ㅁ김송배가 만난 문인들(1)
후백 황금찬(后白 黃錦燦) 시인
후백 황금찬 시인이 고희를 맞았을 때(1988년) 친근한 문인들은 ‘대기만성적 초극의 시인, 노익장’이라고 말했다. 그후 2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이 말은 지금까지도 유효하다. 아직도 전국을 누비며 문학 강연을 하거나 문학행사에서 축사를 하고 청탁받은 원고는 직접 전해주는 건장한 모습을 자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황금찬 시인을 처음 만난 것은 1983년 늦은 봄, 내가 월간『심상』신인상에 당선하고 상패를 받기 위해 찾아간 원효로 박목월 시인댁에서였다. 그는 신인상 심사위원장으로서 나에게 시상을 했다. 목월 시인의 미망인 유익순 여사와 장남 박동규 교수 그리고 많은 시인들이 참석하여 축하를 하는 자리였다.
그는 상패를 주면서 ‘좋은 시 많이 써서 훌륭한 시인이 되십시오. 정말 축하합니다.’는 격려와 함께 당시 그의 온화한 얼굴과 정겨운 말씀에서 진정한 시인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후 그는 해변시인학교 교장으로 매년 여름이면 바닷가 시의 축제를 이끌어 참가 시인들과 독자들의 환호를 받게 되고 『심상』출신 시인들은 담임을 맡아서 그를 도왔다.
황금찬 시인은 1918년, 강원도 속초에서 출생하여 33년간 강릉사범을 비롯한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51년에 최인희, 이인수, 김유진, 함혜련 시인들과 <청포도> 동인을 결성하여 동인지를 간행하면서 문학의 길로 나왔다. 1953년에『문예』에 1회 추천을 받고 다음 해에 2회 추천이 되어 작품이 조판되었으나 잡지가 폐간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2년 후에『현대문학』에서 천료를 했다.
그는 1965년 시집『현장』과 산문집『실용문작법』을 상재한 후 지금까지 35권의 시집과 23권의 산문집을 발간하고 월탄문학상, 한국기독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서울시문화상, 대한민국예술문화상, 보관훈장 등을 수상하면서 명실공히 우리 시단의 큰 별로 우뚝 서 있다.
어느 날 ‘선생님. 따님을 잃은 것과 사모님과 사별한 것과 어느 쪽이 더 슬픕니까?’하고 어줍은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수필 <아직도 못 잊는 너의 음성>에 답이 나와 있어요. 슬프기는 아내를 사별한 것보다 딸을 잃은 것이 더 슬프지요. 그렇지만 아내와 사별한 것은 더 무섭지요.’라며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대학교 졸업을 23일 앞두고 애지중지하던 딸 ‘애리’를 떠나보냈다. 그리고 딸의 죽음 때문에 얻은 병으로 아내마저 먼저 보내야 했다. 그는 절규하면서 기도했다. ‘신이여! 여기 장미꽃송이를 당신의 손으로 받아주시오.’
너의 창에 불이 꺼지고 / 밤 하늘의 별빛만 / 네 눈빛처럼 박혀 있구나 // 새벽녘 / 너의 창 앞을 지날라치면 / 언제나 애처럽게 들리던 / 너의 앓음소리 / 그 소리도 이젠 들리지 않는다 // 그 어느 땐가 네가 건강한 날을 향유하였을 때 / 그 창 앞에는 마리아 칼라스가 부르는 / 나비부인중의 어떤 개인 날이 / 조용히 들리기도 했었다 // 네가 그 창 앞에서 / 마지막 숨을 걷어갈 때 / 한 개의 유성이 / 긴 꼬리를 끌고 / 창 저쪽으로 흘러갔다 // 다 잠든 밤 / 내 홀로 네 창 앞에 서서 / 네 이름을 불러본다 / 애리야! 애리야! 애리야! 하고 / 부르는 소리만 들려올 뿐 / 대답이 없구나 // 네가 죽은 것이 아니다 / 진정 너의 창이 잠들었구나 // 네 창 앞에서 이런 생각을 해보나 / 모두 부질없구나.
그는 딸이 이 세상을 떠나고 없는 창 앞에서 애절하게 딸 ‘애리’를 불러 보았으나 ‘모두 부질없’다는 작품 <너의 창에 불이 꺼지고>를 지금도 되새기는지 모를 일이다. 또한 해방직후 소련군의 행패로 먼저 월남하여 강릉에 자리를 잡고 얼마가 지난 뒤에 해후한 사모님과의 가난한 살림살이의 고생담도 ‘여성의 설운 미소의 소유자 / 한국의 여인들은 슬프고 / 내 아내는 참혹하다’는 <아내를 위한 기도>에 담아 함께 회고하는지도 알 수 없다.
언젠가 대만에서 열린 아시아시인대회에 참석하고 그와 박태진, 성춘복 시인과 동행하여 일본 도꾜를 돌아보고 온 일이 있었다. 언제나 다정다감하게 일행을 이끌던 그는 일본에서는 말씀이 없었다. 이유는 그 지긋지긋했던 일제시대의 수탈을 생각하면 치가 떨린다는 것이 후일담이었다.
그후 그는『시마을』이라는 예쁜 시 잡지를 만들었다. 손수 원고를 받아서 편집하고 교정도 보았다. 좋은 시인들과의 대화를 위해서라고 했다. 시마을 시낭송회와 시 창작 강의도 곁들였다. 많은 시인들이 그와 교감하기 위해서 몰려 왔다. 그는 매우 흡족해 하는 모습이었다.
어느 날 낭송회 모임에서 그에게 부탁한 나의 산문집『시인, 대학로에 가다』서문을 흔쾌히 승낙했다. ‘대학로의 시인, 그가 갈구하는 조용한 노래는 과연 무엇일까. 오랫동안 예술문화행정을 담당하면서 눈여겨 간직한 그의 진정한 목소리에 귀 기울여 줄 것을 기대한다’고 쓰서 직접 서명까지 해 주었다.
그는 진정한 사랑의 시인이다. 그가 25번째 시집『오르페우스의 편지』를 발간했을 때 내가 서평을 써서 내가 편집주간을 맡고 있던『예술세계』에 게재했다. ‘김 선생, 고마워요.’ 그는 항상 김 선생이란 칭호를 붙였다. 이 <사랑의 긍정적 수용을 위한 행복한 편지쓰기>란 제목으로 내용은 독후감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는 만면에 웃음을 띠면서 앞으로 평론쪽에도 열심히 하라는 격려와 찬사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것은 내 작품을 심사하여 당선시키고 시인의 길을 열어준 선생님으로서 나의 실력을 인정해주는 것 같아서 흐뭇하기도 하였으나 더욱 정진하는 초석으로 삼아야겠다는 또 다른 소명을 가졌지만 어쩐지 면구스러운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그에게는 시인 아들이 있다. 바로『현대문학』출신의 황도제 시인이다. 황도제와는 20수년을 <응시>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인간적, 문학적 교감과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 해가 바뀌면 윤석호, 이무원, 김 석, 주원규, 채수영, 尹石山 동인들이 세배를 가곤 했는데 이젠 세월이 흘러 모두들 고희를 바라봐서인지 찾아뵙지 못하는 일이 안타깝기도 하다
요즘 어떻게 지내시냐고 근황을 물었다. 근력이 예전 같지 않다는 대답이다. 강의도 하고 젊은 시인들과 모여서 술을 마시면서 시적 담론을 즐기던 것도 뜸하다고 했다. 시도 가끔 쓰고 어느 문학지에 <황금찬의 문단 반세기>를 연재하고 있지만, 조용히 집에서 쉬는 날이 많다고 한다.
언젠가 어떤 모임에서 정치가 어떻고 사회가 어지럽다는 등 모두가 목청을 높이는데 그는 ‘그래도 아직은 이 세상을 살만해요. 시가 있고 시인들이 많이 있으니 우리는 희망이 있어요.’ 한생을 시와 함께한 노시인다운 말씀이 아른거린다.
그는 미수를 훌쩍 넘어 아흔의 춘추를 넘는 원로 대가 시인이다. 언제나 인자한 모습으로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정감과 사랑이 철철 넘쳐나는 시에서 우리들은 무엇을 배우고 어떤 것을 닮아야 할지 가슴만 벅찰 뿐이다. 그러나 그의 사랑은 영원할 것이다. 만수무강을 기원한다.
(문학공간 08.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