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음시작 언덕길 조금 오르면 오른쪽 2층 가정집이 있었습니다.
그 가정집 1층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시작한 한 교회가 있었습니다.
이요세, 김경자 집사님 가정집으로 말 그대로 가정집 교회로 시작한 교회가 바로 사랑교회의 출발이었습니다.
비록 가정집 1층이지만 열정과 성령을 사모하는 마음은 누구도 따라올 수 없었던 교회인 것 같습니다.
목사님은 1남 1여를 둔 장인성 목사님으로, 특히 큰 아들 문호는 장애를 갖고 있어서 누구보다도 더 하나님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던 목사님 내외분이었지 않았나 싶습니다. 지금도 그 얼굴이 생생합니다. 비록 몸은 아프고 힘들었지만
순수한 그 얼굴을…… 지금은 하나님의 품에 안겨 있는 문호를 생각해 봅니다.
반지하 5평 남짓한 곳에서 매일 밤 12시 자정기도회로 성령의 역사를 사모하던 교회였습니다.
찬양과 기도하기에 반지하는 더 없이 좋은 곳이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소리가 외부로 나가는 것을 차단해 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으니까요.
어쩌면 지금 사랑교회의 모습은 그 때 밤마다 하나님께 부르짖었던 기도의 응답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도 듭니다.
약 1시간 동안 찬송과 기도로 하나님의 역사를 사모하던 교회로 시작하였습니다.
지금도 몇 몇 분의 모습들이 눈 앞을 스쳐 지나갑니다.
사람들의 숫자가 아닌 하나님만을 사모하며 하나님만 바라보기를 간절히 원한 갈급한 영혼들을 향한 하나님의 손이
그곳에 머물러 있었던 시간들이었던 같습니다.
매년 초가 되면 삼각산 민족봉, 통일봉에 올라가 1박2일로 밤새 기도하고 내려왔는데, 무슨 힘으로 그렇게 했는지
지금 돌아보면 그 또한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그 외에도 자주 산 기도를 다니며 하나님의 은사를 사모하는 목사님 사모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몇 년 안되어 건너편 상가 지하실로 교회를 옮겼습니다.
교회의 기관들이 규모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하던 시기로
주일학교의 규모도 70~80여명의 어린이들이 모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추억:
주일 예배 시간에 늦게 출석하는 어린이들이 자주 늘어나자 그 당시 어떤 교회에서 교회 문을 시간에 닫아 버리고
예배 드린다는 이야기를 듣고 당시 전도사이던 나는 교사들에게 공지하고 1달여 동안 공고 후 실제 그렇게 지하 교회로
들어가는 문을 닫아 버리기도 함. 한달여 동안 그렇게 하다가 다시 이전처럼 운영….
때론 교사들이 늦게 와서 들어오지 못하기도 함.(지금 생각해 보면 무모한 도전….)
혹자는 그것으로 상처를 입기도 하고 혹자는 눈물 흘리며 더 부지런해지기도 하고…..
지금 돌아보면 교회 부흥과 성장을 위해 성장하는 교회들의 밴치 마케팅이라면 무모하게 따라 했던 시절이었던 것
같습니다.
길음시작 언덕길 조금 오르면 오른쪽 2층 가정집이 있었습니다.
그 가정집 1층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시작한 한 교회가 있었습니다.
이요세, 김경자 집사님 가정집으로 말 그대로 가정집 교회로 시작한 교회가 바로 사랑교회의 출발이었습니다.
비록 가정집 1층이지만 열정과 성령을 사모하는 마음은 누구도 따라올 수 없었던 교회인 것 같습니다.
목사님은 1남 1여를 둔 장인성 목사님으로, 특히 큰 아들 문호는 장애를 갖고 있어서 누구보다도 더 하나님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던 목사님 내외분이었지 않았나 싶습니다. 지금도 그 얼굴이 생생합니다. 비록 몸은 아프고 힘들었지만
순수한 그 얼굴을…… 지금은 하나님의 품에 안겨 있는 문호를 생각해 봅니다.
반지하 5평 남짓한 곳에서 매일 밤 12시 자정기도회로 성령의 역사를 사모하던 교회였습니다.
찬양과 기도하기에 반지하는 더 없이 좋은 곳이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소리가 외부로 나가는 것을 차단해 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으니까요.
어쩌면 지금 사랑교회의 모습은 그 때 밤마다 하나님께 부르짖었던 기도의 응답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도 듭니다.
약 1시간 동안 찬송과 기도로 하나님의 역사를 사모하던 교회로 시작하였습니다.
지금도 몇 몇 분의 모습들이 눈 앞을 스쳐 지나갑니다.
사람들의 숫자가 아닌 하나님만을 사모하며 하나님만 바라보기를 간절히 원한 갈급한 영혼들을 향한 하나님의 손이
그곳에 머물러 있었던 시간들이었던 같습니다.
매년 초가 되면 삼각산 민족봉, 통일봉에 올라가 1박2일로 밤새 기도하고 내려왔는데, 무슨 힘으로 그렇게 했는지
지금 돌아보면 그 또한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그 외에도 자주 산 기도를 다니며 하나님의 은사를 사모하는 목사님 사모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몇 년 안되어 건너편 상가 지하실로 교회를 옮겼습니다.
교회의 기관들이 규모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하던 시기로
주일학교의 규모도 70~80여명의 어린이들이 모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추억:
주일 예배 시간에 늦게 출석하는 어린이들이 자주 늘어나자 그 당시 어떤 교회에서 교회 문을 시간에 닫아 버리고
예배 드린다는 이야기를 듣고 당시 전도사이던 나는 교사들에게 공지하고 1달여 동안 공고 후 실제 그렇게 지하 교회로
들어가는 문을 닫아 버리기도 함. 한달여 동안 그렇게 하다가 다시 이전처럼 운영….
때론 교사들이 늦게 와서 들어오지 못하기도 함.(지금 생각해 보면 무모한 도전….)
혹자는 그것으로 상처를 입기도 하고 혹자는 눈물 흘리며 더 부지런해지기도 하고…..
지금 돌아보면 교회 부흥과 성장을 위해 성장하는 교회들의 밴치 마케팅이라면 무모하게 따라 했던 시절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때는 교사들의 헌신과 희생이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지만 돌아보면 자신의 시간들과 열정을 주를 위해 사용한
모든 이들에게 참 감사들 드립니다.
당시 교사들의 열정도 참 뜨겁게 기도하며 헌신한 시간들이었다. 무엇보다 그들에게는 가습이 있었습니다.
교역자로서 보는 시각은 그들의 헌신과 열정이 부족해 보였어도 때론 토요일까지 시간을 내어 온전히 하나님께
자신을 드린 교사들의 모습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앞으로 나아가기에 바빠서 소중한 것들을 보지 못한 것을
재삼 돌아보게 됩니다.
이들의 눈물과 기도와 열정과 헌신이 하나님의 나라를 든든히 세워가게 한 원동력이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역사가 먼저지만요.
예배 전 교사 기도회를 통해 주일하교 부흥을 위해 열정으로 품었던 시간들이었습니다.
때론 전도 사역을 위해 함께 주일 오후 주변 전도 사역을 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인수 시장은 거의 한 집 건너 한 집 무속인 집이 자리를 잡은 지역이며
길음동 제일 언덕배기에는 천주교가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서라벌 고등학교 옆 상가 자리로 교회를 이전하였는데, 6층으로 된 건물의 5층으로 교회를 이전하게 되었습니다.
교회 내부를 새롭게 인테리어 하여 입당하게 되었죠.
대부분 인테리어를 교회 집사님들과 같이 진행하여 성전을 꾸몄습니다.
한번은 천장 공사를 위해 난간 설치를 하고 작업하다가 난간이 무너져 아찔한 사고를 당할 뻔 하기도 했답니다.
지금은 웃픈 옛 추억이지만 그 때는 정말 가슴 철렁한 사고의 현장이었다. 온통 양념가루에 범벙을 한 모습이 생생합니다.
주일 오후마다 청량리역 앞에 나가 찬양전도 사역을 하며 전도사역에 열정을 더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영혼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주께 돌아오는 역사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솔직한 마음으로 때론 쉬고 싶을 때도 있지만 어쩔 수 없이 가기도 했지요.
현 정릉3동 교회 부지를 매입
계약금 치르고 잔금 부족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기억으로, 40일 현장 여리고 돌며 기도했던 시간들도 있었다.
그 때는 교사들의 헌신과 희생이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지만 돌아보면 자신의 시간들과 열정을 주를 위해 사용한
모든 이들에게 참 감사들 드립니다.
당시 교사들의 열정도 참 뜨겁게 기도하며 헌신한 시간들이었다. 무엇보다 그들에게는 가습이 있었습니다.
교역자로서 보는 시각은 그들의 헌신과 열정이 부족해 보였어도 때론 토요일까지 시간을 내어 온전히 하나님께
자신을 드린 교사들의 모습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앞으로 나아가기에 바빠서 소중한 것들을 보지 못한 것을
재삼 돌아보게 됩니다.
이들의 눈물과 기도와 열정과 헌신이 하나님의 나라를 든든히 세워가게 한 원동력이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역사가 먼저지만요.
예배 전 교사 기도회를 통해 주일하교 부흥을 위해 열정으로 품었던 시간들이었습니다.
때론 전도 사역을 위해 함께 주일 오후 주변 전도 사역을 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인수 시장은 거의 한 집 건너 한 집 무속인 집이 자리를 잡은 지역이며
길음동 제일 언덕배기에는 천주교가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서라벌 고등학교 옆 상가 자리로 교회를 이전하였는데, 6층으로 된 건물의 5층으로 교회를 이전하게 되었습니다.
교회 내부를 새롭게 인테리어 하여 입당하게 되었죠.
대부분 인테리어를 교회 집사님들과 같이 진행하여 성전을 꾸몄습니다.
한번은 천장 공사를 위해 난간 설치를 하고 작업하다가 난간이 무너져 아찔한 사고를 당할 뻔 하기도 했답니다.
지금은 웃픈 옛 추억이지만 그 때는 정말 가슴 철렁한 사고의 현장이었다. 온통 양념가루에 범벙을 한 모습이 생생합니다.
주일 오후마다 청량리역 앞에 나가 찬양전도 사역을 하며 전도사역에 열정을 더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영혼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주께 돌아오는 역사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솔직한 마음으로 때론 쉬고 싶을 때도 있지만 어쩔 수 없이 가기도 했지요.
현 정릉3동 교회 부지를 매입
계약금 치르고 잔금 부족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기억으로, 40일 현장 여리고 돌며 기도했던 시간들도 있었다.
현재 사랑교회가 자리한 정릉 3동 교회로의 이전
정릉 3동에 위치한 부지를 교회 부지로 매입하기 위해 계약금을 지불하고 중도금과 잔금을 치루어야 했죠.
그러나 교회 자금 부족으로 인해 계약금 치르고 잔금 부족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기억으로, 40일 현장 여리고 돌며 기도했던 시간들도 있었다. 매일 저녁마다 집 주인 몰래 그 집 주위를 돌며 여리고 작전이랍시고
돌며 기도하던 시간들이 생생합니다.
이런 무모한 도전에 하나님은 응답하여 현 부지에 사랑교회를 헌당하게 되었습니다.
교회 건물 한 편은 목사님 사택으로 사용하였고, 지하는 주일학교 예배실로 사용하였습니다.
사연도 있었고 일들도 있었지만 나의 아들 3명은 전부 사랑교회 다닐 때 받은 선물들입니다.
전도사역 일지중
한번은 청년들과 무속인 전도를 하기 위해 기도하며 D-DAY를 정하여 전도를 나갔습니다.
2~3명 짝을 이루어 길음동 시장 무속인 집을 돌며 실제 무속인들과 접하는 훈련이었습니다.
무속인 집도 빨간 깃발과 흰 깃발 두 개를 걸은 집들을 중점으로 돌게 하였습니다. 우리가 표현하는 강신무라고 표현했습니다.
청년 2명과(누구인지 기억은 나지 않습니다) 함께 강신무 집에 들어가서 3만원 돈을 지급하고 점을 봐 달라고 했습니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은 무속인이 한 시간 정도 점을 봐 주었는데, 하는 내내 무속인은 답답해 하였고, 나에 대해 말하는
것이 전부 틀리게 나왔습니다. 아니 어쩜 내가 하나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랬을지도 모르는 이야기이겠지만, 사실적으로는
나의 현실과 모두 틀린 이야기였습니다. 예를 들면, 내가 39살에 큰 위기와 사고를 당한다고 했는데 그런 적이 없었습니다.
나의 장남이 죽었다고 했는데 지금까지 잘 자라서 사범대를 준비하고 있고, 결혼을 2번 했다고 했는데 지금 나의 아내가 나의
첫 아내입니다. 결국 중간에 무속인은 힘들어하며 쉬기를 몇 번하다가 박카스를 연거푸 마시다가 돈을 돌려 드릴테니 그냥
나가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나는 그 돈을 받지 않고 그냥 청년들과 나왔습니다.
그리고 종종 청년들과 무속인 신내림 하는 굿당을 가서 현장을 탐사하기도 했습니다.
청년들과 주일 오후 굿당 입구에 가서 그냥 쳐다보는 것이 다였습니다.
장독대를 타고 굿을 하는 무당, 깃대를 흔들어 대며 춤을 추며 굿을 하는 무당 다양한 모습들을 보며, 청년들과 함께 조용히
흑암을 꺽는 기도만 했을 뿐인데, 무당들은 굿을 하다가 멈추고 우리들을 힐끗 힐끗 쳐다보다가 ‘에이 퉤!’ 하며 밖으로 침을 뱉곤
했습니다. 그리곤 쉬었다 하자고 하며 굿을 멈추기도 했죠.
어릴 때 기억이 납니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 쯤 되던 해 우리 집에서 굿을 한 기억이 있습니다. 나는 어리기 때문에 집에 들어가지
않고 대문 밖에서 주기도문을 연신 외운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무속인이 나를 몇 번이나 쳐다보다가 결국 굿을 멈추고
돌아간 기억이 떠 오릅니다.
한 번은 정릉 2동 빌라 주택 부근 전도하러 갔는데, 병으로 죽어가는 병에 걸린 한 40대 청년을 만났습니다.
그에게 복음을 전하고 영접기도를 했는데, 죽어가던 얼굴에 빛이 날 정도로 변하던 모습.
70대 중풍에 걸려 말도 잘 못하던 남자 아버님께 복음을 전하고 영접기도를 하는데, 발음도 제대로 못하던 그 분이 영접기도를
또박또박 하는데 정말 같은 사람이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전도는 늘 편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항상 부담이기도 하고 어쩔 수 없이 할 때도 대부분이었다고 해야 진심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자에게도 역사하신 하나님께 감사할 뿐입니다.
간단하게 적어 보았어요…
항상 은혜가 충만한 하나님을 바라는 교회가 되기를 늘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신 교회, 말씀이 앞서가는 교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