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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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발생과 이동
선사 시대는 문자 기록이 있기 전 인류의 역사이다. 문자 기록이 없기 때문에 당시 사용하였던 도구를 기준으로 시대를 구분한다. 선사시대는 공산사회로 계급이 없는 사회이다. 선사 시대는 구석기 시대, 중석기 시대, 신석기 시대 같은 석기 시대와 문자를 사용하지 않았던 지역의 청동기 시대 및 초기 철기 시대를 포함한다.
현생 인류는 100,000-50,000년 전 아프리카 동부에서 발현하여 전 세계로 퍼져 나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당시 지구는 제6빙하기 전의 온난기로 아프리카 대륙에는 이미 나일강이 있었고 현재의 사하라 사막 등 아프리카의 사막은 녹지였을 것으로 추측된다.[5] 인류는 마지막 빙하기 무렵 북아메리카와 오세아니아에까지 퍼져나가게 되었으며 빙하기가 끝나는 기원전 12,000년 경에는 빙하가 덮지 않은 지구상 모든 지역에 거주하게 되었다. 이 당시의 인류는 수렵채집 생활을 하며 유랑하였다.
신석기 시대에 들어 농업이 시작되면서 정착생활이 시작되었다. 그 결과 움집과 같은 거주지가 생기고 이들이 모인 촌락이 형성되었다. 신석기인들은 장례와 같이 공동체의 문화를 지니고 있었다. 청동기 시대에 들어 인류는 금속을 사용하게 되었고 강력한 권력을 갖춘 지배 집단이 형성되었다. 생산수단이 있어도 생산수단을 보호하고 유지할 힘을 가진 집단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이다. 또한 인류 최초의 도시, 국가, 문자, 도서관, 상업, 종교, 신화, 철학과 같은 지금까지도 인류 문화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분야들이 생겨났다.
구석기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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뗀석기의 제작과정
구석기 시대의 주요 도구는 뗀석기와 같은 석기였다. 뗀석기는 먼저 원석을 일차적으로 다음어 거북등 모양의 석핵을 만든 후 석핵의 모퉁이를 가격하여 석편을 떼어내 사용하는 방식으로 매우 경제적인 방법이었다. 이러한 방식의 구석기 유물은 프랑스의 르발루아 근교에서 처음 발견되어 흔히 르발루아 방식의 석기로도 불린다.
구석기 후기에는 석기 제작과정이 보다 정교하게 발전하여 정과 모루를 이용한 돌날 방식의 석기를 제작하였다. 한편, 중국에서 발견된 약 28,940년 전 구석기 후기 시대 유물로 흑연으로 만들어진 구멍뚫린 돌구슬과 같이 구석기 후기에는 여러 가지 장신구 유적이 발견되고 있어 이 시기에 인류가 이미 정교한 사회를 형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유명한 동굴 벽화인 스페인의 알타미라 동굴의 벽화나 프랑스의 라스코 동굴 벽화 역시 구석기 시대의 것이다. 한편,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와 같이 가슴, 엉덩이, 생식기 등이 과장된 여성상은 구석기 시대 사람들의 다산숭배를 보여준다.
한반도에서는 약 70만 년 전부터 1만 년 전까지의 구석기 유물이 발견되었으며, 구석기인 유골로는 평양에서 발견된 역포인, 1983년 충청북도 청원군에서 발견된 흥수 아이 등이 있다.
중석기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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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기 시대 이후 신석기 사용이 있기 전까지의 석기 시대를 중석기 시대라 한다. 부싯돌과 같은 돌을 사용하여 구석기 시대에 비해 단단한 도구를 제작하였다. 유럽에서는 대략 소빙하기가 끝난 후 신석기가 시작되는 기원전 5000년까지 지속되었다. 이 시기에 인류는 개와 같은 가축을 기르기 시작하였으며 불을 사용하였다.북유럽의 경우 중석기 시대는 기원전 4000년 전까지 계속되었다.
중석기 시대부터 인류는 토기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신석기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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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기 시대의 마제석기
신석기 시대는 기원전 10세기 경부터 시작되었다 이전의 석기 시대와 구분되는 신석기 시대의 특징은 돌을 갈아 만든 마제석기였다는 점이다. 돌을 갈아 더 날카롭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석기에 손잡이 부분과 날부분의 구분이 명확해지고 각종 장식을 넣기도 하였다. 또한, 사회 문화에도 커다란 발전이 있어 농사를 시작하였고 매장과 같은 장례문화가 생겨났다. 이집트 카룬 호에서 당시의 것으로 보이는 다수의 무덤이 발견되었다. 이와 같은 경제, 문화적인 발전은 이전의 인류 역사와 확연히 구분되는 것으로 흔히 신석기 혁명이라 불린다.
신석기 시대에 이르러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인류는 정착 생활을 하기 시작하였고 움집을 만들고 촌락을 이루었다. 기원전 5,000년 전부터 기원전 4,000년 사이 번성한 이집트의 파이윰A 문화의 경우 당시 사용한 토기와 움집 유적이 발견되었으며 보리, 밀, 아마와 같은 작물이 재배되었고 양과 나귀가 가축으로 길러졌다.[18]
한반도의 신석기 시대 유적은 1950년 평안남도 온천군 궁상리 패총 유적이 발견된 이래 지금까지 100여 곳이 발견되었으며 대표적인 유물로는 마제 석기 이외에 빗살무늬 토기, 즐문토기 등이 있다. 1998년 남강댐 수몰지역의 유적 조사에서 부산시립직할박물관의 남강유적조사발굴단은 토기를 잇대어 관으로 사용한 옹관묘를 발굴하여 신석기 시대에 옹관을 이용한 매장 풍습이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농업
밭갈이 하는 모습, 이집트 벽화
농업은 신석기 시대에 일어난 가장 큰 변화로 고든 차일드는 이시기의 경제 문화적 변화를 신석기 혁명이라 이름 붙였다.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에서는 약 기원전 9,500년 경부터, 인도에서는 약 기원전 6,000년 경부터, 고대 이집트에서는 약 기원전 5,000년 경부터, 그리고 중국에서는 기원전 2,500년 경부터 농경이 시작되었다.
한반도에서도 신석기 시대부터 농업이 시작되어 조, 피, 수수 등을 재배하였다. 당시 유물로는 평양에서 발견된 탄화된 조를 비롯하여 돌로 만든 보습, 낫, 괭이 등이 있다.
신석기 시대에 시작된 농업으로 인류는 강을 중심으로한 촌락을 형성하여 정착 생활 문화를 이루었고 이는 세계 여러 지역에서 문명의 모태가 되었다. 당시 인류는 국가의 성립 단계까지는 이르지 못하였으나 부족단위의 생활을 이루고 있었다.
종교
신석기 시대에 출현한 대표적인 문화 중 하나는 종교이다. 기원전 5,000년 경의 이집트 분묘에서는 매장된 시신과 함께 토기, 장신구와 같은 유물과 개의 뼈가 발견되어 당시 이미 내세 사상이 있었음을 알게 해 준다. 당시 일반적인 숭배 대상은 태양이었으며 이러한 태양 숭배는 이집트, 인도, 중국, 한반도 등 지역에서 두루 발견된다. 또한, 모성 숭배와 하늘을 아버지에 견주어 숭배하는 사상도 이 때부터 시작되었다.[27]
청동기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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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 발굴된 청동검
청동기 시대에 이르러 기원전 2,500년 경 아카드 제국과 같은 문명이 출현하였다.[28] 중국에서는 상나라 시대에 이르러 청동기의 제작이 보편화되었으며, 만주 지역에서는 기원전 13세기 무렵, 한반도에서는 기원전 10세기 무렵부터 청동기를 사용하였다.
청동기 제작을 위한 야금술의 발명은 기원전 4,000년 무렵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시작되었다. 우르와 같은 당시 도시 국가의 유적에서 비소와 구리의 합금으로 된 유물이 발견되었다. 이후 보다 견고한 주석과 구리의 합금이 쓰이게 되었다.[31] 성경, 사기 등 많은 기록에서 당시 청동기 사용을 확인할 수 있다.
“ | 블레셋 사람 진영에서 가드 사람인 골리앗이 나왔는데 그 신장은 여섯 큐빗 한 뼘이요, 머리에는 청동 투구를 썼고 몸에는 사슬갑옷을 입었는데, 그 갑옷의 무게가 청동 5,000 세켈이었다.다리에는 청동 각반을 찼고 어깨에는 청동 단창을 맸다. | ” |
| — 사무엘상 17:4~6, 구약성서 |
문명
청동기 시대는 인류의 초기 문명이 출현한 시기이다. 이 시기에 지금까지 인류 문화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국가, 도시, 정치, 법률, 문자, 철학과 같은 것들이 출현하였다. 당시의 주요 문명으로는 고대 이집트 및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시아, 인더스 문명, 중국의 상나라 등이 널리 알려져 있다.
무역
1세기 경 무역로
청동기는 유라시아 대초원을 통해 교역되었고 이때 이미 비단길의 원형이 되는 교역로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중국 북부에서 사용된 비소가 함유된 청동기가 발굴되어 이 지역까지 메소포타미아의 청동기가 교역되었음을 알게 해 준다.
철기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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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철기는 운석 등에서 발견된 철을 이용한 것으로 기원전 3,000년에서 2,000년 사이 지금의 터키 지역에서 이미 사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야금술을 이용하여 철광석에서 철을 분리한 철로 도구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1,500년 경 아나톨리아 지역에 등장한 히타이트이다. 철기 제작 기술은 유라시아 초원지대의 스키타이 문화로 전파되어 전 세계에 파급되었다. 중국과 한반도 등 동아시아에는 기원전 4세기경 철기가 전파되었다.
고대
청동기 시대에 이르러 지역에 따라 독특한 문화를 가진 문명을 이룬 인류는 문자를 발명하고 스스로의 역사를 기록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다른 지역과의 교역으로 세계에 대한 인식이 발전하여 지도의 제작과 지리에 대한 기록으로 이어졌다. 한편,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과 인간에 대한 성찰은 철학, 종교, 윤리와 같은 문화를 낳았다. 고대 시기의 국가들은 문명에 따라 도시 국가의 모습을 띠기도 하고 제국을 이루기도 하였다. 국가의 지배를 위해 법률이 제정되었고 이웃 지역과의 충돌로 국가간 전쟁이 일어났다. 고대 시기의 시작과 끝은 각 문화마다 그 시기가 다르다.
최초의 문명
메소포타미아 및 수메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우르의 전차
“ | 옛날 옛적 지위가 낮은 작은 신들은 노동을 하고, 큰 신들은 그들을 지켜 보며 쉬고 있었다. 홍수를 방지하고 농사를 잘 짓기 위해 작은 신들은 강과 수로의 흙을 파내야 했다. 노동이 점점 힘들어지자 신들은 점점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했다. …… 지혜의 신 엔키는 지하수의 여신 남무에게 진흙에 신들의 피를 섞어 신들의 노역을 대신할 사람들 만들게 했다. | ” |
| — 수메르의 인간창조신화,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1에서 재인용 |
가장 오래된 문명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일어난 수메르 문명이다. 이들은 기원전 3,200년 경부터 도시 국가를 이루었으며, 설형문자를 이용하여 문서를 만들고 이를 보관할 도서관을 세웠다. 전쟁을 통해 영향력이 강해진 키시나 우르크, 라가시 등은 이웃도시를 지배하는 우두머리 도시가 되었다. 우르의 제왕 우르 남무는 자와 저울과 같은 도량형을 통일 시키고 학교를 건설했으며, 백과사전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우르 남무의 가장 중요한 업적 중 하나는 법전의 편찬으로 이 법은 훗날 함무라비 법전으로 계승되었다.
주요 고대 문명
메소포타미아 이외에 잘 알려진 주요 고대 문명으로는 고대 이집트, 고대 그리스, 페르시아 제국, 인더스 문명, 황하 문명의 상나라, 마야 문명, 아즈텍 문명, 잉카 문명, 도리아 문명, 에게 문명 등이 있다. 이 외에도 전 세계에 걸쳐 고대 문명이 존재하였다. 만주와 한반도에서는 고조선 이래 삼국 시대까지의 고대 국가들이 있었다.
고대 이집트
아멘호테프의 조상, 이집트 멤피스, 기원전 1360년 경 하이집트의 관리
기원전 3,100년 경 히에라콘폴리스 통치자들은 상 이집트를 장악하고 나일강 북부의 하 이집트를 정복했다. 마지막 정복자였던 나르메르 왕은 자신의 정복을 기념하기 위해 팔래트를 제작하였다. 그의 후계자 메네스는 멤피스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고 이집트 최초의 왕조를 세웠다.
이후 3,000년간 고대 이집트는 독자적인 문명을 이루었으며 수많은 왕조가 세워지고 사라졌다. 고대 이집트 문명은 독특한 상형문자와 제3왕조 시기의 거대한 피라미드 및 스핑크스를 건설하였다. 이집트의 왕조는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고 도시별로 분열되어 약화되기도 하였으나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헬레니즘 문화로 편입될 때까지 나일 강 유역을 비롯하여 시리아에 이르기까지 그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인더스 문명
인더스 문명이 언제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철기 유물이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청동기 시대의 문명으로 추정된다. 일반적으로 기원전 3,000년 경에 형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당대의 기록으로는 인장과 조각난 문자 몇 개가 전부이다. 인더스 문명의 유적으로는 하라파와 모헨조다로가 잘 알려져 있다. 이들은 성곽을 갖춘 도시 국가였으며 인더스강을 통해 서로 연결되어 있다. 사방으로 곧게 뻗은 도로와 벽돌로 만들어진 배수시설을 갖춘 인더스 문명의 도시 국가 유적에서는 거대한 목욕탕과 곡식 창고가 발굴되었다. 사람들은 동으로 만든 그릇을 사용했고 금, 상아 등으로 제작된 장신구를 사용했다. 이로 보아 인더스 문명은 농업과 상업에 근간을 둔 고도의 도시 문명이었다.
황하 문명
황하 유역은 신석기 시대 이후 오랜 기간 동안 인류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지역이다. 황하 문명은 중국의 고대 국가의 시초인 하나라에서부터 상나라시기까지의 문명이다.[39] 청나라 말 기원전 1,200년 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상나라의 갑골문자가 은허에서 출토되어 은나라의 실제를 알 수 있게 되었다. 갑골문자는 거북의 등을 구워 갈라진 모양을 보고 점괘를 적은 것으로 왕의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 사람의 머리를 바쳐야 하는지 등을 물었다.[40] 1950년에는 상나라 제6대 왕인 중정이 수도로 삼았던 상성이 발굴되어 당시의 청동기 유물과 무덤 유적이 드러났다. 또한 갑골문자의 기록으로 이때 이미 정전제와 같은 토지 제도가 시행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고대 문화
고대 시대에 발생한 많은 문화 요소들은 오늘날까지 인류의 생활에 깊이 영향을 주고 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은 탈레스이후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을 통해 정교하게 발전하였으며 이후 유럽과 아랍 지역에 큰 영향을 주었다.[42]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인 유가, 묵가, 한비자 등의 사상은 이후 중국과 인근 아시아 지역에 영향을 주었으며[43] 인도에서 시작된 불교는 유라시아 전역에 전파되었다.
청동기 시대 초기부터 있어온 동서양의 교류는 비단길과 같은 무역로를 통해 지속되었다. 이러한 교역로는 한반도의 신라에서 중동까지 연결된 세계적인 것이었다.
중세
중세 및 고전후 시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045년 세워진 웨스트민스터 대성당
역사에서 중세라는 용어는 르네상스 시기 유럽에서 자신들과 고대 사이의 역사를 암흑기로 인식하는 입장에서 쓰이기 시작한 용어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쓰이는 중세라는 표현은 오늘날 많은 비판이 있다. 그러나, 중세는 근대 이전의 시기를 나타내는 일반적인 의미로 여전히 사용되고 있으며 요한 호이징아는 오히려 르네상스를 《중세의 가을》로 표현하기도 하였다.한편, 동양의 역사에서 중세를 구분하는 것은 서양 중심의 역사 구분을 기계적으로 적용한 것이라는 비판도 있다.
각 지역 별 역사에서 중세는 대략 다음의 시기를 뜻한다.
유럽의 중세는 어느 한 시점에 급작스럽게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 점진적으로 형성되었다. 유럽 중세의 형성에 영향을 미친 사건으로는 훈족의 침입, 콘스탄티누스 1세의 기독교 공인, 게르만족의 이동과 프랑크 왕국의 성립 등을 들 수 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유럽 중세의 시작을 로마 제국의 붕괴로부터 보고 있다.
중국의 역사에서 중세는 당나라 후기에서 명나라 말에 이르는 시기이며, 한국의 경우 고려 시대를 중세로 파악한다. 한편, 일본의 역사에서는 가마쿠라 시대에서 무로마치 바쿠 시대까지를 중세로 파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