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장 4 절 내가 땅을 세울 때 너는 어디 있었느냐? 네가 그렇게 잘 알거든 말해 보아라.욥기의 저자는 현실에서 인과응보나 상선벌악의 원리가 제대로 작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직시한다. 악인이 득세하고 의인이 고통을 당한다. 이런 부조리한 현실 앞에서 저자는 의문을 제기한다. 정의롭고 자비로운 하느님은 이 잘못된 현실을 왜 바로잡으려 하지 않으시는가?
그러나 욥기의 집필 목적은 이 풀리지 않는 문제에 해답을 제시하려는 데 있지 않다. 욥기의 저작 시기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학자들은 최종 저작 연대를 기원전 6 세기 중반에서 4 세기 중반으로 봅니다.
우리가 ‘욥’하면 ‘고통받는 자’로 알고 있다. 욥기 1 장 1 절은 ‘우츠라는 땅에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욥이었다. 그 사람은 흠 없고 올곧으며 하느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이었다.’로 시작한다. 욥기는 기원전 5-3 세기 이전에 구전으로 내려오던 이야기를 정리해 기록한 책이다. |
왜 이 이야기를 썼을까? 유대인들은 기원전 6 세기 바빌로니아에 의해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포로로 잡혀간 후, 자신들이 처한 처지를 전통적인 신앙 안에서 설명할 길이 없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지탱해온 신앙은 신은 위대하며, 그 신을 잘 섬긴다면 지상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그런 그들의 생각이 깨진 상황에서 새로운 신앙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욥기는 바로 과거의 신앙과 다른 새로운 신앙의 길을 모색하는 책이다.
성경에서 ‘흠이 없고 정직한 자’로 묘사된 유일한 인물이 욥이다.‘흠이 없다.’라는 표현은 하느님이 보기에 온전한 사람이라는 의미이고, ‘정직하다.’는 사람들이 평가하기에도 완벽한 인간이라는 뜻이다. 하느님은 신앙심 깊은 욥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하루는 하느님이 하늘에서 회의를 하는데 그 자리에는 인간을 시험하는 ‘사탄’도 있었다. ‘사탄’의 원래 의미는 ‘고발하는 자’이다. 사탄은 신의 임무를 맡은 인간을 시험하고 평가해 그가 임무를 충실히 이행하지 않으면 하느님께 고발한다.
하느님이 욥의 근황을 묻는다. ‘너는 내 종 욥을 잘 살펴보았느냐? 이 세상에는 그 사람만큼 흠이 없고 정직한 사람, 그렇게 하느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는 사람은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사탄은 하느님께
‘욥이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이 하느님을 경외하겠습니까? 주님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울타리로 감싸주시고, 그가 하는 일이면 무엇이나 복을 주셔서, 그의 소유를 온 땅에 넘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제라도 주님께서 손을 드셔서,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치시면, 그는 주님 앞에서 주님을 저주할 것입니다.’
사탄은 인간이 왜 신을 믿는지, 인간들이 생각하는 종교의 핵심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하느님은 사탄에게 욥의 시험을 허락한다.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네게 맡겨보겠다. 다만, 그의 몸에는 손을 대지 말아라.’
사탄은 바로 지상으로 내려가 욥의 부, 가축, 집, 종들 그리고 심지어 그의 자녀 열 명의 생명도 앗아간다. 이해할 수 없는 비극을 당하고도 욥은 자신의 신앙을 지킨다. 욥은 슬퍼하며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민 다음 머리를 땅에 대고 엎드려 경배하며
‘모태에서 빈손으로 태어났으니, 죽을 때에도 빈손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주신 분도 주님이시오, 가져가신 분도 주님이시니, 주님의 이름을 찬양할 뿐입니다.’라고 기도한다.
하느님은 욥의 신앙을 보고 흐뭇해한다. 그리고 사탄에게 욥을 자랑하자 사탄은 다시 한번 하느님께 ‘가죽은 가죽으로 대신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 생명을 지키는 일이면,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립니다. 이제라도 주님께서 손을 들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시면, 그는 당장 주님 앞에서 주님을 저주하고 말 것입니다.’
하느님은 생명은 건드리지 말고 욥을 다시 사탄에게 맡겨 보겠다고 하신다.
욥은 발바닥에서부터 정수리까지 악성 종기가 나서 고생을 한다. 한때 최고 부자였던 그는 잿더미에 앉아 옹기 조각으로 자신의 몸을 긁어 댄다. 욥의 아내는 융통성 없는 남편에게 차라리 신을 저주하고 자살하라고 종용한다. 그러나 욥은 이 모든 어려움을 당하고도 말로 죄를 짓지 않았다.
밀라노의 주교였던 성 암브로시우스는 욥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거룩한 욥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의 몸이 모두 종양으로 덮여 있고, 그의 사지가 병들었으며 몸 전체가 고통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역경에도 굴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심지어 말로도 실수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성경에서 증언한 대로 ‘그는 이러한 일을 당하고도 입술로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그의 고통 가운데서 힘을 얻었습니다.’ 이때 욥의 세 친구인 엘리파즈, 빌닷 그리고 초파르가 찾아온다. 그 친구들은 욥의 처참한 모습을 보고 7 일 동안 밤낮으로 욥과 함께 땅바닥에 앉아 있었다. 욥기 3 장에서 욥은 신에게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한다.‘어찌하여 하느님은, 고난 당하는 자들을 태어나게 하셔서 빛을 보게 하시고, 이렇게 쓰디쓴 인생을 살아가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시는가? 어찌하여 하느님은 길 잃은 사람을 붙잡아 놓으시고, 사방을 그 길을 막으시는가?’ 세 친구는 고대 이스라엘의 보편적 세계관인 인과응보의 논리로 신은 인간에게 무작위로 고통을 부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욥이 이러한 고통을 받는 이유는 그가 그것에 상응하는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욥기 3 장부터 37 장까지는 욥과 대화하며 그에게 끊임없이 회개를 촉구한다. 하지만 욥은 자신이 잘못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을 죄인 취급하지 말라면서 그들과 논쟁을 벌인다.
욥은 우주와 생명의 기원을 들먹이면서 신의 뜻을 안다고 주장하거나, 자기 자신이 가장 지혜롭다며 세 친구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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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란 무엇인가? 하느님은 욥이 친구들과 논쟁하는 것을 지켜보다 드디어 욥에게 질문을 한다.
‘네가 누구이기에, 무지하고 헛된 말로 내 지혜를 의심하느냐? 이제 허리를 동이고 대장부답게 일어서서, 묻는 말에 대답해 보아라.’
‘지각없는 말’이라는 용어는 ‘지식이 없다’는 뜻이다. ‘지식’은 히브리어로 ‘다아트’이고 우주 삼라 만상의 원칙에 대한 앎이다. 고대 인도의 ‘다르마’ 그리고 중국의 ‘도’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아는 지식은 극히 제한적이다. 지식은 지혜와 슬기의 일부로 드러난다. 여기서 지혜는 전체를 파악할 수 있는 직관력이며, 슬기는 분석하고 계산하는 능력, 판단력, 분별력으로 볼 수 있다.
욥이 아무리 의롭고 지혜롭다 해도 그의 지식이 온 우주의 운행 원칙을 알 수 있는 정도는 아니다. 하느님이 보기에 욥이 우주와 생명의 기원에 대해서 떠벌리는 행위는 ‘무지의 소치’다. 이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높은 산에 올라가 이 산이 어떻게 생성이 되었고 지질학적으로 어떤 산인지 안다고 하면서 마치 그 산을 다 아는 것처럼 말하는 것과 같다.
그저 그 웅장함 앞에서 그저 침묵하고 경외를 표하기만 하면 된다. 욥은 무식한 말로 신의 계획에 대해 아는 척하며 지껄인 것이다.
하느님은 욥에게 땅의 기초를 놓을 때 너 어디에 있었느냐고 묻는다. 아침 해가 떠오르게 해 본 적이 있느냐, 빛이 어디에서 오는지 아느냐 어둠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아느냐?고 묻는다. 욥은 대답을 찾지 못한다. 욥은 자신의 제한된 시각으로는 도저히 신의 의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
왜 선한 사람이 고통을 받는가? 흠이 없고 정직한 욥은 왜 아무런 이유 없이 고통을 받은 것일까?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풀기 어려운 질문 중에 하나인 ‘인간 고통’의 문제이다. 신이 위대하고 선하다면, 악이 존재할 수 있는가? 선이신 분께서 어떻게 인간 세상에서 벌어지는 불의적이고 악의적인 행동에 침묵할 수 있는가? 왜 하느님은 아우슈비츄에서 수많은 유대인과 폴란드인 등이 무참히 살해되는 장면에서도 침묵하셨는가? 왜 하느님은 우리의 힘없는 할머니들을 강제로 끌고 가 위안부로 삼았던 일본군들에 대해서 왜 침묵하셨는가?
왜 착한 사람들이 세상에서 고통을 받는가?
영화 ‘트리 오브 라이프’에 천사와 같던 아들 잭이 베트남 전쟁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녀는 하늘을 응시하고 속삭인다.
‘주여 당신은 어디에 계십니까?’
욥은 하느님에게 자신의 고통의 이유에 대해서 묻는다. 왜 욥과 같이 선한 사람이 이 같은 고통을 당해야만 하는가? 왜 신은 의로운 자가 고통을 받도록 허용하는가? 그런 신을 믿어도 되는가?
신은 이런 욥에게 대답 대신 질문을 한다. 땅의 기초를 놓을 때 어디 있었는지, 신은 쉴 새 없이 욥에게 질문을 한다. 신은 욥의 질문에 끝내 대답하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의 수많은 어린아이들이 기아나 질병으로 죽는다. 왜일까? 신앙인들은 그들을 위해 도움의 손길을 보내거나 기도를 하지만 신은 침묵한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 미얀마의 독재 정권의 국민 탄압, 수단의 내전으로 인한 민간인들의 학살.
하느님은 침묵하신다. 왜일까? 이것이 신의 섭리일까? 만일 굶어 죽어가는 아이가 당신에게 도움을 청한다면, 당신은 가만히 있을 것인가? |
자연의 길과 은총의 길 삶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 자연의 길과 은총의 길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은총은 스스로의 이익을 구하지 않는다. 은총의 길을 걸으면 다른 이들에게 무시당하고, 잊혀지고, 말없이 미움을 당한다. 심지어는 모욕과 상처를 입기도 한다. 그러나 자연의 길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애쓴다. 외부에서 자신에게 기쁨을 주기를 바란다. 다른 이들의 주인 노릇을 하고 싶어 한다. 많이 소유하는 것이 자연의 길이다.
토마스 아 켐피스가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저서에서 소개한 길이다. 인간이 행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사랑하는 것이다. 서로 돕고 용서하는 길이다. 사랑이 모든 악과 슬픔을 극복할 수 있는 처방전이다. 이것이 우리가 추방당했던 에덴동산으로 가는 길이다. 그 길은 우리를 영원한 세계로 인도한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모든 것을 경험하거나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늘 ‘무지’라는 불확실성과 만납니다. 그리고 그 무지의 일부,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의 일부가 바로 ‘죽음’이라는 현실이다. 그것이 우리의 현실이라고 우리가 온전히 그것을 아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신비’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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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각자의 삶에 대해서 모든 것을 조절하고 있다고 착각하지만 지극히 순간의 삶을 살다 갈 뿐이다. 유한한 인간이 창조주의 무한한 지혜를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느님이 우주를 창조할 때 그 광경을 목격하지 못한 인간이 하느님의 우주 창조 목적을 알 수 있을까?욥은 신이 보여준 우주와 대자연의 신비를 보면서 자신의 삶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얻게 됐다. 욥은 말한다. ‘저는 알았습니다.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음을, 당신께는 어떠한 계획도 불가능하지 않음을, 당신께서는 “지각 없이 내 뜻을 가리는 이 자는 누구냐?”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저에게는 너무나 신비로워 알지 못하는 일들을 저는 이해하지도 못한 채 지껄였습니다.’
욥은 하느님이 인정한 의인이었지만, 자신의 미천한 지식으로 온 우주를 이해할 수 있다고 떠든 것이 잘못임을 깨닫는다. 욥은 기껏해야 우주의 한 점에서 한순간을 사는 존재임을 절실하게 인식합니다.
욥기 마지막에 나오는 욥의 회복 부분은 욥기에서 중요한 부분은 아닙니다.
욥기를 편집한 저자가 아마도 신앙의 시험을 통과한 욥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희망을 주고자 의도했을지 모르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미 잃어버린 열 명의 자녀 대신 다른 자녀를 얻는다고 해서 행복할까? 그럼 나의 자녀들은 대체 가능한 이마트나 홈플러스에 가면 살 수 있는 물건들인가? 하는 의문을 남깁니다.
욥기는 욥이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는 것으로 충분하고 거기서 끝났어야 합니다.
욥은 ‘신께서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제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합니다.’라고 고백한다.
세상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놀라움과 신비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떤 힘에 의해서 우주가 팽창하는지, 인간은 어떻게 두발로 걷고 뛰는지, 아이들이 어떻게 말문이 트이는지, 전혀 모르는 사람을 만나 사랑에 빠지는지, 우리 삶은 경외로운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 삶 자체가 신비입니다.
삶의 지혜란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익숙한 것을 덜 익숙한 것으로 보는 시각이며, 또한 덜 익숙한 것들을 익숙하게 만드는 노력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철학의 길이기도 합니다.
우주를 창조하시고 우주의 운행을 관리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 양심에 말을 걸어오십니다. 그 목소리는 바로 우리의 심연에 숨어 있는 ‘섬세한 침묵의 소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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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의 신학 사상 욥기에 나타난 신학 사상을 마지막으로 정리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로 상선 벌악.인과응보의 원리가 욥기 전체를 주도합니다. 이 원리는 고대 사회의 정의를 지탱하는 원리였고 동시에 지혜문학의 근본을 이루는 불변의 진리였습니다.
그런데 욥기의 저자는 이 원리가 현실에서 정확히 들어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직시합니다. 죄 없는 의인이 까닭 모를 고통을 받고 악인이 득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욥과 친구들은 이 원리에 집착을 합니다.
욥은 자신에게 닥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으로 고통스러워하고 친구들은 욥의 불행의 원인을 욥의 죄로 본다. 욥은 이런 불공정한 현실을 바로잡아 주시지 않는 하느님을 원망하고 하느님은 욥에게 나타나신다.
그런데 욥에게 나타나신 하느님은 상선 벌악의 문제를 거론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창조적 지혜와 권능만을 언급하신다. 그분은 문제의 핵심에 접근하기 위하여 욥에게 질문을 던지시고 자연의 놀라운 현상들을 하나하나 나열하신다.
욥은 점차 자연 안에는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많으며 인간 삶 안에도 자신의 이해를 뛰어넘는 현실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하느님은 상선 벌악의 원리가 세상만사에 언제나 정확하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욥에게 일깨워 주신다.
그래서 행복과 성공이 반드시 의로운 사람의 보상도 아니며, 불행과 실패가 죄에 대한 징벌도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가르침은 고통이 결코 죄로 인한 하느님과의 단절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하느님을 변호하는 호신론을 적극적으로 펼쳐 나갑니다.
상선 벌악의 원리가 통하지 않을 때 사람들은 하느님은 정의의 신인가? 하느님은 악을 완전히 통제하고 불의를 처단할 능력을 갖추신 분이신가? 하느님은 세상에서 보잘것없고 초라한 사람들에게 관심이 있으신가? 라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욥기의 저자는 하느님은 정의의 신인가? 에 대한 질문에 42 장 7-17 절에서 볼 수 있듯이, 하느님은 욥이 바르게 살았고 자신의 생각과 처신을 정직하게 드러냈다는 사실을 인정하심으로써 정의의 하느님이신가? 에 답을 하십니다.
다음으로 하느님은 두 가지 말씀으로 욥에게 당신의 권능을 확인시키신다.
38 장-40 장에서 하느님은 만물을 창조하시고 만물 위에 계신 유일한 주님으로서 자애와 공정으로 당신의 피조물을 완벽하게 관리하고 통제하신다. 욥은 피조물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떤 기능을 발휘하는지 전혀 모른다.
욥은 하느님의 창조 능력과 관리 능력 앞에서 한없이 왜소해짐을 느끼며 입을 다문다. 이것이 두 번째 질문, 하느님은 악을 통제하고 불의를 처단할 능력을 갖추신 분이신가? 에 대한 답변이다.
셋째로 하느님의 발현과 말씀은 그분이 사람들과 기꺼이 친교를 맺고자 하신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욥이 하느님께 송사를 걸었을 때 거기에 응하셔서 폭풍 속에서 나타나시어 말씀하셨다. 하느님은 우리 인간과 기꺼이 친교를 맺으시고 특히 가난한 이들의 호소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는 분이다.
욥기의 신학 사상 세 번째로 욥기의 저자는 고통의 이유와 목적에 대해서 진지하게 반성한다. 고통의 이유에 대해 가장 일반적인 설명은 상선 벌악이고 이 원리에 따르면 고통은 죄에 대한 벌이다.
욥기에서 욥의 고통은 하느님이 욥의 충성과 믿음을 시험하시기 위해 사탄이 그를 괴롭히는 것을 허락하셨기 때문에 욥에게 고통이 닥쳤다. 즉 욥의 고통의 목적은 믿음의 강화이다.
외아들을 제물로 바쳐야 했던 아브라함과 시나이 광야에서 갖가지 시련을 겪어야 했던 이스라엘 백성도 시험 때문에 고통을 당했는데, 시험받은 이들은 시련이 지나간 다음에 그것이 자신들을 단련시키기 위한 하느님의 특별한 배려였음을 깨닫고 더욱 큰 믿음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욥기에서는 고통의 이유를 시험이라고 본다면, 고통의 목적이 믿음의 강화인데 이것은 욥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이 밖에도 고통은 죄에 대한 경고의 구실을 한다고 욥의 친구 엘리후를 통해서 언급하기도 하고,
욥기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이사야 52 장 13 절-53 장 12 절까지에 등장하는 대속적 고통, 시편 66 편 10 절의 정화를 위한 고통, 창세기 50 장 20 절에 하느님의 뜻을 실현시키기 위한 고통 등이 성경에 등장한다.
그러나 고통에 대한 성경의 설명들은 어떤 고통에나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는 그 이유나 목적이 뚜렷하지 않은 고통도 수없이 많다. 그런 경우 그 고통이 왜 왔다. 등등 억지 설명이나 값싼 위로보다는 고통받는 사람 옆에 조용히 머물면서 두 손을 잡고 그와 고통을 함께 나누는 것이 더 낫다.
네 번째로 욥기의 저자는 하느님의 존재와 섭리는 인간의 사고 범위를 훨씬 뛰어넘는 신비임을 밝힌다. 폭풍 가운데 나타나신 하느님은 고통의 문제에서 하느님의 신비로 이야기의 주제를 바꾼다.
욥은 하느님을 두고 불평을 합니다. 가까이 계실 때에는 전능하시지만 인간을 억누르는 분이시고, 멀리 계실 때에는 인간의 고통에 냉담하신 분이라고 또 욥의 친구들은 하느님을 상선 벌악의 집행자로 제시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욥과 친구들의 생각으로 담아낼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창조주로 만물 위에 계시는 초월자이시며 동시에 해산하는 양과 산고를 치르는 암소까지 돌보시는 자상한 분이시다. 39 장 1 절.
하느님은 수많은 질문을 욥에게 합니다.
이것은 욥을 질책하거나 고발하려는 데 있지 않고, 그에게 당신에 관한 신비를 가르치려는 데 있었습니다. 욥은 이제 고통이 왜 왔는가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고통을 허락하신 데에는 그분만이 아는 어떤 이유와 목적이 있을 것임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겪는 고통은 하느님이 지혜와 선의로 창조하신 세상 안에서 중요한 몫을 차지합니다.
마지막으로 욥기의 저자는 사심 없는 즉 어떤 대가 없는 하느님 공경을 요구합니다.
욥기 첫 부분에 사탄은 욥이 하느님을 공경하는 이유가 그가 누리는 온갖 부귀영화 때문이라고 단정합니다. 그래서 사탄은 욥의 신심을 두고 하느님과 내기를 합니다. 그는 욥에게서 모든 행복을 빼앗으면 하느님을 저주하리라고 장담합니다.
사탄의 첫 번째 저주로 욥은 재산과 자녀를 잃었지만 슬픔 속에서도 하느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 저주로 욥은 온몸에 종기가 나고 잿더미 속에 앉아 질그릇 조각으로 제 몸을 긁으면서도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좋은 것을 받는다면, 나쁜 것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냐 ’고 합니다. 욥은 고통과 슬픔 속에서도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욥기를 관통하는 주제는 하느님 공경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 닥치더라도 인간은 하느님을 사심 없이 공경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고 있으며 또한 우리의 이해와 능력의 한계를 뛰어넘는 상황 앞에서도 하느님 안에서만 그 상황의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창조주이신 그분께 받은 것이고, 그분과 그분이 하시는 일은 우리의 지혜와 능력을 뛰어넘는 신비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그리고 예수님의 수난과 고통 그리고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묵상하며 우리 삶의 리듬을 맞추면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