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첫 상륙
일본 땅을 처음 밟은 것은 만 여섯 살이었던 1976년 5월 8일. 그 날은 화창하게 개인 토요일이었다.
주일한국대사관에서 근무를 하게 된 아버지를 따라 바다를 건너게 되었다.
생활터전을 마련해 놓기 위해 1년 먼저 동경으로 건너가셨고 그 동안 나는 서울에서 어머니와 셋방사리를 하고 나서 이듬해가 되어서야 비행기를 타게 된 것이다.
해외여행자유화는 1989년의 일이기에 김포공항은 한산했다.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당시에는 비록 배웅이나 마중이라 하더라도 공항에 간다는 것만으로 주위에 자랑거리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고작 일본에 가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온 일가친척이 공항으로 모여들었다. 어림 잡아 서른 명은 더 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여권을 보여주고 출국수속을 하기 위해 어머니 손을 잡고 들어간다. 바닥은 레드카펫이 깔려 있었다. 살짝 뒤를 돌아보자 그 모여든 사람들이 마치 단체사진이라도 찍는 듯이 우리를 지켜본다. 어린 마음에 무엇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손을 살짝 흔들어봤더니 30여명 모두가 한 번에 손을 흔들기에 깜짝 놀라 묵묵히 앞만 보고 걸어갔었다.
비행기 좌석은 창가였다. 활주로에 들어서고 가속을 시작하자 조금씩 기체가 떠오른다.
나는 흥분했으나 소심했기에 작은 소리로 외쳤다.
“떴다. 떴다. 떴다!”
도쿄 하네다공항에 도착한 어머니와 나는 아버지 차를 타고 자택으로 향하게 되는데, 차창 바깥으로 바라보는 풍경은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첫째로 모든 자동차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대도시 서울이라고는 하나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도로들이 비포장 상태였기 때문에 크고 작은 자동차들은 먼지를 뒤집어쓴 상태였다. 반면에 이미 선진국 대열에 들어서 있던 일본은 모든 도로가 아스팔트 포장이 된 상태였기에 아무리 자동차가 달려도 먼지를 뒤집어쓸 일이 없다. 승용차나 버스나 할 것없이 그야말로 보석상자를 열어놓은 것처럼 눈부시게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다음으로 인상적인 풍경은 산의 모습이었다. 한국의 산은 그야말로 붉은 산. 나무들은 듬성듬성 나 있고 붉은 흙이 대부분을 차지한 모습을 하고 있었으나, 일본에 내려서 바라보는 산은 어찌 나무들이 많은 지 내게는 답답함을 느낄 정도로 빼곡했다.
놀라움은 집에 도착한 다음에도 이어졌다. 한국에서는 셋방사리를 하던 우리 집에 라디오만 있어서 오후 6시가 되면 ‘마루치 아라치’를 들었으며, 가끔 집주인 방에 가서 문이 달린 흑백TV로 마징가 제트를 보곤 했었는데, 한국을 떠나기 얼마 전 그 방송이 끝나 아쉬웠었다.
그런데 일본 집에 와보니 마징가제트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칼라TV라니. 뿐만 아니라 이른바 백색가전, 냉장고와 세탁기까지 있다. 나는 우리 집이 대단히 부자가 된 것으로 착각하기에 충분했다.
3층짜리 건물 1층에는 과일가게가 있었는데 거기서 내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무엇보다 바나나였다. 60년~70년생 분들은 공감하시겠으나, 그 때까지만 하더라도 한국에서는 왜 그리도 바나나가 비쌌는지 모른다. 일본에 가기 전 어머니와 동대문시장 같은 곳에 갔을 때 “배가 아프다”고 해야만 고가의 바나나, 그것도 두세 개가 달린 바나나를 마치 녹용이라도 다려서 사 먹이듯이 사주곤 했었다.
하지만 내가 살고 있는 1증 바로 코앞 과일가게에 진열된 바나나는 수십 개가 달려있다. 당시 그림책에서나 보았던, 어쩌면 실존하지 않는 가상의 과일처럼 인식되었던 그 바나나가 일개 동네 과일가게에 있다는 사실에는 경악을 금치 못했었다.
이를 정리하자면 내게 있어서 당시 일본은 단순한 돈 많고 살기 좋은 나라를 떠나서, 말 그대로 눈부신 미래도시처럼 비쳐졌다.
처음으로 일본에서 살던 집은 하네다 공항 근처인 도쿄 오타(大田) 구. 동경한국학교까지 가는 스쿨버스 중 하나가 거기서 출발했다. 이는 다시 말해서 학교까지의 거리가 대단히 멀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구나 학생들을 태워야 하니 직선거리가 아니라 많은 곳을 우회해서 가게 되는데, 그러다 보니 학교가 있는 신주쿠(新宿)까지는 1시간 30분 정도 걸렸기 때문에 아침 7시에 버스를 타야 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한다면서 전날 밤은 8시에 잠을 자라고 하는데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매일 밤 잠이 들기까지 힘들었다는 기억이 있다.
대사관이 있는 미나토(港) 구로 이사한 것은 그 이듬해였다. 학교까지 거리도 월등이 가까워져 취침시간이 8시에서 9시로 늦춰졌을 때의 기쁨이란 잊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