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애창곡 ‘눈물젖은 두만강’과 박헌영의 사연
내가 어려서부터 가장 많이 들었던 노래 중 하나가 ‘눈물젖은 두만강’이었다. 80년대 무슨 특집만 하면 나오는 가수 중 한명은 김정구였고 그의 대표곡 눈물젖은 두만강은 항상 TV에서 흘러나왔다. 대한민국 국민들의 애창곡인 눈물젖은 두만강은, 분단과 통일이라는 상반되지만 하나가 될 수밖에 없는 대한민국 땅에 태어난 사람이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그 가사 하나하나가 아리랑만큼이나 몸으로 느껴지는 곡이다.
90년대 이후 이 곡은 김정구의 음성보다는 강산에의 ‘라구요’의 첫소절로 젊은 사람들에게 익숙한 곡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렇게 남녀노소를 망라하고 누구나 부르던 곡을 2000년대 다시 듣게 된 장소는 평양이었다.
북한에서 만든 대집단체조극인 ‘아리랑’의 첫 부분에 웅장한 테너의 목소리로 눈물젖은 두만강이 흘러나왔다. 북에서도 이 눈물젖은 두만강은 민족의 한을 실은 노래로 널리 애창되고 있는 곡이었다.
그러나 이 노래가 남북에서 모두 버림받은 박헌영에 대한 송가였다는 아이러니한 일화가 있음을 아는 이는 드물다.
박헌영은 일제 강점기 조선공산당을 창건하고 공산당을 이끈 최대 이론가이자 전략가로 반제운동의 지도자로 활동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언제나 일본 경찰에게 감시 대상이었고 반대로 조선의 민중들에게는 신화적 존재로 추앙받았다. 그러나 1945년 해방은 그 시대를 살았던 모든 이들에게 선택을 강요하였다. 해방과 동시에 남북은 둘로 나뉠 수밖에 없었고 서로 다른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를 채택한 남북은 서로에게 적대적일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공산주의자였던 박헌영은 남한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인물이 되었다. 그리고 남한에서 박헌영의 이름은 역사책에조차 거론할 수 없을 정도의 극렬 공산주의자로 몰렸다.
북에서 박헌영은 6.25전쟁이라는 한반도의 비극 속에서 사라져버렸다. 전쟁 이전 박헌영은 남로당의 총책이었지만 휴전이 되면서 그의 남로당 조직은 대부분 파괴되었고 북한 노동당에 흡수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조선 공산주의운동의 주류를 차지했던 박헌영 중심의 남로당은 전쟁 패전의 주역이 되었고, 그는 미국의 고용간첩이라는 죄목으로 1955년 북한에서 처형되었다. 이후 박헌영은 북한에서도 인정받지 못한 영원한 스파이로 버림받은 것이다.
조선의 레닌이라 불리며 조선 공산주의 운동의 중심이었던 박헌영은 남북분단이라는 현실 속에서 역사적 평가나 이름 석자 불리는 것조차 거부당했지만 일제시대까지 박헌영은 조선 민중들에게 언제나 빅뉴스 인물 중 한명이었다.
1928년 투옥 중 병보석으로 풀려난 박헌영은 만삭의 아내를 데리고 두만강을 건너 소련의 블라디보스토크로 탈출을 감행하여 성공한다. 이 뉴스는 당시 조선에서 큰 사건로 조선 민중들 사이에게 회자되었다.
그 무렵 영화 촬영차 두만강변에 와 있던 김정구의 형 김용환이 박헌영의 소식을 듣고 감회에 젖어 만든 가사가 눈물젖은 두만강이었다고 한다. 이 곡에 나오는 그리운 내 님은 다름 아닌 박헌영이었던 것이다.
또 다른 기록에는 이시우라는 작곡가가 만주 순회 공연 도중 두만강 유역의 한 여관에서 흘러나오는 여인의 울음소리를 듣고, 독립군이었던 그녀의 남편 이야기에 곡을 만들었다는 설도 있다.
이런 기구한 사연을 가지고 있는 이 곡은 남한에서도 기구한 사연을 가지고 있다. 작곡가인 이시우는 월북 작곡가라는 이유로 1987년 해금되기 전까지 그의 노래는 모두 금지곡으로 묶여있었다. 그러나 1960년 라디오로 방송된 <김삿갓의 북한방랑기>에 이 곡이 테마곡으로 쓰이게 되었다. 다른 곡들은 금지곡으로 묶여있었으나 이 곡은 이후 해금되어 전국민의 대표곡으로 사랑받게 되었고, 이 노래를 부른 가수 김정구는 전두환 시절 대중가수로는 최초로 문화훈장 보관장을 수여받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아래는 유튜브 김정구 선생님의 '눈물젖은 두만강' 동영상입니다.
https://youtu.be/oxcAmZLcYC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