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_ 벽 / 추성은
벽 / 추성은
죽은 새
그 옆에 떨어진 것이 깃털인 줄 알고 잡아본다
알고 보면 컵이지
깨진 컵
이런 일은 종종 있다
새를 파는 이들은 새의 발목을 묶어둔다
날지 않으면 새라고 할 수 없지만 사람들은 모르는 척 새를 산다고, 연인은 말한다
나는 그냥 대답하는 대신 옥수수를 알알로 떼어내서 길에 던져두었다
뼈를 던지는 것처럼
새가 옥수수를 쪼아 먹는다
몽골이나 오스만 위구르족 어디에서는 시체를 절벽에 던져둔다고 한다
바람으로 영원으로 깃털로
돌아가라고
애완 새는
컵 아니면 격자 창문과 백지 청진기 천장
차라리 그런 것들에 가깝다
카페에서는 모르는 나라의 음악이 나오고 있다 언뜻 한국어와 비슷한 것 같지만 아마 표기는 튀르크어와 가까운 음악이고
아마 컵 아니면 격자 창문과 백지 청진기 천장이라는 제목일 것이고
새장으로 돌아가라고……
아마 그런 의미겠지
연인은 나 죽으면 새 모이로 던져주라고 한다
나는 알이 다 벗겨진 옥수수를 손으로 쥔다
쥐다 보면 알게 될 것이다 컵은 옥수수가 아니라는 것
노래도 아니고
격자 창문과 백지 청진기도 아니고
진화한 새라는 것
위구르족의 시체라는 사실도
새의 진화는 컵의 형태와 비슷할 것이다
그리고 끝에는 사람이 잡기 쉬운 모습이 되겠지
손잡이도 달리고 언제든 팔 수 있고 쥘 수도 있게
새는 토마토도 아니고 돌도 아니기 때문에 조용히 죽어갈 것이다*
카페에서 노래가 흘러나온다
그건 어디서 들어본 노래 같고 나는 창가에 기대서 바깥을 본다
곧 창문에 새가 부딪칠 것이다
깨질 것이다
<詩 부문 심사평> 정끝별 시인, 문태준 시인
[2024 신춘문예] 감각·사유·언어를 오가며 빚어낸 ‘미래의 시인’
시는 긴장이고 충돌이다. 도전이고 모험이다. 새로운 시는 안전이나 완전과는 멀리 있다. 뛰어난 시는 지금-여기에서 저기-너머를 꿈꾸게 한다. 신인에게 기대하는 시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추성은 씨를 새로운 시인으로 추천한다. 감각, 사유, 언어라는 시의 세 꼭짓점을 오가며 빚어낸 그의 시편들은 읽는 사람을 충분히 매료시키며 시의 안쪽에 오래 머물게 한다. 당선작 ‘벽’은 녹록하지 않은 신예의 탄생을 예고하는 수일(秀逸)한 작품이다. 버드 스트라이크 혹은 조류 충돌의 새에게 사람 사는 곳이란 온통 부딪힐 수밖에 없는, 차단된, 차가운 벽이다. 그러니 ‘새’의 선택지는 진화하거나 깨져 죽거나, ‘창’ 안에서 ‘옥수수’를 받아먹으며 길들거나 창의 ‘바깥’으로 넘어서거나, 숱한 ‘새 아닌 새’가 되거나 ‘진짜 새’가 되거나일 것이다. 비단 새뿐이겠는가. 이 시가 반문명과 비인간을 지향하는 시로 읽히는 대목이다. 미래의 시인으로서 우리 시의 지평을 새롭게 열어가길
개인적 시 감상
벽 / 추성은
죽은 새
(투명 유리에 부딪혀 죽은 새)
(투명유리는 보이지 않는 벽으로 인간의 자유를 가로막는 관념, 제도, 이념 등을 상징한다)
그 옆에 떨어진 것이 깃털인 줄 알고 잡아본다
(죽은 새 옆에 떨어진 깃털을 잡아본다)
알고 보면 컵이지
(깃털은 새가 살았을 때나 깃털의 기능을 한다.죽은 새의 깃털은 무생물인 컵이나 다름없다.)
깨진 컵
이런 일은 종종 있다
(새가 유리창에 부딪혀 죽는 일은 종종 있다)
(사람이 자유를 가로막는 제도 등에 희생되는 일은 종종 있다)
새를 파는 이들은 새의 발목을 묶어둔다
(권력은 자신들이 구축하는 제도, 법률, 사상 등이 인간을 이롭게 하고 자유롭게 한다고 하지만 사실 자유의 발목을 묶어둔다)
날지 않으면 새라고 할 수 없지만 사람들은 모르는 척 새를 산다고, 연인은 말한다
(겉모양은 새같지만 날지 못하면 새가 아니다.새의 본질은 하늘을 나는데 있기 때문이다.그런데 사람들은 날지 못하게 발목을 묶은 새가 표피적으로 인간을 즐겁게 하므로 모른 척한다)
(인간성의 자유를 제한하는 제도를 만들어도 돈을 버는데 혹은 내 집단에 도움이 된다면 모른 척한다)
나는 그냥 대답하는 대신 옥수수를 알알로 떼어내서 길에 던져두었다
(나도 모른 척한다. 이 자유제한의 시스템의 일원으로 옥수수을 알알이 떼어내어 길에 던져두었다.옥수수 씨앗은 땅에 뿌려서 생명을 싹틔워야 옥수수이므로 길에 던지면 더이상 옥수수가 아니다)
뼈를 던지는 것처럼
(뼈는 인체의 핵심부분이다.그러므로 인간의 핵심부분인 자유를 내던진것과 같다)
새가 옥수수를 쪼아 먹는다
(자유를 제한 당한 새가 자유를 잃은 옥수수를 쪼아 먹는다)
몽골이나 오스만 위구르족 어디에서는 시체를 절벽에 던져둔다고 한다
바람으로 영원으로 깃털로
돌아가라고
(풍장은 자연의 일부로 돌아가라는 긍정적인 기능을 하는 풍습이다)
애완 새는
컵 아니면 격자 창문과 백지 청진기 천장
차라리 그런 것들에 가깝다
(애완 새는 자유를 제한당하고 있으므로 자유가 없는 컵, 더 나아가 벽을 상징하는 격자 창문, 백지, 청진기, 천장에 가깝다)
카페에서는 모르는 나라의 음악이 나오고 있다 언뜻 한국어와 비슷한 것 같지만 아마 표기는 튀르크어와 가까운 음악이고
(자본주의 시스템인 카페 안에서 모르는 음악이 나오는데 한국어와 비슷한 가사이다)
아마 컵 아니면 격자 창문과 백지 청진기
(유사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천장이라는 제목일 것이고
새장으로 돌아가라고……
아마 그런 의미겠지
(표면적으로는 자유라고 말하지만 사실 벽인 경우일 수도 있다)
(음악은 반복적 기능이 있고 카페 시스템에 맞는 음악이므로 이념을 전달하고 홍보하는 기능을 한다)
연인은 나 죽으면 새 모이로 던져주라고 한다
(연인은 자신이 죽어도 이 시스템의 일원으로 죽겠다고 한다. 이 시스템의 위험성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알이 다 벗겨진 옥수수를 손으로 쥔다
(나는 알 즉 핵심이 없어진 빈 옥수수 대공을 쥔다)
쥐다 보면 알게 될 것이다 컵은 옥수수가 아니라는 것
(쥐다 보면 컵은 빈 껍데기, 자유를 제한당한 사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노래도 아니고
격자 창문과 백지 청진기도 아니고
(시스템을 찬양하는 노래도 아니고 벽으로 기능하는 것도 아니고)
진화한 새라는 것
(이 시스템 안에서 자발적으로 진화한 혹은 맹신하는 새로운 사물이라는 것)
위구르족의 시체라는 사실도
(위그르족의 시체는 자연의 일부로 돌아가는 자연스러운 것인데 우리 인간이 이렇게 자연스럽게 부자유 속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사실)
새의 진화는 컵의 형태와 비슷할 것이다
그리고 끝에는 사람이 잡기 쉬운 모습이 되겠지
손잡이도 달리고 언제든 팔 수 있고 쥘 수도 있게
(새의 진화 즉 자유를 잃어가는 사물은 권력이 다루기 쉬운 모습이 되겠지)
새는 토마토도 아니고 돌도 아니기 때문에 조용히 죽어갈 것이다*
(유리창에 부딪힌 토마토는 유리창에 붉음이 낭자하고 유리창에 부딪힌 돌이라면 유리가 깨질텐데 새는 유리창에 부딪혀도 시스템에 영향을 주지 않으므로 자유는 조용히 죽어갈 것이다)
카페에서 노래가 흘러나온다
그건 어디서 들어본 노래 같고 나는 창가에 기대서 바깥을 본다
(자본주의 시스템을 상징하는 카페에서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노래가 반복된다)
(나는 다른 사람과는 달리 자유가 제한당하는 사실을 인식하고 안이 아닌 바깥을 관조한다)
곧 창문에 새가 부딪칠 것이다
깨질 것이다
(잘못된 시스템에 순응하면 비극은 되풀이 될 것이다)
1. 메시지
ㅇ주제: 자유를 억압당할 때 저항하지 않고 모른 채하면 다루기 쉬운 존재로 퇴화할 것이다. 자유가 제한당한다는 인식이 깨어나지 않으면 인간의 희생은 조용히 계속될 것이다)
ㅇ시로 들어가는 철학
-칼 포퍼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의 형식을 시적으로 형상화
<닫힌 사회는 자유가 억압된 사회이며 그 속의 개인은 원자화되어 자신만의 세계 속에서 기능한다.전체적인 세계상을 보지 못하고 알아도 모른 채 무시하며 자유에 족쇄가 채워지는 모순 속에 산다.권력자가 조작하기 쉬운 대상으로 전락한다>https://m.cafe.daum.net/somdaripoem/rA34/962?svc=cafeapp
-하이데거의 계산적 사유와 감상적 사유
*감상적 사유:경이의 기분속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계산적 사유:과학적 방식으로 세상을 보는 방식.과학의 종교화가 세상을 계산적 인간으로 만들며 인간성을 상실하게 함
2. 이미지
ㅇ 컵의 이미지-컵은 내용물을 담는 그릇.깃털은 새를 담는 그릇, 나는 애인을 담는 그릇, 제도는 자유를 담는 그릇, 음악은 메시지를 담는 그릇, 한국어는 한국인의 사상을 담는 그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