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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창작 위한 필수학습작품_소나기, 별, 마지막 잎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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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기
- 황순원
소년은 개울가에서 소녀를 보자 곧 윤초시네 증손녀(曾孫女)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소녀는 개울에다 손을 잠그고 물장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서울서는 이런 개울물을 보지 못하기나 한 듯이.
벌써 며칠째 소녀는,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물장난이었다. 그런데, 어제까지 개울 기슭에서 하더니, 오늘은 징검다리 한가운데 앉아서 하고 있다.
소년은 개울둑에 앉아 버렸다. 소녀가 비키기를 기다리자는 것이다.
요행 지나가는 사람이 있어, 소녀가 길을 비켜 주었다.
다음 날은 좀 늦게 개울가로 나왔다.
이 날은 소녀가 징검다리 한가운데 앉아 세수를 하고 있었다. 분홍 스웨터 소매를 걷어 올린 목덜미가 마냥 희었다.
한참 세수를 하고 나더니, 이번에는 물 속을 빤히 들여다본다. 얼굴이라도 비추어 보는 것이리라. 갑자기 물을 움켜 낸다. 고기 새끼라도 지나가는 듯.
소녀는 소년이 개울둑에 앉아 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냥 날쌔게 물만 움켜 낸다. 그러나 번번이 허탕이다. 그대로 재미있는 양, 자꾸 물만 움킨다. 어제처럼 개울을 건너는 사람이 있어야 길을 비킬 모양이다.
그러다가 소녀가 물 속에서 무엇을 하나 집어낸다. 하얀 조약돌이었다. 그리고는 벌떡 일어나 팔짝팔짝 징검다리를 뛰어 건너간다.
다 건너가더니만 홱 이리로 돌아서며,
“이 바보!”
조약돌이 날아왔다.
소년은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단발머리를 나풀거리며 소녀가 막 달린다. 갈밭 사잇길로 들어섰다. 뒤에는 청량한 가을 햇살 아래 빛나는 갈꽃뿐.
이제 저쯤 갈밭머리로 소녀가 나타나리라.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고 생각됐다. 그런데도 소녀는 나타나지 않는다. 발돋움을 했다. 그러고도 상당한 시간이 지났다고 생각됐다.
저 쪽 갈밭머리에 갈꽃이 한 옴큼 움직였다. 소녀가 갈꽃을 안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천천한 걸음이었다. 유난히 맑은 가을 햇살이 소녀의 갈꽃머리에서 반짝거렸다. 소녀 아닌 갈꽃이 들길을 걸어가는 것만 같았다.
소년은 이 갈꽃이 아주 뵈지 않게 되기까지 그대로 서 있었다. 문득, 소녀가 던진 조약돌을 내려다보았다. 물기가 걷혀 있었다. 소년은 조약돌을 집어 주머니에 넣었다.
다음 날부터 좀더 늦게 개울가로 나왔다. 소녀의 그림자가 뵈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었다. 소녀의 그림자가 뵈지 않는 날이 계속될수록 소년의 가슴 한 구석에는 어딘가 허전함이 자리 잡는 것이었다. 주머니 속 조약돌을 주무르는 버릇이 생겼다.
그러한 어떤 날, 소년은 전에 소녀가 앉아 물장난을 하던 징검다리 한가운데에 앉아 보았다. 물 속에 손을 잠갔다. 세수를 하였다. 물 속을 들여다보았다. 검게 탄 얼굴이 그대로 비치었다. 싫었다.
소년은 두 손으로 물 속의 얼굴을 움키었다. 몇 번이고 움키었다. 그러다가 깜짝 놀라 일어나고 말았다. 소녀가 이리로 건너오고 있지 않느냐.
‘숨어서 내가 하는 일을 엿보고 있었구나.’
소년은 달리기를 시작했다. 디딤돌을 헛디뎠다. 한 발이 물 속에 빠졌다. 더 달렸다.
몸을 가릴 데가 있어 줬으면 좋겠다. 이 쪽 길에는 갈밭도 없다. 메밀밭이다. 전에 없이 메밀꽃 냄새가 짜릿하게 코를 찌른다고 생각됐다. 미간이 아찔했다. 찝찔한 액체가 입술에 흘러들었다. 코피였다.
소년은 한 손으로 코피를 훔쳐내면서 그냥 달렸다. 어디선가 ‘바보, 바보’하는 소리가 자꾸만 뒤따라오는 것 같았다.
토요일이었다.
개울가에 이르니, 며칠째 보이지 않던 소녀가 건너편 가에 앉아 물장난을 하고 있었다. 모르는 체 징검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얼마 전에 소녀 앞에서 한 번 실수를 했을 뿐, 여태 큰길 가듯이 건너던 징검다리를 오늘은 조심스럽게 건넌다.
“얘!”
못 들은 체했다. 둑 위로 올라섰다.
“얘, 이게 무슨 조개지?”
자기도 모르게 돌아섰다. 소녀의 맑고 검은 눈과 마주쳤다. 얼른 소녀의 손바닥으로 눈을 떨어뜨렸다.
“비단조개.”
“이름도 참 곱다.”
갈림길에 왔다. 여기서 소녀는 아래편으로 한 삼 마장쯤, 소년은 우대로 한 십 리 가까운 길을 가야 한다.
소녀가 걸음을 멈추며,
“너, 저 산 너머에 가 본 일 있니?”
벌 끝을 가리켰다.
“없다.”
“우리, 가보지 않으련? 시골 오니까 혼자서 심심해 못 견디겠다.”
“저래 봬도 멀다.”
“멀면 얼마나 멀기에? 서울 있을 땐 사뭇 먼 데까지 소풍 갔었다.”
소녀의 눈이 금세 ‘바보, 바보,’할 것만 같았다.
논 샛길로 들어섰다. 벼 가을걷이하는 곁을 지났다.
허수아비가 서 있었다. 소년이 새끼줄을 흔들었다. 참새가 몇 마리 날아간다. ‘참, 오늘은 일찍 집으로 돌아가 텃논의 참새를 봐야 할걸.’ 하는 생각이 든다.
“야, 재밌다!”
소녀가 허수아비 줄을 잡더니 흔들어 댄다. 허수아비가 자꾸 우쭐거리며 춤을 춘다. 소녀의 왼쪽 볼에 살포시 보조개가 패었다.
저만큼 허수아비가 또 서 있다. 소녀가 그리로 달려간다. 그 뒤를 소년도 달렸다. 오늘 같은 날은 일찍 집으로 돌아가 집안일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을 잊어버리기라도 하려는 듯이.
소녀의 곁을 스쳐 그냥 달린다. 메뚜기가 따끔따끔 얼굴에 와 부딪친다. 쪽빛으로 한껏 갠 가을 하늘이 소년의 눈앞에서 맴을 돈다. 어지럽다. 저놈의 독수리, 저놈의 독수리, 저놈의 독수리가 맴을 돌고 있기 때문이다.
돌아다보니, 소녀는 지금 자기가 지나쳐 온 허수아비를 흔들고 있다. 좀 전 허수아비보다 더 우쭐거린다.
논이 끝난 곳에 도랑이 하나 있었다. 소녀가 먼저 뛰어 건넜다.
거기서부터 산 밑까지는 밭이었다.
수숫단을 세워 놓은 밭머리를 지났다.
“저게 뭐니?”
“원두막.”
“여기 참외, 맛있니?”
“그럼, 참외 맛도 좋지만 수박 맛은 더 좋다.”
“하나 먹어 봤으면.”
소년이 참외 그루에 심은 무밭으로 들어가, 무 두 밑을 뽑아 왔다. 아직 밑이 덜 들어 있었다. 잎을 비틀어 팽개친 후, 소녀에게 한 개 건넨다. 그리고는 이렇게 먹어야 한다는 듯이, 먼저 대강이를 한 입 베물어 낸 다음, 손톱으로 한 돌이 껍질을 벗겨 우쩍 깨문다.
소녀도 따라 했다. 그러나 세 입도 못 먹고, “아, 맵고 지려.”하며 집어던지고 만다.
“참, 맛없어 못 먹겠다.”
소년이 더 멀리 팽개쳐 버렸다.
산이 가까워졌다.
단풍이 눈에 따가웠다.
“야아!”
소녀가 산을 향해 달려갔다. 이번은 소년이 뒤따라 달리지 않았다. 그러고도 곧 소녀보다 더 많은 꽃을 꺾었다.
“이게 들국화, 이게 싸리꽃, 이게 도라지꽃,…….”
“도라지꽃이 이렇게 예쁜 줄은 몰랐네. 난 보랏빛이 좋아! …… 그런데, 이 양산 같이 생긴 노란 꽃이 뭐지?”
“마타리꽃.”
소녀는 마타리꽃을 양산 받듯이 해 보인다. 약간 상기된 얼굴에 살포시 보조개를 떠올리며.
다시 소년은 꽃 한 옴큼을 꺾어 왔다. 싱싱한 꽃가지만 골라 소녀에게 건넨다.
그러나 소녀는
“하나도 버리지 마라.”
산마루께로 올라갔다.
맞은편 골짜기에 오순도순 초가집이 몇 모여 있었다.
누가 말할 것도 아닌데, 바위에 나란히 걸터앉았다. 유달리 주위가 조용해진 것 같았다. 따가운 가을 햇살만이 말라가는 풀 냄새를 퍼뜨리고 있었다.
“저건 또 무슨 꽃이지?”
적잖이 비탈진 곳에 칡덩굴이 엉키어 꽃을 달고 있었다.
“꼭 등꽃 같네. 서울 우리 학교에 큰 등나무가 있었단다. 저 꽃을 보니까 등나무 밑에서 놀 던 동무들 생각이 난다.”
소녀가 조용히 일어나 비탈진 곳으로 간다. 꽃송이가 많이 달린 줄기를 잡고 끊기 시작한다. 좀처럼 끊어지지 않는다. 안간힘을 쓰다가 그만 미끄러지고 만다. 칡덩굴을 그러쥐었다.
소년이 놀라 달려갔다. 소녀가 손을 내밀었다. 손을 잡아 이끌어 올리며, 소년은 제가 꺾어다 줄 것을 잘못했다고 뉘우친다. 소녀의 오른쪽 무릎에 핏방울이 내맺혔다. 소년은 저도 모르게 생채기에 입술을 가져다 대고 빨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홱 일어나 저 쪽으로 달려간다.
좀 만에 숨이 차 돌아온 소년은
“이걸 바르면 낫는다.”
송진을 생채기에다 문질러 바르고는 그 달음으로 칡덩굴 있는 데로 내려가, 꽃 많이 달린 몇 줄기를 이빨로 끊어 가지고 올라온다. 그리고는,
“저기 송아지가 있다. 그리 가 보자.”
누렁송아지였다. 아직 코뚜레도 꿰지 않았다.
소년이 고삐를 바투 잡아 쥐고 등을 긁어 주는 체 훌쩍 올라탔다. 송아지가 껑충거리며 돌아간다.
소녀의 흰 얼굴이, 분홍 스웨터가, 남색 스커트가, 안고 있는 꽃과 함께 범벅이 된다. 모두가 하나의 큰 꽃묶음 같다. 어지럽다. 그러나 내리지 않으리라. 자랑스러웠다. 이것만은 소녀가 흉내 내지 못할, 자기 혼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인 것이다.
“너희, 예서 뭣들 하느냐?”
농부(農夫)하나가 억새풀 사이로 올라왔다.
송아지 등에서 뛰어내렸다. 어린 송아지를 타서 허리가 상하면 어쩌느냐고 꾸지람을 들을 것만 같다.
그런데, 나룻이 긴 농부는 소녀 편을 한 번 훑어보고는 그저 송아지 고삐를 풀어내면서,
“어서들 집으로 가거라. 소나기가 올라.”
참, 먹장구름 한 장이 머리 위에 와 있다. 갑자기 사면이 소란스러워진 것 같다. 바람이 우수수 소리를 내며 지나간다. 삽시간에 주위가 보랏빛으로 변했다.
산을 내려오는데, 떡갈나무 잎에서 빗방울 듣는 소리가 난다. 굵은 빗방울이었다. 목덜미가 선뜻 선뜻했다. 그러자, 대번에 눈앞을 가로막는 빗줄기.
비안개 속에 원두막이 보였다. 그리로 가 비를 그을 수밖에.
그러나 원두막은 기둥이 기울고 지붕도 갈래갈래 찢어져 있었다. 그런 대로 비가 덜 새는 곳을 가려 소녀를 들어서게 했다.
소녀의 입술이 파아랗게 질렸다. 어깨를 자꾸 떨었다.
무명 겹저고리를 벗어 소녀의 어깨를 싸 주었다. 소녀는 비에 젖은 눈을 들어 한 번 쳐다보았을 뿐, 소년이 하는 대로 잠자코 있었다. 그리고는, 안고 온 꽃묶음 속에서 가지가 꺾이고 꽃이 일그러진 송이를 골라 발밑에 버린다. 소녀가 들어선 곳도 비가 새기 시작했다. 더 거기서 비를 그을 수 없었다.
밖을 내다보던 소년이 무엇을 생각했는지 수수밭 쪽으로 달려간다. 세워 놓은 수숫단 속을 비집어 보더니, 옆의 수숫단을 날라다 덧세운다. 다시 속을 비집어 본다. 그리고는 이쪽을 향해 손짓을 한다.
수숫단 속은 비는 안 새었다. 그저 어둡고 좁은 게 안 됐다. 앞에 나앉은 소년은 그냥 비를 맞아야만 했다. 그런 소년의 어깨에서 김이 올랐다.
소녀가 속삭이듯이, 이리 들어와 앉으라고 했다. 괜찮다고 했다. 소녀가 다시, 들어와 앉으라고 했다. 할 수 없이 뒷걸음질을 쳤다. 그 바람에, 소녀가 안고 있는 꽃묶음이 망그러졌다. 그러나 소녀는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비에 젖은 소년의 몸 냄새가 확 코에 끼얹혀졌다. 그러나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도리어 소년의 몸 기운으로 해서 떨리던 몸이 적이 누그러지는 느낌이었다.
소란하던 수수잎 소리가 뚝 그쳤다. 밖이 말개졌다.
수숫단 속을 벗어 나왔다. 멀지 않은 앞쪽에 햇빛이 눈부시게 내리붓고 있었다. 도랑 있는 곳까지와 보니, 엄청나게 물이 불어 있었다. 빛마저 제법 붉은 흙탕물이었다. 뛰어 건널 수가 없었다.
소년이 등을 돌려 댔다. 소녀가 순순히 업히었다. 걷어 올린 소년의 잠방이까지 물이 올라왔다.
소녀는 ‘어머나’소리를 지르며 소년의 목을 끌어안았다.
개울가에 다다르기 전에, 가을 하늘이 언제 그랬는가 싶게 구름 한 점 없이 쪽빛으로 개어 있었다.
그 뒤로 소녀의 모습은 뵈지 않았다. 매일같이 개울가로 달려와 봐도 뵈지 않았다.
학교에서 쉬는 시간에 운동장을 살피기도 했다. 남 몰래 5학년 여자 반을 엿보기도 했다. 그러나 뵈지 않았다.
그날도 소년은 주머니 속 흰 조약돌만 만지작거리며 개울가로 나왔다. 그랬더니, 이 쪽 개울둑에 소녀가 앉아 있는 게 아닌가.
소년은 가슴부터 두근거렸다.
“그 동안 앓았다.”
어쩐지 소녀의 얼굴이 해쓱해져 있었다.
“그 날, 소나기 맞은 탓 아냐?”
소녀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었다.
“인제 다 났냐?”
“아직도…….”
“그럼, 누워 있어야지.”
“하도 갑갑해서 나왔다. ……참, 그 날 재미있었어. 그런데 그 날 어디서 이런 물이 들었는지 잘 지지 않는다.”
소녀가 분홍 스웨터 앞자락을 내려다본다. 거기에 검붉은 진흙물 같은 것이 들어 있었다.
소녀가 가만히 보조개를 떠올리며,
“그래 이게 무슨 물 같니?”
소년은 스웨터 앞자락만 바라보고 있었다.
“내, 생각해 냈다. 그 날, 도랑을 건너면서 내가 업힌 일이 있지? 그 때, 네 등에서 옮은 물이다.”
소년은 얼굴이 확 달아오름을 느꼈다.
갈림길에서 소녀는
“저, 오늘 아침에 우리 집에서 대추를 땄다. 낼 제사 지내려고 …….”
대추 한 줌을 내준다. 소년은 주춤한다.
“맛봐라. 우리 증조(曾祖)할아버지가 심었다는데, 아주 달다.”
소년은 두 손을 오그려 내밀며,
“참, 알도 굵다!”
“그리고 저, 우리 이번에 제사 지내고 나서 좀 있다. 집을 내주 게 됐다.” 소년은 소녀네가 이사해 오기 전에 벌써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어서, 윤초시 손자(孫子)가 서울서 사업에 실패해 가지고 고향에 돌아오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것이 이번에는 고향집마저 남의 손에 넘기게 된 모양이었다.
“왜 그런지 난 이사 가는 게 싫어졌다. 어른들이 하는 일이니 어쩔 수 없지만…….”
전에 없이, 소녀의 까만 눈에 쓸쓸한 빛이 떠돌았다.
소녀와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 소년은 혼자 속으로, 소녀가 이사를 간다는 말을 수없이 되뇌어 보았다. 무어 그리 안타까울 것도 서러울 것도 없었다. 그렇건만, 소년은 지금 자기가 씹고 있는 대추알의 단맛을 모르고 있었다.
이 날 밤, 소년은 몰래 덕쇠 할아버지네 호두 밭으로 갔다.
낯에 봐 두었던 나무로 올라갔다. 그리고 봐 두었던 가지를 향해 작대기를 내리쳤다. 호두송이 떨어지는 소리가 별나게 크게 들렸다. 가슴이 선뜩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굵은 호두야 많이 떨어 져라, 많이 떨어져라, 저도 모를 힘에 이끌려 마구 작대기를 내리 치는 것이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열이틀 달이 지우는 그늘만 골라 디뎠다. 그늘의 고마움을 처음 느꼈다.
불룩한 주머니를 어루만졌다. 호두송이를 맨손으로 깠다가는 옴이 오르기 쉽다는 말 같은 건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저 근동에서 제일가는 이 덕쇠 할아버지네 호두를 어서 소녀에게 맛보여야 한 다는 생각만이 앞섰다.
그러다,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녀더러 병이 좀 낫거들랑 이사 가기 전에 한 번 개울가로 나와 달라는 말을 못해 둔 것이었다. 바보 같은 것, 바보 같은 것.
이튿날, 소년이 학교에서 돌아오니, 아버지가 나들이옷으로 갈아입고 닭 한 마리를 안고 있었다.
어디 가시느냐고 물었다.
그 말에도 대꾸도 없이, 아버지는 안고 있는 닭의 무게를 겨냥해 보면서,
“이만하면 될까?”
어머니가 망태기를 내주며,
“벌써 며칠째 ‘걀걀’하고 알 날 자리를 보던데요. 크진 않아도 살은 쪘을 거여요.”
소년이 이번에는 어머니한테 아버지가 어디 가시느냐고 물어 보았다.
“저, 서당골 윤초시 댁에 가신다. 제사상에라도 놓으시라고…….”
“그럼, 큰 놈으로 하나 가져가지. 저 얼룩수탉으로…….”
이 말에, 아버지는 허허 웃고 나서,
“임마, 그래도 이게 실속이 있다.”
소년은 공연히 열적어, 책보를 집어던지고는 외양간으로 가, 쇠잔등을 한 번 철썩 갈겼다. 쇠파리라도 잡는 체.
개울물은 날로 여물어 갔다.
소년은 갈림길에서 아래쪽으로 가 보았다. 갈밭머리에서 바라보는 서당골 마을은 쪽빛 하늘 아래 한결 가까워 보였다.
어른들의 말이, 내일 소녀네가 양평 읍으로 이사 간다는 것이었다. 거기 가서는 조그마한 가겟방을 보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소년은 저도 모르게 주머니 속 호두알을 만지작거리며, 한 손으로는 수없이 갈꽃을 휘어 꺾고 있었다.
그 날 밤, 소년은 자리에 누워서도 같은 생각뿐이었다. 내일 소녀네가 이사하는 걸 가보나 어쩌나. 가면 소녀를 보게 될까 어떨까.
그러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는가 하는데,
“허, 참 세상일도…….”
마을 갔던 아버지가 언제 돌아왔는지,
“윤초시 댁도 말이 아니야, 그 많던 전답을 다 팔아 버리고, 대대로 살아오던 집마저 남의 손에 넘기더니, 또 악상까지 당하는 걸 보면…….”
남폿불 밑에서 바느질감을 안고 있던 어머니가,
“증손(曾孫)이라곤 계집애 그 애 하나뿐이었지요?”
“그렇지, 사내 애 둘 있던 건 어려서 잃어버리고…….”
“어쩌면 그렇게 자식 복이 없을까.”
“글쎄 말이지. 이번 앤 꽤 여러 날 앓는 걸 약도 변변히 못써 봤다더군. 지금 같아서 윤초시네도 대가 끊긴 셈이지.……그런데 참, 이번 계집앤 어린 것이 여간 잔망스럽지가 않아. 글쎄, 죽기 전에 이런 말을 했다지 않아? 자기가 죽거든 자기 입던 옷을 꼭 그대로 입혀서 묻어 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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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 알퐁스 도데
내가 뤼르봉 산에서 양을 치고 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몇 주일씩이나 사람이라고는 통 그림자도 구경 못하고, 다만 양떼와 사냥개 검둥이를 상대로 홀로 목장에 남아 있어야 했습니다. 이따금 몽들뤼르의 은자가 약초를 찾아 그 곳을 지나가는 일도 있었고, 또는 피에몽에서 온 숯을 굽는 사람의 거무데데한 얼굴이 눈에 띄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도 외로운 생활을 해 온 나머지 좀처럼 입을 여는 일이 없는 순박한 사람들이어서 남에게 말을 거는 취미도 잃어버렸거니와, 도무지 무엇이 지금 산 아래 여러 마을이나 읍에서 이야깃거리가 되고 있는지를 통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두 주일마다 보름치의 양식을 실어다 주는 우리 농장 노새의 방울 소리가 언덕길에서 들려올 때, 그리고 꼬마 미아로(농장 머슴)의 그 또랑또랑한 얼굴이나 혹은 늙은 노라드 아주머니의 다갈색 모자가 언덕 위에 남실남실 떠오를 때면, 나는 너무나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때마다, 나는 어느 집 어린이가 영세를 했고 누가 결혼을 했는지, 그 사이 산 밑에서 일어난 소식을 연해 캐묻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관심이 쏠리는 것은 주인댁 따님, 이 근처 백 리 안에서 가장 예쁜 우리 스테파네트 아가씨가 어떻게 지내는지를 아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과히 관심을 가지는 기색을 보이지 않고, 아가씨가 자주 잔치에 참석하며 저녁 나들이를 하는지, 또는 지금도 새로 나타난 멋쟁이들이 잇달아 아가씨의 환심을 사러 오는지, 이런 따위를 넌지시 알아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만일 “네가, 산에 사는 보잘 것 없는 일개 목동인 네가, 그런 건 알아서 무엇 하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나대로 지금도 대답할 말이 있습니다. 그때 내 나이 스무 살이었다고, 그리고 스테파네트는 지금까지 한평생 내가 보아온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었다고.
그런데 어느 일요일이었습니다. 보름치의 식량이 오기를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있었는데, 식량은 그날따라 아주 늦게야 겨우 도착하였습니다.
아침나절에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큰 미사를 보고 오기 때문일 테지.’
그러자 점심때쯤 되어 소나기가 퍼부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길이 나빠서 노새를 몰고 떠날 수가 없었으리라고 생각하며 초조한 마음을 달래는 것이었습니다.
드디어 세 시쯤 해서 말끔히 씻긴 하늘 밑에 온 산이 비에 젖고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일 때였습니다. 나뭇잎에 물방울 듣는 소리와 개천에 물이 불어 좔좔 넘쳐흐르는 소리에 섞여, 문득 방울 소리가 새어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흡사 부활절날 여러 종루에서 일제히 울려오는 종악과도 같이 즐겁고 경쾌한 소리였습니다.
그러나 막상 노새를 몰고 나타난 것은 꼬마 미아로도 아니고, 그렇다고 늙은 노라드 아주머니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누구일까요? 천만뜻밖에도 바로 우리 아가씨였습니다. 우리 아가씨가 노새 등에 실린 버들고리 사이에 의젓이 올라타고 몸소 나타난 것입니다. 맑은 산정기와 소나기 뒤에 싸늘하게 씻긴 공기를 씌어 얼굴이 온통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습니다.
꼬마는 앓아누워 있고 노라드 아주머니는 휴가를 얻어 자기 아이들을 보러 갔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름다운 스테파네트는 노새에서 내리며 우선 그 모든 소식과 그리고 도중에 길을 잃었기 때문에 늦어졌다는 사연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러나 한편 아가씨 머리에 꽃은 꽃 리본이며, 그 눈부신 스커트, 그리고 그 곱고 빛나는 레이스로 단장한 화려한 옷차림을 보면, 덤불 속에서 길을 찾아 해맸다느니보다는 차라리 어느 무도회에라도 들러서 놀다가 늦어진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습니다.
오, 그 귀여운 모습! 아무리 바라보아도 내 눈은 지칠 줄을 몰랐습니다. 그때까지 그렇게 가까이 아가씨를 바라본 적이 없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겨울이 되어 양떼를 몰고 벌판으로 내려가서, 저녁을 먹으러 농장으로 돌아가면 가끔 아가씨가 식당을 휙 가로질러 지나가는 때도 있었읍니다만, 거의 하인들에게는 말을 거는 일이 없었습니다. 늘 아름답게 차려 입고 어쩐지 좀 깔끔해 보이고……
그런데 지금 그 아가씨가 바로 내 눈앞에 와 있는 것입니다. 오로지 나만을 위해서 말입니다. 그러니 그만하면 넋을 잃을 법도 하지 않습니까?
바구니에서 식량을 끌어내기가 무섭게, 스테파네트는 신기한 듯이 주위를 휘휘 둘러보기 시작했습니다 아가씨는 아름다운 나들이옷을 더럽힐까봐 스커어트 자락을 살짝 걷어올리더니, 양을 몰아넣는 울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내가 자는 구석이며, 양 모피를 깐 짚자리며, 벽에 걸린 커다란 두건 달린 외투며, 내 채찍, 그리고 구식 엽총 따위를 보고 싶어했습니다. 그 모든 것이 아가씨에게는 재미있고 즐거웠던 것입니다.
“그래, 여기서 산단 말이지? 참 가엾기도 해라. 밤낮 이렇게 외로이 세월을 보내자니 얼마나 갑갑할까! 무얼 하며 시간을 보내지? 무슨 생각을 하며?”
‘당신을 생각하며…… 아가씨.’
이렇게 대답하고 싶은 생각이 불현듯 치밀었습니다. 사실, 그렇게 대답한대도 거짓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 나는 어찌 당황했던지, 한 마디도 대답이 선뜻 나오질 않았습니다. 아마 그러한 낌새를 눈치채고도 깜찍스러운 것이 일부러 얄궂은 질문을 던지고는, 내가 쩔쩔매는 꼴을 보며 기뻐하고 있었나 봅니다.
“그리고, 예쁜 여자 동무라도 가끔 만나러 올라오니? 정말 여자 동무가 여기를 찾아올 때면, ‘황금의 양’이나 저 산봉우리 위로만 날아다니는 에스테렐 선녀를 눈앞에 보는 듯하겠구나.”
이런 말을 하며 머리를 뒤로 젖히고 웃는 그 귀여운 몸짓이라든지, 요정이 나타나듯이 얼른 왔다가는 숨 돌리 겨를 없이 가 버리는 그 서운한 뒷맛이, 정말 아가씨 자신이야말로 내게는 영락없이 에스테렐 선녀 같이만 보였습니다.
“잘 있어라. 목동아.”
“조심해 가셔요. 아가씨.”
마침내 아가씨는 빈 바구니를 싣고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아가씨가 비탈진 산길 속에 가뭇없이 사라진 뒤에도, 그 노새 발굽에 채어 연방 굴러 떨어지는 돌멩이 소리가 여전히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돌멩이 하나하나가 그대로 내 심장 위에 덜컥덜컥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오래오래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해가 질 무렵까지, 그 애틋한 꿈이 달아날까 봐 감히 손 하나 까 딱 못하고 졸음에 겨운 듯 우두커니 서 있었습니다. 저녁때가 다 되어, 내려다보이는 산골짜기들이 차차 푸른빛으로 변하고, 양들도 울안으로 돌아오려고 ‘매매‘ 울면서 서로 몸을 비비대고 있을 무렵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밑으로 내려가는 언덕배기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그러자 우리 아가씨가 나타나는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금방 생글생글 웃던 모습은 간 데 없고, 흠뻑 물에 젖어서 추위와 공포로 오르르 떨고 있었습니다. 아마, 언덕 밑에서, 소나기에 물이 불은 소르고 강에 부딪치자 기를 쓰고 굳이 건너가려다가 그만 물에 빠질 뻔한 모양이었습니다.
더욱 난처한 일은, 그렇게 날이 저물고 보니 이젠 농장으로 돌아 갈 생각은 아예 꿈에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름길이 있기는 했지만, 아가씨 혼자서는 도저히 찾아갈 수 없을 터이고, 그렇다고 내가 양 떼를 여기에 내버려두고 떠날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산 위에서 밤을 새워야 하며, 더군다나 가족들이 근심할 생각을 하고 아가씨는 안절부절못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로서는 힘자라는 데까지 아가씨를 안심시키려고 위로해 주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칠월이라 밤도 아주 짧습니다. 아가씨, 잠깐만 꾹 참으시면 됩니다.”
이렇게 달래 놓고는 황급히 불을 활활 피워, 발과 시냇물에 젖은 옷을 말리게 했습니다. 이어 우유와 치이즈를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러나 가엾은 아가씨는 불을 쬐려고도, 무엇을 먹어 볼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구슬 같은 눈물이 글썽글썽 눈에 괴는 걸 보고, 그만 나까지도 울고 싶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기어이 밤이 오고야 말았습니다. 이제는 아득한 산꼭대기에 겨우 싸라기만큼이나 햇볕이 남아있어, 서쪽 하늘에 증기처럼 한 줄기 빛이 비껴 있을 뿐이었습니다. 나는 아가씨가 울안에 들어가서 쉬기를 바랐습니다. 새 짚 위에, 한번도 써 보지 않은 새 모피를 깔아놓고, 안녕히 주무시라고 인사를 하고 나서, 나는 밖으로 나와 문 앞에 앉았습니다.
비록 누추할망정 그래도 내 울안에서, 신기한 듯이 그 잠든 얼굴을 들여다보는 양들 바로 곁에서, 우리 주인댁 따님이-마치 다른 어느 양보다 더 귀하고 더 순결한 한 마리 양처럼- 내 보호 밑에 마음 놓고 고이 쉬고 있다는 생각에 오직 자랑스러운 마음이 벅차오를 뿐이었습니다. 이때까지 밤하늘이 그렇게도 유난히 깊고 별들이 그렇게도 찬란하게 보인 적은 없었습니다.
갑자기 사립문이 삐꺽 열리면서 아름다운 스테파네트가 나타났습니다. 아가씨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양들이 뒤척이는 서슬에 짚이 버스럭거리며, 혹은 잠결에 ‘매‘하고 울음소리를 내는 놈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모닥불 곁으로 오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나는 염소 모피를 벗어 아가씨 어깨 위에 걸쳐 주고, 모닥불을 이글이글 피워놓았습니다. 그리고 우리 둘이는 아무 말 없이 나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만일 한번만이라도 한데서 밤을 새워 본 일이 있는 분이라면, 인간이 모두 잠든 깊은 밤중에는 또 다른 신비로운 세계가 고독과 적막 속에 눈을 뜬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 때 샘물은 훨씬 더 맑은 소리로 노래 부르고, 못에는 자그마한 불꽃들이 반짝이는 것입니다. 온갖 산신령들이 거침없이 오락가락 노닐며, 대기 속에는 마치 나뭇가지나 풀잎이 부쩍부쩍 자라는 소리라도 들리듯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들, 그 들릴 듯 말 듯한 온갖 소리들 이 일어납니다. 낮은 생물들의 세상이지요.
그러나 밤이 오면 그것은 물건들의 세상이랍니다. 누구나 이런 밤의 세계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은 좀 무서워질 것입니다만…….
그래서 우리 아가씨도 무슨 바스락 소리만 들려도, 그만 소스라치며 바싹 내게로 다가드는 것이었습니다. 한번은 저편 아래쪽 못에서 처량하고 긴 소리가 은은하게 굽이치며 우리가 앉아 있는 산등성이로 솟아오르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 찰나에, 아름다운 유성이 한 줄기 우리들 머리 위를 같은 방향으로 스쳐 가는 것이, 마치 금방 우리가 들은 그 정체 모를 울음소리가 한 가닥 광선을 이끌고 지나가는 것 같았습니다.
“저게 무얼까?”
스테파네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천국으로 들어가는 영혼이지요.”
이렇게 대답하고 나는 성호를 그었습니다.
아가씨도 나를 따라 성호를 긋고는 잠시 고개를 들고 하늘을 쳐다보며 깊은 명상에 잠겼습니다. 이윽고, 불쑥 이렇게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게 정말이니? 너희들 목동은 모두 점쟁이라면서?”
“천만에요, 아가씨.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남들보다는 더 별들과 가까이 지내는 샘이지요. 그러니, 평지에 사는 사람들보다는 별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을 더 잘 알 수 있답니다.”
아가씨는 여전히 공중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손으로 턱을 괸 채 염소 모피를 두르고 있는 모습은 그대로 귀여운 천국의 목자였습니다.
“어머나, 저렇게 많아! 참 기막히게 아름답구나! 저렇게 많은 별은 생전 처음이야. 넌 저 별 들 이름을 잘 알 테지?”
“아무렴요, 아가씨. 자! 바로 우리들 머리 위를 보셔요. 저게 ‘성 쟈크의 길(은하수)’이랍니다. 프랑스에서 곧장 에스파니아 상공으로 통하지요. 샤를르마뉴 대왕께서 사라센 사람들과 전쟁을 할 때에, 바로 갈리스의 성 쟈크가 그 용감한 대왕께 길을 알려 주기 위해서 그어놓은 것이랍니다. 좀더 저 쪽으로 ‘영혼들의 수레’와 그 번쩍이는 굴대 네 개가 보이지요? 그 앞에 있는 별 셋이 ‘세 마리 짐승’이고, 그 셋째 번 별이 바로 곁에 다가붙은 아주 작은 꼬마별이 ‘마차부’이고요, 그 언저리에 온통 빗발처럼 내리 떨어지는 별들이 보이죠? 그건 하느님께서 당신 나라에 들이고 싶지 않은 영혼들이랍니다. 저편 좀 낮은 쪽에, 저것 보십시오. 저게 ‘갈퀴’ 또는 삼왕성(오리온)이랍니다. 우리들 목동에게는 시계 구실을 해 주는 별이지요. 그 별을 쳐다보기만 해도, 나는 지금 시각이 자정이 지났다는 걸 안답니다. 역시 남쪽으로 좀더 아래로 내려가서, 별들의 횃불인 쟝 드 밀랑(시리어스)이 반짝이고 있습니다. 저 별에 관해서는 목동들 사이에 다음과 같은 얘기가 전하고 있답니다. - 어느 날 밤, 쟝 드 밀랑은 삼왕성과 ‘병아리장(북두칠성)’들과 함께 그들 친구별의 잔치에 초대를 받았나 봐요. ‘병아리장’은 남들보다 일찍 서둘러서 맨 먼저 떠나 윗길로 접어들었다나요. 저 위쪽으로 하늘 한복판을 보셔요. 그래, 삼왕성은 좀 더 아래로 곧장 가로질러 마침내 ‘병아리장‘을 따라갔습니다. 그러나 게으름뱅이 쟝 드 밀랑은 너무 늦잠을 자다가 그만 맨 꼬리가 되었어요. 그래 불끈해 가지고 그들을 멈추게 하려고 지팡이를 냅다 던졌어요. 그래서 삼왕성을 ‘쟝 드 밀랑의 지팡이’라고도 부른답니다. 그렇지만 온갖 별들 중에도 제일 아름다운 별은요. 아가씨, 그 건 뭐니 뭐니 해도 역시 우리들의 별이죠. 저 ‘목동의 별’ 말입니다. 우리가 새벽에 양떼를 몰고 나갈 때나 또는 저녁에 다시 몰고 돌아올 때, 한결같이 우리를 비추어 주는 별이랍니다. 우리들은 그 별을 마글론이라고도 부르지요. ‘프로방스의 피에르’의 뒤를 쫓아가서 칠년 만에 한 번씩 결혼을 하는 예쁜 마글론 말입니다.”
“어머나! 그럼 별들도 결혼을 하니?”
“그럼요, 아가씨.”
그러고 나서, 그 결혼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를 이야기해 주려고 하고 있을 무렵에, 나는 무엇인가 싸늘하고 보드라운 것이 살며시 내 어깨에 눌리는 감촉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아가씨가 졸음에 겨워 무거운 머리를, 리본과 레이스와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을 앙증스럽게 비비대며, 가만히 기대온 것이었습니다. 아가씨는 훤하게 먼동이 터 올라 별들이 해쓱하게 빛을 잃을 때까지 꼼짝 않고 그대로 기대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 잠든 얼굴을 지켜보며 꼬빡 밤을 새웠습니다. 가슴이 설렘을 어쩔 수 없었지만, 그래도 내 마음은 오직 아름다운 것만을 생각하게 해 주는 그 맑은 밤하늘의 비호를 받아 어디까지나 성스럽고 순결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총총한 별들이 마치 헤아릴 수 없이 거대한 양떼처럼 고분고분하게 고요히 그들의 운행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따금 이런 생각이 내 머리를 스치곤 했습니다.
‘저 숱한 별들 중에 가장 가냘프고 가장 빛나는 별님 하나가 그만 길을 잃고 내 어깨에 내려앉아 고이 잠들어 있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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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잎새
- 오 헨리
워싱턴 광장 서쪽 좁은 지역에는 구불구불한 골목길들이 이리저리 뻗어 있다. 골목길들은 그 지역을 여러 조각으로 쪼개놓았다. 그 조각들을 사람들은 ‘플레이스’라고 불렀다. 그 플레이스의 모양은 기묘했다. 모퉁이나 구부러진 모양이 많고, 하나의 길이 쭉 이어지다가 다시 그 길로 돌아오는 경우도 있다. 그만큼 이 지역은 생김새가 복잡했다.
전에 어떤 화가는 이 거리를 잘 활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였다. 물감이나 종이, 캔버스 등 물건 값을 받으러 온 사람을 따돌리는 데 이 거리처럼 안성맞춤인 곳은 찾기 어려울 것이다. 일단 이 길에 들어서면 돈을 한푼도 받아내기 전에, 자신이 왔던 길로 되돌아 나가는 일이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곧 이 낡고 이상한 모습의 그리니지 마을에는 온갖 종류의 예술가들이 찾아와 자리 잡게 되었다. 이 마을의 집들은 북쪽으로 향한 창, 18세기식 박공, 네덜란드식 지붕 밑 다락방 따위를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집세가 무척 쌌다. 예술가들은 그들은 6번가에서 양철 간단한 난로 따위를 두세 개 사서 이 마을로 찾아온다. 그리하여 이곳에는 일종의 예술인 마을이 만들어졌다.
수우와 존시는 볼품없는 3층 벽돌 건물 꼭대기에 화실을 가지고 있었다. 존시는 조안나의 애칭이었다. 수우는 메인 주 출신이고 존시는 캘리포니아 주 출신이었다. 두 사람은 8번가에 있는 델모니코 식당에서 만났다. 두 사람은 샐러드와 의상 - 신부(神父) 두루마기를 연상시키는 소매가 달린 - 에 대한 취미가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두 사람은 모두 예술가였다. 그리하여 이 마을에 두 사람의 공동 아틀리에가 탄생한 것이었다.
그것은 지난 5월의 일이었다. 11월이 되자 의사들이 흔히 폐렴이라고 부르는 불청객이 이 마을을 휩쓸고 다녔다. 이 냉혹한 손님은 얼음 같은 손으로 온 마을을 휩쓸어버렸다. 빈민가를 대담하게 걸어 다니며 엄청난 희생자를 한꺼번에 쓰러뜨렸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 이 불청객은 조용히, 비좁고 이끼 낀 플레이스의 골목길 안에까지 침범해왔다.
폐렴 씨는 아무리 생각해도 기사도를 갖춘, 늙은 신사다운 품위를 갖춘 존재가 아니었다. 캘리포니아의 부드러운 바람 속에서 자라난 연약한 여성은 특히 그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그 늙은이는 피투성이 주먹을 휘두르며 거친 숨을 내쉬며 사람들에게 대들었다. 그 늙은이는 자기에게 어울리는 다른 적당한 상대를 찾아야 했다. 그런데도 병마는 존시를 습격했다. 존시는 페인트를 칠한 낡은 쇠 침대에 누워 거의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네덜란드식의 조그마한 유리창 밖으로 이웃집 벽돌 벽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느 날 아침이었다. 동네 여기저기 왕진을 다니느라 늘 바쁘기만 한 의사가 흰털이 섞인 굵은 눈썹을 움직여 수우에게 신호를 했다. 복도로 좀 나와 보라는 뜻이었다.
“살아날 가능성은 - 글쎄 열에 하나 정도랄까?”
의사는 체온계를 흔들어 눈금을 내리면서 말했다.
“우선 살아야겠다는 정신력이 있어야 나을 가능성도 생기지. 그런데 환자 마음이 장의사를 부르는 생각만 하고 있어서는 아무리 좋은 처방을 해줘도 아무 소용이 없다고. 이 아가씨는 자기가 낫지 않을 거라고 스스로 단념하고 있어요. 이 아가씨 맘을 확 잡아 끌만한 것이 뭐 없을까?”
“존시는 - 언젠가는 나폴리만(灣)을 꼭 그리고 싶다고 그랬어요.”
수우가 대답했다.
“그림이라고? 그따위 건 아무 소용없어! 뭔지 이 아가씨가 푹 빠져들어서 그걸 위해 곰곰이 생각할만한 그런 것 말이야! 이를테면 혹시 뭐 마음에 드는 남자라든가…….”
“남자요?”
수우는 뭔가 목에 걸린 것 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없어요, 선생님. 그런 사람은 전혀 없답니다.”
“흠, 그러니 꼭 살아야겠다는 의욕이 생길 리 없지…….”
의사가 말했다.
“일단 내 힘이 닿은 데까지 힘을 써 보겠어요. 하지만, 중요한 건 환자의 의지에요. 환자가 자기 장례식 행렬에 차가 몇 대나 따라올지, 그따위 생각만 하고 있으면 치료의 효과는 절반도 낼 수가 없어요. 이를테면 올 겨울 외투는 어떤 소매가 유행하느냐랄지, 환자가 그런 질문만이라도 할 수 있다면 가능성은 열에 하나가 아니라 다섯에 하나쯤으로 늘어날 수 있어요.”
의사가 돌아간 후, 수우는 화실로 들어가서 일본제 종이 냅킨이 흠뻑 젖을 정도로 울었다. 그리고 화판을 겨드랑이에 끼고 일부러 휘파람을 불면서 활발하게 존시의 방으로 들어갔다.
존시는 창쪽을 향해 조용히 누워 있었다. 이불에 주름이 하나도 접히지 않을 만큼 조용한 모습이었다. 혹시 잠이 들어 있나 싶어서 수우는 휘파람을 그쳤다.
수우는 화판을 똑바로 놓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어느 잡지 소설의 삽화였다. 젊은 작가는 스스로의 문학의 길을 열어가기 위해 잡지에 소설을 쓰고, 젊은 화가는 그 소설에 쓸 삽화를 그리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의 예술의 길을 개척해 가야 한다.
소설의 주인공은 아이다호의 카우보이였다. 수우가 승마 클럽의 화려한 승마 복장과 모노클(외눈안경)을 그리고 있으려니, 낮은 소리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수우는 얼른 일어나서 침대 쪽으로 갔다.
존시는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그리고 창 밖을 내다보며 뭔가 계산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계산은 수를 거꾸로 세는 것이었다.
“열 둘.”
조금 더 있다가 또 말했다.
“열하나.”
숫자는 점점 내려갔다.
“열.”
“아홉.”
이번에는 거의 동시에 수를 세었다.
“여덟, 그리고 일곱…….”
수우는 이상해서 창 밖을 내다보았다. 도대체 존시가 지금 세고 있는 게 뭘까? 창밖에 보이는 것은 인기척 없는 쓸쓸한 안마당과 20피트쯤 떨어진 이웃집의 벽돌 담벼락뿐이었다. 그 벽에는 해묵은 담쟁이덩굴이 벽 중간까지 뻗어 있었다. 차가운 가을바람이 잎새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바짝 마른 담쟁이덩굴이 이제 거의 벌거숭이가 되어서 낡은 벽돌 벽에 달라붙어 있었다.
“너 지금 뭘 세는 거니?”
수우가 존시에게 물었다.
“여섯.”
존시는 마치 속삭이는 것처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점점 더 빨리 떨어지고 있어……. 사흘 전에는 백 개나 있어서 다 세려면 골머리가 아팠는데……. 하지만 이제는 훨씬 쉬워졌어. 아, 또 하나 떨어지는구나. 이젠 다섯 개만 남았다.”
“뭐가 다섯이란 말이야? 나한테도 좀 가르쳐주렴.”
“저 잎 말이야. 저 담쟁이덩굴에 붙은 잎새.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면 드디어 나도 가는 거야. 삼 일 전부터 난 쭉 알고 있었어. 의사 선생님도 그렇게 말했지?”
“세상에, 그런 바보 같은 얘기는 하지도 마!”
수우는 말도 안 된다며 강하게 존시를 나무랐다.
“철 지난 담쟁이 잎이 떨어지는 것하고 네 병하고 무슨 상관이란 말이야? 너 완전히 저 담쟁이를 보고 넋을 잃었구나. 아무튼 바보 같은 소리는 하지도 마. 의사 선생님이 아침에 그러셨어. 네 병이 나을 가능성은, 그러니까, 저……. 하나에 열 정도라는 거야. 뉴욕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 정도야 보통이지 뭐.
전차를 타고 다니거나 공사하는 건물 옆으로 지나가더라도 그 정도 위험은 있는 거야. 자, 그러니 신경 쓰지 말고 수프라도 조금 먹어봐. 그래야 나도 그림을 그릴 마음이 생길 것 아냐? 그림을 빨리 그려다 주고 돈을 받아야 해. 그래야 아픈 너한테 포트와인을 사줄 수 있지. 나는 식욕이 왕성하니까 포크찹을 사 먹어야겠어.”
“이젠 포도주 따위는 사올 필요 없어.”
존시는 여전히 창밖을 내다보면서 말했다.
“또 하나 떨어졌네. 아니, 수프도 전혀 먹고 싶지 않아. 앞으로 겨우 네 개……. 더 어두워지기 전에 마지막 하나까지 다 떨어지는 걸 보고 싶어. 그러면 나도 저 세상으로 가는 거야.”
“존시…….”
수우는 침대에 몸을 굽히면서 말했다.
“내가 그림을 끝낼 때까지, 눈을 감고 창 밖을 보지 않겠다고 약속해줘, 응? 이 그림은 내일까지 갖다 줘야 해. 그림이 아니면 커튼을 내리고 싶다만…….”
“저쪽 방에서 그리면 안돼?”
존시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난 네 옆에 있고 싶단 말이야.”
수우는 말했다.
“그리고 제발 저 담쟁이 잎새 따위는 쳐다보지 마!”
“그림을 다 그리거든 내게 말해 줘.”
존시는 일단 눈을 감더니 말했다. 그 모습은 마치 쓰러진 조각상처럼 창백했다.
“난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는 걸 보고 싶어. 이제 그걸 기다리는 것도 힘들어. 내가 그 동안 매달려왔던 것에서 손을 떼고 싶어. 그리고 어딘지 모르지만 하염없이 떨어져 가고 싶어. 철 지난 저 처량한 잎새처럼 말이야.”
“우선 좀 자는 게 좋겠어.”
수우는 말했다.
“난 베어맨 할아버지한테 늙은 광부 모델이 돼 달라고 해야겠어. 금방 돌아올 거야. 그러니까 내가 올 때까지는 꼼짝도 말고 있어야 해.”
베어맨은 같은 건물 1층에 사는 화가였다. 나이가 예순이 넘은 노인이었다. 몸뚱이는 도깨비 같고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사튀르 같은 머리에다 미켈란젤로의 대리석 모세 상 같은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그는 사실 예술의 낙오자였다. 지난 40년 동안 계속 붓을 쥐고 있었으나 아직도 예술의 여신(女神)의 치맛자락도 붙잡지 못한 처지였다. 늘 걸작을 그린다고 장담을 하면서도 정작 그 걸작을 그리는 작업에는 손도 대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최근 몇 년 동안에는 상업용 도안이나 광고 그림밖에는 전혀 그린 게 없었다.
그는 직업적인 모델을 둘만한 여유가 없는 이 예술인 마을의 풋내기 화가들을 위해 모델 노릇을 하여 몇 푼 안 되는 돈을 벌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진을 자꾸 들이키면서 미래 어느 땐가는 걸작을 그릴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그림은 보잘 것 없고, 몸집도 작았지만 그는 사기 충만한 노인네였다. 그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약해 빠졌냐며 비웃곤 했다. 그러면서 스스로 3층에 있는 두 젊은 여성 예술가의 수호신 역할을 떠맡고 있었다.
수우는 아래층에 내려가 베어맨 노인을 찾았다. 노인은 어둑어둑한 지하실에서 노간주나무 열매(진의 원료) 냄새를 풀풀 풍기며 뒹굴고 있었다. 한쪽 구석에는 아무 것도 그리지 않고 텅 빈 캔버스가 이젤에 걸려 있었다. 그의 걸작을 그릴 붓이 닿기를 무려 25년간이나 기다려 온 캔버스였다.
수우는 베어맨 노인에게 존시 얘기를 들려줬다. 담쟁이 잎새가 다 떨어지면 자기도 죽는다는 환상을 갖고 있는 존시가 저러다가 정말 생명을 지탱하는 힘이 약해져서 가벼운 담쟁이 잎새처럼 허공으로 날아갈까봐 두렵다는 것이었다.
벌겋게 술에 취한 베어맨 노인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늙은이는 존시의 어리석은 망상에 대해 고함을 질러가며 나무랐다.
“멍청한 소리!”
그는 고함을 질렀다.
“담쟁이 잎새가 다 떨어지면 자기도 죽는다 그 말이야? 세상에 그런 멍청이가 어디 있담? 생전에 그런 얘기는 금시초문이야. 그런데 나더러 다 망가진 늙은 광부 모델을 해달라고? 왜 하필이면 그런 모델이야? 난 딱 질색이야. 그런데 도대체 존시 양은 왜 그따위 생각을 하는 거야?”
“걔는 지금 몸도 너무 아프고 약해져 있어요.”
수우는 말했다.
“열이 높으니까 기분이 이상해지고 자꾸 환상 같은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베어맨 할아버지, 모델이 되기가 싫으면 관두세요. 상관없어요. 하지만 할아버지는 정말- 늙은 변덕쟁이라고요.”
“여자라는 건 정말 어쩔 수 없는 것들이라니까!”
베어맨 노인은 더 큰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내가 언제 모델을 하지 않겠다고 그랬어? 먼저 올라가, 나도 곧 따라갈 테니까. 난 반시간 전부터 모델이 되겠다고 말할 생각이었어. 글쎄 말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는 존시 같은 순해빠진 아가씨가 병이 나서 누워 있을 곳이 아니야. 나도 이제 곧 걸작을 그릴 거야. 그러면 우리 모두 이 동네를 빠져나가자고. 정말이야! 정말이구말구.”
두 사람이 위로 올라가 보니까 존시는 이미 잠이 들어 있었다. 수우는 커튼을 밑으로 내리고, 베어맨 노인에게 옆방으로 가자고 손짓했다. 두 사람은 거기서 두려운 심정으로 창 밖의 담쟁이덩굴을 바라보았다. 담쟁이덩굴은 이제 정말 잎새가 몇 개 남지 않았다.
잠시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계속해서 내리는 비에는 어느덧 눈보라까지 섞여 있었다. 베어맨 노인은 낡아빠진 파란 셔츠를 입고 뒤집어 놓은 냄비 위에 걸터앉아 바위에 앉은 늙은 광부의 포즈를 취했다.
수우는 겨우 한 시간쯤 자고서 눈을 떴다. 벌써 아침이었다. 존시가 퀭한 눈을 크게 뜨고 초록색 커튼을 바라보고 있었다.
“커튼을 올려줘. 밖을 보고 싶어!”
존시가 마치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부탁했다.
수우는 어쩔 수 없이 그 말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것일까? 벽돌 담벼락에는 담쟁이덩굴의 잎새 하나가 떨어지지 않고 여전히 달라붙어 있었다. 기나긴 밤사이에 사나운 비바람이 그렇게 거세게 휘몰아쳤는데도 말이다. 그것은 덩굴에 달린 마지막 잎새였다. 잎새 아래쪽은 아직 어두운 초록색이 남아 있고 가장자리는 시들어가는 노란 색이었다. 하지만 그 마지막 잎새는 땅에서 20피트쯤 뻗어간 줄기에 굳세게 매달려 있었다.
“마지막 하나구나…….”
존시가 말했다.
“지난밤에 꼭 떨어질 줄 알았는데……. 밤새 바람 부는 소리를 들었어. 하지만 오늘은 꼭 떨어지겠지, 그리고 그 때 나도 죽을 거야.”
“제발, 제발…….”
수우는 지치고 피곤한 얼굴을 베개에 파묻으며 말했다.
“그런 소린 하지 마. 자기 생각을 하기 싫더라도 내 생각 좀 해주렴. 난 도대체 어떡하란 말이야?”
그러나 존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것은 머나먼 미지의 여행을 떠날 준비를 하는 사람의 마음이다. 존시는 이 세상에서 자기와 이어져 있던 모든 매듭이 하나하나 풀리면서 더욱 더 환상에 빠져드는 것 같았다. 수우에 대한 우정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하루가 또 지나가고 황혼이 다가왔다. 그러나 마지막 하나 그 담쟁이 잎새는 여전히 벽에 달라붙은 덩굴줄기에 매달려 있었다. 이윽고 어둠이 닥쳐오면서 또다시 북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빗방울이 계속해서 창문을 두드렸다. 낮은 네덜란드식 처마에서 빗방울이 쉴 새 없이 흘러 떨어졌다.
그 다음날 또 날이 밝아오자 존시는 커튼을 올려 달라고 졸랐다.
담쟁이 잎새는 아직 그 자리에 남아있었다.
존시는 자리에 누워 오랫동안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존시는 수우를 불렀다. 수우는 가스난로 위에 닭고기 수프를 올려놓고 젓고 있었다.
“수우디, 이봐, 내가 잘못했어.”
존시는 말했다.
“뭔가가 내 생각이 잘못이라는 걸 가르쳐 주려고 저기에 마지막 잎새를 하나 남겨두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이젠 알겠어. 죽기를 원하는 건 죄를 짓는 거야. 자, 수프를 조금 갖다 줘. 밀크에 포도주를 탄 것도. 아냐, 우선……. 거울을 좀 보고 싶어. 베개를 몇 개 등에 받치고 일어나 앉아야겠어. 그래서 네가 아침 차리는 걸 봐야지…….”
한 시간쯤 지나자 존시가 말했다.
“수우디, 언젠가는 꼭 나폴리만을 그리고 싶어!”
오후에 의사가 찾아왔다. 의사가 돌아갈 때 수우는 슬쩍 복도로 그를 따라 나왔다.
“이젠 좀 희망이 엿보이는구먼!”
의사는 수우의 가냘프게 떨리는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이제 간호만 잘하면 아가씨 당신이 이길 거야. 난 또 아래층에 가서 새로 병이 난 다른 환자를 봐야겠어. 베어맨이라는 사람인데, 그 사람도 글쎄 무슨 예술가라고 하더군. 그 사람도 폐렴이야. 갑자기 병이 든 모양인데 글쎄, 나이가 많은데다 몸도 약해서 어려울 것 같구먼. 그러나 고통을 좀 덜어줘야지. 그래서 오늘 입원을 시킬 계획이야.”
다음날, 의사는 수우에게 말했다.
“이제 위험은 완전히 벗어났어. 아가씨, 아가씨가 이긴 거야. 이제 영양 섭취를 잘하도록 돌봐주기만 하면 만사 오케이야!”
그날 오후, 존시는 침대에 누워 파란 털실로 목도리를 뜨고 있었다. 그 목도리가 별로 쓰임새가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이다. 그때 수우가 그녀에게 다가와 팔로 베개와 이불까지 한꺼번에 존시를 끌어안았다.
“요 생쥐 같은 아가씨야, 네게 할 얘기가 있어.”
수우는 말했다.
“베어맨 할아버지가 폐렴에 걸려 오늘 병원에서 돌아가셨어. 겨우 이틀 앓았을 뿐인데……. 병이 나던 날 아침, 관리인이 아래층 할아버지 방에 가보니까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도 없이 혼자서 신음을 하고 있었단다. 구두고 옷이고 몽땅 젖어서 꽁꽁 얼어 있었다는 거야. 도대체 그렇게 비바람이 사나운 밤에 어디를 다녀왔는지 상상도 못한 거야.
그런데 관리인이 방안에서 무얼 봤는지 알겠니? 불을 켜 놓은 랜턴, 헛간에서 끌어온 사다리, 붓 두세 자루, 초록색과 노란 색 물감을 풀어놓은 팔레트……. 이런 것들이 방안에 흩어져 있더라는 거야. 자, 창 밖을 한번 내다 봐. 저기 벽에 담쟁이 잎새가 딱 하나 붙어 있는 게 보이지? 바람이 이렇게 거세게 부는데도 꼼짝도 안 하는 게 좀 이상하지 않았어? 존시! 저게 바로 베어맨 할아버지의 걸작이었던 거야.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던 그날 밤, 그분이 벽에다 저걸 그렸던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