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년01월 서울구치소 최고수 상담 및 교리 진행 ★
★이해를 그대의 유일한 법으로 삼아라 ★
“자유로운 존재가 되는 것, 이것이 인간의 존엄성이다”
▷ 일 시 : 불기2568 (2024)년1월15일 (월) 오후1:00~4:00
▷ 장 소 : 서울구치소 소법당
지도법사: 보광-조철주
*상구보리 하화중생 *
2024년1월15일(월) 서울구치소
최고수 정기 자매 상담 및 교리를 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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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귀의와
한글 반야심경 봉독을 하고,
상담 후 생활법문 및 교리를 전하였으며,
한해 편안과 건강을 기원하고,
사홍서원을 끝으로,
새해 첫 번째 만남을 회향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시아본사 석가모니불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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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내용 : < 라즈니쉬 오쇼의 반야심경 The Heart Sutra>186~191p
★이해를 그대의 유일한 법으로 삼아라 ★
“자유로운 존재가 되는 것, 이것이 인간의 존엄성이다”
무(無)는 두려움을 모른다.
거기엔 탐욕도, 야망도, 폭력도 없다.
무(無)는 범용(凡庸, mediocrity)과 어리석음을 모른다.
무(無)의 세계에는 천국도 없고 지옥도 없다.
거기에는 두려움이 없으므로 지성이 존재한다.
이것이 가슴에 새겨 둘 가장 위대한 말씀 중의 하나이다.
두려움이 없을 때 지성이 존재한다.
이때 그대의 행동은 전혀 다른 특성을 갖는다.
무(無)에서 나온 행동은 질적으로 다르다.
그 행동은 신성하고 성스럽다.
▶무(無)와 대면하기 위해서는 그대 또한 무(無)가 되어야 한다.
왜 그런가?
무(無)에서 나온 행동은 '반응(reaction)'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無)에서 나온 행동은 계획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전에 연습 된 것이 아니다.
무(無)에서 나온 행동은 즉흥적 (spontaneous : 오쇼는 거의 모든 강의에서 이 단어를 사전적인 정의와는 다소 다른 의미로 사용한다. 순간에 응하는 것, 어떠한 인위적 조작도 없이 일어나는 그대로 상황에 응하는 것을 말한다. 자발적이라는 말과도 상통한다)이다. 이때 그대는 순간순간을 산다.
그대는 무(無)이다.
하나의 상황이 생겨나면 그대는 이 상황에 감응(respond) 한다.
만약 그대가 에고라면 그대는 결코 감응하지 못한다.
항상 반응할 뿐이다.
이것을 설명해 보자.
에고로 있을 때 그대는 언제나 반응한다.
가령 그대가 자신을 아주 선하고 성스러운 사람으로 생각한다고 하자. 187p
누군가 그대를 모욕한다면 그대는 이 모욕에 감응할 것인가,
아니면 반응할 것인가?
자신을 성자로 생각한다면 그대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성자의 체면을 유지할지 신중하게 생각할 것이다.
이렇게 신중하지 않으면
사람의 모욕이 그대의 성스러움을 단번에 무너뜨릴 수도 있다.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 순간에도 시간은 흘러간다
이때 그대는 즉흥적일 수 없다. 돌이켜 생각해 보아야 한다.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 순간에도 시간은 흘러간다.
한순간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시간이 흘러간다.
그러므로 이것은 즉흥적인 행동이 될 수 없다. 순간에서 나온 행동이 아니다.
그대는 과거를 통해 행동한다. 그대는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화를 내면 나의 성스러움은 일거에 무너질 것이다.
이것은 너무 값비싼 대가이다.“
그래서 그대는 미소 짓기 시작한다.
자신의 성스러움을 지키기 위해 그대는 억지로 미소 짓는다.
이 미소는 가짜다. 이것은 가슴에서 우러나온 미소가 아니다.
입술 위에 위장된 미소일 뿐이다.
이것은 가짜다.
웃고 있는 것은 그대가 아니다. 그대가 쓴 가면이 웃고 있는 것이다.
그대는 상대방을 속이고 있다. 그대는 위선자이다. 사이비 인간이며 가짜이다.
그러나 이렇게 행동함으로써 그대는 성자의 체통을 지켰다.
그대는 과거를 통해 행동했다.
자신에 대해 갖고 있는 특정한 이미지와 관념을 통해 행동했다.
그것은 반응이었다.
즉흥적인 인간은 결코 반응하지 않는다.
그는 감응한다. 여기엔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
그는 상황이 자신에게 작용을 미치도록 허용한다.
그리고 어떤 감응이 나오든 그것을 허용한다.
과거에 의존해 사는 사람은 예측이 가능하다.
그러나 순간에 사는 사람은 예측할 수 없다.
예측 가능한 존재가 된다는 것은 곧 사물로 전락함을 의미한다. 188p
그리고 예측 불가한 존재가 되는 것은 자유로운 존재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자유로운 존재가 되는 것, 이것이 인간의 존엄성이다.
그대가 예측 불가능한 존재가 되면 아무도 그대를 예측할 수 없다.
그대 자신조차 모른다. 이것을 명심하라, 그대 자신조차 자기를 예측할 수 없다.
만일 자신이 어떻게 행동할지 이미 알고 있다면, 그대의 행동은 더 이상 감응이 아니다.
그대는 이미 준비되어 있다. 그것은 사건에 훈련된 것이다.
예를 들어,
그대가 면담을 하러 갈 예정이라고 하자. 그대는 예행연습을 한다.
어떤 질문이 나올지, 어떤 식으로 대답할지 미리 생각해 둔다.
이런 일이 날마다 일어난다. 너무나 분명하게 일어난다.
매일 저녁 나는 이곳에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음을 본다.
어떤 사람은 기성복 같은 완제품으로 이곳에 와 있다.
그는 내게 무슨 말을 할지 생각해 보고 미리 준비까지 해두었다.
이미 원고가 준비되었다. 이제 남은 일은 그 원고를 읽는 것밖에 없다.
그는 어떤 질문을 할 것인지 미리 결정해 두었다.
그런데 나는 그가 곤경에 처하는 것을 본다.
내 앞에 앉으면 전혀 다른 상황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분위기, 현존, 나에 대한 그의 사랑, 그에 대한 나의 사랑, 다른 사람들의 존재,
너무나 생생하게 느껴지는 신뢰, 거기에 흐르고 있는 사랑의 물결,
명상적인 분위기, 이런 것들은 그가 사전에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른 상황이다.
이제 그가 준비했던 것은 터무니없어 보인다. 그것은 상황에 맞지 않는다.
그는 '어떻게 하지?' 하면서 안절부절하고 불안해진다.
그는 즉흥적으로 행동하는 법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모른다.
그가 내 앞으로 나올 때 나는 그 허구성을 본다.
그의 질문은 가슴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다만 목구멍에서 나온 질문이다.
거기엔 깊이가 없다. 그의 목소리에 깊이가 없다. 189p
그 자신도 지금 이런 질문을 묻고 싶은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그는 질문을 준비했다.
어쩌면 여러 날 동안 준비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마음은 '어서 물어 봐. 그렇게 애써서 준비한 게 아깝지도 않아?' 하고 말한다.
그는 이것이 터무니없는 일임을 안다.
어쩌면 그 질문은 이미 대답 된 것일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의 질문을 받고 내가 이미 대답한 문제일 수도 있다.
어쩌면 나와 마주 앉은 상황 속에서 그의 마음이 바뀌었기 때문에
사전에 준비한 질문은 이제 아무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과거를 통해 행동한다. 이것이 반응이다.
질문할 게 없을 때 그는 당황한다. 아주 어색한 순간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는 엉엉 울지도 못한다. 위선에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그는 간단하게 안녕하십니까?' 하고 인사를 건네지도 못하고,
'제가 바라는 것은 그저 당신 앞에 1분 동안만 앉아 있는 것입니다.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 하고 말하지도 못한다. 그는 '이 순간'을 통해 행동하지 못한다.
그는 '지금 여기에 있지 못한다. 그는 당혹감을 느낀다. 그러므로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저 친구는 질문할 것도 없으면서
왜 다르샨(darshan)을 요청했지?' 하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묻는다.
그는 더 이상 그 질문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 질문은 더 이상 아무 의미도 없는 진부한 질문이다. 그래도 그는 묻는다.
그대도 알겠지만,
나는 어떤 사람들의 질문에는 장시간 대답하고,
어떤 사람들의 질문에는 아주 짤막하게 대답한다.
내가 어떤 사람이 진실하지 못한 것을 볼 때,
그의 질문이 가짜이며 이미 준비된 것임을 알 때,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그래도 내가 그의 질문에 간단하게나마 응하는 것은 순전히 그를 존중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는 그의 질문에 아무 관심도 없다. 진실치 못한 질문자는 나의 말에 관심이 없다.
그는 자신의 질문에도 관심이 없다. 그러니 나의 대답에 무슨 관심이 있겠는가. 190p
그러나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서서히 거짓이 사라지고 점점 더 진실해져 가는 산야신들이 있다.
어떤 사람은 내 앞에 나와 앉아서는 그냥 웃는다.
이것은 그 순간에 나온 행동이다. 그는 당혹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는 이런 행동이 상황에 맞지 않는다고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미리 준비된 원고가 틀린 것이다.
무(無)와 대면하기 위해서는 그대 또한 무(無)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진정한 만남이 일어난다.
오직 비슷한 것들끼리만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크나큰 기쁨과 아름다움이 있다. 거기에 대화가 있다.
입 밖으로 한마디 말도 나오지 않았을지라도 거기엔 대화가 있다.
간혹 어떤 사람은
내 앞에 나와 앉아서 눈을 감고 천천히 몸을 흔들면서 내면으로 들어간다.
이것이 내게로 오는 방법이다.
그는 자신의 내면에 들어감으로써 즉각 내 안으로 뛰어든다. 그리고 내가 그의 안으로 뛰어 들도록 허용한다.
또는 그저 내 발을 만지거나 내 눈을 들여다본다.
또는 큰 의문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이 질문은 순간 속에서 나온 것이다.
이 질문은 진실하다. 이 질문에는 엄청난 힘이 담겨 있다.
이 질문은 그의 가장 깊은 중심부에서 나온 것이다.
그때 이 질문은 상황에 맞는 질문이다.
무(無)로부터 행동할 때 그대는 감응한다.
그것은 더 이상 반응이 아니다. 그대의 행동 안에는 진리와 타당성이 있다.
진실함이 있다. 그 행동은 실존적이다.
그것은 명상적이고 즉흥적이며, 단순하고 순진무구한 행동이다.
그리고 이 행동은 어떠한 카르마(kama, 業)도 남기지 않는다.
'카르마 라는 단어는 특정한 행동을 의미한다. 이것을 명심하라.
모든 행동이 카르마를 낳는 것은 아니다.
붓다는 깨달음을 얻은 후에 42년을 더 살았다.
하지만 191p
그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보리수 나무 아래에만 앉아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수많은 행동을 했지만 카르마가 생기지 않았다.
그는 행동했지만 그것은 더 이상 반응이 아니었다. 그것은 감응이었다.
‘만일 그대가 무(無)로부터 감응한다면 그 행동은 찌꺼기를 남기지 않는다.
아무 자취도 남기지 않으며 아무런 카르마도 짓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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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출처: 오쇼라즈니쉬 강의(손민규 옮김 ) 『반야심경 』 초판 2쇄; 서울:태일출판사,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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