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의 대표적인 人物(인물)로는
錫(석)의 7세손 龍庇(용비)가
太子詹事(태자첨사:동궁의 정3품 벼슬)를 지냈고, 龍弼(용필)은 守司空(수사공)을
역임하였다.
고려 때 武官(무관) 光富(광부)는
1362년(공민왕11) 紅巾賊(홍건적)을 격퇴한 功(공)으로
2등공신이 되었고, 1379년(우왕 5) 都巡問使(도순문사)가 되어 嘉樹縣(가수현)에 침입한 倭賊(왜적)과
싸우다가 殉節(순절)하여 忠義壇(충의단)에 祭享(제향)
되었으며, 居斗(거두)는
瀛州府尹(영주부윤)과 工曹典書(공조전서)를 지내고 嘉善大夫(가선대부:종2품인 문무관의 품계의 하나)에 올라 「三國史記(삼국사기)」의 跋文(발문)을
썼다.
고려에서 명성을 날린 義城 金氏(의성김씨)는 朝鮮朝(조선조)에
와서도 명문의 代(대)를 이어 가문을 빛낸 인물들이 많았다.
兵曹
參判(병조참판)을 역임한
英烈(영렬)은 1404년(태종 4) (推忠奮義左命功臣(추충분의좌명공신)에 올라 王命(왕명)으로 會盟錄(회맹록:공훈이 있는 사람의 이름을 적은 책)에 記錄(기록)되었으며, 文臣(문신)으로
義兵(의병)을 일으켜 왜군과 싸워 용맹을 떨친 齊閔(제민)은
당대의 名臣(명신) 李恒(이항)의 문하에서 글을 배워 1573년(선조 6)
式年文科(식년문과)에 급제하고 郞官(낭관)을 거쳐
和順 縣監(화순현감)·淳昌 郡守(순창군수)를 지낸 뒤 병으로 사퇴하여 역문연구에 전심, 많은 저서를
남겼다.
이렇게 명문 義城 金氏(의성김씨)의 가문을 빛낸 인물들 중에 특히 安國(안국)과 正國(정국) 형제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慕齋(모재)
安國(안국)은 龍弼(용필)의
11세손으로 일찌기 寒暄堂(한훤당)
金宏弼(김굉필)의 門下(문하)에서
修學(수학)하여 1501년(연산군 7) 生員(생원)·進士試(진사시)에 합격하고,
2년 別試文科(별시문과)에 급제,
承文院(승문원)에 등용되어 博士(박사)·副修撰(부수찬)을 역임한 후 禮曹 參議(예조참의)·대사간 공조 판서 등을 지냈다. 1517년(숙종12) 경상도 관찰사가 되어 각 鄕校(향교)에 〈少學(소학)〉을
권하고 「?瘟方(벽온방:의관 김순몽, 유영정, 박세거 등이 엮은 의서)」·「瘡疹方(창진방:세조 때 임원준이 쓴 전염병을 논한 의약서)」
등을 刊印(간인)하여 보급화였다. 그외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하고
大提學(대제학:홍문관, 예문관의 정2품 벼슬)·贊成(찬성)을 지낸
후 1541년(중종36) 兵曹 判書(병조판서)에 올라 苔紙(태지:가는 털과 같은 이끼를 섞어서 뜬
종이)를 만들어 왕에게 바치고 이를 권장했다. 특히 그는 趙光祖(조광조)와 함께 至治主義(지치주의:정치를 가장 이상적으로 다스리는
사상)를 강력하게 주장했고, 性理學(성리학)을 포함하여 천문·주역·농사·국문학 등에 조예가 깊어 많은
저서를 남겼다.
思齋(사재) 正國(정국)은 형인 安國(안국)과 함께
金宏弼(김굉필)의 門下(문하)에서 글을 배워 1509년(중종 4)
別試文科(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賜暇讀書(사가독서:휴가를 얻어 집에서 공부함)를 한 후
吏曹 正郞(이조정랑)·사간 등을 지낸 후 승지에 올랐다가 己卯士禍(기묘사화)로 삭직되어 高陽(고양)으로 내려가 학문에 전심, 1537년(중종32)
복관되고 전라도 관찰사가 되어 便民祛幣(편민거폐:백성의 편리를 위하여 폐단을 없애는 것)라는 施政策(시정책)을 건의하여 시행케 했으며, 兵曹(병조) 및 工曹
參議(공조참의)를 역임한 후
禮曹(예조)·兵曹(병조)·刑曹
參判(형조참판)을
지냈다.
龍庇(용비)의
12세손 誠一(성일)은 李退溪(이퇴계)의
門下(문하)에서 공부하여 宣祖(선조) 때 등제하고 奉敎(봉교)를 시작으로 여러 벼슬에 올랐다가, 招諭使(초유사:난리가 일어났을 때 평정하기 위하여 백성을 타이르는 일을
맡아보던 임시 벼슬)를 거쳐 경상우도 관찰사 겸 巡察使(순찰사)를 지냈다. 三陟 府使(삼척부사)
希參(희삼)의 아들 宇??(우옹)은
曺南溟(조남명)과 함께 退溪(퇴계)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워 明宗(명종)
때 문과에 올라 宣祖(선조) 때 湖堂(호당:젊고 재주있는 문신으로서 임금의 특명을 받은 사람들이
공부하던 곳)에 뽑혔다.
그외 副提學(부제학)을
역임하고 「開巖集(개암집)」을 집필한 宇宏(우굉)을
비롯하여 임진왜란 때 義兵(의병)을 규합하여 항쟁한 通(통)이
유명했으며, 汝鍵(여건)은 肅宗(숙종) 때
修撰(수찬)을 지내고, 著書(저서)
「北遷錄(북천록)」을 집필하였다. 嶺南儒林(영남유림)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學者(학자)로 이름난 興洛(흥락)은 여러
차례 벼슬에 천거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의병대장 河洛(하락)은 여러
곳의 전투에서 순절하여 文臣(문신)의 뒤를 이어 武臣(무신)으로
가문을 빛내었다.
독립운동가 東三(동삼)·元植(원식)·昌淑(창숙) 등도
日本(일본) 강점기에 나라의 독립을 위한 숭고한 희생으로, 명문
義城 金氏(의성김씨)의
자랑스런 후손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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