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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꽃이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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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자료실 스크랩 우리고장 바로알기 강좌
이중호 추천 0 조회 31 11.06.24 16:52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2010.10.14 19:00 문화원 우리고장바로알기 강좌에 나가 강의한 내용 및 씨나리오)

 

 안녕하세요. 오늘 말씀드릴 이야기는 3.1독립만세운동과 관련한 내용입니다.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듯이 191931일 손병희 선생을 비롯한 민족대표 33인이 주도하여 서울 파고다공원에서 일으킨 3.1독립만세운동은 일제에 항거하는 우리민족의 투혼에 불을 질러 전국적으로 열화와 같이 번져 나감으로서 대한민국의 독립정신을 세계만방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주렴산 독립만세운동

일시: 1919316일 밤

장소: 주산면 주야리 주렴산 정상(국수봉)

참여애국지사: 18

 

 그때 우리 보령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이 있었습니다. 이는 충남지역 독립만세운동 중 가장 먼저로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 일어난 유관순열사의 독립만세운동보다도 15일이 빨랐던 것입니다. 유관순열사의 만세운동은 41일이었으니까요.

바로 화면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주렴산 독립만세운동인데요.

 

 316일 밤에 보령시 주산면에 있는 주렴산 정상에서 열여덟 분의 애국지사들이 독립만세를 부른 운동입니다.

그런데 보령시민들 중에서도 우리지역에서 있었던 독립만세운동에 대하여 모르거나 또 알아도 막연히 아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 주렴산 독립만세운동에 대하여 자세히 알고 지역민들에게 정확하게 알려야 하겠으며 타 지역 사람들에게 자랑스럽게 이야기 할 수 있도록 해야 되겠습니다.

 사진에서 보시는 주렴산은 해발 351m로서 바로 아래에는 주야리 야룡리 유곡리 증산리 등 많은 마을이 둘러 있을 뿐더러 주산면 전체가 내려다보이기 때문에 이곳에서 밤에 만세를 부름으로서 주산면민 모두가 들을 수 있었을 것이고 따라서 파급효과가 대단히 컸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사전협의

이철원(李哲源) - 보령시 주산면 증산리 출신

<배재고등보통학교(培材高等普通學校)재학,학생전위대(學生前衛隊)로 독립운동>

3.1독립만세운동 참여한 후 - 왜경의 감시를 피하여 귀향

고향에서도 만세를 불러야겠다고 결심 - 18명 동지규합

315(216) 간재장날(주산 5일장) - 거사(擧事)하기로 계획

기밀이 누설되어 왜경의 삼엄한 감시가 있어 보류.

 

 독립만세운동의 사전협의는 서울에서 배재고등보통학교에 다니며 학생전위대로 독립운동을 하던 우리 보령시 주산면 출신 이철원선생이 파고다공원에서 3.1만세운동에 참여한 후 왜경의 감시를 피해 고향에 내려와서 시작되었지요. 이철원선생은 이곳 고향에서 독립만세를 불러야겠구나 생각하고 동지들을 규합했지요. 공개적으로 할 수는 없는 비밀리에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주로 자기가 살던 증산리 일가친척들과 가까운 주야리를 중심으로 많이 모으고 다른 마을에 사는 지인들을 보충하였습니다.

 그렇게 18인의 동지들이 모아지자 315(216)간재장날(주산5일장) 많은 장꾼들이 보는데서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했지요. 그래야 파급효과가 클 테니까요. 그러나 사전에 기밀이 누설되어 왜경들이 삼엄한 감시를 하는 바람에 거사를 못하고 말았습니다.

 

거 사

316일 밤 - 주렴산 국수봉(國帥峯)

횃불을 밝히며, 태극기를 꽂고, 독립선언서에 혈서 서명, 징을 치며 대한독립만세를 부름.

317일 야룡리(野龍里) 복개봉(覆蓋峯)에서 다시 부르자 약속했으나 대부분 애국지사들 체포됨

박윤화(朴奫和) 홀로 복개봉에 올라가 태극기를 꽂고 만세

 

 하는 수 없이 계획을 변경했습니다. 315일을 넘기고 316일 주렴산꼭대기에 가서 독립만세를 부른 것이지요. 열여덟 분이 올라가서 횃불을 밝히고, 태극기를 꽂고, 독립선언서에 혈서로 서명을 한 후 징을 치며 대한독립만세를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다음날 주산면 소재지 바로 옆에 있는 야룡리 복개봉에서 또 부르기로 약속했는데 다음날 왜경들이 발칵 뒤집혀 난리가 났지요. 그래서 애국지사들 대부분 체포되었고 체포되지 않은 야룡리에 사는 박윤화선생이 혼자 복개봉에 올라가서 태극기를 꽂고 만세를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곧 체포되었습니다.

 

애국지사들의 수난

애국지사들 보령경찰서 - 홍성구치소(洪城拘置所)에 수감

혹독한 고문 - 매일 3회씩 43일간 지속

나라의 독립을 위해 만세를 부른 것이 무슨 죄가 되느냐

                      - 오히려 호통 치며 맞섬.

보안법위반 죄명 - 태형(笞刑) 60-90장씩 맞고 석방

고문 후유증 - 윤용원(尹用源) 한 달 만에 운명 - 나머지 분들도 오래 고생

 

그로부터 애국지사들의 수난이 계속되었지요.

체포된 애국지사들은 보령경찰서를 거쳐 홍성구치소에 수감되면서 혹독한 고문을 받게 되는데. 그러나 고문에 굴하지 않고

 나라의 독립을 위해 만세를 불렀다. 그게 무슨 죄가 되느냐?” 라고 오히려 호통을 치셨다고 합니다.

매일 3회씩 43일간 고초를 겪다가 소위 보안법위반이라는 죄명을 씌워 태형 60-90장씩 맞고서 풀려나오게 됩니다.

그때 얼마나 고문이 심했던지 엉덩이 살이 헤어지고 팔다리를 못 써 교자를 타고 나왔으며 고문 후유증이 심해 윤용원선생은 한 달 만에 세상을 떠났고 다른 분들도 헤어진 살이 썩어 구더기가 나오는 등 오래 고생하였답니다.

 

마을사람들의 피해

 ○체포되지 않은 애국지사 -이철원(李哲源), 윤천영(尹天榮)

 ○왜경들의 횡포 - 매일 찾아와 무고한 백성 닦달, 문을 부수는 등 만행계속

 ○이철원은 해외로 망명 - 대한민국의 제2대 공보처장역임

 

 이때 애국지사 열여덟 분 중 체포되지 않은 분이 두 분 있었습니다,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던 이철원선생과 또 한 분 윤천영선생인데 왜경들은 매일같이 마을에 와서 그들을 찾아내라고 가족은 물론 마을사람들까지 닦달하고 문을 부수는 등 횡포가 아주 심했다고 합니다. 이철원선생은 증산리 사람이고 윤천영선생은 주야리 사람인데 해당 마을 사람들은 왜경 등쌀에 죽어났다고 합니다. 왜경이 오면 하도 행패가 심하니까 마을 입구에 왜놈 순사가 나타났다하면 마을사람들이 모두 도망하거나 숨기에 바빴답니다.

 그러나 두 분은 끝까지 잡히지 않았지요. 특히 이철원선생은 해외로 망명하였다가 해방 후에 돌아와 대한민국 제2대 공보처장을 지낸 인물이고 윤천영선생은 전라도 쪽으로 피신하였다고 하는데 그대로 우리지방을 떠났고 연고자도 없어 그 후의 행적은 알 수가 없습니다.

이름

출생지

비고

김양제(金亮濟)

주산면 주야리

태형90, 대통령표창

박윤화(朴奫和)

주산면 야룡리

〃 〃

박태현(朴台鉉)

주산면 증산리

〃 〃

이장규(李莊圭)

주산면 증산리

〃 〃

이철규(李哲圭)

주산면 주야리

〃 〃

임문호(任文鎬)

주산면 주야리

〃 〃

윤기호(尹起鎬)

주산면 유곡리

태형60

이관규(李觀圭)

주산면 증산리

이성규(李成圭)

주산면 증산리

이성수(李性秀)

주산면 증산리

이홍규(李洪圭)

주산면 증산리

박성하(朴性夏)

주산면 주야리

수형사실 확인 안 됨

신도휴(申道休)

청라면 내현리

윤용원(尹用源)

웅천면 대창리

이항규(李恒奎)

주산면 증산리

최봉규(崔鳳圭)

주산면 창암리

윤천영(尹天榮)

주산면 주야리

체포되지 않음

이철원(李哲源)

주산면 증산리

 주렴산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던 열여덟분의 애국지사가 누군가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김양제, 박태현, 박윤화, 이장규, 이철규, 임문호, 이상 여섯 분은 죄가 무겁다하여 태형 90장씩을 받았습니다. 이는 현재 주산면사무소에 소장하고 있는 수형인명부에서 확인 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윤기호, 이관규, 이성규, 이성수, 이홍규 등 다섯 분은 태형 60장씩을 받았습니다. 역시 수형인명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박성하, 이항규, 최봉규, 신도휴(청라출신), 윤용원(웅천출신) 등 다섯 분은 수형사실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또한 체포되지 않은 이철원, 윤천영 등 두 분도 역시 기록이 없지요.

 

 태형 90장을 받은 김양제, 박태현, 박윤화, 이장규, 이철규, 임문호 등 여섯 분은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으나 태형60장을 받은 윤기호, 이관규, 이성규, 이성수, 이홍규 등 다섯 분은 표창추서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그 정도의 형을 받은 사람은 전국적으로 너무 많아 추서치 않았다고 합니다. 또한 수형사실이 확인되지 않는 박성하, 이항규, 최봉규, 신도휴, 윤용원 등과 체포되지 않은 이철원, 윤천영 등도 역시 추서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태형60장을 받은 애국지사들도 당연히 표창을 추서해야하며 나머지 분들도 공적을 인정하여 표창을 추서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해보세요. 다 같이 독립만세를 불렀는데 누구는 애국지사고 누구는 아닙니까?

특히 이 운동의 주도자인 이철원선생이 공식기록이 없다 해서 애국지사가 아닙니까? 그것은 말이 안 됩니다. 표창을 추서 받았건, 받지 못했건, 수형인명부나 기타공식기록에 있건, 없건, 열여덟 분 애국지사 모두는 목숨을 걸고 독립만세운동을 펼친 훌륭하신 선열들로 표창을 추서해야 하며 추앙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수형인 명부입니다. 죄명은 보안법 위반, 형량은 태형 90장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열한 분 모두 이렇게 수형인명부에 기록되어있습니다.

 

 

 

주렴산 기미독립만세 진원지 기념비

(국가지정 현충시설 23-1-9)

세운 곳: 주산면 증산리 산65-1(주렴산 정상)

세운 때: 1995

비문내용: 이곳은 1919년 기미년 31618의사가 해발 351m인 이곳 국수봉에 올라 봉화를 올리고 징을 치며 독립선언서에 혈서 한 후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곳이다. 숭고한 정신과 결연한 의지를 기리면서 후세에까지 전하고자 이곳에 표비를 세운다.

 

관련유적이 두 곳이 있는데요.

 먼저 주렴산 기미독립만세 진원지 기념비입니다

주렴산 정상에 있고 국가지정 현충시설 23-1-9호로 지정하였습니다.

 1995년에 세웠으며, 내용은 이곳은 1919년 기미년 31618의사가 해발 351m인 이곳 국수봉에 올라 봉화를 올리고 징을 치며 독립선언서에 혈서 한 후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곳이다. 숭고한 정신과 결연한 의지를 기리면서 후세에까지 전하고자 이곳에 표비를 세운다. 라고 되어 있고 뒷면에는 18명의 애국지사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기념비 사진인데요 뒷면에는 18애국지사 명단이 있고 왼쪽에 있는 것은 국가현충시설 표지판입니다.

 등산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한번 올라가 보시면 좋겠습니다. 주야리 답박굴마을 회관에서부터 올라가면 등산로가 잘 되어있으며 약 40분 정도 소요됩니다. 독립만세를 불렀던 현장을 들러보시고 등산도 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보실 수 있습니다. 특히 정상에 서면 주산면 전체가 다 보일 뿐 아니라 탁트인 서해바다와 웅천, 서천 멀리 미산까지 보이는 시원한 경관이 참으로 좋습니다. 내려 올 때엔 올라간 길을 되짚어 내려와도 되지만 북쪽 능선을 타고 갓주렴산마을 쪽으로 내려가면 1시간 반 정도 걸리는데 아기자기한 능선을 타고 내려오면서 왼쪽은 서해바다 오른쪽은 주산면 일대가 훤히 보이는 아주 좋은 하산코스가 됩니다. 더구나 봄에는 고사리 취나물 등 갖가지 산나물도 채취할 수 있어 색다른 즐거움도 있지요. 한번 시간을 내어보십시오.

 

3.1항일지사 의거 추모비(국가현충시설 23-1-37)

세운 곳: 주산면 야룡리 181-3(주산면사무소 경내)

세운 때: 2002년 월 일

비문내용: 주렴산 항일만세운동의 내용, 참여한 애국지사 18인 명단,

그리고 다른 분야에서 독립운동을 한 주산면출신 애국지사 윤길(尹?)과 김정제 (金廷濟)의 공적내용.

 

 다음은 3.1항일지사 의거 추모비입니다. 주산면사무소 경내에 있고 국가현충시설 23-1-37호입니다. 3.1일 독립만세운동의 내용과 다른 분야에서 독립운동을 한 윤길선생과 김정제선생 두분의 공적이 적혀 있습니다. 사진에서 두 개의 비석이 나란히 섰는데 오른쪽 비석입니다.

 왼쪽 옆에 있는 이것은 보령항일애국지사추모비입니다.

보령지역 전체의 항일 애국지사로 국가서훈을 받은 32명과 서훈이 안된  2명 등 34명의 이름과 공적을 적었습니다. 주산면에 가실일이 있으면 면사무소경내에 있는 추모비를 둘러보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추모행사

일시: 매년 316

장소: 주산면사무소

주관: 대천문화원

참석: 기관단체장, 광복회원, 시민, 학생

내용: 추모식 및 시가행진

추모행사는 매년 316일 주산면사무소에서 대천문화원주관으로 개최합니다.

 옛날에는 민간인 추모위원회 주관으로 행사를 하였으나 몇 년 전부터 대천문화원이 주관하여 행사의 격을 높였습니다. 기관단체장, 광복회원, 시민 학생 등 200여명 참석하며 추모식 후에 추모비 참배와 시가행진을 합니다.

이 사진은 2010 행사모습입니다.

 

 

 

 

 

 

식이 끝난 후 추모비에 참배하는 모습입니다.

 

 

 

 

 

 

시가행진입니다. 군악대가 앞장을 서고 학생들이 프랑카드를 들고 일반시민들이 따르지요? 애국지사와 왜경들로 분장한 가장행렬도 따릅니다, 뒤에는 일반시민들이고 . . . 이 사진은 2010.3.16 행사 후 시가행진입니다.

 

 

주렴산만세운동의 중요성과 가치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주렴산만세운동은 충남지역에서 가장먼저 일어난 만세운동입니다. 또한 보령지역에서는 유일한 만세운동입니다.

이 운동 후에 청소면에서 강영국, 김사구 선생 등이 주동이 되어 주렴산에서 독립만세를 불렀다는데 우리도 진당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부르자고 계획하고 4.10일 거사키로 하였으나 사전에 기밀이 누설되어 체포되어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분들도 형을 받았으며 대통령표창을 받았지요.

-주렴산만세운동은 유관순열사의 아우내장터 독립만세와 같은 성격입니다.

두 곳 모두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며 독립운동을 하던 학생이 3.1독립만세운동 후 고향에 내려와 주도한 운동입니다.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은 이화학당의 유관순 주도주렴산 만세운동은 배재고등보통학교의 이철원 주도, 똑같지 않습니까?

주렴산독립만세운동도 당초에는 아우내장터와 같이 간재장터에서 거사하기로 계획되었던 것이지요.

만약 계획대로 간재장터에서 성사되었다면 주동자였던 이철원선생이 잡혔을 것이고 아우내장터 독립만세운동처럼 유명해졌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지난 200711월 천안에 있는 독립기념관에 간 일이 있었는데 제4전시관(겨레의 함성)에 지역별 날자별 3.1만세운동 내역이 기록되어 있었으나 우리지역의 주렴산만세운동이 빠져있음을 발견하고 독립기념관 측에 알려 올리도록 요구한바 있습니다. 그런데 돌아와서 사람들에게 이를 이야기하자 "그런 일이 있었는가?" "왜 그게 빠졌을까?" "늦었지만 지적한 것 잘 했다"는 등 반응을 보였는데 어떤사람은 "주렴산만세운동은 혹시 우리지역에서만 주장하는 검증되지 않은 운동이 아닐까?" 하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미 만세운동에 참여한 애국지사 6명이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을 추서 받았고 관련시설을 국가지정 현충시설로 지정받았는데 보령사람으로서 이럴 수가 있습니까?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2000년 동안 떠돌아다니던 유태인들이 세운나라인데 학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그들이 그들의 역사를 잊지 않고, 그들의 문화를 계승했기 때문에 오랜 세월이 지났어도 나라를 세울 수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도 우리의 역사를, 우리의 문화를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지역의 역사도, 지역의 문화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런 면에서 문화원에서 매주 목요일마다 실시하고 있는 내고장 바로알기 강좌는 참으로 뜻있고 유익한 사업이라고 생각하면서 오늘 제가 말씀드린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우리의 과제

주렴산 독립만세운동 - 보령시민은 누구나 알 것

지역의 자랑 - 타 지역에 홍보.

후손들에게 전수 - 길이 선양

 

 

 주렴산 독립만세운동은 보령시민이면 누구나 다 알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타 지역 사람들에게 자랑스럽게 홍보해야합니다. 또한 후손들에게도 분명히 알려 자손만대에 길이 선양해야 합니다. 감사합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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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11.06.24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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