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생각하는 자연순환장의 함의 (유방종)
1. 머리말
인간과 가축 이외의 지구의 모든 구성원들은 자연 그대로의 처리과정에 따라 순환된다. 산업혁명 이전 시기에 인간과 동물의 동력, 물레방아 등의 수력을 이용할 때에는 인간이 생태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도 못했고, 그저 자연을 활용하여 살아가면 그만일 따름이었다.
그러나 산업혁명 이후 화석연료의 사용과 함께 인구가 급증하면서 생태계의 변화를 야기하는 인간의 힘에 거대한 가속화가 일어났다. 이에 따라 인간이 지구 지질시대 변화의 강력한 변인이 되는 인류세(anthropocene)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었다.
인류세는 생물 중 한 종(species)인 인간이 지구의 지질을 바꿀 힘을 갖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런 힘을 갖게 된 것이 긍정적인지, 아닌지에 대한 의견이 일치되지는 않았으나, 인간이 지구환경에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먹이사슬은 한 단계 이동할 때마다 에너지가 1/10로 감소한다고 한다. 최상위 포식자인 인간이 먹고 살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먹이사슬의 하부구조가 필요한 지 알 수 있다.
환경오염과 생태계 파괴, 지구온난화가 오직 많은 인구 때문인 것만은 아니다. 끝없는 성장과 시장 확대를 추구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물질과 에너지를 낭비하고 소모하는 소비지상주의 등 여러 가지 문제가 복합되어 있다.
2. 관련된 문제들
가. 인구와 도시화
인간이 증기, 전기 등의 기계동력을 이용하게 되면서 석탄, 석유, 천연가스 등 화석연료를 많이 사용하게 되었다. 화석연료는 효율성을 높여 생산력을 증대시켰고, 인구도 급증하였다.
세계 인구는 이제 80억명을 넘어섰다. 지구는 이미 만원이다. 생물이 환경수용능력을 초과하여 꽉 들어찬 상태가 되면 어떻게 될까? 서식지 밀도가 낮아져 적정 개체수가 될 때까지 서로 싸우거나, 개체군 붕괴를 겪게 된다. 인구가 계속 증가한다면 지속가능한 사회란 존재할 수 없다. 인간도 머지않아 자원전쟁 상황에 처하거나, 전염병 등으로 자멸하지 않을까 우려된다.
또 도시화가 급격히 진행됨에 따라 도시의 인구가 선진국은 80%, 전 세계적으로도 50%를 넘어섰다. 도시는 건물, 상하수도, 교통, 냉난방 등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에너지가 필수적이다. 인간의 절반 이상이 거주하는 도시는 일상적인 기능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물질과 막대한 에너지를 24시간 내내 소모한다.
인구가 70억명이던 2013년에 백만명이 넘는 도시의 수가 5백개, 그중 27개 도시는 1천만명, 12개 도시는 2천만명이상이었다. 이들은 모두 많은 양의 쓰레기와 CO2를 배출하며 음식, 연료, 주거 등 다양한 서비스를 필요로 한다.
이제 인간의 동태는 환경과 생태계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따라서 인간이 얼마나 생태계를 유지, 관리하기 위해 노력하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자연순환장은 이러한 과제의 일부를 감당하기 위한 긍정적인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나.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
시장경제는 매매의 대상, 특히 자본과 그 운용을 선과 악이라는 윤리적 굴레에서 해방시켜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하나의 메커니즘인 것처럼 연결되어 사용된다.
자본주의는 콜럼버스 이후 자본의 초기 축적기에 해적, 약탈, 수탈, 침략, 기업적 노예매매 등을 했던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이윤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어떤 방식으로든 가리지 않고 이를 수행해 왔다.
금융자본주의는 이런 경향을 더욱 심화시켰다. 금융자본주의는 중개행위를 통해 예금자나 투자자와 자금운용을 분리시킨다. 예금자, 투자자는 마치 타고 있는 버스가 교통규칙을 위반하거나 말거나 상관하지 않고 빨리 가기만 바라는 승객처럼 오로지 수익성을 기준으로 판단한다.
기업이 수익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생산비용을 낮춰야 한다. 경제주체의 입장에서 긍정적 외부효과지만, 이는 생태계라는 폐쇄계의 순환차원에서 볼 때 ‘비용은 사회화하고, 수익은 사유화’하는 과정이다.
공장, 광산, 자동차 등은 폐수, CO2 등 오염물질을 배출하고, 스타벅스는 플라스틱컵, 종이컵 등 일회용품 처리비용을 사회화한다. 이렇게 기업이 긍정적인 외부효과를 추구하면 기업의 수익은 높아지고, 이는 곧 자본(주주)의 이윤을 높이는 결과로 나타나게 된다.
결국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작동하는 메커니즘은 수질과 대기오염 등 각종 공해물질과 비닐과 플라스틱 등의 처리비용을 사회화함으로써 환경을 오염시켜 우리가 살고 있는 생태계를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계속 성장과 확장을 하여야 생존할 수 있기 때문에, 더 많이 생산해서 더 많이 소비하는 소비 지향적 가치체계를 추동한다.
최근 지구 온난화, 환경오염, 생태계 파괴 등에 대한 규제나 국제적 합의를 위한 움직임이 있고, 이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합의도 쉽지 않고, 각종 예외나 책임소재 회피 등 임시적, 제한적 처방에 그칠 뿐이어서 그 실효성에는 의문이 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요인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이윤추구 동기와 그로 인한 비용의 사회화 메커니즘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경제주체들이 이런 알고리즘에 의해 움직이기 때문에 지구온난화, 환경오염 방지 등을 위해 각종 캠페인을 벌이는 등 계속 노력해 왔어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ESG(Environment, Social, Governance), 탄소발자국과 같이 기업의 목표와 사회적 환경이라는 거시적 합리성을 고려하도록 만들면 되지 않을까? 경제주체들이 자본주의 시장경제 메커니즘도 불구하고, 과연 제대로 추진할 수 있을까?
이는 새로운 도전과제다. 기업과 개인 등 경제주체는 지구 온난화와 환경 오염의 해결을 위해 에너지를 덜 쓰고, 요금은 더 많이 낼 용의가 있는지, 투자자로서 우리는 수익성만이 아닌 생태적, 윤리적 기준의 적용을 고려할 수 있는지, 덜 벌고 덜 소비하는 더 불편한 삶을 살아갈 용의는 있는지 여부에 달려있다.
개인적 선택은 가능하다고 보나, 전체적으로 가능할 지는 의문이다.
다. 환경오염과 생태계 파괴
이제 지구 환경과 생태계는 과거처럼 인간이 자연을 개간, 경작해서 사용하면, 나머지는 생태계의 순환과정에서 저절로 처리되는 단계를 넘어섰다. 많은 인구가 먹고, 사용하고, 버리는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처리되기는 불가능하다.
생물의 번식잠재력을 엄청나다. 그러나 번식력은 먹이사슬에 의해 억제된다. 어떤 이유로 먹이사슬의 제어능력이 제대로 발휘되지 않으면 일시적으로 개체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할 수 있으나, 먹이나 환경 등에 의해 조정되거나, 스스로 자멸하는 현상을 보인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지금의 인구는 최근 이백년 사이에 6배, 백년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4배나 증가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별 생각 없이 누리는 우리의 일상이 지구 환경과 생태계에 커다란 재앙을 초래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다지 실감하지 못한다.
인간은 공통의 위기를 자각하면 서로 힘을 합쳐 위기에 맞서 대응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 자연순환장을 추진하는 것도 이러한 생태적 위기를 자각하고, 힘을 합쳐 개선해 나가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 할 것이다.
라. 믿음과 종교
우리 조상들이 숲에서 바스락하거나 윙윙거리는 소리의 원천을 추적해 보았다면 ‘숲의 신’이나 ‘숲의 정령’이 내는 소리가 아닌 별 의미 없는 바람소리거나, 다람쥐 소리였다는 걸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분석하고 대응한다 한들 그게 생존에 별 도움을 줄 수 있는 건 아니다. 중요했던 건, 그런 소리가 났을 때는 포식자가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많은 바스락거리는 소리 중 한번이라도 사자나 호랑이가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면, 소리가 날 때는 무조건 빨리 도망친 사람이 살아남아 우리의 조상이 될 수 있었다. 재빠른 판단과 행동이 생존에 유리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우리는 ‘정확한 진실’보다는 ‘단순하고 유용한 믿음’을 선호하는 인간이 되었다.
진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으며, 우선 순위는 번식과 생존에 있다. 따라서 인간의 두뇌는 사실이나 진실보다, 번식과 생존에 유리한 믿음을 낳는 쪽으로 진화해 왔다. 인간이 큰 집단을 이루어 살 수 있는 것은 상상하는 것을 공유하고, 그걸 믿을 수 있는 능력 때문이다. 믿음은 진실보다는 대처해야 하는 조건에 대한 상황적 분석과 감정적 반응이 복잡하게 섞여 나타난 결과인 것이다.
우리는 영혼을 통해 불멸을 얻기 위해 자신의 몸을 억압하고 쾌락을 희생하며, 가능한 한 죽음을 멀리하고 외면하기도 한다. 죽음에 맞서 영속적 가치가 있는 일, 종교나 예술 등에 동참해 죽음을 초월한다고 믿는다.
믿음은 죽은 뒤의 불멸에 대한 소망과 망자에 대한 제사 등의 형식으로 구체화되고, 이집트의 미이라처럼 육체의 보존과 사후의 재생을 연결시키기도 한다. 이렇게 생전의 육체와 사후의 영생을 연결시키는 믿음은 시신의 훼손, 부패를 거부하는 형태로 나타나 자연순환장의 처리방식을 거부할 수도 있다.
서구의 기독교적 전통은 인간과 자연의 대립적 구도로 인간이 자연(또는 이교도)을 이용, 착취하는 행위가 신의 뜻이라고 보았다. 근대의 자연관도 물질은 불활성의 세계로 일종의 기계일 따름이었다.
기계적 자연관에서 자연은 그저 활용하면 될 뿐이지 무생물과 인간, 다른 생물과 인간간의 유기적 관계나 전체적, 종합적 생태계 변화 등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다.
기계적 자연관은 우리 일상에서 아직도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으나, 인류세가 운위되는 지금 시대의 지구환경이나 생태계에 적절치 않다는 것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러한 인식하에 인간과 자연이 상호보완적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초석 중의 하나가 자연순환장이라고 생각한다.
마. 유교와 제사
우리는 삼국시대 이후 유학을 통치 이념으로 활용하고,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에는 성리학을 건국이념으로 하는 통치철학이 확립되었으며, 사서삼경은 교육과 인재의 등용을 위한 기본교재가 되었다.
유학은 천제(天帝)와 천명(天命)을 최고의 가치표준으로 삼고, 유교는 하느님과 조상에게 효도하기 위한 ‘제사의례’를 기본으로 삼는다. 왕(황제)은 하늘제사(天祭)를 지내는 제사장이었으며, 천명(天命)을 받은 천자(天子)로 불렸다. 이는 제사라는 의례가 가장 중요한 통치수단이었음을 보여준다.
제사란 보본반시[報本反始 : 근본을 갚고, 시초로 돌아간다. 즉, 천지(天地)와 어버이조상(父祖)의 은혜를 갚는 것]로 인간의 도리(孝道)를 다하는 것이다.
조상에 대한 제사를 제례(祭禮)라 하고, 장사지내는 것을 장례(葬禮)라고 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은혜를 갚고 자식으로서 도리를 다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왜 장례에 소홀함이 없도록 애써 준비하고, 장례식이나 제사에 드는 비용을 아끼지 않았는지 말해준다.
또 제사는 ‘은혜를 베푸는 도리(惠下之道)’라 하여 천한 직업을 가졌거나,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제수(祭需)를 나누어 주었다 그래서 군주나 종갓집 같은 위치의 사람들은 제사가 많고, 제사가 많으면 주변의 가난한 사람들이 헐벗고 굶주리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의 전통에서 제례나 장례는 조상에 대한 도리의 측면이 있다. 비용을 아끼거나, 제수(祭需)를 베풀지 않는 것은 마땅한 도리(孝行)가 아니라는 의식은 아직까지도 많이 남아 있다. 장례나 제례에 허례허식이 많은 것은 이런 연유 때문이다.
이는 자연순환장도 충분한 예우를 갖추지 않으면 안된다는 걸 시사한다. 자연순환장이 장례비용이 덜 들고, 흙으로 돌아간다는 점에서 긍정적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망자에 대한 도리를 다하지 못한 걸로 치부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주검을 생태적으로 처리하면서도, 우리 사회의 유교적 사고방식에 잠재되어 있는 조상과 부모에 대한 효도의 명분을 고려한 적절한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3. 자연순환장의 의미
가. 자연에 대한 책임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개발을 당연시하고, 생태계를 가꾸고 보존한다는 것은 생활의 불편이나 불필요한 비용만 늘어난다는 부정적인 시선으로 보아 왔던 것이 사실이다.
이제는 생태계 파괴나 지구온난화가 생존과 직결된다는 인식이 강해졌다. 그만큼 환경오염, 기후변화 등의 영향을 깨닫고, 위기가 닥쳐올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지질시대를 좌우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된 인류세에 우리는 자연과 더불어 조화롭게 사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이제 인간은 지구 환경과 생태계 보존에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이러한 인간으로서의 책무를 다하고자 하는 구체적, 실천적 행동 가운데 하나가 삶을 마감하는 단계에 자신의 주검을 분해시켜 생태계의 유기적 순환이 원활히 이루어지도록 하는 자연순환장이라고 할 수 있다.
나. 생태계 유지, 복원
코뿔소, 오랑우탄 뿐 아니라, 지구의 대다수 생명들은 인간의 선택과 결정에 따라 삶과 멸종의 갈림길에 들어서 있다. 이들이 그런 한계상황으로 내몰리게 된 것은 벌목이나 작물 재배, 자원 개발 등에 의한 서식지 파괴와 생태계 훼손 때문이다.
환경과 생태계는 장차 태어날 생명들에게는 생득권이다. 다음 세대의 권리를 소중히 여긴다는 측면에서 지금 살고 있는 인간들이 환경과 생태계를 파괴하지 않고 잘 유지, 관리할 필요가 있다.
너무나 당연하여 늘 의식하지는 않지만, 자연은 우리 삶의 기반이자 조건이다. 물고기가 언제나 당연하게 여기던 물이 소중하다는 걸 알게 되는 때가 오면, 물고기는 위태롭다. 물고기가 일상에서 물의 소중함을 모르는 채 살아가듯, 인간도 그렇다.
우리는 그동안 자연을 개발하여 활용만 하면 될 줄 알았다. 그러나 우리가 깨우치게 된 것은 자연이 인간을 위한 것도, 인간의 필요에 의해 존재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자연은 지구상 모든 존재들의 터전이다. 편협하고 이기적인 인간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관심과 애정으로 뭇 생명들을 보살필 필요가 있다.
인간은 모든 존재들의 삶의 터전인 자연과 환경이 잘 보존되고, 순환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생태계 유지, 복원의 관리자로서 인간의 역할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
다. 베품과 나눔
우리는 사는 동안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 타자의 생명을 취하여야 한다. 삶은 다른 생명의 주검으로 유지되는 것이며, 인간을 제외한 모든 생명체의 주검은 다른 누군가의 먹이이다. 그렇게 보면 타자의 죽음은 우리 삶의 조건이다.
인간은 자연과 생태계의 예외적 존재가 아니다. 생명으로 있는 동안 받았던 것처럼 당연히 돌려줄 줄도 알아야 하며, 그것은 나의 주검이 다른 생명의 살림살이에 쓰여야 한다는 뜻이다.
화장처럼 불태워 없애 버리거나, 돌무지나 도자기에 보전하기 보다는 죽은 다음에는 내 주검으로 다른 생명들이 살아갈 수 있게 흔쾌히 내어줄 수 있어야 한다.
삶을 마감하고, 마무리하는 시점에 그동안 미처 다하지 못한 뭇 생명들에 대한 베품과 나눔을 실천하는 장이 바로 자연순환장이 될 터이다.
라. 죽음에 대한 준비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연습하라고 했다. 죽음의 연습은 삶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는 헛된 망상에서 깨어나 지혜에 이르는 길이다. 죽음을 자각함으로써 언젠가 죽어갈 자신의 무지와 무능력을 직시할 수 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인간을 움직이는 가장 중요한 동인의 하나다. 우리는 죽음에 맞서는 용기를 무엇보다 높이 평가하며, 그러한 행동에 감동한다.
인간은 때가 되면 죽는다. 그러나 죽음 직전까지도 의식의 내면에선 설마 내가 죽을까 의심하며,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다가오는 죽음에 두려움과 무력함을 느낀다. 그래서 죽음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외면하지도 못한 채 지내다가 황망히 죽음과 대면하게 된다.
우리는 죽음의 준비과정에서 삶에 대해 배울 수 있다. 에피쿠로스는 삶의 종말을 제대로 이해하면 지금 이 순간 평온과 행복에 도달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했다.
유한한 몸이 내 삶을 담는 그릇일 뿐임을 알게 되고, 장례의 방법과 주검의 처리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지금까지 내 삶이 어떻게 가능하였는지, 다른 생명의 삶은 왜 존중해야 하는 지 배울 수 있게 된다.
이는 결코 쉬운 과제가 아니다. 우리 몸을 구성하는 약 10조개의 세포들은 생명의 유지, 번식을 위해 모인 공동체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약 100조개에 달하는 미생물도 각자 자기 삶을 영위하기 위해 우리 몸속에서 공생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을 외면하고, 일주일 후면 죽게 될 암환자도 내가 퇴원하면 뭘 하겠다든지, 뭘 먹겠다든지 하면서 살아갈 계획을 세우곤 하는 것이다.
자연순환장을 한다는 것은 죽음을 부정하거나 은폐하지 않고, 주검의 처리방법에 대해 생각하고 결정한다는 것이다. 죽음을 외면하지 않고, 죽음을 준비하고 맞이하는 하나의 방법이 자연순환장이라고 생각한다.
마. 삶과 죽음의 엮임
살아감과 죽어감은 볏짚으로 꼰 새끼처럼 서로 엮여 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살아있는 우리 몸 안에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예정된 세포자살과 세포의 죽음이 일어나고 있다.
이처럼 삶의 시선으로 보면 죽음이 다른 세상의 일처럼 보이지만, 삶과 죽음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꼬인 새끼줄처럼 엮여 변화하는 과정일 뿐이다.
우리의 언어 감각으로는 삶과 죽음은 다른 개념이다. 그러나 언어는 소통과 전달을 위해 인간이 만든 추상적인 세계를 나타내는 개념일 뿐, 근원적 실재를 가리키고 있는 게 아니다. 실재는 언어의 너머에 있다.
노자 『도덕경』은 말한다.
道可道 非常道 道를 가르쳐 말할 수는 있지만, 그 말해진 도는 自然의 근원적 실재인 道가 아니다
名可名 非常名 언어로 이름(名)지어 부르면 구별할 수는 있으나, 그것이 自然의 근원적 실재의 이름(名)은 아니다.
無名天地之始 언어로 이름(名)지어 구별하지 않은 無名(自然의 근원적 실재)이야말로 천지의 시작이요,
有名萬物之母 언어로 구별하여 이름(名)지은 有名(개념, 차별성)은 만물이 드러나는 모태이다.
시인 김춘수는 그의 시 ‘꽃’에서 이렇게 표현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이하 생략)
이와 같이 언어적 한계를 뛰어 넘어 근원적 실재에 대해 전하려는 시도가 생사일여(生死一如), 유무상통(有無相通), 태극(太極), 상보성(complementarity, 입자-파동 이중성, 위치-운동량 불확정성 등)과 같이 대칭적이거나, 일견 모순된 언어의 표현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이는 동전의 앞뒷면, 왼쪽과 오른쪽처럼 어느 위치,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른 구분일 뿐, 서로 엮여있는 관계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관계를 상태가 변화하는 걸로 달리 보는 것이 삶과 죽음이다.
‘삶과 죽음이 엮여 있다’, ‘삶과 죽음이 다르지 않다’거나 ‘삶과 죽음은 하나다’라는 말은 ‘삶과 대립되는 죽음’이라는 상대적이고, 대칭적인 언어에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 대립관념에 사로잡히지 않으면 삶의 끝이나 종말이라 하여 죽음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으며, 이는 자연순환장을 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삶과 죽음이 특별한 게 아니다. 마치 호흡처럼 언제나 일상과 더불어 있다. 가볍게 생각하고, 편안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4. 맺음말
지구온난화 및 생태계 유지에 대한 책임 있는 존재는 인간이다. 이를 명확히 하는 것이 자연순환장을 추진하는 출발점이다. 따라서 장례와 주검도 인간의 과시적 욕망을 소비하는 차원이 아닌, 환경과 생태계를 유기적으로 순환시키는 방법이 되어야 할 것이다.
동식물의 주검은 생태적으로 처리된다. 코끼리와 돌고래, 침팬지 등 영장류도 시신에 대한 애도행위를 하는 걸로 알려져 있다. 다만, 그들은 나뭇가지나 잎을 덮어 주거나, 발로 흙을 덮어주는 정도가 고작이다.
이에 비해 인간은 오래전부터 추모 등을 위해 관이나 묘지, 비석 등 인위적이고 장식적인 장례의례 및 시신처리 절차를 만들어 행해 왔다.
인간의 장례도 추모행위 자체보다는 추모과정에서 여러 과시적이고, 비생태적인 일들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삶과 죽음의 과정이나 절차에서 인간의 존엄성이 지켜져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자연순환장은 주검에 대한 처리의 절차나 방법을 자연을 훼손하지 않는 순환 가능한 생태적 방식으로 하고자 한다.
이는 물질의 재생과 유기적 순환이라는 생태적 과정을 통해 주검을 처리하고자 하는 것으로, 자연을 인간과 더불어 공존하는 존재로 인정할 때라야 비로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자연은 인간의 도구로써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자연은 훼손되거나, 망가지면 인간도 생존할 수 없는 필요불가결한 존립의 기반이다.
인류세의 시대, 이제는 인간과 자연의 지속가능성과 상호보완성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 새로운 스토리를 만들어야 할 때다. 그런 현실적 개혁을 위한 이미지, 스토리텔링 중의 하나가 자연순환장이라고 생각한다.
자연순환장이 한꺼번에 모든 걸 해결해 줄 수 있는 마법의 지팡이는 아니다. 하지만,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환경과 생태계가 어떻게 변할 것인지 깊이 생각하고, 해야 할 일과 할 수 있는 일을 숙고함으로써 가능한 일부터 하는 것이 장차 살아갈 미래세대에 대한 우리의 마땅하고 피할 수 없는 책임일 것이다.
|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