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 포를 깔아 둔 바닥에는 군데군데 물이 고여 있다. 울 퉁 불통하니 스잔 서럽기까지 하다. 그 위에 들깨가 늘려진 채 있다. 다른 밭이랑은 잡풀들이 제멋대로 자라나서 누워 있다. 자주 들려 손 봐주지 못해서 방치수준의 밭이다. 맨 위 다랭이 밭에 있는 감나무는 감 두 개가 달려 있었는데 한 개만 남아 있다. 그것도 새 먹이로 쪼여서 너덜너덜하게 반쪽이 되어 있다. 아래 밭의 나무에는 50여 개의 누른 감이 고운 분을 바르고 웃으면서 반겨 준다. 을시 년 서러운 밭 모양이 이 감으로 인해 마음을 푸근하게 하게 해준다. 밭도 훤해진다. 경산 남천면 산전리 비내골 텃밭 풍경이다. 3일 전에 다녀왔다.
11월 말경이니 계절은 초겨울로 접어들었다. 삼 채 나물과 파옥초를 파종용으로 챙겨 두어야 한다. 고사리밭 잡풀도 베고 그 위에 낙엽 등으로 덮어 주어야 한다. 내년을 작목을 위해서다. 그 준비를 위해서 며칠마다 한 번씩 올라온다. 정말 감이 탐스럽게 달려 있다. 먼저 떠 오른 것이 외손녀들이다. 아이들에게 준다고 생각하니 신이 났다. 내년 밭갈이 준비가 되든 말든 마음은 이미 대붕 감 과실의 흥에 취해 있다.
장독에 담아 두면 겨울이면 온전한 홍시가 된다. 외손녀들이 방학 때 내려오면 맛있는 홍시 주겠다고 약속까지 했다. 익어 단 냄새가 나면 새들이 가만두지 않는다. 한 알만 쪼아 먹는 게 아니다. 모든 감을 쪼아 다 먹지도 않으면서 사용도 못 하게 피해를 당할 수가 있다. 그런 몹쓸 짓 당하기 전에 따야 한다. 가끔 한 번씩 오르는 밭 둘러만 보고 가게 일에 쫓겨서 바로 내려오곤 했다. 오늘은 옹차게 마음먹고 올라갔다. 새먹이가 되기 전에 따기 위해서다. 솔직히 외손녀랑 한 약속이 아롱거려 따고 싶은 마음이 급해졌다. 벌써 장독 안에서 홍시가 되어가는 생각에 콧노래 절로 난다.
황당하다. 가지에 누렇게 빛나며 훤하게 기분 좋게 해주던 감이 몇 개만 달려 있고 다 없어졌다. 까치밥 남겨 둔 꼴의 앙상한 슬픈 모습이다. 썰렁한 분위기에 기분이 샤 해진다. 누가 서리해갔을까? 증좌가 없으니 알 수도 없다. 밭에서 도둑맞은 적이 없었는데 생각지도 않은 일이 발생했다. 홍시에 대한 기대가 커서 허탈감이 아니라 배신감이 느껴진다. 외손녀의 눈물방울이 아른거린다. 오만가지 감정이 치댄다. 마지막 육두문자 사용하다가 몇 개라도 남아 있는 감을 다시 본다. 그저 어이없는 한숨뿐이다. 아이들에게 뭐라고 해야 하나? 밭에 있는 물건 훔쳐 가는 사람 없다고 일러두었는데 도둑맞았다고 할 수도 없고.
시흥 배곧으로 이사 간 지가 2년이 되어 간다. 멀리 있어 자주 만나지도 못하고 있다. 여자아이만 세 명이다. 영상 통화하면 그 좁은 공간에서 재롱부려 보겠다며 조잘거리는 모습은 매일 본다. 엄마가 차례로 보여준다. 유치원 다니는 큰아이 제법 언니 티를 내면서 한발 물러서는 모습 본다. 둘째는 막무가내식이다. 보고 싶은 동영상 본다며 떼쓰기 일쑤다. 전화 소리만 나면 달려드는 막내는 아직 말도 제대로 못 하면서 ‘어! 어!’소리만 낸다. 내 얼굴을 조그마한 손으로 가리키다가 전화기를 빼앗아 귀에 댄단다. 그래서 영상 얼굴이 사라지고 검은 화면에 ‘아아’하는 소리만 들려왔구나. 며칠 전부터 가지에 달린 감이 이런 아이들의 얼굴로 겹치곤 했다. 때깔 마저좋아서 마음이 부자였다. 영상통화 하다가 갑자기 사라지는 막내 아이 얼굴처럼 너무나 허해졌다. 보이지 않는 마음의 삭풍이 이런 맛이구나.
채소 말고는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건 이 감뿐이었다. 또 홍시를 잘 먹는다. 숟갈로 발려서 주면 홀짝홀짝 받아먹는 모습이 너무 앙증스럽다. 아이 셋이 나란히 앉아서 감 바르는 모습을 바라보는 그 모습이 너무 아련하게 그려진다. 제비집에서 어미가 물어다 준 먹이를 달라고 노란 입을 벌리는 새끼 제비가 연상되어 웃기도 했다. 이런 모습을 보기 위해 챙겨 두려 한 것이다. 감이야 어찌 이 감뿐일까 만은 내가 키워서 줄 수 있는 유일한 먹거리이었다. 너무 아깝고 애통하다. 아깝지만 이제 포기하고 내년에 꼭 챙겨 주면 돼 지할 수밖에 없다.
가져간 사람이 그래도 얄밉다. 몰랐겠지. 할비의 속마음인 이런 사정을 어찌 알 수 있었겠나. 알았다면 어떻게 했을까? 당연히 가져가지 않았겠지. 언감생심이었을 거다. 주먹보다 더 큰 누른 감이 탐스럽게 주렁주렁 달려 있다. 주인도 없다. 밭떼기 보니 방치수준이다. 따 가도 되겠다는 욕심이 생겼을 거다. 방치해 둔 나도 잘한 게 없다. 일용하는 텃밭처럼 잘 일구어 두었더라면 누가 이런 욕심을 가질 수 있었겠나. 혹, 그 양반도 자기 손 주에게 주려고 가져가지 않았을까? 당신의 손 주에게 꼭 챙겨 주기를 바라본다. 외손녀에 대한 바람을 이렇게라도 달래보고 보고 싶다. 또 내년에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관리 잘하자 다짐도 해본다. 가게 일로 쉽지는 않겠지만 시간을 만들어 보자. 경작하는 밭 모양새를 갖추어 외손주 먹거리를 꼭 챙겨 주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