다.
스승의 이러한 폭넓은 사상 취향 또한 후일 권극중이 유교의 제약을 벗어나 도교에 심취할 수 있는 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권극중은 최명룡으로부터 사상교육만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
당시의 유명한 문인인 현주(玄洲) 조찬한(趙纘韓, 1572∼1632)으로부터 문학 교육을 받았고,
실제로 그는 시문(詩文) 창작에 있어서 뛰어난 자질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그가 어지러운 정치에 실망을 느껴 은둔하게 되었을 때
학문탐구와 문학작업은 그가 생애를 통하여 몰두할 수 있는 가치 있는 일이 되었다.
그가 문학세계에서 특별히 흠모했거나 친밀히 교유했던 문인들로는 석주(石洲) 권필 , 택당(澤堂) 이식, 동명(東溟) 정두경
등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도교적 기질이 농후한 인물로 그들의 작품도 낭만적, 유선적(遊仙的) 성향이 강하였다.
이중 정두경은 북창 정렴의 후손으로서 권극중의 시집에 서문을 쓴 바 있으며
권극중 역시 당시에 편찬된 정렴의 시집에 서문을 써주었으니, 두 사람의 도교로 맺은 인연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현실을 놓치지 않는 시문 창작에도 뛰어나
권극중은 비록 관직에 나가지 않고 고고(孤高)한 은자(隱者)의 생활을 하였지만
현실 자체에 대한 문제의식마저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문집인 『청하집(靑霞集)』에는 예리한 현실인식을 엿보게 하는 시편들이 여럿 있다.
그의 생애를 통해 겪은 네 차례의 전란(임진왜란·정유재란·병자호란·정묘호란)과
잦은 정치적 변란(폐모사건·인조반정·이괄의 난 등), 그리고 그것들로 인한 백성들의 피폐한 생활에 대해
그는 깊은 동정과 슬픔을 표시하며 이러한 상황을 가중시키는 관리들의 부패, 정치의 타락에 대해 절망과 분노를 표출하였다.
특히 농민의 비참한 현실을 노래한 시가 많은 것은 그가 초야(草野)에 묻혀 살면서
누구보다도 심각하게 그들의 생활을 목도했었기 때문일 것이다.
「텅 빈 마을(空村)」이라는 제목을 붙인, 다음 두 수의 시를 보자.
1
民戶日凋擦
백성들은 날로 곤궁해지는데
公家賦斂饒
관가는 세금을 거두어 풍족해지네.
翁歸阻河役
노인은 강둑 쌓는 작업에 나갔고
子赴築城搖
자식은 성 쌓는 부역에 불려갔네.
破宅牛羊露
폐가에는 소와 양이 밖에 버려 있고
空村吏卒驕
텅 빈 마을엔 아전들만 뽐내며 다니네.
稅車何以渡
조세 실은 수레는 어떻게 건널까?
秋雨浸溪橋
가을비에 다리가 물에 잠겨 버렸는데.
2
텅 빈 마을엔 뽕나무만 우거졌고
落日見煙稀
지는 해에 희미한 연기가 보이는데.
少婦河橋哭
젊은 아낙이 다리가에 슬피 우나니
征人旅棺歸
출정했던 남편이 시체로 돌아왔다네.
簿書頒稅令
세금을 재촉하는 공문서가 날라왔고
霜露助秋威
찬 서리는 가을 위세를 더욱 떨치네.
卒歲無長計
해가 다 가도 좋은 방도가 없어
晨炊燃織機
새벽 밥 지을 때 베틀을 태워 불피우네.
전란과 착취로 도탄에 빠진 농민, 그리고 이에 아랑곳 않는 관가의 횡포가 여실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러한 현실고발의 사실주의적 시체(詩體)는 후한말 혼란기의 문인들에 의해 ‘악부시(樂府詩)’라는 형식으로 처음 지어졌는데
후일 당대(唐代)에 백거이(白居易)가 『신악부(新樂府)』를 지어 크게 유행시켰고,
다시 한참 후 조선의 시인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쳐 권극중에까지 이르렀다.
앞의 두 수는 그의 『신악부풍유시(新樂府風諭詩)』 22수 중에서 뽑은 것이다.
“권극중은 『참동계』에 대한 독자적인 해석을 시도하고 나름의 내단(內丹) 이론 체계를 구축했다.
조선의 도교는 김시습에 의해 문호가 열리기 시작했는데, 그후 권극중에 이르러 이론의 결실을 맺어다고 말할 수 있다.”
치열한 현실 인식은 바로 이타심(利他心)
권극중의 시에 반영된 짙은 현실 의식을 보면 우리는 수련하는 도인이 완전히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아야만 한다는 생각이
어떤 면에서 편협한 견해임을 알 수 있다.
물론 도인이 권력이나 물욕에 눈이 어두워 기회만 주어지면 현실에 뛰어들고자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즉 개인적 욕망에서 비롯한 현실에 대한 관심은 도와는 거리가 먼 행위일 것이다.
그러나 도인일지라도 국가나 민족이 처한 위험과 불행에 대해서는 문제의식을 느낄 수 있다.
그것 역시 이타심(利他心)의 발로일 수 있기 때문이다.
도인이 그러한 치열한 현실의식을 자신의 내면에서 승화시킬 때 그는 더 큰 자기완성의 길을 걸을 수 있을 것이다.
일찍이 동진(東晋)의 도인 갈홍(葛洪)은 그의 『포박자(抱朴子)』에서 전설과 역사상의 저명한 신선들의 예를 들면서
이러한 입장을 옹호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황제(黃帝)·강태공(姜太公) 등은 현실참여와 수도를 병행하여 득도한 바람직한 인물들이다.
따라서 그는 수도자도 충(忠)·효(孝)·인(仁)·신(信) 등의 덕행을 행하지 않으면 신선이 되지 못하거나
득도가 늦어질 수 있다고 경고하기까지 한다.
한국 도교에서도 최치원은 망해가는 신라의 국운을 회복하고자 노력하였고,
김시습은 세조의 찬탈에 분노하여 생육신(生六臣)으로서의 절의(節義)를 지킨 바 있다.
권극중의 현실에 대한 깊은 관심은 편협한 의미의 은거, 수도의 차원에서 이해할 일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수도인이 현실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낀다면 그 정도가 어디까지이며 참여 방식이 어떠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간단히 규정할 수 없고 많은 토론의 여지가 있다 할 것이다.
지금까지 설명한 바 권극중의 도덕적, 경세적(經世的) 의식세계를 지배해 온 것이 그가 유년기부터 학습해 온 성리학이었다면
그의 내면세계를 차지하여 사실상 그의 수련가로서의 삶을 이끌어 간 도교사상은 과연 어떠한 것일까?
설득력 있는 내단(內丹) 사상을 구축
그의 도교사상은 한 마디로 내단학(內丹學)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현재까지의 자료로는 그가 누구로부터 전수받았는지,
이른바 사승(師承) 관계를 확인할 수가 없다.
다만 『청하집』에는 「만남궁진사(挽南宮進士)」라는 제목의, 도인 남궁두(南宮斗)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가 실려 있다.
주지하다시피 남궁두는 허균(許筠)의 「남궁선생전(南宮先生傳)」의 실제 모델로서
무주(茂朱) 적상산(赤裳山)의 신선 권진인(權眞人)으로부터 선도를 배워 상당한 수련의 경지를 이룩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권극중의 「행장(行狀)」에 따르면 그의 외가가 함열(咸悅)의 남궁 씨 집안이었다고 한다.
남궁두 역시 함열 사람이었으므로 그가 권극중의 외가 인물이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바
그렇다면 권극중이 남궁두 혹은 외가 계통을 통하여 내단학을 전수받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권극중 내단학의 주저 『참동계주해』는 그의 나이 55세 때인 인조 17년(1639)에 이루어 졌다.
유학자이자 수련가이기도 한 그는 이 책에서 김시습·정렴 등 선배 단학파의 입장뿐만 아니라
중국의 종리권(鍾離權)·여동빈(呂洞賓) 및 남파(南派)·북파(北派)·선종(禪宗) 불교 등의 여러 경향을 넓게 수용하여
유·불·도 삼교합일(三敎合一)의 체계화된 내단사상을 수립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역리(易理)에 근거하여 내단의 기초를 확립한다는 단역참동론(丹易參同論),
선종과 내단이 하나로 귀착된다는 선불동원론(仙佛同源論),
선종에서의 심성 수련과 내단에서의 기 수련을 함께 실행한다는 선단호수론(禪丹互修論) 등의 관점에서
내단 이론을 전개하였는데, 그의 이러한 관점은 당시 지배사조였던 성리학과 불교측의 도교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완화시키고
사상의 폭을 넓혀, 보다 설득력 있는 내단이론을 구축하려는 데에 목적이 있었다.
그는 태극(太極)과 선천일기(先天一氣)라는 두 개념을 만물생성의 근본으로 파악하고 두 가지가 인간에 내재하여
각각 성(性)과 명(命)을 이룬다고 보았다.
여기서 성과 명을 아울러 수련해야 한다는 수련론이 도출되는데,
그는 구체적으로는 먼저 명을 수련하고 뒤에 성을 수련하는 방법을 제시하였다.
그에 의하면 명의 수련 즉 수명(修命)은 인체내의 수(水)·화(火) 이기(二氣)를 하나로 합하여 선천일기를 포착하는 과정
〔採藥〕과 우주의 리듬에 맞추어 선천일기를 인체내에 운행시켜
후천적 기를 본래의 선천적 기로 변화시키는 과정〔周天火候〕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 단계가 끝나면 성의 수련 즉 수성(修性)에 진입하는데 이는 선불교의 선정(禪定)과 같이 모든 관념을 버리고 도와
하나가 되는 무심합도(無心合道)의 경지라고 한다.
그런데 인간의 현실적 조건인 유한한 후천성명(後天性命)과는 달리 본래의 선천성명(先天性命)은 그 본질이 영원하고 자유롭다.
이에 따라 성명의 수련을 통해 도달된 선인은 생명의 불멸성과 정신적 자유가 조화롭게 갖추어진 인격으로 제시된다.
조선 초·중기 내단 이론을 집대성
결국 권극중의 내단학은 독자성을 견지하면서 본체론·인성론·실천론 등 정비된 이론적 틀을 갖추었기 때문에
한국의 도교이론사상 획기적인 의의가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무엇보다도 그의 커다란 공적은 김시습·정렴 등 조선 초·중기 단학파의 학구적, 수련적인 경향을 계승하여 내단이론을 집대성하였고 그에 이르러 심화된 『참동계』 연구가 후일 민이승(閔以升)·서명응(徐命膺) 등에 의해 조선 참동계학으로 성립, 발전함에 있어
기틀이 되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황윤석(黃胤錫)은 『해동이적보(海東異蹟補)』에서 권극중을 두고
‘조선 최초의 단학저술가(在東方丹家文字 當爲開山祖也)’ 라고 극찬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 전해지는 그의 저술로는 『참동계주해』 5권과 『청하집』 7권이 있으며 「중흥십조(中興十條)」
「경연의대(經筵疑對)」 등 정론(政論)과 경학(經學)에 관한 글도 있다.
아울러 근래에 발견된 도교관계 자료인 『직지경(直指鏡)』과 『중묘문(衆妙門)』도 그의 영향하에 편집된 것으로 추측되어
이렇게 많은 저술을 토대로 그에 대한 탐구가 보다 본격화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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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원전
한국의 선도 역사
동이족 선도의 시작은 환인(桓因)이라고 볼 수 있다.
조여적(趙汝籍; 조선 명종 때의 인물)이 쓴 책 청학집(靑鶴集)에 보면 환인은 동방(東方) 선파(仙派)의 종조라고 나와 있다.
그렇다면 환인은 누구에게서 선도를 배웠는가하면 그것 역시 변지수라는 인물이 기술한 기수사문록(記壽四聞錄)에 나와 있다.
그 책에 의하면 명유(明由)에게서 선도를 배웠다고 나온다.
명유는 상고의 선인인 광성자(廣成子)에게서 선도를 전수받은 인물이다.
따라서 광성자라는 신화적 인물이 선도를 인간세계에 전한 최초의 인물이며 그가 명유와 황제에게 도를 전하여
명유는 환인에게 전하여 동방선파의 종조가 되게 했고 황제는 한족,
즉 중원선파의 종조가 되는 황제내경의 저술자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여하튼 환인은 그 아들 환웅에게 전했고 환웅은 계속 그 아들과 자손들에게 선도를 전해 내려오다가
드디어 단군 한배검에게 그 맥이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삼국유사에 따르면 중국의 유불선이 들어오기 이전에 이미 고조선에서는 선도가 중심사상이 되어
사회의 기본이념으로 자리잡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그리하여 단군의 선도는 아사달 산에서 살고 있던 문박씨(文朴氏)에게 이어졌다는 사실이
이능화(李能和)의 조선도교사라는 서적에 나오고 있다.
후일 문박씨의 선도는 보덕(普德), 을밀(乙密), 영랑(永郞), 안류(安留), 단옥(丹玉), 벽옥(碧玉), 대란(大蘭), 소란(小蘭),
구상(九尙), 무골(武骨), 묵거(黙居), 재사(再思) 등에게 전달되어 이어졌다고 되어있다.
어쨌든 한국은 고대로부터 중원의 한족에게는 선도의 본거지처럼 여겨져 왔다.
산해경(山海經)에도 고조선의 옛 이름인 발해가 선인국(仙人國)으로 표현되어지며
이는 열자(列子)에서도 같은 표현으로 기록되어 있다.
어쨌든 한국 선도의 시조는 환인이며 중국 선도의 시조는 황제와 노자이다.
따라서 중국선도는 황노교(黃老敎)라고도 불렸는데 그 초기에는 수련보다는 의식과 주술의 결과인 단약을 복용함으로써
장생불사를 추구하였다.
이에 반해 한국의 선도는 초기부터 의식과 주술보다는 오직 수련만을 주축으로 삼는 전통이 이어졌다.
다시 말하자면 광성자가 황제에게 전한 것은 의학과 의식이라면 명유에게 전한 것은 실수련법이었다고 유추할 수 있겠다.
그런데 사실상 광성자란 인물은 신화적인 인물로서 중국인들이 자신들의 선도에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
후대에 만들어진 인물일 수가 있다고도 볼 수 있는데 본래는 한(漢)족의 전통에는 선도사상이 없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중국상대 문헌에는 신선설이 없으며 십삼경(十三經)과 노자에도 없고 춘추시대까지도 나타나지 않는다.
장자(莊子)에 와서야 비로소 선인(仙人)이라든지 신인(神人)설 같은 것이 나오기 시작하는데 이는 전국시대에 해당된다고 말한다.
한편 은족동이설(殷族東夷說)이란 주장은 학계에서 무척 설득력 있는 주장으로 대두되고 있다.
그것은 세계 4대 문명 발상지 중의 하나인 황하문명이 바로 은족에 의해서 이룩된 것인데 이 은족은 바로 동이족이라는 사실이다.
중국학자의 ‘중국민족사’에 나오는 주장을 보아도 맹자는 순임금이 동이족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사실상 현대에 와서도 중국인들에게는 순임금을 은족의 조상이라고 보고 있으며 은족은 동이족으로서 동방에서 일어났지만
은이 멸망한 후 기자는 동쪽으로 가서 기자조선을 세웠다고 한다.
또 한편의 일화에 의하면 노자에게 선도를 전수한 황제(黃帝)는 백민(白民)에서 태어났고 동이(東夷)에 속한 사람이라고 하며,
또한 백두산(白頭山)의 다른 이름인 대풍산(大風山) 삼청궁(三靑宮)에서 자부선인(紫府仙人)으로부터
선도를 전수받았다고 했다.
그런데 환단고기(桓檀古記)에 따르면 자부선인은 발귀리(發貴理)의 후손이며
발귀리는 환웅(桓雄)시대의 선인(仙人)이었다고 한다.
이런 정황으로 보아서 결국 중국의 신선도는 동이족의 선도와, 이 선도에서 유래되어 그들의 노장(老壯)철학을 낳았고
결국 그들의 도교가 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단군신화 역시 그 주제가 선도수련에 해당된다.
범인(凡人)인 웅녀가 쑥과 마늘만으로 동굴에서 100일간 정진 수행하는 것은
당시에 불교가 없는 이상 선도수련의 그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마침내 웅녀는 단을 이루어 선녀(仙女)가 되었고 선인이자 천인인 환웅과 결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단군 역시 1048년 간 통치 후에 아사달(阿斯達)에 가서 신선(神仙)이 되었으며
고구려의 동명왕도 19년 간의 재임 후 천선(天仙)으로 화했다는 기록이 있다.
건국의 시조가 사명을 마친 뒤에 선거(仙去)하는 건국설화를 한족뿐만 아니라 다른 어느 민족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이러한 선도의 전통은 삼국시대에도 그대로 전승되어 고구려에서는 ‘선인도(仙人道)’라는 이름으로 널리 성행했으며
종교적 무사 계급을 ‘조의선인(皁衣仙人)’이라 불렀다.
또한 옥저(沃沮)의 두 왕녀 단옥(丹玉)과 벽옥(碧玉)에 대한 이야기와 기자(箕子)의 부인이었던 대란(大蘭)과 소란(小蘭)에
관한 이야기 등 사선녀(四仙女)의 전설도 조선후기 이의백(李宜白)의 오계집(梧溪集)에 나온다.
그런 차에 고구려 때 중국으로부터 오두미(五斗米)도라는 도교가 들어왔지만 별 무리 없이 기존의 선도문화와 잘 어울렸다.
중국의 도교와 조선의 선도 수련이 아무런 마찰 없이 잘 혼합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선도의 전통이 이미 조선에 있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고구려가 멸망한 뒤에 생긴 발해 역시 고구려의 도맥을 계승하여 천신교(天神敎)라는 이름의 선도가 널리 성행했다.
또한 발해국지(渤海國誌)에 보면 발해에서 당나라 무종(武宗)에게 보물궤를 보내왔는데 그 속에 선서(仙書)가 가득 들어있었으며 또 중국의 장건장(張建章)이라는 사람이 발해의 대도(大島)에서 대여선(大女仙)을 만났다는 일화도 전해지고 있다.
신라 역시 고구려 못지 않은 선도국(仙道國)이었다.
삼국사기에 보면 최치원이 화랑도(花郞道)에 대해 난랑비(鸞郞碑) 서문에 다음과 같이 쓴 것이 나온다.
“우리나라에는 현묘한 도가 있으니 이를 풍류(風流)라 한다.
이 가르침을 설치한 근원은 이미 선사(先史)에 상세히 기술되어 있거니와 그것은 실로 유불선 삼교를 포함한 것으로서
모든 생명과 접하여 이들을 감화하였다.”
한국의 선도 역사 2
이는 이미 화랑도가 전통 선도의 맥을 잇고 있음을 나타내는데 신라의 유명한 사선(四仙)인 영랑(永郞), 술랑(述郞), 남랑(南郞),
그리고 안상(安詳) 중에서 금강산에서 수도한 당시의 유명한 신선인 영랑의 도맥이 이어져 제도화된 것이다.
그리고 초대의 화랑은 설원랑(薛原郞)이었는데 그는 왕과 대신들로부터 국선(國仙)의 대접을 받았다.
또한 화랑 출신의 유명한 선인 물계자(物稽子)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조식법, 즉 단전호흡을 가르쳤음이 알려졌다.
또한 백결(百結)선생이나 우륵(于勒)같은 음악가들 역시 선가(仙家) 출신이었으며
만파식적의 설화 역시 선가(仙家) 전통의 음악임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통일신라 이후에는 불교가 매우 융성해서 선가는 불가에 흡수되는 양상이었는데 보통 많은 사서(史書)에 기록된 승(僧)은
일부는 선도의 수행인인 선인(仙人)으로 이해해야 타당할 것이다.
원효대사 역시 화랑 출신으로 물계자 계통의 풍류도를 닦은 후에 불문에 입문했다.
의상 역시 선도에 조예가 깊어 도가에서는 자혜(慈惠)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는 당나라에 가서 김가기, 최승우, 최치원 등과 더불어 전진도의 북오조 중 가장 큰 스승인 정양제군 종리권에게 선도를 배웠다.
그 중에서 김가기(金可紀)는 중국의 조정대신들 앞에서 백일승천 하여 우화등선 16선 중의 하나로 꼽히며
그의 이야기는 당나라 때의 선사(仙史)자료인 속선전(續仙傳)에 나와 있다.
그리고 승려이며 풍수학의 대가인 도선(道詵)국사 역시 물계자 계통의 선도 수련인으로
도가쪽 이름은 옥룡자(玉龍子)였음이 밝혀졌다.
이들 선도의 수련인들이 불교도로 그 모습을 바꾼 이유는 화랑출신에 대한 탄압정책이 표면화되면서부터였다.
그러나 물계자로부터 대세(大世), 구염(仇染)으로 이어지는 선도의 맥을 이어받아
선도를 크게 꽃피운 사람은 다름 아닌 최치원이다.
또한 그는 천부경을 한문으로 번역하여 후대에 전했다.
그는 중국 유학 중에 종리권을 만나 전수받은 도가의 수련법과 고유한 우리의 선도를 합해서 한국선도를 정립하고 그 비조가 되었다.
한편 고려 때에는 국선(國仙)의 경신행사(敬神行事)인 팔관회가 행해지면서 그 주관자를 선가(仙家)라고 불렀는데
이는 화랑의 유풍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북송에서 파견된 중국의 도사들에 의해 중국도교가 왕실에 전해졌다.
당시 궁궐에는 도교의 사찰인 도관이 설립되었는데 복원궁(福源宮)이 바로 그것이다.
예종 12년에 처음 설립된 복원궁은 왕실의 안녕과 복을 비는 행사를 주관하고 동시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업무를 관장했다.
그 후로 도사란 직위명으로 10여 만 명을 득도시킨 것과 송나라에 도사를 파견하였으며
전국 도교의 총림과 같은 역할을 하면서 민간신앙을 하나의 제도적 종교로까지 발전시켜 조선이 건국되기까지 270여 년 간
고려 왕실번창의 신앙적 기반이 되었다.
고려시대 선도의 주요인물들로는 곽여(郭輿), 이명(李茗), 최언당(崔言黨), 한유한(韓惟漢), 한식(韓湜), 강감찬(姜邯贊),
명법(明法), 권진인(權眞人) 등을 들 수 있는데 모두 최치원의 도맥을 이어받은 사람들이다.
한편 조선조에 와서 복원궁의 뒤를 이은 소격서(昭格署)는 그 행사의 규모가 줄어들기는 했지만
조광조에 의해 사라질 때까지 왕실의 번영을 도교적 입장에서 기원하는 대표적인 도관 노릇을 했다.
특히 마니산에서 열리는 초제(醮祭)는 국가적인 제천행사로서 단군의 전설을 계승하는 것이었다.
조선중기 이후 성리학을 정치이념으로 내세우는 유림들에 의해 결국 조선의 제도권적 도교의 본산지는 사라지게 되었지만
재야지식인들에게 관심을 불러일으켜 그 맥이 전수되어졌다.
조선 중기 이후의 선도는 개인의 은둔적 수련을 위주로 하여 풍수지리설과 산신사상 등과 함께 민속 선도로 숨어들면서
민중에 널리 성행하게 되었다.
한국의 선도 역사에 대한 문헌적 기록은 그리 많지 않지만 대표적인 세 가지 도교역사서가 있다.
그것을 소개하면 한무외(韓無畏; 1517- 1610)가 광해군 2년에 지은 해동전도록(海東傳道錄)과
홍만종(洪萬宗; 1645-1725)이 지은 해동이적(海東異蹟), 그리고 조여적(趙汝籍)의 청학집(靑鶴集)이다.
그렇다면 해동전도록은 어떤 책인가?
이 책은 현존하는 최초의 한국 선도의 계보(系譜)를 서술한 책이다.
이 책은 지은이가 한무외지만 이 책을 세상에 전파한 사람은 이식(李植; 1584-1647)이다.
이 책의 내용은 김가기(金可紀), 최승우(崔承祐), 자혜(慈惠; 義相대사)의 일화, 그리고 도교가 전파된 경로,
각각의 수련기 등이 적혀있으며 각종 도법, 비결, 도장경의 전래와 함께 최치원을 동방 선파의 비조로 삼아 기술하였다.
해동이적에 관하여서는 홍만종이 기술한 책으로서 한국 선도의 특성을 잘 보여준 책이데
한국의 선도 역사에서 크게 이적을 남긴 20인 중에 9명을 뽑았다.
그 이름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권진인(權眞人), 남궁두(南宮斗), 김시습(金時習), 홍유손(洪裕孫), 남주(南珠), 정렴(鄭𥖝), 전우치(田禹治),
권극중(權克中) 등이다.
이 책은 조선의 고유한 선도적 입장에서 조선 선인들의 전기를 집대성한 전기류인데 특히 선도수련의 경전을 수록해놓았다.
그 목록은 다음과 같다.
∙ 음부경(陰符經)
∙ 용호경(龍虎經)
∙ 참동계(參同契)
∙ 황정경(黃庭經)
∙ 최공입약경(崔公入藥經)
∙ 동고경(洞古經)
∙ 정관경(定觀經)
∙ 대통경(大通經)
∙ 청정경(淸靜經)
끝으로 조여적의 청학집은 은둔생활을 하던 선인들의 행적을 모아놓은 것인데 도참사상이나 민간설화를 신봉하고
명청의 교체를 예언했으며 조선왕조의 몰락을 내다보았다.
그리고 이외에도 선도와 관련하여 각종 비기(秘記), 참서(讖書)등이 유행했는데
정감록(鄭鑑錄)과 토정비결(土亭秘訣)이 대표적인 것이다.
또한 홍길동전(洪吉童傳)이나 전우치전(田禹治傳), 구운몽(九雲夢), 박씨전(朴氏傳)등의 소설은
민간에 유포된 선도사상을 잘 대변해주고 있다.
한편 이능화의 조선 도교사는 우리나라의 도교사 전반에 관한 자료들을 모두 수집해놓았으므로
우리의 선도역사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그 공헌도는 절대적이라고 할 만큼 매우 크다.
본래는 한문으로 서술되었으나 이종은(李鍾殷)이 우리말로 번역해놓았기 때문에 일반인 독자들도 쉽게 읽을 수 있다.
조선의 선도역사에서 최치원이 해동선도의 비조라고 불린다면 김시습은 해동선도 최전성기의 중심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김시습은 유불선을 자유로이 넘나들 만큼 유불선 모두에 달통해 있었고 유생에서 시작하여 다음은 불교
그리고 말년에 가서는 선도에 깊은 통달을 보여주었다.
김시습처럼 유불선을 자유로이 넘나든 사람으로서 서산대사가 있다.
서산대사의 제자인 사명당 역시 그의 일본에서의 행적을 보아도 역시 선도를 수련한 흔적이 역력하게 보인다.
특히 김시습은 그가 죽었을 때 자신의 시신을 항아리에 넣어서 봉한 뒤 3년 뒤에 열어보라는 유언을 자신의 제자들에게 남겼는데
3년 뒤 어느 절에서 제자들과 승려들이 그의 유언에 따라 항아리를 열어보니
생시와 똑같은 모습으로 있는 것을 보고 매우 놀랐다고 하는 일화도 있다.
이런 일들은 현대에서도 티베트의 고승들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한편 그의 저서 매월당집(梅月堂集)에서 심호흡에 의한 다양한 자세와 정신통일 방법, 신체단련방법 등을 설명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문장들은 당시에 일반인들이 도무지 이해를 하지 못했지만 그 후에 북창 정렴(1506~1549)만이 제대로 이해하였다.
그는 선도에 대한 연구가 깊었으며 그의 행적이 모두 이적(異蹟)투성이어서 이미 살아있을 당시에도 이인(異人)으로 여겨졌다.
그는 김시습의 용호론(龍虎論)을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정리하여 용호비결(龍虎秘訣)이라는 선도수련의 지침서를 저술했는데
그 수련방법이 자세하고 쉽게 풀어졌기에 일반인들도 읽고서 수행할 수 있을 정도였다.
북창(北窓) 정렴 이후로 신선사상을 이론적으로 정비하려는 지식인들의 운동이 있었는데 그 인물들과 저서를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 정렴(1506-1549) : 용호비결(龍虎秘訣)
∙ 한 무외(1517-1610) : 해동전도록(海東傳道錄)
∙ 곽재우(1552-1617) : 양심요결(養心要訣)
∙ 조여적(1520-1611) : 청학집(靑鶴集)
∙ 권극중(1585-1659) : 참동계증해(參同契證解)
∙ 홍만종(1645-1725) : 해동이적(海東異蹟)
∙ 순양자(純陽子; 선조) : 중보 해동이적
∙ 서명응(1716-1787) : 도덕지귀론(道德之歸論)
∙ 홍석주(1774-1842) : 정노(訂老)
∙ 강현규(1797-1860) : 참동계연설(參同契演說)
∙ 작자미상 : 직지경(直指鏡), 중묘문(衆妙門)
한국의 선도역사 -3
한편 해동의 주자(朱子)로까지 불리는 거유 이퇴계(1501~1570)는 중국의 주권(朱權)이 지은 도가류의 의학서인
활인심(活人心)을 상세히 복사하고 연구하여
그 중에 어려운 부분은 한글로 표기해 활인심방(活人心方)이란 제목의 책을 발간했다.
여기에는 단전호흡의 여러 자세가 있고 또 도인법(導引法)이라는 체조의 방법들이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도교에 배타적이었던 이퇴계가 유교에서 거부하는 수련도교를 스스로 실천하고 양생법을 강의하고
제자들에게 권했다는 것은 놀라움을 금치 못할 사건인데
이는 그만큼 조선 중기의 지식인들에게 수련도교가 널리 퍼져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유학에서 퇴계와 쌍벽을 이루는 이율곡(1536~1584) 역시 도교의 양생론에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순언(純言)이라는 글을 지어 제자들에게 선도수련을 권장하기도 했다.
한편 주기론(主氣論)을 주장한 서화담은 단순한 관심의 차원에서 벗어나 김시습으로부터 직접 선도를 배운 사실이 있다.
그는 그 때문에 일생을 은거하며 수련하여 선도의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그는 선도이론에 대한 책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수련에 대하여 시 한 수를 남겨 놓았다.
“내 몸에는 연(鉛)과 홍(汞)의 약재가 있으니 수(水)와 화(火)를 조정하여 성태(成胎)를 맺는다.
혼돈하기에 앞서 도모(道母)를 만나고 혼연한 중에 영아(嬰兒)를 얻었네.
아홉 번 굽는 솥이 은근히 돌아가고 삼십육 동천이 차례로 열리네.
내가 바로 옥경의 진일자(眞一子)이니 아무도 이 도사가 여동빈임을 모르네.”
이리하여 조선조 선도의 맥은 김시습을 필두로 이혜손(李惠孫)과 그의 제자 청학상인(靑鶴上人),
그리고 칠문(七門)에게 이어졌다.
칠문의 속명은 알려져 있지 않고 단지 도명만 알려져 있으니 그들의 이름을 열거해보면 금선자(金蟬子), 채하자(彩霞子),
취굴자(翠窟子), 아예자(鵝蕊子), 계엽자(桂葉子), 화오자(花塢子), 벽락자(碧落子)들이다.
또한 이사연(李思淵), 이정운(李淨雲), 담월당(潭月堂), 한휴휴(韓休休), 이의백(李宜白), 이흥종(李興宗), 이유(李愈),
홍만종(洪萬宗), 서경덕(徐敬德), 이지함(李芝涵), 홍유손(洪裕孫), 박묘관(朴妙關), 정희량(鄭希良), 정렴(鄭𥖝), 정작(鄭碏), 정초(鄭礎), 남궁두(南宮斗), 남사고(南師古), 장세민(張世民), 장도관(張道觀), 장휘량(張輝梁), 승대주(承大珠),
박지화(朴芝華), 윤준평(尹俊平), 관치혜(瓘治兮), 전우치(田禹治), 서기(徐起), 정두(鄭斗) 곽재우(郭在禹)등등
이 외에도 많은 분들이 있다.
문헌에 나온 한 이 분들의 이름을 일일이 나열하는 것은 어려운 가운데서도 선도의 맥을 이은 노고를 높이 받들며
후학인 우리가 그 뜻을 이어받고자 다짐하는 의미에서다.
조선 말 우리민족의 의식을 높이 치켜세운 가장 큰 일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동학인데
이 동학 역시 선도의 정신이 그 밑바탕이 되어 일어난 것이다.
그 후 일제 치하의 혹독한 탄압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던 선풍(仙風)은 더욱 사라져 갔으며 해방 이후 서양문물에 밀려서
그 자취조차 사라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살아남아 맥을 이은 스승들이 있었으니
대표적인 사람은 천우(天宇), 권태훈, 무운(無雲), 청운(靑雲), 청산(靑山) 등이 있다.
4. 선도의 역사
일반적으로 선도는 동이족을 중심으로 한 맥과
중국의 한족이 중심이 된 맥이 동시에 발전되었다고 보는 것이 학자들의 다수 의견이다.
단지 문자의 사용이 늦었던 동이족은 그 문헌이 매우 적은 편이어서 선도의 주류가 되지 못했을 뿐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먼저 그 문헌이 풍부한 한족(漢族)의 발자취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1) 중국의 선도 역사
선도는 신선이 되어 불로장생하기 위한 수련방법을 총칭한 것으로 때에 따라서 단도(丹道) 혹은 금단도(金丹道)라고도 불렸다.
선도는 사실상 노자 이전부터 그 수련문화가 있었지만 도교가 형성되면서 노자의 도경(道經)을 경전으로 삼았기에
노자(老子)를 도교의 교조 혹은 원조로 삼아 태상노군(太上老君)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는 성이 이(李)요 이름은 이(耳)이다.
춘추시대의 인물로 나이는 공자보다 위라고 한다.
한때 공자는 노자에게 예를 물었다고 하고 노자는 공자를 가리켜 “공구는 우리 스승님의 제자다”라고 칭찬했다는데
이는 도가 같다는 뜻이다.
이에 공자는 노자를 가리켜 용과 같다고 했는데 그 조화(造化)가 용과 같다는 뜻으로서 노자를 유용씨(猶龍氏)라고도 했다.
이런 노자는 그의 도를 소양제군(少陽帝君)인 왕현보(王伭甫)에게 전했다.
이에 왕현보는 정양제군(正陽帝君)인 종리권(鍾離權)에게 전하고, 종리권은 순양진인(純陽眞人) 여동빈(呂洞賓)에게 전했다.
그러면 순양진인 혹은 여조사로도 불리는 여동빈에 대해서 알아보자.
여조사의 이름은 암(嵓)이고 자가 동빈(洞賓)인데 당나라 때 인물로서 과거에 계속 낙방하여 60세가 되었을 때
처음으로 종리권을 만나 선도를 배우게 되었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선도에 크게 통했고 후에는 불가(佛家)의 선사(禪師)인 황용(黃龍)조사에게 입문하여
역시 불도에도 도통하였기에 여조사(呂祖師)라고 칭하게 되었다.
그런데 선도에서는 여조사에 대한 일화가 가장 많다.
마치 불교의 관세음보살처럼 여동빈신선은 사람들이 어려울 때마다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여 나타나서
사람들을 구원해 주었다고 했는데 결국 이러한 민간신앙은 신선사상이 도교화되는 과정의 일례라고 볼 수 있겠다.
여동빈은 두 명의 제자를 두었다.
하나는 중양진인(重陽眞人)이라고 불리는 왕덕위(王德威)이고
다른 하나는 해섬제군(海蟾帝君)이라고 불리는 유성종(劉成宗)이다.
왕덕위 즉 왕중양의 일파를 북파라 하고 전진교라고도 부르는데 그의 제자 7인은 단양(丹陽)진인 마옥(馬鈺), 담처단(譚處端),
장생(長生)진인 유처현(劉處玄), 장춘(長春)진인 구처기(邱處機), 왕처일(王處一), 학대통(郝大通), 손불이(孫不二) 등이다.
이 7인을 북칠진(北七眞)이라 한다.
그리고 마옥 즉 마단양(馬丹陽)은 송피운(宋披雲)에게, 송피운은 이태허(李太虛)에게, 이태허는 장자경(張紫瓊)에게,
장자경은 조연독(趙緣督)에게, 그리고 조연독은 진상양(陳上陽)에게 각각 전하였다.
그리고 전진교에서 유명한 구처기에 의해 용문파가 창시되었는데 용문파는 지금까지 800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전진도의 주류를 이루면서 맥을 이어왔다.
현재 중국에서 대기공사로 활동하고 있는 왕력평(王力平)은 용문파의 18대 전인이다.
이에 비해 남파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해섬제군 유성종이 자양진인(紫陽眞人)인 장백단(張伯端)에게 전했고,
장백단은 현태(玄泰)진인 석행림(石杏林)에게, 석행림은 자현(紫賢)진인 설도광(薛道光)에게,
설도광은 이환(泥丸)진인 진남(陳楠)에게, 진남은 자청(紫淸)진인 백옥섬(白玉蟾)에게,
백옥섬은 학림(鶴林)진인 팽사(彭耜)에게 각각 전했다.
그러면 선도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람 다섯을 뽑아서 보통 오조(五祖)라고 불렀는데,
이는 다섯 제군을 가리키는 말로서 시대 순으로 다음과 같다.
그들은 소양제군, 정양제군, 부우(孚佑)제군, 해섬제군, 중양제군이다.
그 본명을 말해보면 왕현보, 종리권, 여동빈, 유성종, 왕덕위
이렇게 다섯 명이 선도에서 가장 상징성이 중요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겠다.
다시 말하면 이들을 주인공 삼아서 선도의 수련에 관한 가르침을 엮은 경전이 도장에서 가장 흔하게 나온다는 뜻이다.
여기서 부우제군은 여동빈(순양)진인을 말하는데 그 이름은 말뜻 그대로 참된 친구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노자 이전에는 선도가 없었는가?
물론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정확한 문헌의 시작이 노자이기 때문이며 노자 이전에는 여러 문헌에 부분적으로 나오는 이야기들이 있다.
어쨌든 노자 이전의 신선도에는 어떤 인물이 있었는지 열거해 보자.
∙적송자(赤松子) : 신농씨 때 선인, 물을 다스리는 우사(雨師), 신농에게 가르침을 베품.
곤륜산에서 서왕모(西王母)와 함께 선도를 닦았다고 함.
∙광성자(廣成子) : 황제의 스승, 공동산(崆峒山) 석실에 살면서 3개월간 황제에게 도를 전했다고 한다.
천이백세의 수명을 누렸다고 한다.
∙팽조(彭祖) : 767세에도 노쇠하지 않고 소년의 혈색을 지녔다고 함. 그의 스승은 청정선생 은나라 말기 사람이다.
∙황제(黃帝) 헌원(軒轅)씨 : 황제내경의 주인공, 황제내경은 한의학의 시조로 알려져 있다.
∙동방삭(東方朔) : 무(武)제, 장수한 사람의 대명사 임.
∙용성공(容成公) : 자칭 황제의 스승이라고 함.
∙방회(方回) : 요임금 시대의 선인
∙갈유(葛由) : 주나라 성왕시대의 선인
∙왕자교(王子喬) : 주나라 영왕의 태자 진(晉)이라고 알려짐.
∙창용(昌容) : 자칭 은나라 왕자라고 함. 2백년 동안 안색이 20세와 같았다고 함.
노자 이후에도 많은 신선들이 있었는데 그들 역시 노자의 가르침에서 시작한 정통 선도의 맥에 포함되지 않는 인물들이다.
다시 말하면 기공은 이미 고대로부터 중국 전반의 민중 속에 퍼져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춘추전국시대 이후로 당나라 시대의 이인(異人), 즉 선도수련의 대가들의 이름을 나열해보면 이전(李筌), 무능자(無能子),
천은자(天隱子), 나은(羅隱), 담초(譚焦), 손사막(孫思邈), 사마승정(司馬承禎), 장지화(張志和) 등이 있다.
그 뒤로 오대(五代) 북송(北宋)시대에는 임영소(林靈素), 두광정(杜光庭), 장군방(張君房) 등이 있다.
그 이후로도 무당산(武當山)파의 진단(陳摶)과 장삼봉(張三丰) 등
몇몇 사람들의 이름과 그 문파들이 오르내리지만 자세한 것은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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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도맥(東國道脈)◀
1.정양진인(正陽眞人;鍾離權)
1)최승우(崔承佑)-최치원(崔致遠),이청(李淸)
2)김가기(金可紀)
3)승자혜(僧慈惠)-명법(明法)
4)석현준(釋玄俊;尸解仙)
2.의상대사(義相大師)
1)태백산노인(太白山老人)
2)권진인(權眞人)
3)남궁두(南宮斗),조전흘(趙傳흘)
3.자혜(慈惠;신라,승려)
1)명오(明悟;승려)-권청(權淸;승려)-계현(게賢;고려)
2)김시습(金時習;승려)
3)윤군평(尹君平;參同契,龍虎秘旨)-곽치허(郭致虛)-한무외(韓無畏)
4)홍유손(洪裕孫;天遁劍法,練魔訣)-박묘관(朴妙觀)-장도관(張道觀)
5)정희랑(鄭希良;玉函記,內丹之法)-승대주(僧大珠)-박지화(朴枝華)
정염-정석
6)그외 서경덕(徐敬德),장세미(張世美;승려),이지함(李之함)
곽재우(郭再佑),강귀천(姜貴千),정두(鄭斗)등
***단학 관련 인물들
(1) 한무외(韓無畏)의 {해동전도록(海東傳道緣)}에 기록된 인물
통일신라말 : 김가기(金可紀), 최승우(崔承祐), 승 자혜(僧 慈惠, 의상대사?), 최치원(崔致遠), 이청(李淸).
고려 : 승 명법(僧 明法), 권청(權淸), 명오화상(明悟和尙), 원나라의 설현.
조선 : 조운흘, 김시습(金時習), 서경덕(徐敬德), 홍유손(洪裕孫), 정희량(鄭希良), 승 대주(僧 大株), 정렴, 박지화(朴枝華),
윤군평(尹君平), 곽치허(郭致虛), 박묘관(朴妙觀), 장세미(張世美), 강귀천(姜貴天), 장도관(張道觀).
(2) 조여적(趙汝籍, 先視대)의 {청학집(靑鶴集)}에 기재된 인물
신라 이전 : 환인(桓人), 단군(檀君), 문박(文朴), 영랑(永郎), 보덕(普德).
삼국 및 통일신라 : 호공, 탐시선인, 물계자(勿稽子), 대세(大世)와 구염, 원효(元曉), 도선(道詵), 옥보고(玉寶高).
고려 : 이명(李茗), 곽여(郭與), 최당, 한유한(韓惟漢), 한식(韓湜).
조선 : 청학상인(靑鶴上人, 魏漢祚), 채하자(彩霞子), 취굴자(翠窟子), 아예자, 계엽자(桂葉子), 백우자(百愚子),
편운자(片雲子, 李思淵), 김선자(金蟬子), 화오자(花塢子), 벽락자(碧落子) 등.
(3) 홍만종(洪萬宗)의 {해동이적(海東異蹟)}에 실린 인물
삼국 이전 : 단군. 삼국 및 통일신라 : 혁거세(赫居世), 동명왕(東明王), 사선(四仙), 옥보고, 김겸효(金謙孝)와 소하, 대세와 구염, 탐시, 김가기, 최치원, 선도성모(仙桃聖母).
고려 : 강감찬, 권진인(權眞人).
조선 : 김시습, 홍유손, 정붕(鄭鵬), 정수곤(鄭壽崑), 정희량, 남추, 지리산인(知異山人), 서경덕, 정렴, 전우치(田禹治), 윤군평,
한라산인(漢羅山人), 남사고(南師古), 박지화, 이지함, 한계노승(寒溪老僧), 유형진(柳亨進), 장한웅(張漢雄), 장생(蔣生),
곽재우(郭再祐).
(4) 이능화의 {조선도교사(朝鮮道敎史)}에서 거론된 인물
환인, 환웅, 단군, 선도성모, 영랑, 사선, 호공, 탐시선인, 물계자, 대세와 구염, 옥보고, 우륵, 김겸효, 소하, 장미선녀, 김가기, 최승우, 자혜, 이청, 명법, 권청, 의상대사, 최치원, 김유신, 김암, 강감찬, 한유한, 한식, 남궁두, 김시습, 홍유손, 정희량, 윤군평, 박지화, 정렴, 장도관, 박묘관, 곽치허, 한무외, 남추, 조운흘, 장세미, 강귀천, 최도, 갑사만승(岬寺萬僧), 이광호(李光浩), 김세마(金世痲),
문유채(文有彩), 정지승(鄭之升), 이정계(李廷稽), 곽재우, 김덕랑, 이지함, 권극중, 청학상인, 김선자, 채하자, 취굴자, 아예자,
계엽자, 화오자, 벽락자, 송루, 운홍.
* 이상의 인물은 주로 {해동전도록}, {해동이적? {청학집}에 근거하고 {삼국유사(三國遺事)}, {빙연제집(氷淵제齋輯)}(윤극열),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이규경) 등에서 몇 인물을 첨가한 것이다.
(5) 황윤석의 {해동이적증보(海東異蹟增補)}에서 보충한 인물
삼국 이전 : 신지(神誌). 삼국 및 통일신라 : 우륵, 문무왕, 처용, 계변천신, 금구선인, 장미선녀, 연주선녀, 을밀선인, 안시용,
백제궁인(百濟宮人), 이영한. 조선 : 서호청, 이남, 정두, 이제신, 강서, 조충남, 앙사언, 김모제, 조헌, 허난설헌, 설도인, 서천객,
지리산장자, 태백산노인, 권극중, 소리자, 장도령, 신유한, 신두병, 유홍자, 편금자, 휴휴자, 성거사, 민응성, 김자겸, 주비, 성내헌,
김백련, 김치, 해중서생, 박화, 박구, 병자이인, 권화산, 오상렴, 김집의, 임숙영, 신해익, 허호, 허목, 오세억, 흥인문이인, 물치촌이인, 김대용, 정술, 영남사인, 송항(宋沆), 춘천구, 정돈시(鄭敦始), 한강선인(漢江仙人), 동촌이선(東村李仙), 나주정선(羅州鄭仙),
임계.
(6) 이의백의 {오계일지집(梧溪日誌集)}에서 거론된 인물
삼국 이전 : 환웅, 단군, 부루, 기자, 사선녀, 문박, 대왕, 신지. 심국 및 통일신라 : 해모수, 동명왕, 갈오도인, 김암, 천개도인,
보덕선녀, 밀향, 연향, 도흥, 최치원, 무골, 묵거. 조선 : 1) 이의백의 집안 이의백(李宜自), 이미연(李美延, 翠窟子), 이운홍,
이정운(李淨雲), 이흥종(李興宗), 이유(李愈). 2) 기타 한휴휴(韓沐休), 담월(潭月), 백우자(百愚子), 단세인(檀世人),
운곡대사(雲谷大師), 최호잠(崔孤岑), 채하자(彩霞子), 송처사(宋處士), 기표옹, 남궁생(南宮生), 선우도사(鮮于道士),
구진동자(九眞童子), 철장도인(鐵杖道人), 운악선생(雲岳先生), 자허거사(紫虛居士), 아두구, 구참여자(九參女子),
처운상인(處雲上人), 석문처사(石門處士), 칠산어인(七山漁人), 석진인(石眞人), 사시은(謝市隱), 해운당(海雲堂), 화옹(花翁), 귤거사(橘居士), 축종상인(竺宗上人), 김유정(金有錠), 사공성(司空星), 황보태(黃甫泰), 남궁환(南官歡).
(7) 아직 충분한 관련자료가 발견되진 않았으나 선맥과 관련이 깊은 성리학자들
양사언(楊士彦), 서기(徐起), 김안국(金安國), 민이승(閔以升), 최석정(崔錫鼎), 허목(許穆), 장유(張維), 이서구(李書九),
이식(李植), 남구만(南九萬), 이준경(李浚慶), 이제신(李濟臣), 박엽(朴燁), 김치(金緻), 이한중(李漢中).
(8) 선맥과의 관련이 추측되는 승려들
원효(元曉), 의상(義湘), 진감(眞鑑), 도선(道詵), 서산(西山), 사명(四溟), 진묵(震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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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해동전도록(海東傳道錄) ◇ ◇ ◇
조선시대의 도인 한무외(韓無畏)가 1610년(광해군 2)에 저술한 수련적인 도교의 도입과 전승을 다룬 도서(道書). 불분권 1책.
인조 때 한 승려의 발낭(鉢囊)을 관원이 수색하여 이 책을 얻어 이식(李植, 1584∼1647)에게 넘겨져 세상에 전해지게 되었다.
나말의 유당학인 최승우(崔承祐), 김가기(金可記), 승자혜(僧慈惠) 3인이 장안의 종남산(終南山) 광법사(廣法寺)에 들어가
천사 신원지(天師 申元之)의 알선으로 종리권(鍾離權)으로부터 한바탕의 훈계와 함께 《청화비문 靑華秘文》,
《영보필법 靈寶畢法》, 《금고 金誥》, 《입두오악결 入頭五岳訣》, 《내관옥문보록 內觀玉文寶록》,
《천둔연마법 天遁鍊魔法》 등 여러가지 도서와 구결(口訣)을 얻어,
신원지의 도움을 받아 3년의 수련 끝에 체내에 단(丹)을 이룩했다. 김가기는 신라에 돌아가지 않고 남아 있었다.
《독선전 續仙傳》에 따르면 김가기는 한차례 귀국했다가 다시 종남산으로 들어가 수도 끝에 선가(仙駕)의 마중을 받아
신중 태풍으로 한 큰 섬에 밀려가 대피 중에 종리권이 보낸 사자들로부터 종리권의 편지와 함께 전에 주었던 도서들에 다시
《참동계 參同契》, 《황정경 黃庭經》, 《용호경 龍虎經》, 《청정심인경 淸淨心印經》 등
수련도교에 관련된 도서들을 더 보태서 받아가지고 신라로 돌아왔다.
이렇게 해서 얻어진 단학의 도요(道要)는 이 두 사람으로부터 최치원(崔致遠), 명법(明法), 권청(權淸), 남궁두(南宮斗),
조운흘(趙云흘), 원설현(元설賢), 윤군평(尹君平), 밀양 과부 박씨묘관(朴氏妙觀), 장도관(張道觀), 승대주(僧大珠), 정렴(鄭렴), 정작(鄭작), 박지화(朴枝華), 곽치허(郭致虛), 한무외(韓無畏), 장세미(張世美), 강귀천(姜貴千), 이광호(李光浩),
김세마(金世麻), 문유채(文有彩), 정지승(鄭之升), 이정해(李廷楷), 곽재우(郭再佑), 김덕량(金德良), 이지함(李之함),
정두(鄭斗), 허미(許米) 등으로 전수된 것으로 되어 있다.
종리권이 최승우 등에게 한 말 가운데 8백년 후면 환반지지(還返之旨:곧 단학)가 신라 땅에 선양되어
도교가 더욱 성하게 되리라는 예언이 있었다.
저자 한무외는 자기 때에 이미 8백년이 채워져 가니 마땅한 사람에게 이 도요가 전수되어야 한다고 절박한 어조로 말하고 있다.
도요 전수의 계보 중에 신라와 고려에 걸친 시기는 연대가 맞지 않고 비약도 심해 사실 신빙성이 희박하다.
그러나 김시습은 마치 중흥시조같이 홍유손, 정희량, 윤군평 3인에게 각기 다른 도법을 전수하고
이어 그것이 여러 사람들에게 전수되어 내려갔다.
이 책은 1. 500자 남짓한 짧은 글에 불과하지만 한국도교사에서 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규장각도서에 필사 완본이 보존되어 있는데, 이식과 신돈복(辛敦復)의 발문,
<단서구결 丹書口訣> 16장, <단서별지구결 丹書別旨口訣> 16장, 정렴(鄭렴, 1506∼1549)의 《용호결》이 부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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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쳐야 미친다!
제목 자체가 주는 강렬한 첫 인상은 내용 곳곳에 나타나는 광적인 얘기에 다다르면 오히려 안온한 현실이 된다.
51쪽에 나오는 엽기적인 독서가였던 김득신의 얘기에 이르면
마치 잔뜩 웅크린 하늘에 은은히 퍼지는 한가로운 웃음처럼 가슴 속을 덮여준다.
그런데 김득신의 일화 중에 왜 그렇게 머리가 둔한지에 대한 다른 얘기가 전해오고 있어 여기에 잠깐 싣는다.
백곡 김득신의 부친은 심곡(深谷) 김치(金緻 ․ 金治, 1577-1625)선생 이다.
조선 선조 30년에 27세로 문과에 급제했다.
부평부사를 지낸 김시회의 아들로 태어나 임진왜란 때 진주성에서 장렬한 최후를 마친 숙부 김시민의 양자이다.
본관은 안동이며, 자(字)는 사정(士精), 호는 남봉(南峰) 또는 심곡(深谷)으로 광해군때 대제학을 지냈다.
대북파였던 그는 인조반정에서 반정 주요 인물들과 능양군의 사주를 봐주었고 거사일을 잡아주고 자문을 해주게 된다.
그는 그 공로로 동래부사를 거쳐 경상감사로 부임하게 되지만 서인들의 원수였던 대북파인데다,
혹 역혁명을 꾀할지도 모른다는 추측, 사주로 반정의 성공을 예언하고 주역들의 면면을 정확히 짚어냈다는 적중률 때문에
불안감에 사로잡힌 서인들에 의해 암살당하고 만다.
심곡선생이 35세 때 아들을 보았는데 막 태어나려는 자식의 사주를 뽑아보니 시간이 너무 나빴다.
그래서 무명천으로 아내의 배를 묶고 시간을 벌고자 했는데…….
산모가 내지르는 비명소리와 태어날려고 바둥거리는 아기의 고통은 차마 바로 볼 수 있는 광경은 아니었다.
한 시간쯤을 고통 속에 지내다 묶은 무명천을 풀었고 이어 아기가 태어났다.
시간은 좋은 시간으로 맞추었지만 자궁 속에서 기운이 다 빠진 아기가 사경을 헤매게 되었다.
간신히 응급조치를 하여 생명은 건졌지만 총기도 없는 어눌한 바보가 된 것이다.
이에 죄책감을 느낀 심곡 선생이 온갖 정성을 다하여 아이를 가르쳤는데 이이가 바로 백곡(栢谷) 김득신(金得臣)이다.
훗날 심곡선생의 글을 모아 남봉집(南峯集)이란 문집을 낸 효자이다.
177쪽에 이르면 다산과 그의 제자인 황상과의 맛난 만남에 대한 얘기가 기특하다.
우연한 만남이 사람의 인생을 바꾸고 변화시킨다.
이들에 대한 얘기 중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배우는 사람에게 큰 병통이 세 가지가 있다.
네게는 그것이 없구나.
첫째 외우는데 민첩한 사람은 소홀한 것이 문제다.
둘째로 글 짓는 것이 날래면 글이 들떠 날리는게 병통이지.
셋째 깨달음이 재빠르면 거친 것이 폐단이다.
대저 둔한데도 계속 천착하는 사람은 구멍이 넓게 되고, 막혔다가 뚫리면 그 흐름이 성대해진단다.
답답한데도 꾸준히 연마하는 사람은 그 빛이 반짝반짝하게 된다.
천착은 어떻게 해야 할까?
부지런히 해야 한다.
뚫는 것은 어찌하나?
부지런히 해야 한다.
연마한다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할까?
부지런히 해야 한다.
네가 어떤 자세로 부지런히 해야 할까?
마음을 확고하게 다잡아야 한다.”
참으로 마음에 와 닿는 귀중한 언질이다.
내게도 저런 스승을 만날 수 있다면……. 가슴은 차디찬 뭉클함으로 가득해진다.
302쪽을 보면 조선 중기의 천재였던 교산(蛟山) 허균(許筠, 1569-1618)의 얘기가 나온다.
허균! 그는 누구인가?
천재적인 문학재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갖가지 구설수에 오르고 철저한 유교적 질서에 순응해야 했던 관리로서
부처를 숭앙했으며 서얼들과 어울려 큰 옥사에 연루되기도 했다.
그야말로 꺼리 낄 게 없는 대자유인처럼 구속과 속박을 벗어나려 했던 혁명적인 인물이었다.
그가 내단수련에 빠져 전라도 함열의 남궁두(南宮斗)를 찾아가 제자로 써 줄 것을 간청했지만
주색에 찌든 인물이라 받을 수 없다는 얘기는 꽤 알려진 일화이다.
“깨닫지 못한 사람의 마음은 잔뜩 때가 낀 거울과 같다.
사물을 비추지 못하는 것은 이미 거울이 아니다.
하지만 물로 씻어내고 수건으로 닦아내면 거울은 다시 사물을 비춘다.
마음의 먼지도 이같이 털어낼 일이다.
세상 살아가면서 생겨나는 온갖 망념들은 바로 거울에 덕지덕지 붙은 때다. (중략)
마음 밭도 이와 다를 것이 없다.
차분히 가라앉혀 침묵을 깃들여야 한다.
생각을 걷어내야 한다.
그 끝에 깨달음이 있다.
이 깨달음은 유불도 삼교의 가르침을 넘어선다.
나와 우주의 사이, 나와 세계의 사이에 간극이 없어진다.
무어라 말할 것이 없게 된다.”
나는 허균의 어떤 일화보다 저자의 이 해설이 더욱 마음에 와 닿는다. 정말 그렇다.
“하늘을 훨훨 나는 신선이란 것도 결국은 잡념을 걷어가 해맑아진 마음이 얻게 되는 대자유의 경계를 비유한 것이 아니겠는가? (중략)
그는 마음에서 욕심을 걷어내면 몸이 둥실 떠올라 광대무변의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으로 꿈꾸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정작 그것이야말로 큰 욕심인 줄은 몰랐던 것 같다.
그 꿈을 성급히 이루려고 역모를 계획하다 그는 죽임을 당했다.
그의 호는 교산(蛟山)이다.
교(蛟)는 이무기다.
이무기는 용이 되려다 승천하지 못하고 못에 사는 이물(異物)이다.
그의 호 교산은 용으로 승천하지 못한 그의 꿈을 상징하는 것만 같다.”
허균에 대한 이러한 해설은 내 마음을 열린 방향으로 들어낸다.
저자는 참으로 사물에 대한 풍부한 학자적 경험과 이해를 가지고 한편의 서사시를 쓰듯 엮어내었다.
격정적이고 활화산처럼 분출하던 얘기들이 강강하게 마음을 되잡고 다소곳이 자신을 되돌아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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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되어 오던 원본 토정비결인 석중결을 만나기까지
대덕 김동환
* 작성일 : 2003-07-22
예전에는 토정비결을 석중결이라 하였다.
비전되어오는 원본 토정비결.
너무 완벽한 예언서로 백발백중하여 토정 선생마저도 놀라 대중화시키지 않은채 석함속에 넣어 몰래 전해져오는 그 비전 토정비결!
필자가 할아버지로부터 처음 역학과 풍수를 접하고 그후 육임, 귀문둔갑, 육효, 하락이수 등을 배우게 된것도
어언 25년이 넘어가고 있다.
그러나 토정 이지함 선생의 비전되어오던 원본 토정비결을 만났을 때의 감동은 지금까지도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나는 스므살부터 계룡산, 속리산, 설악산, 지리산과 십승지 등으로 역학의 달인을 찾아 다니며 공부하였다.
일명 석중결을 만난 것은 80년초에 역학의 도인을 찾아 전국을 헤매던 중 지리산의 어느 깊은 산골짜기에서였다.
지리산 중턱에서 내가 만난 팔순을 훨씬 넘긴 듯한 그 어른은 길다란 지팡이에 스님 복장을 하셨지만
머리를 산발하고 계셨기에 어찌 보면 스님같기도 한 그런분이었다.
토정 선생의 도맥을 이어가며 바위굴에서 살아간다고 하여 호가 석정(石亭)이신 분이었다.
석정 도인과 1년여의 짧은 만남 속에서 토정 이지함 선생님에 대해 정확하게 알게 되었고 토정 이지함, 서기, 남궁두, 정개청, 남사고, 홍경래,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석정으로 내려오는 전통 민족 역학의 맥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또한 그 도맥(道脈)의 문하(門下)에 들어가게 되는 영광까지도 안게 되었다.
토정 이지함 선생의 원본 토정비결은 원래 백발백중이었는데 그것으로 인하여 오히려 백성들이 나태해짐을 걱정한 나머지
석함 속에 넣어 자신의 수제자에게 주면서 깊은 산 속으로 떠나게 했다.
그 수제자에게는 동굴속에서 살아가면서 역학과 도를 닦으라고 석정이란 호를 내려 주었다.
분명 언젠가는 원본 토정비결이 후세에 긴요하게 쓰이게 될때가 있을 것이고 그떄까지는 석함을 절대로 열어보지도 말 것이며
또한 발견되지 못할 장소에 보관하라는 당부가 있었다고 한다.
다만 책으로써는 절대 전하지 못하게 했으나 수제자 한 사람에게만 말로써 원본 토정비결을 전달하는 것을 허락하셨다.
석정이란 호는 계속 제자에게 물려 주란 말씀까지도 있으셨다고 한다.
석정 도인께서도 1년동안 비전 토정비결을 가르쳐 주시면서도 책을 보여 주거나 글로 쓰거나 하는 일은 절대없이
작괘법부터 효사 하나하나, 주역의 상수학과의 대입법까지 말로써만 가르쳐 주셨다.
그렇다면 석함 속에 넣어져 석굴에 숨겨져 있는 비전 토정비결인 석중결(石中決)은 어디에 있는가?
석정 도인께 여러번 질문을 해보았지만 절대 가르쳐 줄 수 없다고 단호하게 잘라 말하시고는
십승지 중 한곳인 어느 깊은 산 바위굴 속에 숨겨져 있다는 말씀만 하셨다.
1년여가 흘러가고 비전 토정비결이 완성되어갈 무렵의 어느날 도인은 너에게 석정(石亭)이란 호를 물려 주겠다며
아무 말씀도 없이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그후 석정 도인을 어느곳에서도 만나뵐 수가 없었다.
석정 도인이 가르쳐준 비전 토정비결을 적용하여 수많은 사람들에게 임상실험을 해본 결과 80% 정도의 정확도가 있었다.
말로만 전달되어오다 보니 완벽하게 정리되지 못한 감이 있어
원해 백발백중이었던 토정비결 원본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80%라면 매우 정확하게 전달되고 있다는 얘기이며 그 결과가 놀라울 따름이다.
지금 어느 깊은 산속엔가 있을 석함속의 비전 토정비결의 원본 석중결만 찾을 수 있다면 100%의 확률을 장담할 수 있겠지만
정말 필요한 때가 아니면 발견되지도 않을 것이고 찾을 수도 없을 것이라고 믿으며 찾으려 노력하지도 않을 것이다.
다만 언젠가 다시 민중들 앞에 나와서 희망을 주고 개척의 힘을 주는 필요함이 있을 것이라고 믿고 그 시기를 간절히 기다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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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벽과 상생의 문화지대, 새만금문화권
새전북신문
김성환(군산대 교수)
올해 상반기에 '개벽과 상생의 문화지대, 새만금문화권'이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했다.
한데 독서시장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하다.
의례 갯벌 아니면 간척지여야 할 새만금을 ‘문화권’이라고 하니, 생뚱맞은 모양이다.
하지만 대중의 눈길을 끄는 데는 비록 미흡하더라도, ‘새만금문화권’ 개념은 유효하다고 확신한다.
내부개발의 향방을 떠나, 이미 완공된 새만금방조제만으로도 전북 서부의 지형도는 이미 크게 바뀌었다.
방조제는 군산시 서남부와 변산반도를 잇는 세계최장(33.2㎞)의 해상고속도로이다.
2008년에 방조제 포장이 완료되면, 2시간 가까이 소요되던 군산-변산은 20분으로 단축된다.
그리하여 군산-고군산군도-부안군(변산 국립공원)-김제시가 연결되고,
외곽에 고창-정읍-전주서부-익산을 아우르는 지역이 자동차로 1시간 거리에 들어온다.
이는 해양과 도서, 평야와 산악을 구비한 천혜의 자연환경, 그리고 다양하고도 풍부한 문화자산을 보유한 지역이다.
하지만 이런 지리적 연계만으로 곧 바로 ‘문화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지리적 통합성에 더해, 어떤 문화적 통일성이 있었거나 또 있어야 ‘문화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새만금 일대를 하나의 문화권으로 볼 수 있을까?
대답은 단연코 ‘그렇다’이다.
문화의 동질성은 ‘역사적 경험’과 ‘정신적 가치’를 공유하는데서 비롯된다.
새만금지역은 이런 의미에서 분명한 하나의 문화권이다.
오래 전부터 이곳은 △민초들의 땀과 눈물이 배인 ‘서민문화권’ △저항과 개벽의 정신이 꿈틀대는 ‘개혁문화권’
△개방과 회통의 전통이 살아있는 ‘복합문화권’ △생명과 상생의 가치를 중시하는 ‘생태-생명문화권’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을 품고 미래를 준비하는 ‘미래형 문화권’을 이루었다.
여기에서 최치원, 부설거사, 정여립, 남궁두, 허균, 진묵대사, 유형원, 권극중, 전봉준, 강증산, 박중빈 같은
사상·문화적 영웅들이 태어나거나 활동했다.
그들은 지배문화에서 벗어나 자유와 혁신의 정신으로 살았으며, 민초들과 호흡했고, 신세계를 꿈꾸었다.
동학농민혁명의 기치가 이곳에서 오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새만금은 바로 이 문화지대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숨결, 그들의 정신세계 한 가운데 있다.
지금까지 이점이 간과되었다.
온통 ‘갯벌이냐 간척이냐’는 이분법에 함몰됐기 때문이다.
서울 중심의 거대담론에 짓눌려 지역 특성이 무시된 까닭도 크다.
그러나 지금은 문화가 밥이 되고, 문화가 지역의 희망이 되는, ‘문화의 시대’이다.
그것도 오랜 세월 지역에 온축된 문화자산을 밑천으로 삼아야 한다.
지역에 독특한 문화가 앞서야 비로소 지속가능한 관광산업도 가능해진다.
그러니 이제 개발·환경의 극단적 이분법을 넘어서는 문화담론의 새로운 지평을 열 때이다.
“새만금을 개벽과 상생의 문화지대로 구축하라”
태권도박물관 (무주에 묻힌 옛태권인들)
무천동계곡에는 애국자들의 이야기가 많다.
화랑도, 선인, 수사, 등의 호국선들이 도를 닦던 곳이라고도 한다.
인걸은 땅의 영기로 태어나는 곳이므로 인걸 또한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무주 적상산에서 도교를 수련한 도사 “남궁두”는 함열사람이고, 청하 “권극중”은 고부사람인데, 선도를 수련하였다.
그들은 기개가 뛰어난 재주로 후세에까지 명성을 날린 사람들인데, 유사시에는 나라를 위해 한 목숨 바치려 했다.
그리고 무사가 푸대접을 받아 입산하는 경우도 많았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곽재우를 비롯한 선비들이 그들이었다.
(Old Taekwondo Men buried in Muju)
The valley of Mucheondong has a lot of stories about patriots.
This was the place where Hwarangdo, good men, monks, and patriots trained themselv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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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학설화 (丹學說話)
단학에 얽힌 설화.
수련파의 도인(道人)들이 선약(仙藥)을 연조(煉造)하는 이른바 외단(外丹)에의 집념에서 탈피하고,
자신의 수련을 통하여 공행(功行)을 쌓고 자기 몸 안에 단(丹)을 이룩하는 내단(內丹) 성취에의 수련을 고취하는 데에서 생겨난
설화를 말한다.
본성에 연결시킨 단학의 기본이론은 김시습(金時習)의 용호(龍虎)에 관한 해설에 잘 해명되어 있다.
배꼽 아래 한 치 서 푼의 자리에 있는 단전(丹田)을 기준으로 하여 몸을 안정시키고 일호일흡(一呼一吸)을 잘해서
우주의 원기를 훔쳐다가 체내에 단을 이룩한다는 단학은 불로장생하는 신선으로 변화하는 것이 중심으로 되어 있다.
단학설화에서 홍만종(洪萬宗)이 편술한 《해동이적(海東異蹟)》은 38항 32인의 이적을 여러 책에서 초록하여
인물별 시대순으로 배열하고 편자의 안어(按語)와 평설(評說)을 달기도 하였다.
다루어진 인물은 단학에 조예가 깊어서 이적을 나타낸 것은 아니나 단학을 연상시키는 성질의 것이다.
중국의 도교전적인 설화 《운급칠첨》의 <속선전(續仙傳)>에
김가가 신선의 의장대가 도열한 가운데 하늘로 올라간다는 내용이 있다.
김시습에 얽힌 신화나 최치원(崔致遠)에 얽힌 신화는 모두 신선이 되어 승천했다는 것이며,
남궁두(南宮斗)에 얽힌 신화는 금단을 이룩하려던 욕심이 과하여 금단이 망가져버리고 신선의 신태를 구경한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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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선생전 [ 南宮先生傳 ]
조선 선조 때 허균(1569~1618)이 지은 고대소설.
구분 : 고대소설
작자가 손수 편찬한 그의 시문집 《성소부부고》에 수록된 5편의 한문소설(漢文小說) 중에서 가장 긴 작품으로,
그의 한글소설인 《홍길동전》과 함께 허균 소설의 쌍벽을 이룬다.
전라도에 남궁두(南宮斗)라는 부자가 살았는데,
그가 서울에서 진사 벼슬을 하는 동안 고향에 혼자 남아 있던 애첩이 남궁두의 당질과 간통을 한다.
분통이 터진 그는 두 남녀를 활로 사살하고 귀경하나, 이 일이 탄로되어 붙잡힌 끝에 갖은 악형을 받는다.
아내의 도움으로 겨우 풀려난 그는 금대산(金臺山)에 들어가 중이 되며, 한 노인을 만나 수련을 쌓고 도에 통한다.
그뒤에 남궁두는 스승이 시키는 대로 속세에 돌아와 새로 장가를 들고 사는데,
때마침 파직을 당하고 부안(扶安)에서 살던 작자 허균을 찾아와 선가(仙家)의 비결을 알려 준다는 줄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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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은 29세때 장원급제하여 이듬해 황해도 도사가 되지만 한양기생을 가까이 했다하여 탄핵을 받고 파직된다.
그 후 여러차례 벼슬길에 나아갔는데 불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계속 탄핵을 받자 스스로 관직을 내놓고 불교에 몰두한다.
그 후 그의 누이 허난설헌의 시를 보여 이를 중국에 출판했는데 이 공로로 삼척부사가 되나
또다시 불교를 가까이 한다는 이유로 세번째 파직을 당한다.
그의 학식을 높히 평가한 조정은 다시 그를 공주목사로 임명하지만,
이번에는 서얼출신들과 어울린다는 이유로 네번째 파직을 당한다.
「남궁선생전」본문 내용중에 허균 자신이 1608년 가을 공주목사에서 파직된 뒤에 부안에서 살고있었는데
남궁선생이 고부로부터 찾아와서 자신을 만났다고 한다는 점,
그리고 1610년 10월에 그는 자신의 글이 나아졌다는 것을 스승 손곡에게 보이기 위해 몇 편의 작품을 보냈는데
그가운데「남궁선생전」이 있었다는 점들을 보았을때 허균이 파직을 당하고 정사암에 머무르는 동안
이 작품을 지은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한다.
1. 작품의 줄거리
남궁두는 사마시에 급제하고 성균시에 수석으로 뽑힌 인물인데 성격이 거만하여 사람들의 미움을 샀다.
서울로 이사하고 시골에는 첩만 남겨두었는데 첩이 남궁두의 당질과 사통하고 있었다.
이를 안 남궁두가 두 사람을 활로 쏘아 죽이고 도랑에 매장한 다음 서울로 돌아왔는데
남궁두를 싫어하던 종에 의해 이사실이 밝혀져 붙잡혔다.
아내의 도움으로 탈출한 남궁두는 중노릇을 하기도 했는데 소재가 발각되어 붙잡히기 직전에 신선의 현몽 지시에 따라 도주한다.
그뒤 우연히 만난 젊은 중이 자기의 스승을 소개하자 남궁두는 1년동안이나 그사람을 찾아
마침내 스승으로 섬기며 신선술을 연마한다.
잠을 자지도 않기도 하고, 도가서를 만 번이나 읽기도 하고, 곡식을 끊기도 하고, 호흡법과 운기하는 법을 배우기도 한다.
그리하여 거의 신선이 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으나 하루라도 빨리 신선이 되고 싶어 서두르는 바람에 실패하고 만다.
이에 스승은 남궁두에게 지상선(地上仙)은 될 수 없으며 수양하면 8백년은 살 수 있을 것이라 하였다.
이후 스승의 내력을 듣고 스승이 여러신의 조회를 받는 광경을 목격한 다음,
스승의 지시로 산을 내려온 남궁두는 예전의 노비를 찾아가 의지하면서 상민의 딸과 혼인하여 자녀를 얻는다.
남궁두가 허균을 찾아왔을 때 그의 나이가 83세 였으나 46~47세 정도로 보였으며,
그는 허균에게 인간세상에 재미가 없어 속세에 음식을 금하지 않고 평범하게 여생을 보내다가
하늘로 돌아가 하늘이 주신 바에 순종하려 한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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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선생전(南宮先生傳)>
【해설】
조선 중기에 허균(許筠.1569∼1618)이 지은 한문소설.
그의 시문집 <성소부부고(惺所覆螺藁)> 제8권 문부(文部) 제5의 전(傳) 속에 있는데 5편의 한문소설 중에서 가장 길다.
한글소설인 <홍길동전>과 더불어 허균 소설의 쌍벽을 이룬 <남궁선생전>은 전기체 소설이 갖는 하나의 전형(典型)과 같이,
실재하였던 남궁두(南宮斗)라는 인물을 대상으로 하여 사건전개의 동기를 잡고, 그 속에 작자의 이상을 표현하고 있다.
【줄거리】
『전라도에 남궁두(南宮斗)라는 부자가 살았는데, 그가 서울에서 진사 벼슬을 하는 동안
고향에 혼자 남아 있던 애첩이 남궁 두의 당질과 간통을 한다.
분통이 터진 그는 두 남녀를 활로 사살하고 귀경하나, 이 일이 탄로되어 붙잡힌 끝에 갖은 악형을 받는다.
아내의 도움으로 겨우 풀려난 그는 금대산(金臺山)에 들어가 중이 되며, 한 노인을 만나 수련을 쌓고 도에 통한다.
그 뒤에 남궁 두는 스승이 시키는 대로 속세에 돌아와 새로 장가를 들고 사는데,
때마침 파직을 당하고 부안(扶安)에서 살던 작자 허균을 찾아와 선가(仙家)의 비결을 알려 준다.』
『전라도 임피(臨陂)에 살고 있던 부호 남궁두는 나이 서른에 진사가 되어 서울에 살고,
다만 애첩 하나를 시골집에 두어서 농장을 경영하였다.
그러다가 애첩이 그의 이성(異姓) 당질(堂姪)과 간통하게 되자, 남궁두는 활로 두 남녀를 쏘아 죽여 논에 묻고 서울로 돌아왔다.
일이 발각되자 남궁두는 붙잡혀 갖은 악형에 처해졌으나, 그 아내가 포졸에게 술을 먹이고 빼내었다.
남궁두는 금대산(金臺山)으로 들어가 중이 되었다가,
무주 치상산(雉裳山)에 옮겨가서 한 장로를 만나 수련의 비결을 받고는 도를 통하였다.
장로가 모든 귀신을 접견할 때에 조선이 왜적에게 병화를 입어서 7년 동안을 소란하였으나,
나라가 망하지 않았음이 다행스럽다고 한다.
남궁두는 스승의 명령에 의하여 다시 속세로 돌아와 장가들어 살림살이를 하였다.
때마침 작자인 허균이 공주에서 파직되어 부안에 살고 있었다.
남궁두는 그를 찾아가 선가(仙家)의 비결을 주었다.』
【감상】
이 작품의 주제를 ‘인(忍)’이라고 볼 수도 있고,
일사소설(逸士小說)로서 자아(自我)와 세계(世界)의 강한 대립의 양상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또는 당시의 혼란한 사회에 대한 간접적 비판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혹은 작자 자신의 자화상이거나, 미래상이 아닐까 하는 지적도 있다.
이 작품 속에는 도술적(道術的)인 요소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데,
이러한 수법은 당나라 때의 전기소설(傳奇小說)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서,
혼란한 사회상을 풍자하고 작자의 이상을 경험할 수 없는 신비한 곳에 두어 해결하려 하였던 현상이다.
작품 말미에 작자의 논평이 붙어 있어 작자의 사상과 감정에 대한 후인의 이해를 돕고 자신의 이론을 간접적으로 전한다.
그리고 작품의 결구나 사용된 비유 등을 살펴보면, 이른바 도문일치(道文一致)에 접하는 작자의 문학관을 읽을 수 있고,
<장자(莊子)>의 우언(寓言)을 모방하여 고도의 은유법을 구사, 작자의 의도를 충분히 발휘하는 수법을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작자의 문장기교가 그만큼 뛰어났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도가적 이야기는 사건전개의 한 양식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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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선생전(南宮先生傳)
* 허균은 내단수련에도 조예가 깊었던 인물입니다.
실존인물이었던 도사 남궁두의 수련과정을 그린 이 소설은 오늘날에도 단학 수련하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교과서로 쓰일 만큼
상세한 수련과정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선생의 이름은 두(斗), 대대로 임피(臨陂 전북 옥구의 옛 지명)에서 살아 집안도 오래되고 재산도 넉넉하여
고을에서 내로라하는 집안이었다.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2대에는 과거에 뽑혀 관리되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나,
두(斗)만은 박사의 제자로서 과거공부를 하여 집안을 일으켰다.
30세에 처음으로 을묘년(명종 10, 1555)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과장(科場)을 울렸다.
일찍이 대신불약부(大信不約賦)라는 글을 지어 성균관(成均館) 시험에 수석으로 뽑혀
사람들이 모두 그 글을 전송(傳誦)하기도 했다.
두(斗)는 거만하고 고집이 세며, 자신만만하고 오만한 성격이어서 감히 재주만 믿고는 고을에서 호탕한 채 멋대로 지냈었다.
잘난 체하면서 장리(長吏 고을의 원)에게 예의 바르게 대하지도 않으니 읍내의 상하간이 모두 두(斗)를 흘겨보며 앙심을 품었으나
겉으로 나타내지는 않았다.
처음으로 선생이 서울로 이사하여 진취(進取)할 계획을 세우고는, 첩(妾) 한 사람만 시골 집에 남겨 두었다.
해마다 가을이면 곧장 내려가 가을 수확을 처리하였다.
첩(妾)은 무인(武人)의 딸이었으나 매우 예쁘고 영특하여 글과 계산법을 가르쳐 주면 뛰어나게 빨리 알아차렸다.
그래서 두(斗)는 그를 가장 사랑했었다.
그러나 주인이 서울에 살게 되면서 여러 달 동안 독수공방으로 지냈으므로
몰래 두(斗)의 성(姓)이 다른 당질(堂姪)과 사통(私通)하고 있었다.
무오년(명종 13, 1558) 가을 두(斗)는 급한 일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30리를 남기지 못하고 날이 저물었다.
하인배들만 그곳에 머물러 있게 하고는 혼자서 말 한 필을 타고 시골 집으로 달려와 보니 이미 등불이 밝혀 있는 밤이었다.
노복들도 모두 잠자리에 들었으나 중문(中門)이 활짝 열려 있어 첩(妾)이 보이는데,
곱게 화장하고 화려한 옷을 입고 섬돌에 서 있었다.
당질(堂姪) 놈이 동쪽의 낮은 담을 넘느라 발이 땅에 반자[半尺]쯤 닿지 않고 있는데 첩이 급히 달려가 안아서 맞아들이고 있었다.
두(斗)는 분노를 참으며 짐짓 그 마지막까지를 천천히 기다리고 있었다.
말[馬]을 외문(外門)의 기둥에 매어 두고 몸을 숨겨 가린 채, 틈 사이로 그들을 엿보고 있었다.
두 사람이 희희덕거리며 온갖 추잡을 떨다가, 옷을 벗고 함께 잠자리에 들려고 할 때에 두(斗)는 당장 그 실제를 확인하기 위해
어둠 속으로 가서 벽을 더듬으니 걸려 있는 화살통에 화살 두 개와 활 하나가 있었다.
마침내 화살을 당겨서 쏘아, 먼저 계집의 흉부를 꿰뚫어 즉시 넘어뜨리니 그 사내는 놀라서 일어나 북쪽 창문으로 뛰어넘으려 하자, 또 쏘아 늑골을 적중시켜서 죽게 하였다.
두(斗)는 관(官)에 알리고도 싶었으나 가문(家門)을 더럽히는 일이자,
또 고을 원님의 마음을 보장하기도 어려운 일이어서 곧 바로 두 시체를 끌고 가서 벼논의 도랑 속에 매장해 버렸다.
그리고는 곧바로 말을 몰아 서울로 돌아왔었다.
다음날 날이 밝은 훨씬 뒤에야 집안의 종들은 첩이 보이지 않음을 알아차렸다.
그녀와 당질이 도망친 걸로 여기고 당질의 집에 가서 물어보니, 역시 간 곳을 알지도 못하고 있었다.
농장의 어떤 종놈이 두(斗)의 곡식 1백여 석(石)을 훔친 적이 있어 두(斗)가 오면 반드시 죽일 것이라고 항상 염려하고 있었다.
그 자는 두(斗)가 두 사람을 죽였지 않을까 의심하고는 그 자취를 찾아대었다.
벼논 도랑의 물 위에 기름이 떠 있는 걸 보고서 삽질하여 파보니 두 시체가 엎어지고 뒤집어져 있었다.
곧바로 첩(妾)의 집에 알리자 늙은 병졸이 현령(縣令)에게 고발하고, 사내 집안에서 숙원(宿怨)이 있었다는 증거를 세웠다.
현령이나 여러 아전들은 본래부터 두(斗)를 불쾌하게 여겼기에 모두 기뻐하여 잘 걸려들었다고 하면서,
사사로운 미움으로 당질(堂姪)을 모살(謀殺)했다고 죄안(罪案)을 꾸몄다.
서울에서 두(斗)는 형틀에 묶이고, 오독(五毒)을 첨가한 죄인의 수레에 태워 이산(尼山 충남의 지명)에 이르렀다.
두(斗)의 아내가 어린 딸을 업고 뒤늦게 도착해서는 간수(看守)에게 취하도록 술을 먹이고 밤에 형틀을 풀어 빠져나가게 하였다.
날이 밝아서야 간수가 그가 없음을 알아냈으나 찾을 길이 없었다.
그래서 그의 아내를 읍내까지 데려와 딸과 함께 옥중에서 굶겨 죽였다.
임피(臨陂)의 전답과 재산을 모조리 빼앗아 두 피해자 집안에 나누어 주었다.
두(斗)는 곧바로 금대산(金臺山)으로 들어가 낙발(落髮)하고 중이 되었으니, 법명(法名)을 총지(摠持)라고 하였다.
계행(戒行)을 무척 엄하게 지키며 1년을 지냈다.
원수로 여기던 집에서 있는 곳을 알아내어 병졸들을 거느리고 붙잡으러 오고 있었다.
그날 새벽에 꿈을 꾸는데, 산신(山神)이 일러주기를,
"원수진 사람들이 올 것이니 급히 달아나야겠다."하였다.
잠에서 깨어나자 급히 하산(下山)에 버리니 잡으러 오던 사람들이 도착해서는 붙잡지 못하고 돌아가야 했다.
두(斗)는 두류산(頭流山 지리산(智異山))으로 향하다가 쌍계사(雙溪寺)에서 한 달 정도 기거하였다.
이름 있는 절이라 중들이나 속인들이 모여드는 것에 싫증을 느끼고 그곳을 버리고 태백산(太白山)으로 향했다.
의령(宜寧)에 있는 야암(野庵)에 이르러 휴식을 취했다.
뒤따라 중 한 사람이 도착하였다.
예쁘게 생겼고 나이도 어린데 삿갓을 벗고 당(堂)으로 오르더니 자세히 얼굴을 살펴보면서,
"그대는 사족(士族)이군요. 왜 뒤늦게 삭발하였습니까?"
하고는 조금 뒤에,
"참을성이 있는 분이군요."
하더니 잠시 뒤에는,
"유도(儒道)를 업으로 하시면 큰 벼슬 하실 텐데." 하였다.
얼마쯤 지나서는 껄걸 웃으면서,
"두 사람의 목숨을 상하게 하고 죄를 지어 도망온 사람이군요."하는데, 말한 네 마디가 모두 딱 들어맞는 말이었다.
두(斗)는 깜짝 놀라서 허둥지둥 어찌할 줄을 모르다가, 밤이 되어 그의 침소로 찾아가 머리를 조아리며 해준 말이 사실이라고
승복하여 이어서 무척 간곡하게 스승이 되어달라고 청했었다.
나이 젊은 중은,
"나는 겨우 관상(觀相)만을 이해하고 있을 뿐이오.
우리 스승께서는 모든 방술(方術)을 아십니다.
어떤 사람을 관상하고는 어떤 방술을 전해 주시니, 더러는 부주(符呪)로, 더러는 상위(象緯)로, 더러는 감여(堪輿 풍수지리)로,
더러는 추점(推占)을 전해 주시며 그 그릇에 따라 친절하게 가르쳐 주십니다.
나는 상법(相法 관상법)을 전수받았으나 아직 지극한 경지에 도달하지도 못했는데 어떻게 감히 남의 스승이 되겠습니까."하였다.
두(斗)가 지금 스승이 어디에 계시냐고 묻자 그 중은,
"무주(茂朱 전북의 지명)의 치상산(雉裳山)에 계시오. 그대가 그곳으로 가면 만나 뵐 수 있을 겁니다."하자, 두(斗)는 절하고 나왔다. 다음날 날이 밝아 안부를 살피러 가 보았더니 이내 떠나버렸다.
곧바로 방향을 돌려 막대를 짚고, 치상산에 도착하여 온 산을 두루 살폈다.
절이 거의 수십 곳이었으나 모든 절에 유별한 중[異僧]이라고는 없었다.
한 해 동안을 머물며, 온갖 고생을 하면서 돌이 구르는 층계와 산의 정상(頂上), 나는 새도 이른 적이 없는 곳까지를 찾아다녔다.
세번 네번을 돌며 뒤졌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젊은 중이 속였다고 여기고 창연(悵然)히 돌아가려 하였다.
그런데 우연히 한 골짜기에 이르자 숲속으로 흐르는 시내가 있었는데, 물 위에 큰 복숭아씨가 흐르고 있었다.
두(斗)는 마음 속으로 기뻐서,
"이 계곡 가운데가 선사(仙師)가 계시는 곳이 아닐는지."
하고는 걸음을 재촉하여 물줄기를 따라 몇 리(里) 정도를 걸어 들어가 우뚝 솟은 한 봉우리를 바라보니,
소나무와 삼목(杉木)이 해를 가리고 있는 곳에 허름한 세 칸 집이 있었다.
벼랑에 기대어 지은 집인데 돌로 쌓은 층계로 대(臺)를 만들었고 맑고 깨끗한 곳에 위치를 정하였다.
옷깃을 거머쥐고 길을 따라 그 위로 오르니 동자(童子)가 맞이해 주며 묻기를,
"어디서 오시오?"
하기에, 두(斗)는 읍(揖)하고서,
"총지(摠持)가 선사(仙師)를 찾아 뵈러 왔습니다."했더니,
동자가 동편의 왼쪽 합문(閤門)을 열어주었다.
노승(老僧)이 계시는데 모습은 마른 나무 같았으며 해진 가사(袈裟)를 입고 나오면서,
"화상(和尙)의 풍신이 우람하여 보통 사람 같지 않은데, 무엇 때문에 오셨나?"하였다.
두(斗)는 꿇어앉으며,
"어리석고 우둔한 저는 아무런 기예(技藝)가 없습니다.
노사(老師)께서 많은 방술(方術)을 알고 계심을 듣고 세상에서 한 가지의 방술이라도 행하고 싶어서
천리 먼 길에 스승을 구하고자 왔습니다.
1년을 지내고야 겨우 찾았습니다.
제자가 되어 배우려 하오니 가르쳐 주소서."하였다.
장로(長老)가,
"산야(山野)에서 죽음이 임박해 있는 사람일 뿐인데 무슨 방술이 있겠나."하자,
두(斗)는 계속 절하며 간절히 애걸했으나 굳게 거절하며 문에서 나오지도 않았다.
두(斗)는 처마 아래서 엎드린 채, 새벽이 되도록 애소(哀訴)하였고 아침이 되어도 그만두지 않았으나,
장로는 아무도 없는 것같이 여기며 부좌(趺坐)하고 선정(禪定)에 들어가 돌아보지도 않은 채 3일을 보냈다.
두(斗)가 갈수록 더 정성을 드리자, 장로는 그때에야 그의 정성을 알아보고는 문을 열어주며 방으로 들어오도록 해주었다.
방이 한 길[丈]밖에 되지 않았고 목침(木枕) 하나가 놓여 있으며 북쪽 벽을 뚫어 여섯 굽이의 감실(龕室)을 만들었다.
자물쇠로 닫아 놓고 열쇠 하나를 감실 기둥에 걸어 놓았고 남쪽 창문 위의 선반에는 책 5~6권이 있을 뿐이었다.
장로가 오래도록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웃으면서,
"그대는 참을성이 많은 사람이네.
투박한 성품이니 다른 방술은 가르쳐 줄 수 없고 오직 죽지 않는 방술은 가르쳐 줄 수 있겠네."했다.
두(斗)가 일어나 절하며,
"그거면 족합니다. 다른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하였다.
장로(長老)가,
"대저 모든 방술(方術)이란 먼저 정신(精神)을 모은 후에 이룰 수 있는 것인데,
더구나 혼(魂)과 정신을 단련하여 신선(神仙)으로 탈바꿈하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있어서야 더 말할 게 있겠나.
정신을 모으는 일은 잠을 자지 않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니, 그대는 먼저 잠을 자지 않도록 하게나."하였다.
두(斗)가 그곳에 도착한 지 4일이 되어도 장로는 음식을 먹지 않고 어린아이처럼 하루에 한 차례 흑두말(黑豆末 검은 콩가루)
한 홉만 먹고도 전혀 배고프고 피로한 기색이 없어, 마음에 별다르게 여기고 있었는데,
그러한 가르침을 받고는 온 정성을 다하여 큰 소원을 이뤄 달라고 빌었다.
첫날 밤에는 앉아서 사경(四更)을 지내자 눈이 저절로 감겼으나 참아내고 새벽까지 보냈으며,
둘째 날에도 정신이 흐리고 고달파 움직일 수도 없었으나 각고의 뜻으로 굳게 참아냈다.
셋째와 넷째 날의 밤에도 피로하고 고달파 앉아 있을 수도 없어, 더러는 머리를 벽에 찧고 부딪히며 겨우 참았다.
일곱째 밤을 지냈더니 툭 트이듯 정신이 밝게 깨쳐 상쾌함을 자각할 수 있었다.
장로(長老)가 기뻐하며,
"그대에게는 정말로 큰 인내력이 있으니 무슨 일인들 이룰 수 없겠나."하고는
이어서 두 가지의 경전(經傳)을 꺼내 주면서,
"위백양(魏伯陽)의 《참동계(參同契)》라는 책이니 수련(修煉)하는 데 가장 좋은 비결(祕訣)이며
선가(仙家)의 가장 높은 교리[上乘]이다.
《황정경(黃庭經)》의 내옥경경(內玉景經)은 기(氣)를 인도하고 오장(五臟)을 단련하는 지요(至要)한 것으로
역시 도가(道家)의 묘체(妙諦)다.
이 두 책을 만 번 정도 읽으면 저절로 오해(悟解)할 수 있으리니, 매일 열 번씩 읽도록 하게나."하였다.
또,
"무릇 학문이 비승(飛昇)하는 사람은 염두(念頭)를 단제(斷除)하고 편안히 앉아서 기신(氣神)을 연정(煉精)해야 하며,
삼보(三寶)를 밀폐시켜 용호(龍虎)가 서로 싸우는 틈에서도 도술(道術)은 이루어지니 그런 게 제일의 첩경이네.
자신이 상지(上智)나 숙품(宿稟 뛰어난 성품)이 아니고서야 빨리 이루어질 수는 없네.
그대의 성품은 박고(朴固)하고 강인(剛忍)하니 높은 교리(敎理)로써 가르쳐주기는 어렵네.
맨 먼저 곡식으로 식사하는 걸 끊어보게나.
그렇게 하는 것이 제일 낮은 곳에서 최상까지 도달하는 방법일세.
무릇 사람의 생명이란 오행(五行)에서 정기(精氣)를 받았기 때문에 오장(五臟)은 각각 오행(五行)이 주관하는 거라네.
위장(胃臟 비위(脾胃))은 토기(土氣)를 받아 사람이 마시거나 먹는 것은 모두 위장으로 들어가네.
비록 곡정(穀精)으로 몸을 건강하게 하고 병이 없게 한다 하더라도
기(氣)가 토(土)에 끌려 끝내는 찌꺼기[魄]가 되어 땅으로 돌아가니 옛날의 곡식을 먹지 않던 사람들이란 모두 그래서였네.
그대는 먼저 곡식 먹지 않는 것을 시험해 보게나."하였다.
그리고는 곧 두(斗)로 하여금 7일 동안 하루에 두 끼니만 먹도록 하였다.
또 7일 동안은 한 끼니는 밥, 한 끼니는 죽을 먹도록 하고, 다시 7일 동안은 한 끼니의 죽을 없애고 밥만 한 끼니 먹도록 하였다.
다시 7일 동안은 밥 대신 죽만 한 끼니 먹도록 하고는 28일이 지나자 밥이건 죽이건 먹지 못하게 하고,
열쇠로 윗 감실(龕室)의 자물쇠를 열어 칠(漆)을 입힌 합(盒) 두 개를 꺼냈다.
하나는 흑두말(黑豆末)이 든 것이고 하나는 황정(黃精 죽대 뿌리임)과 복숭아씨 가루였다.
각각 한 숟가락씩 물에 타서 하루에 두 차례 먹으라 하였다.
두(斗)는 본래 식량(食量)이 커서 허기증을 참을 수 없는 지경이었고,
몸이 수척해지고 피곤해지며 눈이 흐려져 물건을 분별할 수 없었지만 계속 참아냈다.
흑두말을 21일째 복용했던 날, 갑자기 배 안이 채워진 듯하여 먹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다.
그 후에는 곧바로 측백나무 잎과 호마(胡麻 참깨)를 먹도록 해 주자, 온몸에 촘촘히 부스럼이 돋아 참을 수가 없었다.
또 1백 일이 지나자 부스럼 딱지가 떨어지고 새 살이 나와 완전히 전대로 되어졌다.
장로(長老)가 기뻐하며,
"그대는 참으로 훌륭한 성품과 체질을 타고났네. 다만 욕념(慾念)을 없애면 되겠군."하였다.
3년 동안 머무르며 두 가지의 비결(祕訣)을 모두 만 번씩 읽었다.
가슴속이 씻은 듯이 시원해져 신회(神會 신이 통함)가 있는 듯하였다.
장로(長老)가 호흡 자주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고, 또 운기(運氣)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어 기(氣)가 이미 움직여졌다.
마침내 자(子)ㆍ오(午)ㆍ묘(卯)ㆍ유(酉)로서 육자 비결(六子祕訣)을 행하여 호흡도(呼吸道)를 이루자,
얼굴에 점점 살이 찌고 기운은 갈수록 상쾌해지며 온갖 상념이 모두 사라졌다.
6년을 지내서 장로(長老)가,
"그대에게는 도골(道骨)이 있어 법으로는 마땅히 상승(上昇 신선이 되어 승천함)할 만하네.
이 수준에서 내려간다 해도 왕자교(王子喬)ㆍ전갱(錢鏗) 정도는 될 것이네.
욕념(慾念)이 비록 동(動)하더라도 오직 그걸 참아야 하네.
무릇 욕념이란 비록 식색(食色)의 욕념이 아니더라도 일체의 망상(妄想)은 참[眞]에 해로우니
반드시 모든 유(有)를 없애고 고요한 마음으로 단련해야 하네."하였다.
그런 후에 비어 있는 두 번째 집에다 두(斗)를 앉히고는, 오르고 내리며 구르고 넘어지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가르쳐 주는 말마다 자상하고 친절하였다.
두(斗)는 가르쳐 주는 바에 의거하여 태연히 앉아 움직이지 않으며, 눈을 감고 내면으로 장로(長老)를 보았다.
그런 때에는 춥고 더움, 주림과 배부름을 견디어 낼 수 있었다.
하루는 윗 잇몸에서 조그마한 오얏 같은 물건이 단물을 혀 위로 흐르게 하는 것을 깨닫고 장로(長老)에게 알리자,
장로는 천천히 빨아 뱃속으로 삼키라 하고는 기뻐하며,
"서주기(黍柱基)가 세워졌으니 화후(火候)를 움직일 수 있네."하면서
곧바로 벽에 삼재경(三才鏡 천(天)ㆍ지(地)ㆍ인(人)을 비추는 거울)을 걸고 좌우에 칠성검(七星劍) 두 개를 꽂아
절름발이 걸음을 걸으며 주문(呪文)을 외어 마귀를 물리치고 도(道)를 이루게 해달라고 빌었었다.
단련한 지 거의 6개월 만에 단전(丹田)이 가득 채워지고 배꼽 아래서 금빛이 나오고 있었다.
두(斗)는 도(道)가 이루어짐을 기뻐하다 급히 이루고 싶은 마음이 갑자기 솟아남을 억제할 수 없더니
타녀(姹女 신단(神丹)의 물)에 불이 붙어 이환(泥丸)이 타오르자 고함을 지르며 뛰어나왔다.
장로(長老)가 지팡이로 그의 머리를 치면서,
"슬프다, 크게 이루어지지 못하는구려."하고는 급히 두(斗)를 편안히 앉게 하여 기(氣)를 내리게 하였다.
기(氣)는 비록 수그러졌으나 마음이 두근거려 온종일 안정되지 않았다.
장로가 탄식하면서,
"세상에서 드문 사람을 만났기에 가르쳐 주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업(業)의 가로막음을 제거하지 못하여 끝내 엎지러지고 말았으니 그대의 운명(運命)이지, 내 힘으로 어떻게 하겠나."하고는
이어서 소다(蘇茶 회복시키는 차)를 마시게 하였다.
7일 만에야 마음이 편안해지고 기에 뜨거움이 오르지 않았다.
장로(長老)가,
"그대는 비록 신태(神胎)를 이루지는 못했으나 역시 지상(地上)의 신선(神仙)은 될 수 있을 것이며,
조금만 더 수양한다면 8백 세의 수(壽)를 누릴 수 있을 거네.
그대의 운명(運命)에는 당연히 아들을 두도록 되어 있으나 정자(精子)가 나오는 길이 이미 막혔으니
복약(服藥)하여 트이도록 하게나."하면서 붉은 오동 열매와 같은 환약(丸藥) 두 알을 꺼내 주어 그걸 삼켰다.
두(斗)가 청(請)하기를,
"우둔한 사람이 가르침대로 하지 못했음은 나 자신의 운명이 기박함이니 무엇을 한스러워하겠습니까.
그러나 제자(弟子)가 스승님을 모신 지가 이제 7년입니다만 아직도 스승님의 출처(出處)도 모르고 있습니다.
제발 자세하게 가르쳐 주셔서 뒷날에라도 사모하는 정성이 위안받을 수 있게 해주심이 어떨까요?"했다.
장로(長老)가 웃으면서,
"다른 사람이 묻는다면 결코 말할 수 없지만 그대는 참아낼 수 있는 사람이었으므로 자세히 말해 주겠네.
나는 상락(上洛 상주(尙州)의 옛 이름)의 큰 성씨(姓氏)의 후손으로 태사(太師) 권행(權幸)의 증손자였네.
송(宋) 나라 희령(熙寧 신종(神宗)의 연호) 2년(고려 문종 23, 1069)에 태어났네.
열네 살에 나병[風癩]에 걸려 부모가 거두어 주지를 않고 숲속에 버렸네.
밤에 호랑이가 안아다가 석실(石室)에 놓아 주고는 눈에 불을 켜고 두 마리의 새끼에게 젖을 먹이며
그 곁에 있는 나를 끝내 해치려 하지 않더군.
통증이 한창 극도에 달하여 호랑이의 어금니에 물려 속히 죽지 못하는 것만이 한스럽더군.
초라(草羅)라는 풀이 벼랑의 구멍에서 자라고 있었는데, 잎이 넓고 뿌리가 크더군.
시험삼아 씻어서 먹었더니 뱃속이 조금 채워졌네.
그걸 먹으며 몇 개월이 지나자 부스럼이 줄어지고 점점 혼자서 일어섰었네.
그리하여 많이 캐다가 끼니마다 그걸 먹었었네.
산 중턱의 것을 거의 전부를 캐 먹으며 몇백 일을 지내자 부스럼이 다 벗겨지고 온몸에 푸른 털이 돋아나기에 기뻐하며 실컷 먹었더니 또 1백 일이 지나자 몸이 저절로 움직여져 산의 정상에 올라가지더군.
이미 나병은 나았으나 옛날의 마을을 판별하지 못하여 길에 나와서도 갈 곳을 몰라 서성거리고 있었네.
뜻밖에 중 한 사람이 산봉우리 아래로 지나가고 있어 그곳으로 찾아가 길을 막으며 묻기를 '이곳은 어떤 산입니까?' 했더니
중이 '이건 태백산(太白山)이요, 지역은 진주부(眞珠府)의 소속입니다.' 하더군.
그래서 근방에 절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중은 '서쪽 봉우리에 절이 있으나 길이 단절되어 쉽게 올라갈 수 없을 것이오.' 하였네.
나는 곧 날아서 그 암자에 이르렀더니 선방(禪房)은 낮에도 문이 닫히고 사람이라곤 없더군.
손으로 곁 채의 문을 열고 들어가 가운데에 있는 집으로 가보았더니,
늙고 병든 중 한 사람이 굵은 베옷을 두르고 탁자에 기대어 숨차하며 거의 죽어가는 모습이었네.
눈을 뜨고 바라보면서 '간밤의 꿈에 노인이 말하기를 「우리 스승님 비결서(祕訣書)를 전할 사람이 지금 오고 있다.」고 하더니,
그대의 얼굴을 보니 진정 그 사람이군.' 하면서, 일어나 보자기를 풀어 한 뭉치의 책을 꺼내서 주었네.
그리고는 '이걸 만 번 읽으면 그 의미를 저절로 알 것이니 노력하고 게으름 피우지 말게나.' 하였네.
내가 그건 누가 전해준 것이냐고 물었더니 '신라(新羅) 의상대사(義湘大師)께서 중국에 들어가 정양진인(正陽眞人)을 만났더니
이 책을 주셨고 임종(臨終)에 나에게 부탁하시며 2백 년 뒤에는 반드시 전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고 하였는데,
그대가 그분의 예언에 합치되는 사람이니 받아가지고 힘쓰게나, 나는 전해줄 사람을 만났으니 이제는 죽으려네.' 하면서
부좌(趺坐)하고 조용히 입적(入寂)하였었네.
나는 곧바로 그분을 다비(茶毗)하여 감색(紺色)의 사리(舍利) 1백 알맹이를 얻어 내어 탑(塔) 속에 매장하였네.
책 뭉치를 풀고 살펴보니 《황제음부경(黃帝陰符經)》및《금벽용호경(金碧龍虎經)》ㆍ《참동계(參同契)》ㆍ
《황정내외경(黃庭內外經)》ㆍ《최공입약경(崔公入藥經)》ㆍ《태식심인(胎息心印》ㆍ《통고정관(洞古定觀)》ㆍ
《대통청정(大通淸淨)》등의 경전(經傳)이었네.
그 암자에 들어가 독거(獨居)하면서 수련(修煉)을 하였네.
마귀(魔鬼)들이 만방에서 와서 둘러쌌으나 듣지도 않고 보지도 않으니 사라져 갔네.
온갖 애를 쓰며 11년 만에야 신태(神胎)를 이루었네.
법으로는 당연히 해탈해서 떠났겠지만
상제(上帝)께서 이곳에 머물러서 동국(東國) 삼도(三道)의 모든 신(神)을 거느리라고 명령하셨네.
그래서 여기에 머문 지 5백여 년이었네.
기한이 차면 당연히 상승(上昇)할 걸세.
내가 수십 명을 만나 보았지만 더러는 기(氣)가 지나치게 예민(銳敏)하고, 더러는 너무 둔하기도 하고, 더러는 인내력이 적거나,
더러는 인연이 옅고, 더러는 욕념(慾念)이 많아 모두 성공할 수가 없었네.
만약 성도(成道)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마땅히 내 임무를 맡기고 옥경(玉京)으로 돌아갔으련만,
수백 년을 헛되이 보내고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으니 이건 나의 티끌 세상과의 인연이 다하지 못해서 그런 걸 거야."하였다.
두(斗)는 장로와 함께 오랫동안 같은 방에서 잠을 자곤 했지만 그가 숨기는 것이 있어 늘 이상하게 여겼다.
그의 배꼽 아래 한 치[寸] 정도의 부분을 가리고 남이 보지 못하도록 하는 점이었다.
그 까닭을 물으며 그걸 보고 싶다고 했더니, 장로(長老)는 웃으면서,
"그걸 왜 쉽게 보여 주랴. 보여 주면 그대는 깜짝 놀라 까무러칠 것인데."하였다.
두(斗)는,
"왜 놀라겠습니까, 한 번 보는 것이 원입니다."하자,
장로(長老)가 싸맨 것을 풀어 놓으니 반짝이는 금빛 1백여 줄기가 천장까지 쏘아댔다.
바로 볼 수도 없어 의자 밑으로 숨으니 장로(長老)는 다시 그걸 싸매서 전과 같이 하였다.
두(斗)는 또,
"스승님은 벌써부터 모든 신(神)들을 다스린다면서 왜 한 사람도 찾아와 받드는 사람이 없습니까?"하니,
장로(長老)는,
"나는 정신을 날려서 그들의 조화를 받곤 했었네."하였다.
또 여러 귀신 구경하기를 청했더니,
"내년 정월 보름날을 기다려야 하네."하였다.
그날이 되자 장로(長老)는 감실(龕室) 속에서 옷 상자를 꺼내서 여덟 가지 채색의 방산건(方山巾)을 쓰고,
일곱 개의 별ㆍ해ㆍ달의 수를 놓은 도포(道袍)를 입고, 둥근 청옥(靑玉)에 사자를 그린 띠[帶]를 두르고
다섯 가지 꽃으로 무늬진 신을 신고, 손에는 여덟 모진 옥(玉)으로 만든 여의주(如意珠)를 붙잡고 섬돌대 위에 부좌(趺坐)하였다.
두(斗)는 서쪽으로 향해서 모셨고, 동자(童子)는 모퉁이에 서 있었다.
갑자기 대(臺) 위의 두 잣나무에 각각 울긋불긋한 꽃등불이 걸리더니
조금 지나자 산골에 가득한 수천 수만의 나무에 모두 꽃등불이 걸려 붉은 불꽃이 공간을 가득 채워 대낮 같았다.
기이하고 괴상한 모습의 짐승들이 나타나는데, 더러는 곰이나 호랑이 같기도 하고, 어떤 것은 사자나 코끼리 같았다.
어떤 것은 표범인데 다리가 둘이고, 어떤 것은 규룡(虯龍)의 모양에 날개가 있고, 어떤 것은 용이면서 뿔이 없었다.
어떤 것은 용의 몸에 말의 머리가 달렸고 어떤 것은 뿔이 세 개인데 사람처럼 서서 빨리 달리고,
어떤 것은 사람 얼굴처럼 생겨 눈동자가 세 개나 달린 것들로 수백 마리나 되었다.
또 코끼리ㆍ노루ㆍ사슴ㆍ돼지의 모양을 지닌 것으로 노오란 눈에 하얀 이빨, 붉은 털 하얀 발굽에 뛰고 할퀴고 하는 것들이
1천여 마리 정도나 되었는데 그를 모두가 열지어 좌우에 모시고 섰었다.
또 금동(金童)과 옥녀(玉女)가 지휘 깃발을 들고 수백 명이 서 있었다.
기치 창검을 든 군대도 1천여 명으로 삥 둘러 서 있었다.
대(臺) 위에는 온갖 향기가 욱욱하고 패옥[璜珮] 부딪치는 소리들이 쟁쟁거렸다.
바로 이어서 푸른 장삼을 입고 상아 홀(笏)을 들고,
옥[水蒼]을 차고 고깔을 쓴 두 사람이 섬돌 아래서 국궁(鞠躬)하고는 창(唱)하기를,
"동방(東方)의 극호림(極好林)ㆍ광하(廣霞)ㆍ홍영산(紅暎山) 등 삼대신군(三大神君)이 뵙습니다."하였다.
그들 삼대신(三大神)은 모두 빨간 금관을 쓰고 붉은 도포에 옥띠를 띠고, 홀을 단정히 잡고, 구름이 그려진 신을 신고,
칼과 노리개를 찼으며 키가 헌칠했다.
얼굴은 희맑고 길었으며 미목(眉目)이 밝고 수려하였다.
장로(長老)가 일어서서 공수(拱手)하니 삼대신은 함께 두 번 읍(揖)하고는 물러갔다.
또 창(唱)하기를,
"봉호(蓬壺)ㆍ방장(方丈)ㆍ도교(圖嶠)ㆍ조주(祖洲)ㆍ영해(瀛海) 등 오주(五洲)의 진관(眞官)이 뵙습니다."하였다.
다섯 신(神)은 각각 지방색을 보이는 도포를 입고 관(冠)이나 패물은 앞의 것과 같았고, 모두 헌걸차고 수려했다.
장로(長老)가 일어서니 다섯 신(神)들이 모두 두 번 절하고 물러갔다.
또 창(唱)하기를,
"동해ㆍ남해ㆍ서해의 장리(長離)ㆍ광야(廣野)ㆍ옥초(沃焦)ㆍ현롱(玄隴)ㆍ지폐(地肺)ㆍ총진(摠眞)ㆍ여궤(女几)ㆍ
동화(東華)ㆍ선원(仙源)ㆍ임소(琳宵) 등 십도(十島)의 여관(女官)들이 뵙습니다."하자,
선녀(仙女) 10인이 모두 꽃으로 수놓은 금말건(金襪巾)을 쓰고 붉은 구슬로 된 보요(步搖)를 꽂아,
구슬과 비취옥이 영롱하게 얼굴에 반사하여 똑바로 바라볼 수도 없었다.
금봉(金鳳)의 무늬를 놓은 하얀 저고리에 파란 비단으로 만든 무릎 아래까지 닿는 긴 치마를 드리웠다.
태을영부(太乙靈符)를 차서 번쩍번쩍 번갯불이 나고, 푸르고 붉은 모가 난 낮은 신을 신었다.
헌칠하고 긴 허리로 남자들이 하던 절을 올리니 장로(長老)는 일어나지 않고 앉아서 절을 받자 여관(女官)들이 물러갔다.
또 창(唱)하기를,
"천인(天印)ㆍ자개(紫蓋)ㆍ금마(金馬)ㆍ단릉(丹陵)ㆍ천량(天梁)ㆍ남루(南壘)ㆍ목주(穆洲) 등
칠도(七道)의 사명신장(司命神將)이 뵙습니다."하니
붉은 말액(抹額 건(巾)의 일종)에 깃을 꽂고 무인(武人)들이 입는 고의(袴衣)와 꽃으로 수놓은 앞가림 옷을 입고,
팔에는 활집과 화살통을 비스듬히 걸었고, 손에는 붉은 창을 붙잡고 있었다.
모두 사자의 형태에 범의 모습으로 붉은 머리털을 세우고 금빛 눈동자에 용의 수염이 달렸었다.
읍(揖)만 하고 절은 하지 않고 물러갔다.
또 창(唱)하기를,
"단산(丹山)ㆍ현림(玄林)ㆍ창구(蒼丘)ㆍ소천(素泉)ㆍ자야(赭野) 등 다섯신의 거느림을 받는 산림(山林)ㆍ수택(藪澤)ㆍ
영독(嶺瀆)ㆍ성황(城隍) 등의 모든 귀백(鬼伯)ㆍ귀모(鬼母)는 함께 뵙습니다."하였다.
5대 신장들의 모습은 앞의 7도 신장들의 모습과 같았고, 각각 한 부대(部隊)가 1백여 명이나 되는 영관(靈官)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어떤 것은 키가 작고 누추했으며 어떤 것은 키가 컸으며,
어떤 것은 말쑥하고 어떤 것은 여섯 개의 팔과 네 개의 눈을 지닌 자들이었다.
여자 중에는 더러 늙은 추녀이고 더러는 곱고 젊었으나 그들의 옷은 모두 지방색을 따라 입었는데
열지어 서서 네 번 절하고 물러나와 다섯 대열이 되었다.
장로(長老)가 소동(小童)에게 명령하여 붉은 깃발을 들고 북쪽에서 동쪽으로 향해 가서 남쪽으로 돌아 서쪽에 이르러
중대(中隊)의 앞에 서게 하니,
"여러 신령(神靈)들이 모두 모였으나 오직 위주(魏州)의 조 부인(趙夫人)만 오지 않았습니다."고 아뢰었다.
소천신(素泉神)이 나와서 꿇어 앉으며 말하기를,
"그는 귀양살이 가서 이제는 사람으로 강등되었고 그를 대신할 사람이 오지 못했습니다."하였다.
장로(長老)는 광하(廣霞) 등 세 진인(眞人)을 불러서 앞에 세워 놓고 말하기를,
"경(卿)들은 세 방면(方面)을 나누어 다스리면서 상제님의 어진 덕(德)을 실천하여
백성들이 경들의 은택(恩澤)을 입은 지 오래였다.
요즈음 액운이 다가오고 있어 만 백성이 재앙(災殃)에 걸려 들었는데 이에 대하여 구출할 방책을 강구하였는가?"
하고 물었다.
세 사람은 모두 탄식을 거듭하며,
"정말로 유시(諭示)하신 바와 같습니다.
어제 봉래산(蓬萊山)의 치수대감(治水大監)이 자하원군(紫霞元君)이 계신 곳으로부터 와서 홍영산(紅映山)에 들러 말하기를
'여러 진인(眞人)들이 구광전(九光殿) 위에 있으며 상제(上帝)를 모시는데,
삼도제군(三島帝君)이 있어 말하기를 「염부제(閻浮提)에 살고 있는 삼한(三韓)의 백성들이 지나치게 교사스럽고 간사하여
속임수를 잘 쓰고 복(福)을 아끼지 않으며,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고, 불효(不孝)ㆍ불충(不忠)하고, 귀신을 모독하였다.
그래서 구림동(句林洞)에 사는 이면(狸面)의 대마(大魔)를 빌려다가 적토(赤土)의 군대를 모두 모아 가서 소탕하려 한다.
그래서 연속된 전쟁 7년째에 나라는 다행히 망하진 않을지라도 3방의 백성들을 10에 5~6을 살육하여서 경계하려 한다.」고 했다.' 하였습니다.
신하인 저희들도 그 말을 듣고 역시 모두 두려워서 마음이 떨리더이다.
그러나 큰 운수의 소관인데 어찌 감히 힘으로 해결되겠습니까?"한다.
장로(長老)도 역시 탄식하기를 그만두지 못했다.
잠깐 사이에 중대(中隊)로부터 대포 한 알을 쏘는 소리가 나자 네 개의 대열이 모두 호응하여 북과 쇠를 울려서 도왔다.
그리하여 나무 위의 등불이 하나하나 땅에 떨어지고 아득히 깊은 골짜기에 많은 구름이 내리 깔렸다.
장로는 방으로 들어와 관(冠)과 옷을 벗고 등불을 밝히고 방 가운데 앉았다.
두(斗)는 깜짝 놀라서 오랫동안 정신을 잃고 있었다.
다음날 두(斗)를 불러들여 말하기를,
"그대는 이미 인연이 엷어서 여기에 오래 남아 있기에는 합당치 못하니 하산(下山)하여 머리를 기르고 황정(黃精)을 먹으며
북두칠성에 절하도록 하게나.
음탕한 사람이나 도둑도 죽이지 말고 매운 채소ㆍ소ㆍ개고기 등을 먹지 말며,
타인을 음해(陰害)하지 않는다면 이는 곧 땅 위의 신선이네.
행하고 수양하는 일을 쉬지 않는다면 또한 승선(昇仙)도 할 수 있을 거네.
《황정경(黃庭經)》과《참동계(參同契)》는 도가(道家)의 높은 교리이니 외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게.
《도인경(度人經)》은 노자(老子)의 도(道)를 전하는 글이고,
《옥추경(玉樞經)》은 바로 뇌부(雷府)의 여러 신들을 존숭하는 글이니 항상 지니고 다니면 귀신들이 두려워하고 흠앙할 것이네. 이 밖에 마음을 닦는 요체는 남을 속이지 않는 것이 최상이 되는 것이네.
일반 사람이 한 번 선과 악을 생각하여도 귀신들이 좌우에 벌려 있어 모두를 먼저 알아내고,
상제(上帝)께서 강림(降臨)하심이 무척 가까워 하나의 일을 하면 곧바로 그걸 두궁(斗宮)에 기록하여 억제하고
응답해 주는 효과가 그림자나 메아리보다 더 빠른 거네.
이치에 어두운 사람이 이를 업신여기고 꽉 막힌 하늘이니 두려울 게 없다고 하지만,
그들이 어떻게 창창(蒼蒼)한 하늘 위에 참다운 주재자(主宰者)가 처리하는 자루[柄]를 조종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겠는가.
자네야 참아내는 마음이 강하긴 하지만 욕념(慾念)이 제거되지 않았으니 혹시라도 삼가지 않는다면
한 차례 이단(異端)에 떨어지는 경우 끝없이 오랜 괴로움을 당할 걸세. 삼감이 없어서야 되겠나."하였다.
두(斗)는 눈물을 흘리며 그의 가르침을 받고 곧 하직하여 하산(下山)하였다.
돌아보니 사람이 살았던 곳이라고는 온데간데 없어져 버렸다.
이곳저곳을 헤매다가 임피(臨陂)에 이르고 보니,
옛날의 집이라고는 터도 남지 않았고 전장(田莊)은 모두 2~4차례씩 주인이 바뀌었다.
또 서울로 가보아도 옛날의 집은 터만 남아 주춧돌만이 묵은 풀 속에 종횡으로 놓여 있었다.
눈물을 삼키며 돌아오고 말았다.
늘 생각하던 착실한 늙은 종이 있었다.
그 종은 해남(海南)에 살며 충분한 전택(田宅)도 있다기에 찾아가 몸을 의탁하였다.
처음에는 알아보지도 못하더니 얼마 후에 자기 주인임을 알아차리고는 서로 붙잡고 통곡하며 울어댔다.
그가 살던 곳을 비워 주며 거처하도록 하였다.
상민(常民)의 딸을 아내로 맞아서 아들 딸 하나씩을 낳았다.
선생은 비록 다시 가업(家業)을 세웠으나 스승의 교훈을 가슴에 새기고 끝까지 조금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해남에서 떠나 용담(龍潭)의 지역에 은거하였다.
깊은 산 골짜기를 골라서 살았으니, 치상산(雉裳山)에서 가까운 곳이어서 다시 선사(仙師) 만나기를 바라던 계획이었으리라.
수십 년 동안 황정(黃精)과 솔잎을 채취하여 식사로 했으니
몸이 날이 갈수록 더욱 건강해져 수염도 희지 않고 걸음걸이도 나는 듯하였다.
만력(萬曆 명 신종(明神宗)의 연호) 무신년(선조 41, 1608) 가을 허균(許筠)이 공주(公州)에서 파직을 당하고
부안(扶安)에서 살았다.
선생이 고부(古阜)로부터 도보로 나의 여관방을 찾아 주셨다.
그리하여 네 가지 경(經)의 오묘한 뜻을 나에게 전해 주시고,
또 그분이 선사(仙師) 만났던 전말(顚末)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를 위에서와 같이 말해 주었다.
선생의 나이는 그해에 83세였으나 얼굴은 마치 46~47세 된 사람과 같았다.
시력(視力)이나 청력(聽力)이 조금도 쇠약하지 않았고, 톡 쏘는 눈동자나 검은 머리털이 의젓하여 여윈 학(鶴)과 같았다.
어떤 때는 며칠을 먹지도 않고 잠을 자지도 않으며 《참동계(參同契)》나 《황정경(黃庭經)》을 쉬지 않고 외곤 하였다.
간혹,
"몰래 해로운 일을 하지 말며, 귀신이 없다고 말하지 말게.
착한 일을 행하고 덕을 쌓으며 욕심을 끊고 마음을 단련한다면 상선(上仙)의 극치를 세울 수 있으며,
난새[鸞]와 학(鶴)이 며칠 사이에 내려와 맞아줄 것이네."하였다.
나는 선생의 음식ㆍ거처가 보통 사람과 같음을 보고서 이상하게 여겼더니, 선생은,
"내가 처음에는 비승(飛昇)하리라 여겼는데 빨리 이루고 싶어하다가 이루지를 못하고 말았네.
우리 스승님께서 이미 지상의 신선은 되었으니 부지런히 수련하면 8백 세의 나이는 기약할 수 있다고 허락하셨네.
요즘 산중(山中)이 너무 한가하고 적막하여 속세로 내려왔으나 아는 사람 한 사람 없을뿐더러,
가는 곳마다 젊은이들이 나의 늙고 누추함을 멸시하여 인간의 재미라고는 전혀 없네.
사람이 오래도록 보고 싶어하는 것이란 본래 즐거운 일인데, 쓸쓸하고 즐거움이라고는 없으니 내가 왜 오래 살려고 하겠는가?
이 때문에 속세의 음식을 금하지 않고 아들을 안고 손자를 재롱부리게 하며 여생을 보내다가 승화(乘化)하여 깨끗이 돌아가
하늘이 주신 바에 순종하려네.
그대야말로 선재(仙才)와 도골(道骨) 있으니 힘써 행하고 쉬지 않는다면 진선(眞仙)이 되기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 것이네.
우리 스승께서 일찍이 나에게 인내력이 있다고 하셨는데 참아 내지를 못하고 이 지경이 되었네.
인(忍)이라는 글자 하나는 선가(仙家)의 오묘한 비결(祕訣)이니 그대 또한 삼가 지니고 놓치지 말게나."하였다.
얼마 동안 머무시다가 붙잡는 손을 뿌리치고 떠나갔으니, 사람들은 그가 용담(龍潭)으로 다시 갔다고들 하였다.
허균(許筠)은 논한다.
전해오는 말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불교(佛敎)는 숭상했어도 도교(道敎)는 숭상하지 않았다.'라는 말이 있다.
신라 시대부터 조선(朝鮮)에 이르기까지 몇천 년이 지났으나 득도(得道)하여 신선되어 간 사람이 있음을 듣지 못했다.
그렇다면 전해오는 말이 과연 징험이 되는 말이랴.
그러나 내가 보았던 남궁 선생(南宮先生)으로 말한다면 이상할 수밖에 없다.
선생이 스승으로 여겼던 분은 과연 어떤 사람이고, 상(相) 보는 사람에게 알아냈다는 것도 결코 확실히 믿을 만한 것은 못 되며,
말했던 것들도 역시 모두 그렇지만은 않으리라.
요컨대 그림자나 메아리 같은 실체 없는 소리이리라.
다만 선생의 나이와 용모로 본다면 참으로 득도(得道)할 수 있었던 사람이 아닐 것인지.
어찌하여 80의 나이이고도 그처럼 건강했으랴.
이건 또 도교 숭상하는 일이 실제로 없었다고 결정내릴 수도 없으리라.
아아, 그거야말로 기이하도다.
우리나라가 궁벽한 바다 밖 멀리에 있어 뛰어난 은사(隱士)로 선문자(羨門子)나 안기생(安期生)과 같은 분들이 드물었으나
암석(巖石)의 사이에 그러한 이인(異人)이 있어 여러 천백 년 만에 남궁 선생으로 하여금 만날 수 있게 하였으니
그 누가 '좁은 지역이니 그러한 인물이 없다.'라고 말하랴.
도(道)에 통달하면 신선이고 도에 몽매하면 범인이다.
전해진다는 말이 이식(耳食)과 무엇이 다르리오.
선생으로 하여금 빨리 이루려던 욕망이 없게 하여 끝내 단련하던 효과를 거둘 수 있게만 했다면
저들 선문자ㆍ안기생과 어깨를 맞대고 나란히 맞서기에 무슨 어려움이 있었으랴.
다만 그분이 찾아 내지 못하여 다 이루어진 공(功)을 실패하고 말았으니 오호, 애석하도다.
[주D-001]오독(五毒) : 참혹한 형벌을 가하는 다섯 가지의 형구(刑具).
즉 항양(桁楊)・하교(荷校)・질곡(桎梏)・낭당(鋃鐺)・고략(栲掠)을 말한다.
[주D-002]위백양(魏伯陽) : 한 나라의 오인(吳人). 도술을 익혀 산에 들어가 성취하였음.
도가(道家)의 중심 이론인《참동계》와《오행상류(五行相類)》라는 저서를 남김.
[주D-003]《황정경(黃庭經)》 : 도경의 이름. 《황정내경경(黃庭內景經)》・《황정외경경(黃庭外景經)》・
《황정둔갑연신경(黃庭遁甲緣身經)》의 세 종류가 있음. 이 책의 저자(著者)에 대해서는 자세하지 않다.
[주D-004]삼보(三寶) : 도가에서 말하는 귀・입・눈.
[주D-005]염부제(閻浮提) : 남염부제(南閻浮提)와 같은 말로 불전(佛典)에서 말하는 사대부주(四大部洲)의 하나.
[주D-006]뇌부(雷府) : 선가(仙家)에서 말하는 우레를 맡은 부(府).
[주D-007]이식(耳食) : 귀로 듣기만 하여 그 전체는 따지지 않고 옳다고 믿어버리는 것.
자료출처 : 성소부부고 제8권 문부 5 - 전(傳)
여기 소개한 신선계보는 현재 공부 중으로 직접 인터넷에서 수집한 것입니다.
대세와 구칠이 우리나라(고대) 신선 계보에 올라 있는데 삼국사기나 화랑세기 해동이적 등에서 소개한 바로는
이게 뭐 신선인가 할 정도로 내용이 아주 빈약한데 김부식이 그 빈약한 내용을 기록했다는 것은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역사 기록을 하면서 그것도 정부에서 편찬하는 것인데 씰데없이 별것도 아닌 이야기를
김태식의 말처럼 뚱딴지를 그려 놓았으니 궁금 도는 수상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럼 구칠과 대세가 나뭇잎을 타고 중국으로 갈 수 있다면 또 어떻습니까
이런 사람은 신선의 경지에 이르렀을 것인데 또 스승을 찾아 나뭇잎을 타고 중국으로 가겠습니까
나뭇잎을 타고 강을 건너는 것도 아니고 바다를 건너 갓습니다.
그들이 간 곳은 알지 못한다고 했으니 아마도 이들이 일본으로 갔는지 대마도로 갔는지 오끼나와로 갔는지
오나라 월나라로 갔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고 다만 흔적도 없이 사라 졌다는 것입니다.
김태식의 말마다나 화랑도로서 올라갈때까지 올라가 더 올라갈 곳이 없는 상황에서 벼슬의 진급 같은 것은 꿈도 꿀 수 없고
래서 권력 투쟁에 밀려 났을 것입니다.
최치원도 6두품계라는 신분제에 갇혀 꿈을 잃어버리고 가야산으로 들어가 잠적했지요
바로 신라 사회에서는 쿠데타 같은 것을 꿈꾸는 어리석은 유교론자들은 없었다고 봅니다.
꿈이 사라지면 홀연히 조용히 떠나는 것입니다.
동이의 나라 은나라 이후 주나라 그리고 공자의 나라 전국시대 등등을 보면 요 순 우 빼고 전부 개판입니다.
이것이 유교를 만들어낸 나라입니다.
쿠데타를 일삼고 왕이 되기 위해 수백명을 죽이고
그런 엄청난 살상의 날이 끊어지지 않았지요
적어도 신라는 그런 패륜은 없었다 이겁니다.
더이상 올라갈 신분 상승의 기회가 없어지면 쿠데타 같은 것은 없고 그냥 떠나는 것입니다.
씨알을 바꿔보려는 시도도 없습니다.
내가 잘 모르는 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 북방계 민족은 아주 민주적이고 공평하게 왕위를 계승했습니다.
사위에게도 왕위를 물려주고 동생 형제 상속도 하고 그리고 가장 나라를 잘 이끌 수 있는 실질적 리더에게
왕위를 계승하는 그런 민족이엇습니다.
현대적으로 보면 좀 순진했던 것이고
아주 순수한 사람들이엇습니다.
좀 배웠다는 중국 놈들은 왕위 쟁탈전에 혈안이 되어 서로 뺏고 죽이고 하다가 나라꼴이 50년 100년 길어도 200년이면 끝나잖아요
우리나라 보세요 적어도 600년이고 조선이 그래 가장 못합니다.
보통 7~800년 신라는 천년 아닙니까
저는 이런 일들의 원동력이 바로 쌈정신이라고 봅니다.
대세와 구칠 또한 최치원처럼 조용히 속세를 떠난 것입니다.
그래서 삼국사기에는 기록이 빈약하지만 계보를 아는 사람들은 구전이라도 대세와 구칠에 대해 전했을 것이고
그들은 그 두사람의 도력을 알고 전파했다고 봅니다.
대세와 구칠의 선통력이 나뭇잎을 타고 바다를 건너는데 서로 경쟁하듯 했다는 것만 보아도
이 두사람은 보통 인물이 아닌 것입니다.
이를 경공술이라하는데 경공술이란 물위를 날르뜻이 아주 몸을 가볍게 해서 건너가는 것입니다.
이런 경공술이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순은 없지만 실제로 가능하다는 것을 믿었던 사람중에 송재철관장이 있었습니다.
그는 1980년대에 티비 출연에서 경공술을 익히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종이 한장을 타고 강을 건너가는 것이 목표라고까지 말했습니다.
또 우스개소리로 불가에서 전해지는 말도 있습니다.
어느 스님이 천수경을 그렇게 줄줄 잘 외우고 경지에 올라
어느날 천수경을 외우면서 나뭇잎을 타고 강을 건너갈 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수리수리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하면서 주주ㅡㄹ 외우면 몸이 솜털처럼 가벼워지고 강을 건너간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수행을 게을리 했는지 강을 건너다가 천수경 한구절을 까먹었다고 합니다.
그 길로 물에 빠졌다고 합니다.
우스개 소리이지만
이는 법성스님의 소리수리명상을 수련하면 그 진리에 가까이 갈 수 잇습니다.
소리를 잘 닦으면 음파가 중력을 거스를수 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강조한 것입니다.
즉 음파는 진동이고 주문이 바로 그런 것과 연관성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마도 대세와 구칠 또한 쌈도를 닦으면서 그런 경지까지 올랐을 ㅡ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여기서 쌈도라고 한 것은 아직 화랑이라는 말은 있지만 신선이란는 용어가 탄생하지 않았던 때이며 중국에서는 신선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을 때입니다.
화랑 이전에 삼랑 선랑 선인 풍인 종인 전인 등등 여러 도통자가 있었는데 중국은 이를 다 뭉뚱거려 신선이라 하던 때입니ㅏㄷ.
신라 때 중국으로 건너가 장도릉의 문하에서 도를 닦고 신선이 된 신라인이 있는데 이들은 신선이고 삼랑 화랑의 도와 비슷한 길을 간 사람들인데 이들이 신라에 돌아왔다고 유학파 신선 계보에 넣었더라고요 해동이적 해동전도록 등에 보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안능쉬여
신선 공부가 쉽지 않습니다.
그냥 남이 연구해 놓은거 베끼면 벌써 다 썼을 것입니다.
계보는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아무도 말하지 않았던 사실을 발굴해야 아무도 태클을 걸지 못합니다.
그런 글을 쓰고 잇습니다.
끝으로
중국의 도교는 종교이고 노자를 팔아 먹는 것입니다.
도교가 선도는 아닙니다.
선과 도는 다른 것이며
어떤이는 道를 仙보다 높고 오묘한 경지로 보는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러면 삼신산이 왜 우리나라에 있었겠습니까 그히고 도를 추구하는 수많은 왕족과 선사들이 어찌 삼신산을 찾아 왔겠습니까
묘도 군도에 사문도가 있습니다.
사문도가 사먼도 입니다.
즉 쌈선녀의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 옆에 견우도가 있습니다.
이곳은 그 옛날 삼신산의 한 구역이었던 것이고 봉래에 해당합니다.
구산 선생니이 밝힌 이것 하나 만으로도 고조선본토기는 명작 중에 명작입니다.
아시잖아요 仙의 어원이 사마 쌈 이라는 것을
끝
그래서 도교라고 한 것의 道는 그 출처가 태양이 뜨는 곳을 의미합니다.
먹여주고 살리주는 땅 말입니다.
뭐 심오한 것
개뿔입니다.
잘 먹고 잘 살리는 것이 道입니다.
한마디로
KA
이고 여기에 인칭을 붙이면
Khan
이 됩니다.
여기에다가 구체적으로 어떤 행위를 붙이면
까사칸 이됩니다.
居西干
까사칸은 환인의 옛 음입니다.
KA는 처치워드가 밝힌 태양이고
에집트에서는 조상의 영혼
발해 대조영은 단기고사에서 기자를 태양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Kai-Za
기자가 태양의 아들이며
은나라 망명 기자가 아닌 번조선의 기자를 발합니다.
동명이인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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