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교구
소속 본당. 강원도 강릉시 임당동 159 소재. 1921년에 설립되었으며, 주보는 성 골롬바노.
공소 시대와 본당의
설립 영동 지역에 교우촌이 형성된 때는 1866년 병인박해 이후이다. 다시
충청 · 전라 · 경기도의 신자들이 산간 지대로 피신해 오면서 이곳에도 교우촌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이 중 강릉 지역은 1882-1883년에
삼정평(강릉군 구정면 여찬리) · 새울(강릉군 구정면 어단리) 공소가 설립되었고, 1887년에는 금광리(강릉군 구정면 금광리) 공소가 설립되는
등 병인박해 이후 꾸준히 신자들이 존재해 있었다.
당시 영동 지역은 1893년 이후 안변(내평) 본당에서 관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지역은 내평 본당과 멀리 떨어져 있었고, 또 신자수가 점차 늘어나면서 본당의 설립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그 결과 교구에서는 1921년 5월에
양양 본당을 설립하고 최문식(崔文植) 베드로 신부를 초대 주임으로 임명하였다.
그런데 양양 본당의 신설 당시, 교구에서는 이미 영동 지역에 또 하나의 본당을 설립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이에 최문식 신부의 보좌로 임명된 이철연(李喆淵) 프란치스코 신부는 1921년 12월에 금광리 본당(주문진 본당 · 임당동
본당의 전신)을 설립하고 강릉 지역의 사목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금광리는 거주하기에 적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발전 가능성도 적어, 이철연
신부는 1923년 말에 주문진(강릉군 신리면 교항리 133번지)에 새 부지를 매입한 뒤, 성당과 사제관을 짓고 주문진으로 본당을
이전하였다.
하지만
주문진에서의 전교는 활발하지 않았고, 또 지역적으로도 주문진보다는 강릉 지역의 발전 가능성이 더욱 높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1929년 1월
주문진 성당이 화재로 전소되자, 2대 주임 김인상(金寅相) 야고보 신부는 금광리로 본당을 옮겼다가 1931년 6월 강릉시 임당동에 12칸짜리
가옥을 매입하고 본당의 이전을 준비하였다.
본당의 변모와
발전 1934년 강릉으로 이전된 본당은 점차 본당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가던
가운데 광복을 맞이했다. 광복 후 본당에서는 본당의 내실화는 물론, 사회 복지 · 교육 사업을 통해 지역 속의 본당 공동체를 구현했는데,
1946년에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를 초청하여 본당 사목의 내실화를 기하는 한편, 성심보육원과 성심공민학교(1957년 폐교)를 설립하여 고아
보육과 불우한 청소년들을 위한 교육 사업을 전개하였다.
뿐만 아니라 1951년에는 1,128평의 대지를 매입한 뒤 1955년 10월에 성당을
신축하였고, 1956년 12월에는 ‘증거자들의 모후’ 쁘레시디움을 창단하여 레지오 마리애 활동도 시작하였다. 이어 1962년 10월에는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가 본당 사목을 맡았고, 1964년 3월에는 갈바리아 의원을 개원하여 의료 봉사에도 힘을 쏟았다. 또 1967년에는
소화유치원을 개원하여 유아 교육을 실시하였으며, 1968년에는 강릉시 내곡동과 강릉시 성산면 위촌리에 교회 묘지를
조성하였다.
1970년대에
들어 강릉 본당은 외형적으로 성장했을 뿐만 아니라 신앙적인 측면에서도 더욱 성숙해 갔다. 그리하여 1973년 3월에는 ‘신용협동조합’을 창립하여
신자와 지역 주민들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주었고, 4월부터는 울뜨레야 · 효성회 · 안나회 · 빈첸시오회 등 여러 신심 단체가 설립되어 개인 및
가정 성화의 기초를 확립해 갔다. 그런 가운데 본당의 신자수가 증가하면서, 1974년 11월에는 옥천동 본당을 분가시켰고, 아울러 본당 명칭도
강릉 본당에서 임당동 본당으로 바꾸었다.
1981년으로 설립 60주년을 맞은 임당동 본당은, 11월에는 신자 재교육을 위한
교육관을 건립하였고, 1987년 10월에는 노암동 본당을 분리하였다. 또 1991년 4월에는 성당 보수 공사를 시작하여 청동 십자가, 제대,
14처, 스테인드글라스 등을 2년에 걸쳐 갖추었으며, 1992년 11월에는 본당 설립 70주년 기념 화보집을 발간하였다. 그리고 1998년
11월에는 노후화된 사제관, 수녀원, 유치원을 신 · 증축하여 본당의 면모를 일신하였으며, 2001년 10월에는 본당 설립 80주년을 맞아
사진전 등 경축 행사를 거행하였고, 12월에는 춘천교구 대희년 전대사 지정 순례지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출처 : 방상근, 한국가톨릭대사전
제9권, 2002년]
임당동
성당은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1955년에 완공되었다고 믿기엔 너무도 웅장한 모습을 하고 있다. 성당 내부는 조광호 신부의 유리화
작품에서 나오는 오묘한 색채로 가득 차 있다. 예수님의 탄생 예고, 노아의 방주와 무지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등 다양한 주제의
유리화들은 빛을 내뿜고 있다. 청동으로 만든 제대 십자가, 동을 소재로 한 십자가의 길, 나무로 만든 주수대 · 감실대 · 독서대 · 제대와
유화로 그린 제대와 독서대의 그림 등 성당 내부 전체가 조광호 신부의 성미술 작품으로 꾸며졌다.
성당에서 나와 왼쪽 건너편을 바라보면 강릉 임영관지가 있다. 이곳 칠사당과 임영관
삼문인 객사문에서 병인박해(1866년) 당시 많은 신자들이 순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강릉 지역의 순교자로 교회 공식 문헌에 나타나고 있는 이는
“치명 일기”에 기록되어 있는 심 스테파노 한 명뿐이다. “치명일기”에 있는 심 스테파노에 관한 내용을 보면 “본디 강릉 굴아위에 살더니, 무진
5월에 경포(포도청 포졸)에게 잡혀 지금 풍수원 사는 최 바오로와 함께 갇히었다. 치명하니 나이는 29세 된 줄은 알되 치명한 곳은 자세히
모르노라.”고 기록되어 있다.
임당동 성당은 1950년대 강원도 지역 성당 건축의 전형을 보여주는 건물로 외관의
뾰족한 종탑과 지붕 장식, 첨두형 아치 창호, 부축벽을 이용한 입면구성 및 내부의 정교한 몰딩 구성 등 의장기법에서 보존가치가 높을 뿐 아니라
영동 지역 신앙의 중심지로, 영동 지역 많은 본당의 모본당이라는 역사성도 겸비하고 있어 2010년 2월 19일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457호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강릉 임영관지(臨瀛館址)는 사적 제388호, 임영관 삼문(三門)인 객사문(客舍門)은 국보 제51호,
칠사당(七事堂)은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되어 있다. [최종수정 2011년 11월 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