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永川李氏
淵源과 氏族史 槪要 尊德祠(존덕사) 배향위 : 시조 李文漢 평장사 부군 - 익양 군 李克仁 - 영양군 李大榮 3위 봉안 소재지 : 경상북도 영천시 오미동 석현재 永川李氏의 淵源 (영천이씨의 연원)
시조 고려 초 평장사 이문한(李文漢). 永川李氏는 신라 유리왕 9년(AD:32) 6성을 사성 할 때 제1성 양산촌 李氏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나 고증 문헌이
없기 때문에 고려초 평장사를 지내고 영천 땅에 세거한 李文漢을 시조로 족보가 이뤄졌다. 구족보에는 시조7세 이극인(李克仁: 대장 군 봉,익양군) 연대가 고려 통합시로 되었으나 고려사에
고려중기(?-1224)로 고증되어 정정한 기록이 수록되어있다 영천은 신라 땅 切也火郡을 경덕왕 때 臨皐로 고치고 고려 초 道同 臨川 두고을을 합쳐 永州로 하였다 현종 때는
慶州에 소속되고 조선태종 13년 永川으로 되었다. (주요성씨) 李, 崔, 鄭, 皇甫, 金, 尹, 張씨 <파명록:派名錄> 署丞公派 : 영천이씨 장파문중 益陽君派 : 지하에 6세까지만 기록이 있음. 구족보에 익양군 연대가 고려사에 고증되어 영양군 울산군을 7세에 연계할 수 없음으로 후손 1세로 기세
하였음. 永陽君派 : 지하에 파보와 항렬이 다른 6개 파가 있음 *少監公派 *判書公派 *南谷公派 *少尹公派 *監司公派
*生員公派. 鬱山君派 : 4개 지파가 있음 *監務公派 *參 議公派 *縣監公派 *松峴公派 上將軍公派 : 7개지파가 있음. *部長公派 * 進士公派 *訓導公派 *宣務郞公派 *禦侮 將軍公派
*司直公派 *孝友公派 尙書公派 :*尙書公派 *武毅公派이하 무고. 領同正公派 : 8개지파가 있음 *生員公派 * 監司公派 *參議公派 *通德郞公派 *察訪 公派 *參奉公派
*通政公派 *訓導公派. (실계 무고된 파) *判書公派 *貞景公派 *校尉公派 *摠郞公派 ========================== <세계도: 별표> <항렬표 10파문중: 별표> ================================= <氏族史 槪要> 永川李氏 선세사는 17세기까지 문중 가승족보가 있었다. 18세기초 함흥 판서공파 가승보에서 시조 李文漢이하 12세
계보가 고증되어 1741년 "永陽李氏姓譜"에 수록되고 1746년에 최초 판본 "丙寅譜" 1798년에 "戊午 大同族譜"가 이뤄졌다.
문헌에는 16세기 "대동군부운옥" 성씨부에 대장군 李大榮 계와 영동정 李박 계의 일성 양파기록이 있으나 18세기
정조 때 홍문관 수찬 "增補文獻備考"의 제계고 성씨편에는 시조 평장사 李文漢 지하에 후손 李大榮(영양군파) 李永朝(교위공파) 李박
(영동정공파) 李孫茂(총랑공파) 李膺(정경공파) 李允卿(판서공파)로 정리되어 기타 제반 문헌에 일반화 되어있다.
단 1970년대 일신각 출판사 발간 "항국인의족보" 영천이씨편 계보표에 "초판본"은 시조 李文漢 지하의 파조
李大榮계에 李박 을 연계한 잘못이 있었고 "재판본"은 시조 李文漢계 시조 李박 계로 흡사 양시조 처럼 병립하여 모두 잘못되었다.
# 시조 李文漢 고려 초
평장사: 영천이씨가 관향지 영천에 정착한 역사적 배경은 고증할 문헌을 찾지 못하였으나 세보 원편에 시조 李文漢 官:平章事
묘소 배위 실전으로 되어있고 이하 5세까지는 휘자와 관작만 기록되었으며 6세 李榮(추봉금오위장군)은 영천 북습 망지산에 묘가 있고 7세에 이르러
6형제의 계보기록이 족보에 전한다. # 시조-7세 李克仁
고려대장군 고려사에 李克仁(?-1224)대장군은 신종5년(1202) 동경의 별초군과 운문의 적도들이 동화 부인 양사의 승도를
이끌고 영천에 침범할 때 동생 李守椿과 의병을 모아 물리친 공으로 장군이 되었다. 1216년에는 몽고군에 쫓겨 우리나라 서북부로 침입한 거란병을 金就礪장군과 함께 연주에서 대파한 공으로 대장군에
올랐으나 고종11년(1224)에 무단정권의 권신 崔瑀를 모해하려다 발각되어 상장군崔愈恭 장군金季鳳과 함께 살해된 기록이 전한다.
이로서 선세사 연대가 고증되고 李克仁 대장군은 광록대부 익양군에 훈봉되어 선3대 추증의 영예가
있었다.. # 서승공파 파조 李約 :
고려후기(13세기 말엽)시조 11세 李約은 선관서승을 지내고 장파문중을 이루었다. 족보 기록은 초기에 주손이 청송에 세거하였으나 이후 영천과 경주지역에 세거지가 형성되었다.
李約(서승공)의 따님 "변한국대부인"은 고려말 충신 포은 정몽주선생의 모후다. # 익양군파 파조 李克仁
: 시조 7세 李克仁(대장군 익양군)은 족보에 6세 李伯修(대장군)까지 기록되고 후손은 연계하지 못하였다 구족보에
이극인 연대가 고려초로 기록되어 6세 지하에 이대영 이중영 형제를 연계하였으나 고려사에 이극인 연대(?-1224)가 고증됨에 따라 연계불능으로
정정한 기록을 남겼다.. # 상장군공파 파조 李守椿
: 시조 7세 李守椿은 상장군: 평장사에 오르고 상장군공파 문중이 이뤄졌다. 후손은 영천 임고 양항에 세거지가 형성되고 조선 초 단종 사화 이후 영일 땅 청하와 장기 경주 금척에도 세거지가
형성되었다 李守椿(상장군)은 李克仁의 아우로 고려 중기 형과 함께 영천 땅을 침범한 동경의적도를 물리친 공으로 상장군
평장사에 올랐다. 李守椿의 8세 李敢(문한당)은 고려말 대과급제하여 좌헌납 지제교 때에 역성혁명 주체세력을 규탄한 상소사건으로
유배되었다 풀려나 고향에 문한당을 짓고 학문에 정진하였다. 조선초에는 징소되어 전라감사 밀양도호부사를 지냈으며 선대 양위 여묘 6년의 지극한 효성이 알려서 정려가 하사되고
1801년 지역유림이 임강서원을 세워 봉안했다 이감의 7세손 李訥(장사랑훈도)은 임진난 때 향교에 선성(오성,팔현)의 위판을 수호한 공신으로 향중 유림에서 장기
교동에 삼명서원을 세워 봉안되어있다. # 영양군파 중시조 1세 李大榮
: 李大榮은 고려 진사 신호위 대장군 봉 영양군으로 생몰 연대가 실전되고 익양군계에 연계하지 못하여 후손 중시조
1세로 족보에 기록하고 있다. 영양군파는 영천이씨 자손 70% 내외의 대파문중으로 고려말엽 지하에 6개파 문중이 전국에 세거지를 형성하고
있다. * 장파인 소감공파는 영양군 6세 李伯古(고려말 소부소감) 문중으로 영천 관향지에 세거하다 단종사화 때 화를 당하여 영남일원에 분산 피난하였다.
소감공 2세 李宣(참판)은 세종 기유(1429)년에 급제하여 형조 참판에 올랐으나 금성대군과 단종 복위를 도모한
李甫欽(충장공)이 역신으로 몰리는 화를 당하여 아들 李仁近 대에 살아남기 위한 피난 잠적 300여년으로 상하 7,8대의 묘소 배위와 사적을
일실한 안타까운 연유가 족보에 기록되어있다. * 판서공파는 고려말 예문관 제학을 지낸 조선태조
원종공신 영양군 7세 李伯(공조판서)의 문중으로 영덕에서 함흥 유배지에 이거 정착하여 현 함경남도 일대에 세거지가 형성되었다.
판서공 17세 李寅鐸(통정대부우승지)은 조선조 철종 때(1850년경) 십승지지를 찾아 강원도 평창군 도암면에 이주
정착하여 평창문중이 되었다. 영천이씨는 단종사화에 연루되어 영호남 호서 일대에서 피난 잠적으로 사적이 거의 실전되었으나 18세 영조 때
판서공파 문중에서 선세 사적이 발굴되어 선세계보가 정리된 기록이 족보에 전한다. * 남곡공파는 고려말 보문각 대제학에 오른 영양군
6세 李釋之(호:남곡 두문동 72현)문중이다. 조선 초까지는 3대5제학의 명문으로 지하에 6파가 형성되어 경기 영호남 및 호서(개성 황주 중화
장연)지방에도 고루 분포되고 영천이씨 전체 자손의 추계 30%를 상회한다. 李釋之의 아들 5형제 중 장남 李安愚(제학)는 한성판윤에서 참판에 오른 집현전 제학으로 8개도 관찰사를 지내고
군위 우보에 제학공파 문중이 형성되었다. 차남 李安直은 정종 기묘(1399)년 문과 태종 병술(1406)년에 중시로 지제교를 거처 직제학에 올랐다
아들 형제중 李宗儉(호:雙溪)은 세종 기유(1429)문과 한림 직제학 대사간을 지내고 문종 사호 孝友堂으로 안성
덕곡에 정려와 담양 대치에 쌍계당이 있으며 단종대왕 충신으로 공주 숙모전에 배향되고 안성 여주 이천 양주 음성 경산 담양대치에 효우당파 문중이
형성되었다. 양주 땅에 정착한 李宗儉의 5세 李律은 경상감사를 거치고 선조 17년(1589)에 호조판서에 올랐으며 동생 李選은
호조참의를 거처 판서를 지낸 기록이 왕조실록에 수록되어있다. 李宗儉의 동생 李宗謙(호:巖谷)은 세종 임자(1432)문과 이조참판으로 집현전 제학에 올랐으나 단종사화 때 외종
柳誠源(사육신 시:충경공)과 종형제되는 李甫欽(시:忠莊公)의 피화에 연루되어 대사간으로 있던 형(李宗儉) 과 함께 벼슬을 버리고 낙향
은둔하였다. 자손은 순천 광양 하동 황해도(장연)에 암곡공파 문중이 형성돠었다. 李釋之의 제3자 李安柔(호: 西坡公)는 태종 을유(1405)문과 사간원헌납 이조정랑을 지내고 고향 영천에 낙향하여
영천 영덕 김해 양산에 서파공파 문중이 형성되었다. 제4자 李安實(호:老田)은 봉선대부 군기시; 부정랑을 지내고 자손이 황해도 황주 중화에 이거 정착하였으며
일부자손은 영천 신령 청송에 정착하여 정랑공파를 형성했다. 제5자 李玄實은 부사직을 지내고 용인에서 형 李安柔와 함께 永川에 이거 정착하였으나 아들 형제중 李甫欽(忠莊公)이
금성대군과 단종대왕 복위를 도모하다 역신으로 몰려 3대 멸족의 피화로 후손이 거창 웅곡에 잠적하였으며 후에 주손은 군위에 피난 정착하여
충장공파를 형성하였다. 李甫欽의 동생 李甫款은 세종 경신(1440)문과를 거처 풍저창 부사를 지내다 형의 피화로 이름을 世輔로 고치고
팔공산 자락(대구 공산)에 은거하고 일부 자손은 경남 고성 통영에 피난 정착하여 부사공파 문중이 형성되었다.
* 소윤공파는
고려말 군기시 소윤을 지낸 영양군 6세 李軒(소윤공)문중으로 고려말엽 안동에 이거 정착하여 안동문중을 이루고 영남일대에 세거지가 형성되어 있다.
소윤공파는 李軒의 2세에 아들 李坡(병조참의)는 참의공파를 이루고 李塢는 한림직제학에 올라 제학공파를
이루었다. 李坡(참의공)의 증손 李賢輔(1467-1555)호 농암(시:효절)선생은 호조참판 홍문제학으로 숭정대부에 오르고
기로소에 들었으며 청백리에 녹선된 2001년 정부선정 문화인물이다. 농암 李賢輔선생은 강호문학을 창도한 국문학계의 거성으로 영남학맥을 이루고
안동 도산서원에 봉안되었다. 李坡의 6세 李德弘(호:간재 1541-1596)선생은 퇴계 문인 성리학자로 선조11년(1578) 선비 등용 때
영남 9현에 추천되어 영춘현감을 지냈다 임난 때 선조 호종1등공신으로 이조참판에 증직되고 3대 입사에 추증되었으며 영주 오계서원에 봉안되고
원천동(외내)문중이 형성되었다.. 李德弘(간재)은 아들 李蒔 李徜 李吆 李焿 李慕 5형제가 문과 급제한 명문으로 장남 李蒔(호:선오당)는
오계서원에 배향되었다. * 감사공파는
조선 태종 때 경상도관찰사를 지낸 영양군 6세 李殷(호: 송헌 경상감사 1348-1417) 문중으로 경주 울산 부산 기장 일대에 3개지파 문중이
형성되었다. 李殷 6세에 李安國(호:라암)은 라암공파를 이루어 경주 일대에 세거하고 李德良(호:해암) 참봉은 해암공파를 이루어
영천과 울산에 세거한다. 李論道(진사 호:이재)참봉공은 이재공파를 이루고 기장으로 이거하여 부산 일대에 세거한다.
李殷은 선초 영상 河崙의 문인으로 사위가 되며 울산군사 때 왜구 침범으로 기관 李藝(학성이씨 시조)와 함께 일본에
포로로 가서도 굴하지 않고 선비의 기개로 호령하며 기관도 군사를 극진히 우대함으로 왜구가 감복하여 방환되자 임금이 특히 치하한 기록이 실록에
전한다.
* 생원공파는
고려말 생원을 지낸 영양군 6세 李安邦의 문중으로 경남 하양과 영천 대구시에 세거지가 형성되었다. 李安邦(생원공)의 6세 李幹(호:괴암 1576- 1637)은 높은 학덕으로 후학양성에 전념하여 1823년 유림에서 임호서원을 창건 봉안되었다.
# 울산군파 중시조 1세
李仲榮 : 李仲榮은 李大榮(영양군)의 아우다. 고려 때 원나라에서 봉승랑 권농방어사를 지내고 환국하여 지울주사를 지내고 울산군에 훈봉되었으며 울산군파 문중을
이루어 2세에 4파문중이 형성되었다. * 장파 감무공파 : 울산군 2세 李瑕(감무공) 문중으로 영천 운천동에 세거하여온다. *참의공파 : 울산군 2세 李持(참의공) 문중으로 영덕 직천에 세거지가 형성되고 李持의 3세 李承吉(호:처호정)은 문과급제하여 우부승지에
올랐으나 곳 낙향하여 영덕 직천에 처호정을 짓고 학문에 정진하였으며 자손은 영덕 직천에서 대지리와 흥해 일대에 세거지가 형성되었다.
* 현감공파 : 울산군 2세 李挾(광양현감)문중으로 영일 기계 화당 백산 일대에 세 거지가 형성되었다. * 송현공파 : 울산군 2세 李抗 계의 문중으로 영천 구계 약남 일대에 세거지를 형성하였다. # 상서공파 파조 李世和
: 고려중기 호부상서를 지낸 시조 7세 李世和(상서공) 문중이나 족보에는 함경남도 안변석방에 세거한 기록이 있으며
1925년 국세조사에도 29호의 대문중이 집계되었으나 현재 자손을 찾지 못하고 있다. 고려사에 상서공 5세 이인(仁: 1246-1290) 은 충열왕 때 상호군으로 합단적을 대파한 공을 세우고
무의(武毅)에 시호되었다. # 영동정공파 중시조 李
烩 : 영동정공파는 고려 때 영동정을 지낸 중시조 1세 李박 여말 선초 영동정공의 9세 李麗(호:라은)대에 영천에서 군위 양곡에 이주 정착하여 문중이 형성되었다
李박 (영동정)의 14세 李光俊(호:학동 1525 -1609)은 강원감사를 지내고 조선조 중기 군위에서 의성 산운에 입향하여 영동정공파 자손의 약 50%인 감사공파
대문중(산운문중)이 형성되었다. 족보기록은 이시기에 영동정공파는 8파문중이 형성되어 군위 의성 산운 경산 영천 일대에 세거 하여왔다.
李박 (영동정)의 12세 李世憲(호:우암 1475 -1555)은 진사 때 사화를 피하여 낙향하였으며 좌승지에 증직되고 오양서원에 배향되었다. 영동정공 14세
李光俊(호:학동)은 강원감사를 지내고 예조참판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에 증직되고 빙계서원과 오양서원에 배향되었다. 영동정공 15세 李民宬(호:경정)은 좌우부승지 봉조하에 오르고 영남 팔학사 한분으로 장대서원에
배향되었다. 영동정공 15세 李民篺(호:자암) 시:충간공은 호성원종 훈2등으로 가선대부 이조판서에 특증되고
영동정 21세 李羲發(호:운곡) 시:희정공은 1조판서에 오르고 기로소에 들었다.
<계보 실계된
문중> # 판서공파 : 판도판서 李允卿계로 4세 李承孫(시:성정)은 판서를지내고 찬성에 올랐으나 8세 李應運(현감)이후는
무고되었다. # 정경공파 : 李膺(시:정경 봉:영양군)은 조선개국공신, 계미자 주조도감 형조판서를 지내고 2세
李順蒙(시:위양)은 세종조 명장으로 영중추원사에 올랐으나 무후되었다. 李順蒙장군의 사저"숭열당"은 국가문화재 (보물제521호)로 영천시성내동에 있으며 묘는 비위 능성구씨와
쌍봉(경기도문화재 기념물92호)으로 양평군 개군면에 있다. # 교위공파 : 李永朝(교위)계로 6세 李仁裕(영동정)이하 무고되었다. # 총랑공파 : 李孫茂(군부총랑)계로 2세는 李瑚(찬성 판삼사 봉:영양군) 3세는 李英允(통례판관서령)으로 이후
무고되었다. # 북한땅의 자손 분포 족보 기록은 조선 태종 때 함흥차사 일화를 남긴 판서공파(영덕에서 함흥에 입향) 가 있고 조선초 단종사화 이후
남곡공파 자손 일부가 황해도 황주 장연 중화 개성지방에 각 500년 세거지를 형성하였으며 고려 후시 흥남 석방에 상서공파 세거지가 형성되었으며
북간도 땅에 이주 정착한 자손들도 많았다. * 6,25사변 때 월남한 자손들리 족보로 선대 연고를 찾아 보계를 확인하고 있으나 당시 어린 나이로 단독 월남한
자손은 보계를 찾지 못하여 안타까운 경우도 많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