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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시집 [간지]
서울 허수아비의 수화
(1986. 4. 25. 도서출판 모모. 재판 1987. 1. 10. 미래문화사)
해설 : 윤강로(시인) / 영원과 통하는 순간의 생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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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 후기
바람 부는 날은 흔들리는 풀잎을 닮아 나의 가슴앓이가 시작 된다. 하늬바람에도 온몸으로 웅성대던 어릴 적 대숲으로 가보면, 게딱지 초가지붕 위로 너울대던 저녁연기는 따스한 한 폭의 정경으로 채색되어 내가 자라서도 남아있기를 염원하던 동심을 청솔밭에 묻어둔 채, 시를 쓰는 일은 조그마한 향수에서 출발한다.
불혹이 지나도록 지울 수 없는 수천의 허탈과 절망은 나의 내면에서 일렁이는 바람을 잠재우지 못하고 어두운 방황 또는 온화하지 못한 한 생명의 심층까지 죄어드는 현실에의 절규에서 빚어진 나의 시는, 더욱 시련의 몸부림 위에서 자리 잡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시는 가장 절망적인 허탈의 늪에서 마지막 건져 올린 찬란한 증언이기도 하다.
허탈은 진정한 한 생애의 비상을 알차게 다듬는 바로 그 과정이었으며, 절망은 삶의 시야에서 시행착오와 갈등을 시작하는 순수한 심상(心象)의 뜨거운 태동(胎動)에 지나지 않음을 잘 안다.
어둡고 두려운 모든 사상(事象)들이 어떤 시점에서는 투혼(鬪魂)에 길들여 질 수 있듯이, 괴로움과 아픔의 분열 뒤에는 더욱 승화된 최후의 생명이 깊게 머물 수 있음을 나는 믿는다.
작은 꽃 하나라도 고귀하게 스스로 피우기 위하여 나의 시에는 언제나 바람이 불고 가슴앓이가 계속될 것이다.
설익은 시들은 묶으면서 여러 가지로 채찍주신 잊지 못할 많은 이웃들에게 고마움을 보내고 특히 바쁜 나날에도 해설을 해주신 윤강로(尹崗老) 선배시인에게 앞으로 무게 있는 시작에 임할 것을 약속한다.
첫 시집을 상재하도록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신 많은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1986년 4월
김 송 배
*시집에는 맨 끝에 「후기」로 게재되었으나 다른 시집과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앞에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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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剝製)
어제의 따스한 숨소리 멀어지고
아침 이슬내린 솔밭을 벗어나
조용히
떨리는 가슴으로
창가에 앉아 있다.
어지럽게 예감의 손짓으로
풀숲을 펄럭이다가
그리움도, 사랑의 기다림도 없이
속살 버리면서
노래마저 묻혀지고
못다 이룬 작은 소망은
허우룩한 껍질로 남아
텅빈 햇살을 줍고 있다.
퇴색한 산울림
눈동자에 메아리지고
오늘은 창가에 나와
찬바람의 和音만 듣는다.
의족점(義足店) 앞에서
일찍이 우리가 간직한
빛바랜 다리 한쪽
창 너머 서러웁도록
누구를 기다리는가
빗겨치는 눈발 속
골목길에 얼어붙은
어둠을 헤집고 다리를 절룩이며
누군가 먼 길을 가고 있다.
우리 함께 딛고 설 수 없는
진한 핏빛의 한쪽 땅
매서운 바람이 시린 가슴을 적시고
꿈을 적시고
어쩔거나
깊은 상채기 안고 어쩔거나
기우는 햇살
벼랑 위에서 통곡한다
나의 분신이여
빛바랜 다리 한쪽
오랜 기다림은 끝내고
무지개빛 들숲으로 오라.
어떤 묘비명(墓碑銘)
햇살을 마지막으로 쬐인 저녁답
산그늘도 나를 멀리 빗겨 가는
산골짜기에는 이승의 바람소리들만
이해될 수 없는 메아리로
소용돌이치다 허연 뼈 속으로
안개처럼 흩어진다.
까풀막진 비탈에서 한 생애를
박넝쿨 기어오르듯 몸부림이다가
썩은 초갓 지붕에서도 뿌리는 내리지 못해
가시덤불에서 여린 살갗을 할퀴우고
아직도 핏자국은 아물지 않았는가.
이름도 없고, 더구나 작은 풀꽃 하나
피우지 못한 흐린 날의 물거품
바람도 잠든 잡초 속에 마음을 파묻고
아, 허물어져 간 이름이여.
어디에서 오고 어떻게 지나갔는가를
아직도 물어보지 말라. 나에게는.
지금은 버려진 무덤이여!
어느 병실에서
예리한 영혼 한 웅큼은
병실 어두운 벽에 부서지고
아직 할딱이는 숨소리
퉁명스러운 침상을 벗어나
두꺼운 창문을 열면
찌푸러진 바람 한 조각
병실 가득히 쓰러진다.
쉬임 없이 피가 도는 이 하늘 끝까지
아픔은 어디서나 아픔으로 남아
차거운 어린 풀잎 베갯머리에
언제나 비어 있는 먼 하늘
잠도 말라버린 창문을 닫으면
밤새도록 쏟아지는 별
별빛이 뿌연 돌무더기로 쌓일 때
나는 허망으로 층계를 내려가고
피돌기가 멈추려는 들판에서
바삐 달려가는 아, 숨소리
산새들 울음소리
소리, 소리, 소리-.
아침 情景
아침 출근길에 햇살이 부서진다
햇살을 따라 허기진 은행잎 하나
나풀대다 바람으로 떠난다
떠나는 바람의 행방을 알 수 없어
아내의 눈망울은 흐려진다.
햇살이야 어지럽게, 어지럽게 눈부시지만
바람, 그 떠남의 끝에 잘 정돈된 별빛 몇 잎
딸애의 손은 떨리고 있다
좀처럼 영글지 않는 아침 햇살이여
언제나 젖어 있는 내 가슴을 향하여
활시위를 겨누는 붉은 부표여
되도록 멀리 피하여 돌아서 가자
어디쯤에서 멎을지 모르는 바람을 따라
부서져 떨어지는 햇살을 따라
오늘 아침
표정 없이 문을 나서는 헛기침 소리.
여름, 그 나뭇잎처럼
여름 쨍볕 속에서
비록 한생을 나뭇잎처럼
그대의 중심으로 살아가지만
바다 속 깊은 산호의 속마음은 알지 못한다.
그대 중심에 가로 놓인 출렁다리 저켠에서
한 가닥 가느다란 등대불빛의 넓이가
거울같이 맑지 못함을 기억하지만
그대가 오래도록 무섭게 치닫는
모래밭 따가운 우리의 지도에는
텅빈 오후 나뭇잎들은 아픈 꿈을 버리고
우울한 노래나 하루 종일 불러대는
왕매미들의 낡은 일기장 갈피에
햇살은 핏빛으로 엉기어
太古의 化石으로 누워있다.
빛바랜 노을, 바람이 손짓 멈추는
여름, 저물녘
막소주 쓴 한 잔으로 그대의 눈물은 지워지고
체온이 식어가는 나뭇잎 하나 밟으며
홀로 떠나는 먼 길에
핏자국 말라버린 폐허의 땅들은
나의 가슴에서 어른거리지 말라
그대가 이승을 고이 떠날 때
한몸 아름답게 쉴만큼의 흙을 얻기 위하여
그대가 이 여름날
나뭇잎처럼 한생을 비록 살아가는 것이지만-.
空閑地에서
빈 하늘
달빛이 시려오고
젖은 이파리들이
울거나 혹은 잠이 들었다
흔들리는 들판
숨 끊긴 나뭇가지 위 빈 까치집
문패가 이름을 잊어
낯선 손님으로 서성이고
한 개의 어둠을 머금은
마지막 그림자는
흰 풀꽃들만 밝고
달빛 끝에 매달려 있다
다시 비어 있는 산
새떼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데
바람은 저녁 문을 닫고
암갈색 재 덮인 창 밖 빈터에서
밝은 불빛이 되기 위해
오늘도 이 밤을 태우고 있는가.
대 화
너의 눈망울이 파랗게 혹은 노랗게
계절을 버리면서
침묵의 하늘을 향하고 서 있을 때
나의 깊은 호흡은 갈라져서
둔탁하게 뿜어내는 우주의 숨소리 들리고
네가 살아 있음의 웃음소리 바람결에 흔들리면
이 황야에 조그맣게 서 있는 나를 본다.
흙먼지 가득한 도시의 길목마다
얇은 거미줄 보이지 않게 드리우고
하나만의 웃음을 갈아 삼킨 유령
너의 맑은 산소로 나의 온몸을 헹구며
나누어 간직하는 우리의 생명처럼
새벽바람 한 줄기에 어리운 이슬방울
내가 토해버린 탄산가스로
다시 너의 온몸을 감싸고
필요한 한 사발의 소나기를 기다리노니
나도 숨쉬므로 이 세상을 날 수 있지만,
초롱한 너의 눈망울이 어느날
하얗게 부서지고 내 곁을 떠나가면
나의 숨소리는 거칠고
바람소리 들리지 않는 일상의 끝
그저 탄소동화작용뿐임을
우리들은 잊어가고 있었네.
조용히 서 있는 자
깊은 명상으로 여무는
한 생명의 노래를 잊어가고 있었네.
화 분
한 웅큼의 넋이 고인 좁은 세상
한 사발의 절망을 어지럽게 퍼내고
마른 풀잎, 나의 草地위에
물 한 모금은 뿌려진다.
아린 속잎은 어둠만 핥고
흙의 열기로 찌드는 실뿌리
비집고 나갈 문은 잠겨 있어
좁은 공간, 끝없이 치닫는 허우적임
나의 영혼은 황사 속을 멀어져 간다.
수만 평의 초지 위에서
흔들리는 제 무게의 지탱은
햇살든 창가에서 졸고 있네
호수를 넘치는 꿈, 꿈이 부서지는 소리
엿듣고만 살아가는 나의 좁은 땅에
다시 무디어진 한 줌의 재 뿌려지고
땅거미처럼 깔리는 핏빛 생명
햇살은 창밖에서 타는데
오늘도 무엇을 기다리는가
그리움의 나비떼는 보이지 않는다.
墓地頌
아무도 열 수 없는 빗장을 잠근 채
투명한 명상으로 살아가는 겨울바다
창밖에서 서성이던 나뭇잎은
살아간다는 것은
언제나 끝남을 위한 축제
어지러운 발걸음을 멈추고
잔잔히 숨죽인 바람
수천 길 벼랑 아래로
아래로만 곤두박질 하다가
빗물은 둥근 지붕 위에 와 박히고
이승 언 빨래줄에 걸려있는
낡은 한 올의 기억
떠나고픈 길 막힌 그믐밤
여기는 참으로 화목한 세상이여.
쭉정이 別曲
베어진 풀잎
춤소리 들리는 날은
광화문에서 마실만큼 술을 마시고
비바람 치는 밤
내장까지 비 젖으며 그는
구산동까지 휘적휘적 걸어 간다
길거리에 내 깔린 흙탕물
싹트지 못한 텅빈 가슴으로
물위에 둥둥 떠
맨 먼저 잠을 깨고 유랑은 시작 된다
쭉정이의 탄식을 한 아름 안고
李裕憬 시인은
밀양 하남에서 겨울 수산으로
다시 합천 삼가로
지친 이 밤 고개를 돌리면
풀밭에 누워 있는
검은 지푸라기의 노래 다시 들리고
귀먹고 눈멀은 죽은 가지들
우리들 곁에서
밤새도록 그들의 노래만 들려준다.
*이유경 시집 <草落島>에는 ‘쭉정이’를 많이 다루고 있다.
高麗葬
제자리에서 몇 바퀴를 돌고
낡아버린 연륜
모든 발자국은 흔들리지 않게
내 무게를 챙기고
오늘 갑자기 굳어버린 땅을 밟는다
산과 바다는 물구나무를 선채
낙엽이듯 지고 마는 한 생애
그러나 아직 마르지 못한 野乾草
굳은 땅을 갈아 엎으며
땅속 어둡게 묻어 두려나
뿌려진 시간은 말이 없어지고
온몸에 감추어온 傷痕
바람은 십자가를 그린다.
이제 不惑의 더 푸른 하늘은 지워지고
남아있는 그림자는 누구를 탓하랴.
너무나 또렷한 한 생애의 기억은
마냥 어둠을 마신다.
不 眠
밤마다
무기재의 빛깔은
소나기로 쏟아지고
낡은 얼룩무늬가
빈 방을 서성입니다
하릴없이 무너지는
물레방아 소리
뿌연 물안개 되어
밤이면 시퍼런
시퍼런 칼날들의 춤소리만
무겁게 들려옵니다.
가을 山寺에서
가을 산사에 후줄근히 비가 내린다
아침나절에 딩굴던 나뭇잎
뚫린 가슴팍에 날아와
오늘의 말씀들을 버리기 위하여
젖은 채로 안개 속을 떠다니고
굵은 빗방울이 인경을 깨워도
날지 못하는 꿈
낡은 꿈만으로만 남아 있으리라
아, 걷어내지 못한 粉塵의 아픔
어느날 일백여덟을 헤아리지 못한
검은 구름은 밀려 오는데
두 손 모두운 합장
그래도 모자라는 눈물처럼
늦가을 산사에 비는 내리고
지친 꿈속을 허우적이는 나뭇잎 몇 개
스러지는 물안개 위에 딩굴고 있었다.
造 花
에덴에서 버려진
꽃 한송이
화분에서도
설 자리는 없어
부끄러운 이름으로 남아 있다
온몸에 감추었던 향기는
얕은 물살에 흘려 보내고
싸늘해진 입술 위에서
멀리 떠난
별, 나비-.
허물벗기 연습
허물을 벗는다.
흙먼지 하늘 가득
진눈깨비와 섞이는 날은
한 까풀씩
껍질을 깎아내는
아픔이 남는다.
하루에 열두 번은
맨살 할퀴는 바람이 불고
피 흘리며 벗겨도
다 벗지 못하는 우리의 허물
제 자리에 서 있으려는
끈끈한 핏기 위에서
날마다 허물을 벗어야 하리.
살아가는 연습을 위해-.
山동네의 겨울
낮에도 꿈을 꾼다.
꿈으로만 허탈해지는
영혼의 그림자
얼지 못해 날아간 눈발
산동네에 쏟아져
뜨거운 눈물이 되고
겨울 밤
귀또리도 깊은 잠 이룰 수 없어
낙엽 몇 잎은
가난한 자의 긴 숨소리에
타지 못하고 버려진 햇살
따수운 봄은 땅속 깊이 묻어둔 채
둥실둥실 떠가는 꿈
꿈속의 산동네에는
달빛이 젖은 채로 부서진다.
겨울새(1)
눈덮힌 산길
돌아 벼랑끝 쯤에서
얼지 못한 바람 줄기 속에
웅크린 작은 겨울새 한 마리
산동네 사람들
서둘러 떠난 빈 눈길에서
눈을 감으면 혼불이 타는데
건너 산비알
천 년 전의 눈꽃을 쏟으며
산꿩이 놀라면
꺼지려는 마지막 시간
핏줄 불거진 팔뚝으로
울아버지는 천년 후로 돌아가지만
그 모습을 덮어가는 눈발
쓸어도 다가오는 검정빛 시각은
단 한번만의 삶을 잊었는가.
꺼져가는 시간
치유될 수 없는 아픈 시간
지금쯤은 비워두어야 할 영혼
돌아보고 눈을 감는
겨울새여!
겨울새(2)
길을 잃었음.
말을 잊었음.
은백색 쟁반 위에
얼비치는 별무리
우리 모두를 잃어 버렸음.
보이지 않았음.
듣지도 못하였음.
겨울 안개
여린 햇살마저 뺏아 돌아눕고.....
그러나 꿈은 있었음.
아직 엷기는 하지만
무기재빛 하늘 끝까지 훨훨
또한 沈潛의 언저리에서
집중되지 못하는 설익은 꿈
겨울 바람막이 되어 하루를 사위고
까맣게 머무는 두려움뿐이었음.
눈오는 날의 대화
한 점 바람으로
남아 있던 당신의 절망 앞에
눈발이 쌓이고
눈더미만큼 아픔도 쌓인다
어느날 우리 곁을 떠난
당신의 소리 먼 귀울림
밤이면 가슴으로 떨어져
부서진 초점 하나 당신 곁에 머물고
눈 덮힌 산길에서
얼어붙은 기원만큼
굳어지는 당신의 눈빛
닦지 못한 낮달처럼
목쉰 당신의 말씀만 뜨겁게 달려온다.
아, 눈 오는 날이면-.
겨울 일기
자욱한 안개
이름 아침 鋪道를 차들은 질척이고
지새운 새벽달은 마냥 차거웁다
승차대에 뿌려진 傷心의 행렬은 서고
껍질만 삼키는 검은 그림자
몇 무리 지분거린다
분노한 장님, 지팡이 뿐인 큰 속마음은
겨울 아침 난무하는 逆秩序,
持國天王을 찾아간다.
안개도 걷히고 오늘은 괘청
한치 앞 가시거리를 잊은 우리의 일상
보이지 않는 낮달의 아쉬움으로
겨울해가 저문다.
*지국천왕(持國天王) : 선악자를 가려서 상벌하는 불교의 사천왕(四天王)의 하나.
裸 木
어제 밤 숨져간 마른 풀잎 하나
내 곁에 돌아와
밤새도록 지난 여름 얘기 합니다
가파른 숨소리, 허방짚은 꿈들이
뼈마디에 삭여지며
나의 체온도 식어가고 있었습니다
발부리에 깔리는 경련으로
아직도 출발하지 않은 봄
내일의 언어는 아무도 들려주지 않았습니다
조그마한 이 한 몸 감싸볼 재주 없음으로
마른 풀잎 헛기침처럼
알몸으로 이 겨울밤을 흔들리고 있습니다.
流淚症
비 쏟아지는 초겨울 밤
아직 매달린 오동잎처럼
눈시울은 언제나 마르지 못한다
오래도록 눈물로만 길들여져
온몸에 휩쌓인 不治의 증세.
산봉우리에서
마지막 빛을 거두는 그믐달 같이
슬픔은 슬퍼서 울어버리고
이산가족 상봉은
서로 가슴 깊이 묻어둔 뜨거운 눈물
너무 기뻐서도 눈물이었나니
반만년 이 땅 겨울 들 숲에서
가시덤불 베어내며 할퀴인 얼룩들을
지금사 한꺼번에 지우고 있을까.
診 斷
아침마다 창을 열면
지난 밤 제풀에 지친 안개비
오늘도
명주실오라기로 나의 목을 조른다.
관자노리는 언제나 매캐한 바람
날마다 썩어가는
검붉은 계절의 몸살은 시작되지만
겨울 개펄에 버려져 숨 끊긴 조개
어두움 속으로
제 아픔만큼은 빠져들고
하늘과 땅 끝까지 깔린 햇살은
잿빛 커튼으로 가리워져
살아있는 모든 아픈 것들만
신음하고 있었다.
겨울 山
빛바랜 허물을 벗어던지고
유년의 알몸으로
부끄러울 것 없는
아름다운 나의 진실
여름 한철 열애를 견디면서
몸은 야위어지고
가슴팍 뚫어진 오솔길에
길 잃은 벌레 하나
꿈틀대다 긴 잠을 부른다.
지금은 서로를 감출 것 없는
水脈은 속살로 스미고
계절의 버림 끝에서
표정 없는 내 영혼은
알몸으로 돌아 왔다.
겨울 旅窓
미끄러지는 고속도로
하행선 차창 밖에 눈이 내린다.
하얗게 쌓이는 만큼
내 마음은 중량을 견디고
차창에 부딪히는 만큼
부서지는 나의 영혼
눈을 감는다.
기다림도 기다리는 사람도 없는
이 겨울에
조각난 영혼 한 잎은
눈발과 섞여지는데
그리움도 그리울 것도 다 묻어버린
서글픈 겨울 노래 한 음절은 남아
고속도로 차창에 눈은 쌓이고
미끄러지는 山野에는
마지막 절망이 쌓인다.
아랫물을 마시며
지평선 위에서는
계절이 붉게 타다가
겨울 햇살이 숨을 거둔다
회오리바람 한 올에
표백되는 꿈 조각
구멍 뚤린 가슴들은
지평선 위에 버려져
맑지 못한 웃물
천년을 흘러내려도
우리들은 그 아랫물만 마신다
오늘 밤은 겨울 달을 닮아
을씨년스러운 낱말을 줍고....
맑은 웃물을 위해
맑은 아랫물을 마실거나.
종점에 서서
마지막 도착하는 언어들이
어둠 속에서 비워진다
슬픈 것들은 실려 보내고
불이 꺼진 종점
만남과 떠남이
늘 내 마음에서
뒹구는 바람소리
달빛도 무디어진 이 밤
어디선가 실려 올
몇 개의 환희를 기다리며
한 아름 어둠을 지우고
마지막 설레임으로
종점은 휴식이었다.
바 람
멀리서 쓰러진다.
누군가 마른 풀씨만 씹다가
썩지 않은 마음 한쪽 남겨놓고
한생의 幕을 내리는가.
하늘이 엷게 흔들린다.
흔들리는 저 언저리
시린 시야 밖으로
돌아가 눕는 저녁 새떼
바람만
빗살고운 무늬로 어른거린다.
오늘밤
귀에 젖은 물소리는
밤의 중심으로 흐르고
홀로 잠들지 못하는 섬 하나
거기에 나는
그리움처럼 남아있다.
바람 四季
1. 앞에(前)
황량한 나의 들숲에서
갈잎이 흔들린다
삭정이 끝마디에 웅크린 들새 한 마리
내 몫의 웃음조차
잃고 돌아서는 저물녘
바람은 홀연히 속살로 스며든다
실개천 둑에서 풀잎은 잠을 깨고
어디로 떠나는 것이 아니라
오래도록 머물며,
탄생을 위하여
다시 낙엽 지는 날을 위하여
그러나 늘 비어있는 겨울 들판에서
내 마을처럼 흔들린다.
2. 봄(春)
싸릿대 울안에 오색빛깔이 깔린다.
겨우내 잠겨 있던 빗장을 열고
헛간구석까지 돌아보는
아버지의 음성
봄바람 잠 깨우는 오두막
활짝 문은 열리고
살아있는 개울물 소리,
온몸에 피가 도는 소리,
소리의 긴 설레임 끝에
무거운 나의 짐을 부리고
하품하던 영혼의 씨앗은
허물을 벗고 새옷을 입는다.
3. 여름(夏)
너의 온몸이 고목잎에도 와 닿을 때
다복솔 목덜미에서 바람은 속삭인다
뙤약볕 한 웅큼
뽑혀진 잡초의 아우성
바람은 용서하라.
빗줄기 속에서
나무들 합창은 시작되고
한 멍석 제자리에서
꽃들은 핀다.
황토길에 깔려있던
애옥살이의 잔잔한 강물은
먼 바다 어디선가
모래톱이나 핥고 있을까.
4. 가을(秋)
그냥 손길 닿으면
포근한 엄마의 가슴이 된다.
닿은 만큼의 부드러운
황금색 열매는 들판에 쏟아지고
꽃들은 웃음을 접은 채
더 넓은 들길을 떠난다
흰 한 조각 구름
한 자리에서만 길게 머물 수 없어
이 세상 부끄러운 일들은
고이지 않고 흘려보내리
오랜 진통 끝에 분만한
나뭇가지는 허탈해지고
낮달도 제 모습으로
순한 흐름을 위하여
돌아, 돌아가는 따숩은 손길이다.
5. 겨울(冬)
고샅길 어둠을 밟고
벗어버린 겨울나무
가지를 흔들고 밑둥을 후들기며
누군가 다가오고 있다
하늘도 닫혀버린
겨울 밤
발 뻗을 둥지 하나 갖지 못한 자
모두 내 곁에 몰려 왔느니
후미진 골방
문설주에 모여 앉아
잠들지 못해
얼고 있다
울고 있다.
6. 끝에(終)
바람은 어쩌면 눈물이다
민들레 꽂잎 위에
몇 개의 사랑은 뿌리지만
진통은 늘 다시 시작되는 것을
감나무에 감꽂이 달리고
민들레의 꽃씨는 여물어
그리하여 우리의 가난을 퍼내고
다시 구름 한 응어리로
베짱이의 슬픈 가락이 들리는데
드디어 밤은 오는 것을
민들레는 저녁노을을 향해
꽃씨를 멀리 날려 보내고
풀잎들은 제 모습으로 돌아간다.
계절은 겨울을 없앨 수 있을까
봄, 여름, 가을-.
그러나 겨울은 어김 없이
우리 집 안마당에 서 있고
아프도록 나의 살갗에 와 닿고
사랑을 뿌리던 바람
어쩌면 눈물이 되어
밀물처럼 늘 밀려오고 있는 것을.
밤바다
어둠이 바다에 떨어지고
온 누리에 낮게 휘감기는 별빛 한 아름
나는 잠들지 않고 부서지리
여름밤 바닷가에서
바람은 무너져 어둠을 가르고
심장을 핥아내는 소리
하얀 울음으로 남아 있으리
서로 밀고 밀리면서
살아가는 비밀처럼
밤바다는 조용히 흔들리지만
온몸으로 분노한 파도
오늘밤은 잔인한 회상일까.
바다의 넋은
떠나간 님 아픔으로 출렁이지만
파아랗게 쌓였던 수천의 그리움
물머금은 갯자갈은 홀로 잠이 들었다.
비 오는 날
내가 가진 것은
모두가 하얀 눈물이다.
못 피우고 시들은 꽃망울
가슴으로 뿌리는
진한 눈물이다
아득한 벌판
무거운 머리 위에서
무너지는 눈물은
흐려진 시간 속으로
목이 쉬어 버린 언어이다
먼 하늘가
바람처럼 서성이는 빈 터에서
다독일 수 없는 슬픔
하루 종일
가진대로 쏟아내는 응어리
젖은 나뭇잎 하나 돌아 눕는다.
새가 되어
웬일일까.
밤이 이슥해지면
거슬러진 시간을 쫓아가는
쪽빛 날개의 새가 된다
식어가는 때까치의 울음은
검은 빌딩 꼭대기에
그림자처럼 남아
바람이듯 날아간다
끝내 시들고 말 꽃잎의 떨림 끝에
억새풀은 몸 부비며 바람을 잠재우고
애시벌 맨 논뚝에서
영혼의 숨소리를 듣는 나--
웬일일까
쪽빛 날개의 밤새가 되어
바다 끝 침묵 속으로
떨어져 버린 새가 된다.
밤비 속에서
어둠은 푸석푸석 갈라지고
신들린 物象이 무너진다
감추어온 울먹임 멀리 씻겨 가도
텅 비어 있는 헛간에
앙금처럼 고여 있는 마른 그의 눈물
끝내 거두지 못한다.
몇 날을 대지는 뒤집히고
구름 밀리듯 이미 너의 하늘은
바람으로 멀리 떠났다
오늘 밤
갈라짐을 위하여, 무너짐을 위하여
내가 해야 할 일을
오직 뜨겁게 飛翔한 뒤
지워지는 무지개의 색깔을 보는 것
너의 마른 눈물을 위하여
바다를 온몸으로 퍼 올리다가
까만 늪이 되는 일,
벌레조차 떠나고 없는
남의 집 빈터 근처에서
자맥질이나 하다가 지친 넋
너를 돌아보는 일이지만
이제 돌아와
죽은 가지 흔들리는 빈산에서 잠드는 밤
순한 바람 한 줄기 너의 곁에서
불을 켜놓고 기다리자
까맣게 젖은 채로 떨고 있는
하얀 고무신 한 짝
돌아와 잠들게 하자.
江陵가서
머무를 곳이 어디인가를
분명하게 알고 길 떠나는 이의
눈망울은 언제나 빛난다.
구름 덮힌 대관령을 넘으며
나의 영혼은 휜 구름 속 멀리
나비처럼 날아가고
밤바다를 흔들며 歡呼하는 파도
파도의 품안에서
다시 바람으로 서 있는 나-
산다는 것은 늘 머물 곳을
잊어버린 채
하얀 조개껍질의 그리움인 것을
그러나
해안을 돌아 갈매기 그럼자와
부딪히는 부드러운 햇살
우리 모두 절망하지 않는 보금자리
머무를 곳에 머물고 있는
시인의 눈망울-강릉의 시인들.
噴水에게
햇볕을 보는 것은
언제나 두려움이다.
시간이 아프게 머물던 자리
일상은 목이 마르고
불꽃처럼 타오르는 單母音
그냥 삭지 못해
深淵에 쌓여서, 아직은
혼돈으로 킬킬대는 소리
더러 하나씩은 잊어 가지만,
오늘만은 버려진 자의 분노를 위하여
게워버려, 온몸으로
알량한 입술은 지워버려
기다림의 일상 위에
분수는 훈풍으로 살아간다.
흔들리는 그림자
느슨한 그림자
엷은 햇살에도 흔들리면서
언제나 꿈 몇 조각과 무섭게 섞인다
빈사 상태의 영혼은
누군가 버린 언어로 젖은 마음 말리며
부서진 구도위에서
마냥 허상의 꿈 쓰러지고
걸어야 할 돌덩이 길
밟은 자죽만 돌아보면
나부끼는 헌 빨래줄에
을씨년스러운 하루를 뉘이고
흔들리는 그림자는
몇 방울의 비 속에서
스물스물 지워지고 있었다.
서울 돌개바람
실버들 가지는
바람소리만 들어도 무서워합니다
고사리 손들이 흔들어 대는 꿈
꿈을 마시고 취해 있는 운동장
어머님 은혜 합창도 끝나고
텅 빈 오후
돌개바람은 운동장을 휘몰아
유리창을 흔들고
선생님의 마음도 흔듭니다.
아, 서 있어야 할 자리에서
지워지는 마음들
한 생명 활활 불태울 날은 언제인가.
돌개바람 몰려간 자리
독버섯이 되기 위한 풀 한 포기
또 한사발의 눈물을 마십니다.
낙 엽
엷은 햇살이 머물고
말라버린 마음들이 길섶에 머문다.
조금씩 길 떠나는 속삭임
가을은 마지막 표류를 끝내고
여기는 태양의 입술이 부서진 緘?
모두 눈이 멀고
차거운 몸부림은 겨울 창가에서 절망하는가
폐허뿐일 수 밖에
남아있는 바람 한 줄기
여름날 싱그러운
합창들이 천천히 멎어지는데
서고, 피고, 맺음 그 서투른 의미는
풀지 못한 매듭으로 긴 안식을 부른다
육신의 흔적이 지워지고
파아란 숨소리, 따스한 개울 물소리
바람 한 줄기 다시 내 곁에 머물 때
시린 손마디에 수 놓여지는 하얀 물거품.
돌이 되어 누워 있음
문풍지 밤새도록 슬픈 이야기를 만나
마음이 엷은 바람소리 된 자여
내 곁으로 오라
이 세상 사는 일들이
동지 섣달 긴 밤 불면으로
지새운 귀또리의 음성으로 남았더라도
흔들리는 한 자락 풀잎의 꿈을 베고
수억의 그리움이 머무는
풀섶 돌밭으로 오라
한 마디 절규도 감싸며
여기 천 년을 누워
더욱 마음 가난한 자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이는
아픔을 듣는다. 겨울밤에--
풀숲은 어둠,
어둠 속을 내 곁에 누워
문득 흘러가는 강물 위에
이 세상 버려진 이야기를 들을꺼나
點 하나 안개 속을 떠돌다가
한줌 흙으로 섞여지는
낡은 野史나 들을거나.
나뭇잎은 흔들리고
바람이 부네
마지막 남은 나뭇잎 흔들고 가네
응달진 산기슭 돌고 돌아
흰 구름 몰켜 가는 곳
들새의 버려진 꿈들이
빈 하늘에서 흔들릴 때
낮은 골 하나 넘지 못한 엷은 바람
저문 들녘에 되돌아오고
흩어진 들새의 꿈 모여
어둠으로 서 있네
바람은 불고 불 꺼진 창 밖
젖은 눈시울의 마른 나뭇잎 하나
짙은 사랑도 부서지고
부서지는 이 세상 흔들림만큼은
한 사내가 돌맹이로 버려지네.
弔燈도 없이
마른 눈물이
弔燈도 없이 밤바람에 젖고 있다
총소리 멎은 산천에서
재가 된 애비의 원혼이
한 마리의 새가 되어
빛바랜 슬픔을 마시고
육이온가 뭔가 아름한 기억 속에
야윈 핏멍울이 하얀 수의에 덮혀진 채
상도꾼도 없는 빈 길을 떠나는데
弔燈도 없는 빈 초상집
돌담너머 뿌려지는 눈물 한 웅큼마저
바람따라 지워지는 아픔으로 남아있다.
手 話
나는 바람일래
너는 풀잎이거라
먼 산마루에서
입김 가득 부을 때
이른 새벽
이슬 한 모금으로 일어서는 너
나는 꽃바람일래.
너는 풀꽃을 피우고
마침내 나의 손짓으로
태양이 비워둔
시린 품에 돌아와
젖은 꽃 한 송이 달래면서
어두운 그림자는 지우거라.
나는 고운 바람일래.
봄 밤
꽃들은 울먹이며 핀다
그대 잠든 벌판
쏟아지는 별처럼
꽃들은 피어서 눈물이 되고
꽃들이 떠가는 봄밤
아지랑이 꽃 한 다발 흔들리는
영롱한 눈물방울
모래알로 부서져
나의 꿈을 적신다.
저녁연기
옛 놀던 山, 뒷산에 올라보면
청솔가지 사이 초갓지붕
저녁연기는 예대로 누워있네
밭이랑 가로지른 바람은
서녘하늘에 노을을 뿌리고
칡넝쿨 새순 돋는 소리로
지금도 보리이삭은 패는데
기울고 떠나 빈 집된 옛집
풀꽃들의 손짓만 가득하구나
참으로 오랜만에 산꿩 소리는 들리지만
논두렁 뜨거운 숨소리는 들리지 않아
다만 저녁연기는 이승의 모습으로
천년을 누워 있네.
풀꾹새 울음
무지개 지우고 떠난
풀꾹새 울음소리
밤 되면 고향 먼 에움길에 깔리는데
제 마음으로 남아
어느날 바람이 된 텃밭 감나무
주저리로 달려있는 떫은 전설은
오뉴월 불볕 잘도 견딘
구름 한 조각 가슴 깊이 묻어 두고
따갑게 흘러간 시냇물
오늘도 찾지 못한 무지개빛
아픈 그림자들만
빗속에서 헤어지고
젖은 채로 지워지고
초가지붕 위 하얀 박꽃잎 하나
풀꾹새 울음으로
가슴 앓은 소리여.
그림자 곁에서
당신이 먼 길 떠나신 빈 山川에
당신의 영롱한 그림자
잠깨어 있는 나의 창가에
어리오고 있습니다
논뚝길로 山길로
당신의 그림자를 따라 갔지만
마흔이 넘어서야 당신의
발자국 소리를 들었습니다
한 번도 안겨본 기억 없는
증조할머니, 할머니
카랑한 목소리는 늘
나의 온몸을 감싸고 있습니다
이 어지러운 벌판, 죽은 나뭇가지
옹이처럼 살아가는 당신의 핏점
때로는 비 오는 날
당신의 그림자 지워지는 일 있더라도
더 넓은 환한 웃음
별빛처럼 쏟아져서
차가운 가슴에 불 지피는 이 밤
작은 그림자 하나 매달려 있습니다.
除 夕
호롱불 심지 돋궈 처마에 걸리면
가는 한 해의 먼지가
삼백 예순 여 나날
땅속 깊이 얼어붙어
잠겨진 창문 근처에서 기웃거린다
섣달 그믐날 밤
대청마루에 앉으신 어머니
지푸라기의 신음처럼 먼지를 닦아내고
버릇이듯 하얀 종이 위
바다 한 폭은 그려 보지만
바다 위로 그어진 주름살은
닦아내지 못해 사립문을 나서는데
쓰러진 기억들만 바삐 걸어가고 있다.
거기에 고향이
대숲에 노을이 깔리면
갈미봉에 걸리는 초승달은
黃江 은모래와 어루고 있을까
바람이 콩밭을 흔들고
빈 수숫대 서걱이는 텃밭에
울아버지는 지금도 서 계실까
연어가 제 영혼을 찾아서
황강에서 한가로울 때
시나브로 떠나간 白鷺들
옛 둥지는 잊지 않고 있을까
뼈를 묻은 서마지기 논배미
이 보래이 김서방!
우리들 한평생은 이 흙이재
한 짐 지게에 주름살을 챙겨 지고
억새풀 손짓하는 산길에서
더러는 알몸의 강가에서
우리들 영혼은 서로 만나
거기에 고향은 머물고 있는데-.
*黃江 : 경남 합천군을 흐르는 강
雨村에서
비가 오는 날은
우리 동네 먼지 낀 벽을 씻어 내리라
봄볕이 부끄러운 시든 풀포기에
한 웅큼의 눈물을 부으면서
언 땅 속 모질게 감춰진 얼룩들을
봇도랑물에 띄우리라
비 오는 동네에서
빗속을 서성이는
한 떼의 비정한 그을음 모두 지워진 뒤
흙냄새 향그러운 풀내음만 마시리라
아아, 맑은 영혼들만 모여 사는
비 젖은 풀밭에 누워
유년의 노래나 줍고
그리하여 다시 돋을 태양을 맞으리라.
서울허수아비
디오게네스를 찾아볼까
안개 짙은 서울에서
어린 날의 허수아비를 만날까
들판에 서서 참새 한 마리 만나지 못하고
어느 날 허수아비 된 나를 만난다
기웃거리는 골목에는
비켜서야 할 햇살도
들앉을 토관도 보이지 않고--
서울의 하늘이여
우중충한 가슴들만 무너지고
아무도 만나지 못하는 나의 영혼
오오라, 행진을 시작하는
오늘은 허수아비여라
버려진 고향 들판에서
파아란 하늘을 마시고 싶다.
母 情
합천(陜川)고을 황토길에
바람따라 이월은 오네
초하룻날 정결한 새벽
한 바구니 정성으로
개똥논 앞 실개천에
영등(靈燈)할멈 있다던가
의성김씨(義城金氏) 아무아무아무.....
소지(燒紙)올린 울엄매야
새 바가지 물 떠놓고
촛불 합장(合掌) 울엄매야
자식 걱정 손 비비고
그게 모두 내 마음이재.
비워진 약병
北邙山川을 돌아가는
요령소리 멀어지고
내장을 훑고 나온 바람 한 줄기
비워진 약병 속에서 외롭다
고속도로 서울 깃점 몇 킬로에서
나의 피돌기는 산사태를 만나고
하얀 알약 혹은 몇 cc 의 액체는
흙더미를 녹이면서 나를 다스리는 비겁함.
창 너머 北邙 어두워지고
약 한 병으로 녹아내린 햇살이
어쩐지 불투명하다
오늘은 요령소리만 들린다.
기념사진
줄지어 선
홍안들이 꿈을 버린다
액자 속에 묻어 둔
파아란 은행잎이 차가웁다
지금사 만나는 얼굴들
빛바랜 인화지만큼은
몇 친구가 고향 先塋으로 빠져 나가고
남아 있는 것은
나의 주름살
오오, 짧은 기억들이
기념으로 서서
틀 속에 갇힌 흔들이여
이 겨울에 보는 기념사진
푸석이는 은행잎들만
얼굴 위에 흩날린다.
홑꽃잎 뒤풀이(1) . 울
-나비야 청산가자
구름아 너도 가자
삭정이로 남아
서러운 사람 떠나보내고
나팔꽃 홀로 피어
제 몫의 슬픔만 듣는다
-가다가 해 저물면
꽃잎 속에 자고 가자
십오야의 다듬이 소리
바람으로 떠돌고
문설주에 거미줄 엉켜
구름 한 올 걸려 있는데
-나비는 청산가고
꽃잎도 지고 없다.
매운 바람 가슴으로 안아
얼어붙은 그림자
목이 쉰 나팔꽃들만
지워지는 낡은 기억 속에 파고든다.
홑꽃잎 뒤풀이(2) . 닻
기다림은
오래도록 끝나지 않는
서러움
그래도 기다려야 한다.
올 수 없는 발걸음 소리
개펄에 꽂힌 채
밤새도록
피를 토하는
아픈 꽃멍울
피어나기 위한 기다림은
아름다운
약속이다.
홑꽃잎 뒤풀이(3) . 꽃
咯血을 하고
붉어진 얼굴
아침 이슬로
웃음 한 모금 열고
사랑,
사랑이라 하던가
실뿌리에서 저며 오는
허허로운 진통
땅속 깊이 묻어둔 채
부끄러움
살포시 가린
눈웃음 흘러
사랑이라 하던가
이승의 매운 노래 한 자락
머금은 얼굴은
먼 설레임이어라.
홑꽃잎 뒤풀이(4) . 강
어둠 속 강물은
졸리운 낚시 불빛
몇 개와
밤을 사루고
서러움
또닥거린 잘 물결
어디론가
먼 길 떠날 채비를 하지만
남아있는 平面에서
대칭점 하나
마지막
기지개를 켠다.
홑꽃잎 뒤풀이(5) . 눈
아랫목 하얗게
어머니의 음성이 들린다
해님, 달님이의 눈물이
구만리장천을 헤메다가
어머니의 구성진 음성으로
내린다. 겨울밤
화롯불도 식어버린 아랫목
한 꾸리의 실은 감기고
물레소리 멎은 만큼
옛날 이야기의 껍질만
하얗게 쌓인다.
홑꽃잎 뒤풀이(6) . 달
새벽달은 슬펐다.
自慰를 하며 울고 있었다
五更이 지나도록
달구어 지는 謀叛들
핏빛 이슬은 내리고
열병으로 가로수 불타는
한낮의 風物들을
저주하고 있었다
마지막 SOS를 송신하는
영혼은 더욱 아팠다
日出이 아니더라도
그의 일그러진 표정
스스로 지우고 있음을
슬퍼하고 있었다.
홑꽃잎 뒤풀이(7) . 굿
서낭당 징소리 울리거든
활옷 소매에 감춘 눈물
우리는 呪術이나 외우세
짤랑짤랑 방울소리 들리면
사는 걱정 잠시 접고
어허 춤이나 추어 보세
육신 속에 숨어들어
피를 빠는 雜鬼들은
써억 물러가고
억조창생
吉한 일만 두리둥실 남으소서
오색 금줄 헝겊을 머리에 동여매고
빌고 비는 한스러움이
어찌 나만의 갈증이랴
이 세상 넘실대는
얼뜨기들 물리기 위해
징소리, 방울소리
어허 울린다.
홑꽃잎 뒤풀이(8) . 길
길은 무너지고
무너진 돌더미에 깔린
영혼들의 비린내--
길은
눈물이 흘러가는 강줄기
갈 사람은 모두 떠나고
소아마비의 멧새 한 마리
오염된 꿈을 버린다.
하늘로 솟을꺼나.
꿈틀거리는 영혼들
황량한 길목에서
천천히
빛을
잃어 가고 있었다.
홀꽃잎 뒤풀이(9) . 鳶
날 수 없는 혼백 하나
전깃줄에 매달려
구조신호를 보내고 있다
창공 녹아내린 소나기에
녹슨 전신을 헹구며
이승에도 저승에도
수신되지 않는 전문은 희미하고
외올 가느다란 꿈 풀면서
얼래에 감아둔 한 생명
감사나운 바람을 만나
활활 타오르는 아지랑이였다가
천길 벼랑을 꽂는 무지개였다가
찢어진 오장육부를 말리면서
짙고 푸른 넋
정말 어쩌다가 낙오되어
눈감은 채 떨고 있다.
홑꽃잎 뒤풀이(10) . 窓
창을 열면
피콜로의 아픔이 들리고
꽃상여 뒤로 멀어지는
하얀 손수건이 펄럭인다
연희동 산번지에서
간밤 지새운 뻐꾸기
아침 창가에 나와
더욱 섧게 울어
창을 닫으면
나와 함께 떨고 있는
비명 소리 몇 조각
빈 방을 뒤척이다가
흐려진 바다가 된다.
홑꽃잎 뒤풀이(11) . 섬
안개 속을 출발한
육지의 물살을 기다린다
흙탕물 한 점 자국으로
앉아 있는 나를 확인하고
아침 선착장 외등 실눈에
가물가물 어리는 님의 노래
파도에 띄어 보낸다
안개 속을 뒤집고 나온 여린 햇살은
물 나간 개펄에서 꽃게 잠재우고
해풍에 곱게 흔들리는
이름 모를 섬꽃 한 아름
오랜 기다림도
미쁜 한 점 자국이여.
홑꽃잎 뒤풀이(12) . 脈
아름아름
나를 버린 기억들만
숨죽인 채 걸려 있고
대숲에서 영근 영혼
저문 용마루에
달빛 길게 옷고름 풀어
은밀한 가락을 줍는다
-아리 아리 아리랑 아라리오
아리랑 고개를 어이 넘어가리
가난을 말리던 뒷마당
비 젖은 풀잎은
흔들려 저만큼 아픈데
살구나무 꽃술 하나
향기를 잃은 채
-나를 버리고 떠나간 사람은
고개를 넘지 못해 뒤돌아 보네.
홑꽃잎 뒤풀이(13) . 탑
風霜에 사그라질 듯
더부룩한 수천의 세월을
한몸에 감고 서 있는
당신의 따수운 자리에
던져진 기원의 흔적은 아픔일레라
풀풀 날고 있는 恨은
썩은 동아줄에 매달려
잠들 수 없는 이름은
차라리 흩어진 구름 조각
하얗게 떠돌다가
지푸라기 하나 잡고픈 인간들이
당신의 휘황한 그 무엇의 빛으로
젖은 마음을 말린다
풍상에 무너질 듯
이끼 끼고 깎여진 뼈마디 속에서
감추어 흐르는 당신의 문 열리고
백 여덟 번 돌아
나의 고뇌도 열리고
저 멀리 慈悲의 숨소리 달려와
사그라진 가슴들을 어루만진다.
홑꽃잎 뒤풀이(14) . 壁
1
양지와 음지를 가로 지른 철근콘크리트는 비겁함 또는 악성임. 서로들 오직 나만 존재하므로 벙어리들만 모였음. 꿈은 있지만 표현되지 못하는 한탕주의의 되풀이. 무섭게 번뜩이는 눈빛이 썩어가고 있음. 우리의 이웃은 이미 떠나고 문은 잠겨 있음.
2
거리에는 장막을 쳐놓고
다만 어둠이 마지막 웃음을 보냄.
나와 너는 보이지 않고
어질머리만 남아 있음.
나라들 사이엔 철조망을
바삐 돌려야 하는 포성이 들림.
어쩌다가 기어오른 나팔꽃 넝쿨은
남과 북이 자유로운 구름을 닮았음.
헐려져야 할 벽은
더욱 높이 쌓여지고
저 너머 멀어져가는
회오리바람 속을 기웃거리며
手話를 보내고 있음.
홑꽃잎 뒤풀이(15) . 밤
연한 잔디위에
부서져 내리는
은비늘.
물거품만 머금은 채
둥둥 떠간다.
어둠 속에
녹아내린
아아, 우리의 우울함이
한꺼번에 풀려지는
실타래.
겨울밤은
청맹과니들의 열기로
더욱 손곱은 껍질들만
까맣게 누워 있다.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