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희(정승)는 고려 공민왕 12년(서기 1363년) 개성 판강릉부사(지금의 군수) 황군서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망해가는 고려를 지켜 보았고, 조선조가 개국된 후 태조, 정종, 태종, 세종 등 4대 임금에 걸쳐 무려 74년 간을 관직 생활을 유지하며 육조 판서를 두루 거치고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을 모두 지냈다. 영의정을 19년 지냈으며, 3정승을 지낸 기간이 24년이 된다. 그는 조선조 제일의 명재상으로, 평생을 오로지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살신성인(殺身成仁:자기 몸을 희생하여 仁을 이룸)의 자세로 초지일관하였던 우리 민족의 영원한 큰 스승으로 살아 있는 분이다. 황희는 명재상(名宰相)이라는 세인들의 기대에 걸맞게 훌륭한 업적과 숱한 일화를 남겼다.
황희는 어느덧 여덟 살이 되었다. 추석을 며칠 앞 두고 어머니 심부름을 다녀오다가 호숫가에 이르러 발길을 멈추었다. 그곳에는 어른 키 만큼이나 큰 잉어를 잡은이가 팔려고 흥정하고 있었다. 잉어는 아가미를 들먹거리며 뒤척이고 있었다. 황희는 그 모습을 보고 한없이 애처롭고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마치 제발 구해 달라고 애원하는 것 같았다. 황희는 가격이 얼마냐고 물어보니, 닷 푼만 내라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돌 때 받은 조그만 반지를 손가락에 매달고 다니고 있었는 데 잉어 값으로 금가락지를 빼주고 잉어를 호수에다 놓아 주라고 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부친은 황희를 불러 “너는 더욱 열심히 공부하여 벼슬길에 나가서도 만백성들을 그러한 마음으로 보살피는 참다운 목민관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침을 주었다. 이때부터 황희는 남다른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공민왕 22년, 황희는 나이 열 살 되던 가을이었다. 황희가 글방에서 돌아왔을 때였다. 아버지 황군서의 얼굴에는 어떤 문제를 놓고 뭔가 고민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황희가 물었다. 아버님 무슨 일이 있는지요?
황군서(부친); 아, 아무것도 아니다..
황군서의 앞에는 사냥꾼 차림의 중년사내 한 명과 얼굴이 온통 털투성이인 30대 사내 하나가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이 광경을 목격한 황희는 어떤 송사(訟事) 문제를 해결하려고 찾아온 사람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들은 빨리 판결을 내려줄 것을 재촉했다.
“사또 마님, 어서 판결해 주십시오.” “저 수달은 소인의 것입니다요.”
“아니 옵니다. 소인의 개가 잡았으니 소인의 것입니다요.”
두 사람 앞에는 매우 드물게 크고, 털이 탐스러운 수달 한 마리가 있었다.
황희가 내막을 알아보니 이러하였다.
사냥꾼은 어떤 부자에게서 수달의 가죽을 구해 달라는 특별한 주문을 받았다. 그래서 사냥 나갔다가 마침 야산에서 수달을 발견하고 뒤를 쫓았다. 가급적이면 상처를 내지 않고 잡으려고 지칠 때까지 쫓아다녔다. 그때 갑자기 거의 송아지만 한 개가 나타나 수달을 덥석 물고 자기 주인에게로 가져갔다.
수달을 쫓전 사람과 개 주인은 서로 수달이 자기 것이라고 다투다가 황군서에게 판결을 내려주십사하고 찾아온 것이었다.
“사또마님, 제가 처음부터 수달을 발견하고 계속 뒤쫓아 잡기 직전에 개가 나와서 수달을 잡았으니 소인의 것이 분명하옵니다.” “아니옵니다, 아무리 먼저 쫓았더라도 실제로 잡은 것은 소인의 소유인 개였으니, 당연히 제 것입니다요.”
황군서는 판결을 빨리 내려야 할 터인데, 두 사람 모두 일리가 있으니 실로 난감하였다. 혹시 판결을 잘못 내리기라도 하면 현명하지 못한 목민관이라고 얼마나 원망을 들을 것인가! 그래서 고심하고 있던 터였다. 그때 황희가 나서면서 말했다.
“아버님, 이 문제에 대한 판결권을 소자에게 위임해 주십시오. 제가 잘 처리하겠습니다.”
“네가 처리하다니, 어떻게?” “아버님께서는 가만히 계시기만 하시면 되옵니다.”
황희는 의젓한 목소리로 위험을 갖추고 두 사람에게 말했다. “두 분은 들으시오, 사또께서 이 문제를 저에게 위임하였소, 사또의 대리 역할로 판결을 내리겠소. 먼저 수달을 발견하고 쫓은 사람은 무엇 때문이었소?”“네, 소인은 수달의 가죽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개의 주인에게 묻겠소? “분명히 집의 개가 수달을 잡았소” “네, 그러합니다.”“개는 고기는 먹되 가죽은 먹지 않지요? 그 말에 대답을 하시오.”“예 그렇습니다.”
“먼저 수달을 발견하고 쫓은 사람은 가죽이 목적이었고 개는 고기를 탐했던 것이오, 그러니 수달을 먼저 쫓은 사람은 가죽을 갖고, 개의 주인은 그 고기를 갖도록 하시오.”
어린 황희가 판결을 내리자, 황군서 및 모든 관속들은 그것을 지켜보고 있다가 무릎을 치면서 탄복을 금하지 못했다.
이 광경을 지켜 본 황군서는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두 사람에게 말했다. “자 판결을 내렸으니 그대로 따르라.” 그들은 고맙다며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물러갔다.
훗날 조선조를 통틀어 첫손 꼽히는 명재상 황희는 어릴 때부터 남 다른 총명함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註)① 그는 어덟 살이 되었을 때 제자백가와 온갖 경서들을 두루 터득하였고 문리(文理)가 환하게 틔었다. 그는 어린 나이임에도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알았고 선비 집안의 후예답게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였으며 언행이 비범하였다.
②김선(金仙), 황희정승과 청백리에서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