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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할렐루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오늘도 거룩하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저와 여러분의 삶과 가정과 일터 위에 항상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십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사랑받기 위해 피조된 하나님의 특별한 걸작품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고, 더불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 계명을 주셨으니 그것이 무엇입니까? 서로 사랑하라 이 말씀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오늘 서로에게 고백합시다.
주 안에서 사랑합니다. 주님 안에서 축복합니다.
애굽에 임한 여덟 번째 재앙은요 바로의 마음을 다급하게 할 만큼 고통스러운 재앙이었던 것 같습니다. 결국 바로는 모세와 아론을 급하게 불러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면서 이번만 나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용서를 구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해서 죽음 만큼은 연하게 해달라라고 간청을 하게 되죠. 얼마나 간절했는지 우리는 이번만 죽음만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지난주의 말씀을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모세의 간청을 들었던 이 모세는 하나님 앞에 즉시 가서 기도하게 되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그 바로가 구했던 것을 하나님께 알리게 됩니다. 기도를 들으신 여호와께서는 즉시 그 뜻을 돌이키셔서 서풍을 불게 하셔서 그곳에 있던 모든 메뚜기를 홍해에 집어넣게 되셨습니다. 이제 애굽 온 땅에는 메뚜기가 하나도 남지 않은 상황이 된 것이죠.
그런데 문제는 바로의 마음이었습니다. 출애굽기 10장 20절 말씀을 우리 함께 같이 읽어보실까요?
그러나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을 보내지 아니하였더라.
그렇게 다급하고 간절했던 바로는 문제가 해결되자 신속하게 돌아서서 본래 악한 상태로 돌아가 버렸다는 것이죠. 즉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나게 되자 결국 앞선 바로의 고백이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거짓 고백이었다라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꼴이 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진정한 회개가 참 쉽지 않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말로 하는 회계가 아닌 나의 삶을 변화시키는 나의 삶의 변화를 가져다 주는 진정한 회개가 쉽다고 생각합니까 어렵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래도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요 회개가 무엇인지 알잖아요. 그래서 간절히 고백한 후에 변화된 삶을 살기 위해서 애쓰고 노력하는 우리의 모습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회개가 무엇인지 알고 그 회개한 삶을 살기 위해서 내가 노력하는구나라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게 그렇게 쉽지만은 않은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바로와 같이 믿지 않는 사람들은 더 하겠죠. 우리는 믿음이 있어서 그래도 회개가 무엇인지 알고 그 길을 가려고 노력하지만 믿지 않은 자들은요 이 회심한다는 것이 정말 쉽지 않다는 거예요.
그것은 영혼 구원을 위해서 전도를 해보신 분들이면 충분히 공감하리라 생각합니다. 너무나 사랑하는 나의 가족, 또 나의 친구를 어떻게든 회심시켜보려고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여서 그에게 복음을 전하지만 회심은 커녕 도리어 점점 완강해지는 내 가족, 내 이웃들의 모습을 보게 될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가 되면 안타까운 마음이 마음 가운데 절로 들게 되죠. 그리고 지속적으로 그 일이 진행되는 가운데 낙심도 되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생기는 것이 우리의 복음 사역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물론 그렇게 복음을 전하면 어떤 날은 큰 문제 앞에서 하나님께 기도를 부탁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또한 이 문제가 잘 해결되고 나면 자신도 하나님을 믿겠노라고 고백하기도 하죠. 그뿐만 아닙니다. 한두 차례 따라서 교회에 오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라는 거예요. 당면한 문제가 해결되고 나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자신의 삶으로 돌이키는 일생활로 돌아가는 그러한 모습을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과정 속에서 흔히 경험하게 된다라는 것입니다.
바로는 지금까지 8번의 재앙이라는 과정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회개한 것은 단 두 번이었습니다. 그 회개는 명목상 회계였을 뿐 그의 삶의 변화를 가져다 주지 못한 회개였다라는 것이죠.
여러분 우리가 전도하려고 하는 세상의 모든 전도의 대상자들, 다는 아니겠지만 대부분이 이 바로와 같은 마음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 포기할 수 없는 것이고 포기해서도 안 되는 것이죠.
왜냐하면 그 영혼이 돌이키면 하나님도 돌이키시기 때문에, 그 영혼이 주님 앞에 서게 되면 하나님도 그를 품어주시고 그 영혼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인도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알기에 포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나에게 맡겨주신 사명이 무엇인가 그것을 곰곰히 생각해 보면 그것은 바로 한 영혼이 구원받는 길에 내가 쓰임받는 것, 그것이 우리 믿음의 사람들의 사명임을 알기에 우리는 포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한 영혼이 진정으로 회개하는 그날까지, 그것이 쉽지 않더라도 그것을 소망하고 꿈꾸며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권면하고 도와주고, 기도하고 권면하고 도와주고, 기도하고 권면하고 도와주고 이것을 반복적으로 그가 돌아오는 그날까지 해야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야 할 이유라는 거예요.
마치 바로가 모세에게 요청했을 때에 그 어떠한 말도 하지 아니하고 즉각 기도해 주었던 것처럼 바로의 회개가 진심이 없고 거기에 진정성이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하나님, 그래도 이 재앙을 면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구했던 모세처럼 우리도 그 영혼을 위해서 기도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번 한 주간은 사랑하는 나의 가족 중에 믿지 않는 영혼, 또한 내 지인들 중에 정말 구원받기를 소망하는 사람이 있다면 여러분 돌아오기를 간절한 마음을 품고 기도하시고 그들에게 권면도 하시고 주님의 전으로 초청하는 그러한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물론 한 번에 되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여러분 첫술에 맛없는 것은 있지만 첫술에 배부른 건 없거든요. 그러나 계속 한술 한술 뜨다 보면 어느 순간에 우리 안에 체험의 기쁨,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의 삶 가운데 나타날 것입니다.
여러분 그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를 기대하고 소망하면서 하나님 저 영혼에게 우리 가족의 이 귀한 영혼에게 하나님의 생명의 빛이 임하는 은총이 있게 해 주시옵소서 기도하고 그들을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는 복음의 사명을 잘 감당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애굽 땅에 9번째 재앙을 주십니다. 모세에게 하늘을 향해서 손을 내밀라 그리고 땅 위에 흑암이 있게 하라 명하십시오. 모세는 말씀에 순종하여서 하늘을 향해서 손을 내밉니다. 그리고 애굽 땅에는 흑암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것은 이번에도 역시 이스라엘 자손들이 거주하는 그 땅에는 흑암이 임한 것이 아니라 성경은 증거합니다. 빛이 임했다. 할렐루야 우리 같이 한번 읽어보실까요? 22절, 23절입니다.
모세가 하늘을 향하여 손을 내밀매 캄캄한 흑암이 3일 동안 애굽 온 땅에 있어서 그동안은 사람들이 서로 볼 수 없으며 자기 처소에서 일어나는 자가 없으되 온 이스라엘 자손들이 거주하는 곳에는 빛이 있었더라.
여러분 왜 하나님은 어둠을 이야기하면서 이 땅 가운데는 빛이 있었다는 것까지 말씀해 주셨을까요? 이거는 분명히 같이 공존하는 그러한 모습을 보게 하신 것입니다.
왜 그것을 보게 하셨을까? 오늘 흑암과 빛이 주는 의미를 조금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첫 번째 흑암이라는 것은 먼저 태양신을 심판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여러분 당시에 이 애굽인들이 여러 신을 섬겼습니다. 하지만 신중의 신, 가장 높은 신이라고 생각하는 신이 어떤 신이었는가? 바로 태양신이었다는 것이죠.
고대 이집트인들에게 당시 이 태양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는 것이었어요. 아침이 되면 떠오르고 저녁이 되면 지구 아침이 되면 떠오르고 저녁이 되면 지구 세상에 많은 것들이 변하지만 변하지 않는 그것을 계속해서 반복해가면서 우리에게 공급하는 은혜가 있다라고 생각을 한 것이죠.
그러다 보니 여러분 그 변함없는 일출과 일몰을 통해서 죽음과 생명은 물론 부활의 영원한 순환이 그 빛 가운데 있다고 그들은 믿은 거예요. 그러니 그들에게 있어서 태양신은 절대적 존재였던 것이지 그리고 절대적 그 존재를 등에 업고 왕으로 생활했던 자가 바로였다는 것이죠.
여러분 바로라는 이름은 이집트의 왕명입니다. 그래서 이집트에 무슨 무슨 왕이 있는데 다 그냥 바로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본래 이 의미는 성스러운 관자라는 의미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가면서 통치자라는 의미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고대 이집트인들에게 바로는요 하늘과 땅을 지배하는 신의 후손 하늘과 땅을 지배하는 신은 누구예요? 태양 아까 그 들의 사고에는 높은 곳 그리고 태양 이런 것이 굉장히 그들의 사고에는 높은 신으로 본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태양계라든지 높이 날아가는 새 이런 것들을 이렇게 결합시켜서 만들어낸 그런 우상들이 참으로 많은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 하늘과 땅을 지배하는 그 신이 점지해 준 사람이 바로 왕 그렇기 때문에 신과 같은 자격으로 지상에서 가장 축복되고 보물이라고 할 수 있는 이집트 지역을 보호하는 것이 바로 왕의 임무였다는 거예요.
바로 왕은 그 신의 아들로서 그 지역을 보호할 책임이 있었다는 것이죠. 따라서 바로는 행정적인 책임자와 동시에 성직자로서의 역할도 함께 수행했다라는 것이죠. 그리고 그들 주변에 있었던 고위 관리자들은 바로가 우주의 조화와 정의를 유지할 수 있도록 보좌의 역할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금 애굽 땅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8번이라는 재앙을 통해서 그 땅이 초토화되어버린 게 보호하는 인물을 가지고 있었던 태양신의 아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땅이 쑥대밭이 된 것이죠. 그러다 보니 바로 왕은 그가 보호해야 할 임무를 감당하지 못하는 왕으로 전락해버린 것입니다. 어쩌면 애굽 사람들은 신이 저 태양신이 바울을 외면했다고 마음 먹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9번째 재앙을 통해서 태양신이 바로 왕을 외면한 것이 아니라 바로가 점지해 주었다고 믿었던 태양신이 흑암의 심판을 통해서 신이 아니라는 사실 더불어 여호와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그들에게 알게 하신 것이죠.
생각해 보세요. 흑암으로 인하여서 그들이 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일까요? 성경은 자기 처소에서 일어나는 자가 없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3일 동안 가만히 있어 보셨어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3일 동안 뭘 할 수 있겠어요? 밥은 먹겠습니까? 움직이다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가만히 있을 거 아니에요 대소변을 볼 수 있겠어요? 볼 수는 있겠죠 화장실을 못 갈 뿐이죠. 그 자리에서 알아서 3일 동안 흑암에 있었다.
여러분 이들의 마음 가운데는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실제 3일 동안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그 캄캄한 방에서 누워만 있다고 생각할 때 그들이 할 수 있던 것은? 생각하는 것 그죠? 주변에 있는 사람들하고 대화하는 것 큰 이상은 없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무슨 생각과 무슨 대화를 했을까? 저는 이제 그런 것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마 제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내가 태양신을 섬겼으니 태양신에게 기도하자 이 어둠 좀 물러가게 기도하자 그렇게 마음을 먹고 말을 건네지 않았을까?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지금 처해 있는 자신들의 모습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고 또 생각했을 것입니다. 또한 앞선 재앙들의 시간들이 있었잖아요. 왜 이 과정들이 있었던가를 묵상했겠죠 그리고 거기에는 누가 연결돼 있어요? 종으로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 여호와라는 분이 연결돼 있었고 그분에 의해서 재앙이 오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하는 이 사건을 우리가 8번이나 반복했는데 또 흑감이라는 여러분 흑감이 지속되면서 결국 이렇게 가만히 있다 보면 결국에는 죽겠구나 그 생각이 들지 않겠어요?
그러니 흑암 재앙은요 그들에게 큰 두려움을 가져다주는 재앙이었던 것입니다. 실제 바로나 애굽인들에게 앞선 다른 재앙들과 비교해 볼 때 육체적으로 어려움이 찾아온 건 없었을 거예요.
그렇잖아요 막 파리 떼가 막 공격한다든지 메뚜기 떼가 공격한다든지 이런 육체적인 그러한 어려움은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마음의 고통, 두려움에 휩싸이게 된 것이죠.
또 하나는 지금까지 변함없이 떠오르고 떠오르고 지고 했던 그 태양이 보이지가 않습니다. 아침이 되면 어김없이 나타나야 할 그 태양이 보이지 않는 것이죠. 그렇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빛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흑암으로 말미암아 빛을 비추게 되지 못하게 이 된 상황을 깊이 생각하면서 우리가 섬기고 있는 태양신이라는 것, 이것은 허망하고 무력한 존재구나 아닌 것을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이처럼 하나님은 흑암 재앙을 통해서 그들이 절대적으로 믿고 섬겼던 태양신이라는 것까지 다스리시는 분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섬기고 있던 여호와라는 사실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여호와께서는요 계속되는 재앙을 통해서 애굽 사람들에게 여호와가 나라는 사실을 알리신이 여러분 시편 145편 12, 13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어요. 같이 한번 읽어보실까요?
주의 업적과 주의 나라에 위험 있는 영광을 인생들에게 알게 하리다.
주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니 주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하나님은 위대한 행적들을 통해서 주의 나라가 영원하고
주의 통치가 대대에 이른다는 사실을 사람들로 알게 하셨고 고백하게 하셨다
라는 거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통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통치는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그렇고요 미래에도 영원토록 견고하고 온전하게 세워질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 나라 통치에 대항하는 세력은 과거서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있었고요 앞으로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도전도 거룩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긍휼과 자비가 한이 없으신 하나님께서 왕으로 계신 그 나라는요 결코 무너지거나 쇠함이 없다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고백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거룩하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살아가는 자들임을 기억하시고, 하루하루 살아갈 때 감사함으로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두 번째 흑암은 심판의 날을 예고해 주고 있다라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잘 알다시피 심판의 날은 재앙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사실을 여러분 꼭 기억하셔야 돼요. 누군가에게는 사형이 선고되는 날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무죄를 선고받는 날이다. 즉 구원이 함께 있는 날 그날이 심판의 날이라는 거예요.
따라서 심판의 날은요 생명과 죽음, 빛과 어둠을 구분하는 자리가 될 수 있다. 지금 애굽 땅에 어둠이 임하고 고센 땅에 빛이 했던 것처럼 이렇게 구분되어지는 모습과 같다는 것이죠.
여러분 이제 10번째 재앙이 임하면 이들에게 임할 재앙은 모두가 끝이 납니다. 그리고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지 않았던 바로도 10번째 재앙을 통해서 모두 다 보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생명과 죽음을 구분하는 자리가 될 거예요. 이를 예고해 주는 것이 바로 흑암 재앙이었다라는 거예요. 그래서 11장 4절에 보면 애굽의 초태생이 죽는 10번째 재앙의 특징 중 하나의 흑암을 넣어주셨다는 것이죠.
우리 11장 4절 같이 읽어보실까요?
모세가 바로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밤중에 내가 애굽 가운데로 들어가리니
어둠을 표현하고 있는 이 밤중에 즉 캄캄하던 유월절 밤중에 애굽에 처음 난 것들이 모두 죽게 됩니다. 그리고 그 밤중에 초태생들이 죽게 됨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진정한 생명 구원이 임하게 된 것이지요.
이처럼 심판은 죽음과 생명, 어둠과 빛을 분명하게 구분하는 시간이라는 거예요. 우리는 이 사실을 요엘 선지자의 말씀을 통해서도 발견할 수가 있는데요. 요엘서 2장 31절 말씀 읽어보십니다.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같이 변하려니와
그런데 이렇게 해가 어두워지는 그 두려운 날은 심판과 함께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는 날임을 그다음 절에 고백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 2장 32절 같이 읽습니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이오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이니라.
그래서 여러분 하나님이 애굽 땅에 휘감의 재앙으로 임하게 하셨을 그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주하는 그곳에는 빛이 있었다. 그것을 성경에 기록해 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창세기 1장에 보시면 딸이 혼동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어요? 빛이 있으라 흑감이 기쁨 가운데 있을 그때에 빛이 있으라.
무슨 이야기예요? 창조가 시작되었다라는 것이죠. 그 하나님께서 이제 죄악된 세상 가운데 즉 어둠에 덮인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를 빛으로 보내주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재창조의 역사로 살아가게 하셨다는 그래서 요한복음을 통해서 말씀하시죠.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찬 빛이 있었습니다. 그분이 세상에 계셨고 세상은 그분을 통해서 만들어졌는데도 세상이 그분을 알지 못했습니다. 또한 자기 땅에 오셨으나 자기 백성들까지도 그들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그분은 자기를 영접하고 믿는 자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재창조다 그렇게 말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 빛으로 오신 주님을 영접하는 자는 구원이라는 재창조의 은혜를 입게 되는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는 지금 세상이라는 어둠 가운데 거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빛으로 오신 주님을 영접하여서 구원받은 자의 삶을 살고 계십니까? 오늘 교회 나왔잖아요 여러분 교회다운 것이 구원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 하나 빛으로 오신 예수를 영접하는 자들 그 자들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곧 길이고 진리이며 생명인 것이죠. 따라서 우리는 빛으로 오신 주님을 분명하게 알고 믿을 때에 구원의 은총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빛으로 임하는 주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왜 빛으로 오셨는가를 알면 됩니다. 요한복음 12장 46절에 예수님께서 왜 빛으로 오셨는지를 말씀해 줍니다. 같이 읽어보실까요?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물은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왜 오셨다고요?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고 빛으로 오신 이유가 저와 여러분들이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따라서 빛으로 오신 주님을 영접하는 사람, 구원받은 사람은 어둠 가운데 있어서 돼요 안 돼요? 안 되죠. 그게 논리적으로 맞죠 내가 예수를 영접했다면 거듭났다면 어둠 가운데 거해서는 안 되는 거죠. 빛 가운데 거하며 사는 것이 마땅한 것이죠.
그런데 이제 저와 여러분들에게 다시 한 번 묻습니다. 그러면 나는 지금 어두운 가운데 거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빛 가운데 거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할렐루야 이 고백이 저와 여러분 고백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지막으로 묻습니다. 그러면 빛 가운데 구하는 삶은 뭐예요? 그걸 찾아야 될 거 아니에요 어떻게 사는 게 빛 가운데 사는 겁니까? 요한일서 2장에 보면 정확하게 가르쳐주고 계세요. 요한일서 2장 8절을 먼저 읽어보실까요?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그에게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치니라.
어둠이 지나가고 참빛이 비쳤다.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이걸 조금 쉽게 설명해 드릴게요. 요한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완성된 사랑의 계명 이것을 알지 못하던 시간을 어둠이라고 이야기하는 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을 모를 때를 어둠의 시간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고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죽으셔서 부활하신 그 사건을 아는 그때를 빛의 시간이라고 본 것이죠.
따라서 우리는 먼저 점검해야 될 것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는가 안 믿는가 믿으십니까? 이 고백이 있다면 우리는 어디에 거하는 거예요? 지금 빛에 거하는 거예요. 빛의 시간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짜 빛 가운데 거하는지 안 거하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어지는 2장 9절, 11절에 가르쳐 줍니다. 우리 천천히 한번 읽어보실까요?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습니다.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즉 예수 십자가 사건을 믿음으로 고백하면서 여전히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 그것은 진정한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서 형제를 미워한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순간적이고 일시적인 감정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요 죄인이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제가 이화주 집사님을 미워할 수 있어요. 그렇잖아요 일시적으로 미워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이 지속되는 마음으로 간다면 그것은 죄라는 것이죠.
우리가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그 마음을 가질 순간 순간들은 있겠지만 제가 이화주 집사님을 오늘부터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미워한다 그건요 죄라는 죄 따라서 우리는 그 마음을 먹지 않는다.
왜 또 그 마음을 먹지 않는 줄 아십니까? 내가 예수를 믿으면 거듭나면 내 안에 누가 오세요? 성령님이 성령님이 내가 미워하는 그 마음이 지속될 때 슬퍼하시고 깨닫게 하신다는 거예요. 그래서 돌이키게 하신다는 거예요.
그것이 없다면 성령이 없는 거죠. 그렇죠? 그래서 우리가 서로 사랑하라는 이 세 계명은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고, 지금이 멈춰야 될 때구나 기도할 때이구나라는 것을 알게 하시고, 기도하게 하시고, 화해하게 하시고, 평화의 왕으로 오신 주님의 삶을 살게 하시는 그 삶으로 인도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전서 5장 말씀 속에서 너는 빛의 아들이오 나의 아들들이다.
라고 그리스도인들을 빛의 아들이라 말씀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에 대해서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빛이 되었다라고 에베소서 5장을 통해서 선언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빛으로 오신 우리 주님을 믿으십니까? 우리의 삶의 현장 속에서 그 빛이 밝게 비춰지는 축복의 통로가 되시기를 그리하여서 빛의 열매를 맺고 빛의 사자들이 되어서 어둠을 물리치는 멋진 성도의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