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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무량하오
김영란
그녀를 다시 만나기 위하여 환생을 선택했던 태환은 서울 장안의 알아주는 칼잽이로 있던 그녀가 긴칼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는 소문을 접한다
자신의 서울 작업실 한구석에 놓아둔 접이식 작은 의자 한 개 달랑 팔에 걸고, 그녀를 만나러 길을 나서는 태환은 그녀가 혼자서 꿋꿋이 둥근 나무의자에 앉아 오래된 보현검 두 자루를 지켜보는 모습을 발견한다.
전생에 그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혜안을 간직한 그녀의 깊은 눈동자를 다시 한번 더 바라볼 수만 있다면 신비로운 눈동자에 간직하던 의미를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삶과 죽음의 그 찰나적인 순간 태환은 이승을 등졌고, 전생에서 현생으로 이어지는 저승길 길목에서 두 번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을 차마 떠나지 못했다.
전생과 현생을 연이어 살아가는 태환에게 주어지는 남다른 특수성은 천부적으로 타고난 손재주와 천재적인 환쟁이 기질을 부여했고 그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작업실 안으로 틀어박히는 일, 그 고독한 시간들을 사랑했다. 일회적인 삶 속에 마냥 내던질 수만은 없는 태환의 전생을 태환 자신은 지극한 마음으로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녀를 그의 가슴 안으로 두 번 받아들이는 심정으로 작업실에서 늘 혼자서 작업을 하곤 하던 그가 그녀를 또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태환은 알았다.
그녀가 가지는 현생의 아픔 같은 것들이 어떤 것인가를 … 가능한 태환은 그녀에게 모든 것을 해주고 싶었다.
전생에 못다한 사랑도, 그 이별을 훌쩍 뛰어넘어 사랑으로 빚진 일도 없이 빛나는 하나의 좋은 의미의 인연이 되고 싶었다.
청춘남녀가 인연을 맺고 산다는 일은 그런 것일까?
좋은 사람과의 만남, 그 자체는 인생을 살아가는데 커다란 선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겨울 아침의 이미지를 간직한 태환과 언제라도 그에게 행복의 파랑새 깃털이라도 뽑아줄 것만 같았던 그녀!
두 사람은 북쪽 묘향산을 마다하고 남쪽 끝 태평양 바닷가로 길을 떠났다. 그녀가 만들고 싶었던 세상에서 가장 긴 칼을 만드는 일을 위하여 그리고 두 사람의 작은 여행을 위하여 함께하는 시간들은 소중하였다.
남쪽의 묘향산 통도사 기슭에 앉아 태환은 그녀를 위한 향나무 칼을 만들기 시작했다. 남쪽 바닷가 백사장 고운 모래로 그녀와 태환은 새벽녘 동트기 전 하늘 아래서 각자가 지닌 모래칼 모형 그대로 모래조각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밤기차를 타고, 부산 바닷가에 도착하자 두 사람이 처음 시작해 본 공동작업이었다. 태환은 정성스럽게 부드러운 봄날의 모래알을 쓰다듬어 가면서 열심히 완성도를 자랑하는 모래칼을 만들고 있었다. 그녀도 열심히 그의 곁에 붙어 앉아서 사랑스런 모습으로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이 모래칼을 만들기에 열중했다.
우연히 두 사람의 작업을 지켜보던 지국은 그녀에게서 해 뜨기 직전의 새벽바람 한줄기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약간 헝클어진 어깨 밑으로 늘어뜨린 긴 머리카락과 가녀린 어깨와 긴 목에 담기던 강인한 흡인력은 신비로움에 가까운, 알 수 없는 매력으로 지국에게 다가왔다. 어쩌면 건장한 체격의 새하얀 얼굴 모습의 태환이 그녀 곁에 우직하게도 자리잡고 있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무칼 깎아 만드는 작업의 초석으로 삼았던 바닷가 모래조각 칼을 그녀와 태환은 지금 지극정성으로 함께 잘 다듬어 내고 있었다.
그 과정에 지국의 등장으로 세 사람은 함께 합석하게 된다. 지국은 견딜 수 없는 심정으로 그녀에게로 마냥 다가서기 시작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새벽길 조깅코스에 늘 빠질 수 없는 해뜨는 바다와 난데없이 지국의 시선을 끌고 있는 새벽바다에 홀연히 나타난 그녀와의 만남은 필연이었다 여겨진다. 그 수많은 사람의 인연의 틈바구니에서도 그 바구니 안에 담겨지는 필연의 의미는 지대하다.
불가에서는 옷깃을 스친다와 또는 스치운다는 의미를 인연법으로 중요하게 생각한다. 한번 스치우고도 모르던 인연의 고리가 또 두 번째 스치게 될 때 그 의미는 남달라진다.
그녀는 묘향산으로 태환과 함께 가서 나무칼을 만들면 그때에는 지국의 나무칼도 똑같이 한 개 더 만들어 주기로 하고 목검처리는 쌍검이 아닌 특별한 세 개를 만들기로 결정하였다.
세 사람은 이별도 아닌 감정적인 아쉬운 헤어짐을 앞에 두고 섭섭하여 그녀가 얼굴 그림 옆에 같이 잘 붙여 놓으라며 쌍칼 그림 한 개를 생생하게 그려 주었다.
그와 그녀는 송정바다 소나무 숲길을 걷기 시작했다. 송정바다 해안가 백사장은 수평선과 해안 남쪽바다 풍미를 자랑할 만했다. 바닷가 소나무들은 바람막이 방풍림으로 서 있어도 지극한 자연미를 띄고 있었다.
하늬바람 한 줌만 건 듯 불어도 바닷가에는 부드러운 곡선의 하얀 물보라가 일었다. 끝없이 끝간 데 없이 땅과 바다 위로 펼쳐진 높다란 하늘가. 살랑대는 봄바람에도 푸르른 소나무는 소금기를 머금고, 바람결에 들은 이야기는 그들에게도 있었다.
바람기도 전혀 없는 태환은 송정 바닷가에서는 그저 그렇게 그녀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소리 소문도 없을 두 사람은 바닷가가 무한정으로 내려다보이는 소나무 언덕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앞장서서 언덕을 올라가던 그녀가 문득 걸음을 멈추어 선 다음 잠시 하늘을 올려다본다. 태환은 엉겁결에 뒤따라 열심히 올라가다가 같이 멈추어 섰다. 하마터면 그녀의 똥글똥글한 히프에 이마 박치기를 할 뻔하여 태환은 깜짝 놀랐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더니, 하늘과 바다와 태환을 동시에 바라다본다. 언덕 위로 올라갈수록 바람이 거세어지고 있었다. 태환은 그녀에게 내가 앞장서서 갈 테니, 내 뒤를 따라서 올라오라고 말했다. 앞장서서는 다시 걷기 시작하는 태환의 뒷모습은 마치 그녀가 업혀가도 될 만큼 듬직하게 보였다. 그녀는 별 무리 없이 태환을 뒤따라 언덕 위로 올라섰다.
소나무 숲길 키 큰 소나무 가지 끝에는 바람개비처럼 봄바람이 머물고, 또다시 한동안 바람은 잠잠해져서 둘이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해가며 발길 닿는 대로 태평스럽게 두 마리 꽃사슴처럼 돌아다녔다.
한참인가를 나무껍질 두터운 붉은 빛깔 도는 소나무를 쓸어보고 쓰다듬어 보기도 하던 그녀가 바다가 가이 없이 펼쳐진 언덕 위 풀밭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둘이서 나란히 정답게 거닐었던 송정 바닷가 해안길이 한눈에 훤히 내려다 보이는 소나무 언덕 그녀는 혼자 오두마니 앉았고, 태환은 웬일로 그녀 곁에 나란히 앉을 기미가 전혀 없어 보였다.
해변의 어떤 여인의 하얀 속살처럼 하이얗게 둥글게 보이는 바닷가 모래밭에는 그들이 두고 온 파돗자락에 둥그러진 반들반들한 소라껍질과 끝없이 밀려와 끊임없이 부서지는 흰 파도가 있었다. 봄바람은 또 그렇게나 변화무쌍하여 송정바닷가 전체를 마음대로 넘나들었다. 태환에게 정이 들만큼 들어버린 그녀가 한참을 혼자 서서 서성거리는 그를 잠시 바라보다가 편안한 기분으로 말을 걸었다.
“태환 씨는 어떤 소나무가 가장 마음에 들어요?”
그녀는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어 서서는 그녀를 유심히 내려다본다. 아무런 대답도 없이 마냥 서서 그녀를 바라보길래 그녀는 재미있다는 듯 미소 띤 얼굴로,
“나는 저어기 서 있는 소나무가 멋져, 마음에 꼭 들어…”
그렇게 말한다.
그는 시선을 고정한 상태에서 눈을 높이 들어 그녀가 가리키는 소나무 한 그루를 올려다본다. 언덕 위의 그 소나무는 바다를 굽어볼 듯 듬성듬성 서 있는 몇 그루 소나무 한가운데 터억 버티고 서서는 굵직한 양팔을 마구 휘두를 듯 힘차게 하늘 끝으로 가지를 틀어 올리고 있었다.
소나무 밑둥부터 하늘로 치켜 올린 소나무 끝가지까지 찬찬히 훑어보던 그가 갑자기 지남철에 이끌리듯이 그녀 곁에 바싹 다가와 앉았다. 두 사람은 어깨가 약간 스치면서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칼이 그의 얼굴에 닿았다. 보드라운 그녀의 머리칼을 쓸어낼 듯한 언덕 위의 바람결은 언덕 아래 바다를 향하고 있다.
태환은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이렇게 가까이 앉아도 어째 볼 수도 없는 그녀를 사랑스럽게 들여다보면서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내가 보아둔 더욱 멋진 소나무 한 그루가 저어쪽 한 귀퉁이에 우뚝 서 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지는 못 했을 거야.”
“아아하… 아까 태환씨가 들여다보던 그 소나무 숲길 안에 있는 오래된 노송 한 그루 말이지… 나도 그 오래된 나무는 눈여겨보았는데 썩 마음에 들어도 그 나무는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되는 천연기념물이야.”
“우리 둘이 다시 함께 가서 구경이나 한번 제대로 해 보자.”
“태환 씨와 그 노송을 함께 보고 나서 우리 오늘 울산 방어진으로 출발하는 거야. 알았지?”
그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녀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숲길로 들어서는데 그가 그녀의 어깨와 머리에 붙은 잔솔가지를 떼어 주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오래 서서 무척이나 오래된 나이테가 굵직한 올곧게 잘 자란 노송을 하염없이 둘러본다. 바다가 그토록 쉼 없이 철썩거리고, 바닷바람은 그처럼 몰아쳐도 끄덕도 없이 잘 자라버린 그 오랜 나무 한 그루면 어쩌면 그녀가 만들어 낼 긴 칼 길이 설정은 가늠해졌는지도 모른다. 그녀가 노송에 기대어 잠시 가지 끝에 걸린 하늘을 우러러보는데 갑자기 마주 서 있던 태환이 노송과 함께 와락 그녀를 끌어안았다. 태환은 마치 불길이 타오를 듯한 눈길로, 그녀의 약간 까칠한 입술에 자신의 뜨거운 입술을 포개었다. 그녀는 너무 놀라서 딱딱한 오래된 바닷가 소나무 한 그루처럼 온몸이 경직되어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의 거칠게 몰아쉬는 숨결을 감당하기가 가슴에 벅차서 까칠하던 입술에 힘을 풀고는 몽롱해지는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거의 부동자세로 느껴지는 그녀와 등 뒤의 우람한 노송과 천천히 천천히 그녀에게로 몸을 한없이 기울이는 태환은 마치 소나무 등걸 위에 누워버린 남녀가 열렬히 서로를 탐하는 모습처럼 보였다.
그녀가 그의 입술을 받아들이듯 그의 허리에 양팔을 감았다. 태환은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헝클어진 긴 머리를 쓸어주면서 가늘고도 긴 그녀의 목덜미 쪽으로 다정스럽게 그녀를 끌어안는다. 태환은 그녀의 향긋한 침샘과 보드라운 속입술과 그녀의 모든 것을 알아내기라도 할 듯 기나긴 첫 키스에 빠져들었다.
해질녘 송정 바닷가 땅거미 내리는 바다가 내다보이는 마을 어귀에서 두 사람은 인근 마을에서도 알아주는 유명한 식당이 함께 있는 포근한 어느 민박집으로 들어선다. 민박집 마당으로 들어선 그들은 점점 어두워가는 하늘이 걸쳐진 민박집 나무마루에 걸터 앉았다. 주인장은 그들을 조용한 시선으로 살펴보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약간 핼쓱했는데, 태환은 그녀가 피곤하지나 않은지 걱정이 되었다. 조그마한 입술은 꼬옥 다물고, 그녀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태환이 약간 어벙져서 생긴 일이 바로 그 새벽바닷가 지국의 발걸음을 뒤미쳐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녀를 위하는 진심어린 마음으로 태환은 어쩌면 지국이 가장 그녀에게 잘 어울리는 남자로 판단했는지도 모른다.
지국에게는 적어도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서 굳이 죽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그녀와 함께하는 현생을 택한다.
그녀와 함께 하는 일이라면 그 무엇이라도 능히 해낼 줄 아는 지국의 지극한 사랑 앞에서 태환은 고개 숙일 줄도 알았다.
천재적인 예술가에게는 특히 그림을 그리는 남자는 진정 사랑하는 여자를 잃어버리기 십상이다. 특히 한국적 정서와 맞물려 배고픈 천재성은 기실 아무도 원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태환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상관 없이 그녀와 지국의 사랑은 전개되고 있었다. 아름다운 봄날의 바닷가 그녀가 태환이 좋아서 만나고, 지국을 만나 그렇게도 아름답던 시절은 남쪽 바닷가 푸른 물결처럼 출렁이고 있었다.
양산 양지바른 언덕 통도사에서 그녀에게 줄 향나무 칼을 다듬고 깎아내고 쓸어내어 쓰다듬던 태환은 범어사 여름날들의 피어오르는 산자락 물안개 자욱한 한량스님의 암자에서 지국에게 줄 나무칼 한 개를 또 만들기 시작한다.
지국과 그녀와 체육관의 젊디젊은 체조 선수가 자동차를 몰고, 태환의 칼을 보러 범어사에 찾아왔을 때만 해도 한량 스님과 태환은 그녀와 지국의 결혼식이 앞으로 곧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태환의 나무칼을 받은 지국은 그녀에게 서울에 보관된 진품을 한번 보고 싶다는 의미있는 운을 띄웠다.
보검이 보관된 그녀의 집 방에 들어서자마자 지국은 그녀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느꼈다. 지고지순한 지국의 사랑 앞에 함몰되어 가는 그녀의 앳된 모습은 주위 사람들의 호응을, 가족들의 열띤 호기심을 자극하기엔 충분했다.
선덕의 무공을 아는 자는 한글의 아름다운 선을 그리고 그 덕을 높이 사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리라.
바닷가 파돗자락에 담기던 해조음의 선율과 하얀 갈매기 날개짓들은 끊임이 없을 것만 같다. 바닷가 지국의 아파트를 비워두고서 두 사람! 그와 그녀는 서울로 올라와 고려대 캠퍼스를 함께 걸었다. 어깨를 마주하며 가을의 캠퍼스를 함께 거닐어본다는 일은 높다란 파란 하늘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일과도 같았다.
고려대 체육관 노천 카페에 나란히 앉아 헤이즐넛의 싸아하고도 쌉사롭한 커피 향기를 즐기던 그녀와 함께 지국은 아이스 링크로 들어간다. 얼음판에서는 한판승의 아이스 하키 경기가 진행되고 있었다.
아이스 하키, 아, 아아~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릴 일도 없을 얼음판에서 고려대 아이스하키만큼 멋진 경기도 드물 것 같다.
그와 그녀는 그날의 산책을 마치고 고려대 막걸리와 재즈바아에서 2차를 무사히 신고식처럼 잘도 치루어내었다.
여름 장마비가 무한정 쏟아져내리던 칠월칠석 견우와 직녀성이 가을날들의 싸아한 하늘 아래서 스산한 바람결에 빛날 때 그녀의 지국과 태환은 생각했다. 사랑하는 그녀를, 사랑했던 그녀를 어찌하면 좋을까….
여름날 뜨겁던 태양 아래 함께 보내던 남쪽 바닷가 푸르던 물결도 깊어가는 가을이 오고 그렇게 또 한 계절이 흘러가고 있다.
가을과 겨울의 문턱에 서면 그 누구나 한번쯤 이별과 만남의 의미를 되새겨보곤 한다. 누구나 한두 번은 헤매이곤 하던 그런 계절이 가을이라면 겨울은 우리들 헤매임의 끝자락이 아닐까.
서울의 하늘 아래 스모그 현상 같은 잿빛 안개가 자욱히 끼던 날 장충단 공원길과 신라호텔 조각공원과 남산길을 그들은 정답게 걷기로 했다.
충무로 극장 앞 복돌이와 복순이 같던 그녀를 지국은 대한극장 앞에서 기다렸다. 그녀와 함께 만나기로 했던 그날, 애완견센터에서 초롱초롱 빛나는 눈동자의 복슬강아지를 혼자서 들여다보면서 귀여운 그녀의 몸짓을 떠올리던 지국은 늦게 나온 그녀와 영화를 보러 극장 안으로 들어서다가 그녀의 옛친구 영화감독과 맞닥뜨리게 된다. 지국은 극장 안에서 그녀에게 짓궂은 목소리로 만인에게 공포하였다.
“당신은 충무로 애완견 복슬강아지다. 너무도 흡사하게 닮은 꼴이야!”
“어머나! 놀라워라… 어머머! 놀래라.”
그녀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대한뉴스가 끝나자 영화는 시작되고 있었다. 그날 밤 그와 그녀는 신라호텔 로비에서 즉석 언약식을 거행하고, 첫날밤을 치루게 된다.
돌아오는 11월 11일에는 빼빼로 데이에는 약혼식을 거행하기로 결정한 지국은 그녀와 밀월여행 같은 서울방문을 한껏 여한 없이 즐기게 되었다.
한량스님 암자에서 가장 단단한 나무칼을 만들고 있는 태환은 두 사람이 범어사를 방문하고, 보현검을 보러 서울에 갔다온다 할 때만 해도 그다지 걱정할 일이 없었다. 한량스님은 서울 가서 둘이서 가을날 꿩 궈 먹은 소식이라 말하는 태환에게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말했다.
산허리 산등성이로 갈바람이 스칠 때 하늘가 산빛 고운 별빛들이 태환의 가슴으로 들어오고 쓸어담는 영롱한 별들은 찬서리 내리는 아침나절 지나면 우박같은 별이 되어 가슴으로 박히다간 녹아내렸다. 그렇다. 한 남자가 진정으로 가슴 안으로 송두리째 한 여인을 사랑한다는 일만큼 가슴 저리고 아릿한 것이 또 있을까!
지국은 서울에서 그녀와 함께 남산 길을 걸으며 알았다. 그녀에게는 풍산개 기질이 다분한, 말하자면 그녀에게는 복슬강아지가 무색할 만큼 대단함이 있는 여자라는 사실이었다. 호랑이도 이겨낸다는 용맹스런 풍산개의 바람 타는 능력과 바람의 기운을 받아내고 다스림에 있어 그 풍류의 도와 즐김을 기꺼이 기뻐할 줄 알던 그녀를 그는 무한히 존경하게 되는 것이다.
그녀의 서울 식구들과 인사를 나누고 지국은 부산 바닷가 아파트로 그녀와 함께 돌아간다. 두 사람은 체육관 일을 서로 함께 도우며 겨울을 보낸다.
겨울철 체육관 식구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고, 동거동락의 진정한 모습을 보였다. 추운 겨울을 함께하는 사람들은 어쩌면 모두다 그렇게 봄을 기다리며 봄날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지도 모른다.
봄날에 태어나 봄기운을 듬뿍 받고 자라난 그녀에게선 겨울날 어느 차가운 겨울 아침엔 창가에 서서 맑고 깨끗하던 태환의 이미지를 보았다. 차창가에 기대어 본 사람은 알리라. 창가에 어른대는 기억 속에 머물다 지나가버린 지울 수 없는 추억과 추억 속에 되살아나는 지울 수 없었던 누군가가 있었음에 대한 그 소중했던 지나간 시간들에 대하여… 그 고마움에 대해서, 그 상념의 잔상이 남아 있음에 우리들은 고마워했는지도 모르겠다. 지나가는 매순간을 지국도 그녀도 소홀함 없이 충실함으로 살았다.
태환이 올겨울을 범어사에서 한량스님과 동안거를 들어갔음에도 세 사람의 시간은 일맥상통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렇다. 수행자의 진정한 수행의식과도 같은 일상이 주어지는 사람들의 생활은 없을 것이다. 차라리 행복의 최상으로 여겨짐은 세 사람에게는 남달랐다면 특별한 생활의 뜻깊은 시간이 되었나 보다.
찬연한 봄빛 사이로 파아란 하늘과 새파란 파돗자락 넘실거릴 듯 하이얀 남청색 파도의 현 그리고 그 바닷가 백사장 모래밭에서 지국과 그녀의 결혼식이 거행되고 있었다.
사람들은 한껏 몰려와서 축하해 주고, 찬란한 봄볕에 눈부신 그녀가 지국과 있었다.
태환은 한량스님과 할랑할랑한 모습으로 결혼식이 중반으로 접어들 무렵 어슬렁거리듯 나타났다. 몇 개 남지 않은 축하객 끝자리 의자에 두 사람이 자리잡고 앉자 통도사 지현 스님은 기다렸다는 듯 태환에게 넌지시 너무 늦게 오질 않았는가? 한마디 물었다. 태환은 아무렇지도 않은 음성으로 “단지 다만 엎어지기 싫어 그랬죠.”
지현 스님은 대꾸하시길 “내 말은 그 말이 아니잖은가…”
좌우지간에 엎어지면 코 닿을 곳 범어사에 있던 태환이 곧 죽어도 엎어지기는 싫다는 데야 어찌할 바도 없지만 그 누구도 지금 이 자리에서 어쨌든 요량이 없었다.
아름다운 오월의 신부가 그녀고 눈부신 새하얀 웨딩드레스에 지국의 늠름한 모습은 너무나 잘 어울렸다.
결혼식이 끝나자 그와 그녀는 신혼여행도 마다하고 봄빛 찬란한 바닷가가 내려다보이는 호텔에서 열흘을 지냈다. 그보다 더 좋은 시간이 또 있을까! 두 사람의 진심으로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은 참으로 어여쁜 한 쌍의 잉꼬 같았다.
예도와 새벽바다 원무도가 있던 날은 칠월칠석이 다가오던 여름날 바닷가였다. 서울에서 태환과 지현 스님은 함께 작업실을 지키다가 여름날들의 남쪽 바다를 향하여 길을 떠난다. 지국과 그녀가 혼연일체가 되어 하늘로 오를 때 황천길을 뚫어내고 중천길을 기필코 가르리라. 천명을 이루고 하늘의 뜻을 거스리지는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태환은 서울 작업실 깊숙이 보관하던 장한검을 꺼내어 그녀에게 돌려주기로 한다. 지국과 그녀가 그 칼을 보관함이 마땅하리라는 태환의 생각에 지현 스님도 동조했다.
예도에 앞서 검도가 있었다는 생각에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지 않으리라. 새벽 바다 한없이 출렁대는 검붉고도 시원한 칠월의 바닷가, 원무도를 잘도 추어대던 태환의 모습은 처용무에 버금가는 몸짓을 보이기도 했다.
살아생전의 김수로왕 말씀하시길 딱히 그녀를 내 아내로 허락함에 있어 합당치 않음은 없으되, 합당치 못함이 있을 시 추호도 허락할 뜻은 없는 바 인도의 왕족을 내 처로 우선 허락지 않을 수 없었노라.
여름날 눈부신 하늘과 두둥실 떠가는 흰 구름, 찬연한 금빛 가을 햇살 화안히 영글면 머언 하늘 위로 날아가는 철새들 … 그래, 그렇게 봄을 맞이하고 그렇게 여름이 오고 그렇게 가을이 가고 그해 가을날들의 가슴 미어지는 서정은 잔잔한 기억의 겨울 유리창가 성애가 하얗게 눈부실 듯 반짝이며 얼었다가 녹았다가 하면서 빛날 터이지!
아, 앞으로 어떻게 하면 태환은 그녀를 송두리째 아주 깡그리 잊을 수 있을까 생각했다. 아니, 굳이 그렇게까지 그녀를 잊어야만 할 특별한 이유도 사실은 없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지국과 결혼하고 신혼의 단꿈에 젖어 바닷가 아파트 집들이를 떠들썩하게도 멋지게 잘도 치루어내었다. 그녀가 처음 혼자 들어가서 자던 조그마한 풀꽃향기 스미던 작은 방에는 아주 가끔씩 풀빵 냄새가 났다.
그렇다. 필라테스 연구가 지국은 감성이 너무 많은 놈이라 해도 태환의 사전에는 감성이 꽂히는 일은 있어도 그것을 그다지 많이 갖고 싶어 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남녀의 사랑 자체가 어떻게 생각하면 너무나 다양하고 또 다변적인 요소를 품고 있어서 태환의 그녀에 대한 사랑이 지국의 사랑보다 우월했다 말할 수는 없을지라도 지국의 그녀에 대한 지극한 사랑 앞에 머리 숙인 태환의 깨끗함이 왜 눈물겹도록 지현 스님의 마음을 애처롭게 만들었던 것일까.
칠월칠석이 오기 전에 가보자고 나선 길이 어찌 보면 너무 일찍 서둔감이 없잖아 있었다. 그래도 바다는 칠월 중순보다야 칠월의 초순이 넉넉하여 더욱더 시원하고 좋은 것이지….
신혼의 달콤새콤한 삼 개월째 지국과 그녀는 태환과 지현 스님의 방문을 받는다. 태환은 한 손에 그 오래된 긴 칼을 들고 바닷가 아파트로 들어섰다.
한 남자에게 여자는 그저 그렇고 그런 허전한 가슴 속 잃어버린 갈비뼈 한 대 정도, 그러나 한 남자에게 있어서 사랑하는 여자는 세상의 모든 것일 수도 있다. 어느 시인은 해가 뜨고 지는 세상의 모든 사소함조차도 사랑의 대상이 존재함 그 자체라 했다.
태환과 지국의 그녀에 대한 사랑의 실체가 달랐다 한들 가슴에 물결치는 애정의 감정은 어땠을까.
해질녘 바닷가 칠월의 부드러운 해풍이 넘실거리듯 활짝 지국과 그녀의 아파트 실내를 감싸고 돌았다. 지국의 넓은 이마와 드넓은 가슴의 준수한 얼굴은 길어진 머리카락의 한들거림과 함께 무언가 진중한 무게가 느껴졌다.
태환의 더부룩한 머리와 지현 스님의 파르라니 깎은 빡빡머리는 서로 너무 대조적이었다. 세 남자가 그녀가 준비한 푸짐한 저녁 밥상 앞에 둘러앉아 천천히 저녁식사를 시작했다. 그녀는 태환이 그토록이나 좋아하던 생선 매운탕을 푸지게도 잘도 끓여내고 있었다. 바로 예도란 그런 것이 아닐까.
지현 스님과 함께 태환이 고이 모셔 온 그녀의 칼을 지국이 정중한 모습으로 받아들였다. 그녀, 지국, 태환, 지현 스님 네 사람은 새벽 바다 원무도를 마치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행길에 올랐다. 세계에서 가장 긴 칼을 함께 만들기로 약속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