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을 보다 / 교정 중
카카오 톡에 온통 가을 풍경 사진이다. 너나없이 모두가 가을 타령을 한다. 시장가 사람들도 만나면 가을 이야기뿐이다. 찾아오는 손님도 단풍 이야기가 먼저다. 가을 맞는 마음은 누구나가 설레는가 보다. 오곡백과와 단풍이 같이하는 계절이니 오죽하랴. 가게 일손 바쁜척하면서 감정을 올려 본다. 아마 비내골에도 단풍이 서로서로 마주 보고 도닥거리며 누구를 기다리고 있으리. 잡목이 많이 있으니 당연히 그냥 있지는 않는다. 이리저리 예쁜 짓으로 서로 자랑하는 모습이 선하다. 텃밭 차지한 잡풀은 세월 장단에 어울려 놀다 된서리 맞지 않았을까? 아마 누렇게 퇴색되어 바닥에 누워 떠가는 구름을 보고 있을 거다. 다녀온 지가 한 달이 되었다.
무 배추는 아직도 모퉁이에서 쪼그리고 있겠다. 대인지뢰처럼 느닷없이 떨어진 밤송이에 겁먹은 모양새 일게다. 성장이 느려서 자람이 멈춰진 어린 배추 같다. 안간힘 다하는 것이 눈에 훤다. 지난번 갔을 때 들깨는 베어서 갑포에 널어 두었는데 아침 이슬에 골병들지는 않았는지 걱정이다. 심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자란 것들이다. 인간 욕심에 한 번의 망종을 기리다 홀랑 포획된 포로 신세가 되었다. 고삐 푼 망아지처럼 내버려 둔 오가피 열매는 피는 건지 열리는 건지 아주 요상하게 생겼다. 포도송이처럼 주먹 크기만 뭉치는 반은 벌써 벌어져 빈 껍데기 하얀 속살을 내놓고 배 째라 식이다. 반은 또 녹색 열매로 송골송골 달려 있다. 녹에서 검은색으로 익어가야 할 열매가 아직도 여름철을 못 벗어났다. 이런 가을 풍경은 빈 수다 같아 슬프다. 추수를 기다리는 계절이지만 추수의 의미가 무색해진다.
대붕감 진녹색 잎사귀가 갈색으로 변하면서 하나 둘 떨어진다. 그 사이로 ‘나 익어가요’라며 주먹만 한 주황색의 감이 군데군데 보인다. 햇볕 받으니 황금색이 온 밭을 환히 밝혀 준다. 봄날부터 퇴비를 듬뿍 주었다면 주렁주렁 달렸을 텐데. 수십 개뿐이지만 그래도 이게 얼마냐 마냥 좋다. 가을 익는 모습을 보면 가게의 힘든 시간도 잊었다. 또한 감 홍시는 외손주들이 좋아한다. 이 텃밭에서 첫 과일 가실 걷이니까. 그 기분이 오버랩되어 카톡 갤러리 방에서 작년 사진으로 보고 있는 중이다. 정자로 가는 길 따라 푹신하게 자리 잡은 낙엽은 구릉 같았다. 발목까지 덮이는 소리에 세월 잔상 문구를 자극하곤 했다. 자연의 시간들이 연출하는 존재물. 영상과 이야깃거리는 하나하나가 단편의 다큐다. 가을은 여기에다 가시적인 눈 호강을 더해준다. 아직 귀뜨라미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삶의 결실로 영금과 퇴색을 하고 있을 산과 들이다. 익어가는 세상을 가게에서 상상으로 읽어 본다. 올 가을은 나만의 방식으로 탐닉 중이다.
산 위에서 능선을 타고 계곡으로 내달리는 채색 잎새의 움직임이 나무의 아픔으로 만들어진 세월의 상흔이다. 역살의 기운은 자연의 순리로 돌아 또 다른 태생을 이끄는 자리로 이어진다. 봄과 가을, 여름과 겨울. 삶과 죽음, 생존경쟁, 약육강식, 돌고 도는 삶의 곳에서 만들어 진 자연 현상이다. 다만 내가 그 자리에서 없어지고 다른 이가 들어선다는 것이 슬픈 감정이지만. 가을은 이런 자연을 꾸미는 한 구간이다. 한겨울을 이겨 내야 할 겨울잠도 챙겨 두어야 한다. 나목도 짐승도 이미 수 세월을 지내오면서 적응되어있다. 자연 그냥 가는 시간을 잡고만 있다. 감정을 아는 동물들의 눈에 보이는 감상이다. 나의 가게도 또 누가 뒤를 이어 꾸려 나갈까? 가을 값어치는 못해지만 언젠가는 바뀌어지는 현실 연속이다. 시간의 순리에 동참해 숫자 채우기를 한다. 시간이 가면서 정리를 한다.
10월 말경이 지나는 시점이니 절정으로 가고 있을 것이다. 멀지도 않은 거리에서 마음으로만 달구는 나의 가을 색. 회 칼질하는 장소에서 유추되는 풍경 전개. 아름다움과 동심이 마냥 좋은데 아귀의 욕심으로 물고기 숨길 고르기 일을 한다. 허하다. 가을이 다 가기 전 산수에다 내 몸을 한 번 기대 보았으면 해본다. 칼날에 묻은 붉은색을 산 단풍이 품어줄까? 기분이 홀로 덩그렇다. 올 가을은 참 춥다. 친구가 준 단감 한 상자는 자신의 의지완 상관없이 방구석에서 나랑 마주 한다. 가을을 향한 환희로 다음 세상의 꿈으로 영글었을 텐데. 상자에 담긴 약자의 모습으로 나랑 눈치 싸움한다. 그저 세상 속의 한 존재물로 밀려진 물건이다. 그래도 누렇게 익어서 여기까지 왔으니 가을의 풍류는 잘했다 말해 주고 싶다. 밝은 빛이 나는 것 같다.
날. 지금. 선. 보이는 지점이 각기 다르다. 날 목줄이다. 지금은 아귀다. 선은 욕심이 우글거리는 지저다. 단풍이 피로 보이는 것도, 물고기의 비명도, 수족관 물방울도, 침묵의 하늘도, 한 점에서 날 지금 선으로 가을 영역 그린다. 예쁘게 차려입은 아낙이 보고 싶다. 움츠림 보다는 방긋 웃는 감처럼 환한 기분 열자. 우는 가을이라면 좋게 보내고 웃는 가을이라면 신나게 그려보자. 가을은 성숙의 계절이니까. 벼루박 달력은 숫자로만 알려 줄 뿐 재미가 없다. 그냥 벽에서 놀아라 하고 물고기 보려 간다. 휑한 가게 수족관 물고기들 유영이 한가하게 자유롭다. 공기 방울은 몽골몽골 오르다 창공을 향해 터진다. 나의 화풀이 대신하듯. 가을이 갇힌 시간도 아랑 곳 하지 않고 물방울 따라 자유롭게 유영하는 물고기가 부럽다. 가을이 오히려 물고기을 가만히 보고 있다.
24. 04. 01.
가을을 보다 / 초고
카카오 톡에 온통 가을 풍경 사진이다. 너나없이 모두가 가을 타령을 한다. 시장가 사람들도 만나면 가을 이야기뿐이다. 찾아오는 손님도 단풍 이야기가 먼저다. 가을 맞는 마음은 누구나가 설레는가 보다. 오곡백과와 단풍이 같이하는 계절이니 오죽하랴. 가게 일손 바쁜척하면서 감정을 올려 본다. 아마 비내골에도 단풍이 서로서로 마주 보고 도닥거리며 누구를 기다리고 있으리. 잡목이 많이 있으니 당연히 그냥 있지는 않는다. 이리저리 예쁜 짓으로 서로 자랑하는 모습이 선하다. 텃밭 차지한 잡풀은 세월 장단에 어울려 놀다 된서리 맞지 않았을까? 아마 누렇게 퇴색되어 바닥에 누워 떠가는 구름을 보고 있을 거다. 다녀온 지가 한 달이 되었다.
무 배추는 아직도 모퉁이에서 쪼그리고 있겠다. 대인지뢰처럼 느닷없이 떨어진 밤송이에 겁먹은 모양새 일게다. 성장이 느려서 자람이 멈춰진 어린 배추 같다. 안간힘 다하는 것이 눈에 훤다. 지난번 갔을 때 들깨는 베어서 갑포에 널어 두었는데 아침 이슬에 골병들지는 않았는지 걱정이다. 심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자란 것들이다. 인간 욕심에 한 번의 망종을 기리다 홀랑 포획된 포로 신세가 되었다. 고삐 푼 망아지처럼 내버려 둔 오가피 열매는 피는 건지 열리는 건지 아주 요상하게 생겼다. 포도송이처럼 주먹 크기만 뭉치는 반은 벌써 벌어져 빈 껍데기 하얀 속살을 내놓고 배 째라 식이다. 반은 또 녹색 열매로 송골송골 달려 있다. 녹에서 검은색으로 익어가야 할 열매가 아직도 여름철을 못 벗어났다. 이런 가을 풍경은 슬프다. 추수를 기다리는 계절이지만 추수의 의미가 무색해진다.
대붕감 진녹색 잎사귀가 갈색으로 변하면서 하나 둘 떨어진다. 그 사이로 ‘나 익어가요’라며 주먹만 한 주황색의 감이 군데군데 보인다. 햇볕 받으니 황금색이 온 밭을 환히 밝혀 준다. 봄날부터 퇴비를 듬뿍 주었다면 주렁주렁 달렸을 텐데. 수십 개뿐이지만 그래도 이게 얼마냐 마냥 좋다. 가을 익는 모습을 보면 가게의 힘든 시간도 잊었다. 또한 감 홍시는 외손주들이 좋아한다. 이 텃밭에서 첫 과일 가실 걷이니까. 그 기분이 오버랩되어 카톡 갤러리 방에서 작년 사진으로 보고 있는 중이다. 정자로 가는 길 따라 푹신하게 자리 잡은 낙엽은 구릉 같았다. 발목까지 덮이는 소리에 세월 잔상 문구를 자극하곤 했다. 자연의 시간들이 연출하는 존재물. 영상과 이야깃거리는 하나하나가 단편의 다큐다. 가을은 가시적인 눈 호강을 더해준다. 아직 귀뜨라미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삶의 결실로 영금과 퇴색을 하고 있을 산과 들이다. 익어가는 세상을 가게에서 상상으로 읽어 본다. 올 가을은 나만의 방식으로 탐닉 중이다.
산 위에서 능선을 타고 계곡으로 내달리는 채색 잎새의 움직임이 나무의 아픔으로 만들어진 세월의 상흔이다. 역살의 기운은 자연의 순리로 돌아 또 다른 태생을 이끄는 자리로 이어진다. 봄과 가을, 여름과 겨울. 삶과 죽음, 생존경쟁, 약육강식, 돌고 도는 삶의 곳이다. 다만 내가 그 자리에서 없어지고 다른 이가 들어선다는 것이 슬픈 감정이지만. 가을은 이런 자연을 꾸미는 한 구간이다. 한겨울을 이겨 내야 할 겨울잠도 챙겨 두어야 한다. 나목도 짐승도 이미 수 세월을 지내오면서 적응되었있다. 자연 그냥 가는 시간을 잡고만 있다. 나의 가게도 또 누가 뒤를 이어 꾸려 나갈까? 가을 값어치는 못해지만 언젠가는 바뀌어지는 현실. 시간의 순리에 동참하게 된다. 이 시간이 언제나 지나가면서 해결을 다해 준다.
10월 말경이 지나는 시점이니 절정으로 가고 있을 것이다. 멀지도 않은 거리에서 마음으로만 달구는 나의 가을 색. 회 칼질하는 장소에서 유추되는 풍경 전개. 아름다움과 동심이 마냥 좋은데 아귀의 욕심으로 물고기 숨길 고르기 일을 한다. 허하다. 가을이 다 가기 전 산수에 내 몸을 기대 보면. 칼날에 묻은 붉은색을 단풍이 품어줄까? 기분이 홀로 덩그렇다. 올 가을은 참 춥다. 친구가 준 단감 한 상자는 자신의 의지완 상관없이 방구석에서 나랑 마주 한다. 가을을 향한 환희로 다음 세상의 꿈으로 영글었을 텐데. 상자에 담긴 약자의 모습으로 나랑 눈치 싸움한다. 그저 세상 속의 한 존재물로 밀려진 물건으로. 그래도 누렇게 익어서 여기까지 왔으니 가을의 풍류는 잘했다 말해 주고 싶다. 밝은 빛이 나는 것 같다.
날. 지금. 선. 보이는 지점이 각기 다르다. 날 목줄이다. 지금은 아귀다. 선은 욕심이 우글거리는 지저다. 단풍이 피로 보이는 것도, 물고기의 비명도, 수족관 물방울도, 침묵의 하늘도, 한 점에서 날 지금 선으로 가을 영역 그린다. 예쁘게 차려입은 아낙이 보고 싶다. 움츠림 보다는 방긋 웃는 감처럼 환한 기분 열자. 우는 가을이라면 좋게 보내고 웃는 가을이라면 신나게 놀자. 가을은 성숙의 계절이니까. 벼루박 달력은 숫자로만 알려 줄 뿐 재미가 없다. 그냥 벽에서 놀아라 하고 물고기 보려 간다. 휑한 가게라서 수족관 물고기들이 더 자유로히 유영을 한다. 공기 방울은 몽골몽골 오르다 창공을 향해 터진다. 나의 화풀이 대신하듯. 가을날 갇힌 남은 목숨줄 시간도 아랑 곳 하지 않고 물방울 따라 자유롭게 유영하는 물고기가 부럽다. 가을이 오히려 물고기을 가만히 보고 있다.
2018. 10.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