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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빠사나란
위빠사나란
비구들이여, 모든 삶들의 정화를 위한 육체적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정신적인 고뇌에서 벗어나기 위한 해탈을 향해
진리의 길을 나아가기 위한 오직 한길(一乘道)!
네 곳에 마음을 챙겨 관찰하는 위빠싸나(如來禪法)뿐이니라.
그러면 네 가지의 마음챙김에 대한 관찰 대상은 무엇인가?
대상을 바르게 겨냥해서 바르게 마음을 모아
바르게 마음을 챙기는 수행자라면
첫째 몸[身]의 현상을 관찰하며
몸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욕망과 혐오감을 극복하고,
둘째 느낌[受]의 현상을 관찰하며
느낌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욕망과 혐오감을 극복하고,
셋째 마음[心]의 현상을 관찰하며
마음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욕망과 혐오감을 극복하고,
넷째 정신적 대상[法]을 관찰하며
정신적 대상의 세계에서 일어나는욕망과 혐오감을 극복하느니라.
『중아함부 대념처경 중에서』
이 가르침에서 오직 한길이라고 언급하신
이 '위빠싸나(Vipassana)'의 어원부터 챙겨봐야 할 것이다.
빠알리어 사전에 의하면 '위(Vi)'란 접두사로서
'여러가지'라고 해석된다.
그러나 여기서의'위'란 중점적으로 세가지를 의미하는데
그 세가지란 부처님께서 깨달음의 핵심이 되는
제행무상,
일체개고,
제법무아등 삼법인(三法印)을 의미한다.
첫째, 일체개고(一切皆苦)란 무엇인가?
모든 생명체는 태어나면서부터 경험하게 되는
육체적인 괴로움뿐만 아니라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과 춥고, 덥고, 목마르고, 배고픔과 같은 일반적인
괴로움을 비롯해서 미운 사람이나 싫은 환경에서
함께 할 수 밖에 없는 괴로움,
사랑하는 사람이나 좋은 환경을
함께 할수 없는 괴로움,
원하는 바를 모두 이루지 못하는 괴로움,
모든 것이 허무하고 무상하게 변화되는데
느끼는 조건적인 괴로움들을 의미하는 불만족들의 통칭이다.
이런 고통들은 시시각각 일어나고 사라지는
자연적인 현상이기에 이 고통의 특성을 이해하면
더 이상 끄달리거나 집착하지 않고
감각적인 노예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이 수행의 목표가 될 것이다.
둘째, 제행무상이란 어떤 것인가?
우리들의 몸과 마음을 비롯해서
우리 주변을 한번 둘러보십시오.
나가면 들어가게 되고,
먹으면 내어놓게 되고,
또 내어 놓으면 먹게됩니다.
공기도 들이쉬면 내쉬고 또 들이쉬어야 하듯이
모든 만물이 순간 순간 일어나고
사라지는 덧없음의 이치를
가슴으로 깨달아야 하는 것이 두 번째의 수행목표이다.
셋째 제법무아(諸法無我)란?
우리들이 나, 너, 그이, 그녀 등 모든 개체를
실체시 해오던 관념에서 벗어 나라고 일러주는
부처님의 제일 중요한 멧세지가 아닐 수 없다.
부처님의 재세시에도
육십 두가지 이상의 사상들이 있었으나
모든 사상의 근원은 나를 전제해서 갖춰져 있었다.
그러나'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이 말은
당시 오직 부처님만이 입에 올릴 수 있었던 핵심이었다.
그래서 불교가 개창된 원인이 되었으며
오직 불교에서만이 찾을 수 있는 독특함이었다.
다른 신앙에서는 나를 전제해서 자아나 영혼
혹은 신성이라고 표현하면서 신이나
그 어떤 절대자를 받들고 신봉합니다.
그래서 자아나 영혼 신성이 구원을 받아
하느님이나 신이나 어떤 절대자와 일체화
내지 그들로부터 구원을 받는다는 교리 체계이지만
불교에서는 이런 사상을 절대 부정하시며
'나라고 할 수 있는 실재는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다만 일어나고 사라지는 자연적인 몸과 마음의
인과적 현상뿐이니라' 부처님께서 일러 주셨다.
여기서 우리들은 대단히 중요한 귀로에 서게 될 것이다.
우리들은 지금까지 나를 전제해서 지금까지 살아오지 않았던가?
만약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실재하는 내가 없다면'
즉 나 또는 마음의 존재유무에 따라 삶의 목표와
방향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되는 매우 귀중한 위치가 될 것이다.
이 세상에서 무엇보다 급한 일이'나를 바르게 이해한다'는
바로 이 일이지 않을까? 많은 사람들은 먼저 해야 할 일과
뒤에 해도 될 일을 분간하지 못하고 먼저 해야만 할 일을
뒤로 미루고 뒤에 해도 될 일을 먼저 하려는 즉 앞뒤가 뒤바뀐
어리석음 속에서 살다 자신을 단 한번이라도 챙겨 보지 못하고
삶을 마치게 된다.
'과연 내가 실재하는 존재인지?
그렇지 않는지?'
우선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수행을 통해
조사하고 점검한 뒤 삶의 목표와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 보다 더 중요하지 않겠는가?
부처님은 내가 실재하지 않는다라고 하셨지만
'형상적으로는 그래도 내가 존재하지 않겠는가?
만약 그것도 아니라면 영혼은 존재하겠지?‘
라는 의문마저 일체 용납하지 않았다.
자! 여기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옳다면
우리들은 지금까지 '나'라는 존재가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환상적인
착각 속에서 살아 왔다는 결과가 됩니다.
'믿어야 하느냐? 믿지 말아야 하느냐?'
이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부처님의 지혜로 '나'라는 존재를 아무리 살피고 찾아 보았지만
그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얻으시고
우리들에게 직접'제법무아(諸法無我')라는 공의 이치를 일러 주셨다.
우리 불자들은 부처님을 믿으며 부처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더 이상 의심하지 말고 이론적으로나마 이해하고
우선 그 가르침을 믿고 실천하며 검증해야 할 것이다.
만약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심이 생기면
그 의심을 의심 속에 묻어 두어서는 결코 안될 것이다.
'내가 엄연히 존재하는데 왜 무아라고 일러 주셨을까?’
라고 묻고 살피며 조사,확인, 검증까지 해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바른지 틀린지를 살펴봐야 할 것이다.
그 뒤에는 믿음도 불신도 사라지고
오롯한 자신의 지혜로 깨달음을 완성하게 될 것이다.
물론 부처님의 가르침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지나지 않지만
달을 볼려면 그 손가락을 의지해서 그 가리키는 방향을 쫓아
달을 봐야 하듯 부처님의 그 가르침을 의지해서 정진한다면
이와 같은 세 가지의 진리를 쉽게 이해하는 동시에 더 없는
지혜를 갖춰 생사 윤회를 벗어나는 깨달음에 이르게 될 것이다.
다음 위빠싸나의
'빠(Pa)'란 '자세히, 면밀히'라는 뜻이며
'싸나(Ssana)'는 '꿰 뚫어 관찰하다'라는 의미이다.
제행무상,
일체개고,
제법무아 등 삼법인(三法印)의 진리를 바르게 관찰한다,
즉 삼법인을 자세히 본다' 라는 의미의 위빠싸나는
결론적으로 부처님께서 생사윤회를 벗어나시는
중도(中道)의 깨달음을 일궈낸 불교의 핵심이다.
우리들이 이 부처님의 행법을 실천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으로 확인한다는 의미도 된다.
인류가 생긴 먼 옛날부터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은
안락과 평화를 위해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찾으려고
끊임없이 노력해 오는동안 수많은 신앙과 종교가 명멸되어 왔다.
그 중에서 특히 위빠싸나는 가장 현실적이며 합리적이고
인간적이며 과학적인 수행 방법이다.
이 수행법은 오직 자력으로만 수행할 수 있는 깨달음의 작업이요,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인류 최대의 과제를 풀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수행자들이여! 네 가지 대상을 의지해서
마음을 챙기는 수행을 실천하면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고
욕망과 갈망에서 자유로워지느니라.
그래서 완전한 깨달음의 자유를 얻게 되며
진정한 행복과 위없는 지혜를 갖춰
마침내 해탈을 성취하게 되리라.
마치 겐지스 강물이 오직 서쪽으로만 흘러가듯이
누구나 이 방법으로 열심히 정진하면
결코 다른 샛길로 빠지지 않고
분명히 열반의 깨달을 성취하게 되리라'고
부처님께서 직접 일러주신 말씀이다.
겐지스의 긴 강은 동쪽에서 서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게 된다.
물론 어느 위치에서는 동쪽으로나 남쪽으로
그리고 서쪽으로나 북쪽으로 흐르지만
결국 서남쪽으로 떨어지는 흐름에
이 수행의 결과를 비유하신 가르침이다.
네 가지 대상은 무엇이며 어떻게 수행하는가?
우리들에게 일어나고 사라지는 네 가지의 현상이 있다.
몸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
느낌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
마음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
진리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 등
이 4가지 현상에 마음을 챙겨 알아차리는 동안
무상, 고, 무아등 3법인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즉 몸 의 현상으로 3법인를 깨닫고,
느낌의 현상으로 3법인를 깨닫고,
마음의 현상으로 3법인를 깨닫고,
정신적 대상으로 3법인를 깨닫게 되는 방법이 위빠싸나이다.
첫째 어떻게 몸의 현상으로 삼법인을 깨닫게 되는가?
우리들의 몸에는
피가 흐르고, 생각이 흐르고, 바람이 흐르고, 느낌이 흐르고 있다.
특히 서있을 때나 앉아 있을 때 항상 그 흐름 가운데
가장 확실하고 또렷하게 인지할 수 있는것이
바람의 흐름인 호흡의 현상이다.
이 호흡의 현상에 자세히 마음을 챙겨보면
바람이 코끝을 스쳐서 가슴을 통해 아랫배에 이르기까지
들어 왔다가 나가는 진행이 계속되는 현상을 알수있을 것이다.
아랫배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호흡의 현상은 우리들이 인식하든
인식하지 않든 우리들이 살아있는 동안은 계속 진행될 것이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호흡을 알게되면
무엇이 어떻게 된다는 것인가?'라는 의문을 갖겠지만
위빠싸나는 우리들의 주변에 있는 중요한 부분에
우리들의 마음을 연결해서 그 일어나고 사라지는
변화의 진리를 바른 마음 챙김으로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호흡이 진행되는 과정을 관찰하면서
변화하는 현상을 이해하고 부처님이 일러주신
세 가지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
우리들이 들이쉬는 숨과 내쉬는 숨은 같지 않다.
들이쉬는 숨은 산소로서 삶이며 생명이요,
내쉬는 숨은 이산화탄소로서 죽음이며 독가스이다.
한 호흡에서도 무상의 진리를 깨닫게 해 준다.
즉 들이쉰 살아있는 공기가 그대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곧 죽은 독가스로 변화되어 나온다는 것이
무상의 진리를 확인하게 된다.
우리들이 먹은 음식이나 물도 그대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변화되어 나온다. 이와 같이 느낌이나 생각을 비롯해서
우리들의 몸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자연적인 진행이
무상의 진리에서 벗어남이 없다.
'우리들의 몸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자연적인 현상들을 알아서어떤 유익함이 있겠는가?'라고
역시 의문을 갖겠지만 자신의 몸에 관한 것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면서 몸밖의 일은 커녕 우주에 관한 진리를
어떻게 넘겨다 볼 수나 있겠는가?
자신에 관한 것을 먼저 바르게 이해하지 않고
몸밖의 일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부처님은 아무리 살펴보았지만 '나'라는 존재를
결코 존재 하지않는 사실을 깨달으시고
우리들에게'무아(無我)'라고 일러 주셨다.
여기서 우리들은 대단히 중요한 갈림길에 서게 될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정확하다면
우리들은 지금까지 '나'라는 존재가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환상적인 착각 속에서 살아 왔다는 것이 된다.
'믿느냐? 믿지 않느냐?' 이것이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나의 존재 유무에 따라 삶의 목표와
방향을 세워야 하기에 얼마나 귀중한 위치가 되겠는가?
이 마음과 몸이 실재하는지 그렇지 않는지,
우선 수행을 통해
조사하고 점검하는 것이 보다 더 유익하지 않을까?
의심이 생기면 그 의심을 의심 속에 묻어 두지 말고
'부처님은 왜 그렇게 일러 주셨을까?'라는 의문으로
살피며 조사해서 그 가르침을 확인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믿고 따르며 수행해서 검증해야 믿음도 불신도 없어지고
확실한 자신의 체험으로 깨달음을 완성하게 될 것이다.
물론 부처님의 가르침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지나지 않지만
달을 보려면 그 손가락을 의지해서 그 가리키는 방향을 쫓아
달을 봐야 하듯이 부처님의 그 가르침을 근거로 해서 노력하면
이와 같은 자연적인 진리를 이해하는 지혜를 갖춰 생사 윤회를
벗어나는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본래 길이란 언제 어떤 사람이 따라가도 같은 곳을 거치고
같은 목적지에 도달하게 된다. '오직 한 길'이란 부처님이 간다고
원하는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이 가면 원하는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오직 한 길'이라고 표현하신 그 내면에는 외줄과 같은
의미도 내포되어 있기 때문에 이 길은 옆으로 빠지는 샛길도
없거니와 지름길도 없으며 둘러 가는 길도 없거니와
뛰어갈 수도 없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라도 이 길을 따라서 나아가면
생사 윤회를 여의는 단지 하나밖에 없는 법이란 의미이다.?
누구나 이 길을 따라서 나아가는 과정에서
처음으로 나타나 맞이하게 된다.
다른 수행 방법은 수행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지혜 정도를 자세하게 스스로 제대로 파악조차 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 수행은 명색지를 비롯해서 12∼16가지의 지혜가
한 순간에 나타나는 경우도 있지만 단계적으로
누구든지 이 길을 따라 정진하는 수행자라면 꼭 같은
체험의 결과에 도달하게 된다.
'수행자들이여! 네 가지 대상을 의지해서
마음을 챙기는 수행을 실천하면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고
욕망과 갈망에서 자유로워지느니라.
그래서 완전한 해탈을 성취하게 되며
진정한 행복과 위없는 지혜를 갖춰
바른 깨달음인 열반을 성취하게 되리라.
겐지스 강물이 오직 서쪽으로만 흘러가듯이
누구나 이 방법으로 열심히 정진하면 결코
다른 샛길로 빠지지 않고
분명히 열반의 깨달음으로 흘러들리라'고
부처님께서 직접 수행자들에게 일러주신 말씀이다.
겐지스의 긴 강물은
동쪽에서 서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갑니다.
물론 어느 위치에서는 동쪽으로나 남쪽으로
그리고 서쪽으로나 북쪽으로 흐르지만
결국 서남쪽으로 떨어지는
흐름에 이 수행의 결과를 비유하신 가르침이다.
마찬가지로 어느 누구라도
이 수행을 실천하면 다른 샛길로빠지지 않고
틀림없이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일러주신
네 가지는 무엇이며 어떻게 정진을 하는가?
우리들에게 일어나고 사라지는 네 가지의 현상이 있다.
몸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
느낌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
마음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
진리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 등이다.
이 4가지 현상에
마음을 챙겨 알아차리는 위빠싸나로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 등 3가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몸의 현상으로 3가지를 깨닫고,
느낌의 현상으로 3가지를 깨닫고,
마음의 현상으로 3가지를 깨닫고,
정신적 대상으로 3가지를 깨닫게 되는 방법이 위빠싸나이다.
첫째 어떻게 몸의 현상으로 삼법인을 깨닫게 되는가?
우리들의 몸에는 피가 흐르고 있다.
우리들의 몸에는 생각이 흐르고 있다.
우리들의 몸에는 바람이 흐르고 있다.
우리들의 몸에는 느낌이 흐르고 있다.
특히 서있을 때나 앉아 있을 때 항상 그 흐름 가운데
가장 확실하고 또렷하게 인지할 수 있는 것이
바람의 흐름인 호흡의 현상이다.
이 호흡의 현상에 자세히 마음을 챙겨보면
바람이 코끝을 스쳐서 가슴을 통해 아랫배에 이르기까지 들어
왔다가 나가는 진행이 계속되는 현상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랫배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호흡의 현상은
우리들이 인식하든 인식하지 않든
우리들이 살아있는 동안은 계속 진행될 것이다.
그 어떤 상황이든 이 호흡이 멈추면 우리는 죽었다고 하는
이 귀중한 현상을 보통 사람들은 전혀 모르고 있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호흡을 알게되면 무엇이 어떻게 된다는 것인가?
라는 의문을 갖겠지만
위빠싸나는 우리들의 주변에 있는
중요한 부분에 우리들의 마음을 연결해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변화의 진리를
바른 마음 챙김으로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호흡이 진행되는 과정을 관찰하면서
변화하는 현상을 이해하고 부처님이 일러주신
세 가지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들이쉬는 숨과 내쉬는 숨은 같지 않다.
들이쉬는 숨은 산소로서 삶이며 생명이요,
내쉬는 숨은 이산화탄소로서 죽음이며 소멸이다.
한 호흡에서도 무상의 진리를 깨닫게 해 준다.
즉 들이쉰 살아있는 공기가 그대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곧 죽은 독가스로 변화되어 나온다는 것이
무상의 진리를 확인하게 된다.
우리들이 먹은 음식이나 물도 그대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변화되어 나온다.이와 같이 느낌이나 생각을 비롯해서
우리들의 몸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자연적인 진행 과정이 무상의 진리에서 벗어남이 없다.
'우리들의 몸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자연적인
현상들을 알아서 어떤 유익함이 있겠는가?‘라고
역시 의문을 갖겠지만 자신의 몸에 관한 것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면서 몸밖의 일은커녕
우주에 관한 진리를 어떻게 넘겨다 볼 수나 있겠는가?
자신에 관한 것을 먼저 바르게 이해하지 않고
몸밖의 일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천상에 태어남을 구하지 말고 생사 윤회의 족쇄에서 벗어나라'고
부처님께서간곡하게 당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천상에 태어남은
윤회의 길을 계속 밟는 것이며 윤회의 족쇄에 계속 머무는 것으로서
결코 우리들의 수행 목표는 될 수 없다.
부처님의 목표는 우리들이 한 순간이라도 빨리
생사 윤회로 부터 벗어나게 하는데 있고
부처님의 자비는 우리들이 생사 윤회 속에
한 순간이라도 더 머물지 않게 하는데 있다.
Sadhu! Sadhu! Sadh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