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문-그의 삶과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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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삶은 우연일까 필연일까. 필연보다는 우연에 기인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묘하게도 인간사는 우연으로 시작해서 필연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인간사가 어디 우연으로만 이루어지거나 필연으로 막을 내리기만 하는 게 아니라 필연이 악연이 되기도 하고 악연이 필연이 되기도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때론 우연이 악연을 낳고 그 악연은 어느 날 우연을 동반해 또 다른 필연을 잉태한다. 산다는 게 그리도 아이러니한 건 우리네 삶이 원했건 원하지 않았건 우연과 필연의 틀 속에서 산다는 것이다.
1996년 리처드 피어스 감독이 연출한 ‘브라더 스토리’란 영화를 보면서 우연과 필연이 우리 인생사에 어떤 무게로 다가오나 생각해 보았다. 우연과 필연, 결코 멀리 있지 않다. 바로 우리 곁에 우연과 필연이 서로 마주보며 공존하고 있다. ‘브라더 스토리’의 내용은 이렇다. 백인가정에서 일하는 흑인여자에게 주인남자는 못쓸 짓을 한다.
흑인여자는 주인여자에게 주인남자의 불장난을 얘기하지만 남자는 아니라고 변명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흑인여자는 임신을 하고 산월이 되어 출산을 한다. 산모는 출혈과다로 목숨을 잃고 아이만 세상에 남는다. 그런데 태어난 아이가 백인아이다. 흑과 백,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이기에 흑과 백이 무어 문제가 되겠는가. 의사는 아이가 백인이기에 그 아이를 흑인가정에 보내지 않고 백인여자에게 키우도록 한다. 흑인여자와 친구였던 그녀는 남편의 씨앗을 친자식처럼 키운다.
아이는 중년이 됐고 어머니는 병이 들어 세상을 뜬다. 장례가 끝난 어느 날 얼은 농기구가게의 문을 닫을 때 목사가 찾아와 어머니가 남긴 편지를 주고 간다. 목사가 주고 간 편지를 읽고 난 얼은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고 아버지에게 항의한다. 현재의 자신은 백인이지만 피는 분명 흑인이라는 사실에 분노하면서 그는 피가 다른 형을 찾아 시카고로 간다.
우연치고는 고약한 우연이다. 아니 믿기지 않는 현실이지만 모든 게 진실로 다가오고 있으니 진실이 아니라고 항변조차 할 수 없다는 현실에 조바심 내며 흑인인 형과 대면한다. 형으로 불리는 흑인 머독은 분명 모든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걸 동생 얼은 알아챈다. 그만큼 형은 백인 동생 앞에서 여유가 있다.
두 사람은 많은 얘기를 나누며 헤어진다. 그러나 시카고에서 동생은 건달들에게 시비를 당하고 차를 뺏긴다. 이게 인연이 되어 형제는 며칠간을 함께 지내며 우애를 다져간다. 정말로 우연이 필연으로 자리매김을 해나간다. 얼의 몸에 검은 피와 흰 피가 석여 흐르듯 형의 몸에도 우애의 피가 서서히 스며들어 흑과 백은 하나둘 피부의 껍질을 벗고 진정한 필연의 교감을 이루어간다.
신동문, 생전에 그는 얼마나 많은 우연의 연으로 세상을 살았을까. 아니면 필연으로 세상을 가슴에 담으며 살았을까. 그것도 저것도 아니면 우연 반, 필연 반으로 살았을까. 하긴 우연으로 살았건 필연으로 살았건 살아가는 동안의 우연이 진정 우연이었다면 그 우연이 만들어낸 우연은 우연으로 끝나지 않고 우연의 끝물이 아름답고 청조한 우연으로 자리 잡았을 터이다.
신동문, 그가 군대시절에 썼던 ‘풍선기’도 우연의 소산물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비약이라고 할까. 그렇지 않다. 시대가 만들어준 아픔이 그를 군대라는 곳에 발을 디디게 했고 디딘 발끝에서 ‘풍선기’는 탄생했다. 비록 그 시대가 위정자들이 판을 치던 자유당시대였지만 그는 억압의 시대를 뛰어넘어 풍선을 타고 하늘을 훨훨 날며 ‘풍선기’를 써냈다. 마치 그가 그리고픈 하늘이 자신의 손안에 있듯 그렇게 ‘풍선기’는 세상을 향해 손짓을 했다.
신동문, 시대가 만들어준 아픔 이전에 그는 병약했다. 그런 그가 어머니 품을 떠나 방랑을 하는 몇 개월 동안 몸은 몰라보게 강해졌고 그는 본의 아니게 방위군으로 끌려갔다. 그러나 그는 담대하게도 방위군을 탈출해 공군에 입대했다.
신동문, 그는 스스로 강건해졌다. 약골이자 심신이 병약한 그는 항상 병치레였다. 어찌 보면 6·25라는 비극이 그를 강인하게 하고 차가운 시대를 견뎌내게 했는지도 모른다. 전장은 그를 병상에서 밀려나게 했고 빈사상태로 펄펄 끓는 몸을 이끌고 산과 강을 헤매고 때론 시골의 외딴 집 처마 밑에서 허기와 신열을 참아가며 오한으로 몸을 떨며 세상의 빈 수레 속에서 절망과 공포를 이겨냈다.
신동문, 이제 그는 공군이 되었다. 그것도 하늘을 나는 비행기의 기체를 수리하고 훈련하는 공군이. 그는 수신호로 비행기를 유도했으며 그 수신호는 어느 날 ‘풍선기’기 되어 하늘을 날고 땅을 거닐었으며 아리비안 나이트가 되기도 했다. 때론 무수한 하늘의 별을 따서 가슴에 담기도 했으며 ‘풍선기’는 어느 날 그 에게 시인이라는 월계관과 함께 3년이라는 시간을 사유의 시간으로 변용케 했으며 나아가 ‘풍선기’는 또 다른 인간이라는 그림을 그려내기 시작했다.
‘초원처럼 넓은 비행장에 선 채 나는 아침부터 기진맥진한다. 하루 종일
수없이 비행기를 날리고 몇 차례인가 풍선을 하늘로 띄웠으나 인간이라
는 나는 끝내 외로웠고 지탱할 수 없이 푸르른 하늘 밑에서 당황했다. 그
래도 나는 까닭을 알 수 없는, 내일을 위하여 身熱을 衛生하며 끝내 기다
리던, 그러나 歸處란 애초부터 알 수 없던 풍선들 대신에 머언 山嶺 위로
떠가는 솜덩이 같은 구름 쪽만을 지킨다.’
'風船期' 1호 전문
신동문, 그가 바라본 하늘은 어떤 색깔이며 그 너머에 있는 산령은 얼마나 높을까. 그가 매일 관제탑에서 수신호를 보낼 때 비행기의 조종사는 그의 수신호를 보고 무슨 생각을 할까. 그가 수신호를 하면서 풍성기를 쓴다고는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수신호를 보내기에 여념이 없는 신호사가 바람에 날리는 풍선을 생각할 여지가 없다고 여길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런 비행사는 신동문의 수신호에 무사히 이륙하고 착륙했다는 것에 만족할 것이다. 그러나 수신호를 보내는 당자로서는 단 1초의 흐트러짐도 용서가 안 되는 참으로 찰나의 순간을 땀과 떨림과 초조와 절박함과 긴장감으로 보낼 것이다. 땅에서의 깃발과 하늘에서의 날갯짓은 분명 다른데도 그 날갯짓이 하나가될 때 하늘은 푸르고 지상엔 안도와 환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