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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암 노응규(愼菴 盧應奎)
개항기 거창출신 항일의병장
한말 전기 의병운동에서 전국적으로 이름을 떨친 의병장 노응규(盧應奎)는 본관이 광주(光州)이고 자는 성오(聖五,뒤에 景五로 고침), 호는 신암(愼菴)이며, 선조는 누대로 합천 초계(草溪)에서 살아왔다.
철종 12년(1861) 3월 15일, 묵재공(墨齋公) 노필(盧㻶,1464~1532)의 26세손 이선(以善)과 어머니 초계정씨(草溪鄭氏)의 차남으로 경남 거창군 고제면 개명리 괘암동(掛巖洞)에 태어났고, 경남 함양군 안의면 당본리 죽전동에서 성장했다.
노응규는 소년 시절에 기호(畿湖)의 남인 학자로서 성호 이익(星湖李瀷)의 학통을 계승한 성재 허전(性齋 許傳
,1797~1886)의 문하생이 되었고, 30세를 전후하여 면암 최익현(勉庵崔益鉉,1833~1906), 연재 송병선(淵齋宋秉璿,1836∼1905)과 입재 송근수(立齋宋近洙,1818~1903) 문하를 드나들며 학문을 연마하였다. 노응규가 사사(師事)했던 성재와 면암, 연재는 당시 위정척사와 보국안민을 주장하는 선비로 유림의 존경을 받든 인물들이었다.
특히 성재 허전은 1864년부터 1867년까지 김해부사로 재직하면서 강우(江右, 경상우도,낙동강 서쪽) 25개 지역에 354명의 제자를 양성하였다. 19세기 강우지역에 남명학파(南溟學派)를 주도해 나갈 만한 큰 학자가 배출되지 않고 있었는데, 남명-한강-미수-성호의 학맥을 이은 성재 허전의 등장으로 이 지역 선비들은 남명학을 기반으로 하는 지역 학문의 부흥을 다시 도모할 수 있었다. 성재 허전의 제자 명단을 기록한 『冷泉及門錄(냉천급문록)』에는 거창 임진원(林眞源)·정재선(鄭載善)·정지선(鄭址善)·김우현(金友鉉)·최원근(崔元根)·윤주하(尹冑夏) 등 6명, 안의 정원섭(鄭元燮)·노응규(盧應奎)·박응환(朴膺煥)·박이진(朴以震)·박이회(朴以晦)·유병원(柳炳元) 등 6명이 등재되어 있다. 허전의 제자 중에는 스승의 위정척사 정신을 이어받아 의병운동에 관여한 인물들이 많았는데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인물이 노응규였다.
1895년 10월 일제는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뒤따라 친일정권을 사주하여 소위 ‘을미개혁(乙未改革)’의 하나로 단발령(斷髮令)을 강제 시행하였다. 평소 위정척사사상을 갖고 있던 신암 노응규는 국모의 원수를 갚고, 국왕을 보위하며, 성리학적 질서를 수호하기 위하여 거의(擧義)하기로 결심하였다. 이와 같은 신암의 생각은 그가 저술한 『愼庵集抄(신암집초)』에 잘 나타나 있다.
의병을 일으키면서 고종에 올린 ‘창의소(倡義疏)’에서 신암은
“흉악한 저 적도(賊徒)들이 (국모를) 시해하고 또 서인(庶人)으로 폐하고, 폐했다가 또 빈(嬪)으로 올리고, 빈(嬪)으로 또다시 복위(復位)하여 임금이 없는 것같이 여기고 있으니, 이런 심장으로는 비록 임금을 10번 시해하고 (국모를) 1백 번 시해하는 데도 무엇이 꺼리는 바가 있겠사옵니까? 천도와 인륜이 이로써 다 끊어지고 5백 년 종묘사직이 이로써 이미 멸망된 것입니다.·····(중략) 더구나 성인(聖人)이 궁실(宮室)을 만들고 의복을 만들어서 거처하게 하고 출입하게 하였으며, 또 발부(髮膚, 머리털과 피부)를 감히 훼손하지 말라고 훈계한 것은 부모에게 받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의복을 훼손하고 머리를 깎는다면 금수(禽獸)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비록 무지한 남녀라도 차라리 죽을망정 금수가 되고 싶지 않은 마음은 다 있을 것입니다. 전하같이 어지시고 성스러우시고 날래시고 굳세신 성품으로 어찌 차마 의복을 변경하시겠으며, 어찌 차마 머리를 깎으시겠사옵니까? (凶彼賊徒弑又廢庶 廢又升嬪 嬪又復位 若將無君 以此心腸 雖弑十王殺百後 有何所憚 以不爲乎 天紀人倫 於斯盡絕矣 五百年宗祀 於是已滅矣 ····(中略) 且夫聖人爲宮室 制衣服 以養居處出入 而又戒髮膚之毋敢毁傷者 以受於父母故也 若毁衣傷髮 削與禽獸何異哉 雖匹夫匹婦 寧死而不學禽獸之心 人皆有之 以若殿下仁聖勇剛之質 忍何毁衣 忍何傷髮乎)”
라며 울분을 토하고 있다.
1896년 2월 19일(음력 1월 7일), 신암 노응규는 8척 장신으로 힘이 장사였던 장수사(長水寺)의 승려 서재기(徐再起, 본명 寬成)를 선봉장으로 삼고, 문인 박준필(朴準弼, 본명 準玉), 정도현(鄭道玄), 최두원(崔斗元), 최두연(崔斗淵) 등과 전사과(前司果) 임경희(林景熙), 선비 성경호(成慶昊) 등 지사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이들은 진주에서 170리 떨어진 안의(安義)를 출발, 당시 경상우도(慶尙右道)의 수부(首府)였던 진주성을 공략하기 위해 무기를 싣고 남행(南行)하여 그날 저녁 진주성(晉州城)에 당도하였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1896년 2월 20일) 일시에 진주성을 함락시켰다. 이때 진주부 관찰사와 경무관은 대구로 도주하였고, 또 참서관은 성을 탈출하여 삼가로 도주하였다.
노응규 부대는 개화파 세력인 진주 부근의 군수(단성,고성,하동,함안)와 일본 상인들을 공격하면서 점차 경상도 전역으로 활동 범위를 넓혔다. 1만여 명의 대부대를 형성한 노응규 부대는 그해 3월 29일 김해까지 진출하여 부산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일본 상인들을 크게 위협하였다.
신암(愼菴)은 4월 중순 호남을 거쳐 진주에 도착한 이겸제(李謙濟)가 이끄는 관군과 진주성에서 공방전을 벌이다가 4월 24일 밤 700여 명의 적군이 성벽을 부수고 발포하면서 쳐들어오자 신암(愼菴)은 성을 탈출하여 정한용 의진과 합류하기 위해 삼가로 향하였다. 그러나 정한용이 배신하여 신암을 옥에 가두었으나 그곳 선비들의 도움으로 탈출하여 거창으로 향하게 된다. 이 무렵 안의(安義)에서는 5백여 명의 의병을 이끌던 서재기가 친일파 서리들의 흉계에 의해 피살되고, 의병은 해산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의사의 아버지와 형이 피살되고 재산이 몰수되는 비극적인 현실을 접하게 된다.
노응규 의사는 거창에서 무주를 거쳐 충청창의소로 갔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한양에 도착하여 남대문 밖에 머물게 된다. 이후 개성으로 올라가 포은 정몽주 선생의 사우를 참배하고 재령을 거쳐 전라도로 피신하여 여러 섬을 전전하다가 광주·순창 등지에서 머물렀다.
노응규 의사가 지은 ‘면고문(面告文)’과 ‘무술일기(戊戌日記)’를 토대로 작성된 『신암유고(愼菴遺稿)』의 연보에 그 당시의 상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중 거창과 관계되는 사료를 소개한다.
◑ 고종 33년(1896) 병신, 의사(義士) 36세.
○ 3월 7일(음력) : 병력을 해산하다. [인하여 정한용이 배반하고 군대를 해산하다] 장차 상경하여 궐 아래에서 대죄하려고 삼가에 도착(抵達)하니 정한용, 정재일 등이 의사를 잡으려고 모의하여 현의 옥에 가두었다. 다행히 선비들의 논의한 바에 힘입어 구출되어 화망(禍網)을 벗어났다.
○ 8일(음력) : 의사(義士) 거창 대아점(大雅店, 대아는 대야리의 다른 이름. 점은 주막, 여관)에 도착함. 따르는 사람 10여 인과 이 주막에서 함께 숙박함.
○ 9일(음력) : 새벽에 의사 무촌(武村)에 도착. 최두원·서광진 등이 매우 바쁘게(奔忙)와서 말하기를 지난밤에 안의읍 이서의 무리(吏輩)들이 난을 일으켰다고 한다. [안의현리 아무개(某某)가 의사의 아버지 이선을 살해하였다.]
의사의 형 응교는 부친의 시신을 품에 안고(抱) 돌아가셨다(卒)고 했다. 의사는 이 소식을 듣고 넋이 나가고 마음이 무너졌다.(魂飛心崩)
○ 의사는 안의읍으로 들어가지 않고 몸을 피해 도피하여 전척동(剪尺洞) 정호선(鄭鎬善, 호는 尺山이고 장복추의 문인)의 집으로 왔다. 정(鄭)은 이백 동자(二百銅子)를 주면서 전별하였다. 밤에 가조를 지나 강천(江川, 웅양면 산포리에 있는 강천마을. 흔히 ‘장다리’라 한다.) 사가(査家, 서로 사돈 관계에 있는 집안)에 도착했다. [1천 동자를 얻어 전별하였다.]
○ 새벽에 무주를 지났다. 종자는 박진길(朴軫吉) 혼자였다.
1897년 4월(음력) 상경하여 각방으로 노력한 결과, 대한제국 선포 직후인 그해 10월 1일 학부대신 신기선(申箕善)과 법부대신 조병식(趙秉式)의 주선으로 궐내에 들어가 ‘지부자현소(持釜自見疏)’를 올려 고종으로부터 국권 수호를 위해 봉기한 의병이었다는 인정을 뒤늦게 받았다.
신암(愼菴)은 우여곡절 끝에 부형(父兄)의 원수를 갚고, 아버지와 형의 유해를 괘암마을로 모셨다가 그해 12월 선대의 산소가 있는 초계에 안장하였다. 이 무렵 안의에서 북상면 갈계리로 피신해있던 가족을 만나 고향인 괘암리에 우거(寓居:임시거처)하였다. 신암(愼菴)은 이곳에서 벼슬길에 나아가기 전까지 노모를 봉양하며, 오로지 강학(講學)에 열중하면서 국권 수호의 의지를 불태웠다. 이때의 상황도 『신암유고(愼菴遺稿)』의 연보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고종 34년 정유(1897). 의사(義士) 37세
○10월 5일(음력) : 분상(奔喪, 먼 곳에서 친상의 소식을 듣고 급히 집으로 돌아감)하여 먼저 거창군 고제면 괘암리에 도착했다. 이 마을은 의사의 부형(父兄)의 옛 마을이다.
○ 이 마을의 뒷산에는 의사의 할머니 묘소가 있다.
○ 이 마을에는 의사의 자형(姊夫)의 집이 있었다.
○ 의사 부형의 시신을 자형 집에 임시로 머물게 하였다. 할머니의 묘 아래 고개를 숙이고 엎드려(俯伏) 곡하였다.
○ 의사의 어머니(母夫人) 정(鄭)씨가 의사의 처자를 거느리고 갈계(葛溪, 북상면 갈계리)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 의사의 형수는 자식들을 데리고 신평(新坪:새들,서하면 봉전마을)에 머물러 있었다.
○ 의사는 현창리(玄昌里)로 갔다. 두곡(豆谷)의 족숙(族叔)은 의사를 보자 눈물을 흘리면서 2백금(二百金)을 부조하였다.
○ 20일(음력) : 의사 부형을 초계읍 아막촌(衙幕村) 산 언덕에 장사지냈다.
「독립신문」의 1898년 7월 14일 3면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 있다.
“[번역문] 비도여습(匪徒餘習) 지금 거창군 땅에 우거한 노응규는 본래 안의군 사람으로 일찍 비도의 괴수든지 그곳 백성들이 노가의 아비와 형을 비도의 부형이라고 지목하여 죽였더니 비도 평정한 후에 노가가 서울 올라와서 제 부형의 원수 갚는다 칭하고 무죄한 안의군 최충근(崔春根)을 걸어 정소하여 최가가 감옥서에 갇힌 고로 해군 백성 박국서 하필동 등이 최가의 무죄한 것을 발명할 차로 서울와서 정소하였던지 노가가 하필동을 보고 제 부형이 원통히 죽은 양으로 도로 설명 소지하여 달라고 간청하며 박국서에게도 또한 말을 하겠으니 박국서의 유하는 곳을 가르쳐 달라 하되 하필동이가 박국서의 곳을 아니 가르쳐 준다하고 노가가 비도의 여습으로 칼을 가지고 하필동을 찔러 죽이려 하다가 경무서로 일전에 잡혀갔다더라.”
이 기사의 내용을 살펴보면 신암(愼菴)이 이 무렵 자신이 태어난 곳인 거창에서 살았던 것이 확인된다.
그 뒤 광무 6년(1902) 규장각주사로 임명되어 벼슬길에 나아가 경상남도 사검 겸 독쇄관(慶尙南道査檢兼督刷官),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 동궁 시종관(東宮侍從官) 등의 관직을 거쳤다. 일제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뒤 을사늑약을 체결하도록 협박하자 노응규는 관직을 버리고 항일 투쟁에 다시 나섰다. 그러자 고종은 그를 비밀리에 삼남시찰사(三南視察使)로 임명하고, 암행어사 마패를 내려 다시 의병을 일으키기를 독려했다.
그는 1906년 11월 충청·경상·전라 3도의 분기점이며 산간 요지인 충북 황간군의 상촌면 물한리 직평마을로 들어가 창녕, 초계의 문인들과 거창의 우국 청년 및 상촌면 주민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노응규가 대장으로 추대되고 거창 출신 서은구(徐殷九)가 중군장으로 뽑혔다.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의 별집(別集)에 수록되어있는 ‘서은구의 평리원 판결문’에 의하면
“거창 출신 서은구는 서로 알고 지내던 노응규의 초청을 받고 1906년 11월 19일(음력) 황간군 상촌으로 가서 그를 만났다. 노응규는 ‘현재 일본인이 우리나라를 압재하여 인민이 이처럼 고난을 받게 되었으니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 없지 않은가. 우리도 역시 이 나라에서 생을 받은 국민인즉 외국의 모욕을 받으니 어찌 통탄치 않으리오. 의중(意中)에 있는 지사들을 모아 경성 통감부로 함께 가서 담판하고 적과 싸워 일본인을 축출하고 우리나라의 종묘와 사직을 보존하고 생명의 안전을 기하되, 만일 뜻과 같지 못하면 함께 죽어 돌아오지 않기를 맹세하자.’하므로 이에 뜻을 같이했다”
라는 기록이 나온다. 이 기록은 신암 노응규(盧應奎) 의사의 애국충정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사료라 생각된다.
노응규 의병부대는 병력이 증감됨에 따라 일제의 시설물 및 철도, 열차 등 군용 시설물을 파괴하고 일본군의 척후병을 섬멸하였다. 특히 이들은 덕유산의 문태서, 이장춘 의병부대와 연락하면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07년 1월 21일 충북경무서 황간분파소 소속 순검들의 간악한 계략으로 의병부대의 지도부가 체포되고 말았다. 노응규를 비롯한 서은구, 엄해윤, 노공일 등 주동 인물 6명은 경성 경무감옥서로 이감되었다. 노응규는 옥중에서도 항일의 뜻을 굽히지 않아 심한 고문을 당했고, 동지들이 들여 주는 음식 외에는 어떠한 관급식도 거부한 채 옥중 단식을 하다가 2월 16일 47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광주노씨세보’ 권1에 신암 노응규의 묘소는 ‘충남 서천군 종천면 종천리 고량산(鼓樑山) 간좌(艮坐)’로 기록되어 있다.
신암 노응규 의사는 수덕(秀悳)과 수열(秀悅) 두 아들을 두었다.
장남 수덕은 8세 때 조부와 백부가 안의의 서리배들에게 목숨을 잃은 것을 목격했고, 19세 때는 부친마저 순국하는 아픔을 겪은 후 평생 상복(喪服)을 입고 살았다고 한다. 그는 원수를 갚기 위해 전국 각지는 물론, 만주 등지를 떠돌면서 동지를 규합하기 위해 애써다가 1924년 전북 정읍의 방장산에 아래에서 35세의 나이로 숨졌다.
차남 수열은 9세에 부친을 여의고, 고학으로 서울의 중동학교를 나왔으나 역시 일제와 친일파들의 박해로 1933년 경남 의령에서 34세의 나이로 급사했다. 노씨 문중에서는 신암(愼菴)의 형인 응교(應交) 아들 수방(秀邦)의 차남과 삼남을 각각 수덕과 수열의 양자로 정하여 대를 이어가고 있다.
현재 거창군 고제면 괘암마을 어귀에는 신암 노응규 의사가 숭정후오을미팔월망(崇禎後五乙未八月望,1895년 8월 보름)에 지은 ‘신성당김공정려비(晨晟堂金公旌閭碑)’가 서 있다.
정부에서는 1977년 건국훈장 국민장[현 독립장]을 추서하여 선생의 공훈을 기리고 있다. 1997년 1월 국가보훈처에서 선정하는 ‘이달의 독립운동가’에 선정되었다
【참고문헌】
노응규, 『愼菴遺稿』.
『거창군사』, 거창군사편찬위원회, 1997.
오환숙, 「신암 노응규(愼庵 盧應奎) 의병장 일생」, 『거창문학』 제14호. 2003.
강동욱, 「性齋 許傳의 江右地域 門人 考察」, 『남명학연구』 제31집, 경상대 남명학연구소, 2011.
이태룡, 『의병찾아 가는 길 Ⅰ·Ⅱ』, 도서출판 다물, 2011.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이달의 독립운동가(1997년 1월).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운동사자료집 3 : 의병항쟁사 자료집, 신암집초(愼庵集抄).
국립중앙도서관, 디지털컬렉션, 대한민국신문아카이브, 「독립신문(서재필)」
(1898년 7월 14일 3면 기사).
조익현 (거창문화원 향토사연구위원 / 전 거창군사 집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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