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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첫사랑에 대한 기억들
허명구
집무실 벽은 두툼한 책들과 서류철로 가득 메워져 있고, 창문이 나 있는 벽 쪽에는 화분에서 난이 자라고 있다. 내담객을 위해 마련된 소파와 탁자 세트를 지나면 마호가니로 된 업무 테이블이 나온다. 그 테이블 위에 두툼한 우편물이 놓여 있는 것이 민희의 눈에 들어왔다. 보낸 사람: 기 현준.
기 현준. 잠시 그 이름을 응시하던 민희가 자리에 앉아 봉투를 뜯으니 A4용지 20장 남짓의 원고가 클립으로 집혀 있었다. 원고의 첫 페이지 윗 단에 굵은 글씨로 제목이 쓰여 있다.
‘개새끼’
민희는 그 제목을 보고 후우, 하고 한숨을 내뱉었다. 사무직원이 커피잔을 가지고 들어왔다. 그녀는 테이블 위에 놓인 봉투와 인쇄물에 시선을 주며 어제 오후 늦게 배달되어 온 것이라고 말하고 나갔다.
민희는 잠시 망설이다가 원고를 읽기 시작했고, 원고의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커피는 이미 식어 있었다.
‘같이 저녁 먹읍시다.’
한 달쯤 전이다. 그에게서 이렇게 문자가 왔었다. 마치 자주 얼굴을 대하고 지내는 친한 사이인 것처럼 불쑥 문자를 보내왔다. ‘점심 먹자’도 아니고 ‘저녁 먹자’다. 학교 졸업 후 오랫동안 소식이 끊겼던 그가 1년에 한 번쯤 만나는 학교 동아리 모임에 돌연 얼굴을 나타낸 건 10년 전쯤부터다. 그래서 그와 민희 역시 지난 10여 년 동안 1년 한 번, 혹은 모임에 빠지면 2년에 한 번, 사람들과 어울려 저녁 먹고 맥주 등을 마시다가 틈틈이 시답잖은 이야기를 주고받은 게 전부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 모임이 있은 지도 벌써 일 년 가까이 되었다. 조만간 그 모임에서 다시 볼 수도 있는데 이런 식으로 문자를 보내왔다. 민희는 여덟 자로 된 그 메시지를 한동안 멍하니 들여다보았다.
동아리 모임에서 얼굴을 마주칠 때면 그는 언제나 민희에게 무척 반가워하는 시선을 보냈지만, 민희는 그의 시선을 받기만 할 뿐 그 이상은 돌려준 적이 없다. 그런데도 그는 모임에서 얼굴을 볼 때마다 반가워하는 시선을 보내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민희는 가슴 한 켠이 아려서 싫었다. 지금처럼.
민희가 조금은 불쾌해지려고 하는 순간, 현준은 마치 그녀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이 다시 메시지를 보내왔다.
‘너무 불쑥이었나요? 뭐 물어볼 게 있어서 연락한 겁니다.’
민희는 애초 현준의 메시지를 못 본 척 하려고 했으나 두 번째 메시지를 보고 마음을 조금 풀었다. ‘뭔 얘긴지 들어나 보자.’
약속장소로 차를 몰고 가면서 민희는 생각했다.
물어보고 싶다는 게 뭘까? 무슨 소송이라도 걸린 거야? 생각해 보니 그는 몇 년 전에 자신의 사무실에 들른 적이 있었다. ‘뭐 때문이었더라? 아, 친구가 이혼을 하게 되어 변호사를 구한다고 했었지. 까맣게 잊고 있었네.’ 그때는 ‘그건 내 전문 분야가 아니니까 믿을만한 변호사를 소개해 주겠다,’고 하고 끝냈다.
아니다. 민희가 다시 생각해 보니 그 날 그와 점심을 같이 먹었었다. 그는 이왕 왔으니 점심이나 같이 먹자고 했다. 민희는 순순히 그의 청을 받아들였다. 지금 생각하면 선약이 있다고 거절할 할 수도 있었는데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무엇을 기대하고 같이 밥을 먹었는가. 다시 생각해도 민희는 짜증이 났다.
식사를 하며 친구의 이혼 사유가 불륜관계라는 말을 듣고, 민희는 많은 경우 불륜관계에서 여자는 모든 것을 걸고 관계 속으로 들어가지만, 남자들은 바람처럼 가볍게 빠져나가고 결국 여자만 배신당한 채 남는다고 말했다, 그래서 바람둥이라고 하는 거라고 했다.
민희는 자신의 말을 듣는 현준의 얼굴에 잠시 의아하다는 표정이 어리다가 이내 사라지고 곧이어 흥미롭다는 표정이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 민희가 보기에 그의 첫 표정은 아마도 그녀가 왜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을 것이며, 그러다가 이내 어쨌든 흥미로운 이야기로구나 하는 표정으로 넘어간 것이 분명했다.
민희는 그러한 현준의 반응에 마음이 상했다. ‘이 사람은 내 이야기를 완전히 남의 얘기 듣듯이 하는구나.’ 기분이 나빠진 민희는 손님이 오기로 되어 있다며 서둘러 식사자리를 파하고 사무실로 돌아갔다. 거기까지 기억이 미친 민희는 그가 보내온 추가 메시지, ‘물어볼 게 있어서,’ 한 줄에 마음이 풀려버린 자신에 대해 또다시 기분이 상했다. 그러면서도 차는 돌리지 않았다.
그는 식당 밖에서 민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에게 다가가면서 민희는 현준이 배가 좀 나오고 전체적으로 살이 쪘지만, 얼굴에는 아직 예전의 모습이 많이 남아 있구나, 하고 새삼 생각했다. 환한 미소를 지으며 민희를 맞이한 그는 예약해 놓은 룸으로 민희를 안내했다. 그는 민희에게 창을 마주하는 자리에 앉게 했다. 바깥 경치가 보여서 눈이 더 시원할 거라며. 그러나 그때는 저녁이었고 민희는 저녁 햇살이 얼굴에 비치는 것이 불편했다. 민희의 표정을 읽었는지, 그는 자리를 바꿔 앉을까 하고 물어보고는 민희를 창을 등지고 앉게 했다. 석양이 어른거리는 그의 얼굴에 미소가 스치는 것을 보며 민희는 어떤 기시감이 느껴졌다.
민희는 머리가 희끗희끗했지만, 피부는 고왔다. 곱게 나이드는 스타일이다. 현준은 마주 앉은 민희를 바라보며 그녀의 대학시절 모습을 오버랩한다. 그 시절을 떠올리자 현준은 마음이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어 저 혼자서 싱긋 웃었다.
중국음식이 코스로 하나씩 들어오기 시작했고, 민희와 현준은 사는 이야기, 자식들 이야기, 각자의 남편 아내 소식 이야기들을 나누며 나오는 요리들을 하나씩 처치해 나갔다. 오랜만에 만나 서로의 생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라 거죽만 살짝 스치는 수준인데도 이야기가 끝도 없이 이어졌다. 민희는 이러다가 언제 본론으로 들어갈지 궁금해지기도 했지만 연이어 나오는 맛깔난 음식을 먹는 재미 때문에 왜 만났는지는 잠시 잊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리는 결국 마지막 순서에 이르렀고, 그즈음에서 두 사람 각자의 일상 대소사 이야기들도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현준이 계산을 마치고 두 사람은 같은 건물 내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겼다. 민희는 차는 자신이 사겠다고 했다. 구석에 자리를 잡고. 현준은 커피, 민희는 허브차를 선택했다.
민희는 현준의 얼굴을 바라보며, 이제 말해 봐요. 물어보고 싶다는 게 뭔데요? 하는 시선을 보냈다. 현준은 미소를 지으며,
“음, 물어볼 게 있었는데, 글쎄, 물어보지 않는 게 더 나을까, 생각 중이예요,”라고 했다.
민희는 그 말에 잠시 긴장했다. ‘법률상담이 아니라는 얘기네.’ 가슴 한 켠이 뭔가를 예감이라도 하듯이 슬쩍 아려왔다. 현진이 계속 말했다.
“이렇게 만나서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들을 즐겁게 나누고 났더니 그게 뭐 그리 중요한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현준이 물어보고자 하는 것이 자신과 관련된 이야기라는 것을 감지한 민희는, 현준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그 다음 말을 재촉했다.
현준이 들고 있던 커피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요사이 기억이 많이 지워지고 흐려지고 해요. 세월이 흐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좀 아쉬워지네요. 그래서 말인데,..” 현준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말했다.
“음, 학교 다닐 때 우리 같이 동해안 갔던 거 기억나나요?”
민희는 동해안이 기억나냐는 말을 듣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이 꽉 쥐어지고 풀어져 있던 등의 근육이 긴장하는 것을 느꼈다. 몇 년 전 현준과 식사자리를 가졌던 것도, 그리고 이날 현준이 물어볼 게 있다고 한 말을 핑계 삼아 자리에 나온 것도, 결국 그가 이 말을 꺼내기를 내심 기다렸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민희는 생각했다.
민희는 속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다 지난 일이야. 지금은 그 위에 각자 살아온 수십 년의 인생이 켜켜이 쌓여 있잖아. 생각해 보면 별 것 아니야. 착한 남편 만나 자식들 낳아 잘 키웠고, 돈도 아쉽지 않게 벌고 잘 살아왔어. 그냥, 잘 들어주고, 좋은 추억이었어, 하고 마무리하면 돼.’ 그러면서도 ‘그 오랜 세월은 어디에다 두고 이제야 말을 꺼내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치밀어오르는 건 막을 수 없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마치 호수 깊은 바닥에 뻘밭처럼 가라앉아 있었던, 절대로 건드리고 싶지 않았던, 이제 다 지나간 일이라고 생각했던, 그 상처가 갑자기 헤집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오랜 세월 마치 없는 듯이 물밑에 가라앉아 있었을 뿐, 그건 없어진 것이 아니었다. 민희의 가슴 속 깊은 곳에 지울 수 없이 새겨진 배신의 코드. ‘왜 내가 아니고 미라였어?’ 가 갑자기 고개를 쳐드는 것이었다.
현준은 커피잔을 내려다보며 평온한 어투로 말했다.
“내 머릿속에는 민희 씨랑 동해에 가서 해변이 바라보이는 횟집에 앉아 있던 그날이 사진처럼 남아 있어요. 그 시절 다른 건 생각이 안 나는데, 그 장면만큼은 나의 20대를 빛내주는 사진 한 컷처럼 내 머릿속에, 가슴 속에 남아 있는 거예요.
사람들이랑 회를 먹을 때마다 그날의 동해안이 생각나고, 서해든, 부산이든 제주도든, 그 어떤 바닷가를 가든 그날의 동해안이 생각나는 거예요. 그 생각을 떠올리지 않고 회를 먹은 적이 없고, 그 생각을 떠올리지 않고 바닷가를 걸은 적이 없어요. 그것은 내 기억 속 젊은 시절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었어요. 그때 민희 씨가 사 준 오징어회는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먹어본 회이기도 했고요.
하지만 그때 어떻게 거기엘 가서 회를 먹고 왔는지는 전혀 생각이 안 나고 단지 횟집에 같이 앉아 있던 장면만 떠오르는 겁니다. 그 오징어회의 맛, 처음에 꼬들꼬들하다가 점점 부드러워지며 깊어지던 그 맛. 잿빛 하늘 아래 텅 빈 해변과 밀려왔다가 밀려 나가는 파도 소리. 거기까지만 기억이 나는 거예요. 그런데 그마저도 내가 나이를 먹어서인지, 색이 점점 바래는 것 같아서, 그래서 그때 우리 두 사람이 어떻게 거기에 가게 되었는지 문득 물어보고 싶었어요. 많이 망설였는데, 이 느낌마저 희미해지기 전에 그때의 일을 들으면 좋겠다 싶어 용기를 낸 겁니다.”
그의 말을 따라가며 그다음 말이 이어지기를 기대하던 민희의 귀에서 현준의 이야기가 돌연 멈추었다. 민희가 현준을 바라보니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은 다 했다는 듯이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민희는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그러니까 나에게 물어보고 싶었던 게, 나와 나누고 싶었던 이야기가, 단지 그거라고? 사진 한 컷? 아름다운 기억이라고?’
민희는 자신을 바라보는 현준의 해맑은 표정을 바라보며 질문을 거기서 끝낸 것이 그의 진심이라는 것을 알았다. 민희는 뭐라고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을 하고 현준의 눈을 바라보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어쩌다 동해안에 가서 회를 먹었냐고요?”
그렇게 툭 던지듯이 말하는 민희의 차가워진 어투와 해석하기 힘든 표정에 현준은 당황했다. 그래서 현준은 주절주절 보충설명을 이어갔다.
“아니, 다른 뜻은 없어요. 그냥 나이를 먹으니 기억이 하나둘 희미해져 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그래도 뭔가 빛나던 순간의 그런 기억만큼은 의미가 퇴색되지 않게 간직하고 싶어서... 그게 무엇이었으며, 언제의 일이었으며, 왜 그랬으며,... 식으로 머릿속에 다시 기록해 두고 싶어서.”
민희는 그렇게 말하는 현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빈정거리는 말투가 되어 되물었다.
“아, 그걸 알고 싶었다고요? 물론 난 잘 기억하고 있어요. 그런데 나와 관련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그것밖에 없어요? 그거 밖에 기억 안 나요? ”
‘그래, 그날은 멋진 날이었지.’
민희에게도 그날의 동해안은 도저히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그러나 그날을 더욱 잊을 수 없었던 것은 그 날이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이 아니라 그 이후가 너무 아팠기 때문이었다.
대학 4학년 가을, 추석 전후의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현준은 불쑥, 이번 휴일에 둘이서 어디 멀리 놀러 가면 좋겠다고 했다. 불쑥 들이민 그의 말에 가슴이 얼마나 쿵쾅댔는지 민희는 지금도 그때의 느낌을 생생하게 되살릴 수 있다. 현준을 1학년 때부터 알고 지냈지만, 연인으로 생각하고 만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 그녀에게 둘이서 멀리 가보자는 그의 말은 한편으로 기다리던 말이기도 했지만 또한 떨리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민희의 눈에 현준은 조금 남다른 사람이었다. 1학년인가 2학년인가 어느 날 그는 민희가 봉사활동으로 나오고 있던 노동청소년을 위한 검정고시 야학에 교사로 등록했다. 새로 온 야학교사를 호기심에 차서 바라보고 있는 어린 노동자들에게, 그는 대뜸, 이렇게 인사말을 했다.
“교육받을 권리는 국민의 기본권이고 국가는 그 권리를 보장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청소년 시기에 하루 10시간 12시간 노동을 해야 하는 현실을 못 본 척 하고, 학교 못 다녀도 검정고시제도가 있으니 열심히 공부하라고 하다니, 그건 국가가 자신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 것을 은폐하는 사기행위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여러분이 피곤한 몸을 이끌고 여기 나와 공부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가 비록 몸은 피곤하고 공부하는 시간은 짧지만, 토론하고 고민하면서 일반 학교 학생들보다 더 깊은 생각을 키워갈 수는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해 갈 힘을 키워갈 수 있습니다. 열심히 공부합시다...”
그의 입에서 쏟아져나오는 거침없는 말들은 강의실 뒤에 앉아서 듣고 있던 민희를 조마조마하게 했다. 검정고시를 보기 위해 야학에 나온 노동자들에게 검정고시제도가 사기라니. 곱게 자라서 명문대에 들어와 불쌍한 청소년들을 위해 야학에 나온 자신의 생각에 혹시라도 가벼운 점은 없었나, 다시 돌아보게 하는 말이었다.
그때 그의 말이 민희의 귀에 특별하게 들렸던 것은 현준 자신이 가난한 학생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처럼 사는 데 별 어려움을 모르는 중산층가정 출신의 누군가가 그렇게 말했다면, 말 잘하네, 똑똑하네 하고 치부하고 말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민희가 아는 한, 빈털터리에 자존심만 하늘을 찌르는, 그가 하는 말이기에, 그의 말은 한마디 한마디가 민희의 피부에 와서 박혔다.
어느 날은 현준이 도서관에서 찾아낸 베티 프리던, 화이어 스톤 등, 처음 들어본 사람들의 책을 민희에게 소개해 주기도 했다. 아무도 그런 말을 하지 않을 때, 그는 남자 여자 가릴 것 없이 가부장주의를 내면화하고 있는 현실, 여성의 성적 상품화가 아무 제재나 저항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는 현실이 계급적인 불평등과 억압 이상으로 끔찍한 일이라고 내게 말해 주었다. 사회정의를 외치는 운동권에서도 예외가 없다고.
민희는 그렇게 그가 던지는 말, 그의 표정, 그의 웃음, 그런 것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슴 한 곳에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다가 4학년이 되어 비로소 그와 사귀기 시작한 것이다.
그날 현준이 말한, ‘멀리 가는 것’은 자신들의 관계를 한 단계 더 깊게 만들고 싶다는 거라고 민희는 받아들였다. 뭔가 결정이 필요하고, 용기가 필요한 순간이 왔다고 민희는 생각했다.
“어딜 가고 싶은데?” 민희는 물었다.
“넌 어디 가고 싶은 데 없어? 실은 난 잘 모르거든.” 하고 현준이 되물었다.
현준은 서울에서 1시간 반 거리에 있는 시골에서 커서 서울로 유학 온 터였고, 머릿속으로는 세계지도 위를 누비고 있었지만, 현실에서 움직인 거리는 반경 150킬로미를 넘지 않았다. 민희는 현준의 그러한 사정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현준은 총명한, 하지만 가난한 학생이었다. 여행을 다닌다거나 할 처지가 아니었다. 물론 이제 학업을 마치고 취업하면, 그는 마음만 먹으면 성공한 사회인으로 변신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일자리는 넘쳐났고 졸업을 앞둔 남학생은 모두가 모셔가려고 난리였으니까.
민희는 잠시 생각하다가 강릉의 동해바다에 가서 회를 먹고 싶다고 불쑥 말했다. 강릉이라는 말을 듣고 현준의 눈이 빛났다. 그 빛나는 눈빛이 무엇을 말하는지 민희는 느낄 수 있었다. 민희는 조금 부끄러웠다. 강릉은 당시는 가는데 4시간 오는데 4시간 걸리는 ‘먼 곳’이었다. 자칫 막차를 놓치면 자고 와야 했다. 묻어 두었던 그때의 추억이 민희의 머릿속을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정말 그거 밖에 생각이 안 나요?” 하고 민희는 현준에게 다시 물었다. 현준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멋쩍게 웃으며
“이해가 안 가겠지만 정말 이상하게도, 그 장면만 생각이 나요. 같이 동해안에 가서 시간을 보내고 왔으니 우리가 각별한 사이였을 텐데. 그리고 내가 학교 다닐 때 민희 씨를 각별히 생각했던 것도 느낌으로는 남아 있는데, 학교, 야학, 사회, 정치 문제를 놓고 같이 열띤 토론을 하곤 했던 것도 부분적으로 기억이 나는데, 하지만 둘 사이에만 공유될 사적인 일이라고 할 만한 것은 그것밖에 생각이 안 나는데.,.”
현준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민희씨의 아파트 근처에서 첫 키스를 했던 것도 물론 생각이 나요. 그런데 뭐, 그건,” 하며 현준은 말을 얼버무렸다. 사실 왜 그런지는 몰라도 그녀와 키스를 하던 장면은 현준에게 미소를 떠올리게 하는 기억이 아니었다. 그래서 현준은 그 기억을 자신과 민희가 예사롭지 않은 사이였다는 은밀한 증표로만 간주했을 뿐 그 자체를 일부러 떠올리거나 한 적이 없다.
민희는 첫키스? 하며, 짧게 웃고는
“그래. 나도 첫키스였지. 첫사랑이었으니까.”
민희는 대수롭지도 않은 것을 기억하고 있냐는 표정을 지으며 여전히 빈정거리는 말투로,
“또 뭐가 생각나는데요? 기억해내 봐요” 하고 물었다.
현준은 그 뒤로 이어지는 민희의 독설을 한참 더 듣고 나서야 민희와 자신이 기억하는 첫 키스가 서로 다른 첫 키스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민희가 기억하는 첫 키스는 그녀가 자신과 나눈 수많은 키스들 중의 첫 번째 키스였고, 자신이 기억하는 첫 키스는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그녀와의 수많은 키스들 중 마지막 키스였다는 사실을. 하지만 현준은 그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현준이 민희의 공격적인 어투에 어쩔 줄 몰라하자 민희는 이번에는 재밌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좋아요. 내가 동해안에 대해서는 말해 줄게요. 그 때 우리는 사귀고 있었어요. 사귀고 있었다고요. 알아요? 현준 씨가 동해안에 가자고 했을 때 난 마음이 얼마나 두근거렸는지 몰라요. 그날 우리는 새벽에 고속터미널에서 만나 버스를 탔어요. 나는 내가 가진 가장 예쁜 옷을 입고 나왔지요. 그 때 입고 나왔던 자켓이 푸른 색의 체크무늬였다는 것도 기억이 나네. 동해바다로 나가서 해변을 거닐고 회를 먹고 술도 마셨어. 그러다가 동해바다에 어둠이 내릴 때 쯤 현준 씨는 나에게 자고 가자고 했어. 알아요? 난 안 된다고 했고. 그때 나는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보수적이었으니까. 하지만 만약 현준 씨가 더 완강하게 나왔다면, 모르지 어떻게 됐을지. 하지만 그때 현준 씨는 기본적으로 젠틀했어. 내 의사를 무시하고 막 나가는 사람은 아니었지.”
민희는, 그리고 현준 역시, 말하는 도중에 평상어와 경어가 마구 섞이기 시작했다. 호칭도 씨에서 너, 당신으로 마구 바뀌었다.
“어쨌든 결국 막차를 타고 돌아왔어요. 돌아오는 차에서 현준 씨는 다른 승객들과 승무원의 눈을 피해 내 입술에 뽀뽀를 했고 나를 만지고 싶어 했지. 돌아오는 내내 그랬어. 이런 건 전혀 생각이 안 나? 우리가 동해안에 갔을 때는 우리는 이미 사귀고 있는 중이었는데, 그게 생각이 안 나? 나는 현준 씨가 그때 모럴 디스턴스라는 말을 해주던 것도 기억나는데. 생각 안 나? 멀리 나가면 도덕으로부터 흐트러질 자유를 얻게 된다고... 그 얘기도 생각 안 나? 이렇게 얘기해 주니까 동해안의 사진이 좀 복원이 돼? 그러니까 좋아?”
민희는 계속해서 기관총처럼 말을 쏟아냈다.
“아, 그런데 현준 씨가 그 전에 나에게 고백을 하던 날은 혹시 기억나요? 그때부터 우리가 사귀기 시작했던 건데.”
고백? 현준은 계속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솔직히 잘 생각이 안 난다고 했다. 민희는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참 편리하다. 생각이 안 난다는 말로 모든 게 다 무마되는 거구나,”
하고 계속 비아냥거렸다.
“4학년 8월, 9월 무렵이야. 어느 날 영화관에 갔는데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내게 고백을 했어요. 뭐라고 했냐면, ‘언제부턴가 나도 모르게 너의 얼굴이 자꾸 떠올라. 책을 읽을 때나, 길을 걸을 때나, 가리지 않고. 이게 사랑인지는 모르겠는데, 너의 얼굴이 떠오를 때마다 가슴이 뜨거워져.’ 그랬어. 생각 안 나지요?
현준 씨로부터 그 말을 들을 때 나는 마음이 터져올랐다고 해야 할까 녹아내렸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흰 구름과 아지랑이가 마구 피어났다고 해야 할까 하는 그런 기분이었어. 그때 ‘남과 여’던가 하는 영화를 보던 내내 그랬어. 언제부턴가 늘 현준 씨를 좋아하고 있었고, 이런 날이 오기를 꿈꾸고 있었는데, 정말로 그런 날이 왔던 거야. 그런데 현준 씨는 그 일이 생각 안 나지? 뭐 어쨌든, 그 후로부터 우리는 요즘 말로 해서 사귄 거야. 우리가 사귀었다고.”
그렇게 말하면서 민희는 픽 웃고 계속했다.
“그 후 줄곧 밥도 같이 먹고 도서관에서 서로 마주 앉아서 공부도 하고 그랬는데, 그게 생각이 안 나? 현준씨는 그 때 늘 빈털터리여서 내가 맨날 짜장면도 사 주고 그랬는데, 생각 안 나?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틈만 나면 도서관 주변의 숲을 찾아 들어가서 뽀뽀했던 것도 생각 안 나겠네?
내가 살던 아파트 옥상에 올라가 뽀뽀한 건? 밤에 옥상에 올라가 강 건너편 집들의 불빛을 바라보면서 현준 씨는 불빛은 저렇게 반짝반짝 아름답지만, 그 안에는 기쁨과 행복만이 아니라 슬프거나 괴로운, 다양한 삶이 있지 않을까, 하고 이야기했어. 그 후 아주 오랫동안 나는 그 장면을 떠올렸지. 밤에 창문으로 새어 나오는 불빛들을 바라볼 때면 항상 그때 함께 불빛을 바라보며 뽀뽀하던 순간이 생각났어. 우리가 그렇게 어린 시절이었지만 불빛을 불빛으로만 보지 않고 그 이면에 있는 사람들의 인생을 보려고 했던 것이 좋았어. 나는 그때, 같은 불빛 뒤에서 함께할 우리의 미래에 대해서도 생각했었는데 말이야. 현준 씨는 그런 게 다 생각이 안 난다는 거지?”
민희는 시니컬하게 웃으며 계속 말했다.
“어떻게 그런 일들이 생각이 안 날 수 있지? 나는 그런 경험이 처음이었어. 남자랑 만나서 서로 끌어안고 뽀뽀한 거 나로서는 처음이었으니까. 그리고 끝끝내 그렇게 계속될 줄 알았지, 어쨌든 그 당시는 우리는 뭐 손만 잡고 그래도 결혼해야 하는 걸로 아는 그런 분위기 아니었어요?
우리는 같이 자는 것 빼곤 다했어요. 우리 관계는 가볍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때의 일을 잊어버렸다니. 그때 우리는 강렬한 관계였어요. 정말 그것은 그건 내 생애에서 천둥과 번개와 같은 그런 날들이었어요. 그게 생각나지 않는다니.”
민희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이어서 말했다.
“그런데 겨울이 되어 졸업을 앞둔 무렵의 어느 날, 현준 씨는, 야학에서 어린 노동자들과 세상의 모순에 대해 함께 분개하던 게 어제 일 같은데, 정작 졸업하자마자 그들과는 다른 출발선에 서서 흰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사회생활을 시작한다는 것이 용납되지 않는다, 그들과 같은 노동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하겠다, 하고 나에게 선언하듯이 말했었어. 충격적이긴 했지만, 그때 난 현준 씨와 어떻게든 결혼을 하게 될 거라는 생각만 했을 뿐 그것이 나를 밀어내는 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
이 지점에서 현준은 자신이 첫 키스라고 기억하고 있던 것이 실은 그녀와의 마지막 키스였다는 사실을 떠올릴 수 있었다. 일부러 꺼내본 적이 없던 그날의 기억이 뚜렷이 되살아났다. 부슬부슬 눈비가 내리는 어느 날이었다. 현준과 민희는 둘 다 조금은 술이 올라 있는 상태였고 그녀가 사는 아파트 어딘가에서 격렬한 키스를 나누고 있었다. 술기운을 빌어 그녀가 몸을 밀착하고 감아오는 것을 느꼈을 때, 현준은 그녀의 몸에서 그녀가 이제 자신의 미래를 결정했음을 알리는 어떤 의지를 읽었다. 그때는 그녀 말대로 손만 잡아도 결혼해야 하는 걸로 아는 때였고 여학생들은 졸업이 곧 혼기의 시작이었다. 현준도 그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현준은 돌연 마음이 복잡해졌다. 이렇게 가도 되는지 망설여졌다. 현준은 숨을 깊이 들이쉬고 그녀를 진정시키고는 꼭 끌어안아 준 후 집으로 들여보냈다.
민희는 계속했다.
“그러고 나서 언젠가 당신과 만나기로 한 약속이 깨졌던 때가 있었어. 그 날도 난 생생하게 기억해. 나중에 생각한 거지만 그것이 현준 씨와의 이별을 운명지었던 거 같아. 기억 안 나지? 현준 씨는 그날 이후로 잠적했거든. 그러니 난 그날을 잊을 수 없지.
만나기로 한 날 현준 씨는 종로2가의 서점에서 날 기다렸고, 나는 종로1가의 어떤 서점 앞에서 당신을 기다렸어. 추운 날이었지만 두 시간 넘게 서로 기다리다가 결국 못 만나고 돌아갔지. 그날 저녁 현준 씨 집에 전화를 했더니 어머니가 바꿔 주셨어. 그래서 우리가 서로 다른 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알았지. 당신은 ‘나왔었구나, 우리는 서로 어긋나 있었구나. 그럼 됐어.’ 그렇게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어. 어긋났다는 말이 내내 마음에 걸렸어.
그러고 나서 현준씨는 사라진 거야. 지방 어딘가로 갔다는 것만 알았어. 나는 현준 씨가 엄혹한 세월에 결혼하고 가정을 꾸려 안온하게 사는 사치를 누릴 수는 없다, 하여, 사라진 것으로 생각했어. 그렇다고 이렇게 나를 만나주지도 않고 잠적을 하다니. 난 억울하고 분했지만,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도 했었어. 보고 싶고 또 보고 싶었지만, 언젠가 다시 내 앞에 나타날 거라고 생각했어. 그때면 나도 현준 씨와 맞춰서 노동자로 사는 것도 두렵지 않을 것 같았어.”
민희는 이미 식은 찻잔을 들며 숨을 돌렸다.
“그렇게 현준 씨가 내 앞에서 사라진 후 1년이 지나 다시 겨울이 돌아 왔을 때, 현준 씨가 미라랑 결혼할 거라는 기막힐 소식이 내 귀에 들어왔어. 나도 잘 알고 미라도 잘 아는, 당신도 잘 알지? 지수가 그 소식을 내게 전해 줬어. 지수는 내가 현준 씨를 못 잊어 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거든, 걔가 와서 그 소식을 전한 거야.
그건 도저히 믿기지 않는 소식이었어. 나는 현준 씨가 사라지고 나서도 현준 씨와 함께 할 인생을 나름대로 준비하고 있었어. 그런데 이게 뭐야. 세상으로부터 잠적하여 탄 가루나 아니면 쇳 가루를 얼굴에 뒤집어쓰고 구슬땀을 흘리며 노동을 하고 있을 줄 알았던, 하지만 언젠가는 다시 내 앞에 나타나 싱긋 웃으며 내 손을 잡아줄 줄 알았던 현준 씨가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한다고,... 그것도 번듯한 집안의 외동딸과...
나는 그 소식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어. 갖은 방법을 다 동원했고 그래서 간신히 당신을 만날 수 있었지. 그때 나 만났던 거 생각 나? 물론 안 나겠지. 나는 당신의 입으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어야 했어. 그 소식이 정말인가. 정말이라면 왜 내가 아니고 미라인가에 대하여 알아야 했어, 당신은 잠적한 상태에서 미라는 만나고 있었던 거잖아. 그게 뭐야. 맺고 끊음을 분명히 했어야지. 미라는 만나고 있었으면서 그렇다면 나도 만나서 이러이러해서 너랑 결혼 못 한다, 미안하다고 말했어야 하는 거 아니었어?
그렇게 어렵게 당신을 만났지만, 막상 만나서는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없었어. 왜 내가 아니고 미라냐는 말을 할 수 없었어. 미라와 결혼할 거라는 소식이 정말이라는 걸 확인한 게 고작이었던 것 같아. 그걸 내가 뒤집어라 말아라 하고 따지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어.”
현준은, 민희가 ‘알았어?’ ‘기억 안 나?’ ‘몰랐어?’ 하고 비아냥거리는 사이사이에 굳은 표정과, 당황해하는 표정과, 미안해하는 표정,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 사이를 오가며 뭐라고 열심히 해명을 했다. 그러나 그가 사이사이 하는 말들은 민희의 마음에 하나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위로는커녕 그 시절의 일을 하나씩 더 선명하게 불거지게 하면서 민희의 마음을 후벼팠다.
“그럼 이것도 생각이 안 나겠네?”
민희는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던 휴대폰을 손으로 가져가며 말했다.
“그때 그렇게 만나고 나서 같은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현준씨가 말했지. ‘그래, 나는 개새끼야. 나중에 나와의 일을 책으로 써서 거기에다 제목을 개새끼라고 붙여.’ 그렇게 말했던 거 기억나?. 개새끼라는 제목으로 책을 쓰라고 했다고. 기억 안 나지? 나는 그때 타고 가던 버스에서 먼저 내리면서 그 순간이 얼마나 치욕스러웠는지 몰라.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가는 동안,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나로부터 잠적한 것이 노동운동 때문이 아니었구나, 결국 내가 여자로서의 매력이 없었다는 거구나. 내가 충분히 예쁘지 않았다는 거구나. 그래, 내 코가 좀 낮기는 하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 나의 자존감은 한 칸 한 칸 무너져 내려 땅 속으로 꺼지는 것 같았어.
그날 이후 나는 몇 년 동안을 위장이 망가져서 병원을 드나들어야 했고, 또 몇 달 동안은 정신상담까지 받으러 다녀야 했어. 이건 당신이 정말 모르고 있었겠지.”
민희는 손으로 잡고 있던 휴대폰을 핸드백 속에 밀어 넣으며 시선을 아래로 깔고 말했다.
“그런데 뭐? 아름다운 사진 한 컷? 그런 시절을 아름다운 사진 한 컷 정도로 기억하고 있다는 게, 그리고 계속 그렇게 간직하고 싶다고 내 앞에서 말하는 게, 정말 놀라워.”
“그 동해안의 사진 한 컷, 그 포장지로 뭘 싸려고? 아니, 뭘 감추려고? 당신의 배신? 아니면 당신의 바람기? 아니면 당신의 양심? 반성? 그걸 포장지로 싸서 나한테 선물이라도 하려고? 당신, 또 바람기가 동했어?”
고개를 들고 현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렇게 말한 후 민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너무 늦었다. 가야겠어.”
그 시점에서 현준은 이미 아무런 변명의 말도 하지 않은 채 잠자고 민희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민희는 자신을 따라 일어서는 굳은 표정의 현준에게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나도 지금은 결혼해서 애 낳고 키우고 잘살고 있으니 됐어요.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거 현준 씨에게 감사해야죠. 끝내 못 놓고 살았을 수도 있는데, 물어봐 줘서 고맙지 뭐.”
그녀는 희미하게 웃으며,
“잘 가요,” 라고 짧게 말하고는 엘리베이터 쪽을 향해 빠르게 걸어갔다.
민희는 현준을 뒤에 남겨 놓고 걸어가면서 현준이 보낸 메시지에 대해 왜 카톡이나 전화로 말하자고 하지 않았는지 후회했다. 자신의 입에서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말이 쏟아져 나올 줄 몰랐다. 말들이 제멋대로 날뛰며 삐져나오는 것을 제어할 수 없었다. 그토록 오랜 세월이 지나서도 자신에게 위로받고자 하는 마음이 이렇게나 깊게 남아 있었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다.
에필로그.
현준은 주차장으로 이어지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자신을 등지고 서 있는 민희의 뒷모습을 착잡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그 동해안의 풍경을 이제는 예전처럼 떠올릴 수 없을 것이다. 그녀가 돌아보지도 않고 엘리베이터 속으로 사라지자, 그는 터덜터덜 어둠이 깔린 길을 걸어갔다. 개새끼로 추억되고 있는 자신의 젊은 날의 한때를 되새기며.
첫댓글 기형도 시인에게서 '질투는 나의 힘'
나에게 첫사랑은 감성의 샘, 눈물의 뚜레박, 가슴앓이의 源流
이 아침 내 心海의 눈물을 뚜레박에 흠뻑 담아 건져올리고 싶네
잘 읽었습니다.
여기 게시판에 올려 놓으니까 맞춤법 틀린 거, 빠진 글자, 더해진 글자, 같은 게 더 잘 눈에 들어와 몇 군 데 고쳤습니다. 제가 쓴 첫 소설의 독자가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과거 연인이었던 두 남녀가 다시 만나게 된다. 함께 보냈던 지난 추억을 되새기며 이야기를 나누지만, 서로의 기억과 감정이 너무나도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누구에게나 처음이라 서툴 수밖에 없는 아련한 첫사랑 이야기...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허명구선생님
글 잘 읽었습니다
쉽게 술술 잘 읽혔습니다
'민희가 아니고 왜 미라 였을까요?'
잘 읽었습니다~ 오랫동안 가슴한켠에 아련한 아픔으로 남은 사람과 그냥 즐거운 한 때로 기억하는 사람. 사랑의 무게가 같을수는 없지만 허무했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