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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한국삽살개재단 홈피에 있는 삽살개에 관한 사료와 설화입니다.
그 내용에 대해서 자료를 조금 찾아서 검토해 보았습니다.
우리 민족의 삶과 정서에 녹아있는 ‘삽살개’ 삽살’은 귀신이나 액운을 쫓는다는 뜻을 지닌 ‘삽(쫓는다, 들어내다)’과 ‘살(귀신, 액운)’이 합쳐진 순수 우리말 이름입니다. “삽살개 있는 곳에는 귀신도 얼씬 못한다.”는 옛말처럼 ‘귀신 쫓는 개’라 불리며 지난 2천 년 동안 우리 민족의 벽사진경(僻邪進慶) 수호견이었습니다. 한반도에 널리 서식하던 삽살개는 고구려 고분벽화에도 등장하고 있으며, 고대 신라 때부터 왕실과 귀족사회에서 길러져 오다 통일신라가 멸망하면서 민가로 흘러나와 고려나 조선시대에 대중적인 개가 되었다는 것이 정설로 통합니다. 신라 고승 김교각 스님이 삽살개 선청(善聽)이와 함께 당나라로 건너가 고행했다는 중국의 안훼이성에서는 삽살개를 타고 있는 지장보살도와 삽살개 선청(善聽) 동상이 세워져 수호신으로 추앙받고 있으며, 신라 김유신 장군이 군견으로 전쟁터에 데리고 다녔다는 속설은 삽살개와 관련하여 전해지는 유명한 일화입니다. 조선의 개 그림 중에는 삽살개 그림이 여러 점 전해지고 있는데 영모화(새나 동물을 소재로 그린 그림)나 문배도(액운을 쫓기 위해 동물을 그려 문에 붙이는 그림) 등에서 그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중 김두량의 <삽살개>에서는 단모 삽살개의 특징인 목과 몸통, 앞다리 뒤편의 긴 갈기가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고, 16세기 출간된 「훈몽자회」에서는 “개 일명 삽살개”라는 자귀가 등장합니다. 이외에도 한시, 소설, 민요 등 역사적 문헌자료에서 볼 수 있듯이 삽살개는 오랜 세월 우리 민족의 곁에서 함께 해온 토종개입니다. |
삽살’은 귀신이나 액운을 쫓는다는 뜻을 지닌 ‘삽(쫓는다, 들어내다)’과 ‘살(귀신, 액운)’이
합쳐진 순수 우리말 이름입니다. “삽살개 있는 곳에는 귀신도 얼씬 못한다.”는 옛말처럼
‘귀신 쫓는 개’라 불리며 지난 2천 년 동안 우리 민족의 벽사진경(僻邪進慶) 수호견이었
습니다.
삽살개라는 단어가 들어간 속담을 속담 사전에서 검색해 보았으나 귀신 운운하는 속담은 하나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삽살개의 삽살(揷煞)은 귀신을 쫒는다는 뜻이라고 하는 말은 그
용례를 찾을 수 없었으며,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삽살개는 揷沙乙犬 또는 厖狗로 쓰고 있습니다.
또한 노비의 이름으로 揷士里(삽사리) · 揷沙里(삽사리)가 쓰였다는 자료가 있습니다.
노비의 이름은 한결같이 고유어로 지었는데, 江阿之(강아지) · 姜兒只(강아지) · 介也之(개야지) · 揷士里(삽사리) · 揷沙里(삽사리) · 壽快(수캐) · 道也之(도야지) · 道牙之(도아지) · 大也知(대야지) · 馬牙之(마아지) · 梅兒只(매아지) · 夢牙之(몽아지) · 加莫伊(가막이) · 加馬貴(가마귀) · 杜路未(두로미) 등과 같이 동물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거나, 甘實(감실) · 巨墨介(거묵개) · 居墨伊(거묵이) · 古邑丹伊(곱단이) · 古邑同(곱동) · 古溫介(고온개) · 立分德(입분덕) · 於汝非(어여비) · 入分伊(입분이) · 足古萬(족고만) · 古孟伊(고맹이) · 同古里(동고리) 등과 같이 용모의 특징 등을 잡아서 지었다. |
벽사진경의 수호견으로 그려진 대표적인 그림들에서도 지금의 삽살개와 닮은 개라고 말할 수 있는 개는
찾아 보기가 어려웠습니다.
장천1호분은 중국 길림성에 있는 고분으로 예불도에 나오는 개 두마리는 털이 길고 꼬리가 풍성한
모습의 개이기는 하지만 반드시 삽살개의 모습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 것이, 몽골이나 만주지역의 개를
묘사한 것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다만 삽살개와 어느 정도 연관성이 있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장천 1호분 예불도를 모사한 그림
장천 1호분 예불도(부분)
한반도에 널리 서식하던 삽살개는 고구려 고분벽화에도 등장하고 있으며, 고대 신라 때부터 왕실과 귀족사회에서 길러져 오다 통일신라가 멸망하면서 민가로 흘러나와 고려나 조선시대에 대중적인 개가 되었다는 것이 정설로 통합니다.
신라 고승 김교각 스님이 삽살개 선청(善聽)이와 함께 당나라로 건너가 고행했다는 중국의 안훼이성에서는 삽살개를 타고 있는 지장보살도와 삽살개 선청(善聽) 동상이 세워져 수호신으로 추앙받고 있으며, 신라 김유신 장군이 군견으로 전쟁터에 데리고 다녔다는 속설은 삽살개와 관련하여 전해지는 유명한 일화입니다.
바이두 백과에 의하면 신라승려 김교각이 중국으로 건너 갈때 데리고 간 개는 神犬「諦聽」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신구를 삽살개로 동일시하는 것은 다소 무리한 해석으로 보이며, 체청(諦聽)이라는 말은
'자세히 들음' 또는 '새겨 들음'이라는 뜻이므로 개의 이름이라고 하기에는 무언가 의미심장한 뜻이 있어서
김교각이 데리고 간 것은 개가 아니라 '체청'의 자세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또한, 삽살개가 신라 왕실과 귀족사이에서 길러졌다든가, 김유신 장군이 군견으로 데리고 다녔다든가하는 것은
모두 사실 확인이 어려운 구전에 의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바이두에서 김교각으로 검색
金喬覺(696年—794年),法號地藏,故又名金地藏、釋地藏,朝鮮半島人,新羅宗室[1],曾到唐朝留學,相傳他為求佛教正法攜神犬諦聽航海來唐,卓錫[註 1]九華,苦行七十五載,九十九歲涅槃,肉身得道,保留全身舍利,世人認為其為地藏菩薩化身。
佛教史中往往包含著很多神話因素,因而使得還原真正的歷史增加了困難,關於金喬覺的生平也是如此。如金喬覺的降生、示寂後為何被視為地藏菩薩的化身等等,都具有濃厚的宗教色彩。
在唐開元末年帶著神犬「諦聽」,渡海來華求法。
교각(喬覺) 불교 인물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왕자로 당나라에서 출가한 승려. 출생 연도 695년(효소왕 4) 사망 연도 794년(원성왕 10) 성은 김씨(金氏). 법호는 교각(喬覺). 신라의 왕손으로, 24세에 출가하여 중이 되었다. 교각과 동시대 사람인 당대(唐代)의 비관경(費冠卿)은 813년(헌덕왕 5)에 쓴 ≪구화산화성사기 九華山化城寺記≫에서 8세기 초에 승려 지장(地臟)이 있었는데 그는 김교각이라는 신라의 왕자라고 밝히고 있다. 이 때 그는 볍씨를 가지고 삽살개 한 마리와 함께 돛단배를 타고 건너와 중국 안휘성(安徽省) 지역에 벼농사 짓는 법을 전파한 뒤 수행을 계속하다가 99세로 입적하였으며, 공덕이 높아 문하에 제자들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고 한다. 당에 간 연대에 대해서는 653년 입당설, 719년 입당설, 756년 입당설 등 세 가지가 있다. 가장 믿을 만한 기록인 비관경의 ≪구화산화성사기≫와 이용(李庸)이 편찬한 ≪구화산지 九華山志≫에 의하면 719년(唐 開元 7) 24세 때 입당한 것이 유력하다. 그는 입당한 뒤 바로 구화산에 정착한 것이 아니라 각지를 돌아다니다 구화산으로 들어갔다. 즉 ≪신성전 神聖傳≫에 김교각이 “바다 건너 각지로 돌아다니다가 지양(池陽: 지금의 靑陽縣)구자산(九子山, 즉 구화산)의 풍경을 보고 매우 기뻐하였다. 그는 산마루에다 거처를 잡았다.”라고 하였다. 김교각은 불도를 닦으려 처음으로 구화산에 오른 사람이다. 그는 가시덤불을 헤치고 절벽을 오른 후 자그마한 석굴(지금의 동암동)에 거처를 정하고 그날부터 불경을 읽기 시작하였다. 757년 구화산 기슭에 사는 제갈절(諸葛節)이란 사람이 구화산에 올라갔다가 석굴 속에서 도를 닦는 것을 보고 감탄한 나머지 그를 도와주었다. 그 때부터 김교각은 자주 산 밑에 내려와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설교하였다. 이 때 구화산 일대에서 큰 부자였던 민양화(閔讓和)와 그의 아들 도명(道明)이 그의 설교에 감화되어 구화산을 불교성지로 하고 백성들을 모아 절을 지었는데, 이 절이 후에 화성사(化城寺)가 되었다. 이 때부터 명성은 나날이 높아져 중국 각지는 물론 신라에까지 전해져 신라인들도 구화산을 찾아와서 불문에 들어섰다. 김교각은 ≪화엄경≫을 연구한 기초 위에 새로 4부의 불경을 편찬하여 구화산에 두고 설교하였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는 불경을 연구하기 위하여 서역에 가서 불법을 연구하고 돌아왔다고 하는데, 구화산에서 자신의 독특한 불교이론을 내놓고 구화산을 성지로 만들었다. 794년 갑자기 제자들을 모아놓고 고별인사를 한 뒤 참선하다가 입적하였다. 이 때 산이 울고 돌이 떨어지며 종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고 새들이 비통하게 울었다고 한다. 시신을 석함 속에 안치하고 3년이 지난 후에 보니, 얼굴은 살아 있는 것 같았고 손이 부드럽고 뼈마디에 소리가 나며 마치 금쇠를 흔드는 것 같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의 유신을 석탑 안에 옮겨놓고, 육신전(肉身殿)을 건립하여 석탑을 보호하였다. 열반에 든 이후, 불교도들은 ≪대승대집지장십륜경 大乘大集地藏十輪經≫의 내용을 근거로 하여 그를 바로 지장보살의 현신이라 믿게 되어 김지장(金地藏)이라 하였다. 이는 ≪대지도론 大智度論≫에서 말하고 있는 육신(肉身)의 보살이 법신(法身)의 보살로 화한 것임을 뜻한다. 이때부터 구화산은 지장도량이 되었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우리 나라에서 볼 수 있는 삭발형의 지장보살이 아닌, 머리에 관을 쓴 김지장을 지장보살로 신앙하고 있다. 오늘날 전하는 김지장상의 양식은 머리에 관을 쓰고, 신라에서 데리고 갔다는 개의 형상을 한 동물상을 대좌로 좌상을 취하고 있다. 머리의 보관은 5불을 나타내는데, 중앙에 비로자나불, 그 왼쪽에 보생불(寶生佛)과 아촉불(阿閦佛), 그 오른쪽에 아미타불과 성취불(成就佛)을 입불로 나타내고 있다. 이상을 통해서 볼 때, 김교각이 중국문화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즉 그는 중국 4대불교 성지의 하나인 구화산 성지의 창시자이며, 또한 ≪화엄경≫의 기초 위에 4부경을 편찬함으로써 자신의 불교이론을 정립하였다. 이것은 중국불교이론의 발전을 촉진한 것이다. 또한 그는 구화산에 있는 동안 많은 시(詩)를 지어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였는데, 이것은 당나라 시집에도 수록되어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또 신라에서 황립도(黃粒稻)란 벼종자를 가져오기도 한 그는 승려들을 동원하여 벼농사를 지었으며, 뽕나무를 심기도 하였고, 서역에서 가져온 오서송(五敍松), 운무향차(雲霧香茶) 등도 구화산에 심어 구화산의 특산품이 되기도 하였다. 그는 당나라 불교문화의 발전 뿐만 아니라 농업경제의 발전에도 기여하였으며 한·중경제문화교류에도 공헌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육신의 보살이 법신의 보살로 화한 실례를 보여주고 있어 주목된다. 참고문헌 『구화산화성사기(九華山化城寺記)』 『송고승전(宋高僧傳)』 『신증전(神僧傳)』 『금교각급기구화산중술기(金喬覺及其九華山重述記)』 『대지도론(大智度論)』 『지장십륜경(地藏十輪經)』 『중국지장보살의궤집(中國地藏菩薩儀軌集)』 집필자 김위석 |
이외에도 한시, 소설, 민요 등 역사적 문헌자료에서 볼 수 있듯이 삽살개는 오랜 세월 우리 민족의 곁에서 함께 해온 토종개입니다.
삽살개에 관한 한시, 소설, 민요 등은 수없이 많으나,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집지키는 개로 묘사되고
있어서 '귀신 쫒는 개'라는 개념과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정지용의 '삽살개'라는 시와 오지호의 '남향'이라는 그림으로 삽삽개에 대한 일반적인 이미지에 갈음합니다.
정지용의 삽살개 그날 밤 그대의 밤을 지키던 삽사리 괴임직도 하이 그날 밤 그대의 밤을 지키던 삽살개를 사랑할 만도 하오. 짙은 울 가시사립 굳이 닫히었거니 짙은 울타리에 가시가 돋힌 사립문(門)이 굳게 닫히었고 덧문(門)이요 미닫이오 안의 또 촉(燭)불 고요히 돌아 환히 새우었거니 덧문(門)과 미닫이문(門) 너머 그 안의 촛불을 켜고 밤을 새웠고 눈이 치로 쌓인 고샅길 인(人)기척도 아니하였거니 눈이 한 길이나 쌓인 마을의 좁은 골목길에서 인(人)기척도 아니 하였거늘 무엇에 후젓하던 맘 못 놓이길래 그리 짖었더라니 삽살개는 무엇 때문에 고요하고 쓸쓸한 마음을 놓지 못하고 그렇게 짖었던가. 얼음 아래 잔돌 사이 뚫노라 죄죄대던 개울물 소리 기어들세라 얼음 아래 잔돌 사이를 뚫노라 졸졸 흐르던 개물물 소리가 (집으로) 기어들어가는 것 같고 큰 봉(峰)을 돌아 둥그레 둥긋이 넘쳐오던 이윽달도 선뜻 내려설세라 큰 봉(峰)우리을 돌아 둥글게 넘어오던 거의 꽉 찬 달도 (집으로) 선뜻 내려오는 것 같구나 이저리 서대던 것이려냐 개울소리와 달이 집으로 들어갈까봐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던 것이었냐? 삽사리 그리 굶음직도 하이 삽살개가 그렇게 행동(行動)할만도 하구나 내사 그댈 새레 그대 것엔들 닿을 법(法)도 하리 나야 그대는커녕 그대가 가진 물건(物件)에도 미치지 않는다. 삽사리 짖다 이내 허울한 나룻도사리고 삽살개가 짖다가 이내 텀수룩한 수염(鬚髥)으로 웅크린 자세(姿勢)를 하고 그대 벗으신 고운 신 이마 위(爲)하며 자더니라. 그대가 벗어놓은 고운 신발에 이마를 대고 자더라. [출처] 삽사리 - 2021.06.30 11:36|작성자 침칠공 집 |
(집) 남향집/오지호 회화 작품 문화재 한국 근대기의 화가 오지호(吳之湖)가 그린 풍경화. 2013년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캔버스에 유채. 세로 80㎝, 가로 65㎝.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오지호가 개성 송도고등보통학교의 교사 시절 살던 집을 그린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적 인상주의 화풍이 잘 나타난 대표적인 작품으로, 그림 오른쪽 아래에 세로로 ‘1939년 지호(一九三九年 之湖)’라는 서명이 있다. 「남향집」은 1935년부터 해방 전까지 오지호가 살았던 개성의 집을 그린 것으로 알려졌다. 배경의 초가집을 좌우로 과감하게 절단시키고 중앙에 청색과 보라색 그림자를 드리운 고목을 배치하여 따사로운 햇빛이 내리쬐는 일상의 평화로운 한때를 포착했다. 막 문을 나서는 붉은 옷의 여자아이는 둘째 딸 금희이고 오른쪽 양지바른 돌벽 아래에 졸고 있는 흰 개는 애완견 삽살이라고 후일 작가가 증언한 바 있다. 오지호는 서양화 도입기에 일본을 통해 받아들인 절충적 인상주의를 극복하고 이를 한국적 감성으로 토착화시킨 대표적인 작가로 평가된다. 특히 1930년대 중반부터 김주경(金周經)과 함께 우리나라의 풍토에 맞는 인상주의를 추구하여 한국의 청명한 공기와 자연미를 밝고 투명한 색채감각으로 표현해내기 위해 노력하였다. 화면에 나타난 하늘과 초가집, 돌계단과 삽살이 등은 모두 밝은 원색의 굵은 붓터치로 처리되어 맑은 공기와 투명한 빛을 느끼게 한다. 특히 작가는 집 앞의 고목과 돌계단의 그림자를 빛을 받은 청색과 보라색으로 강조하여, 색채로 표현된 인상주의적인 그늘을 효과적으로 구현해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