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법조대사는 출생과 입적한 연대는 분명하지 않지만, 여러 전기를 종합한 활동 시기는 당나라 대력(大曆766~778년), 정원의 해(貞元785~704)로 추정된다.
출생지 역시 미상인데. <신수왕전에는> 남양사람(南陽人), 《정토오회염불약법사의찬》에는 양한(梁漢)나라 사문이라 되어 있다.
법조대사는 출가후 동쪽의 오(吳, 강소성)나라에서 유학한 후 초조 혜원대사를 흠모해 여산(廬山)에 들어가서 반주삼매를 닦았다.
다시 765년부터 이듬해까지는 남악형산(南嶽衡山)에 올라가 승원대사를 스승으로 섬기면서 정토법을 전수받았다.
766년 4월 15일 하안거때 남악 미타대(彌陀臺)에서 시작한 반주삼매는 매년 여름 90일동안 수행하였다.
- 반주삼매란 초기 정토종에서 《반주삼매경》에 의해 수행하는 염불법으로, 혜원대사도 반야대(般若帶)에서 123인과 함께 반주삼매를 닦았을 정도로 가장 오래된 고차원의 염불법이다.
《반주삼매경》에는,
'홀로 한 곳에 머물러 서방의 아미타불이 현재 계신 것을 염하고, 들은 바를 마땅히 염하라. 여기서부터 천만억의 불국토를 지난 곳에 있는데, 그 국토를 수마제(須摩提; 극락의 범어)라 이름한다. 일심(一心)으로 그것을 염하되, 하루 밤낮 혹은 7일 밤낮을 정진하여 7일을 지난 이후는 부처님을 친견할 수 있다.'라고 설해져 있다.
말하자면 현생에 염불삼매속에서 아미타불을 친견하여 가르침을 받고, 명이 다한 즉시 아미타불의 접인을 받아 윤회를 벗어난 극락정토에 화생하게 되는 염불법이다.
법조 대사는 승원 대사의 가르침에 따라 반주삼매를 닦은 결과 마침내 삼매를 성취하고 ‘오회염불(五會念佛)’이란 독창적인 염불행을 닦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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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조(法照)스님은 당(唐)나라 대력 연대의 스님으로서 이 기록은 법조스님께서 친히 기록해 놓은 기사에 의지(依支)한 것임을 알아두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스님은 숙세(宿世) 선근(善根)을 많이 닦으신 아주 불연(佛緣)이 많으신 스님으로 보통 스님들과는 전혀 다르신 분임을 또한 알아두기 바랍니다.
이 스님께서는 일찍부터 정토(淨土)발원(發願)을 하여 염불수행(念佛修行)에 전념(專念)을 해오셨다고 한다.
대력 이년 형주 운봉사(運峰寺)에 계실 때에 일이었다.
이 스님께서는 항상(恒常) 남달리 밤잠을 안자가면서 정진(精進)에 노력하여 애를 써오셨다는 것이다.
하루는 승당(僧堂)에서 아침 공양(供養)을 드시는데
죽발 위에 이상한 구름이 생겼다.
오색(五色)이 아롱진 아주 아름다운 상운(祥雲)이 일어나면서 그 구름 안에 한 산사(山寺)가 나타났다. 그리고는 그 산사에서 동북간(東北間)으로 약 5십리(五十里) 정도(程度) 떨어진 곳에 또 산이 하나 나타나며 그 산 밑에는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있는 것이 보이며
그 시냇물 북(北)쪽으로 조그만한 석문(石門)이 또한 보이더라는 것이다.
그리고는 그 석문안으로 약 5리(五里)쯤을 들어가서 커다란 절이 하나 보이는데 그 절앞에 커다란 현판(懸板)이 걸려 있어 <대성죽림사(大聖竹林寺)>라고 순금(純金)으로 아주 크게 써 있었다.
그러한 광경(光景)이 큰 병풍(屛風)에 그림처럼 아주 분명하게 보이더라는 것이다. 그리고는 곧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법조스님이 비록 분명히 목격한 것이기는 하나
그 사유가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는 것이며 또한 그곳이 어디인지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더라는 것이다.
그 후 며칠이 지난 뒤에 낮에 제 공양을 드실려고 하는데, 또다시 발우에 오색채운이 일어나더라는 것이다.
그리고는 다시 그 오색 구름 안에 오대(五臺)가 나타나며 그 오대에 모든 절이 나타나고 있는데,
그 땅이 모두 순금으로 되어 빛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는 것이며 산림과 일체 부정(不淨)한 것은 하나도 없는 것이었으며, 못(池)과 대와 누각(樓閣)등이 보이는데
그 모두가 칠보(七寶)로 장엄(莊嚴)되어 호화찬란(豪華燦爛)하게 보이더라는 것이다.
그리고는 그 안에 문수보살(文殊菩薩)께서 일만 성중(聖衆)을 거느리고 계시는 것이 나타나 보이는 것이며,
또 다시 시방세계(十方世界)의 모든 부처님의 맑고 아름답게 장엄(莊嚴)된 호화찬란한 국토들이 나타나 보이더라는 것이다.
그러한 광경들이 공양을 다 드시고 나니 사라져 버렸다.
법조스님께서는 역시 그 사유와 처소를 분명히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오대(五臺)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오대산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어 공양이 끝난 후 염불원(念佛院)에 돌아가서 여러 스님들께 물어봤다.
"혹시 스님들 중에 오대산을 가보신 스님이 계시느냐."고 하니,
가연스님과 담휘스님 두 분이 "가본 적이 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 스님들로 하여금 오대산에 대한 모든 풍경과 지형등을 들어보니 법조스님께서 보신 발우에 나타난 풍경과 그 모두가 부합되더라는 것이다.
그러나 오대산중에 대성인(大聖人)이 계신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그 후 2년이 지나 대력 4년 여름에 형주(衡州) 호동사(湖東寺)로 옮기어 그 절에 높은 누각이 있어 그 누각에서 오회염불당(五會念佛堂)을 만들어 90일간을 그 곳에서 염불을 하고 지내기로 하셨다. 그리하여 염불수행에 전념을 하고 있던 중 6월 2일이었다고 한다.
오후 3시경에 저 멀리 보니 오대산 절위에 상서로운 구름이 덮이더니
그 구름 가운데에 여러 누각(樓閣)이 나타나며
그 누각가운데에 범승(梵僧)들이 있으되
키가 10척(尺)이나 되어 보이는 스님들이 긴 육환장(六環杖)을 짚고 거닐고 있으며 그 회중(會中)에 아미타부처님께서 계시어 문수보살, 보현보살 두 보살과 더불어 일만 보살들이 계심이 분명히 보이더라는 것이다.
그 몸매는 아주 큰 몸매로써 거룩한 모습이었으며 광명이 빛나고 있었다.
이러한 광경은 비단 법조스님께서 혼자만이 보신 것은 아니니 그 절에 전 대중과 형주땅에 모든 사람들이 다 보았다고 하는 것이며 그 광경을 보는 자(者), 그 모두 심히 감격하여 눈물 흘리며 절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 구름이 서서히 서쪽으로 옮겨가더니 마침내 사라져 버리고 말더라는 것이다.
그날 해가 다 지고 나서 법조스님께서 저물도록 도량밖에서 거닐고 계셨다. 그런데 한 노인이 나타나 법조스님에게 와서 하는 말씀이
“그대가 일찍부터 금색세계에 왕생하기를 발원하였거늘 어찌하여 대성을 뵙고저 가지를 아니하는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법조스님이 괴이하게 생각하면서 하는 말이
“때가 어려운 때이며 길이 지극히 험난하니 어떻게 가서 뵈올 수가 있으리까.” 하고
대답을 하니
그 노인 재차(再次) 다시 말하기를
“빨리 가서 뵈옵도록 할지어다. 가는 길이 그다지 험난하지 않느니라” 라고 말을 마치고는 홀연히 사라져서 보이지를 않더라는 것이다.
이를 본 법조스님은 그 기이함과 이상함에 놀라서 곧 절 안에 들어가 부처님 전에 거듭 맹서(盟誓)하길
"여름 하안거를 마치고는 결정코 오대산에 찾아가 대성을 뵈오리다. 설령 가사 불 무덤과 빙하같은 것이 길 앞에 막아 장애함이 닥치더라도 결코 물러나지 않고 반드시 대성인을 찾아뵈오리다’ 하고 서원(誓願)을 발하셨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여름 하안거를 마치고 8월 13일 도반들 몇 분과 같이 오대산을 향하여 길을 떠나셨다. 과연 별다른 장애없이 근 8개월만에 마침내 오대현(五臺縣)에 도착하게 되었다. 때는 대력(大歷) 5년 4월 5일이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저 멀리 불광사(佛光寺)가 있는 쪽을 바라보니 산세가 수려하여 그 아름다운 풍경은 절세미인인양 과연 천하에 제일인 듯한 것이었다.
또한 이상한 것을 보았나니 불광사 남(南)쪽으로 몇 줄기의 흰색 광선이 뻗치더니 눈이 부실 정도로 밝은 광명을 놓는데 그 아름답고 찬란함은 그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가 없을 만큼 황홀한 것이 이를 본 대중 모두가 환희심에 넘쳐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원로(遠路)의 피로(疲勞)함도 다 잊고서 한시 바삐 그곳에 가서 대성인을 찾아 뵈옵고저 하는 생각이 더욱 간절해 지기만 하더라는 것이다.
그 이튿날 4월 6일에 드디어 불광사에 도착하게 되었다. 가서 보니 법조스님께서 발우에서 본 그 풍경과 과연 조금도 틀리지 않더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