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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런 일들이...
2024 06 12. 망종(芒種) 지나 엿새.
학문의 시작: 분할?
서양에서 철학이 학문의 토대역할을 하는 것은 플라톤이 “국가(폴리테이아)”편에서 지식(에피스테메)과 견해(독사)를 구분하였고, 그 중에서 잡다한 견해들에서 기준을 삼을 수 있는 지식(에피스테메)을 정립하기 위해서 어떤 방법과 체계를 세우느냐에 관심으로 학문이 성립한다고 볼 수 있다.
플라톤은 네 단계(갈래)로 설명한다. 위로부터(또는 진리로부터) 이데아(관념) / 수학적 도형 / 사물(물체) / 그림자이다. 전자의 둘은 지식이 되며, 후자의 둘은 보는 사람마다 달리 규정할 수 있기에 학문이 아닌 각자의 견해라고 한다. 그런데 서양 철학사의 흐름은 위에서 아래로 체계를 설명 또는 해석하는 경향과, 아래에서 위로 학문들을 정립하는 경향으로 나뉜다. 이는 얼핏 보아 동양철학에서 음양과 그리고 4상으로 분류하는 것으로 비교해 볼 수 있는 것 같지만, 동양은 네 가지 단위가 서로 독립적이고 상보관계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4상은 인성들의 결합 방식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불교에서 둘이 아니고 넷도 아니고 여덟도 아니라는 나가르주나의 중론의 견해도 순수 수학적 분류일 것 같지만 삶의 터전에서 사는 이들이 8명이라 해도 각각에게 어느 것이 옳은 지를 먼저 규정하면 다른 쪽이 옳지 않는 것이 되니, 그러지 말자는 것으로 생각하면, 공도 색도, 공색도 색공도, 공공색도 색색공도 등등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세상이 무엇인데?라고 물으면, 색이니 공이니 따지지 말고, 자신이 노력하여 규정 없는 세상에서 잘 살아가라는 노력을 해보라는 것이며, 보살에 이르는 길에서 어디에도 매이지 말라는 점에서, 가정과 제도를 떠나 구도의 길을 걷는지도 모른다.
서양학문에서 플라톤의 4가지를 학문의 맞고 틀림(진리와 거짓)으로 분할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읽고서, 플라톤의 작품과 그 이후 철학적 작품을 읽는 것은 내가보기에 무례하며, 동양철학으로 보아도 어린애 수준이고, 불교로 보아도 사미의 수준이다. 그런데 4가지를 분류하고 각각의 고유성이 있다고 하기에는 분명하게 전자 둘과 후자 둘 사이에 구분이 있어서, 각각을 고유한 것으로 보기 어려다. 크게 보아 둘로 나눈다는 점에서 서양학문을 분할이라고 하는 이들이 있다. 이런 말을 들을 때, 동양의 현자들은 서양이 자기 이외의 것을 지배하려는 제국주의라고 한다. 즉 분할하라 그리고 통치하라(diviser et régner, lat, divide et impera).
그러나 서양에서 학문의 이분 또는 사분의 분할은, 안다는 것에 정확성과 체계를 갖고자 하는 것이지 분할하여 나는 맞고, 식민지의 피지배자들은 틀렸다고 하여 식민지 통치를 위한 도구가 아니었다. 이런 도구는 서양의 그리스 철학을 오용하고 남용한 크리스트교 신학이 로마의 제국주의를 모방하여, 우리의 신은 맞고 다른 신들은 틀렸다고 하면서 다른 세상을 지배하고 예속하려는 데서 비롯되었다.
플라톤의 철학에서 분명히 크게 보아 2분법의 분할이 있다고 하는 것은 크리스트교 신학과 황제의 참주제와 결탁으로 이론화하고 제도화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야 서로마든 동로마든 자기 체제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철학은 인간사의 어려운 문제를 풀어서, 당대와 다음 대에서 그 방법을 따라 교육하고 학습하면 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그래서 플라톤의 이론에서, 4가지로 분할이 아니라 상부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설명과, 심층(하부)에서 위로 올라가는 두 가지 방식을 가르쳐주는 것이라고 읽기 시작한 것은, 플라톤 이래 600여년이 지난 난 뒤 알렉산드리아 학자인 플로티노스였다.
상부에서 하부로, 심층에서 상층으로 두 갈래의 길로 설명으로 했을 때, 유일신앙은 이것조차 하나는 신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신의 길이 아니라고 이분화 시키려 했다. 결국 중세 1300여년 동안에 상부에서 하부로는 맞고, 심층에서 상부로는 거짓이라며, 악마의 꼬임으로, 이단 또는 종파분자로, 또는 이방종교의 반역으로 여겼다. 유일신의 기준에서 보아, 자기와 다른 것을 거짓, 악마, 반란이라 하여 마남사냥 하였고, 이로 인해 어느 누구도 상층에서 하부로 경로에 대해 공공연히 반박하지 못했다. 그 반박으로 기존의 상층에서 심층이 거짓이라고 쏘아 올린 이는 철학자라기보다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였고, 그의 망원경을 통해 지구를 덮고 있던 하늘 뚜껑이 없다는 것을 알아챈 것은 도미니크파 신학자인 브루노였다.
분할보다 우선 분류가, 삶에서 고통을 벗어나게 하는, 또는 로마 제국의 절대적 권력아래서 비참함을 벗어나게 하는, 중요한 학문적 방향을 제시 할 것인가? 나로서는 그렇다고 한다. 분할을 생각하는 자들은 상부가 우선이고 분류를 생각하는 자들은 각각의 삶의 고유함을 생각하게 되어 있다.
분할(division)과 분류(classification)
운동(스포츠)이란 측면을 생각해보자, 분류로서 축구, 농구, 마루운동, 피켜, 마라톤, 십종경기 등이 각각의 고유성이 있다. 축구의 손흥민이 피겨의 김연아를 대신할 수 없을 것이다. 삶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왜 제도 속에서는 하나의 정점에 통치자와 각 행정부서들, 그 아래 실무 담당으로 그리고 만백성으로 생각할까? 사람들은 편하게 살기 위해서라고 한다. 편하게 살면, 그 제도가 사람들의 각각의 고유성을 발휘하게 하는 것일까? 아니면 제도 속에서 아웅다웅 경쟁하면서 누가 이기고 누가 지는 것인가?
철학이 모든 학문의 위계상 제일 위에 있다는 생각을 한 것은 모든 자료들을 다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제일 위가 아니라 그저 토대일 것이다. 한 인간이 수학, 물리학, 생물학, 심리학을 한꺼번에 다룬다는 것은 19세기 중반에서부터는 생각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여러 학문의 분과학이 분류되고 발전된 것도 이 시대였다. 그래도 하나의 위계가 성립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상층 우위, 즉 사람 위에 사람있고 사람 밑에 사람 있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적어도 1859년 비유클리드 기하학과 진화론이 성립한 이래도 학문들 사이에 위계라는 생각은 거의 사라졌다. 철학은 어느 학문이든 거쳐가야 하는 기초정도로 생각한다. 이것도 좋은 표현은 아니다.
초등학교, 중등, 고등 과정을 거치면서, 교과과정들은 사물들을 다루는 여러 방식들을 배우고, 제도 속에 습관처럼 살아가게 한다. 그 배움은 인류의 학문 발달사의 전개 양식과 거의 같다. 어느 나라든 어린 시절 산술을 배우고, 터전의 도덕을 익힌다. 중등에서 물체들을 분할하고 조립하는 방식과 해석기하학을 배우고, 고등에서 물체를 보다 세분화하여 들어가 원자니 분자니 하면서 미분방정식과 더불어 배운다. 인류가 만든 사회에서는 이 정도의 공통의 과정을 거친다. 이런 과정을 보면, 상부(이데아, 관념)에서 하부로의 방향이 아니라, 사물과 물체의 다룸에서 추상의 개념과 관념으로 간다는 것을 깨닫는다. 염처경도 그러하고 대학의 격물치지도 그러하다.
사람들은 분류를 하고 나면 분할로서 사회의 여러 삶의 방식을 생각한다. 나누어져 있다고, 그렇지 않다. 그 분할을 위계를 정립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제도상으로 익숙해진 습관 상으로, 위계의 일반적 방식으로 법체계를 말한다. 헌법, 법률, 시행령, 조례 등으로 위계를 세운다. 이 방식은 지배 방식의 편의를 위한 것이기도 하고, 삶의 질서를 세우기도 한다. 그렇다고 삶의 터전을 위계를 기준으로 선을 긋듯이 분할할 수 없다는 것도 안다. 터전의 다양하고 잡다함에서 일어나는 관계들은 위계로서 해결할 수 없는 난제들을 안고 있다. 난제를 만드는 것은 터전이 아니라, 지배의 적용방식이 풀수 없기 때문일 것인데, 지배방식은 맞고 터전에서 삶의 다양성은 틀리다는 관점을 갖는다. 그래야 안정되고 편하다고 생각하는 사법체계 중심주의자들이 있다. 이들은 상부와 심층 사이에 갈등이 생긴다면, 당연히 심층이 잘못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심층을 개돼지 취급하려든다.
현실적으로 우리나라에서 경제적 빈부차이는 난제이며, 인류가 고민하는 것으로 지구가 더워지고 있는 것도 난제일 것이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자고 노력하자는 말은 할 수 있는데, 풀 수 있는 방법은 쉽지 않다. 사람들이 철학을 넘어서, 정치경제학, 기상학, 지구과학자 등을 통해 해야 한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이런 노력을 하는지도 의문이고, 그 해답을 내놓아도 이들의 말을 들을 지도 의문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가난의 해소와 지구 온난화를 삶의 양식을 상부상조로 바꾸면 될 것이다. 이익의 추구를 넘어서 잉여착취를 통해 부를 삶의 기준으로 삼는 한 해결책은 없을 것이다. 돈이면 세상에 못할 것이 없다는 도적과 깡패가 상부를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상부의 탐욕과 오만과 치졸함에서(탐만치), 그들은 삶의 터전의 해결의 이야기보다, 자기들의 축적과 착취를 정당화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김건희의 디올벡과 향수가 중헌가, 인민의 삶이 중헌가? ‘상부에서 하부로’라는 착취방식과 종교의 지배방식이 패거리(카르텔)를 견고하게 만들고 있다. 그렇게 가는데 또 하나가 끼어들었다. 인공지능의 발달이다.
분할과 분류의 두 가지 방식에서 분할의 방식은 학문 발달사에서 뿐만 아니라, 국가 간의 지배와 식민지, 국내에서 빈자와 부자 사이의 차이를 크게 만들고 있다. 그럼에도 산골과 토지에서 살던 이들도 인공지능의 역할과 확장을 느끼고 산다. 그 확장이 교육과 더불어 병행해 가는데, 분할의 방식을 강화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지배의 방식은 여전하다. 로마의 총독부와 같은 미대사관이 있다. 현 정부는 자본 제국 지배 아래 마름을 역할을 하려는 일본이 행하는 분할을 받아들이고 있는 형국이다. 미국 밑에 일본 그 밑에 오천만 남쪽을 편입시키려 한다. 분할의 지배는 습관(아비투스)처럼 이어지고 있다. 백성들은 자치와 자주가 이루어질 수 있는가를 생각할 겨를이 없는 것 같다.
플라톤의 사유를 빌어, 제국과 유일신항, 그리고 지식이 패거리를 형성했다. 그러나 플라톤이 상층의 지배만을 사유하지 않았다. 그것은 플라톤을 잘 읽는 이들에게서 들을 수 있는데, 그나마도 들으려 하지 않고, 이 방향이 맞다고 주장들을 하고 있다.
분할이 지배 방식이라면, 분류는 상부상조이다. 축구 리그에서 한쪽 팀이 우수선수들만 있고 나머지 팀이 오합지졸이면, 당연히 한쪽 팀만 이긴다. 보는 사람도 흥미없지만, 운동하는 사람도 재미없고 더 나은 훈련과 연습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 경기들은 재미없는 경기가 된다. 각 팀의 선수들이 서로 실력이 비슷하게 분배하여 각 팀이 나름의 전술을 짜고 다른 팀과 경기를 할때면, 할때마다. 다른 전술과 선수들의 실력도 향상될 것이다. 비유적이지만 삶의 터전에서도 마찬가지 이리라. 분류에서 각각의 고유성을 잘 이끌어내면 많은 좋은 운동방식들이 있을 것이다. 운동경기 만이 아니며, 삶의 어려움을 해결하려는 학문들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하나의 체제와 체계는 다른 방식을 배제하는 문제일 뿐만 아니라, 정체성은 그 체제를 부패하고 붕괴하여 파멸하게 할 것이다. 상부상조는 불평등과, 분할[분단]이라는 시대 아픔을 해결할 방식일 것이다.
분류와 정치 판도
정치 지형도에서 좌와 우를 말하고, 많은 이들이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고 한다. 좌와 우를 나누는 것은 분할이다. 그런데 분할의 대립보다, 삶의 이야기들을 드러내는 지형도라거나 영역별 가지치기(운동경기 종류)정도로 생각하면서, 우리나라의 사유 방식을 바꾸어 볼 필요가 있다.
국회 본회의장에서 좌석의 배치에서, 연단에서 보아, 반원형의 좌석들 배치에서, 좌측에 앉는 이들로부터 우측에 앉는 이들을 분류해 보는 방식으로 생각해보자. 좌석의 배치는 분할이 아니라, 우리나라 유권자들의 성향의 분류라고 생각해보자. 분류는 빛의 스펙트럼에 비유할 수 있다. 물론 프랑스 대혁명에서 제헌의회의 의원들의 배치에서 좌측에서부터 혁명의 지속하자는 쪽에서 우측에는 혁명을 과도함을 줄이자는 쪽이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올해 22대 국회의 좌석배치를 이렇게 해보면 분류에서 진솔한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본회의에서 국회의원의 좌석의 배치를 정하는 방식은 국회에서 정하는 법률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시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방향으로 정해졌으면 하는 것이다. 좌측에서부터 진보당(3), 조국혁신당(12), 사회민주당(1), 기본소득당(1), 더불어 민주당(170), 새로운 미래, 개혁당(3), 국민의 힘(108)일 것이다. 이런 분류에서 깨어있는 시민들이 어느 쪽에 있으며, 나라를 팔아먹더라도 그 당을 찍는다는 표를 얻은 쪽이 어느 쪽인지를 분명하게 느낄 것이다.
분류를 하고서 비율을 생각하건데, 사회와 제도가 발전한다고 하면, 또는 세상이 조금씩 변하고 있다고 한다면, 달라진 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80년대 군부독재 시대와 비교해본다면 이 스펙트럼의 변화를 알 수 있다. 좌편을 진보, 우편을 보수라고 할 때는 스펙트럼에서 분류된 다발들이 구분될 경우이다.
펼쳐진 스펙트럼을 다발의 우측을 상층으로 다발의 좌측을 심층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의회에서는 평면인데, 왜 상층과 하층으로 구별하였는가? 백성의 의사 반영에 상층과 심층의 구별이 있었던가?
어느 시대나 상층으로부터 사유와 심층으로부터 사유가 있었다고 한다. 헤겔 식으로 말하면 고대에서는 당연히 황제[참주]로부터이고 황제가 자유였다고 한다. 중세에는 왕으로부터 사대부 또는 귀족이 있고, 이들 소수가 자유였다고 한다. 프랑스 대혁명을 거치면서 입법부와 행정부, 그리고 이를 선출하는 부르주아들이 주류를 이루면서 많은 이들이 자유를 누린다고 하였고, 헤겔은 시민들이 자유를 누릴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백성들이 자유를 누리기에는 역사가 더 전진해야만 했다. 시민들 또는 인민들이 자유선거를 하는 것은 20세기였다.
현대에 와서 사람들은 문제 해결을 위해 좌측 51% 우측이 49% 정도로 이루어질 때 그래도 전진한다고 했다. 우리나라 스펙트럼에서 더불어 민주당을 중도쯤으로 보면, 우측이 매우 우세하게 보인다. 이런 현상은 대의민주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는 시민이 주권을 제대로 행사하기 위해, 잘못하는 정치인을 소환할 수 있는 소환제와 파면제를, 그리고 시민이 헌법과 법률들을 제정할 수 있는 법률제정권을 가져야 할 것이다.
현실은 어떠한가?
51대 49가 바람직한 사회일 것이라고 했다. 이런 노력은 입말에서부터이다. 문자화 또는 문서화는 나중이다. 입말로부터 문자화가 인민의 삶의 터전을 기초로 하는 경우가 인민이 기본심급이다. 법률적으로 조작 검사가 대법원에서 무죄를 하고 싶어도, 인민들이 소환권을 갖는다면, 그에게 유죄를 평결하는 것이 최종심금이다. 6월 6일 부산의 한 고층 아파트에서 욱일기를 붙였을 때, 그 집 문에 항의의 쪽지와 그 사람의 신상을 공개하는 것도 한 방법이었다. 그 죄를 공공연하게 물을 수 있어야 하는데 법률에 없기에 물을 없다고 하였다. 제도에서 문서화보다 먼저가 입말이다. 보다 이전에 일본기를 내건 사건도 인민의 평결에서 그 사람의 믿음에 대한 단죄하였고, 그는 장사를 접었다고 한다. 이 두 사건의 평결에 대해 우파들도 두 사건자들에게 신뢰를 표시하지 않고 평결을 따른다. 깨어있는 시민의 평결이라고들 한다. 욱일기 다음으로 디벡의 평결은 언제쯤일까?
10알단, 일베, 할배부대, 엄마부대, 태극기부대 등이 부일파와 숭미파 같은 정부에 힘입어서 야바위짓 같은 짓으로, 전문가 집단의 운동들과 전문블로그들의 시대의 시민운동을 무화시키고서, 있어도 없는 것(투명인간)처럼 만들고 있다. 후자의 운동들이 민중 또는 시민의 상호보조를 이루려는 방식으로 생각한다면, 전자들에서는 일부 교회세력과 제국의 앞잡이들이 이들을 돈을 미끼로 집결시켰고, 게다가 후자들을 빨갱이로 몰았다. 돈의 홀린 자들이 유투버와 인스타그램에서도 영향자(인플루엔서)들로서 활동하면서, 시민운동가들과 진솔한 활동가들을 밀어냈다. 이런 경향(트랜드)들이 전면에 나서면서 소멸해가던 극우같은 이들이, 마치 서북청년단처럼 (국힘의 힘을 입어) 되살아났다.
그런데 이들의 열광을 짐짓 모른 체 하는 이들이 점잖은 카톨릭과 일반 교회세력이며, 은근슬쩍 부추기기기까지 한다. 이들은 공익보다 사익이 우선이라고 가르친다. 다른 한편 법률을 다루며 부와 지위를 누리는 법원과 변호사들이 있으며, 이들은 돈을 벌면서 잘 살면서 소문없이 지내고 싶어 한다. 그런데 공직에 나가다가 부의 착취가 드러나도 실력이라고 뭉갠다. 이들이 민중의 저항에 대해 저항하는 자들의 근원에 있다. 이를 본뜬 것이 거부권행사이다. 거부권에 대한 거부는 인민의 최종심급이어야 한다.
이렇게 사익을 노리는 자들이 뿌리를 내리며 병렬로 퍼져가다가, 선거기간에는 한 몸의 수많은 머리들을 가진 히드라처럼 움직인다. 이 히드라의 결집이 인공지능(AI)과 큰 자료(빅데이터)를 다루고, 게다가 소프트의 역량들의 히드라들이 튼튼하지 못하기에 내부와 하부에 인프라처럼 하드웨어 장치를 만들고 통합할 것이라 한다. 이에 비해 2025년에 다른 방식이 나올 것이라며 기다려보자고 하는 이들도 있다.
이런 통합과 패거리(카르텔)를 신앙처럼 갖는 자들이 파라노이아, 편집증자들이다. 이를 광기라 부르다. 이에 비해 다양한 가지들의 각각이 배우고 익히며 노력하여 강도(내공)를 쌓는 쪽은 스키조(분류자들)이다. 스키조는 분열이라기보다 분화이며 인민의 확산이다. 말하자면 수렴을 주장하며 위계를 세우는 쪽이 우파이고, 분화하며 상부상조와 호혜를 이루어가는 쪽이 좌파이다. 이런 설명이 분할이 아니냐고 물을 것이다. 분화와 분류를 먼저 생각하는 것은 산다는 터전을 튼튼하게 자주를 하자는 것이고, 그 터전에서 필요에 따라 제도를 만들고 제도 속에서 공공의 업무를 우선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분할의 사고는 저편이 아닌 내편, 내편 속에서 내 것이라는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자들이라, 사실상으로 공공의 적인 셈이다. 프랑스 사상가인 프루동이 괜히 부의 축적이 도둑질이라 했겠는가?
21세기의 전반부의 반이 흘러간다. 한 때, 벽에다가 라도 욕하는 시민, 깨어 있는 시민의 흐름이 거대할 때 촛불에서도 입말이 심층에서 솟아났다. 10알단 이래로 돈에 집착하는 이들의 놀이터가 된 공론의 장에서 입말은 극우의 선전에 포획된 듯하다. 21세기 1/4분기가 지나가는 국회를 바라볼 것이 아니라, 인민이 거부권에 대한 거부, 모화파, 부일파, 숭미파로 이어지는 300년 역사에서, 79년의 동안의 입말이 제대로 소통하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퀴니코스학파를 이어받은 스토아학파가 권장하다. 노력(포노스, πόνος)하고 내공 (토노스 τόνος) 을 강하게 수련하고 실행하자고. (5:06, 57QKJ) (6:10, 57Q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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