ㅁ 가상 유언장
(나의 마지막에 대한 행복한 상상)
“詩人”이라 새긴 빗돌(碑石) 하나만
김 송 배
가상 유언장이라? 약간 황당하다는 느낌이다. 그러나 ‘나의 마지막에 대한 행복한 상상’이라는 부제에서 안도감을 갖는다. 아직 마지막이라는 말을 떠올려본 바도 없고 더구나 유언을 글로 남겨서 전해야 할 위치도 아닌 것 같아서 얼떨떨하기도 했다. 아직 팔순(八旬)도 안지난 사람이 아무리 가상이라지만 유언장을 쓴다는 것은 상상 이외의 일이기도 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몇 도래가 간혹 모여서 한담(閑談)하면서 술을 마실 때면 이제 모든 것을 정리해야 한다는 말을 쉽게 찌끌이고 있으나 누구 하나 실제로 깨끗이 정돈했다는 말은 아직까지 듣지 못했다.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의 체험을 천천히 마무리하면서 그동안 축적했던 지식과 지혜를 남김없이 후진들에게 물려주고 이젠 홀가분하게 개인의 취미에 심취하면서 안분지족(安分知足)의 순리를 따르는 일을 실행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그래서 흔한 말로 그동안 흔적으로 남아 있던 사진들도 유품(遺品)으로 남길 것 몇 장만 제외하고 모두 버리고 나에게 모든 지식을 제공했던 서적들도 하나씩 정리해야 한다는 반농담으로 나누는 일이 잦아졌던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 생각해보니 실제로 한생을 마감하면서 준비해야 할 일과 사후(死後)에 자식들에게 당부해야 할 몇 가지의 일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현재 미완성인 인생 80년에서 성과로 간직한 13권의 시집 외에 산문집, 평론집 등을 전집(全集)으로 묶어서 발간하는 일이 아직도 진행중인데 이를 완성해서 각 도서관이나 동행했던 문인들과 공유하는 일이 남아있다.
이 외에는 따로 남길만한 것이 없다. 막대한 유산이나 웅대한 명예 그리고 후대에 물려줄 지적재산 등 하나도 관심과 영향력을 미칠 일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대단히 홀가분하면서도 명예롭다는 평소의 신념을 지울 수가 없다.
다만, 하나뿐인 아들에게 부탁이 있다면 너를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한 부모의 사진과 가계(家系)를 알 수 있는 족보(族譜)는 반드시 간직하면서 조상들의 위의(威儀)와 그들의 행장에서 다양한 교훈을 습득하고 승계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남겨진 서적들은 필요한 사람들에게 적절하게 분배하고 그래도 남으면 시골 도서관에 기증하여 독서하는 이들에게 편의를 제공하도록 권한다. 그것이 역경(逆境)을 극복하면서 시인의 길을 일생동안 고수한 아버지의 진실이 깃든 교훈임을 명심하게 될 것이다.
내가 이승을 영원히 하직한 후에는 조그마한 자연석에 <시인 김송배 여기 잠들다>라고 새긴 빗돌(碑石) 하나 세워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옛 시인을 떠올리게 하면 더 없는 영광이 될 것이다.
이렇게 유언장을 써놓고 보니 나에게 주어진 생명의 시간들이 얼마만큼 남아 있을까 다시 유추해보기도 한다. 어디까지나 가상이니까 실상과는 좀 다를 수도 있겠다 싶지만 과장되거나 허구가 아닌 현재의 심경, 너무나 연약했던 일생에서 그래도 “시인”이라는 이름으로 자연과 인간들의 생태를 교감하면서 나름대로의 인생관 탐구를 위해서 온갖 고난을 극복하고 열정으로 살아왔다는 사실에는 눈물겹도록 스스로 찬사를 보내고 싶다.
이승 훌쩍 떠난 영혼도 가난과 절망의 고행을 이제 훌훌 벗어버리고 영계(靈界)에서 무소불위(無所不爲)의 또 다른 혼불을 영원히 지피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