路上因緣 (노상인연) (홍우흠)

[강용호]

路上因緣 (노상인연)

       홍우흠 명예교수 (사범대학 한문교육학과)

2024년 1월 5일 나와 집사람은 저녁 10시 50분 대구공항 발 T-way 비행기를 타고 6일 새벽  타이완(臺灣) 타오유엔(桃園) 공항에 도착했다. 입국수속을 마치고 공항을 나오자 미리 예약해 둔 택시 기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약 1시간 쯤 달려 타이페이(臺北) 둔화북로(敦化北路) 54항(巷)에 있는 Simple 호텔에 도착했다. 비록 규모는 작으나 깨끗하고 안전하며 교통이 편리한 곳이라 매우 마음에 들었다. 6일 아침 8시 지하층에 마련된 식당으로 내려오니 음식도 의외로 풍성하고 입맛에 맞았다. 

이번 여행은 특별한 목적을 염두에 두고 간 여행이 아니었기 때문에 여유로운 마음으로 지난 날 유학 시절에 가보지 못한 몇 곳을 둘러보기로 하였다. 6일 10시경 택시를 타고 타이페이 중앙역에 도착, 지룽(基隆)으로 가는 완행열차를 탔다. 지룽은 타이페이 동북쪽에 위치한 대만 제1의 국제무역항이며, 중요한 해군기지이다. 그곳의 명승지를 관람하고 신선한 해산물 요리로 점심을 할 계획이었다.

약 1시간 정도 달리는 기차이기 때문에 일반 버스와 같이 지정 좌석이 없어 매우 불편하였다. 좌석을 차지하지 못한 나와 집사람이 천정의 손잡이에 매달려 기우뚱거리고 있던 순간, 앞 좌석에 앉아 우리를 바라보고 있던 한 중년 부인이 옆에 앉은 자기 딸과 함께 일어서서 우리 부부에게 좌석을 양보하였다. 몇번 사양을 했으나 기어이 앉으라는 것이다. 부득이 좌석에 앉긴 했으나 참으로 미안하기 그지없었다. 이때부터 나는 그 부인과 대화를 시작했다.  

“당신은 어디에 사는 분이며 무엇 때문에 지룽(基隆)에 가느냐?”라고 물으니
“저는 신베이(新北)에 사는 사람인데 허리 통증이 심하여 지룽에 있는 안마사에게 안마시술을 받으러 가는 중입니다.”라고 했다. 

나는 자신의 몸이 불편하면서도 좌석을 양보하는 그 마음이 하도 기특하여 “당신은 참으로 노인을 공경하는 예의 바른 사람이다. 요즘 세상에 당신과 같은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나는 한국에 돌아가 당신이 오늘 우리 노부부에게 베풀어준 이 아름다운 인정을 널리 알리겠다.”라고 하자, 비로소 내가 한국사람인 줄 알게 된 그 모녀는 “한국사람이 표준 중국어를 어찌 그렇게 잘하시느냐? ”등의 칭찬을 하면서 진지한 대화가 이어졌다. 

드디어 통성명과 집안 사정까지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나의 성이 홍(洪)인 줄 알게 된 그 부인의 예쁜 딸이 “저의 성도 홍(洪)이며 이름은 징아(靖雅)입니다. 그러니 오늘 일가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만나게 되었네요.”라면서 친손녀와 같이 반가워하였다. 

이런 대화가 오간 다음 부인은 우리에게 “내일(1월 7일) 우리 집안의 경사를 자축하기 위해 큰 버스 한 대를 세내어 친척들과 친구들을 초청, 타인완 남부 타이난(台南)과 장화(彰化) 등지를 여행하려고 하는데 마침 버스 좌석 두 자리가 비어 있으니 교수님 내외분도 참석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제발 그렇게 해 주시면 큰 영광이겠습니다.”라는 것이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그 초청하는 태도가 매우 진지할 뿐만 아니라, 그러잖아도 이번 여행 중 꼭 한 번 가볼 계획이었던 곳이라 흔쾌히 승낙하였다. 지룽역에 도착하자 부인 모녀는 안마소로 가고 우리는 지룽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해변 지질공원을 둘러본 다음 해변에 늘어선 생선요리집에 들려 제일 비산 물고기 반마리로 만든 요리로 점심을 이우고 버스를 이용 타이페로 호텔로 돌아와 하루의 여정을 마쳤다. 

 
1월 7일 아침 5시 Simple호텔에서 기상, 택시를 타고 약 30분간 달려 어제 그 홍씨 부인이 알려준 新北市 中平路 71港 2號(順興精緻洗衣坊. 洪坤木)에 도착했다. 전날 홍씨부인이 알려준 그대로 골목에 큰 버스 한 대가 서 있고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아침인사를 나누었다. 

홍씨 부인이 우리 부부를 알아보고 반가이 맞아 규모가 큰 세탁소 안으로 인도하였다. 이 여행에 초대받은 한 홍곤목 친구의 귀띔에 의하면 “독실한 도교 신자인 홍곤목은 원래 가난한 사람이었다. 오늘 보는 이 집을 세내어 세탁소를 시작했는데 홍씨 내외가 도교신인 옥황상제(玉皇上帝)에게 지극정성으로 기도하며 열심히 세탁소를 경영한 결과 세든 이 건물을 매입하고 이어서 매우 값비산 다른 건물 한 동도 매입함으로써 이제 큰 부자가 되었다. 

오늘 이 여행은 바로 홍씨가 자신이 부자가 되게 해 준 옥황상제에게 감사하고 그것을 자축하기 위해 마련한 여행이다.”란 것이다. 참으로 축하할 일이었다. 여행에 초대받은 사람들이 다 도착하자 주인 홍곤목은 집안에 모셔 두었던 검은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도교신상(道敎神像)을 안고 나와 미리 준비한 탁자 위에 정중히 모셨다. 참가한 친척들과 친구들은 그 신상 앞에 열을 지어 주인과 함께 머리를 숙이고 무언가 주문을 외우며 엄숙히 기도하였다. 주인은 우리 내외를 위한 기도도 잊지 않았다. 기도가 끝나자 주인은 그 신상을 버스 조수석 앞에 마련된 융단 방석 위에 모시고 함께 여행을 시작하였다. 신께서 그 날 여행의 안전을 지켜달라는 의미인 것 같았다.

버스에 오르니 우리 내외를 위해 비워둔 좌석은 제일 안전하고 쾌적한 자리였다. 나도 참가비를 내겠다고 하니 절대 불가였다. 버스는 어느덧 타이페이 시내를 벗어나 타이난으로 향하는 고속도로에 진입하였다. 손님들의 아침식사로 빵과 두유를 나누어 주었다. 한국의 봄날처럼 날씨가 온화하고 쾌청하여 더욱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약 3시간 정도를 달려 일차 목적지인 타이난(台南)에 있는 도교사원 보안궁(保安宮)에 도착했다.

버스가 사원 입구의 광장에 들어서자 흡사 전쟁이 일어난 듯 수백 발의 폭죽을 터뜨렸다. 폭죽은 박격포처럼 공중 높이 올라가 굉음을 울리며 터지는 것과 땅에서 연발로 터지는 두 종류였다. 그 소리는 고막을 찢을 정도로 시끄럽고 매시꺼운 화약냄새는 두통을 일으킬 정도였다. 하도 신기하여 폭죽을 터뜨리는 이유를 물었더니 

“오늘 이 도교사원이 홍곤목 집에서 모시고 온 도교신상을 기쁘게 맞이하는 의식절차”란 것이다. 폭죽의 연기와 굉음이 가라앉지 홍곤목은 버스안에 모시고 온 신상을 안고 내려와 다시 몇 번의 절차를 거친 다음 사원의 집례자에게 안겨주었다. 집례자는 그 신상을 본당의 주신(主神) 옆에 앉혀 두고 거기서 참가한 전체 인원과 함께 미리 작성해 간 기도문을 읽으며 예배를 올렸다. 옆에서 들어보니 기도문에 우리내외의 이름도 들어 있었다. 

행사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보안궁에 안치되었던 그 신상을 안고 다시 태상도조(太上道祖)와 옥황대제(玉皇大帝)의 신상이 모셔진 보천궁(普天宮)으로 자리를 옮겼다. 보천궁은 건물 외양의 규모도 웅장하고 거대하거니와 황금색으로 장식된 그 내부의 장엄하고 화려함은 필설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홍곤목과 그 일행은 보안궁에서와 같은 절차를 거쳐 보천궁 여러 신상(神像) 앞에 모셔간 신상을 앉혀두고 함께 주문을 외며 기도를 하였다. 우리 일반 유가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약간 이해가 되지 않는 일면도 있지만 홍곤목과 친척들이 보여준 이날의 도교적인 종교 나들이는 매우 질서가 있고 엄숙하며 진실하고 순수한 신앙심을 보여 주었다. 

지난 날 도교의 원리에 대해 몇 가지 듣고 생각해온 바는 있지만 도교신자가 직접 자신의 집에 안치한 신상을 모시고 나와 종교적인 순례의식을 거행하는 것은 처음인지라 흥미진진하였다.  기도절차를 마친 다음 홍곤목은 나를 보천궁 사무소로 안내하여 관리책임자 홍종종(洪宗從)을 소개하였다. 홍종종은 멀리서 온 일가를 만났다면서 매우 즐거워하였다.

보천궁의 교주(敎主)를 비롯한 주요간부가 대부분이 홍씨란 것이다. 전설상 한국 홍씨의 조상은 중국 돈황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대만홍씨의 근원은 어떠냐고 물어보니 자기조상들도 돈황지역에서 나왔다는 전설이 있다는 것이다. 신기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한국 부림홍씨 문회장을 역임한 적이 있는데 언제 한번 한국대만홍씨종친회를 해보자.”란 정담도 나누었다.

홍곤목은 일행은 보천궁 기도행사를 마치고 타이난(臺南)시 해변에 위치한 염전(鹽田)으로 갔다. 염전 부근 숲속에 위치한 식당에는 미리 예약해 둔 산해진미의 풍성한 요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홍곤목과 부인의 친절함은 물론이고 아직 경혼하지 아니한 예쁜 두 딸(洪思綺, 洪靖雅)은 종일 우리 내외를 친조부모를 대하듯 할아버지(爺爺), 할머니(奶奶)라고 부르면서 온갖 시중을 들어 주었다. 집사람의 손을 잡고 보행을 도와주고 음식을 날라주며 소지품을 대신 들어주었다. 어찌 이와 같은 뜻밖의 감사한 여행을 할 수 있는지?  

   
식사를 마친 뒤 염전으로 자리를 옮겨 바닷물을 끌어드려 소금을 만드는 소금밭, 나도 직접 고무레를 들고 소금을 모으는 체험을 해 보았다. 그리고 소금으로 만든 치약 한 통도 구입했다. 

어느덧 오후 3시가 넘었다. 일행을 실은 버스는 장화(彰化) 타이중(臺中)을 거쳐 오후 7시경 타오위엔(桃園)에 있는 어느 화려한 식당에 도착했다. 점심 때보다 오히려 더 값지고 풍성해 보이는 음식이 준비되어 있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아침에 출발했던 홍곤목의 집에 도착하니 밤 9시경이었다. 홍곤목 가족은 버스에 싣고 갔던 그 가정수호의 도교 신상을 본래 자리에 모신 다음 일행과 함께 여행의 무사함을 감사하는 기도를 올리고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우리는 홍곤목 가족에게 감사함과 아울러 다음 언젠가 기회를 보아 한국에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타이페이 둔화북로(敦化北路)에 있는 Siple호텔로 돌아왔다. 천만뜻밖의 “路上 因緣”으로 인해 이루어진 이날 여행은 생각하면 할수록 남가일몽(南柯一夢)의 신기함을 금할 수 없다.       

    
 2024년 1월 22일 한가람 타운 101동 1719호에서 작성

[박종갑]

이 글은 세상에 이렇게 마음을 열어놓고 사는 사람들이 있나 하는, 참 아름답고 신기한 느낌이 드는 내용입니다. 아무 인연도 없는 낯선 외국인 부부를 자신들의 가족적이며 종교적인 행사에 초대하는 사람의 마음도 열린 마음이지만, 어떻게 보면 미편하고 부담스러운 자리인데도 초대에 응해 축하하며 즐겁게 참여한 홍우흠 교수님 내외분의 마음도 듣보기에 참 좋습니다. 모든 사람이 이런 마음씨를 가지고 있다면, 이 세상에 전쟁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김성광]

김성광(의대.미생뭏학)
한 동안 갑짝이소식이 뚝 단절되어 궁금했었는데 이런노상인연 작품을 대본 계셨군요. 이제야 무고하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Therese]

한국과 대만 양국에서 '홍씨'라는 연대감을 느끼게 하는 모습도 감동적이고, 특히 도교 문화의 일면을 자세히 보게 해주시니 새로운 교재이기도 합니다. 풍부한 사진자료가 현장을 생생하게 설명합니다. 교수님께서 '행운' 가득한 분이라는 느낌은 덤이구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