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는 오늘도 마카롱 스튜디오에서 대표한테 된통 깨지고 소품챙겨 터벅터벅 집 가는 길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
초록 불이 켜지고 바쁘게 갈 길을 향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저-어기 검은색 긴 코트를 입은 남자가 손 떼 많이 묻은 검은 수첩 떨구며 은하를 지나친다.
이미 소품들로 짐이 한 가득인 은하는 겨우 그거 하나를 그냥 지나치지를 못해서 수첩 주워들고 지갑 주인을 찾아 쫓아간다.
‘..걸음 되게 빠르네-…’
너무 빨리 사라진 남자를 결국엔 놓친 은하는 검은 수첩 하나를 집까지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대충 화장대에 던져놓은 저 수첩이 계속 눈에 아른거린다
‘아- 저거 내가 보면 안 될 것 같은데-… 아니야 아니야…’ 하다가
결국엔
‘그래. 안에 연락처라도 확인해야 돌려줄 수 있는거니까.. 훔쳐보는거 아니고 어쩔 수 없는 거야 이거는’ 중얼거리며 수첩을 연다.
손때가 많이 묻은 수첩에는
'앞머리꼬불, 초록색가디건, 연청바지'
붓 같은 도구를 쓴 듯 두꺼운 글자 딱 이 3개만 적혀있다.
‘가죽이 헐도록 들고 다니면서 이거 3개밖에 안 적었어?’ 하며 못 지나치고 주워 온 그때가 허무해지는 은하다.
생각보다도 별거 없는 수첩을 덮어버리고 옷이나 갈아입자 일어서는데 문득 보이는 전신거울에 오늘따라 앞머리가 유독 꼬불하고 초록색가디건에 연청바지 입고있는 자기모습이 보여 피식 웃는다.
‘나 보고 적어놓은 것도 아니고..뭐야-..’
우연..우연이겠지 싶어서 그저 쉬이 넘겨버리는 수밖에. 갈아입던 옷을 마저 갈아입고 오늘은 그냥 좀 특이한 일이 있었다며 잠에 든다.
이상하리만치 평화롭고…따스하고...지각한 삘이 찌르르 오고 괜스레 눈뜨기 싫어져 밍기적거리다가 겨우 눈을 떴는데 자취방 주인 아줌마가 20년 전 유행하는 디자인으로 골라 붙인 미감 따윈 저승길 간 촌스런 빨간색 꽃 벽지가 없다.
..없..다?!
얼레벌떡 일어나서 보는데 난생처음보는 방이다.
처음 보는 것도 처음 보는 건데..
벽지는 한지에, 방문은 창호지에, 이불은 이게 또 뭐고 상황 파악 안되는 와중에
정면 쪽에 놓인 반신 거울에는 옥색 저고리에 하얀색에 가까운 하늘색..치마.....
한복을 입고 있는 은하 본인이 보인다.
지금 이 공간에서 알고 있는 거라곤 자기 얼굴밖에 없는 이 상황이 여전히 어지럽다.
이게 대체 뭔 꿈이야... 하는 본인을 두고 저 문밖에서 우당탕탕 소리라 들린다.
>>은하 아가씨!!<<
지금 꿈에서 내가 아가씨구나..하다가도 유달리 오늘따라 이 꿈이 안 깰까 무서워지기도 한다.
-
‘은하 아가씨!! 아직도 늦잠을 주무시고 계시면 어떡해요!!’
자기를 흔들어 깨우는 여자에 진짜 은하 몸도 흔들리고 소리도 꽤 생생하게 들린다.
‘꿈이 뭐 이렇게 진짜같냐..’
‘아가씨-! 꿈은 무슨 꿈입니까~~ 혹 오늘 혼인하러 집 떠나가는 날이라 꿈같다고 하시는 것이어요?’
‘아~ 제가 오늘 꿈에서는 결혼을 해요?’
‘결..혼..이요? 결혼은 모르겠고 혼인을 하시죠?’
‘결혼이 혼인인데’
‘아가씨~ 결혼이고 혼인이고 우선 일어나세요! 한 시가 모자랍니다’
자기를 일으켜 세우고 집행하듯 끌고 가 도착한 곳은 목욕탕이다.
큰 나무 욕조에 김이 폴폴 나는 물이 가득 차 있고 그러고 보니 이곳은 좀 추운 것 같다.
‘아가씨 벗으셔요!’
‘예?!’
‘벗으셔야 제가 몸을 씻겨드리죠..!’
꿈인데 꼭 목욕까지 해야하나..싶은 은하는 이미 자기 저고리를 풀어버리는 참을성 없는 여자 때문에 ’그래..꿈인데 뭐…’ 하며 뜨신 물에 몸을 담근다.
‘근데 제가 오늘 혼..인을 해요?’
아무래도 결혼이라는 단어를 두고 혼인이라는 말이 입에 잘 붙지 않는 것 같다.
‘아가씨! 무슨 말씀이세요-…닷새 전까지만 하더라도 혼인하기 싫다고 울고불고 난리셨으면서요’
‘오…꿈이 꽤..구체적이네요..’
‘아잇 참 아가씨 아까부터 자꾸 꿈 타령을 하시네’
여전히 그러면서도 내 몸에 뜨신 물을 모아 붓는 이 소녀는 되게 앳되어 보인다.
‘당신은 그럼 몇 살이에요?’
‘제가 7살 때 아가씨가 10살이셨고..지금 아가씨가 24살이니까.. 21살이네요?’
현실에서는 29살이었던 은하 5살 젊어져서 이 꿈..꽤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아가씨 근데 언제까지 존댓말 하시게요? 마님 앞에서도 그러시면 저 혼나요!’
‘그럼 반말..할까?’
‘원래도 반말하셨잖아요~’
목욕이 다 끝나가는지 큰 천으로 은하 몸을 닦아내는 소녀다.
‘아가씨~ 이제 준비는 다 마쳤으니 마차가 준비되는 대로 모실게요. 방에서 조금만 기다리셔요!’
다시 돌아온 방 안은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다.
‘이런 꿈도 꾸는구나..’ 싶은 은하는 방 안을 둘러보다가 자기가 처음 일어난 그 자리로 가본다.
‘어?!’
머리맡에 횡단보도에서 주웠던 검은 수첩이 있다. 근데 어딘가 모르게 새삥이다.
‘이렇게 새거가 아니었는데?! 이거 왜 여기 있지!?’
꿈에 사물도 따라오나? 근데 나랑 상관없는 사물도 내 꿈에 따라오나?
별생각이 다 드는 은하는 주웠던 그 때처럼 수첩을 다시 열어본다.
아직 수첩에는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다.
‘아까 뭐 적혀있었던 것 같은데.. 뭐였지..?’
애써 생각해 보려던 은하를 밖에서 부른다.
‘아가씨! 마차 왔습니다! 나오셔요!’
자기를 부르는 아까 그 소녀의 부름에 급하게 수첩만 치마폭에 감춰 나가는 은하다.
마차를 타면서 꿈에서 깨면 헤어질 그 소녀에게 은하는 처음이자 마지막 인사를 건넨다.
‘아까 목욕 고마웠어’
‘…’
마지막 내 용모를 단정시켜 주던 그 소녀는 내 인사에 한참을 고민하다가 마차의 문이 닫히기 전에 대답해 온다.
‘아가씨 꿈이 깨기를 기다리지 마세요. 어쩌면 그 꿈이 꽤 길지도 모릅니다’
‘…너?!’
‘그리고 꿈에서 만든 인연들에 미련을 가지지 마세요. 정도 주지 마세요. 꿈에서 깨면 끝일 테니까요’
‘…’
‘아가씨 말대로 꿈이니까요’
이 소녀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어떤 인연에 미련을 가지지 말라는 건지 또 이 꿈이 언제 깬다는 건지
‘아가씨 부디..좋은 꿈을 꾸세요. 아가씨를 만나서 저는 행복했어요’
그 말을 끝으로 마차의 문은 닫히고 출발했다.
그 소녀는 마지막까지 치마폭에서 새어 나온 검은 수첩을 감춰 추듯 내 치마를 한 번 더 정돈하여 수첩을 가려줬던 것 같다.
수첩을 잃어버린 남자 , 현대로 타임슬립한 국왕 서지환과
수첩을 주운 여자 , 과거로 타입슬립한 키즈크리에이터 고은하의 엇갈린 타입슬립문
엇갈린 시공간에 떨어져 서로를 찾는 그 날