附錄
行狀 작가의 行蹟
公姓柳氏 諱應秀 字公恕 晋州人也 始祖諱挺 仕高麗 爲左右衛上將軍
公의 姓은 柳氏이고, 이름은 諱(휘) 應秀이며, 字는 公恕(공서)이고, 晋州人이다. 始祖는 諱挺(정)으로 高麗때 벼슬하시어 左右衛上將軍(좌우위상장군)이 되셨다.
※行狀이란 죽은 사람의 행실을 간명하게 써서 보는 이로 하여금 죽은 사람을 직접 보는 것처럼 살펴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죽은 사람의 문생이나 친구, 옛날 동료, 아니면 그 아들이 죽은 사람의 世系·姓名·字號·貫鄕·官爵·生卒年月·子孫錄 및 평생의 언행 등을 서술하여 후일 史官들이 역사를 편찬하는 사료 또는 죽은 사람의 銘文·만장·비지·전기 등을 제작하는 데 자료로 제공하려는 것이다. 狀은 모양이라는 뜻으로 행동거지를 의미한다. 행장의 기원은 《文章緣起》에 의하면 漢代 胡幹이 揚元伯의 행장을 지은 것에서 시작되었다.
※우리나라는 그리 오래되지 않아 《續東文選》에 처음 보이기 시작한다. 조선 초기 洪貴達의 <廣陵府院君李克培行狀> 바로 그것이다. 조선 후기 행장은 장황하고 번다하게 많이 쓰는 것이 좋은 것으로 인식되어 奏疏의 始末, 사건의 배경 그 議論과 행동거지의 철학적 근거, 異端을 배격해야 하는 이유, 심지어는 供招(죄인이 범죄 사실을 진술하던 일)에 대한 내용과 그 의리의 타당성까지 세미하게 적어 그 양이 1권의 책자가 된 것이 한 둘이 아니었다. 이는 宋代 黃幹이 스승 朱子의 행장을 쓰면서 장장 40여 장을 쓴 데서 연유된 것으로, 요약하면 주자의 거취는 바로 世道의 흥망과 직결되며 후학의 준거이므로 일반적인 행장의 체와는 같을 수 없음을 강조하였다.
五世至諱栯 忠烈王二十五年 以密直使 如元賀聖節事 見麗史 又六世至諱自濱 以天順壬午 文壯錄 我成宗廟 佐理原從勳 又二世至諱祖謙 官縣監 葬于安城 辰峴里 酉坐之原 子孫遂世 居墓下 又十世至雲麟 生四男 長諱遠泰 無嗣 次諱遠厚 官監役 次諱遠模 次諱遠朋
5世에 이르러 諱栯(욱)은 忠烈王 25年에 密直使(밀직사)로서 元나라 聖節에 가신 일이 高麗史에 보이며, 또 6世에 이르러 諱自濱(자빈, 11世孫)은 天順 壬午年(1462년, 세조8년)에 文科에 壯元(장원)하셨다는 記錄이 있으며, 朝鮮 成宗朝에 佐理原從(좌리원종) 공신으로 錄勳(녹훈)되었고, 또 2世 諱祖謙(조겸, 13世孫)에 이르러서는 官職이 縣監(현감)으로 安城 辰峴里 酉坐(유좌) 언덕에 산소가 있고, 子孫들이 대를 이어 墓所 아래에 살고 있다. 또 十世에 이르러 雲麟(운린, 23世孫)은 아들 넷을 두었는데, 長子가 諱遠泰(원태)이나 아들이 없고, 둘째 諱遠厚(원후)는 官職이 監役이며, 그다음은 諱遠模, 그다음은 諱遠朋이시다.
※栯산앵두 욱. 聖節: 聖人이나 임금의 生辰을 祝賀하는 名節. 天順: 중국 명나라의 제6대 황제(朱祁鎭)인 英宗 正統帝가 復位하여 사용한 연호로 1457년을 원년으로 1464년까지 8년 동안 사용.
※五舍人洞: 조선시대 한성부 행정구역을 동서남북中의 오부로 나누고 그 아래에는 坊과 契와 洞을 두었는데, 52방으로, 동부 12방 중 어영청 중영에 속하는 坊內에 五舍人洞이 있으니, 곧 諱自濱公이 살던 곳이다. 자빈의 아우 自漢·自汾과 그 손아래 매부 金謙光·辛仲琚가 모두 의정부의 舍人이 되었기 때문에 인하여 洞名이 된 것이다.
※原從功臣: 조선시대에 정치적·군사적 사태를 해결하면서 큰 공훈을 세운 공신들은 勳封功臣이라고 하였는데, 正功臣과 原從功臣이 있었다. 정공신은 정식으로 공신호를 받고 공신 등급을 받은 공신이고, 원종공신은 정공신 이외에 원종공신이라는 공신호를 받은 공신이다. 佐理功臣은 성종 즉위에 찬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