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01.07 비전중앙교회 주일오전예배
<빌 2:1-8 “함께 세워주며 가야 합니다.”>
주보에 설교 제목이 나와 있죠? 설교 제목은 ‘함께 세워주며 가야 한다’입니다. ‘함께’. 이 말은 넘어진 사람도 있고, 힘든 사람도 있고, 여러 가지로 약해서 쓰러질 수 있는 사람들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사람이 있을 때 못 본 척 하지 말고, 외면하지 말고, 같이 손잡고 가자, 같이 가자 하는 의미입니다.
2024년이 시작됐습니다. 작년 한 해 많이 어렵고 힘들었던 해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2023년도를 참 어렵게 보냈지만, 그래도 이제 어김없이 2024년도가 시작되었습니다. 사실 그 2023년도 꼭 한 해만 아니라, 2020년도부터 갑자기 이 코로나 사태로 인하여서 여러 가지로 우리의 삶이 피폐해지고 힘들어지고 어려워졌고, 거기에다가 이제 코로나 사태가 좀 진정이 되면서는 경제적인 아픔들이 또 여러분들을 굉장히 불편하게 만들었습니다. 더구나 2024년도를 전망하는 여러 경제적 예측이나 환경 또는 여타에 대한 예측들 또한 매우 부정적이고 암울한 2024년도가 될 것 같은 느낌을 매우 많이 주고 있습니다.
일단 경제 위기는 반드시 온다고 이야기하고 있고, 그러면서 식량 위기, 그다음에 환경 위기, 그리고 여기까지는 우리가 늘 듣는 이야기이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하는 예측까지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평안하고 안정적으로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 아니라, 대부분 우리를 불안하고 염려하게 하는 전망입니다. 자, 그런데 여러분들은 누구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걸 절대 잊으면 안 돼요. 하나님의 자녀는 세상 사람과 다릅니다. 여러분들은 구별된 자녀들이기 때문에, 이런 도전과 위기 속에서도 세상 사람들의 방법으로 그렇게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끝까지 믿음으로 싸워서 승리해 가야 합니다. 빌립보서 2장 1절부터 8절까지-11절까지 다 보면 좋겠습니다만, 일단 8절까지가 핵심이라 8절까지 봤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함께 세워주며 가야 합니다.
자 여러분들, 가족들이 여기 함께 오셨으면 가족들이나 우리 주변의 성도님들을 한번 잠깐 보십시오. 얼마나 어렵고 힘들게 다들 살아왔는지 느껴지지 않습니까? 구체적으로는 잘 모를 수도 있지만 다들 어렵게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느껴진단 말이죠. 자, 그럴 때 여러분들, 2024년도 좀 힘들고 어려워도 -혼자서 아픔을 짊어지고 갈 수도 있지만 - 여러분들이 함께 아파하고 함께 나아가면 여러 가지 많은 어려운 일들이 반감되고 또 해결될 수가 있습니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어려움도 함께 나누면 다 이겨낼 수 있고, 극복해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우리 성도들이 어떻게 가야 할지에 대해서 굉장히 잘 안내를 하고 있습니다. 일단 우리 성도들은 -여러분들이 세상 사람들도 많이 접하고 있지만- 선한 마음으로 다른 성도들에게 다가서야 합니다. 이것을 잘 기억하셔야 해요, ‘선한 마음으로’.
1절 보세요.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 안’이라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성도들은’ 이 말이거든요. 여러분들은 성도이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에요,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권면할 일이 있거나, 사랑의 무슨 위로할 일이 있거나, 성령의 무슨 교제할 일이 있거나, 또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이렇게 말씀을 했거든요. 몇 가지가 나옵니까? 다섯 가지가 나와요..
자, 권면할 일이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요? 이 권면이란 말은 부드럽고 따뜻한 마음으로 힘들고 어려운 성도들에게 힘을 주는 말을 뜻합니다. 어떤 성도가 너무 힘들다, 괴롭다면 모르면 할 수 없지만 내가 그걸 안다면 그에게 부드럽고 따뜻한 말로 권면해 주고 도와주고 지지해 주는 이런 행위가 권면이에요.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권면할 일이 있으면 그런 마음으로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힘을 주라는 이야기입니다.
두 번째 “사랑에 위로”라 그래 놨거든요. 우리가 상대방이 위로를 받아야 할 만한 그런 일이 있을 때는 항상 사랑이 같이 가야 한다, 사랑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위로하고 그래야지,‘내가 예수 믿으니까 주님이 그렇게 하라 했으니까, 어쨌든 그래야 되지 않겠나’ 이런 마음으로 가면 안 됩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진실이 느껴져야 합니다. 아무리 이런저런 말을 해도 진실이 안 느껴지면 큰 도움이 안 돼요. 물론 사기꾼 같은 사람은 거짓도 진실인 것처럼 잘 포장을 합니다. 그렇다면 사기꾼도 그리 잘하는데, 하나님의 자녀인 여러분들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더 잘해야지요. 그래서 진실된 사랑으로 해야 한단 말입니다. 이 사랑이 참 어렵습니다.
보통 대부분의 사랑은 에로스적인 사랑이에요. 일반적인 사람들이 사랑하는 형태를 에로스적인 사랑이라고 하는데, ‘give and take’의 사랑 즉, 주고받는 사랑이에요. 그래서 나에게 좀 이득이 되고 선한 걸 주면은 사랑이 그냥 가는 거야. 그런데 나에게 뭔가 조금 불편하고 뭔가 조금 사이가 안 좋다면 사랑이 안 갑니다. 미움이 간다고요.
성경에서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네 원수가 주리거든 뭐하라? 먹이라 그랬거든요. 이것은 미울 정도가 아니고, 원수가 그렇다 하더라도 그렇게 해라. 그리고 원수가 힘들고 어려울 때 그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고 지원해 주고 도와주라. 그렇게 말씀하고 있단 말이에요. 그러면서 그렇게 하면 원수의 머리에 뭘 놔둔 것과 같다? 숯불을 놔둔 것과 같다. 이렇게 말씀을 하거든요.
그러니까 많은 성도들이 원수의 머리에 숯불을 놓아두면-우리가 그 원수에게 선을 베풀면- 원수가 그 숯불 때문에 뜨겁고 힘들게 된다는 식으로 생각을 하는데, 그것은 성경을 완전히 잘못 이해하는 것입니다. 숯불을 둔다는 건 무슨 말이냐 하면, 예수님 당시에 아주 어려운 사람들 집은 매우 추웠습니다. 춥고 숯불도 피우기 힘든 이런 집에 자기 집에 따뜻한 숯불이 좀 있는 사람들이 빨리 찾아가서 숯불을 나눠주고 추위를 면하도록 도와주는 이런 관례가 있었어요. 바울이 그 관례를 인용한 겁니다. 그래서 원수의 머리에 숯불을 둔다는 것은 더 큰 사랑을 베푼다는 뜻이에요. 더 큰 사랑을. 그러니까 우리가 선을 행하면 그렇게 추위에 떨고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숯불을 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머리에 숯불을 준다는 건 따뜻해지게 한다는 뜻이에요- 그 정도로 네가 더 큰 사랑을 베풀어라.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런 주님의 말씀은 그냥 쉽게 잊어버리고, 자기에게 도움이 되고 이득이 되고 좀 괜찮다 싶으면 사랑을 하고 안 그러면 사랑을 안 하고 미워하고 싫어하는 이런 것은 세상 사람들이 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이해가 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정말 사랑하는 마음으로 위로를 좀 주라, 힘을 주라 그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리고 성령 안에서 교제, 교회는 성도들 간에 교제가 참 아름다워야 합니다. 교제가 참 아름답게 되어야 교회에 다닐 마음도 사실 생기고 그러는데, 성도들 간에 맨날 시기가 있고 질투가 있고 ‘누가 어떠니, 누가 어떠니’ 이런 식으로 하면 참으로 힘들어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우리 성도님들 오면은 또 잘 모르시는 분들도 많잖아요. 그러면 잘 모르더라도 따뜻하게 위로해주고 만나주고 아름답게 교제를 해나가셔야 합니다. 아름답게 교제를요. 어떤 사람은 “목사님, 나는 그렇게 하려는데 상대방이 안 그러던데요.” 할 수도 있겠죠. 상대방이 어떻게 하고 안 하고는 신경 쓰지 말고 내 쪽에서 그렇게 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긍휼, 그다음에 자비인데요. 긍휼이란 것은 상대방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고, 자비라는 것은 아주 불쌍히 여기면서 선을 베푸는 이런 행태를 자비라 그러거든요. 이렇게 이 다섯 가지가 나와요.
일단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은 이렇게 다섯 가지의 선한 마음으로 다른 성도들에게 다가설 것을 먼저 바울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게 안 되면 그 뒤엣것이 안 돼요. 이게 되어야 뒤에서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권면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내용이 가능해집니다. 근데 앞엣것이 안 되는데 뒤엣것에까지 가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먼저 이렇게 선한 마음을 가지고 다른 성도들에게 다가서고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2절 이하의 말씀도 받을 수가 있습니다.
바울이 2절에서 함께 세워주며 가기 위한 결정적인 단서를 주는데, 그것은 세 가지입니다. 일단 "무엇이라도 마음을 같이 하라" 그랬어요. 그다음에 무엇을 말했습니까? "같은 사랑을 가지라" 그랬고, 또 세 번째는 "뜻을 합하여 한마음을 품으라" 이렇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마음을 같이하고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마음을 품어라.” 교회는 이런 곳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이름 아래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고 성령의 인도로 모여진 성도들의 집단이에요. 특별한 집단입니다. 이곳은 세속적인 것과 구별되어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그런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적인 좋지 못한 마음이나, 세속적인 사랑이나, 나하고 뜻이 안 맞는다면서 세상적인 방식으로 그렇게 외면하고 돌아서는 것이 아니라,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지체이기 때문에 한마음과 같은 사랑과 같은 뜻을 가지고 서로가 협조하고 이렇게 가야 합니다.
자, 그런데 이렇게 하려고 하면 굉장히 힘이 듭니다. “저 사람하고 나하고 뭔가 뜻이 안 맞아, 성격이 안 맞아.” 여러분들, 교회에서 하는 일들이 거의 다 하나님 앞에 선한 생각이고 선한 일들이에요. 그런데 그것이 나하고 뜻이 안 맞다 이러면, 내가 양보하면 되잖아요. 어떤 사람들은 시간 갖고 싸우고 날짜 갖고 싸우고 또 재정 문제 갖고 싸우고 막 이렇게 합니다. 그렇게 싸울 필요가 없는 것들인데, 자기 고집이나 자기 주장을 내세울 필요가 없는 일인데, 그걸 가지고 막 고집을 내세우고 자기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막 소리 지르고 하는 이런 모습들, 정말 하나님이 보실 때는 얼마나 우습겠어요? 선한 일을 위해서 어떤 계획이 딱 되면은 선한 일이니까, 설사 사람들 간에 있어서 의견 조율이 잘 안 되고 뜻이 안 맞다 하더라도 선한 일이니까, 내가 희생하면 되잖아요, 내가 포기하면 되잖아요. 그래서 이렇게 마음을 같이 하거나, 같은 사랑을 갖거나, 같은 뜻을 품는 이것이 쉬운 일 같지만, 굉장히 어려워요. 왜냐하면 이것은 자기 희생이나 자기 포기가 들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뭔가 자기를 죽여야 돼요. 그리 해야 일이 된다고요. 이제 우리 각 기관의 기관장님들이나, 각 기관들, 또는 여러분들이 이런저런 일을 해나갈 때, 이런저런 의견이 나오면 의견을 일단 반영을 하지만, 그러나 그런 걸 가지고 고집을 피운다거나 이럴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우리 이렇게 해서 그냥 선하게 가도록 그렇게 합시다.
그리고 2024년도가 -지금 여러 방송 매체에서도 그렇게 나오지만- 사실 공갈이 아니고 실제로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이럴 때 더욱더 여러분들은 같은 마음으로 그렇게 같이 하셔야 돼요. 세워줘야 된다고요. 세워주고 그렇게 도와주면서 가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지체된 자임을 알게 되고, 힘든 자들이 다시 힘을 얻고 가는 겁니다. 우리 교회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같은 마음과 뜻을 가지고 가려면, 자기 생각, 자기 주장, 자기 고집 다 버리고, 희생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님들이-스스로를 돌아보는 것도 굉장히 중요한데- 주변에 다른 성도님들이 혹시 힘들지는 않은가, 어렵지는 않은가, 이것을 목사님에게 말하는 것이 옳은가 아닌가, 이런 걸 여러분들 스스로가 잘 판단해서 그렇게 하면, 우리 성도님들 자체적으로 서로가 도움을 주고 받고 하기도 하지만, 교회 차원에서도 그렇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그런 계기가 됩니다. 단, 자기 일을 열심히 안 하고, 아무것도 안 하면서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그것은 마귀 짓입니다. 사탄이 그걸 좋아합니다. 절대 그러면 안 돼요.
정말 열심히 했는데, 최선을 다했는데, 그런데 참 갑자기 어려운 일이 생겼다. 그럴 때는 우리가 일어설 수 있도록 지원해 주고 도와줘야 하지만, 아무것도 안 하면서 그냥 남이 주는 그런 도움만 받으려고 하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다 카트를 시킵니다. 그래서 성경은, 게으른 자는 굶어 죽으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이거 굉장히 무서운 말이거든요. 원수도 먹이라 그랬고, 원수에게도 자비를 베풀라고 했지만, 게으른 자에게는 일체 그런 것을 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원수된 거는 서로간에 좀 다툼이 있어서 그렇게 될 수 있고, 이거는 사람 간의 관계잖아요. 그러나 게으른 것은 하나님 앞에서 굉장히 무서운 잘못입니다. 이런 자들은 먹기를 탐하지 마라. 안 된다는 겁니다. 열심히 할 때 도와줘야 돼요.
자, 이렇게 우리가 한 마음, 한 사랑, 한 뜻을 가지고 가기 위해서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이 여섯 가지가 나와요. 잘 보면 여섯 가지가 나오는데, 3절에서 5절 사이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 보세요. 3절에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다툼, 허영 두 개죠. 그다음에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세 가지죠. 그다음에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그다음에 “자기 일을 돌아보고 다른 사람의 일을 돌아보고”, 다섯 가지고, 그다음에 여섯 번째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어라, 누구의 마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라” 하면서, 여섯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자, 여기에서 '다툼으로 하지 말라'는 이 말은 원래 뜻이 '비열한 마음'이나 '이기적인 마음'으로 하지 말라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를 드러내고 내 욕심으로, 뭔가 모르게 조금 속에 좋지 못한 마음으로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겁니다. 여기서 '다툼'이라는 것은 그냥 싸운다는 의미로 생각하기 쉬운데, 원 의미는 '비열한'이란 뜻이에요. 비겁하게 자기를 속이면서 외식적으로 거짓으로 이렇게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 식으로 하나님 앞에서 한 마음, 한 뜻이 되면 결국은 문제가 생겨 버린다. 그러니 진실한 마음으로 나가라는 거예요.
그다음에 두 번째, '허영으로 하지 마라'. 이 '허영으로 하지 마라'에서 ‘허영’이란 가식적으로 뭔가 보이기 위해서, 남에게 뭔가 나라는 존재를 부각하기 위해서 나타내는 그런 행태를 이야기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하잖아요. 남을 도와준다거나 교회에서 일을 한다거나 어려운 사람을 도와준다면서 은근히 자기를 드러내고 싶어하고 과시하고 싶어하는 이런 마음, 이런 마음으로는 한 뜻이 잘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한 뜻이 안 되고 한 마음이 안 돼요. 처음에는 되는 것처럼 보이고 좋은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그 본질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서의 진실한 마음이 없으므로 깨진다는 거예요. 깨져요. 그래서 허영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다음에 '겸손한 마음으로 다가서라'. '겸손한 마음'. 여기서 '겸손'이라는 말은 원래 'humble'이라는 단어예요. 'humble'이 뭡니까? 비천한, 보잘것없는, 아주 처참하게 낮아져 있는 이런 상태에요. 그래서 예수님 당시에 이 '겸손'이란 말은 좋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굉장히 비천하고 못나고 다른 사람보다 부족한 자를 향해서 'humble', '겸손'이라고 표현을 했어요. 그러나 지금은 '겸손'이라는 단어가 굉장히 좋은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와 있지만, 원래 예수님 당시에는 이 '겸손'이라는 단어가 그렇게 쓰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겸손하다’ 하면 ‘참 보잘것없는 인간이네’, ‘참 비참한 인간이네’ 하면서 굉장히 무시하고 깔보는 태도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렇게 하라는 겁니다. 나를 깔보더라도, 비웃더라도, 조롱하더라도, 남들이 혹시 나를 비천하게 보더라도, 우리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이런 자세로 가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성도들에 대해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은 겸손해야 가능해진다고요. 낮춰요, 그냥! 다 나보다 나은 사람이다, 나보다 못한 사람은 없다 하는 그런 귀한 마음을 가지고, 여러분들이 남을 도와준다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선을 베푼다거나 할 때, 폼 잡으며 내가 있어서 하는 이런 ‘허영’적인 마음이나 ‘다툼’적인 마음으로 하지 말라는 겁니다. 숨기고, 비천하게 낮아져서 내가 저 사람보다 훨씬 가진 것도 많이 있고, 훨씬 높은 자리에 있지만, 그러나 나는 아주 비천한 자리로 내려가서 그런 사람들을 도와주고 지원해 주는 그리고 선을 베풀 수 있는 이런 겸손한 마음을 가지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자를 사랑하시고, 교만한 자는 하나님이 대적하신다 그랬어요.
겸손한 마음으로 어떻게 하라 했습니까?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 사실 우리 교회는 대체로 생활들이 비슷비슷해요. 비슷비슷하게 이렇게 다들 힘들게 살아가지만, 또 어떤 곳에는 가면 격차가 매우 큽니다. 저는 한 번씩 그런 생각이 들어요. 지금 우리나라에 예수님을 믿는 어마어마한 재벌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사실은 이름만 대면 금방 알 만한 어마어마한 재벌들이 많은데, 이런 사람들이 자기 교회뿐만 아니라 많이 어렵고 힘든 여러 교회나 성도들을 좀 구체적으로 잘 파악을 해서, 자기 교회만이 아니라 그런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좀 도움을 주면 좋겠어요. 전 예전부터 그렇게 생각했거든요. 우리 교회에 혹시 그런 분이 나온다면 나는 그렇게 하려고 하는데, 그런 분이 왜 아직도 안 나오는지 모르겠어요. 내가 은퇴하고 졸업하면 나오려나. 그렇다 하더라도 혹 그런 분이 있으면요, 여러분들 물질 자체가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자기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많은 어렵고 힘든 주의 자녀들을 위하여, 세상의 힘든 자들을 위하여 그렇게 하면 좋겠다 하는 생각을 저는 예전에 참 많이 했거든요. 그러나 그러지 않고 오히려 그런 분들에 대한 비리들이 자꾸만 나오더라고요. 그러니 참 안타까운 마음도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일들을 돌아보는 게 자기 교회에서만 자꾸만 하는 이거, 이것도 필요해요. 그러나 이게 다가 아니거든요. 하나님의 자녀가 자기 교회에만 있습니까? 천지에 널려 있잖아요. 널려 있고, 그리고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이 사실 굉장히 많아요. 그러면 자기가 조금만 애를 쓰면 굉장히 도움을 줄 수도 있고, 그분들을 살릴 수도 있고, 용기도 줄 수 있는데, 그런 걸 잘 안 해요. 이게 뭔가 그런 걸 잘 안 하고, 자기 교회 십일조 몇천만 원, 몇억 하면서 말이죠, 진짜 어렵고 힘든 사람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이건, 제가 볼 때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들고요, 지금 교회들 가운데서 크게 교회 건물이 있으면서 재정적으로 굉장히 많은 교회들요, 바르게 환원해야 합니다. 교회가 돈 모아둬서 뭐 할 거예요? 딱 자기 교회 운영할 만큼 되고 그 이상이 되면, 교회는 다른 사람을 자기보다 낫게 여겨야 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정말 하나님의 자녀로서 힘을 내어 갈 수 있도록 지원해 줘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꼭 그렇게 해보십시오. 그러면요, 하늘에서 그 상을 절대 상을 잃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거 모를 것 같아요? 전부 아신단 말이에요. 주님 오실 때가 언젠지는 모르지만, 얼마 남지 않은 건 분명해요. 그때 주님이 다 보십니다.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다 보상해 주신다고요, 사람으로부터 뭘 인정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 일을 돌아보라’는 겸손한 마음으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면서, 그들에게 정말 하나님의 자녀로서 힘을 내어 갈 수 있도록 지원해 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가 된다고요.
그다음에 네 번째는 자기 일을 돌아보라 하셨거든요. 24절에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보라” 그랬는데, 여기에 원어에는 ‘일’이라는 단어가 없어요. ‘일’을 돌아보는 게 아니고, ‘자기 자신’을 돌아보라는 얘기예요. 각각 자기를 먼저 돌아보라는 겁니다. 그러고 나서 다른 사람들도 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하나님 앞에서 어떤 상태로 어떻게 하고 있는가도 중요하지만, 앞에 내용과 연결하여 보면 내가 한마음을 품고 한 뜻을 가지고 같은 사랑을 가지고 성도들에게 지원을 하고 도와주는데, 이런 자기의 모습이 그리스도 안에서 진실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지, 나의 욕심, 은근히 나를 자랑하고 나타내려고 해서 나오는 것인지도 돌아봐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를 먼저 돌아보고 그다음에 다른 사람들을 돌아볼 수 있는 넉넉한 마음까지도 우리가 가져야 한다는 겁니다. 2024년도에 -그런 일은 없길 바라지만- 혹시 여러분들 가운데 어려운 상황이 되면 물론 저도 많은 노력을 하겠지만 우리 성도님들도 노력을 해가지고 잡으셔야 합니다. 꽉 잡으셔야 해요. 그래서 ‘자기를 돌아보고 그리고 다른 사람을 돌아보라’가 다섯 번째였고요.
그다음에 여섯 번째는 -아주 중요한 게 나오는데- 이것 하나면 다 돼요.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라.”예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하는 내용이 5절부터 10절 사이에 나와요, 오늘 다 읽지 않았습니다만. 보세요, 5절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다음에 6절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이지만, 하나님과 같은 그런 위치에 놓일 것을 자기가 스스로 거부하시고라는 뜻이에요. 취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그 모든 영광과 권세와 능력을 다 비우고 종의 형체와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절에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어디까지 자기를 낮추셨습니까? 죽기까지 자기를 낮추셨다고 그래요.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렇게 8절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굽니까? 하나님이세요, 그분은 하나님의 본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신적인 능력과 권세, 하나님의 속성을 그대로 그분이 다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비록 다 갖고 있지만, 그러나 인간으로 오셔서 하나님과 같은 그런 동등한 자리를 자기가 취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여기서 취하지 않았다는 것은 스스로 그 자리에서 내려왔다는 겁니다. 이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똑같은 하나님이지만, 이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을 그분 스스로가 다 포기하시고 아주 낮은 종의 자리로 자기가 내려왔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자리에 갈 수 있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으로서 위엄과 권세를 가지고 천군만마의 천사들을 거느리면서 호령할 수도 있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런 자리를 그리스도가 다 버리고 이 땅에 오셨거든요. '무엇 때문에 왔습니까? 나 때문에 온 거예요. 나, 우리 때문에 온 겁니다. 우리 때문에 하나님이 그 자리를 포기한 겁니다.'
이것은 세상의 부모도 그렇습니다. 자, 부모가 자식이 어떤 위험에 처했을 때 그 자식을 살리기 위해서는, 부모로서 뭔가 권세나 능력을 포기해야 한다면, 부모는 포기합니다. 왜 포기합니다? 자녀를 살리려고요. 내가 이것을 포기해서 내 자녀를 살릴 수 있다면 부모는 그것을 포기합니다. 이게 부모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그래도 이 땅에서 가장 근접하게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게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이에요. 이것을 ‘스톨게’적인 사랑이라 그래요. 그런 사랑이 부모의 사랑인데, 이런 부모의 사랑보다 비교할 수 없이 크고 넓은 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 같은 자들을 살리기 위해서 자기의 영광과 권세, 그 능력을 다 포기했다는 겁니다. 다 포기했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에 로마 병사들이 예수님을 잡아가려고 할 때 제자 가운데 누군가-그게 어떤 제자인가는 알 수 없어요-가 “예수님, 지금 제가 이 사람들 쫓아버리고 다 없애버릴까요?”라는 식으로 말했거든요. 그때 예수님이 하신 이야기가 있어요. “그만두라. 내 말 한마디면 하늘의 천군천사들이 다 와서 다 박살낼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걸 안 했습니다. 그걸 하게 되면 우리가 못 살거든. 주님이 죽어야 했어요. 죽어야 했고, 고난을 당하셔야 했다고요. 이게 구약에서 계시한 메시아의 예언적 계시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런 것 하지 않고 그 능력과 권세를 다 발휘할 수 있지만 다 포기를 한 겁니다. 포기했어요. 그래서 자기 자신을 내어 주게 되는 겁니다. 이런 그리스도의 마음은 남을 위해서 자기를 포기하는 거예요. 제일 비천한 자리로 갔거든요. 우리가 그렇게 갈 때 하나가 된다, 그래야 한 마음이 되고, 한 뜻이 되고, 하나가 되어서, 우리는 어려운 2024년도 이 해를 극복해 가며 승리해 갈 수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이런 마음이었어요. 하나님의 자리에 갈 수 있지만, 그 자리를 가지 않고 우리를 위해서 그분은 정말 약하고 비천한 인간의 몸을 입었어요.
자, 여기에서 하나님의 자리,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않았다, 이 취하지 않았다는 단어가 ‘강탈하다, 붙잡다’라는 의미가 있어요. 그런데 이것은 제가 볼 때 조금 무리한 해석이고, ‘붙잡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 자리에 연연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자기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자기를 따르는 수많은 백성들을 살릴 수 있으니까 그걸 기쁨으로 본 겁니다. 여러분들도 '내가 죽어서 내가 희생이 되어서 남이 산다면 다른 사람이 일어선다면' 그걸 기쁨으로 알고 가셔야 합니다. 그러면 한 마음이 될 수 있습니다. 한 뜻을 가질 수가 있어요. 같은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그 많은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해 낼 수 있습니다. 하나가 된다는 이야기예요.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본체이시지만 자기의 원래 모습을 완전히 거부했고 스스로 낮아져서 종의 형체로 사람 같이 되셨는데, 그렇게 해야 우리가 살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겁니다. 이것은 조금만 있으면 그 의미가 여러분들에게 확실히 와닿습니다. 언제요? 죽을 때가 되면요. 얼마 안 있으면 죽잖아요, 우리도. 어떤 형태로든지 죽는다는 말이에요. 그러면요, 주님께서 이렇게 우리를 위해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다 심판받을 자란 말이에요. 그런데 그 심판에서 주님이 대신 심판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심판에서 면제되는 겁니다. 면제되어서 하나님 나라로 가게 되는 거예요. 이것은, 여러분들, 보통 복이 아닙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얘기해요. “목사님, 저는 예수 믿은 지도 얼마 안 되는데, 수십 년 동안 잘못하고 이 우상 저 우상 섬기고 별별 짓을 다 했는데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묻는 분이 있어요. 정확하게 답을 말해 줄게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어린애나 나이가 들어서나, 아니면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로 돌아와도 –우리가 볼 때는 몇십 년으로 보이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그 시간이 똑같습니다- 똑같이 돌아온 것으로 보십니다. 그래서 구원받습니다. 이게 얼마나 큰 은총인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또 “목사님, 나는 예전에 예수 안 믿을 때 좀 재밌게 살아보는 건데, 술도 해보고 담배도 해보고, 이것저것 재밌게 좀 살아보는 건데, 어쩌다 예수를 빨리 믿어서 그런 것도 못 하고, 참 억울합니다.” 이러는 사람이 간혹 있어요. 그러나 그게 억울한 게 아니고요, 만약 그런 분이 그런 식으로 가면, 어쩌면 영원히 그렇게 갈 줄 모른다고요. 그래서 하나님이 딱 때에 맞게 다 그렇게 부르시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인간으로 계실 때 어떻게 하셨습니까? 자신을 낮췄어요. 이게 ‘humble’이에요. 다른 사람이 모욕하고 그럴 때 예수님은 한 마디로 다 죽일 수 있어요. 그런데 그렇게 안 했단 말이에요. 계속 예수님을 욕하고 조롱해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결국은 십자가 위에서 그분은 죽으셨습니다. 죽으실 때 하신 말이 뭡니까? "다 이루었다" 하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분의 사역이 거기서 마무리되는 겁니다. 이루었다 하시고 돌아가셨어요. 왜 그랬습니까? 우리를 위해서 그랬습니다. 자, 여러분들 보세요. 다른 사람과 한마음이 된다, 성도가 한뜻이 되고 또 같이 간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그리스도처럼 자기가 죽어야 한다. 자기가 죽어야 하고, 자기가 ‘humble’해야 해요. 낮아져야 해요. 비천해져야 해요. 그렇게 해야 한마음이 되어서 옆에 있는 사람들 일으켜 세워주고 도와주고 다 갈 수가 있습니다. 꼭 여러분들 그렇게 하셔야 해요.
결과가 9절에서 12절에 나옵니다. 자, 보세요. 9,10절에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이 말이 뭡니까?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면 하나님이 우리를 높여 주신다. 그다음에 하나님께서 우리가 ‘humble’해지고 비천해지고 낮아지면 하나님이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우리에게 무릎 꿇도록 해주신다. 그다음에 가장 중요한 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 여러분들 살아가는 목적이 뭡니까? 하나님의 영광 아닙니까? 구원이 아닙니다. 구원은 이미 받았어요. 구원은 받았기 때문에, 이제 구원받기 위해서 노력하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들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했기 때문에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이고, 이제는 이렇게 나와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같이 예배드리고. 그다음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말씀을 들을 때는 참 쉽게 들리고 간단하게 들리지만요, 이거 굉장히 어려운 작업이에요. 제가 그거 압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일단 저부터 노력을 많이 해야 하겠죠. 저부터 노력을 굉장히 많이 할 겁니다. 여러분들도, 우리 장로님들도 -우리 장로님들은 참 좋은 분들이에요. 대한민국에서 제일 좋은 장로님들이에요- 그리고 우리 집사님들도 서로가 이렇게 이제 낮아지면서 섬겨 주고 지원해 주고 도와주면서 가면, 2024년도에 아무리 어려워도 우리는 이기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주께서 우리를 붙잡고 가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 ‘예수님, 이 손을 꼭 잡고 가소서.’ 자, 여러분들, 주위 분들이 잘 아시는 분들도 있고 모르는 분들도 있겠어요. 그래도 여러분들이 이제 하나님 앞에서 좌우에 있는 사람들의 영적인 손을 꼭 잡았다고 생각하고 이 찬양을 하시고, 그 손 위에 주의 손이 잡고 있음을 기억합시다. 주의 손이 잡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이 찬양을 같이 합니다.
“예수님 이 손을 꼭 잡고 가소서. 약하고 피곤한 이 몸을.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 잡고 날 인도하소서./ 인생이 힘들고 고난이 겹칠 때, 주님여, 날 도와주소서. 외치는 이 소리, 귀 기울이시사 손잡고 날 인도하소서.”
첫댓글 아멘..목사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