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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뉴스에 예전에 기고했던 글들을 몇개 올립니다...
매초성! 당을 내쫒고 통일을 이룩하다
수세기에 걸친 삼국간의 전쟁은 중국세력이 가담하는 국제전의 양상을 띠며 고구려와 백제의 멸망과 신라와 당의 연합군의 승리로 삼국시대는 막을 내렸다. 그러나 당은 고구려와 백제땅을 차지하고 급기야는 신라마저 지배하려는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에 신라는 끝임 없는 저항으로 결국에는 당을 몰아내고 한반도 최초의 독자적 주인이 된다.
이 통일로 인해 신라는 한반도 최초의 지배자로 군림했지만 역사적으로 만주와 요동은 더 이상 한민족의 역사에서 중심이 되지 못하고 주변으로 물러나야 했다. 따라서 신라의 통일은 반쪽 통일로 기억할 수밖에 없는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신라의 통일 이후 고구려계 유이민들이 세운 발해가 잠시 만주를 차지하고 신라와 대립하는 남북국의 형세를 이뤘으나 발해의 역사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고 발해의 멸망 이후 고려가 이를 계승하기는 했어도 영토적인 계승을 하지 못하는 비참함 속에서 한민족의 역사는 한반도로 국한해야 했다.
그러나 신라의 통일이 비록 반쪽이기는 했으나 한민족에 있어서 최초의 통일이었고 삼한으로 나누어진 나라가 하나로 됐다는 점에서는 큰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외세의 개입이라고 하지만 외세를 축출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모습은 외세에 전적으로 의존해서 나라를 이끌어가는 조선이나 최근의 우리 모습과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인다는 점에서 신라의 통일을 다시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나당연합과 신라의 통일전쟁
수나라에 이어 중국을 통일한 당나라는 건국 초기에 고구려와 국교회복을 위해서 도교사를 파견하여 ‘노자’를 강론하는 등 고구려의 환심을 사며 수나라와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붙잡힌 포로의 교환을 요구하였다. 고구려 또한 이에 화답하여 포로를 송환하는 등 당나라와 고구려와의 관계는 별다른 이슈가 없는 듯 했다.
그러나 고구려 영류왕 24년인 641년 당나라 사신인 진대덕은 고구려의 강산 등을 다니며 군사적 지형물을 파악하려 했던 일이 알려지고, 고구려는 이에 당나라가 고구려를 침입하려한다는 구실로 요하유역에 천리장성을 쌓으면서 당과의 사이가 벌어지게 된다. 이어 고구려는 대당 강경파인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죽이고 권력을 잡자 당에서는 이를 구실로 고구려에 대한 침입을 준비하게 된다. 그리고 때마침 신라는 당과 동맹을 청하게 되고 이를 기화로 당태종은 고구려의 항전태세를 알아보게 하였다.
당시 신라는 백제와의 동맹이 깨지고, 백제가 고구려와 동맹관계를 설정함으로 인해 양방면에서 들어오는 협공을 받자 국가적으로 매우 위중한 위기에 놓여있었다. 당시 선덕여왕의 밀사로 고구려로 들어간 김춘추는 고구려와의 동맹을 맺으려 하였으나, 신라로 인해 국경도 접하지 않은 백제가 고구려의 적이 될 수 없다는 이유로 동맹을 거절하게 된다. 이에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협공으로 고립되게 되고 이에 대한 대책으로 중국의 당나라에 구원을 요청한 것이다.
이에 응답한 당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하기로 결심하고 신라와 협공으로 고구려를 공격하기로 한 것이 바로 644년의 고구려와 당나라간의 전쟁이었다. 이로써 신라는 고립무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이후 신라는 더욱 적극적으로 대당 외교를 강화하기 시작하였다.
백제 무왕에 이어 등극한 의자왕은 642년 백제 내부의 귀족층을 정비하면서 백제의 귀족간 분쟁을 정리하였다. 이는 의자왕의 왕권강화책의 일환으로 커진 귀족세력을 견제하면서 내부 단속을 강화한 것이다. 의자왕의 개혁은 일시적으로 성공을 거두면서 신라의 일부 영토를 백제로 편입하는 등의 성과를 거두게 된다. 그러나 뿌리 깊은 백제 귀족의 분열과 귀족들의 왕권 견제를 끝까지 버티지 못한 의자왕은 집권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점차 사치한 생활을 통해 왕권의 위엄을 갖추는 것에 위안을 삼기 시작한다. 이로 인하여 충신들이 귀향가고 투옥하는 일이 발생하기 시작하면서 백제 내부는 다시 혼란에 접어들게 된다.
이러한 백제의 내분을 눈치 챈 신라는 660년 당나라와 함께 백제를 공격하기로 결정한다. 신라는 대장군 김유신을 비롯한 5만의 병력이었고, 당나라는 소정방을 필두로 한 13만의 대군이었다. 신라의 진출로는 탄현을 넘어 백제로 나아갔고, 당나라는 산둥반도를 출발해 지금의 금강인 백강으로 들어왔다. 다급해진 의자왕은 귀향 간 흥수에게 의견을 물었고, 흥수는 탄현과 백강을 막으라는 얘기를 하였다. 그러나 이미 신라군이 탄현을 넘어 황산으로 들어왔고, 당은 백강으로 들어와 더 이상 손쓸 여유가 없어졌다. 결국 계백의 결사대가 끝까지 저항했지만 신라와 당의 군대를 막을 수 없었고, 신라와 당은 사비성으로 진군하였다. 의자왕은 태자와 함께 사비성을 버리고 웅진성으로 도망을 가고 왕자 태가 왕이 되어 항전하였으나 성이 함락되면서 의자왕이 돌아와 항복함으로 인해 백제는 건국 678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문무왕 최초의 통일국가를 이룩하다
나당연합군은 백제를 점령한 뒤 곧바로 고구려 원정길에 오른다. 661년 김유신의 신라군과 소정방 등의 당나라군대는 남북으로 고구려를 협공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신라군은 백제부흥운동으로 인해 발이 묶이고 당 군대만이 평양성을 공격하게 된다. 7개월에 걸친 싸움을 하였으나 고구려군의 막강한 저항은 당나라를 고구려에서 후퇴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고구려는 이 싸움으로 인해 국력이 소멸되기 시작하였다. 요동의 여러 성들이 싸움으로 인해 많이 파괴되었으며 권력 내부에서는 대막리지 연개소문의 죽음으로 인해 내분이 시작되었다.
연개소문에 이어 대막리지에 오른 장남 남생이 지방순행길에 오르자 내부에서 연개소문의 다른 두 아들에게 남생이 남산과 남건을 죽일 것이라는 소문을 내어 형제간에 모함으로 권력내부가 분열되게 만들었다. 결국 남생은 평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동생인 남건이 대막리지가 되어 고구려 내분은 끝을 모르고 내전으로 나아가게 된다. 남건의 군대가 남생을 공격하고 남생은 국내성으로 들어가 전열을 정비하면서 고구려를 공격한 당나라에 구원군을 요청하기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남생은 남건의 공격에 버티지 못하고 결국은 적국인 당나라에 망명을 하게 되고 남생을 도왔던 연개소문의 동생인 연정토 역시 신라에 투항하게 된다.
나당 연합군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다시 고구려 원정길에 오른다. 668년인 문무왕 8년 김인문이 거느린 신라군과 이세적이 거느린 당군은 남북으로 고구려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문무왕은 이 때 평양으로 가는 길목인 한성주(지금의 황해도 재령 지방)까지 나와 신라군을 독려하였다. 신라군과 당나라의 협공을 받은 고구려는 내분으로 인해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나당연합군의 공격 한 달 만에 평양성이 함락되고 보장왕이 항복하여 건국 705년 만에 멸망하고 만다.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였지만 700년을 이끌어온 두 나라는 신라와 당나라에 그대로 항복하고 나라를 빼앗긴 것은 아니었다. 두 나라 모두 신라와 당나라에 대항하여 각자 부흥운동을 꽤하기 시작하였다. 먼저 멸망한 백제는 이후 4년여에 걸친 부흥운동을 시작하였다. 신라와 함께 백제를 자국의 영토로 포함시킨 당나라는 백제 전역에 5도독부를 설치하여 각각 그 지방의 세력가들에게 백제를 다스리게 하면서, 유인원과 왕문도의 군대를 백제의 사비성과 웅진성에 각각 주둔시켜 5도독부를 감독하게 하였다. 그리고 소정방 군대의 본대는 김유신의 신라군과 함께 백제지역에서 철군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들의 철군과 함께 함께 백제에서는 부흥군이 곧바로 일어나게 되어 당나라의 5도독부는 실시도 못하고 나당연합군과 백제부흥군과의 전쟁으로 돌입하게 된다.
백제부흥군은 먼저 왕족이었던 복신과 스님이었던 도침이 현재의 충청남도 한산인 주류성을 기반으로 부흥운동을 일으킨다. 이어서 백제의 장수인 흑치상지는 지금의 충청남도 대흥인 임존성을 근거로 부흥운동을 이끌게 된다. 이 두 부흥군의 발기는 백제 전역에서 이에 호응하는 200여 성이 함께 부흥운동에 동참하게 된다. 복신과 도침은 일본으로 건너간 왕자 풍을 다시 백제로 모시고 와 왕위를 계승하게 하고 당나라의 주둔지인 사비성과 웅진성을 공격하게 된다. 당나라가 부흥군의 공격으로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자 신라군은 당군을 지원하기 시작하였고 이로 인해 당 주둔군은 위험한 상황은 모면하게 된다. 그러나 부흥군은 고구려와 왜국의 지원 하에 지속적인 성장을 하게 되자 당나라 역시 본국에서 지원군을 파견하면서 양측의 공방전은 더욱 치열하게 전개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부흥군 내부에서 일어난 내분으로 인해 복심이 도침을 죽이고 왕자 풍이 복심을 죽이게 되자 본국의 지원을 받은 당군은 주류성을 함락하고 백제 부흥운동은 4년 만에 끝나게 되고 만다.
평양성 함락 이후 고구려 역시 전국 각지에서 부흥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검모잠이 궁모성을 근거로 고구려 잔존 세력을 규합하고 왕자 안승을 왕으로 추대하고 당군과 싸우면서 신라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당군의 세력을 꺾지 못한 안승은 부흥운동 1년 만에 신라에 투항하게 된다. 신라는 안승의 투항을 받아들여 안승을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인 금마저에 정착시키고 보덕국왕에 책봉하여 고구려 유민을 다스리게 하였다.
안승이 남하한 뒤에도 고구려 유민들은 고구려 전 지역에서 일어나 당군을 공격하였다. 안시성이 671년까지 항전하였으며, 백빙산을 근거로 한 유민들이 신라의 지원을 받으며 672년까지 항전하였다. 또한 673년에는 칠중성에서 당나라의 이근행 군대와 항전을 하게 된다. 이러한 고구려 부흥운동은 왕조의 부흥까지 이뤄내지 못하고 흩어졌다. 그러나 고구려의 부흥운동은 평양에 당나라가 설치한 안동도독부를 요동의 신성으로 옮겨가게 하였고, 이후 신라와 당나라간의 전쟁에서 당나라 세력을 한반도에서 축출하는데 큰 도움을 주게 된다. 또한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를 건국하는데도 일부 기여를 하게 된다.
당의 야심과 삼국민의 당 축출전쟁
당은 멸망한 백제에 그들의 신민통치기구인 5도독부를 일방적으로 설치했다가 다시 웅진도독부와 7주로 개편하였다. 이어 663년에는 신라를 일방적으로 계림도독부로 칭하고 문무왕을 계림도독으로 임명하게 된다.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에도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여 백제와 신라의 도독부를 분리지배하려는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다.
신라가 이러한 당의 야심을 알게 된 것은 이미 소정방의 백제공격 때부터였다. 그러나 당시 신라는 백제 부흥군과 그와 연결된 고구려군에 대한 전쟁 준비로 인해 당나라의 군사력에 의존해야 하는 처지에서 당을 적으로 만들 수는 없는 신세였다. 당시 당나라는 소정방에게 백제에 이어 신라마저 멸망시키라는 밀명을 내렸으나 신라의 힘을 쉽게 제압할 수 없었던 당군은 그대로 회군하였다. 신라는 당의 계획을 간파하고 백제부흥운동을 진압하면서도 당나라 군대의 백제 증파를 최대한 억제시키려고 노력하였으며, 고구려 원정에는 당나라에 소극적으로 응하였다. 그리고 이후 일어난 고구려 부흥운동에는 오히려 당이 아닌 고구려 부흥군을 지원해 당군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백제지역에 설치된 당의 식민통치기구는 백제 부흥군의 저항으로 인해 큰 효과를 보진 못하였다. 이에 당은 백제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삼아 백제 유민들을 회유하여 신라에 대립시키고자 하였다. 또한 백제 부흥군의 항복을 계기로 백제와 신라와의 동맹을 강행시켜 신라군이 백제지역에서 완전 철군하도록 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이에 신라는 당과의 일전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당과의 일전은 고구려와의 대치상황이라는 정치적 이유로 고구려 정복 이후로 연기하고 당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계속해야 했다.
당에 대한 신라의 공격은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에 점차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고구려 멸망 후 당은 고구려에 대해 안동도호부를 설치하는 등 백제 멸망 이후 정책과 똑같은 식민화 정책을 진행시켰다. 이에 신라는 먼저 남부의 백제를 점령하고 북으로는 고구려 유민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따라서 신라는 고구려가 망명정부를 수립하자 이를 승인하고 뒤에서 고구려의 안승을 후원하기 시작했다.
670년부터 신라는 당군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기 시작한다. 또한 백제 지역의 웅진도독부와 화친을 맺는 척하면서 그곳을 공격하여 백제 지역 82개성을 되찾게 된다. 이러한 신라의 공격으로 백제 지역에 대한 신라의 영유권을 확보한 시기는 백제가 멸망 한 뒤 12년이 지난 671년에 백제 지역에 소부리주(지금의 부여)를 설치함으로 인해 완성되었다. 이후 신라는 고구려 부흥군을 적극적으로 도우면서 당 축출에 대한 고삐를 더욱 당기기 시작했다. 672년과 673년에 한산주에 주장성과 서형산성을 쌓아 당에 대한 대비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당은 당에 대해 끝까지 적대적이었던 문무왕을 인정하지 않고 그의 동생인 김인문을 신라왕으로 봉하여 신라 내부 분열을 확대시키기 시작했다. 그러나 신라는 당이 파견한 유인궤의 군대를 당으로 쫒아내는 성과를 거두며 당에 대한 전쟁을 수립하였다. 이 과정에서 백제의 유민과 고구려의 유민은 신라군과 함께 통일신라군을 형성하여 당에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이로써 삼국의 군대가 단일한 지휘체계 속에서 하나의 군대로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매초성! 나당전쟁을 승리로 이끌다
당시 당나라는 신라의 북진에 맞서 중국인으로 구성된 한병을 거느린 고간과 말갈병을 거느린 이근행을 한반도로 보내 평양과 황해도 방면에서 북상하는 신라군을 저지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임진강 이북에서 격돌하던 신라와 당나라 양국의 전투는 675년에 접어들면서 점차 국제전 양상으로 번져나가게 되었다.
당나라는 이근행을 안동진무대사로 임명하고 20만 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신라로 남하하였다. 반면 설인귀는 신라인이었던 숙위학생 김풍훈을 길 안내자로 삼아 신라로 침입하였다. 신라의 장군 문훈은 이에 대적하여 1,014명을 죽이고 병선 40여척을 빼앗고 말 1천 필을 얻는 대승을 전해왔다. 이로 인해 당군은 칠중성으로 후퇴해야만 했다. 이에 신라는 남하하는 당나라군대가 주둔하던 매초성 일대에서 신라와 당나라의 명운을 건 최대의 전쟁을 벌이기 시작한다.
이 매초성전투에서 신라는 고구려 유민들과 함께 당나라를 공격하여 많은 수의 무기와 함께 말 3만 필 이상을 획득하는 대승을 거두며 당나라를 패퇴시켰다. 이 매초성 전투를 계기로 신라와 당나라의 전쟁을 신라 쪽으로 기울게 하였다. 이후 당나라는 말갈병과 함께 칠중성을 공략하려 하였으나 다시 패퇴하고 북으로 퇴각하고 신라군은 계속적인 북상을 감행하였다.
당나라는 이에 최후의 방법으로 소부리주의 기벌포로 공격을 감행하여 왔으나 676년 기벌포에서 패하면서 나당 전쟁이 끝나게 된다. 이로 인해 당나라는 웅진도독부를 건안성으로 옮기고 안동도호부를 요동으로 옮겨야하는 치욕을 격어야 했다. 반면 신라는 국경을 임진강에서 함경남도 덕원을 연결하는 영토를 회복하게 된다. 이후 735년부터는 영토를 대동강까지 확대하게 되었다.
신라가 한반도의 주인으로 등장하게 된 계기를 가져온 매초성은 아직 그 위치가 확실하게 알려지고 있지 않다. 일반적으로 매초성을 얘기하는 곳은 경기도 양주의 대모산성을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신라의 매초성을 연천의 대전리 산성으로 얘기하는 견해도 많이 들어서고 있다.
삼국통일이 가지는 의미
신라는 675년 매초성 전투 이후 676년 기벌포에서 당군을 격퇴하고 백제땅과 고구려 이남지방을 회복하는 통일신라를 만들었다. 신라의 삼한통합은 역사적으로 최초의 한반도 단일 국가라는 의미를 가진다. 물론 이러한 의견에 발해라는 또 다른 국가의 성립으로 한반도 최초라는 의미를 퇴색시키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발해의 건국은 698년의 일이기에 기벌포 승리 이후 22년간의 시기는 한반도에 신라 이외에 어떠한 국가도 형성하지 못한 시기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신라의 통일은 이전의 신라와 구분하여 통일신라로 불리기에 무리가 없다. 다만 698년 발해의 건국은 한반도에 또 다른 두 개의 국가가 상존하게 하였기에 이 시기를 남북국 시대로 불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신라로 한정하여 구분한다면 분명히 신라는 이전 신라와 통일신라로 나눌 수 있다.
또한 일반적으로 만주를 잃은 통일의 의미가 반쪽으로 귀결된다는 인식이 많다. 그러나 신라의 입장에서 만주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춘추는 당태종과의 밀약에서 그들의 통일된 영토의 수립을 패강 이남으로 한정짓고 있었다. 즉 신라의 통일은 한반도 내에서의 통일이라는 신라인의 세계관을 보여준 통일이었다. 따라서 신라의 통일은 삼한을 하나로 만드는 것이지 영토 수복을 중점에 두지 않았기에 신라의 통일에 불완전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통일을 부인하기 어렵다.
신라의 입장에서 분명 고구려의 고토를 회복하지 못하고 발해의 건국으로 한반도가 남북국으로 나눠지는 고초를 겪었지만 신라의 입장에서는 분명한 삼한일통이었다. 신라의 입장만이 아닌 민족적인 입장에서도 신라의 통일은 삼국의 문화가 하나로 어우러지는 계기를 갖게 하였다. 그리고 민중들 사이에서 당과의 전쟁은 고구려, 백제, 신라가 하나의 민족이라는 단일의식을 싹트게 하는 기회를 가져온 것이었다.
삼국은 문자, 언어, 풍습, 의복 등에서 매우 유사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종교 역시 불교라는 공통의 종교를 영유하고 있었고, 유학은 국가 정치의 수단으로 작용하였다. 또한 정치나 군사적으로도 통치수단이 매우 흡사하였다. 그러나 문화적으로는 지역적 편차로 인해 서로가 약간은 상이한 문화적 차이를 가지고 있었다. 통일은 이러한 문화적 차이를 계승 발전시키면서 새로운 문화적 성장을 가져오는데 기폭제 역할을 하였다.
고구려의 거문고는 신라에 전해져 가야에서 전해진 가야금과 함께 신라 음악을 더욱 발전시켰고, 백제의 불탑양식 가람양식도 신라에 계승되어 신라 불교문화를 더욱 세련되게 발전시켰다. 신라의 고승들 또한 대부분 고구려계로 사상계와 학계에서 백제와 고구려계 유민들이 신라 사회에 활발하게 참여하였음을 보여주는 일례라 하겠다. 이로 인해 통일신라는 이후 한반도 민족문화의 근간을 이루며 발전할 수 있었다.
대당 전쟁에서 초기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들이 당나라에 대해 저항한 것은 신라와의 동질성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러나 그들은 대당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서로에 대한 민족성을 확인하는 과정으로 나아갔을 것이라고 추론하기에는 어려움이 없다. 초기 대당 적대 의식은 나라를 빼앗긴 망국인으로 느끼는 설움이 컸을 것이다. 또한 신라의 대당 의식도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과의 민족의식보다는 신라의 위태로움이 컸을 것이다. 그러나 삼국이 공통의 과제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민족의식은 하나로 자리 잡았을 가능성이 크다.
언어와 의복, 풍습, 정치 등에서 유사성을 가지고 있던 삼국이 그들과 다른 당나라의 지배방식에서 가지는 박탈감은 이들 삼국의 민중이 느끼는 당나라와의 이질감으로 다가 왔고 그들의 모멸감이 커졌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질적인 당나라와 싸움을 통해서 서로간의 동질감을 회복할 수 있는 계기를 가져왔을 것이고, 이후 신라가 하나의 국가로 다스리게 되자 이들 민중들의 공동운명체 의식은 당대 신라로 고착되어 갔다. 따라서 민족의식은 신라의 통일로 싹텄다기보다는 이후 대당 전쟁 과정에서 싹터 이후 한반도 민중의 의식 속에 단일민족의식으로 커왔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