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과 한 알 / 출품작
컴퓨터가 있는 탁자 옆에 모과 한 알이 있다. 어느 날 조용히 여기로 왔다. 노랗게 익어가는 모습과 향긋한 내음이 우울을 안고 있는 나를 보 담아 주곤 한다. 코로 들어오는 내음이 정말 정겹고 좋다. 붓을 들고 켈리그라피 시서화 휘 갈리면서 신이 났다. 달콤하면서 시큼한 맛으로 기분을 아주 좋게 만들어 주는 멋쟁이다. 어려운 가게 일상을 잊게 하는 친구로 마냥 좋았다. 가끔 잔술에 취한 술 주사 버릇도 그 언제부터 없어졌다. 여기 온지 한 달이 지난 것 같다.
어제 모임이 있었다. 횟집 하는 내 가게에서 열 한 명의 회원이 참석하여 식사하며 담소를 나누었다. 인맥회다. 중학교 동창들로 대구시에 거주 또는 인접 지역에 사는 친구들로 수십 년 동안 매달 모임을 한다. 어릴 적 친구들이니 한 잔술에 떠들썩하고 가끔 육자배기 언성도 있다. 잘난 이 못난 이 두렁두렁 인생살이 이야기를 하면서 스무고개 이상 넘어온 이들이다. 매일 수 통씩 모임 자제와 마스크 착용, 어느 지역에 확정자 발생이라는 코로나 경고 문자 소리가 수시로 울리는 시기다. 서른 명이 넘는 회원에서 열한 명이 참석했다. 하 수상 시절의 분위기지만 맛나게 식사를 한다.
모과는 못난이로 못난 거로 비유되곤 한다. 하지만 냄새는 죽이는 맛이다. 오늘 모임에서 열하나 얼굴. 얼굴들이 다 내게는 모과로 보인다. 잘남 못남을 떠나 모과 내음이 나기 때문이다. 욱하게 가슴을 감아올렸다. 일 년 동안 모임 한번 참석하지 못했다. 가게 한답시고. 이른 나를 찾아온 친구들이다. 즐겁게 신나게 웃고 먹고 즐겼다. 횟집 가게를 하는 나를 모임이라는 인연으로 찾아온 친구들. 반갑고 정말 고맙고…. 내가 모과다. 가게 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모임 등한시 한. 못난이다.
세월이 누가 유구라고 했는가. 가는 걸 막지 못하니. 누가 모과는 못 난다 했는가? 합리화다. 세상 삭이지 못해 못난 인생 속풀이 용으로 활용함이다. 허울이 자신 탓임을 감지 못하고 변명하려는 심보다. 참석하지 못한 이들이 얄밉게 보이는 순간 있었다. 참석하지 않으면서 오지 않은 이를 탓했던. 하 수상 또 문자 소리가 울려서 어물쩍 넘긴다. 내가 모과인지를 몰랐다. 같이 흰머리이고 주름살 달고 있는 웃는 친구들이 나를 본다. 칼잡이 손이 신기하다. 작가인 것이 희안하다. 정말 모과로 보였을까? 향기 나는 모과와의 연계가 가능할까?
밤 10시경이다. 식탁 위 그릇 등 집기들을 정리하고 2층 방으로 왔다. 취기에 잠시 누었는데 눈 뜨인 시간이 새벽 두 시다. 모과가 눈에 들어온다. 연녹색이 조금 남아있는 부분이 보였다. 몸통 대부분 어느 사이에 갈색으로 변했다.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향기를 주던 네가 왜 이래? 우울 씻겨 주든 네가 왜 이래? 슬퍼진다. 속이 뭉개진 친구가 되어 있다. 컴퓨터를 켠다. 아직 취기의 손가락 독수리 타법으로 모과를 담는다. 즐거움만 쫓는 날 물끄러미 보는 것 같다. 맹 난자님의 수필집 모과 한 알에서 ‘고행 승의 열반을 보는 듯했다’는 마지막 문구가 나를 쪼인다. 노란색에서 갈색으로 또 검은색으로 변해가는 동안 나는 정말 무심했다. 자신 버리면서까지 방을 지킨다. 조금이라도 남은 향기를 더 주기 위해서. 춥고 외로운 방 혼자 그 거룩한 헌신의 성정으로 있었다. 이제 서야 보였다.
모과가 내게 오기 전에 나무에 그냥 달려 있었다면 세상 향한 천기를 간직한 체 세상 유하게 보고 있었으리. 모과를 들었다. 꼭지 부분에서 허연 기미가 인다. 곰팡이 자국이다. 거무스레한 색깔이 몸으로 번지면서 끄트머리에 붓꽃 모양새가 자리한다. 그림으로 익살까지 만들려 하는가. 그 몸으로 웃음 주려 함인가. 세상을 향한 아픔의 치유라고 하려는가 보다. 아직 연 녹 빛이 조금 남아있는 부분을 본다. 생의 연. 마무리가 언제일까? 삶은 오기도 하고 가기도 하는 것이다 일러 준다. 하지만 인간 욕심을 어찌 쉬 놓을 수 있으리.
어렵고 힘들다. 먹거리에 매달림이 슬프다. 나를 보는 가족이 아프다. 힘들고 외롭다. 사슬에 묶인 것 같은 일상이 어지럽다. 모과는 나 대신 그렇게 멍이 들었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균에 의해 삭여 가는.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시간은 가니. 생사의 시간 알았을까? 지금의 모습이 자연 순리의 모습? 변화하는 수행자? 세월의 패자? 모르겠다. 달콤새콤한 향기를 준 건 분명하다. 퇴색되는 모습을 헤아리지 못하겠다. 내게는 아직도 시간이 남아있음으로 미화해 본다.
맹 난자님은 또 이렇게 말하신다. ‘그때 등신불이 떠 올랐다. 젓 줄이 끊긴 아이처럼 나무에서 박리된 체 제 모습을 감추느라고 힘들었을 모과의 고행 정진이 짚어졌다.’ 나는 고행도 수행자도 못 된다. 새벽 두 시에 본 모과에서 어제의 친구들이 생각났다. 그리고 변한 모과를 보았다. 모과에 때아닌 내가 왜 스크랩된 건지 모르겠다. 나는 버리지 않을려 한다. 모나지 못한 성질머리 마음이 약해서다. 생의 기운 다 한 검게 변한 덩어리로 그냥 둘 것이다. 나를 위해서 향기를 아낌없이 준 이를 어찌 버리랴.
2021년 경산문학 37호 출품작
2020. 11. 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