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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축지변(丁丑之變)
정축지변(丁丑之變)은1457년 금성대군, 이보흠의 단종 복위 운동 거사가 실패하면서 세조에 의해 순흥부 주민이 학살된 사건을 말한다.
내부 고변으로 단종의 복위 거사가 실패하자 세조는 노산군으로 강등당하고 강원도 영월 청령포에 유배중이던 단종을 사사한다. 이후 역모를 주도한 혐의로 금성대군 유에게 사약을 내려 사사하고 모의에 가담한 순흥부사 이보흠을 참형에 처하였다. 이후 순흥부의 주민(특히 우리 순흥안씨)들을 처형한 뒤 순흥을 폐부하고 현으로 강등시켰으며, 순흥 주민 및 인근 30리 지역 주민들에게도 혐의점을 뒤집어 씌워 처형하였다.
수많은 주민들을 학살하여 순흥부를 가로지르던 죽계천은 온통 피로 물들어 오랫동안 핏물이 10여리를 흘러들어갔다고 한다.
기묘사화(己卯士禍)는 중종 14년 기묘년(1519) 일어난 사화(士禍)이다.
연산군 축출 이후 중앙 정계에 진출했던 진보적 사림파들이 신권 대부분을 장악하고 왕권을 위협하자, 위기의식을 느낀 중종이 신권을 견제하기 위해 벌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조광조, 김식, 기준, 김정, 한충 등이 극형을 당했고 나머지 사림들도 대부분 귀양가거나 정계 진출이 좌절되었다. 이 밖에 김안국, 김정국 형제, 정광필, 안당 등 이들과 친분 관계가 있던 조정 중신들도 피해를 받았다. 이 사건으로 사림의 중앙 정치 진출은 한 세대 밀렸다.
흔히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문구가 기묘사화의 일화로 널리 알려졌지만 연구 결과 후대에 만든 루머임이 밝혀졌고, 실제로는 중종의 친위 쿠데타다. 단순히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중종은 사화를 일으키기 전에 조광조 일파로의 정보 전달을 차단하고 몰래 숙정문으로 군 병력을 소집하여 조광조 세력을 긴급체포하였다.
과거에는 조광조 등 신진 사류가 성리학에 기반하여 주장하는 개혁에 훈구파가 반감을 품어 기묘사화로 발전했다는 인식이 다수였다. 훈구파에 대항해 일어난 사림파들이 원칙적인 주장을 내세우고, 중종이 이에 동조하여 힘을 싣자 남곤, 심정 등 훈구파가 힘을 잃기 전에 사림들을 모략해 일어난 사화가 기묘사화라는 것이다.
결정적 계기는 위훈삭제 사건으로 중종반정으로 공신 작위를 받은 사람들 중 실제 참여가 없었던 자들의 공신첩을 회수하자는 사림파의 주장이 관철되자 위기감을 느낀 훈구파가 공작을 펼친 결과라는 것. 홍경주의 위치에 주목하여 아직 군부에 세력이 남은 훈구 세력이 군사력으로 중종을 협박했다는 시각도 있었다.
기묘사화를 상징하는 문구인 '주초위왕'(走肖爲王)은 이 같은 시중의 인식을 드러내는 장치라고 여겼다. 주초위왕의 '走肖'(주초)는 '趙'(조)를 파자하여 만든 말이다. 따라서 주초위왕은 곧 '조위왕(趙爲王)' 다시 말해 '조씨 성을 가진 자가 왕위에 오른다는 뜻이 된다. 훈구파 중 홍경주의 딸이 중종의 후궁 희빈 홍씨였기에, 궁중 동산의 나뭇잎에 꿀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고 적은 뒤, 이것을 벌레가 갉아먹게 만들어 글자 모양을 나뭇잎에 새기면, 그 잎을 왕에게 보여 왕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여 사화를 일으켰다는 것이 과거의 통념이었다.
주의할 점은 주초위왕은 야사가 아니라 엄연히 실록에 여러 번 기록된 정사라는 점이다. 주초위왕은 중종 당대 기록에는 나오지 않지만 후일 선조실록에 언급되기 때문에 엄연한 정사다. 흔히 '정사 = 정확한 역사' 정도로 받아들여서 생기는 오류인데 정사는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제작한 역사를 의미하지 내용의 정확성은 별개다.
신사무옥(辛巳誣獄)
1519년 조광조 등의 사림세력이 몰락한 기묘사화의 여파로 일어났다. 심정·남곤 등이 기묘사화를 기화로 사림파를 제거한 다음 정권을 잡자, 조광조 일파를 두둔했다는 이유로 안처겸·문근(文瑾)·유인숙(柳仁淑) 등을 파직시켰다. 이 과정에서 안처함(安處諴)은 그의 친구인 송사련으로부터 형 처겸이 친지들과 함께 현 집권자들을 비방했다는 말을 듣고 부친이며 조광조 일파와 가까웠던 당(塘)에게 고하여 자기 집의 농장이 있던 용인으로 데리고 갔다.
그런데 얼마 후 처겸이 다시 그의 장인의 집에서 이정숙(李正淑)과 권전(權磌) 등을 만나 시사(時事)를 논하면서, 심정·남곤 등이 권력을 남용하고 있으니 이 무리를 제거해야 국가를 바로잡을 수 있다고 했다. 이 자리에 있었던 송사련은 남곤·심정에게 아부하여 출세하기 위해 그의 처남인 정상과 짜고, 안처겸의 모친상 조객록(弔客錄)과 발인할 때의 역군부(役軍簿)를 가지고 이들이 무리를 이루어 반란을 꾀하려 한다고 고발했다.
그 결과 안당·안처겸·안처근(安處謹)을 비롯하여 권전·이경숙·이충건(李忠楗)·이약수(李若水)·조광좌(趙光佐) 등 많은 사림들이 체포되어 심문을 받은 다음 역적으로 몰려 처형되었다. 송사련은 고발한 공으로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승진되고, 죄인들로부터 몰수한 전답·가옥·노비를 받고 30여 년 간 세력을 누렸다. 그뒤 심정·남곤의 일파가 몰락하고 사림의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 1566년(명종 21)에 안당의 손자 윤(玧)의 상소로 앞서 희생되었던 안처겸 등의 인물들이 신원되고 직첩을 돌려받았으며, 1575년(선조 8)에는 국가로부터 시호까지 받았다.
이 사건은 심정·남곤 등의 훈구파 세력들이 사림계 인사들을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 무고사건이었다.
을사사화(乙巳士禍)와 안명세(安名世)
1545년(명종 즉위년) 왕실의 외척인 대윤과 소윤의 반목으로 일어나, 대윤이 소윤으로부터 받은 정치적인 탄압이다.
을사사화 당시 우리 순흥안씨의 한림공(翰林公) 휘 명세(世) 공은 시조공의 14세로서 1544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들어가 검열(檢閱)과 주서(注書)를 지내고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인 사관으로 있었다.
안명세(安名世) 공은 을사사화의 자세한 전말을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시정기(時政記: 당대 정무 행정의 실상과 잘잘못을 기록한 1차적 역사 기록물로서 실록을 편찬하는 기본 자료)에 적어 넣었는데, 여기에는 인종의 장례식 전에 윤임 등 3대신이 살해당한 것은 크나큰 불행이라는 지적과 함께 이기와 정순붕의 농간으로 무고한 많은 선비들이 처형당한 사실과 이를 찬반하던 선비들의 명단 등이 담겨 있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기는 자신들이 저지른 만행을 정당화하기 위해 무정보감(武定寶鑑)을 찬집했는데, 그 때 안명세공은 함께 사관으로 있었던 한지원(韓智源)이 안명세공이 쓴 시정기의 내용을 이기에게 밀고함으로써 체포되어 국문을 당하였다. 안명세공은 국문을 당하는 중에도 소신을 굽히지 않고 당당하게 이기, 정순붕의죄악을 폭로하였고, 죽음 앞에서도 의연한 모습을 남겼다. 공께서는 문과에 급제한후 불과 4년도 못 되어 말단직인 정8품에서 참화를 당하고 말았다.
이렇게 안명세 선조가 큰 화를 당하고,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문은 또한 수난의 길로 치닫게 되고 많은 선조들이 몸을 숨겨 낙향을 하게 되었다. 안명세 한림공(翰林公)은 그 후 1570년에 사면되어 통훈대부 홍문관직제학 지제교 겸 경연시강관 춘추편수관(通訓大夫弘文館直提學知製敎兼經筵侍講官春秋編修官)으로증직되었다.
1565년 문정대비가 죽자 윤원형 일파는 몰락하고 말았으나 안명세는 1567년 선조가 즉위하면서 신원(伸寃)되어 직첩(職牒)을 다시 돌려받았다. 이후 을사사화로 인해 귀양 갔던 이들이 돌아오고 재야 신진사류가 많이 등용되면서 사림이 중앙정권을 차지함에 따라 1824년에 안명세를 모시는 계담서원(桂潭書院)이 세워졌다. 계담서원은 흥선대원군 때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기도 했으나, 1991년에 순흥안씨양도공파 종회에서 복원된 것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현재 계담서원에서는 문성공 안향(安珦), 문순공 이황(李滉), 문성공 이이(李珥), 문의공 안문개(安文凱), 문정공 안축(安軸), 문간공 안종원(安宗源), 문숙공 안숭선(安崇善), 문강공 이석형(李石亨), 문민공 김일손(金馹孫), 문민공 주세붕(周世鵬), 문강공 이지함(李之), 한림공 안명세(安名世), 사촌공 안덕린(安德麟), 세마공 안술(安述),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 일완 홍범식 (一阮 洪範植), 백범 김구(白凡 金九), 도명 연병호(圖明 延秉鎬) 등 18명현(名賢)을 배향하고있다.
안명세(安名世)
안명세의 자는 경응(慶應)이며 본관은 순흥이다. 갑진년 과거에 올라 홍문관 저작(著作)이 되었다. 무신년 2월에 이기 등이 논계하기를 "일찍이 사관(史官)이 되어 유관 · 유인숙 · 윤임 등을 찬양하였는데, 죄준 것이 그 죄에 마땅하지 않다."하고, 역당으로 논하여 능지처참하고 처자는 종으로 만들었다.
공이 사초(史草)에 쓰기를 "중종대왕의 소상(小祥)이 지나지 않았고, 인종대왕은 아직 발인(發)하기 전인데, 주상께서 빈궁(殯宮)곁에서 세 대신을 죽였다." 하였다. 또 바야흐로 『무정보감(武定寶鑑)』을 편찬하게 되자, 이기 등이 역사서를 꺼내 보기를 청하였는데, 공이 이기의 죄악을 극히 사실대로 썼기 때문에, 이기가 크게 노하여 역당으로 몰아 극형에 처하였다. 죄목에는, “윤임들의 반역한 사실이 밝게드러나서 의심이 없는데, 안명세는 당시의 사관으로서은근히 역적을 옹호하여 칭찬한 말을 많이 기록하였고,흉적(凶賊)의 공사(供辭)도 누락이 많았을 뿐 아니라, 도리어 조정을 그르다 하고 역적을 옳다고 하여, 만세에 전할 역사서가 부실하게 되어버렸으니, 지극히 흉악하고 참혹하도다. 마땅히 중한 법으로 처치할 일이다.” 하였다.
경오년에 삼공이 아뢰기를, “예로부터 사관이 죄를 입은 적이 없었으므로, 여론이 지금까지 원통히 여기니, 너그러운 용서를 받게 함이 마땅합니다.” 하여, 직첩과 적몰한 가산을 도로 주기를 명하고, 아들 천지(千之)·백지(百之)에게 모두 벼슬을 주었다.
3·1운동과 제암리 사건
제암리(堤岩里)사건은 1919년 3·1운동에 대한 일제의 보복 행위로 일본 군경이 수원군(지금의 경기도 화성시) 향남면 제암리에 사는 민간인 20여 명을 학살하고 민가 30여 호를 불태운 참변사건이다.
1919년 3월 31일 제암리에서 가까운 발안(發安) 장터에서는 장날을 기해서 약1,000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태극기를 세워 놓고 독립 연설회를 개최한 후에,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장거리를 행진하였다. 그리고 일본인 소학교에 불을 지르고 독립 만세를 부르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튿날인 4월 1일 밤, 주변 산봉우리 80여 곳에서 봉화를 올리고 만세를 불렀다. 때문에 그곳에 살고 있던 일본인 부녀자와 어린이는 조금 떨어져 있는 삼계리(三溪里)로 피신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이처럼 3월말을 전후로 만세 시위 운동이 맹렬히 일어나자, 일본군의 몇 개의 검거반이 파견되면서 3·1운동에 대한 보복 행위가 시작되었다.
제암리에서는 만세운동이 일어나지 않고, 다만 마을 사람 중 몇 사람이 발안장터의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였을 뿐이었다. 그런데 1919년 4월 15일(화요일) 오후, 일본군 보병 중위 아리다(有田俊夫)가 이끄는 보병 11명과 순사 2명이 제암리에 도착하여, 강연이 있다고 속여 기독교와 천도교 남자 신자 20여 명을 기독교 교회당에 강제로 모이도록 하였다.
그런데 이들은 돌연 출입문과 창문을 굳게 잠그고, 안에 있는 사람들을 총칼로 학살한 뒤,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 교회당에 불을 질렀는데 불길이 5시간쯤 타올랐다. 이때 일본군은 불속에서 뛰쳐나오거나 길에 나왔다가 달아나는 사람에 대해 발포하거나 총검으로 찔러 죽였다.
이와 같은 사건으로 교회당 안에서 22명, 밖에서 6명 등 모두 28명이 살해되었다. 그리고 일본군경은 민가에 불을 질러 31호가 불타버렸다.
제암리 참변을 전해들은 미국 선교사이며 교육자인 언더우드(Underwood,H.H., 元漢慶)와 미국 영사관 직원 일행이 4월 16일 서울을 출발하여 그곳에 도착하였을 때, 생존자들은 먹을 것, 입을 것도 없이 겁에 질린 채 언덕 옆에 모여 있었고 살해된 시체와 불탄 집터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언더우드는 현장에 모여 있는 생존자 일부를 만나 사건의 자세한 내용을 듣고서 참상을 확인하였다. 한편 4월 17일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수이며 선교사인 영국인 스코필드(Schofield, F.W.)가 현장으로 달려가, 생생한 참상을 사진에 담고, 목격자의 증언을 수록한 <수원에서의 잔악행위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미국으로 보냈다.
또 영국영사 로이드 등도 각기 학살 현장에 가서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였다. 또한 이후부터 침묵을 지켜오던 일본내의 영자신문『재팬 애드버타이저 Japan Advertiser』와 『재팬 크로니클 Japan Chronicle』등도 목격자의 증언까지 곁들이며, 사건을 상세히 보도하기 시작하였다.
또 일본기독교동맹은 뒤늦게나마 대표를 보내 참상을 조사하게 하였으며, 만행의 일단을 신문과 잡지에 실어 일본인의 반성을 촉구하였다. 그리고 제암리 현장을 직접 찾아본 일본인 영문학자 사이토(齋藤勇)는 『복음신보(福音新報)』에 〈어떤 살륙사건>이라는 장편시를 발표하여 일본 군경의 만행에 대한 지식인의 통분을 읊기도 하였다.
한편 제암리 학살사건의 현장 지휘책임자인 보병 제79연대소속 아리다 중위에 대한 처벌은 행위가 직무 집행상 온당하였다는 이유로 덮어두려고 하였다가, 세계 여론의 지탄을 받게 되자 7월 17일자로 군법회의에 붙여졌다. 그러나 처벌의 결과가 어떠하였는지는 뻔한 일이다.
1982년 9월 문화공보부의 민족수난현장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이 사건의 목격자이며 유일한 미망인인 전동례의 증언과 최응식의 도움을 받아 이 일대 1, 300평에 대한 유해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이 조사에서 희생자들이 가지고 있던 다이쇼8년명(大正八年銘) 1전짜리 동전, 호주머니칼, 인장통, 조끼단추, 마고자단추, 램프걸이, 구부러진 못, 불탄 숯, 화염병으로 사용되었던 기린맥주병 조각 등과 함께 여덟 군데에서 집중적으로 유해가 나타났다. 이들 유골 유족의 입회하에 모두 대형관에 입관되어 1982년 9월 29일, 사건시간인 오후 2시에 경기도 주관으로 합동장례식을 치르고 제암교회 뒤편에 마련된 합동묘지에 안장하였다. 그리고 순국선열로 추서, 이 주변을 사적 제299호로 지정하였다.
묘지의 남쪽에는 제암교회에 붙은 기념관이 있는데, 이 기념관 벽면에는 그 날의 참상을 그린 3폭의 기록화와 외국 언론사들의 보도내용이 있고, 유해발굴 조사시의 사진도 함께 전시되어 있다. 내부 진열대에는 유해발굴 조사시 출토되었던 유물들이 그대로 진열되어 그 날의 참상을 되새길 수 있는 역사적인 자료가 되고 있으며, 교회 입구에 기념비가 서 있다.
당시 희생당한 선열들은 다음과 같으며 이들 모두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안정욱 안종린 안종락 안종환 안종후 안진순 안봉순 안유순 안종화 안필순
안명순 안관순 안상용 조경칠 강태성 강태성부인 김은희 홍원식 동부인김씨 홍순진
김정헌 김덕용 김흥렬 김성렬 김세열 김주남 김주업 김흥복 안경순 안무순(이상 30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