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에서 3을 뺄 수 없다. 그러나 영리한 사람들은 장부에 '-1'을 적어놓는 기술을 쓴다. 월급날을 기다렸다가 기어코 3을 받아낸다. 원시인이 토끼 두 마리를 잡았는데 세 마리를 달라고 하면? 못 준다. 다른 부족의 토끼를 훔쳐서라도 가져오라고 하면? 없으면 만들어 오라고. 수의 개념은 확장된다. 자연수에서 정수로.
“내게 1만 프랑의 빚이 있는데 여기에 5백 프랑의 빚을 곱하면 어떻게 5백만 프랑의 큰 자산이 된다는 말인가?” 스탕달의 말이다. 스탕달은 천재다. 그런데 왜 이렇게 띨빵하지? 만약 스탕달이 21세기에 태어났다면? 구조론이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은 스탕달과 같다. 21세기에 태어난 스탕달은 절대 안하는 말이다. 왜? 지금은 수학이 권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화성에 사람을 보낸다는 시대에 감히 수학 앞에서 개길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옛날에는 그렇지가 않았다.
수학? 그거 장사치들이나 쓰는 잔기술이 아닌가? 양반들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지금 구조론이 권위가 없기 때문에 삐딱하게 보는 것이다. 이들은 흥분하지 않는다. 흥분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
문화유산 답사기의 유홍준 눈에는 많은 것이 보인다. 흥분해야 보인다. 일반인은 부석사 무량수전을 열번 봐도 할 이야기가 없다. 그냥 절간이잖아. 어쩌라고? 흥분하는 사람이 볼 것을 본다. 유홍준이라면 무량수전 배흘림기둥 하나만 가지고도 하루종일 떠들어댄다.
허수를 둘러싼 논쟁도 그렇다. 허수는 존재하지 않는 수다. 수가 아니다. 그러나 수의 의미를 확장하면 어떨까? 음수는 당장 셈할 수 없지만 셈을 치른다는 말의 의미를 확장하면 된다. 셈을 치른다는 것은 빚을 갚는다는 거다. 연말에 추수해서 셈하면 되잖아. 당장 못해도 때가 되면 한다. 말이 안되는 것도 의미를 확장하면 말이 된다.
어린이는 잘 받아들인다. 어린이는 쉽게 흥분하기 때문이다. 눈빛이 초롱초롱하다. 형이 하는 것은 꼭 따라하려고 한다. 어린이가 옹알이를 할 때는 잠시도 쉬지 않는다. 아기가 말을 배우며 옹알이에 들이는 흥분의 10퍼센트만 쏟아부어도 영어 정도는 금방 배운다. 옹알이 하는 아기는 극도로 흥분해 있다. 영어 배우는 중학생은 건성으로 한다. 흥분해 있지 않다.
스탕달이 음수를 부정한 것은 어른이 되어서 뒤늦게 배웠기 때문이다. 인생은 현찰박치기로 배웠는데 월급날 받아가는 얍삽한 수를 쓰다니 피곤해졌어. 당장 갚을 수 없는 빚은 원래 탕감해주는거 아냐? 그걸 장부에 적어놨다가 월급날 받아가는 새끼는 더러운 유태인이 틀림없어. 분노다.
이런 식이라면 구조론을 이해할 수 없다. 언젠가 구조론이 권위를 가지게 된다면 초등학생도 쉽게 이해한다. 흥분하면 된다. 에디슨은 삐딱한 꼬마였다. 1+1은 2도 되지만 1도 된다고 우겼다. 심지어 교실에 엄마를 데리고와서 강변했다. 엄마는 당연히 자식 편이다. 1+1은 1이 아니라니 이런 학교라면 자퇴한다. 어른들을 만만하게 보고 개겨볼 생각이 있었던 거다. 될성부른 나무였다.
내가 여덟살 때 구조론의 단서를 발견한 것은 그런 삐딱한 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시절 시골 농부들은 가난했다. 엄마가 짚신 신고 다니는 것을 본 기억이 남아 있다. 거지같은 마을에 가난뱅이들이 사는 꼬락서니를 보면 건방이 들 수 있다. 인간이 뭐 별거냐?
보통은 주눅이 들어 얌전해진다. 개겨볼 생각을 못한다. 쉽게 길들여지는 개가 된다. 인류가 다 틀렸고 내가 옳다는 증거를 잡으려고 노력했다. 10여가지 단서를 찾았는데 혹시 까먹을까봐 외우고 다녔다. 음수 개념은 16세기에 정립되었다. 논쟁은 계속되었다.
허수 개념은 아직도 논쟁 중이다. 인간은 이다지도 멍청한 존재다. 요즘 까진 초딩들은 유치원에서 이미 음수를 배울텐데. 유치원생도 이해하는 것을 천재 스탕달은 왜 이해를 못했을까? 수학=장사치=유태인=고리대금업자=나를 괴롭히는 것들. 이런 편견이다.
수는 방향이 있다. 음수는 방향전환이다. 1만프랑의 빚을 500번 탕감받으면 500만 프랑의 빚이 탕감된다. 이는 500만 프랑을 횡재한 것과 같다. 이게 이해가 안 된다고? 어린이도 3초 안에 이해하겠구만. 근데 실제로는 많은 지식인들이 낚여서 파닥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