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산이씨의 시조는 휘(諱)백령(栢齡) 호(號) 후조(後凋) 벼슬은 광록대부(光祿大夫) 삼중대광(三重大匡)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겸 집현전 직제학(集賢殿 直提學)으로 고려말엽 조정에서 현달(顯達)하여 왕명을
받들고 중국에 들어가 시문(詩文)을 지으신바
명망이 높아 중국 황제가 가상(嘉賞)히 여겨 금백(金帛)과
필마(匹馬)를 하사하니 백관들이 경탄하였다 하며 귀국하여 복명하니 상(上)께서 손을
잡고 위로하며
경(卿)의 문장으로 중국이 감히 우리국가를 경시하지 못하게 되었도다 하며 양산군(陽山君)을 봉(封)하고
시호(諡號)를
충민(忠敏)으로 내렸다. 양산이씨의 구보(舊譜)에 원조(遠祖) 휘(諱) 천일(天一)로부터 선세계
(先世系)가 공주이씨(公州李氏) 대동보
상세계(上世系)와 동일하고, 또한 31세(世) 휘(諱) 송령(松齡)의 계씨
(季氏)가 백령(栢齡)이라 동일한 기록이니 양산이씨는 공주이씨에서
분관(分貫)된 한 뿌리 세계혈통(世系血統)
임이 분명하다. 17세손인(十七世孫) 이성(李晟)이 성주(星州)에서 영천시 화남면 사천리(永川市 華南面
沙川里)로 이주하여 세거(世居)하게 되었다.
⼠
陽山李氏 先係圖 ⼠
遠祖 李天一 - 二世 德裕 -
三世 典 - 四世 承老 - 五世 奎 - 六世 尹元 - 七世 芳 - 八世 必文 - 九世 輔 - 十世 光鎰 - 十一世 澤 - 十二世 宗閔 - 十三世
忠 - 十四世 淳之 - 十五世 膺 - 十六世 春 - 十七世 善遷 - 十八世 仁謙 - 十九世 誠 - 二十世 世才 - 二十一世 裕 - 二十二世 寅拺
- 二十三世 賢元 -二十四世 溫 - 二十五世 玉 - 二十六世 祉 -二十七世 至文 - 二十八世 民元 - 二十九世 承景 - 三十世 希顔 - 三十一世
松齡
栢齡 (陽山君)
⼠ 陽山李氏 世係圖
⼠
始祖 李栢齡 - 二世 寔 - 三世 仁義 - 四世 喬違 - 五世 垠 - 六世 瑢 - 七世 賢奎 - 八世 培 - 九世
東昭 - 十世 礆 - 十一世 根 - 十二世 (孟孫)
仲孫 - 十三世 恒茂 - 十四世
絳 - 十五世 承須 - 十六世 - (守弘)
守全 - 十七世 (樂, 克,
長遜) 晟 - 十八世 (應祖)英蕃 - 十九世 得祿 - 二十世 時郁 得禎
暘郁
⼠항열표(行列表)⼠
22世 |
23世 |
24世 |
25世 |
26世 |
27世 |
28世 |
29世 |
30世 |
廷⁚ |
⁚年 |
木 |
重⁚ |
⁚發 |
輝⁚ |
⁚秀 |
炳⁚ |
⁚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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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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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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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世 |
32世 |
33世 |
34世 |
35世 |
36世 |
37世 |
38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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鍾⁚ |
⁚洛 |
相⁚ |
⁚勳 |
塡⁚ |
⁚鎬 |
淵⁚ |
⁚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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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永 |
東⁚ |
⁚烈 |
基⁚ |
⁚鎭 |
源⁚ |
⁚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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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의(李仁義)
광정대부(匡靖大夫) 호위중랑장 (護衛中郞將). 封 陽山君
⼑이교위(李喬違)
일등공신(一等功臣) 대제학(大提學)
태자태사(太子太師)
⼑이은(李垠) 광정대부
호위중랑장
(匡靖大夫 護衛中郞將)
⼑이근(李根) 세종조(世宗朝) 봉상대부(奉常大夫), 이천감무(伊川監務)역임
⼑이중손(李仲孫)
문종조(文宗朝) 안성군수(安城 郡守)와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를 지냈음
⼑이항무(李恒茂) 자(字)
수여(壽如), 세조조(世祖 朝)원종공신 강계부사(江界府使)를 역임(歷任) 하고, 양산군(陽山君)에 습봉(襲封) 됨
⼑이승수(李承須) 자(字)
자건(子健), 호(號) 만휴 (晩休), 시호(諡號) 충간(忠簡), 중종(中宗) 병자 (丙子)(1516) 문과(文科)에 등과(登科)한 후 홍문
관교리(弘文館校理) 사헌부 대사헌(司憲府
大司憲)을 역임(歷任)하고 말연(末年)에 성주팔거 (星州八呯)에 만휴정(晩休亭)을 짓고 경서(經書)의
의취(意趣)를 연구(硏究)하고 후생지도에 여생(餘生)을 보냈으며 명종조(明宗朝)에 예조판서(禮曹判書)로 추증(追贈) 되었다.
▷만휴정(晩休亭)◁
<1964년 7월 24일 영천시 화남면 사천리 重建> |
▷충간공 기적비紀績碑)◁
<영천시
화남면 사천리> |
⼑이수전(李守全) 자(字) 전지(全之), 명종조 이음관 (明宗朝
以蔭官) 봉정대부(奉正大夫) 한성참군 (漢城參軍)
⼑이성(李晟) 자(字) 일성(日成), 효종조(孝宗朝)
증형조참의(刑曹參議)
⼑이득록(李得祿) 자(字) 선수(善綏), 임진란시(壬辰
亂時)나라와 지역사회(地域社會)가 만신창이(滿身 瘡痍)됨을 감당할 길 없어 野山中에 은거생활(隱 居生活)로 독서구리(讀書究理)하며 아우(得禎)의
義兵活動에 지원(支援) 孝宗朝 特除 자헌대부(資 憲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추증(追贈)
⼑이득정(李得禎) 호(號) 동산(東山), 임진란(壬辰 亂)이
일어나자 의병(義兵)으로 出陣하여 권응수(權應銖)의병장(義兵將)을 도와 1592년 5월 6일 영천시 화남면 삼창리의 漢川戰에서 첫 승전을 하였고
7월 27일 영천 복성전(永川復城戰)에서 적의 흉탄으로 23歲의 젊은 나이로 순국(殉國)함. 후일에 삼등 공신으로 책록되고 訓練院 判官으로 추증
되었으며 대구광역시 망우공원에 壬亂 護國 嶺南 忠義壇에 배향되고, 壬亂義兵 史上 첫 勝戰地인 永川市 華南面 三昌里 36번지에 2002년 8월
17일 壬亂義兵 漢川戰勝捷塔을 건립하여 奉安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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