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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길에 주목해야하는가?
신정일(문화사학자. 사단법인 우리 땅 걷기 이사장)
일찍이 프랑스의 시인 라퐁텐은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했고, 독일의 철학자 니체는 ”가장 중요한 것은 길 위에 있다.“고 했다. 예나 지금이나 중요한 길, 세상이 시작된 이래 길을 최초로 개설한 것은 고대 로마였다. 기원전 3세기부터 전 세계를 연결하는 길을 개설하기 시작해서 2세기 까지 5백 년 동안 건설한 도로의 규모가 장장 15만 Km에 이르렀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길이라는 말이 문헌상 처음 등장한 것은 신라의 향가에서였다. 신라 진평왕 때에 융천사(融天師)가 지은 「혜성가(彗星歌)」와 효소왕 때에 득오(得烏)가 지은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에 도道라는 단어가 처음 나온다. 향가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이 단어를 길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향가에는 이외에도 길을 뜻하는 말로 로(路), 또는 도(道)로 표기하고 있는데 그것들을 길 또는 한자음 그대로 해독할 수도 있으나 도(道)와 시(尸)를 첨가하며 도라고 읽지 않고 길이라고 읽고 있음을 밝히고 있기 때문에 길이라는 말은 한자가 들어오기 전부터 순수한 우리말로 써왔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다.
또 하나 예를 든다면 1100년 무렵 북송 때의 사람으로 사신을 수행하여 고려에 와서 고려 어를 한자로 적어서 전한 손목(孫穆)이 편찬한 일종의 견문록인 『계림유사鷄林類事』의 ‘고려방언’ 조의 ‘행왈기림(行曰欺臨)’에는 간다는 말을 고려 사람들은 ‘기림’이라고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기림이 길이 된 것을 보면 신라 때부터 사용해온 길이 고려로 이어져 조선 초기 ‘훈민정음’ 창제에는 ‘길’ 이 명백하게 표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걸으면서 나의 가장 풍요로운 생각들을 얻게 되었다. 걸으면서 쫓아버릴 수 없을 만큼 무거운 생각이란 하나도 없다.’ 키에르케고오르가 1847년에 제테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이다. 니체역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심오한 영감의 상태, 모든 것이 오랫동안 걷는 길 위에서 떠올랐다. 극단의 육체적 탄력과 충만감이.’
길은 누구에게나 다른 형태로 펼쳐져 있고 그 길은 대체로 평탄하지만은 않다. 그래서 그 길 위에서 사람들은 헤매게 되고 헤매다 자기만의 길을 찾기도 한다. 그러나 그 길의 종점에 영원히 다다르지 못하고 헤매는 사람들도 있다.
보이는 길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마음의 길도 있다. 스스로를 찾지 못한 사람들이 절체절명의 기로에서 “칠흑 같은 어둠에서 벗어나 이제 나의 길을 찾게 해 달라”고 기원하기도 하며 6세기 때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토이스 또한 ‘내가 찾아 헤맨 것은 나 자신이었다.’ 라고 술회하고 있기도 하다. 이렇듯 길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대체로 길은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그 첫 번째가 교통수단으로서의 길이고 두 번째가 방도를 나타내는 길, 그리고 세 번째가 행위의 규범으로서의 길이다.
교통수단으로서의 길은 사람이 걸어 다니는 길을 나타냈기 때문에 『국어사전』에는 ‘사람이나 차들이 편히 다닐 수 있도록 만든 비교적 큰 길’ 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또한 길을 일컬어 ‘사람이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오고 갈수 있게 된 거의 일정한 너비로 따위에 뻗은 공간적 선형(線形)’이라고 정의 하고 있다.
우리말로 된 길은 규모도 그렇지만 형태 또한 다양하다. 강가나 산 속, 또는 솔숲사이에 난 오솔길, 돌담을 따라 꾸불꾸불 이어진 마을의 고샅길, 호젓한 산길, 뭉게구름 피어오르는 들길, 강변에 펼쳐진 자갈길, 비 내린 황톳길의 진창길, 가로 질러가는 지름길 등 길 등 여러 형태로 길은 우리 곁에 존재해왔다. 사람이 걸어 다니며 조성된 이러한 길들이 교통이 발달함에 따라 그 개념이 확대되고 다양화되면서 실체가 없는 관념적 통로까지로 확대되었다. 강이나 바다에도 배가 다니는 길이 만들어지면서 뱃길이 생겨났고 철로 만든 철궤를 따라 이동하는 기차나 전철의 통로를 철길이라고 부르고, 하늘을 나는 비행기의 항로를 하늘길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지금은 유선이 아닌 무선통신의 발달로 수많은 글들과 말들이 허공을 무한히 날아다니고 있다.
그러한 길이 다른 뜻 즉 방도(方途)로 쓰이게 되었다. 어떤 일을 해야 할 때 쓰는 말로 ‘어떤 방법이 없을까?’ 또는 ‘길이 열리다.’ 라는 말은 방도를 나타내는 말이고 그러한 길은 교통수단으로서의 길이 정신적인 길로 확대 재생산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길은 철학적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인생을 연극에 비유하고 세상은 무대로, 사람은 그 연극에 출연하는 배우로 묘사한다. 세익스피어가 죽기 전에 ‘연극은 이미 끝났다.’고 말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동양적 관념은 그와 다르다. 동양에서는 인생을 여행에 비유한다. 그래서 세상은 여관으로, 사람은 나그네로,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을 길을 가는 나그네의 여정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몇 십년 전에 유행했던 대중가요 중에 최희준이 부른 「하숙생」이라는 노래는 다음과 같다.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인생은 나그네길 구름이 흘러가듯 정처 없이 흘러서간다.’ 이렇듯 유행가 같은 인생살이를 두고 ‘구름처럼 떠돌고 물처럼 흐른다.’고 해서 나처럼 떠도는 운수납자(雲水衲子)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여러 길 중 가장 가기가 힘든 길은 무엇일까? 사람의 마음 속 길이다. 아무리 보아도 알 수 없고, 아무리 가고자 해도 그 마음속으로 들어갈 수가 없는 난공불락의 요새 같은 그 마음 속의 길, 그래서 가수 김광석도 “난 아직 그대를 이해할 수 없어요, 그대 마음에 이리는 길을 찾고 있어. 아직도 찾을 수 있을까? 그대 마음에 다가가는 길 찾을 수 있을까. 언제나 멀리 있는 그대,” 라는 노래를 불렀을 것이다.
사람의 길은 하늘의 길에 따르는 것
그와 또 다른 길이 있다. 불교나 유교, 도교 등 동양사상에서 공통적인 이념은 도(道)라고 부르는 길이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지켜야할 심성이나 행위를 도의 또는 도덕이라고 하는데 그 모든 것은 길로 귀추 되며 그 길은 자연과 사람이 공존하는 것을 의미한다. 왕도정치(王道政治), 또는 공맹지도(孔孟之道) 등의 말이나 군자대로행(君子大路行), 즉 ‘왕도(王道)는 치도(治道)’라는 말은 모두가 올바른 길을 가야 한다는 데에서 비롯된 말이었다.
삼국시대와 고려 조선을 거치면서도 우리나라의 길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중국의 사신들이 오가던 의주로 외엔 내놓을 만한 길이 없었다. 우리나라가 일제 강점 이후 신작로가 생기면서 사통팔달의 길이 뚫리기 시작했는데, 그때가 19세기 후반이었다.
삼국시대에는 각국의 도읍지를 중심으로 간선도로가 설치되어 있었고, 고려시대에는 개경을 중심으로 한 도로망이 개설되었었다. 산예도, 금교도, 절령도를 비롯한 22개의 도로가 역로로서 개설되었다.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개경중심에서 한양 중심으로 도로망 구성을 재편하게 되었다. 그때 전국도로망의 기점은 창덕궁의 돈화궁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제 1로는 서울에서 의주를 연결하는 연행로 또는 사행로라고 불리는 도로였다. 전국의 간선도로 가운데, 가장 비중이 컸던 이 도로는 명나라와 청나라 사신들의 내왕로였기 때문에 정비가 가장 잘 된 도로였다. 주요노정은 서울-고양- 파주- 장단- 개성- 금천- 평산- 서흥- 봉산- 황주- 중화- 평양- 순안- 숙천- 안주- 가산- 정주- 곽산- 선천- 철산을 지나 대형 폭발 사고가 난 용천을 지나 의주에 이르는 길이었다.
제2로는 서울에서 원산을 거쳐 함경북도 서수라로 연결되는 도로였다. 주요 노정은 서울- 다락원- 만세교- 김화- 금성- 회양- 철령- 안변- 원산- 문천- 고원- 영흥- 정평- 함흥- 함관령(咸關嶺)- 홍원- 북청- 이성- 마운령- 마천령- 길주- 명천- 경성- 부령- 무산- 회령- 종성- 온성- 경원- 경흥- 서수라였다.
제3로는 서울에서 동해안의 평해로 연결되는 관동대로로 주요 노정은 서울 동대문- 망우리- 평구역- 양근- 지평- 언주- 안흥역(安興驛)- 방림역(芳林驛)- 진부역- 횡계역- 대관령- 강릉- 삼척- 울진- 평해였다.
제4로는 서울에서 용인 충주를 거쳐 문경새재와 상주 밀양을 거쳐 부산으로 연결되는 좌도, 또는 중로라고 불린 영남대로는 일본 사신들이 서울로 들어오는 길을 겸하고 있고, 수륙 연결이 편리하였다. 주요노정은 서울- 한강- 판교- 용인- 양지- 광암- 달내- 충주- 조령- 문경- 유곡역- 낙원역- 낙동진- 대구- 청도- 밀양- 황산역- 양산- 동래- 부산이었다.
제5로는 서울에서 경상도 김천을 거쳐 통영을 잇는 중로였는데 문경 까지는 제 4로와 같다. 주요노정은 유곡- 함창- 상주- 성주- 현풍- 상포진- 치밀원- 함안- 진해- 고성- 통영이다.
제6로는 서울에서 경상도 통영을 잇는 도로인데 삼례, 전주, 오수로 해서 통영으로 가는 길이었다. 주요노정은 서울- 동작나루- 과천- 유천-청호역(수원)-진위- 성환역- 천안 차령-공주- 노성- 은진- 여산-삼례- 전주- 오수역- 남원- 운봉- 함양- 진주- 사천- 고성- 통영이다.
제7로는 서울에서 제주를 잇는 삼남대로인데 삼례까지는 6로와 같다. 주요노정은 서울에서- 금구- 태인- 정읍- 장성- 나주- 영암- 해남- 관두량- 배를 타고 제주에 이르는 길이다. 제8로는 서울에서 충청수영까지의 간선도로로 진위 소사와 평택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제9로는 서울에서 강화를 연결하는 간선도로로 주요노정은 서울- 양화도- 양천- 김포- 통진- 강화이다.
여암 신경준은 나라 정치의 기본이 치도(治道)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그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당시 우리나라의 도로망은 왕이 능, 원, 묘에 거동할 때 지나던 능행로(陵行路), 임금이 온천에 행행하던 온천로(溫泉路) 등이 있었다. 그리고 각 고을 관아에서 사계(四界)에 이르는 이수(里數)와 감영 및 병영에 이르는 이수의 국토의 외곽을 둘러싸는 백두산로, 압록강로, 두만강로, 팔도 연해로 등 4치로가 있었으며, 팔도의 역체로 및 파발로, 해로, 봉수로, 교련 서행로, 그리고 서울에서 의주, 경흥, 평해, 동래, 제주, 강화에 이르는 전국 6대 간선로 등이 있었다.
조선시대의 정치가이자 학자인 김육(金堉)이 쓴 『만기요람(萬機要覽)』 ‘군정’ 편, 4<관방>- 충청도에 보면 ‘전라도의 도로는 무주, 금산을 경유하여 옥천 문의로 통하며, 경상도의 도로는 상주 금산(金山:현재의 김천)을 경유하여 황간. 영동을 통하여 청주에 모이게 되는데, 모두가 남쪽의 적들이 들어오는 첩경들이다. 그 중간에 덕유(德遊)와 대둔(大芚)의 여러 산이 수 백리 사이에 가로질러 있는데 모두들 큰 산. 깊은 골짜기로 인적이 미치지 않은 곳이 많아 옛 적부터 도둑이 많은 곳으로 알려졌다.’고 하였던 것으로 보아 각 지역을 잇는 길이 여러 갈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중환은 『복거총론』 ‘생리’ 조에서 우리나라는 지형상 수레의 사용이 불리하여 말을 많이 쓰는데, 말보다는 수레, 수레보다는 배가 더욱 효과적인 수송수단이라 하였다. 그러나 유형원은 『반계수록(磻溪隧錄)』 권25 도로 ‘교량’ 조에서 ‘우리나라의 지세가 평탄하지는 않으나 수레를 사용할 수 있는 지역이 많으며, 문제는 오히려 수레에 관심 있는 자가 드물어 좁고 굴곡이 심한 길을 고치려 들지 않는 데 있다.’고 하였다. 이익 역시 『성호사설』에서 산이 많다는 핑계를 대지 말고 중국을 본받아 길을 닦을 것을 주장하였는데, 그 이유는 왜구로 인해 조운漕運하는 바닷길이 막힐 경우에 대비하여 마땅히 육로가 개설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정약용 역시 『목민심서牧民心書』의 ‘도로’에서 ‘우리나라에 수레가 많이 사용되지 못하는 이유가 지형 때문이라는 주장은 어리석은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산을 깎아 평탄하게 하면 안 된다고 주장하나, 이는 잘못된 말이다. 나라의 방비는 관방에 의지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자면 도로를 건설해야 한다. 나는 험준한 산지 자체가 관방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수레와 말이 통할 수 없는 것은 오직 도로의 관리상태가 나쁘기 때문이며, 장사꾼이 다니지 못하고 송달되지 못하는 것은 도로의 관리를 잘못했기 때문이다.’고 말하고 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박제가(朴齊家)의 기록을 보면 ‘여염집 소민(小民)들이 가게를 열어 점차 길을 침식하여 골목을 비좁게 만들고 어떤 곳에서는 인마(人馬)의 통행마저 어렵게 되었다.’고 하였는데, 박지원(朴趾源)이 지은 『허생전(許生傳)』에서 허생이 변승업(卞承業)과의 대화에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조선은 배가 외국에 통하지 못하고 수레가 나라 안에 두루 다니지 못하여 온갖 물건이 그곳에서 생산되어 그곳에서 소비될 뿐이다.’
그렇다면 외국인이 바라본 서울의 길은 어떠했는가? 미국인 선교사로 1886년(고종 22년)에 조선에 왔던 길모어(George W. Gilmore)의 증언을 들어보자.
‘서울에는 세 개의 넓은 길 밖에 없음을 알 것이다. ..... 다른 길에는 노점과 가게들이 나와서 지어져 있기 때문에 우차(牛車)가 다닐만한 좁은 길이 남겨져 있을 뿐이다. 어느 때 이 노점들이 철거되어 그 전에 만들었을 때 대로의길 넓이를 본 일이 있었다. 다른 길들은 좁고 골목이 많고 대부분이 어깨를 비비면서 걸어가게 되어 있다. 자세히 보면 처음에 길을 만들었을 때에는 그렇게 좁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길 양 옆에 있는 토지 소유자들이 조금씩 길로 침식해 와서 집을 자꾸 내어서 짓고 점유자의 권리를 얻어가지고 제 맘대로 내버려 두어졌으므로 필경 공로(公路)를 점유하고 길을 막아버리게 되는 것이다. 길이 좁고 초가지붕과 기와지붕이 앞으로 나왔기 때문에 말 탄 사람 혼자서도 지나기 힘들어서, 말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머리를 숙이고 안장을 꼲아가지고 조심스럽게 가야 한다.’
도로는 물길을 대신하고
홍대용(洪大容)은 『담헌서湛軒書』에서 우리나라의 지세가 수레 쓰기에 불편하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이런 말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길 닦는 정책이 시원치 못하여 수레가 통행할 만한 넓은 길이 없으니 수레를 쓰는데 있어서 중국만 못한 것이 당연하다. 우리를 침입한 중국 군사가 수레를 이용하여 전쟁에 이겼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니 우리나라의 지세는 결국 수레를 쓸 수 없다는 결론이 아니겠는가.’ 홍대용은 이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다. ‘사람이 약아지고 기구가 모두 편리해진 것만 보아도 말세의 야박한 현상을 경험할 수 있다.’
1897년에 간행된 <독립신문>에도 전국의 미개한 교통을 한탄하며 도로 개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글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국중國中의 도로는 인체의 혈맥과 같으니라. 고로 혈맥이 웅폐 하고는 장수하는 자가 없고, 협소하고 험난하여서는 잘 되는 나라가 없나니, 아국我國의 금일 잔악한 형세는 상하로 정이 불통함이니라. 비록 500년 국도國道에서 불과 10 리 되는 오강(五江. 마포. 서강. 용강. 용산. 광나루)길도 험하고 추하고 협소하야 거마의 왕래가 불편하나니 한강을 10 리 지척에 두고 있는 도성의 길조차 이처럼 험 하야 무역과 왕래를 방해하니 참으로 한심하도다.“
최창조 선생은 그의 저서 『한국의 자생 풍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풍수에서 도로는 물길을 대신한다. 물이 없는 경우, 같은 흐름이라는 상징성을 갖는 일이 그 역할을 대신하게 된다. 따라서 길의 풍수적 의미는 물의 풍수적 의미와 동일하다. 그것은 음양의 조화, 강유의 보완, 완급의 상보를 있게 하는 원천이다. 길이 시원치 않다는 것은 물이 부족한 경우와 마찬가지로 사람을 궁색하고 편협하게 만든다. 요즈음 우리의 도로사정은 전반적으로 조화와 보완과 상보가 없어, 사람들을 궁색하고 편협하며 조급하게 만들고 있다.’
길이 개설되면서 우리 국토는 여러 형태로 변모를 가져왔다. 충청, 강원도와 영남지방을 연결하는 백두대간 부근에는 1000m가 넘는 봉우리가 열 개가 넘게 있으므로 한반도 남부에 최대의 산지(山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백두대간을 지나는 고개 중 문경새재가 632m, 죽령이 689m, 계립령이 630m, 흔히 새재인 줄 알고 넘는 이화령이 548m, 그리고 추풍령은 200m에 지나지 않는다. 이중환은 그렇기 때문에 『택리지』에서 새재와 죽령만을 큰 고개라 하고 나머지는 작은 고개라 불렀다. 물론 이것은 고개의 높이만을 기준으로 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교통량이라든가 도로의 중요성까지 감안하여 붙인 명칭이겠지만 그 크기와 높이에 있어서도 그 고개들은 큰 고개였던 것만은 사실이다.
고려대 지리교육과 최영준 교수의 『영남대로嶺南大路』에 의하면 ‘임진왜란 후 충주와 상주에 있던 충청, 경상감영이 공주와 대구로 이전하면서 새재의 교통량이 급감하였고 따라서 사양길에 접어들었다.’고 하면서 왜란 후 고갯길 지키기 전략이 확립됨에 따라 가장 중요한 새재만 남겨두고 계립령, 이화령 등 작은 고개와 지방민들이 사용하던 샛길의 통행을 막았다고 한다.
영남대로 뿐만이 서울에서 해남으로 이어지던 삼남대로를 비롯한 모든 길들이 개항 이후 새롭게 닦여지고 철로가 개설되면서 그 옛길이 사라졌다.
사라진 역사속의 옛길
신경준의 『산경표』나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 자세히 나와 있는 길, 그리고 옛 사람들의 길인 이 길들이 현대에 접어들면서 국도와 지방도로로 변화되면서 옛 사람들이 말을 타거나 걸어 다녔던 이 길들이 속도중심의 길로 변형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서울에서 부산까지 또는 서울에서 해남까지는 얼마나 걸렸을까? 괴나리봇짐을 메고 보름 쯤 걸려야 도착했다는데 그 길을 걸어가면서 신발은 얼마나 여러 켤레 소비되었을까?
초정 박제가의 『북학의(北學議)』를 보자.
‘미투리는 백리 길을 가면 구멍이 뚫어지고, 짚신은 십리길만 가도 구멍이 난다. 미투리 값은 짚신 값에 비하여 열배나 비싸기 때문에 비천한 백성들은 모두 짚신을 신으면서 날마다 갈아 신기에 여념이 없다. 가죽신 값은 또 미투리에 비하여 열 곱이 된다.’
내가 우리나라 강 7개를 따라 걸으면서 랜드로바 밑창 두개가 구멍이 나고 그 질긴 캐논 카메라 끈이 세 개나 닳아 끊어졌는데 그 때 그 허름한 짚신은 오죽했을까? 긴 여행을 시작하면 밤이면 밤마다 짚신 삼는데 여념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한 길들이 시속 100km의 자동차로 네 시간에서 다섯 시간 쯤 밖에 안 걸리고 시속 300km의 고속철도가 등장하면서부터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세 시간으로 단축되었다. 물론 교통이 발달되고 세계화라고 지칭되는 이 시대에 빠른 교통량은 필요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 속도와 편리라는 이름으로 놓치고 있는 것 또한 너무 많은 게 사실이다.
그렇듯 속도가 중시되는 그 길들을 21세기를 살고 있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많이 걸어간다. 우리국토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개인의 건강이나 집단의 이익을 관철시키기 위해(새만금, 동계올림픽 등) 또는 한가로움과 정신수양을 위해서 국도 또한 지방도로로 표기된 길을 걸어간다.
세상의 어느 누가 불행으로부터 안전할까?
기원전 401년에 태어났던 철학자 소포클레스는 『콜로노스와 오이디프스』에서 ‘세상의 어느 누가 불행으로부터 안전할까?’라고 얘기 했는데 그의 말처럼 개발 지상국인 대한민국에서 산다는 것은 순전히 ‘운’이라는 말이 있다. 느닷없이 산사태가 나서 흙 속에 묻히지 않나, 지하철 공사장이 무너져서 땅 밑으로 들어가지를 않나, 두부가 잘려나가 듯 다리가 무너져 내리지를 않나, 느닷없이 쇼핑 도중 백화점이 무너져 내리지를 않는가?
물론 ‘삶을 기뻐한다는 것이 미혹(迷惑)이 아닌지를 내 어찌 알겠소? 죽음을 싫어한다는 것이, 어려서 고향을 떠난 채 돌아갈 길을 잃은 사람이 아닌지를 내 어찌 알겠소?’ 라고 말한 장자(長子)의 말처럼 생(生)과 사(死)에 구애받지 않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그 많은 우연(偶然)같은 필연(必然)의 불행이 올 수도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우리나라의 지방도나 국도를 자전거를 타거나 나처럼 길을 걸어서 먼 거리를 간다는 것은 진실로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국도를 걸어갈 때는 죽음을 각오하고 살아남은 가족들을 위해 생명보험을 들어놓고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나라의 지방도나 국도 전체가 넓은 도살장으로 변한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개, 고양이, 너구리, 토끼를 비롯한 온갖 짐승과 새들까지 길 위에서 비명횡사를 하고 있다. 쏜살같이 지나가는 자동차들(특히 화물차들)이 일으키는 바람에 의해 쓰러질 듯하면서 모자가 날아가 버리고 하루에도 몇 번씩 이 길 위에서 죽음을 맞지 않을까 염려하면서 걸어가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기계(자동차, 기차 등등)만이 다닐 수 있는 길과 그 길들 위에 사람이 다닐 수 있는 길 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그래서 사람과 물질이 공존해야 하고 거기에서 전통과 현대의 연결고리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와 함께 한 길들을 지금 되찾고 보존하지 않으면 완전히 망가지고 말 것이다(우리나라 산들과 일곱 개의 강 그리고 해남의 이진항에서 서울까지 이어진 삼남대로를 걸으면서 느낀 소감이다). 그러한 길과 역사속의 길을 되찾고 영원히 잊어버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옛 길의 보존은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다.
역사 속에 남아있는 그 길들 즉 『세종실록 지리지』나 신경준의 『산경표』 고산자 김정호가 그린 『대동여지도』에 나타나있는 몇 개의 중요한 길 옆에다 사람이 걸어 갈 수 있는 ‘보행로’ 특히 흙으로 된 길을 설치해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이다.
로마의 길들과 일본에서 에도시대의 길들이 오랜 세월을 두고 그대로 보존되고 있듯 우리의 옛길을 역사와 함께하는 길 문화와 함께 하는 길로 만들고 가능하다면 역사의 길을 국립공원이나 문화재로 지정해야 할 것이다.
현재 중요한 것은 역사 속에 실재했던 옛 사람들의 길을 복원하여 ‘보행로’로 만들고 우리 국민들이 보행권을 확보하는 것은 우리 국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킴과 동시에 우리 국토의 재발견과 우리 민족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을 만드는 것이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자치단체들마다 스스로의 구역을 설정하여 보행자 전용도로와 자전거 길까지 함께 만든다면 그 길이 해남에서 의주까지 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너 북경을 지나 실크로드를 거쳐 파리로 이어질 것이고 또한 부산에서 서울, 서울에서 나진․선봉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모스크바로 이어지는 길의 소통, 세상과의 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수많은 국도와 고속도로, 및 2004년 4월 개통된 고속철도, 그리고 하늘 길과 뱃길이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는 오늘의 현실에서 옛길이나 강가의 길들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할 수도 있지만 사람의 발길이 이어지는 한 그 길을 따라 걷는 발길 또한 그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 길의 복원이 중요한 것이다. 또한 가능하다면 우리의 옛 길들은 직선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역사의 길을 따라 새로운 삼남대로나 영남대로를 만든다면 몇 십km를 단축하기 때문에 물류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역사의 고장 강화
광주의 서쪽은 수리산이며 안산 동쪽에 있는데 안산에서 바라보면 산세가 독수리처럼 보인다고 한다. 여기에서 서북쪽으로 뻗은 정맥이 한남정맥이다. 인천․부평․김포를 지난 다음에는 움푹 꺼진 돌줄기가 되어 강을 건너고 다시 솟아나서 마니산이 되었는데, 여기가 강화부(江華府), 즉 강화도이다. 강화부 동북쪽은 강이 둘러 싸였고 서남쪽은 바다가 둘러 있어 부 전체가 큰 섬이며, 한양 수구의 나성(羅星)역할을 하고 있다.
한강은 통진의 서남쪽에서 굽어져 갑곶나루가 되고, 또 남쪽으로 마니산 뒤로 움푹 꺼진 곳으로 흐른다. 돌맥이 물 속에 가로 뻗쳐 문턱 같고 복판이 조금 오목하게 되었는데 여기가 손돌목[孫石項]이고 그 남쪽은 서해이다. 삼남지방에서 거둔 조세를 실은 배가 손돌목 밖에 와서 만조를 기다려 목을 지나는데,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돌무더기에 걸려서 배가 파선하게 된다. 정서 쪽으로 흐르는 한강은 양화도의 북쪽 언덕을 돌아 뒤쪽의 서강과 합치고, 또 문수산 북편 조강나루를 돌아 바다로 들어간다.
〈택리지〉에는 “강화부는 남북 길이가 100여 리이고 동서 길이는 50리”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현재의 강화도는 남북의 길이가 약 28킬로미터, 동서의 길이는 약 16킬로미터이고, 면적은 405.2제곱킬로미터이다. 북쪽으로 풍덕의 승천포와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했으며 강 언덕은 모두 석벽이다. 석벽 밑은 곧바로 진흙 수렁이어서 배를 댈 곳이 없었다. 오직 승천포 맞은편 한 곳에서만 배를 댈 만하다. 그러나 만조 때가 아니면 배를 댈 수가 없으므로 위험한 나루라고 일컬었다. 강화부의 좌우에는 성곽을 쌓지 않고 좌우편 산기슭의 강가에 쌓아 마치 성 위에 쌓은 작은 담처럼 돈대(墩臺 조금 높직하게 만든 평지)만 쌓았다. 거기다 병기를 보관하고 군사를 두어 외적에 대비하게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승천포와, 군사의 갑옷만 벗어 쌓아도 건널 수 있을 만큼 좁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 갑곶 양쪽을 지키면 섬 바깥은 강과 바다가 천연적인 요새지가 된다. 그런 연유로 고려 때 원나라 군사를 피해서 여기에다 10년 동안이나 도읍을 옮겨 고려왕조의 명맥을 유지해 나갈 수 있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삼남의 조세를 실은 배가 모두 손돌목을 거쳐 서울에 올라오는 까닭에 바닷길의 요충이라 하여 유수관을 두어 지키게 하였다. 또 동남쪽 건너편에 있는 영종도에도 방영(防營)을 설치하고 첨사(僉使)를 시켜 지키게 하였다.
고려궁 터
강화도 관창리에는 1232년 몽고군의 침입으로 이곳으로 옮겨온 고려 왕실이 39년 간 머물렀던 고려궁 터가 있다. 그러나 바다를 건너 도망쳐온 고려 왕조와 지배계급들은 백성들의 고통과 절망은 아랑곳없이 연등회와 팔관회 같은 행사를 꼬박꼬박 치렀다고 한다. 그 호화스러움이 개경에서 벌이던 것에 못지않았다는데, 그 중에 한 예를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은 고사통(故事通)에서 이렇게 기록하였다.
고종 32년에 그때의 집권자 최우(崔瑀)가 고종에게 진상한 음식상은 여섯 개였고 상마다 귀한 음식이 담긴 그릇 일곱 개씩이 놓여 있었다. 최우는 음식의 풍성함과 사치스러움을 다하고는 스스로 자랑하기를 “다시 오늘과 같이 할 수 있을까” 하였다는 것이다.
고려 왕실과 지배계급의 잔치는 항상 음악과 춤을 곁들여 호화로운 것이었는데, 처용무나 가면 잡기 등으로 여흥을 돋우었고 그때마다 담 밖에는 잔치를 구경하려는 강화도 사람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몽고군의 침입으로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만도 20만 명이 넘었고 몽고군이 지나간 곳은 모두 불에 타서 재가 되었음에도 지배세력이 그렇게 생활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전국의 조세가 안전한 해상통로를 걸쳐 강화도로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강화도가 고려의 왕도였던 시대에 황룡사의 9층목탑과 대구 구인사의 대장경이 불에 타버렸다. 그러자 현재 국보 32호로 지정되어 합천 해인사에 보관 중인 팔만대장경을 강화도에서 16년에 걸쳐 다시 만들게 된다. 민중들의 절박한 삶과는 달리 호화 생활을 하면서도 부처의 힘을 빌려 몽고군을 물리치고자 한 집권 세력들은 오늘날에도 또 다른 형태로 존속하고 있다.
일제 식민지 시대를 살았던 역사학자 호암(湖岩) 문일평(文一平)이 조선사화(朝鮮史話) ‘고적(古蹟)’편에서 강화를 “역사의 고장, 시의 고장, 재물의 고장”이라고 했던 것처럼 강화는 역사 속에서 수난의 땅이었다.
삼별초의 난으로 강화도가 뻘겋게 피로 물들었고, 그 뒤 병자호란 이후 조선조 말기에 병인양요와 신미양요가 일어난다.
1866년 9월 프랑스의 선박 세 채가 수비가 허술한 틈을 타 영종도를 지나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 서강의 언저리 망화진까지 올라갔고, 뒤를 이어 미국과 여러 나라들이 ‘조선의 문호를 연다’ 또는 ‘마실 물을 구한다’는 핑계로 몰려 수호조약을 체결했으며 결국 그 조약들은 조선이 일본에 국권을 빼앗기는 계기가 되었다. 이렇듯 우리나라의 역사 속에 항상 중심축을 형성했던 지역이 강화도였다.
병자호란 이후에 조정에서는 지난 일을 징계(懲戒)로 삼아 군기(軍器)를 수리하고, 말먹이와 식량을 저축하여 비상시에 대비토록 하였다. 그 후 100여 년 동안이나 아무런 일이 없었기 때문에 당시 강화에 쌓여 있던 양곡이 1백만 섬에 이를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숙종 말년에 해마다 흉년이 들자 이 양곡을 각 도로 많이 옮겨 백성들을 구제하는 밑천으로 하였다. 추수 후에는 회수하여 각 고을에 그대로 쌓아두기도 하였고, 서울 각 관청의 경비가 모자라면 미곡을 옮기도록 청하였다. 관리가 허술해지면서 군량이 해마다 줄어 이중환이 택리지를 쓸 무렵에는 10만 섬도 되지 않았다고 한다.
숙종 계유년에 이중환 본인이 병자년 일을 생각하여 임금이 문수산에다 성을 쌓도록 명하였다. 문수산성을 지키지 못하면 강화도를 지킬 수 없다는 이유에서이다. 그 후에 묘당(廟堂)과 여러 장수가 통진읍(通津邑)을 성 안에 옮겨 따로 진을 만들고, 변란(變亂)을 당하면 온 고을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가서 산성을 지키자고 청하였다. 그러나 의논이 끝내 통일되지 않아서 실행되지 않았다가 병인년에 강화 유수(留守) 김시혁(金始爀)이 장계(狀啓)를 올려 강을 따라서 성을 쌓도록 청하므로 조정에서 허가하였다. 그 때의 상황이 택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김시혁이 동쪽부터 성을 쌓기 시작하였는데 북으로는 연미정(燕尾亭)에서 남으로는 손들목에 이르렀다. 공사를 끝내자 임금은 김시혁을 발탁하여 정경(正卿)으로 삼았다. 얼마 안 되어 장마비에 성이 무너졌으나, 성을 쌓을 때 수렁을 만나면 번번이 흙과 돌로 메워서 기초를 만들었기 때문에 강 언덕이 모두 견고해져 사람과 말이 다닐 만하고, 강을 따라 40리나 되는 곳곳에 배를 댈 수 있게 되어 이제는 강화섬도 지키기 어렵게 되었다.”
그 뒤 강화도에서 살다가 임금이 된 사람이 강화도령이라고 일컬어지는 철종임금이다.
“강화도령江華道令 마냥 우두커니 앉아 있다.” 조선의 철종哲宗이 임금이 되기 전 강화에서 아무것도 하는 일 없이 지내듯이 하루 종일 하는 일 없이 지내는 사람을 이르는 말을 이르는 말이다.
철종이 살았던 곳이 고려 궁터 아래 있고, 강화군 송해면 숭뢰리의 송정촌은 소나무 정자가 있어서 지은 이름인데, 이곳은 조선시대의 문장가이자 정치가였던 송강松江 정철鄭澈이 마지막을 보냈던 곳으로 정송강 집터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정철은 강직했고 청렴결백하였다. 정승을 지냈으며 서인의 영수였으면서도 말년에 호구지책을 걱정할 만큼 가난했었다. 그가 이곳에 왔을 때는 더더욱 비참한 시절이었다. 평생을 청직으로 일관한 정철은 하는 수 없이 친구에게 도움을 청하는 편지를 써 보내야만 했다.
“내가 강화로 물러나온 후 사면을 둘러보아도 입에 풀칠할 계책이 없으니, 형이 조금 도와줄 수 없겠습니까? 평일에 여러 고을에서 보내온 것도 여태껏 감히 받지 않았는데, 지금 장차 계율을 깨뜨리게 되니, 늘그막에 대책 없이 이러는 게 자못 본심에 부끄럽습니다. 그러나 형처럼 절친한 이에게서는 약간의 것인즉 마음이 편하겠지만 많은 것은 받을 수 없습니다.”
한 평생 술을 좋아했던 그가 남긴 〈장진주사將進酒辭>라는 시가 그 당시 더도 덜도 아닌 송강의 마음이었는지도 모른다.
한잔 먹세 그려. 또 한잔 먹세 그려
꽃 꺾어 셈하고 무진 무진 먹세 그려
이 몸 죽은 후면 지게 위에 거적 덮고 졸라매어 지고 가나
화려한 상여에 만인이 울어 예나
억세 속세 떡갈나무 백양 속에 가기만 하면
누런 해 흰 달 굵은 눈 쓸쓸한 바람 불 때 누가 한잔 먹자 할고
하물며 무덤 위에 잔나비 휘파람 불 때 뉘우친들 무엇하리
이미 땅에 떨어져 내리는 한 잎의 낙엽과 같았던 정철은 빈곤과 울분 속에서 신음하다가 선조 26년(1593) 12월 18일 이 마을에서 58세를 일기로 파란 많던 생애를 마쳤다. 정철이 죽음에 임하였을 때 둘째아들 종명이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드렸다. 정철은 눈을 살며시 뜬 채로 “이 아이가 헛된 일을 하는 구나”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정철과 부인 문화 유씨와의 사이에는 4남 3녀가 있었다.
산아래 집집마다 흰 술 걸러내고
강화에서 나온 한 맥이 서편 언덕을 따라가다가 움푹 꺼진 돌맥이 되고, 작은 개 하나를 지나서 교동도(喬桐島)가 되었다.
이색이 “바닷물 끝없고 푸른 하늘 나직한데 꽃 그림자 나직하고 해는 서로 넘어가네. 산아래 집집마다 흰 술 걸러내어 파 뜯고 회치는데 닭은 홰에 오르려 하네” 라고 노래한 교동도가 개성의 바깥 안산(案山)이 되고, 섬 북쪽은 한강인데 여기에 와서 개성의 안수(案水)가 되었다. 남쪽은 서해에 임하였고, 바다 건너 남쪽은 충청도의 해미․서산 등의 지역이다. 바다를 사이에 둔 양쪽 언덕이 그리 멀지 않아서 산은 모두 바다가 보이고, 서북쪽으로는 황해도의 연안․배천과 개를 사이에 두고 비스듬하게 서로 보인다. 이곳 교동읍 내 화개산 기슭에 조선시대 폭군으로 이름났던 연산군이 유배를 왔다가 생을 마감했다. 교동도는 강화보다는 작지만 섬 전체가 모두 돌이고 바다 가운데 따로 솟아 있다. 조선 인조 때 조정에서는 이곳에 통어영(統禦營)을 설치하고 경기․황해․평안 삼도의 수군을 거느린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를 두어서 바다를 지키게 하였다. 그러나 두 섬이 모두 땅에 소금기가 있어 자주 가물고 수확이 적기 때문에 주민은 모두 생선잡이와 소금 굽는 것으로 생계를 이어갔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서울을 비롯한 서울 근교 사람들의 출입이 잦아지면서 강화도는 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어떤 길을 걸을 것인가?
요즘에 유행하는 ‘걷기’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길을 걸을까? 우리나라의 옛길을 걷는 사람은 아직 그렇게 많지 않다. 땅 끝에서 통일전망대까지나 판문점까지 걷는 것이 주류이고, 스페인의 순례자들의 길인 ‘산티아고 길’이나 일본의 ‘에도 시대의 옛길’을 걷고자 하는 사람들만 눈에 뜰 뿐이다. 그 이유는 국가에서 개발만 중시하다가 보니 우리의 옛길을 방치하고 있었고, 국민들도 옛길의 중요성이나 존재 자체를 제대로 모르고 있거나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길을 걷는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요즘에도 귀중한 옛길이 사라져 가고 있다.
2009년 11월 20일 저녁 8시에 방영된 sbs의 <사라져 가는 옛길>에 방영된 구미시 산동면의 서울 나드리길은 구미 경제자유특구로 인해 택지가 들어설 예정이고, 경남 창녕군 남지읍 양아리의 낙동강변의 남지장 가는 길은 군도가 예정되어 4km에 이르는 그 아름다운 벼리(벼루)길이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아름답고 유서 깊은 길들을 발굴하고 보존해야할 이유가 거기에 있다.
강화도 역시 교동도에 다리가 놓이면서 여러 가지 변천을 맞을 것이다. 조선시대말까지 하나의 현이었던 교동도의 길에도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조선시대 9대로 중의 한곳이었던 강화로를 찾아내어 걷도록 하고 강화도를 한 바퀴 도는 나들길도 만들어야 하며, 무엇보다 연미정까지 이르는 천삼백리 한강 물길에 관심을 가져야할 것이다.
“강을 보라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그 근원인 바다로 들어가지 않는가” 니체의 말이다. 태백에서 발원한 한강이 바다에 이리는 곳에 자리 잡은 강화에서 한강에 대해 발언권을 가져야 할 것이다.
고려 때의 도읍지이자 이규보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의 역사가 켜켜이 서린 강화도 길을 제대로 만들어내는 것이 시급하다.
강화군 길상면 길직리에 있는 효자촌 북쪽에 고려 시대의 빼어난 문장가이자 문신인 이규보가 살았다는 백운곡이 있다. 백운곡은 뻘벌이라고도 부르는데, 그 뻘벌 동쪽 나지막한 산기슭에 이규보의 묘소가 있다. 풍수지리를 모르는 문외한이라도 묘소를 천천히 돌아다니다보면 편안하고 아늑한 것이 과연 명당이라고 불릴 만큼 좋은 자리이다. 이규보가 잠들고 있는 묘소에 들어서면 소나무 대여섯 그루가 수문장처럼 서 있고, 소박한 묘소 앞에는 석등과 망주석 두 개가 서 있다. 이규보의 묘소가 이곳에 있는 것은 대몽항쟁으로 인해 당시 고려의 수도가 강화도에 있을 때 이규보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가 잠든 묘소에서 강화 나들 길을 걸으면서 그의 호가 만들어진 의미를 새겨보아도 좋으리라.
25세가 되던 해 이규보는 <백운거사어록白雲居士語錄>과 <백운거사전>을 지으며 자신의 심경을 피력했다.
“옛 사람들은 호(號)로써 이름을 대신한 사람이 있다. 호를 보면 대개 자신이 살고 있는 장소를 가지고 호를 지은 사람이 있고, 자기 집에 있는 물건을 두고 호로 한 사람도 있고, 또는 자신의 포부를 가지고 호를 지은 사람도 있다. 두자미가 호를 초당선생이라고 하였고 백락천이 향산거사라고 정한 것은 그들이 살고 있던 곳을 붙인 경우이고 구양수가 육일거사 라고 지은 것은 그 집안에 있는 물건을 두고 지은 경우이다. ……
나는 이와는 좀 다르다. 사방에 정처 없이 떠돌아 다녀서 거소가 일정하지 않고 또 집에 한 물건도 길러둔 것이 없으며, 가진 포부조차 결여되어 세 가지에 적합하지 않다. ……
평생에 거문고와 시와 술을 좋아 하였으므로 처음에는 호를 삼혹호라고 하였는데 그러나 거문고 타는 것도 바르지 못하고, 시를 짓는 것도 공부가 미흡하고, 술도 많이 하지 못하니 이 호를 가지고 산다면 세상에서 듣는 사람들이 크게 웃을 일이지 않겠는가?
그래서 이것을 고쳐 백운거사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자네가 장차 청산에 들어가 누웠다가 백운에 가서 누우려고 하는가. 왜 호를 그렇게 지었는가” 하기에 나는, “그런 것이 아니다. 백운은 내가 사모하는 것이다. 사모하여 이것을 배우면, 비록 그 실상을 그대로는 다 얻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가까워지기는 할 것이다. 대개 구름이라는 것은 뭉게뭉게 오르고 한가히 떠서, 산에도 머물지 않고, 하늘에도 매달리지 않으며, 표표히 동서로 떠다니면서 그 행적이 구애됨이 있겠는가. 잠깐 사이에 변화를 주고, 시종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으며, 유연히 퍼져나가는 그 모양은 마치 군자가 세상에 나가는 것과 같은 기상이요, 금세 걷히는 그 모양은 마치 고인(高人)이 세상을 은퇴하는 것과 같은 모습이다. 비를 일으켜 가뭄을 해소하는 것은 인(仁)이요, 와도 한군데에 애착이 없고, 가도 서운한 미련이 없는 것은 통(通)이다. 그리고 빛깔이 푸르고, 누르고, 붉고, 검고 한 것은 구름의 본래 색이 아니요, 오직 희고 화채가 없는 것이 구름이 항상 가지는 빛깔이다. 덕이 이미 저와 같고, 빛깔이 또한 이와 같으니, 사모하여 이것을 배워서 세상에 나가게 되면, 만물을 윤택하게 할 것이요. 집에 들어앉게 되면 아무 욕심 없이 그 흰 것을 지켜서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무하유(無何有)의 경지에 들어간 듯, 구름이 나인지 내가 구름인지 모를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것이 고인의 포부에 가깝지 않겠는가” 하고 말하였다.”-《동문선》 제 107권
“그런데 이 농서자(隴西子, 작자의 호) 같은 이는 어떠한가, 취해서 바라보면 즐겁고 깨어서 바라보면 서러우며, 곤궁해서 바라보면 햇빛이 환히 비치는 듯하여 즐길 만하면 즐기고 슬플 만하면 슬퍼하기도 한다. 진실로 환경과 기회가 닿는 대로 세상과 더불어 추이할 것이요. 한 가지 법칙만으로 헤아릴 수가 없는 것이다.”
위와 같이 그 자신의 심경을 피력했던 이규보는 평생에 걸쳐 7~8천 수의 시를 지었다. 그러나 말년에 그 시들을 불에 태워버렸다고 하는데 지금 남아 있는 시가 2,000여 편에 이른다. 《동국이상국집》 전집에 1,201편이 실려 있고 후집에는 857편이 실려 있는데, 그는 모든 사물을 바라볼 때마다 그 사물에 대한 호기심을 시로 표현했다. “시라는 것은 자신이 본 것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라고 말한 그는 시라는 것은 후천적으로 배워서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타고난 재기 즉 천재에 의해서 쓰는 것이라고 강변했다. 이러한 이규보가 없었더라면 오백년 고려 왕조의 문학은 얼마나 허전하고 쓸쓸했을까?
<한국사의 천재들> 중 일부
단군의 자취서린 강화도의
정족산(鼎足山 :231m)
강화도에서 가장 큰 절인 전등사는 중창기문(重創記文)에 의하면 길상면 온수리 정족산성내에 있는 사찰로서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에 아도화상이 창건하였다는 유서 깊은 절이다. 아도화상이 신라의 일선군(경북 선산)에 불교를 전파하기 전 이 절을 열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전등사는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의미를 지닌 절 일 것이다. 그 당시 절 이름은 전종사(眞宗寺)였다고 전해오고 고려 중기까지의 절의 역사는 전해지지 않는다. 그 후 1226년에 중창되었고 충렬왕의 비인 정화공주(貞和公主)가 1282년에 승려였던 인기를 송나라에 보내어 대장경을 찍어오게 하여 전등사에 보관하였으며 옥 등을 헌납하면서 전종사를 진리의 등불은 사공(사空) 전등사(傳燈寺)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전등사에 관한 기록은 고려원종 5년(1264) 5월 삼랑성과 궁궐에 불정도량과 오성도량을 4개월간 시설케 하였다는「고려사」기록이 처음이다. 이를 추정해 볼 때 이때까지 전등사라는 절 이름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이곳에 가 궁궐이 있었고 이 절이 왕실과 가까운 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안개 자욱한 길을 조금 오르자 대조루에 이른다. 이곳에 오르면 서해바다의 조수가 한눈에 들어온다고 해서 이름조차 대조루인 이곳에는 고려말 삼은 중의 한사람이었던 목은 이색의「누각에 올라」라는 시가 걸려 있다.
나막신 신고서 산에 오르니 홍은 절로 맑고
전등사 노승은 나의 행차 인도하네
창밖의 먼 산은 하늘 끝에 벌였고,
누 밑에 부는 바람 물결치고 일어나네
세월속의 역사는 오태사(俉太史)가 까마득한데
구름과 연기는 삼랑성에 아득하구나
정화공주의 원당을 뉘라서 고쳐 세우리
벽기에 쌓인 먼지 내 마음 상하게 하네
대웅전과 더불어 영조의 시주로 중수한 이 대조루는 헌종 7년(1841)에 다시 지었고, 현재「조선왕조실록」과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던 보각의 현판인 선원보각과 추향당등의 편액이 걸려 있는데 기념품을 파는 가게로 변해버려 넓게 트여서 사방을 바라보는 운치는 사라지고 없다.
대조루를 지나 만나게 되는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보물 제 178호로 지정되어 있다.
막돌 허튼 층 쌓기로 높은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막돌로 초석을 놓았으며 다소 굵은 민흘림 원기둥을 안정감 있게 세우고 모서리 기둥 높이를 약간 추켜세워 처마 끝을 날아갈 듯 싶게 들리도록 했다.
이 대웅전 네 귀퉁이 기둥 위에는 여인의 형상이라고 하는 발가벗은 여인이 쭈그리고 앉아 처마를 떠받치고 있다. 바라보기가 무척 애처롭기도 하지만 해학이 넘쳐나는 이 나녀 상에는 재미있는 설화가 남아 전한다. 광해군 때 대웅전의 공사를 맡았던 도편수가 절 아랫마을에 사는 주모에게 돈과 집물을 맡겨 두었다. 공사가 끝날 무렵 주모는 돈과 집물을 가지고 행방을 감추었고 이에 도편수는 울분을 참을 수가 없어 그 여자의 형상과 닮은 나체를 만들어 추녀를 들고 있게 하였다. 불경 소리를 듣고 개과천선하도록 하고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악녀를 경고하는 본보기로 삼게 하였다고 한다. 법당 안에는 고종 17년에 조성된 후불탱이 안치되어 있고 법당 내부는 화문과 배천문의 조각 뿐만 아니라 연꽃단청이 아름답다.
(중략)
안개 가시지 않은 경내를 뒤로하고 우측으로 난 산길을 오르는 길섶에 물봉선, 며느리 밥풀꽃, 며느리 밑씻개 등의 여름 꽃들이 이슬 머금은 채 피어있다. “여름이 가고 있구나”하고 깨닫는 순간 정족산성의 사고 터에 눈길이 머무는데 우리가 갔던 그때는 터만 남아있던 사고 터의 복원작업이 한창이었다.
정족산성에 조선왕조실록이
우리나라 국보 1호를 숭례문이 아닌「조선왕조실록」으로 해야 한다고 강변하는 이이화 선생의 말이 아니더라도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시대의 정치에서 종교에 이르기까지 그 방대함만으로도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가 없다. 1413년 태조실록을 편찬하면서 시작된 조선왕조실록은 일반적으로 태조에서 철종까지의 실록을 의미하고 있다. 처음의 실록은 고려시대의 실록이 보관되고 있던 충주사고에 봉안하였다가 1439년 사헌부의 건의로 4부를 만들어 춘추관, 충주, 전주, 성주에 봉안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세 곳의 실록이 모두 병화로 소실되었으나 오직 전주 사고(史庫)의 실록만이 전주의 선비인 안의와 손홍록에 의해 정읍의 내장산 용굴암으로 옮겼으며, 이듬해 7월에 정부에 넘겨주었다.
그 실록을 정부에서는 해주로 옮겼고, 강화도와 묘향산으로 옮겨 보관하게 되었다.
그 후 1603년 7월부터 1606년 3월까지의 전주 사고의 원본을 가지고 실록을 여러 개 더 만들어 병화를 면할 수 있다는 강화도 마니산, 경상도 봉화의 태백산, 평안도 영변의 묘향산, 강원도 평창의 오대산에 사고를 새로 설치하여 보관하게 되었다.
마니산에 보관하고 있던 실록은 1636년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대에 크게 파손되어 남장 낙권된 것이 많이 생겨 현종 때 이를 보수 하였으며 1678년(숙종 4년)에 정족산성에 사고를 지어 실록을 옮겼다.
그러나 1910년 일제가 우리나라의 주권을 강탈한 뒤 정족산, 태백산 사고의 실록은 규장각 도서와 함께 조선총독부로 이관하였고, 적상산 사고의 실록은 구황궁으로 이관하였으며, 오대산 사고의 실록은 동경제국대학으로 반출되어 갔다가 관동 대지진때 불타 버렸다.
그 후 정족산본과 태백산본은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가 우리말로 번역되어 나왔고, 전라도 적상산본은 한국전쟁 당시 북한 측에서 가져가 김일성 종합대학에 소장되어 있다.
(중략)
마니산에서부터 이어져온 산등성이가 길상면 온수리에서 세 봉우리를 형성하였고 이 산의 생김새가 마치 세발 달린 가마솥과 같다고 해서 정족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러나 단군의 세 아들이 성을 쌓았다는 전설로 하여 삼랑산성(三郞山城)이라는 말도 있고 근거를 알 수 없는 어느 시대에 삼랑이라는 신하를 시켜 성을 쌓았다는 불확실한 이야기도 있지만 정족산에 있으므로 정족산성이라고 불린다. 둘레는 약 2Km이고 높이는 2.5~5.3m이며 성곽의 축조는 거친 할석으로 되어있으며 성내도 할석으로 채워 안팎을 겹으로 쌓아 보은의 삼년산성이나 경주의 명활산성과 같이 삼국시대의 석성구조를 보이고 있다.「고려사」에 의하면 고려 고종이 강화도로 천도한 다음 당신들이 머물 궁궐을 지을 자리를 찾다가 삼랑성과 그 아래의 신니동에 정했다는(고종 46년) 기록도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 고종 이전에 성이 있었다는 것만은 확실한 듯하다. 또한 이곳은 고려 때부터 풍수가들에 의해 천하명당의 길지로 주목을 받았다. 동쪽 대모산은 목(木)이고 서쪽 마니산은 금(金)이며 남쪽 길상산은 화(火)가 되고 북쪽 고려산은 수(水)가 되니 정족산이 중앙 토(土)가 된다는 것이다.
단군에서부터 고려, 조선으로 이어지는 기나긴 역사 속에서 수많은 이야기들이 피어났던 정족산에 올라서서 보이지 않는 바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강화의 땅들을 상상 속에 떠 올린다.
<나를 찾아가는 하루 산행>의 일부
이렇듯 길을 걷다가 보면 역사. 문화 인물, 그리고 현존하는 모든 사물들을 만날 수가 있다.
강화의 산길, 강화의 바닷길, 재 너머 사람들이 시집 장가가던 나지막한 고갯길, 나무들이 우거져 있는 숲길들이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이다.
사람들이 즐겨 찾는 숲, 그 숲에 나 있는 희미한 길 언제나 가도 우리들을 받아들이고, 우리가 나와도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는 숲길을 수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보았을까?
그리스인들은 숲길을 걸으며 나뭇가지들 사이로 스치는 바람결에 귀를 기울이는 것, 그 상쾌한 소리를 ‘사랑스러운 드라이드’ 즉 숲의 요정들의 움직임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리스의 시인들은 어떤 놀라운 발상이나 영감을 얻고자 할 때 그 스스로가 오랫동안 숲속을 배회 즉 산책을 했다고 한다.
그 숲길을 걸으면서 세상을 떠돌면서 관조하고 있는 신神과 여신들의 생각을 마음속으로 받아들여야 된다.‘고 믿었다.
독일의 문호괴테는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숲에서 혼자 그렇게 걸었다
아무것도 찾지 않으면서
그 것이 내 의도였다"
그냥 숲으로 가서 아무 말 없이 그 숲길을 걸어가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이 평안해지고 잃어버린 첫사랑이나 헤매고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것이 숲길이다.
바닷가 길은 어떠한가?
“잊어버리자고, 잊어버리자고, 바다 기슭을 걸어보던 날이 하루 이틀 사흘” 조병화 시인의 시 구절에 남아 있는 바닷가 길, 김용호 시인도 “바다가 보이는 산길이 나는 좋아”라는 글을 남긴 것이 바로 바닷가 길이다. 파도 소리 벗 삼아, 바다 기슭을 따라 걷다가 보면 온갖 상념의 바다가 다 나를 향해 물밀듯 밀려오는 것 같은 바닷가 길은 강화 역사 속에서는 뼈아픈 추억도 많지만 그만큼 살아 있는 역사교육의 현장이 바로 바닷가 길이다.
대륙으로 가는 동해트레일
부산해운대 달맞이고개에서 통일전망대까지 가는 여정이 동해트레일이다. 부산과 울산, 경북과 강원도를 잇는 600km의 긴 여정, 북한과 협의가 되어 원산 거쳐 두만강까지 이어지면 약 1400km에 이르는 대장정이다.
부산 해운대에서부터 동해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경주의 대왕암과 죽변곶, 관동팔경과 설악. 금강산을 거쳐 두만강에 이르는 동해 트레일 그 길에는 원산의 명사십리. 함흥 청진. 칠보산등 아름다운 도시와 명승지가 펼쳐져 있고 그 마지막이 두만강이다.
7번 국도를 따라 가는 길,
강릉에서 통일전망대까지의 길은 어쩌다 만나는 마을길이나 바닷가로 연한 길을 빼곤 7번 국도를 따라가는 길이 많이 있다.
우리야 죽으나 사나 큰 길가를 고개 숙이고 걷지만 자동차에 익숙한 사람들은 자동차가 동행하지 않으면 먼 거리를 걸어간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않는다. 걸어가는 것과 자동차로 이동하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자동차는 장소와 역사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풍경을 칼처럼 자르고 지나간다. 자동차 운전자는 망각의 인간이다. 풍경이 차의 유리창 너머 멀리서 휙휙 지나갈 뿐이므로 길에 대한 감각적 마취 혹은 최면상태에 빠져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그는 다만 엄청나게 커진 눈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경우 그는 길을 가다가 멈출 여유가 없다. 더군다나 국도나 고속도로는 탐사나 소요에 적당한 길이 못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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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걷는 사람은 전신의 감각을 열어놓고 몸을 맡긴 채 더듬어 가는 행로와 살아 있는 관계를 맺는 가운데 매순간 발밑에 밟히는 땅을 느낀다. 그는 기억이 거쳐 가는 길 위의 숱한 사건들을 골고루 기억한다.“
맞는 말이다. 걷기가 그처럼 여러 가지로 좋은 것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걷기를 선호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그것을 보면 자동차를 타는 것도 어쩌면 하나의 큰 중독일지도 모르겠다.
경기도 강화의 자산은 역사와 문화 그리고 인물이다. 크고 작은 마니산. 고려산. 교동도의 화개산, 정족산 등 산자락의 마을과 마을을 잇는 일명 ‘둘레 길이나 나들길’을 발굴해서 선보인다면 강화도만이 가지고 있는 귀중한 자산이 될 것이다.
이외에도 ‘금강산 가는 길’ ‘소백산 자락 길’‘ “오대산 자락 길’ ‘설악산 자락 길’등이 사람들의 발길을 기다리고 있다.
맺는 글
사람들이 걷기를 선호하는 길은 어떤 길인가? 반듯하고 넓은 시멘트 길이 아니라, 좁지만 구불구불하고 비단결 같은 감촉이 느껴지는 흙길이다.
해남에서 통일전망대까지 포장도로를 걷는 것이나 강화도에서 동해안까지 걷는 것도 좋지만, 오천년 역사가 켜켜이 쌓인 우리 옛길을 걷는 것은 국토사랑의 지름길이다.
수많은 옛 선인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고, 역사와 철학이 숨어 있는 길을 걷는다는 것은 어디에 비할 수 없는 크나큰 기쁨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자치단체들은 넓은 길만 선호하고 ‘대크시설’을 만능으로 여기고 있다. 올해 봄부터 <문화체육관광부>의 <문화생태탐방로>와 <5대강 도보답사지> 선정 작업을 위해 나라 안의 여러 지자체를 돌아다니며 여러 사례를 보았다.
A지역에서는 5억을 들여 2km를 개설했는데, 포크레인이 지나간 길에 지면이 경사가 하나도 없는데도, 값 비싼 박석을 깔고, 난간에는 벼랑에나 설치하는 굵은 로프가 연결된 목책을 세워놓았었다.
B지역에서는 8억 원을 들여 16Km를 개설한다고 해서 제주올레의 경우를 들어 1구간에 많이 들어야 천만 원 정도가 들 것이라고 하고 돌아보니 돈을 별로 들이지 않아도 될 구간이었다.
C지역은 더욱 가관이었다. ‘가고 싶은 곳’으로 선정되어 돈이 많이 나오다 보니 경사가 완만한 모든 곳에 대크를 설치하고 있었고, 오솔길만 내도 좋을 산을 온통 대크로 휘감는 공사가 진행되어 수십억대의 국고가 손실되고 있었다.
국가의 돈은 ‘눈 먼 돈’이라는 공식이 만연해서 그런지, 여기 저기 줄줄 새고 있는 국고를 주워 담을 수도 없고, 하여간 답사 내내 마음만 불편했다. 어쩌다 작은 표지목 하나 세우고, 길을 표시하고, 그러면 아무 불편 없이 걸을 수 있는 길을, 온통 돈으로 도배를 하면 누가 그 불편한 길을 걷고자 하겠는가?
나라 안에 ‘마이카 전문가’는 많은데 ‘걷기’에 대한 전문가와 공무원들도 이 방면에 전문가가 부족하다. 그러다가 보니 쉽게 찾을 수 있는 ‘임도’를 옛길이라고 선보이고, 그 길에 큰돈을 들이겠다고 난리가 아니다. 사람들이 찾아오기도 힘든 궁벽 진 곳에 길을 만들지를 않나, 하여간 저마다 다른 방법으로 길을 만들어 시행착오가 계속 되고 있다.
가장 시급한 일은 ‘트레일 법’을 만들어야 할 것 같다. ‘보행로’의 폭은 얼마면 되고, 어떤 형태로 만들어야 하며, 그렇게 너도 나도 좋아하는 대크는 어떤 곳에 설치해야 하는가?
그런 기준을 마련하고, 어떤 길이 가장 아름답고, 모든 사람들이 선호하는 길인지를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할 것 같다.
‘아름다운 강길’ ‘유서 깊은 고개 길’ ‘고즈넉한 산 길’ ‘천천히 걸으며 명상하기 좋은 길’ ’시공을 뛰어넘는 역사와 문화의 길‘ ’보부상의 애환이 서린 길‘ 그런 길들을 발굴하여 많은 사람들을 쾌적하게 걷도록 해야 할 것이다.
신정일 약력
문화사학자文化史學者인 신정일(辛正一)은 현재 사단법인 <우리 땅 걷기 모임> 이사장으로 일하고 있다. 1985년 중반 황토현문화연구소를 발족하여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출발점이라 평가받고 있는 동학과 동학농민혁명 그리고 묻혀 있는 지역문화를 발굴하고 재조명하기 위한 여러 가지 사업들을 펼쳐왔다. 1989년부터 문화유산답사 프로그램을 만들어 2005년까지 160여회를 진행했고, 2005년에 사단법인 <우리 땅 걷기>를 발족하여 활동하고 있다.
한국의 10대 강 도보 답사를 기획, 금강,,섬진강,,한강,,낙동강, 영산강과 만경강, 동진강, 한탄강까지 8대강을 발원지에서 하구까지 도보답사를 끝냈고, 한국의 산 400여개를 올랐으며, 부산에서 서울까지 이어지는 영남대로와 해남에서 서울까지 이어지는 삼남대로, 서울 동대문에서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읍까지 이어지는 관동대로 등을 걸었다.
2008년에는 부산 해운대 달맞이 고개에서 북한 두만강(547,8Km)의 녹둔도 까지 이어지는 1300Km의 구간 중 통일전망대까지의 길인 <동해 트레일>을 남북한 공동 관광상품으로 개발하기 위해 걸었으며, 북한의 강인 대동강, 압록강, 두만강 . 청천강 예성강 등 북한의 강과 의주로 경흥로 등을 답사하고 박지원이 걸었던 <열하일기>의 전 구간을 걷기 위해 준비 중이다. 저서로 『동학의 산 그 산강화 가다(1995, 사람과 산)』『모악산(2000 도민일보)』(공저) 『지워진 이름 정여립(2000 가람기획)』 『나를 찾아가는 하루산행 1,2(1-2000 푸른숲 2-2001 사람과 산)』『금강 401km(2001 가람기획)』『섬진강 따라 걷기541204-1528815. 우체국: 400739-01-002807(신정일) 018,610,2563
전북 전주시 덕진구 진북동 416번지 우성아파트 116동 80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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